온라인 연재

9회

일년 동안 그는 지방근무를 자청해 단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도시로 내려갔다. 혼자 살게 된 그는 된장찌개를 끓여 이틀을 먹고, 김치찌개를 끓여 이틀을 먹었다. 그리고 일년 후,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딸과 아내를 다시 만났다. 그날 그는 아내와 낮술을 마셨다. 낮술을 마시며 아내는 말했다. 왜 쌍화탕에 마음에 끌렸는지 알아? 그의 아내는 약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외삼촌이 약사였는데, 방학이면 조카들에게 아르바이트를 시키고 대학 학비를 내주었다. 그가 사온 쌍화탕은 약국에서 공짜로 주는 그런 싸구려 쌍화탕이 아니었다. 약국에서 파는 쌍화탕 중에서 가장 비싼 쌍화탕이었다. 그게 좋았어. 제일 비싼 쌍화탕을 사 와서. 거기에 내가 속은 거지. 그렇게 말하고 아내는 웃었다. 그날 그는 가게에서 가장 비싼 안주를 시켰다. 낭비하는 걸 싫어하는 아내였지만 그날 아내는 안주 가격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딸의 졸업식 날 낮술을 하게 된 걸 계기로 그는 아내와 두달에 한번씩 만나 낮술을 마셨다.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아내가 먼저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요즘 주꾸미 철이래. 차돌박이가 생각나네. 도다리 쑥국이라고 먹어봤어? 아내의 메시지를 받으면, 그는 식당을 검색해서 아내에게 답을 보냈다. 주꾸미볶음 삼인분에 소주 두병. 둘은 만나면 꼭 삼인분을 주문했다. 그가 한병을 마시고 아내가 한병을 마셨다. 서로 따라주지도 않았고 건배도 하지 않았다. “남들이 보면 좀 웃기다 하겠죠. 건배를 하지 않는 건…… 아내 말에 의하면 같이 밥도 먹어주고 술도 마셔주지만 완전히 용서하고 싶지 않아서래요.” 그렇게 몇년이 지나고 나니, 그는 아내가 건배를 권하는 때가 오는 게 두렵게 느껴졌다. 각자 소주를 한병씩 마시고 난 다음에도 안주가 남아 있으면, 한병을 더 시켜 반반 나눠 마셨다. 2차는 가지 않았다. 계산은 늘 그가 했다. “전에는 당신 돈이 내 돈이니까 아까웠지만 이제는 당신 돈이니까 아깝지 않아.” 계산을 하고 나면 아내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아내가 일부러 얄밉게 말한다는 것을 알았다.

“원해서 헤어져주었는데, 왜 여자들은 용서를 해주지 않는 걸까요?” 사회자가 그에게 물었다. 그는 그 말에 답하고 싶지 않았다. 사회자가 자기 아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나운서 시험을 어떻게 통과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갑자기 그는 자신이 출연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낯선 방청객들에게 이혼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자신도 시시하게 느껴졌다. 그는 아내가 앞으로도 계속 건배를 해주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것은 그가 아내에게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겨서도 아니고, 아내가 그를 용서하지 않는 것이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은 구체적인 사건 없이, 해명할 오해조차 없이, 서서히 관계가 어긋난 사람들이라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타인을 용서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상대방을 용서하고 나면 더 큰 것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걸 피하기 위해 아내와 그저 낮술이나 마시고 잘가라는 인사도 없이 헤어지는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는 아내가 건배를 하자고 할까봐, 그런 날이 올까봐, 두려웠다.

아내와 헤어지고 나면 그는 한시간 정도를 걸었다. 그러다 야외 파라솔이 있는 편의점이 보이면 캔맥주를 마셨다. 안주는 늘 꾸이맨이라는 튀김쥐포를 골랐다. 맥주를 마시면서 그는 아내가 집에 도착해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 한모금 마시는 장면을 상상해보곤 했다. 술이 적당히 깨려는 순간, 아내의 말에 의하면 한시간이나 한시간 반 정도 지난 다음, 차가운 맥주 한 모금을 마시는 걸 좋아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냉장고 오른쪽 문이 왼쪽 문보다 약간 아래로 처져 있었다는 게 생각났고, 싱크대 중 열고 닫을 때마다 삐걱거리던 문짝이 있었다는 것도 생각났다. 편의점 파라솔에 앉아 맥주를 마시면서 그는 아내와 만났을 때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허공에 대고 말했다. 마치 맞은편에 아내가 앉아 있는 것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기도 했다. 혼잣말을 하다보면 아내에게 섭섭했던 속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아내의 좋은 점보다 흉을 더 많이 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아내의 흉을 볼수록 아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이었는지, 그 사실만 선명해졌다. 그는 사회자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사회자가 아내를 오해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일단 입을 열었으나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내는 좋은 사람이에요.” 그는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는 사회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마의 주름이 깊어진 것처럼 보였다. 한순간 늙어보였다. 그는 방청객들을 보았다. 방청객 아르바이트가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그는 방청객의 일당이 얼마인지 궁금했다. 그는 오른손을 들었다. PD가 무슨 일이세요, 하고 물었다. “잠깐 쉬었다 하면 안 될까요? 화장실 좀.” 그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