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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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2000년을 여는 젊은 시인 20인

 

전동균 全東均

1962년 경북 경주 출생. 1986년 『소설문학』 신인상 시부문 당선. 시집 『오래 비어 있는 길』이 있음.

 

 

 

진관사 뒷숲

 

 

작은 길 옆에는 아름드리 감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요 봄이 와서 콸콸 쏟아지는 계곡물 소리에 온갖 나무들이 연둣빛 햇잎을 가득 피워올릴 때도 이 나무는 힘없이 가지를 내린 채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는데요 너무 늙은 탓일까요? 시커멓게 썩어가는 옆구리엔 영혼이 빠져나간 흔적처럼 움푹 구멍이 패어 있는데요 참 이상한 일이지요 이 나무 옆을 지날 때마다 나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여 으스스으스스 몸을 떨며 살아온 날들의 기억을 순식간에 잊어버립니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걸음을 멈추고 텅 빈 나무구멍을 오래오래 들여다봅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는 햇볕 좋은 날의 푸르디푸른 강물 같기도 하고 한밤중 굿당의 장고소리 같기도 하고 이제 막 눈뜬 새끼강아지의 낑낑대는 울음 같기도 한 연기가 흘러나오는데요 그 연기자락 끝에는 참척의 슬픔을 안고 엎드려 재를 올리는 노인네와 그 옆에 앉아 사탕을 입에 물고 두리번거리는 아이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가 사라지기도 하는데요  

 

 

 

서면에서 며칠

 

 

담이 없는 민박집

며칠째 강물 위로 뿌리는 비

그 저릿한 허리를 안고 낮술을 마시니

젖은 나뭇가지에 문득

幻夢처럼 꽃이 피었다

 

스윽슥 공중을 떠가는 배들

흰 돛을 편 저 깊은 향기들

 

몸을 떨며 짙어지는 나무그늘 아래에는

애기무당 같은 눈이 까만 처녀들이

서성이며

서성이며

오래 전에 떠나 돌아오지 않는

한 사람을 부르고

 

컹컹 개가 짖고

 

오 弔燈을 켜듯 환한 마음에

흙물 묻은 새 발자국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