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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21세기 한반도와 새로운 공동체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를 넘어서
박영도 朴榮道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초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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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여년 동안 세계사적 사건이 집중하여 발생했다. 냉전의 종식을 필두로, 아시아 금융위기, 코소보전쟁 등은 기존 질서의 붕괴와 함께 새로운 질서의 구도를 예고한다. 이러한 세계사적 변동은 당연히 민주적 정치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논의를 촉발하고 심화시킨다. 공동체의 규범적·정치적 의미를 둘러싸고 진행된 자유주의/공동체주의의 논쟁도 그 대표적 사례 중 하나이다. 이 글에서는 이 논쟁에 개입하는 형태로, 오늘의 상황에서 민주적 정치공동체의 향방과 관련된 규범적 문제를 검토하고자 한다.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공동체가 중요한 규범적·정치적 관심사로 부각된 상이한 맥락을 논쟁의 다양한 이론적 차원과 연결하여 간단히 개괄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첫째, 공동체 문제에 대한 새로운 성찰 뒤에는 현대성의 실천적·규범적 자기이해에 대한 비판이라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개인화와 사회문화적 다원화의 경험적 결과에서 출발하는 이 문제의식은 먼저 탈현대논쟁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바 있다. 탈현대주의는 그 경향을 근대 계몽주의의 허구적 보편주의를 극복하는 발달경향을 보여주는 사회적 기호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똑같이 현대성의 프로젝트를 비판하면서도 공동체주의자들은 개인화·다원화를 공동체적 연대성의 해체와 여기서 비롯되는 정체성의 위협 내지 존재론적 안정성의 위협이라는 결과와 관련해 부정적으로 파악한다. 이들은 탈현대주의보다 명시적이고 직접적으로 현대의 규범적·정치적 자기이해를 공격하면서, 원자적으로 고립된 추상적 개인에 대항하여 구성적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추상적 개인에 기초한 정의(正義)의 윤리에 반대하여 공동체 속에서 형성되는 ‘좋음’(the good)의 윤리를 옹호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논쟁 뒤에는 좀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맥락이 있는데, 종래 사회정치적인 갈등에 대한 메타 해석틀을 제공했던 냉전구도가 무너지면서 다양한 유형으로 분출되는 ‘인정(recognition)의 정치’가 그것이다. 이민의 증대로 늘어나는 다문화사회의 소수민족 문제, 다양한 삶의 양식의 공적 인정 문제, 페미니즘, 그리고 민족주의 문제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인정의 정치는 개인주의적 어법을 지닌 근대법의 구조가 집합적 권리에 대한 인정의 요구를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이와 함께 로크(J. Locke)와 루쏘(J.J. Rousseau) 이래 계속된 인권과 주권, 입헌주의 원리와 민주주의 원리, 사적 자율성과 공적 자율성의 전통적 긴장이 더 첨예해지면서 동시에 두 원리의 매개라는 이론적 과제를 제기한다.
마지막으로 세계화 과정도 공동체 문제를 부각시킨 중요한 요인이다. 이 과정에서 인정투쟁도 ‘아시아적 가치 논쟁’이나 ‘문명충돌론’이 보여주듯이 국민국가 맥락을 넘어 세계적 맥락으로 확대되고 있다. 특히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국민국가적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아넣으면서 인권과 주권의 대립을 첨예화하고 있다. 이 대립은 단순히 학술적 쟁점이 아니라, 코소보전쟁의 딜레머가 보여주듯이, 당면한 정치적 쟁점으로 대두하였다. 이 상황은 세계적 내전의 시대를 넘어 세계적 규모의 내치(內治)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즉 개인, 국민국가, 초국가적 정치공간이라는 세 가지 맥락에서 개인과 공동체, 사적 자율성과 공적 자율성, 보편적 인권과 국가주권의 관계라는 세 가지 이론적 차원과 관련해 공동체 문제가 중요한 쟁점으로 제기되는 것이다. 이를 둘러싸고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가 대립하는데, 이 글에서는 두 견해 모두와 일정한 거리를 두는 성찰적 현대성의 관점에서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사회정치적 맥락에서 제기되는 규범적 문제를 검토하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는 성찰적 현대성의 관점은, 하버마스(J. Habermas)가 제시했듯이, 독백구조에서 상호주관적 구조로의 선회를 통하여 현대의 규범적·정치적 자기이해를 달라진 조건 속에서 비판적으로 계승한다는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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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지배적인 규범적 자기이해는 추상적 개인에서 출발했다. 이 출발점은 한편으로는 개인화의 경향을 반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문화적 다원화 때문에 실체적 ‘좋음’의 관점을 추상하는 형식적 정의의 윤리가 요구되는 상황을 반영한다. 쌘델이 롤즈(J. Rawls)의 정의이론에 함축된 추상적 자아 개념을 비판하면서 자유주의를 향한 공동체주의의 포문을 연 것이나, 테일러가 ‘자아의 원천’을 추적하면서 자유주의를 비판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1 특히 쌘델의 롤즈 비판은 자유주의의 문제점과 동시에 공동체주의의 문제점까지 잘 보여주는데, 그 기본논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정의이론에 전제된 인간은 맥락(context) 없는 자아이다. 둘째, 이 추상적 자아 개념 때문에 자유주의는 개인 혹은 집합체가 갖는 좋음의 관점을 제거하는 추상적 도덕의 관점을 우선시한다. 셋째, 그러나 주체는 구체적 공동체 속에서 형성되는 삶의 목표나 가치정향과 무관하게 기술될 수 없고, 개인적 정체성은 집합적 정체성과 분리될 수 없다. 넷째, 따라서 모든 의무론적 도덕이론은 파산한다. 요컨대 맥락 없는 주체는 없으며, 맥락 없는 도덕도 없다는 것이다.
이 비판은 자유주의의 윤리적 기초를 정면으로 겨냥하지만, 부분적으로만 타당한 듯하다. 즉, 자아의 정체성 형성에서 공동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명제 자체는 자유주의의 몰사회적 관점을 정당하게 지적한 것이지만, 공동체주의자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강조하는 ‘구성적 공동체’ 개념은 너무 짙은 실체적 동질성을 상정함으로써, 내적·외적 다원성 때문에 제기되는 당연한 질문에 적절하게 대답하지 못한다. 먼저, 구성적 공동체에 대한 개인의 비판적 거리두기가 어떻게 가능한가? 공동체주의는 이 비판적 반성의 가능성과 기준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며, 그런한 ‘구성적’ 공동체 안에서의 개인의 자유와 차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다. 둘째, 문화적 다원주의라는 현실 속에서는 서로 상이한 공동선을 추구하는 다수의 공동체들이 존재함에 따라 이들의 갈등을 공정하고 평화롭게 규제하는 문제가 제기되는데, 공동체주의자들은 이에 대해서도 적절한 대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문제는 바로 자유주의가 촛점을 맞춘 정의의 문제였다.
여기서 우리는 공동체주의의 오류추리를 확인할 수 있는데, 호넷이 이를 잘 지적하고 있다. “맥락 없는 원자론적 주체 개념과 자유주의의 평등한 권리의 이념 사이에 논리적 필연관계는 없다. (…) 인간적 삶의 맥락에서 좋음의 윤리가 ‘존재론적으로’ 우선한다고 해서, 권리에 비해 좋음이 규범적으로 우선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는 없다. 반대로 권리가 규범적 선차성을 갖는 이유는, 개개인의 자율성이 존중될 때 비로소 사람들이 ‘존재론적으로’ 추구하는 좋은 삶의 모색이 강제 없이 가능하기 때문이다.”2 물론 그렇다고 해서 추상적 자아에서 출발하는 자유주의적 정의의 윤리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확실히 그것은 사적 자율성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문화적 조건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다. 그러나 공동체 없는 자유가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그것에 못지않게 자유 없는 공동체도 고통스러운 것이다. 이런 상호보충적 결함은, 공동체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의 여지를 풍부하게 한다는 킴리카의 논지에 따라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를 결합한다고 해서 해결되진 않는다.3 그렇다고 우리가 불만족스러운 두 입장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불행한 운명이라는 것도 올바른 설명은 아니며, 오히려 그같은 운명은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가 ‘사회화를 통한 개인화의 통찰’이란 문제를 깊이 사고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추상적 자아의 보편성이나 구성적 공동체에 대한 강조는 모두 사회화와 개인화의 생산적 긴장관계가 무너질 때 발생하는 불만족스러운 두 양상인 것이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하버마스의 담론윤리이다. 하버마스는 공동체주의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정체성이 상호주관적 인정의 관계에서 형성된다는 관점에서 출발하지만,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좋음에 대한 정의의 우선성을 고수한다. 정의의 개념 자체를 상호주관적 맥락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여기서 담론윤리의 복잡한 논증을 다룰 수는 없다. 다만 담론윤리의 바탕에 있는 사회화를 통한 개인화라는 통찰이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보충적 결함을 설명하는 데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 통찰에서 출발한다면, 정의원리를 정당화하는 도덕적 담론을 시작할 때 개인이 자신을 텅 비울 필요가 없다. 이때 개인은 롤즈의 원초적 상황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개인의 정체성을 무시할 필요도, 개인에게 ‘무지의 베일’을 씌울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좋은 삶’에 대한 윤리적 견해를 도덕적 정당화의 담론에서 배제할 필요가 없음을 뜻한다. 오히려 좋음의 윤리적 견해는 정의의 도덕적 관점에 의해 변용되고 제한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사회화를 통한 개인화의 관점은 개인의 자유를 구성적 공동체 속에 매몰시키지도 않는다. 요컨대 상호주관적 정체성은 개인의 목소리를 빼앗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상호주관성은 단순히 저기 주어져 있는 공동성이 아니라 ‘예/아니오’라는 입장을 표명하는 자율성을 전제하는 대화를 거쳐 형성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공동의 신념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자유로운 토론 속에서 타당한 근거에 의거하여 인정될 때 비로소 ‘공동’의 신념이 되는 것이지, 토론 없는 일반성으로 부과되거나 실체적 동종성으로서 주어지지는 않는 것이다. 아마도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용어가 비판적 토론을 거친 공동성의 이미지를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 듯하다. 화해를 이루되 같지 않다 함은 동일성이 결코 차이를 배제하지 않음을 뜻한다. 토론을 거친 공동성 속에서 일자(一者)가 타자(他者)를, 동일성이 차이를 제국주의적으로 합병하지 않으면서 양자가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덧붙여 말한다면, 사회화를 통한 개인화의 통찰은, 똑같이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탈현대론자의 관점과 공동체주의의 대립적 관점을 보면 더 두드러진다. 탈현대주의의 미학화된 자유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사회적 관계는 자유의 장애물로 간주되고, 공동체주의의 공동선의 윤리의 관점에서는 개인화·다원화의 경향은 사회적 연대성과 통합의 해체로 간주되는데, 이러한 상반된 견해 역시 사회화를 통한 개인화의 생산적 긴장관계가 이론구조 안에서 무너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대화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사회화를 통한 개인화라는 관점에서 출발할 때, 우리는 규범적인 맥락에서 자유주의적 현대성에 고착될 필요도 없고, 탈현대의 미학적 세계로 도약할 필요도 없으며, 공동체주의처럼 전통으로 퇴행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성찰적 현대성의 규범적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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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정치 영역에서 ‘공동체’ 문제의 쟁점은 공동체주의자들이 던지는 다음 질문 속에 요약되어 있다. 구조적으로 불이익을 당하는 집단의 권리가 자유주의적 법의 개인주의적 어법 속에서 어떻게 적절하게 고려될 수 있는가? 법적 인격체로만 구성된 정치공동체가 어떻게 가능한가? 이 질문 뒤에는 민주적 정치공동체를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가 있다. 공동체주의는 그것을 정치 이전에 문화적으로 통합된 윤리적 공동체로 이해하고, 자유주의는 자유롭고 평등한 인격체들로 구성된 법적 공동체로 이해한다. 이러한 상이한 견해 뒤에는 역사적·이론적 이유가 있다.
근대 국민국가는 시장의 세계성과 민족적 특수성 사이의 불안한 타협이었다. 국민 개념이 포함하는 데모스(demos)와 에스노스(ethnos)의 긴장이나, 자유주의적 법공동체의 보편주의와 역사적 운명공동체의 특수주의 간의 긴장은 이 불안한 타협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 역사적 긴장은 민주주의 이론사에도 반영되었다. 민주주의는 법의 적용을 받는 사람(수신자)이 동시에 법을 만드는 사람(저자)이어야 한다는 원리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시민의 사적 자율성과 공적 자율성이 내적 연관을 가져야 함을 뜻하지만, 민주주의 이론사는 사적 자율성과 공적 자율성의 경쟁으로 점철되었다. 이 역사적·이론적 긴장이 냉전구도의 종식, 세계화 과정, 문화적 다원화에 따라 다양한 유형의 ‘인정의 정치’가 분출하는 상황에서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대립이라는 형태로 재연되는 것이다.
자유주의에 따르면, 인권은 국민주권의 집합적 의지가 개인적 자유의 영역을 침해하는 사태를 막아주는 보호장벽이다. 자유주의는 시민의 공적 자율성보다는 사적 자율성을, 국민주권 원리보다는 인권을, 민주주의 원리보다는 입헌주의 원리를, 법의 저자로서의 공적 시민보다는 법의 수신자로서의 사적 시민을 우선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적 편향은 공적 자율성뿐 아니라, 자유주의가 우선시하는 사적 자율성까지 위협할 수 있다. 사실 시민들이 공적 자율성을 발휘하지 못하면, 사적 자율성의 사용가치는 보장되기 어렵다. 오늘의 맥락에서 이 문제점은 소수민족과 소수문화의 권리 문제와 관련해 잘 드러난다. 만약 자아가 자율적으로 추구하려는 삶의 목표가 공동체와 무관하게 형성될 수 없다면, 사적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개인적 정체성이 형성되는 삶의 형식, 문화적 조건까지 함께 보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추상적 자아 개념에서 출발하는 자유주의의 법적 일반성 개념 속에는 이러한 문화적 차이에 대한 감수성은 사라지며, 소수집단의 구성원은 법적으로 보장된 사적 자율성을 실질적으로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제약받게 된다.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에 대한 공동체주의의 비판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법적 인격체로서의 시민 개념을 포기하고 인륜적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시민 개념을 택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인권보다는 국민주권, 사적 자율성보다는 공적 자율성을 우선시하는 공화주의 전통을 이어받아 공동의 정치적 실천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들은 정치적 공동성을 정치 이전의 문화적·인륜적 동질성으로 환원시키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에게 정치참여는 공동체 소속감의 표현이고, 또 정치는 공동체의 윤리적 자기이해, 즉 ‘우리에게 좋은 것’을 표현할 때 정당성을 갖는다. 민주적 정당성이 자유주의에서는 법의 추상적·의미론적 일반성으로 환원되는 데 반해, 공동체주의에서는 미리 주어져 있는 인륜적 공동성으로 환원되는 셈이다. 이 경우 법적 인격체로서의 시민의 사적 자율성이 침해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사적 자율성이 적절히 보장되지 않는 한, 시민의 공적 자율성도 자신을 적절하게 실현할 수 있는 매체를 상실한다. 요컨대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는 자아구성의 차원에서 ‘사회화를 통한 개인화의 통찰’을 양분화시켰듯이, 민주적 공동체의 이해에서도 사적 자율성과 공적 자율성 그리고 인권과 주권의 내적 연관을 양분화시키는 것이다.
이 양분화의 저변에는 시민의 공적 자율성 개념을 공적 의사소통과 분리해 이해한다는 공통점이 깔려 있다. 대화와 토론이 민주주의의 본령임을 누구나 인정하면서도 실제로 그것이 정치적 공간의 기본메커니즘으로 이론화되지 않은 근대 민주주의 이론사의 수수께끼를 여기서 재확인할 수 있다. 자유주의에서는 공적 공간을 시민들의 정치적 토론 없이 부과되는 의미론적 동일성의 공간으로 파악한다. 대화를 강조하는 경우에도 그 대화는 시민들의 정치적 토론과는 분리되었다. 반대로 공동체주의는 공적 공간에의 참여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 참여가 미리 주어진 문화적·실체적 공동성의 표현으로 간주되는 순간, 공적 토론의 정치적 의미는 사라진다. 물론 일반적으로 민주적 자기결정에는 공동선이 개입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 공동선의 공동성이 시민들의 공적 토론을 통해 매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동체주의 진영에서도 바버(B.R. Barber)처럼 정치적 토론을 중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이웃’간의 대화를 모델로 삼는다. 이 모델은 매킨타이어(A. MacIntyre)류의 ‘가족’ 모델에 비하면 훨씬 진전됐지만, 이 역시 다원화된 사회상황 속에서 ‘낯선 사람들’ 사이에 연대를 형성해야 하는 현대 정치공동체의 과제를 해결하기엔 소박하다.
사정이 이렇다면 공적 자율성을 상호주관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양분화 현상을 넘어서는 기획을 생각해볼 수 있다. 다양한 ‘담론민주주의 이론’이 이런 발상에서 출발하는데, 여기선 이 이론에서 사적 자율성과 공적 자율성의 내적 연관이 어떻게 설정될 수 있는지 그 기본구도만 살펴보겠다.4 근대법은 법으로 금지되지 않은 것은 허용된다는 원칙하에 사적 자율성을 보장하며, 사적 자율성은 집합적 의지에 의해 도구화될 수 없는 내재적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법은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없고, 공론장(public sphere)에서 행사되는 시민의 공적 자율성, 즉 의사소통적 자유를 통해 정당화된다. 그러나 법을 정당화하는 시민들의 공적 의사소통과 참여의 권리 자체도 법적으로 제도화되어야 한다. 공적 자율성의 실현을 공동체적 가치에 일임할 경우, 현대사회의 문화적 다원성과 기능적 복잡성을 적절히 고려할 수 없다. 이 점에서 현대사회에서 시민들이 공적 자율성을 실현할 매체를 임의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법을 정당화하는 시민의 공적 자율성이 사적 자율성을 보장하는 법이라는 매체를 통해 제도화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사적 자율성과 공적 자율성은 서로를 전제하고 가능하게 하는 내적 관계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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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스와 에스노스의 긴장은 국제적 맥락에서도 나타나며, 여기서도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관점이 경합을 벌인다. 국제적 맥락에서 주권은 민족의 집합적 자기주장과 자기실현으로 독해된다. 때문에 주권은 민주적 자결권이라기보다는 민족자결권으로 나타나고, 또한 민족자결권이 시민의 권리를 효과적으로 보장하는 조건으로 간주된다. 그 결과 민주적 정당성의 측면보다는 안정과 질서의 문제가 부각된다. 이와 함께 국제적 맥락에서 인권과 주권의 관계를 놓고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가 대립하게 된다. 국민주권에 대한 공동체주의적 해석은 외적 주권의 측면을 강조하고, 그 결과 국내정치의 민주적 정당성 문제가 뒤로 후퇴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에 비해 자유주의자들은 내적 주권의 측면을 안정과 질서의 효과적 유지로 환원하는 데 반대하고, 나아가 주권의 장벽을 넘어서까지 인권을 확대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자유주의적으로 독해된 인권이지만 말이다.
인권과 주권의 긴장은 세계화 과정이 본격화되고, 이와 함께 인권의 세계화 경향도 강화되면서 증폭되었다.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 논쟁에서도 그 긴장이 표현되지만, 그 긴장을 극적으로 드러낸 것은 역시 코소보전쟁이었다. 나아가 이 전쟁은 이 긴장 속에 어느 쪽도 선택하기 어려운 도덕적 딜레머가 담겨 있음을 보여주었다. 유고공습을 지지하는 보편적 인권론자들은 밀로셰비치(S. Milosevic)의 잔혹한 인종청소를 바라보고만 있다면 그것 자체가 범죄라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 유엔의 위임도 받지 않은 공습은 분명 현존 국제법의 위반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다름아니라 보편적 인권과 군사적 폭력의 결합을 일반적인 도덕적 직관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점이다. 나토 측은 그 공습이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도덕적 이유에서 나온 것이라고 정당화하지만, 이는 오히려 도덕과 폭력의 순수한 만남이 갖는 도착적 성격에 대한 의구심만 증폭시킨다. 보편적인 도덕적 명령을 구실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야말로 도착증의 전형적 구조가 아닌가? 정신분석의 용어를 원용하면, 코소보전쟁은 도착증과 편집증의 전쟁과도 같다. 하지만 보통사람들의 도덕감정은 도착증도 편집증도 원치 않는다. 어느 쪽도 선택하기 어려운 이 도덕적 딜레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딜레머는 세계적 규모의 내전이 종식된 이후 ‘세계적 규모의 민주주의’라는 프로젝트가 필요함을 말해주는 듯하다. 편집증적인 민족적 자기실현이 초래하는 야만에 대한 대응이 인권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도착성으로 나타나는 딜레머를 피하기 위해서는 세계적 맥락에서 법적 시민상태가 요구된다. 즉 국제법에서 세계시민법으로의 이행이 요구된다. 나토공습으로 국제법이 무너졌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인권의 세계화가 현행 국제법의 구도 안에서 진행되는 한 인권은 도덕적 명령이라는 위상만 가질 뿐이며, 때문에 도덕과 군사적 폭력의 도착적 만남은 언제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세계시민법의 형성은 아직은 요원하지만, 초헤게모니 국가가 도덕의 이름으로 자의적으로 군사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현상황의 위험을 고려한다면 규범적으로는 절실하게 요구되는 프로젝트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사적 자율성과 공적 자율성을 동시에 보장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세계시민법의 형성은 곧 그 저자로서의 세계시민이 공적 자율성을 행사하도록 하는 프로젝트, 즉 세계적 규모의 민주주의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의 필요성은 경제적 세계화의 정치적 결과를 고려할 때 더욱더 늘어난다. 현재 진행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세계자본, 경쟁적 국민국가, 민족주의의 삼각동맹 속에서 국민국가적 민주주의를 구조적 위기상태로 몰아넣고 있다.5 민주주의는 ‘합치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투입의 측면에서 합치조건은 집합적 결정에 영향받는 사람들과 그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의 범위가 합치해야 함을 뜻한다. 만약 우리가 집합적 결정에 영향받기만 하고 거기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그 결정은 구조적으로 타율적인 결정이며, 따라서 민주적 자기결정의 원리가 무너진다. 산출의 측면에서 합치조건은 집합적 결정의 효력범위와 이 결정에 영향받는 행동맥락이 합치해야 함을 말한다.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을 때에도 민주적 공동체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세계화 과정은 지금까지 국민국가의 틀 속에서 충족된 이 합치조건을 무너뜨렸다. 오늘날 세계화된 자본축적의 명령과 국민국가라는 정치적 컨테이너 사이에, 세계적 부르주아지와 영토에 묶인 시민 사이에 간극이 드러나고 있다. 우리가 IMF 사태에서 뼈저리게 체험했듯이, 이 간극 때문에 국민국가에서 민주적으로 정당화된 결정이 실현될 수 없고, 또 국민의 의사·의지와는 무관하게 내려진 결정이 그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양상이 우연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와 함께 국민국가적 민주주의는 구조적 위기에 직면한다.
이 구조적 위기는 민주주의 원리를 초국가적 공간으로 확장할 것을 요구한다. 지금까지 민주주의 발달사는 국민국가적 차원에서 자본주의적 조직원리와 민주적 조직원리의 대립사였다. 그러나 이제 그 대립지형에 세계적 맥락이 추가된 셈이다. 세계화된 자본의 질주와 ‘바닥을 향한 경쟁’을 제어하기 위해선 민주주의 조직원리의 세계화가 필요한 것이다. 사실상 이미 세계적 규모의 내치라는 발달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을 지금처럼 국제적 자연상태에서 초헤게모니 국가의 자의적 권력에 맡겨둘 것이 아니라, 세계적 시민상태의 성립을 통해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규범적으로 합당한 방향일 것이다.
이것은 근대초 국민국가적 민주주의를 통해 해결했던 과제가 더 큰 맥락에서 다시 제기됨을 뜻한다. 당시에도 새로운 사회적 통합과 정치적 정당화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민주주의는 이 두 과제를 해결하는 메커니즘이었다. 이제 초국가적 공간에서 유사한 과제가 제기되지만, 해결조건은 달라졌다. 근대초에 민주주의 원리로 두 과제를 해결했을 때는 민족의식이 중요한 촉매작용을 했지만, 시장의 보편성과 민족의 특수성의 국민국가적 타협이 무너진 오늘날엔 그렇지 못하다. 다문화주의적 상황에서 강한 민족의식은 국민국가 안에서는 소수민족의 억압적 동화나 심한 경우 인종청소라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리고 세계적 자본시장이 국가를 통제하고 국가가 시민사회에 대한 상대적 자율성을 강화하는 반민주적 권력순환에 대응하여, 자본주의적 조직원리를 민주주의적 조직원리로 규제하는 민주적 권력순환을 이루어야 하는 과제와 관련해서도,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역사적 동맹을 기억하는 것으로는 결코 행복한 결과를 기약할 수 없다.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자체가 시장의 세계화와 민족주의의 동맹에 기초한 경쟁국가의 논리를 전제하고 또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동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현재의 조건에선 문화적 동질성을 민주주의의 필수적 전제로 간주하기 어렵고, 오히려 보편적인 민주주의 정치문화와 다수집단의 동질적 문화 간의 동일시를 막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뜻한다. 이것은 결코 민족정체성의 부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민족정체성이 배타적 민족주의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민족정체성이 보편적인 민주적 의사·의지 형성이라는 필터를 거쳐야 하고, 민족의 상상적 정체성이 민주주의의 상징적 정체성을 통해 걸러져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민족의 집합적인 실존적 기층까지 담론과 토론구조 속에서 구성되고 구조화된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다문화적 개별사회나 세계사회 속에서 여러 민족집단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어떤 집단적 권리와 정체성이 인정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정치적 대답이 민족의 실존적 기층으로부터 직접 도출될 수는 없다.6 밀로셰비치의 편집증적 민족주의가 낳은 야만적 인종청소가 충분한 증거이다. 오히려 그 대답은 정치적 억압이 없는 상호인정의 구조에서 비로소 마련될 수 있다.
이 길은 자유주의의 위험도 막을 수 있다. 자유주의는 민주주의 논리가 시장의 소유적 개인주의 논리에 포섭되는 위험에 대해 눈감는다. 다시 말해 그것은 현재의 신자유주의 경제논리가 초래하는 민주주의의 딜레머를 무시하면서 그 논리를 규범적으로 추인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 나아가 인권의 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이미 지적한 도덕과 폭력의 도착적 만남을 가져올 위험이 있다. 필요한 것은 상호주관적으로 이해된 공적 자율성의 국내외적 확대, 즉 자율적 공론장 속에서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을 통해 합의를 형성해가는 민주적 정치문화의 국내외적 강화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시장의 추상적 개인과 자유주의적으로 이해된 민주주의의 위험한 동맹을 피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민주주의가 실체적 민족동질성으로 환원될 때 생기는 위험도 피할 수 있다. 그리고 공론장에서 관철되는 의사소통과 참여의 권리를 세계시민법으로 법제화할 때 코소보에서 드러난 도덕적 권리로서의 인권의 도착성을 막을 가능성도 열린다.
사실 이 프로젝트의 실현 조건은 대단히 취약하다. 이 프로젝트가 시장의 이익추구나 민족의식의 강한 추진력에 의존할 수 없고, 오히려 이들에 의해 침해될 수 있는 공론장의 민주적인 문화적 잠재력으로 이들을 제어하고 매개해야 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깨어지기 쉬운 그릇과 같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곳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고 많은 장애요소도 있지만, 그동안 공론장의 민주주의 문화는 현대의 독자적 전통으로까지 성장하였으며 또 앞으로도 성장할 여지가 있다. 국제 NGO(비정부기구)의 활발한 활동이나 이에 기초한 세계적 규모의 공론장의 태동은 이러한 방향을 보여준다. 이 기대가 아직은 약한 규범적 기대이지만, 민주주의는 항상 약한 규범적 기대에서 출발했으며 그것을 먹고 성장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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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J. Sandel, Liberalism and the Limits of Justice, Cambridge 1982; C. Taylor, Sources of the Self, Harvard University Press 1989.↩
- A. Honneth, The Fragmented World of the Social,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5, 236〜37면(강조는 저자).↩
- W. Kymlicka, Liberalism, Community and Culture, Oxford 1989.↩
- 상세한 논의로는 J. Habermas, Faktizität und Geltung, Suhrkamp 1992 참조.↩
- 상세한 논의로는 졸고 「세계화시대의 민주주의: 그 딜레마와 전망」(1999년 2차 비판사회학 대회 발표논문) 참조.↩
- S. Benhabib, “Democracy and Identity,” Philosophy and Social Criticism, Vol. 24, No. 2/3, 1998, 9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