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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통신 | 학부모는 말한다

 

차이를 인정하는 작은 걸음부터

 

신연숙 申蓮淑

한겨레신문 심의위원

 

 

“바꿔 바꿔 바꿔 모든 걸 다 바꿔.”

가수 이정현씨의 테크노음악 「바꿔」가 최근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새천년의 벽두에 이 노래는 마치 낡은 정치패러다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와 교육의 패러다임도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메씨지처럼 들린다. 한창 자라는 아이 둘을 둔 나는 이 노래가 대학입시와 성적 위주의 우리 교육을 바꾸고 공부에 지친 청소년들을 살려내는 촉매가 됐으면 하는 희망을 품어본다.

학교에 다니는 자녀가 있는 학부모들이 모이는 자리의 으뜸 화제는 역시 교육문제다. 지난 연말 대학동창 모임도 예외가 아니었다. 청소년기 자녀를 둔 탓인지 동창들은 우리나라 교육의 철학부재와 같은 거창한 주제에서부터 지난해 온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학교붕괴’, 수능성적순으로 대학에 들어가는 입시제도의 병폐, 공부에 흥미를 잃은 아이, 등교를 거부하는 아이, 학교와 가정 밖을 맴도는 아이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들을 끄집어올렸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나온 결론은 ‘우리 교육 이대로는 안된다. 확 바뀌어야 한다’였다.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라는 한 친구의 물음에 누군가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서울대가 죽어야 우리 교육과 아이들이 산다”고 답했다. 서울대 관계자나 재학생·졸업생들은 듣기 거북하겠지만, 이 대답은 곧 ‘서울대 지상주의’가 우리 교육과 아이들을 멍들게 하는 주요 병인임을 날카롭게 짚은 것이라는 데 참석자들은 동의했다.

사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가 초등학교에 들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12년 동안 한해 20조원에 이른다는 사교육비를 쏟아부으며 자녀 뒷바라지를 한다. 그 희생의 대가로 부모들은 비록 꿈에 머물지라도 자녀에게 ‘서울대 진학’을 은근히 바라고 혹은 종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서울대의 입학정원은 고작 4738명이다. 200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본 수험생 86만 8366명 중 183명 당 1명 꼴로 이 비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해마다 매스컴의 입시관련 보도는 서울대 중심이고, 학교와 (공부 잘하는 자녀를 둔) 학부모들은 서울대의 특차 및 정시 전형방식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 전형방식이 발표되면 전국의 고등학교가 학생들의 입시상담을 시작한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지만 대학 지원은 철저하게 수능성적순, 생활기록부 성적순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국내 1위 대학인지는 몰라도 세계에서는 100위 안에조차 들지 못하는 서울대는 중·고등학교 때 공부깨나 한다는 소리를 듣던 학생도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수능점수가 아무리 잘 나와도 내신이 받쳐주지 않으면 갈 수 없다. 무려 20개에 가까운 교과목 중에 한두 과목만 처져도 안된다.

서울대의 욕심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서울대는 학교장 추천으로 입학한 학생들이 전공에 대한 인식이 뚜렷하고 입학 뒤 성적도 좋다며 2001학년도에는 학교장 추천 입학비율을 현재보다 더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나는 이 발표를 접하고 우리 교육에 희망이 없는 게 아닌가 싶어 참담했다. 물론 지역에 따라, 학군에 따라 혜택을 보는 학생들도 있겠지만, 서울대의 발상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학생들 개개인이 지닌 잠재적 가능성보다는 고등학교 3년 동안 오로지 공부만 한, 그래서 전과목이 우수한 ‘수퍼 인간’만 뽑겠다는 발상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발표를 할 수 있는지 기가 막혔다.

차라리 공부밖에 잘 하는 게 없는 ‘융통성 없는 공부벌레’를 서울대에서 싹쓸이하면 오히려 21세기가 요구하는 창의적인 인재들이 각 대학에 고루 들어갈 수 있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다른 대학들이 모두 옳다는 것은 아니다. 각 대학교에서 내놓은 신입생 전형방식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성적순으로 학생을 뽑기는 마찬가지다. 서울대보다 조금씩 덜 오만할 뿐이다.

지난해 가을, 과학고에 다니던 한 학생이 물리 등 수리탐구 영역은 자신있지만 사회탐구 영역이 뒤져 자신의 성적으로는 서울대에 진학하기 어렵자 자퇴를 한 뒤 미국의 대학 진학에 필요한 SAT를 준비해 고득점을 올리고 물리 만점을 받아 하바드대학에 합격했다고 매스컴들이 보도했다. 이 뉴스를 접한 나는 우리 대학입시제도의 융통성 없음에 가슴이 아팠고, 공부 때문에 시들어가는 청소년들이 한없이 딱해 보였다.

물론 2002학년도부터는 학생 자신이 좋아하는 과목 하나만 잘해도 대학에 갈 수 있는 형태로 입시제도가 바뀐다고 한다. 그러나 고등학교 3년 생활기록부가 입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금보다 훨씬 더 높아지기 때문에 학생들은 또다시 전과목 내신관리를 해주는 학원에 다니랴, 자격증 따랴 바쁘다. 부모들은 사교육비 부담이 더 커졌다고 아우성이다.

 

물건을 싸들고 교문을 들어서는 학부모들 (사진은 이 글의 특정사실과 관계없음)

물건을 싸들고 교문을 들어서는 학부모들 (사진은 이 글의 특정사실과 관계없음)

우리 교육을 왜곡시키는 입시제도만이 문제가 아니다. 지난해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학교붕괴’도 문제다. 학교는 이제 모범생과 중간층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노는 아이들이 조금 섞여 있던 이전의 학교가 아니라고 교사들은 말한다. 교실마다 중간층이 사라진 지 오래고, 모범생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며, 공부에는 관심이 없거나 아예 담을 쌓고 노는 아이들이 상당수라고 한다. 수업시간에 공부에 전념하면 ‘왕따’당하기 십상이어서 ‘공부는 학원에서 하고, 학교는 잠자는 곳’으로 생각하는 아이들이 점점 많아진다고도 한다. 학원에서 이미 다 배운 내용이라 ‘수업이 따분하고, 재미없다’며 수업시간에 자거나 떠든다는 아이들, ‘야단치거나 호통을 쳐도 소용없는 아이들 앞에서 무력감을 느낀다’는 교사들. 이들은 모두 학교붕괴에 부딪힌 우리 교육의 희생자들이다.

문제아들의 전유물로 알았던 자퇴 양태도 최근 들어 달라지고 있다. ‘입시 때 내신 손해를 보지 않고 일류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자퇴하는 학생들도 있지만, ‘시험을 위한 공부로 내 삶을 허비하기 싫다’ ‘틀 속에 얽어매는 학교가 싫다’며 자퇴하는 아이들도 늘어나는 추세다. 놀라운 것은 이를 지지하는 부모들도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교육개발원이 지난해 10월 전국 1500가구를 대상으로 실시한 ‘중·고교 교육현실에 대한 만족도 조사’에서 학부모의 44%가 ‘자녀가 등교를 거부할 경우 학교에 보내지 않고 다른 교육방법을 찾겠다’고 응답했다. 이처럼 학부모들의 의식 또한 크게 달라졌다. 입시위주의 교육에 기대할 게 없다며 교육이민을 떠나는 가정, 과외비보다 해외유학비가 적게 든다며 자녀를 해외로 유학 보내는 중산층 가정들이 많아지는 것 또한 우리 교육의 안타까운 그림자다.

이런저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뒤섞여 나타난 학교붕괴의 해결방안은 걱정만 한다고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9세기 교실에서 20세기 교사가 싸이버시대를 사는 21세기의 학생을 가르치는 부조화가 빚어낸 학교붕괴는 우리 교육의 낡은 패러다임이 무너져내리는 것에 다름아니다. 따라서 학교붕괴를 새로운 교육환경 만들기의 시발점으로 삼고, 달라진 청소년들의 문화와 의식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자 노력한다면 무너진 학교를 일으켜세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달라진 청소년들의 문화와 의식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이제부터라도 시작되어야 한다.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그걸로 족해.”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이 「교실 이데아」를 내놓았을 때 이미 우리 아이들이 달라졌음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 보인 이 노래에 열광하면서 그동안 내면화해 있던 자신들의 의사를 당당하게 표현하기 시작했다. 대학에 가지 않고도 대중음악 가수로 성공한 서태지가 이룬 신화는 아이들에게 공부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재능을 살려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이런 ‘다른’ 아이들이 전보다 수적으로 많아지는 것을 시대의 변화에 따른 것으로 이해하고, 이를 인정하는 긍정적인 자세를 지닐 때 아이들과의 소통이 가능해질 것이다. 솔직히 털어놓으면, 우리 집엔 모범생과 그렇지 않은 아이가 있다. 큰아이는 정규과정을 밟아 2000학번 대학생이 되고, 올해 고3이 될 뻔한 작은아이는 ‘대학에 가지 않겠다’며 지난해 늦가을에 학교를 그만둔 자퇴생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겠다’던 작은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학에 가겠다’며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공부보다 노는 것을 더 좋아하는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기까지는 마음고생이 많았지만, 아이를 이해하려는 인내심과 포용력을 갖고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이 아이를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지름길임을 내가 했던 고민과 비슷한 걱정 앞에 놓인 부모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공부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를 ‘차별’하지 않고 ‘차이’를 인정하며, 아이를 억누르지 않고 존중하고, 저마다 지닌 개성과 잠재적 가능성을 발견해 이를 살려나가도록 이끌어주는 것, 그것이 곧 학교붕괴도 막고 아이들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낡은 패러다임으로 가득 찬 학교가 무너져내리고 있는 곳에, 학생을 통제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그래서 아이들이 가고 싶어하고 좋아하는 학교를 지어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되돌려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작업을 이미 시작한 곳이 있다. 지난해 말 어느 방송프로그램에서 소개한 충남 천안여중의 ‘즐거운 학교 만들기 운동’은 그 꿈의 실현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신나는 학교를 만들어보자’는 교장의 열린 생각이 교사들의 권위와 기를 살리고, 학생들이 학교를 즐거운 곳으로 여기게 만든 데서 나는 희망의 싹을 보았다.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한 문용린 신임 교육부장관의 취임사 또한 희망을 품게 만든다. “우리 교육은 세 가지가 바뀌어야 한다. 첫째 이제 ‘가르치기’의 시대는 갔다. ‘배우기’도 안된다. ‘생각하기’를 해야 한다.” 이 취임사가 화려한 수사에 그치지 않고 우리 교육을 살리는, 철학을 지닌 교육개혁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