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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통신 | 공교육의 위기와 사교육

 

길종각 吉鍾珏

강북대성학원 사회과 전임강사.

 

 

먼저 우리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

 

 

올해 서울의 입시학원에는 대박이 터졌다. 예년보다 적어도 30% 이상의 재수생이 더몰린 것이다. 이는 이미 작년부터 예견된 바다. 올해 다시 한번 대학 관문을 두드리겠다는 재수생의 행렬은 학원 개강이 100일 가까이 지난 오늘도 현재 진행형이다. 더구나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나는 6월 중순경에는 올해 대학에 진학한 신입생들이 다시 대거 입시학원으로 몰려들 것으로 전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학이 무엇인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1. 작년의 일이다. A양은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을 2학년까지 마친 뒤 휴학계를 내고 우리 반(입시학원의 종합반은 학교와 다름없이 담임이 배정되어 있다)으로 왔다. 사범대학생인 A양의 재도전 이유는 교육대학에 가기 위해서다. 작년에는 유난히 교육대학 지원자가 많았는데, 대학을 이미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7년이나 하다가 나이 서른한살에 교육대학에 가려고 준비하는 또다른 여학생도 있었다. 결과부터 말하면, A양은 특차 및 정시 모집에 모두 네 차례 응시하였으나 결국 떨어졌고, 나이 많은 그 여학생은 특차로 합격했다. A양은 수능점수만으로는 원서를 제출한 그 네 개 대학에 모두 합격하고도 남을 점수였는데도 떨어졌다. 이유는 간단하다. A양은 지방 명문여고를 나왔는데 그 지역은 비평준화 지역이었고 덕분에 내신성적이 중하위권이었다. 교대들은 특차·정시 예외 없이 학생부 성적을 40〜55% 반영하기 때문에 내신이 좋지 않은 A양은 고배를 마신 것이다. 그러나 정작 서른한살의 여학생은 고교 졸업 후 만 5년이 지났으므로 학생부 성적이 아닌 수능점수로 내신성적을 산출하는 제도에 따라 높은 점수를 받고 특차로 합격한 것이다.

올해 유난히 재수생이 증가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올해가 대학입시에서 수능점수만으로 특차 입학을 할 수 있는 마지막 해이기 때문에 학생과 학부모들은 한번 더 기회를 갖고자 하는 것이다. 춤추는 입시제도. 제도에 울고 웃는 수험생들. 그동안 바뀐 대학 입시제도를 손꼽아보면 심각하고 처량한 심사가 절로 들지 않을 수 없다.

P군은 서울소재 대학 지방캠퍼스에서 1학년을 마치고 이번 겨울에 입시학원에 들어왔다. 맨 앞줄에 앉아서 너무나 열심인 데 호감이 가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어보았다. 당연히 첫 질문은 왜 재수를 결심했느냐다. 돌아온 대답은 학교가 ‘후져서’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조금 냉소적이다. 선생님도 다녀보면 알게 될 거란다. 다시 물었다. 그럼, 그런 후진 대학엘 왜 갔느냐고. ‘성적이 나빠서.’ 또 물었다. 그럼 이번엔 어딜 갈 작정인지. ‘서울에 있는 대학’이다. 하고 싶은 전공은? 그런 거 없단다. 그저 서울에 있는 대학만 가면 된단다.

이런 대화는 특별하지 않다. 학원강사와 학생 사이에서 흔히 오갈 수 있는 대화다. 학부모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어쩌다 상담을 청해오는 분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그저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만 갈 수 있게 해달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학생들과 진학상담을 하다보면 때로 가슴이 답답해진다. 이유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자신의 삶에 대한 어떤 꿈, 비전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저 ‘좋은’ 대학, ‘좋은’ 과만 가면 된단다. 한번은 이른바 ‘서울대반’(대부분의 입시학원 반편성은 ‘서울대반’ ‘연·고대반’ ‘일반대반’으로 되어 있다) 수업시간에 왜 모두들 의대 아니면 법대만 가려고 하느냐, 세상을 넓게 보고 자신에게 맞는 적성을 찾아서 남이 안 하는 분야, 예컨대 기초학문 분야 같은 데도 우수한 인재들이 진출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다음날로 학부모가 학원으로 전화를 했더란다. 애들 김 빠지게 하지 말라고.

입시학원에 공부 잘하는 학생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과거에 비해 재수를 결심한 학생들의 성적은 전체적으로 크게 낮아졌다고 한다. 더구나 서울소재 명문학원 두 곳이 상위권 학생들을 싹쓸이하기 때문에 그 나머지 학원에는 ‘일반대반’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 반에 속해 있다고 해서 모두 성적이 낮은 것은 아니지만, 그 대부분은 일단 전문대를 가지 않기 위해 재수를 하는 학생들이다. 물론 그러다 안되면 어쩌는 수 없지만, 일단은 4년제 대학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일반대반에서는 재수의 의미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학원에서조차 공부를 안하는 아이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분명 학교와 학원은 다르다. 학원은 자기 스스로 결심하여 공부를 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오는 곳이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공부에 흥미가 없다. 수업시간에 장난을 치거나 자거나 멍한 얼굴로 공상을 한다. 학원은 클리닉이 아니다. 그래서 공부에 습관을 들이지 못한 아이들, 기초가 너무 약하여 의지는 있으되 교과의 수준이라는 현실 앞에서 무너지는 아이들, 학교에서 느껴보지 못한 또다른 분위기에 휩싸여 신나게 노는 아이들 앞에서 인성이 아닌 수능점수 올리기에 촛점이 맞춰진 학원수업은 더이상 대안도, 대학으로 가는 징검다리도 아니다.

내가 근무하는 학원에도 지난 3월 수능 모의고사 반평균 성적이 300점에 훨씬 못미치는 반이 다소 있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그 점수로는 4년제 대학은 물론 전문대도 서울소재 대학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수생은 늘어만 가고 학부모와 학생들은 쉽게 재수에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재수를 하면 모든 학생이 수능점수가 올라가리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안타까운 일이다. 사회계약론을 가르치는 시간에 어느 학생이 ‘인민(人民)’의 뜻을 몰라 질문을 했을 때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이모작(二毛作)의 뜻을 모른다는 학생에 이르러서는 우리 교육의 부실성을 더이상 설명하기 어렵다. 이 또한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다. 그럼에도 왜 재수를 하는가. 4년제 대학이 거기 있기 때문에.

 

2. 그럼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의 교육현실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이렇게 꼬이기 시작한 것인가? 먼저 교육에 관련된 문제에 있어 제도의 문제만을 지적하거나 그것만을 고쳐서 해결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나는 부질없다고 생각한다. 문제의 본질은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교육관료들의 무지와 밀어붙이기식 행정에 있는 것도 아니며, 정부가 바뀔 때마다 바뀌는 교육제도의 가변성과 불합리성에 있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교육 소비자들인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있다고 하면 나만의 독단일까.

학부모와 학생들이 국가가 제공하는 제도의 테두리 내에 안주하면서 문제를 헤쳐나가보려는 부질없는 노력은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삶과 교육에서 다원성의 가치를 믿고 또 실천해야 한다고 본다. 더이상 국가 지배이데올로기가 제공하는 형편없는 써비스의 공교육에 기대지 말고 새로운 가치와 제도를 만들어나가는 운동이 시급하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교육의 미시적 문제에만 매달려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을 때 바깥 세계와 우리 내부는 엄청나게 달라지고 있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이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하는 것이다.

우리 교육 문제의 내면에는 교육에 대한 국민 모두의 이기적 기대와 정부와 사회의 안이한 자세가 있었다. 세계 10대 교역국이 되었노라고 자랑할 만큼 성장했다는 국가경제에 비추어 교육현장의 시설과 체제는 너무나 부끄러운 수준인 것이다. ‘19세기 교실에서 20세기 교사들이 21세기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말이 떠도는 것처럼 교과서, 교실, 교사 대 학생의 수, 운동장, 도서실, 체육관, 과학실 어느 것 하나 2,30년 전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변하지 않는 것 중에 교육현장의 여전한 관료적 분위기도 한몫 한다. 아이가 전학을 와도 교장은 만나기 힘든 저 높은 곳의 관리자일 뿐이다.

그러나 제도와 시설, 관행의 문제를 탓하기에 앞서 모든 문제의 핵심은 결국 학부모에게 있다고 본다. 즉 나와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우리(학부모)들이 교육을 한사코 경쟁에서 이기느냐 지느냐 하는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한 어떠한 교육 제도와 내용의 개선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그대로 남을 것이다. 우리 학부모들의 자녀에 대한 고민이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결국은 어느 대학에 갈 수 있느냐에 있을 때 공교육은 계속 푸대접을 받고 위기에 놓일 것이다. 그리고 학부모들은 결국 학교교육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어 사교육에 아이를 맡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 아는 얘기지만, 현재 학원에서는 초등학교 5·6학년이면 벌써 중1·2 영어·수학을 가르치고 중 1·2학년이면 어느새 고 1·2 수준의 영어·수학을 가르친다. 이런 파행이 누구의 책임인가. 학교도 학원도 아닌 바로 우리 학부모들의 책임이다.

11년 전 내가 학교에 있었을 때도 아이들 중 10%만이 대학(4년제)에 갈 수 있었다. 나머지 90%는 그 10%를 위한 들러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장과 학부모들은 입시를 위한 수업을 요구했고, 그래서 고3 아이들에겐 아침·저녁으로 보충수업을 해줬다. 문제집도 지정하여 사서 풀었고, 또 보충자료도 푸짐하게 만들어주었다. 학력고사(당시) 보름 전에는 파이널 테스트라고 해서 중요 문제만 다시 뽑아서 특강 형식으로 가르쳤다. 그래도 아이들은 10%만 대학에 들어갔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나머지 90%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었다. 어쩌면 이렇게 변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간에 세상이 얼마나 변하고 또 변했는데 말이다.

나도 두 아이를 초등학교 고학년에 보내고 있는 학부모이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안사람과 약속한 것이 하나 있다. 절대로 우리 아이들을 공부를 위한 학원에는 안 보내겠다는 것이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잘 지켜지고 있다. 아이들이 하고 싶어해서 수영과 검도 학원에는 몇년째 보내고 있다. 어느날 큰아이가 자기 친구들은 학교 파하면 두세 군데 학원에 다니느라고 자기처럼 자유롭게 놀지 못해서 그런지 자기보고 부럽다고 하더라는 말을 했다. 우리 부부는 큰아이부터 중학교 과정부터는 가정학교(홈 스쿨)를 할 생각이다. 무슨 특별나고 대단한 결심 때문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학교의 교과과정도 마뜩찮고, 또 아이들을 비인간적인 경쟁으로만 몰아붙이기 싫어서다. 이제 교육에 대한 우리의 발상과 접근이 다양해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일방적 학습 강요는 결국 아이들을 망치게 된다. 다 아는 말이지만 또한 잘 실천되지 못하는 것이 바로 ‘공부는 제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던가.

‘바꿔’라는 대중가요가 이 봄에 히트를 쳤다. 그러나 우리는 제도의 옹졸함만을 바꾸라고 할 뿐 정작 스스로 바뀔 생각은 별로 하지 않는다. 삶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오기 전에는 어떠한 현실적 대안도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이런 변화가 쉽지만은 않겠지만 장강의 뒷물이 앞물을 밀고 가듯이 이제 우리 삶과 교육에 대한 시각에도 서서히 변화가 오고 있다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