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16회

다음 날 출근하는데 민규가 말없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약국의 종이봉지였다. 지연이 뭐냐고 묻자 그는 말했다.

“놀란 데 좋다고 해서.”

누가 놀랐다는 것인가. 지연은 무슨 영문인지 헤아려보았다. 아마도 전날의 일을 두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것이 놀랐다고 표현할 일인가. 더 어울리는 다른 형용사가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지연은 봉투를 받아들면서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머뭇거리거나 쑥스러워하는 대신 민규의 태도가 더없이 진지했기 때문이다. 종이봉투 안에는 금박지로 개별 포장된 동그란 환약이 들어 있었다. 민규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지연은 그 앞에서 하나를 뜯었다. 입 안에 넣고 살며시 굴려보았다. 지독하게 쓴맛이 났다. 민규가 빙긋이 미소 지었다. 그의 눈동자에 어떤 수줍음, 혹은 두려움의 기미가 지나갔다. 지연은 비로소 안심했다.

그후로 민규는 날마다 지연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민규의 저녁 아르바이트는 여덟시에 시작되었으므로 그들에게 주어진 건 세시간여뿐이었다. 그들은 일터 근처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저녁메뉴를 정할 때면 민규는 항상 지연에게 선택을 맡겼다. 뭘 먹겠느냐고 묻는 건 지연의 역할이었고 ‘네가 오늘 먹고 싶은 거’라고 답하는 건 민규의 몫이었다. 지연의 선택에 따라 어떤 날엔 돈가스를 먹었고 어떤 날엔 국숫집에 갔고 어떤 날엔 가정식 백반을 먹었다. 그들의 직장 근처에는, 값이 싸면서 양도 푸짐하고 맛도 좋은 식당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골목 안쪽에 자리한, 값이 싸고 양이 많은 식당의 음식에서는 인공조미료 외의 감칠맛은 기대할 수 없었다. 맛이 있고 인테리어, 분위기가 근사한 식당의 음식 값은 비쌌다. 그것은 얄미울 정도로 오차 없는 법칙이었다. 까페에서 한 블록 떨어진 분식체인점이 가장 자주 가는 곳으로 굳어졌다. 수많은 김밥들과 면 요리들, 볶음밥과 오므라이스와 카레라이스, 게다가 찌개 종류까지 그곳에서 팔지 않는 음식은 없었다. 가격도 쌌고 무엇보다 음식이 빨리 나왔다.

그곳에서 민규는 예외없이 제육덮밥을 시켰다. 돼지고기와 양파를 맵고 단 양념에 볶아 밥 위에 붓고서 김가루를 뿌려낸 것이었다.

“돼지고기를 진짜 좋아하나봐.”

어느 날 지연이 중얼거리자 민규가 밥을 비비려다 멈추었다.

“아 그런 건 아닌데, 든든해서.”

그러곤 조그맣게 덧붙였다.

“든든하게 먹어놓는 게 버릇이 되어서.”

그것은 지연이 모를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쩌면 정확한 느낌을 알지는 못하는 말이었다. 지연은 자라는 동안 절대적인 허기를 경험한 적은 없었다. 집에 반찬이나 반찬을 만들 식재료가 없었던 적은 있어도 쌀이 떨어진 적은 없었다는 뜻이다. 어머니는 당신이 나가 있는 동안 아이들이 비상금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원짜리 한장쯤은 늘 찬장 안에 넣어두었다. 밥이 먹기 싫은 날엔 떡볶이를 사다 먹기도 했고 자장면을 시켜 먹기도 했다. 그마저 귀찮은 날엔 먹지 않았다.

내가 언제 너희들 밥 한번 굶긴 적이 있었느냐고, 지연의 어머니는 자주 큰소리쳤다. 특히 세 아이들 중 누군가가, 가능한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것을 요구하는 순간에 그녀의 언성이 더 높아졌다. 이를테면 지연이 언니가 다니는 특성화고등학교 대신 일반고등학교에 가겠다고 주장했던 순간에.

“남들처럼 밥 먹이고, 옷 사 입히고, 학교 보내줬는데. 너도 이제 생각이라는 걸 해야지. 어떻게 남들 하는 거 다 똑같이 하겠다고 하니.”

첫 문장과 두번째 문장과 세번째 문장이 어떤 인과관계로 연결되는지 지연은 기어코 모르는 척하고 싶었다.

지연은 제 앞의 쇠고기김밥을 한알, 또 한알 집어 민규의 그릇에 놓아주었다. 민규가 김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사실 여기서 다른 건 안 시켜봤어.”

지연과 민규는 함께 웃었고 함께 밥을 먹었다. 민규가 하는 저녁 일은 청담동 이자까야의 발레파킹이었다.

“운전을 진짜 좋아하나봐.”

“응.”

돼지고기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와는 달리 민규는 곧바로 긍정했다.

“그런데 더 좋아하는 건.”

그가 말을 멈추었다. 지연은 이 사람이 ‘너’라고 말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고 그래서 귀가 빨개졌다.

“차야. 자동차.”

그녀의 직감은 빗나갔다.

“그래서 일하는 거야. 여기서 일하면 온갖 차를 다 볼 수 있으니까.”

민규가 말한 ‘여기’가 그들이 일하는 그 동네를 뜻한다는 걸 지연도 알았다.

“그런 차들 다 몰아볼 수도 있잖아.”

지연이 거들었다. 민규가 정색을 했다.

“그건 아니지. 진짜 마음껏 달려보는 건 아니니까. 여기선 그냥 보는 거야, 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