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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시평

 

담론 없는 아시아 근본주의의 덫

제3회 광주비엔날레를 돌아보며

 

박신의 朴信義

미술평론가. 경희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객원교수.

 

 

지정학적 구분에 따른 현대미술

지난 3월 27일 개막된 광주비엔날레가 6월 7일 막을 내렸다. ‘인+간’(Man+ Space)이라는 주제를 놓고 5개 대륙에 따라 5명의 커미셔너가 전시를 꾸민 본전시와 ‘예술과 인권’ ‘인간과 성’ ‘한·일 현대미술의 단면’ ‘북한미술의 어제와 오늘’ ‘인간의 숲, 회화의 숲’ 등 5개의 특별전으로 구성된 이번 행사는 60만명이라는 당초의 관람객 목표 수치를 달성하고 무사히(?) 전시일정을 마감하였다. 준비기간중 총감독을 비롯한 전시기획팀이 교체되는가 하면, 한국작가들의 출품거부 등 논란과 잡음을 불러일으킨 이번 행사는 그만큼 부담을 안고 시작되었다는 점을 상기할 때, 그나마 무난한 폐막이 다행스럽게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95년 창설 이래 광주비엔날레는 진행되면서 늘 무리수가 따랐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이번 행사의 무난한 폐막 자체도 광주비엔날레의 근본적 문제를 덮어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번 행사를 통해 문제가 훨씬 본격적이고도 극명하게 드러났다는 생각도 해본다.

기본적으로 광주비엔날레에서 해결되어야 할 사안은 전시 기획에서의 국제적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전문성 확보에 있다고 하겠다. 그런 점에서라면 전체 전시 구성을 위해 대륙별 구분 방식(아시아/유럽·아프리카/북미/중남미/한국·오세아니아)을 취함으로써 이미 약세를 드러냈다. 1회 때와 같은 취약점인데, 결국 지정학적 기준으로 현대미술을 분류함으로써 현대미술의 풍부하고도 생생한 담론을 주도해내지 못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더욱이 이미 문화의 혼성과 전지구화에 대한 논의가 일반화된 지 오래인데, 국가별 혹은 대륙별 구분으로 현대미술의 흐름을 분배한다는 것은 현실에 한참이나 뒤진 발상인 것이다. 1회의 경우 9개월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행사를 준비하다보니 손쉬운 대륙별 구분이 불가피했다는 해명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아시아에 집중한다는 의도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광주비엔날레가 아시아에서 열리는 국제전으로서 아시아의 정체성을 구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오광수(吳光洙) 전시총감독은 “광주비엔날레가 서구지향적 모델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을 극복한다는 것이 3회 비엔날레의 주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라고 강조한 바 있다. 결과적으로 아시아 출신의 작가들이 1·2회에 비해 훨씬 많이 참여하고, 특별전에서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계열의 작가들이 다수 참여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시아와 한국의 참여 작가수를 늘린다 해서 자연히 서구지향적 성향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또 지정학적으로 아시아를 구분하고 서구로부터 분리한다고 아시아의 ‘정체성’이 구현될 수 있을까. 광주비엔날레가 규정하는 서구 대 아시아의 구도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갖는가. 과연 하나로 묶일 수 있는 ‘아시아성’이라는 것이 있는 걸까. 또 ‘정체성’과 ‘지역성’ 강조가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곧 전시를 통해 주어져야 할 것인데, 본전시의 초입에 배치된 ‘아시아관’(커미셔너 谷新)으로 그 설명이 충분할까를 헤아려보면 답은 쉽지 않다. 우선 아시아관은 공간에 비해 너무 많은 작가가 선정되었고, 그나마도 작품들이 대부분 거대한 규모의 설치형식이어서 그 좁은 공간을 더욱 갑갑하게 만들어놓았다. 공간 연출도 별다른 개념 없이 마치 칸막이식 가게가 빽빽이 들어선 것처럼 일률적으로 구획짓는 수준이었다. 아시아 작가들의 작품 경향을 볼 때도 너나할것없이 대형 설치와 영상작업을 엮는 것이었는데, 그 자체가 지나치게 설명적이어서 장황하고 잡다하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다. 이를테면 자국의 역사와 사회문제가 주제화되고 이에 전통과 현대가 대치한다는 식의 등식이 지배적이어서, 당대적인 문화 상황과 담론이 생성되었다기보다는 묘하게 제3세계적 볼거리로 축소되고 말았다. 나열된 아시아의 에피소드, 그것이 이번 아시아관에서 가장 먼저 드는 인상이었다.

 

동질화될 수 없는 아시아

아시아라는 지역적 조건을 감안하면서 동시대적이고 전지구적인 담론을 생성해낸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도 아시아는 내적으로 무수한 이질성을 안고 있어 하나로 동질화될 수 없는 실체라는 점에서 그렇다. 특히 한국에 아시아는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그 대답은 황당해진다. 흔히 일본과 중국을 포함하는 동아시아를 아시아적 관계로 먼저 떠올리지만, 베트남·필리핀·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는 아주 낯설고 이국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또, 멀리 인도와 파키스탄·몽고·중동지역은 어떤가. 어떻게 보면 아시아를 하나로 묶는 것은 단지 지정학적 조건일 뿐이지, 문화적 차원에서의 공감대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아시아가 특정 공간으로 배분될 수는 있어도, 그 특정 공간의 거주자들이 단일한 동질적 문화에 소속되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단일하고 일관된 정체성을 지니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시아 내에 존재하는 무수한 아시아 문화의 이질성을 헤아리는 일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그 이질성과 차이를 다시 문화적 순환의 역학관계로 놓는 일이다. 인구와 자본 그리고 정보의 자유롭고 빈번한 국제적 순환이 매일매일 우리를 수많은 문화와 만나게 하고, 민족간의 다양한 문화체계를 형성하고 이들이 교차하며 상호침투하게 한다. 실제로 정체성 개념은 지역성과 국제성, 전통과 현대 간에 일어나는 갈등구조를 충돌시키고 통합하면서 살아간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정체성은 더이상 한민족공동체에 배타적으로 소속되는 것이 아니다. 문화가 서로 섞이고 결합하며 변형되는 혼성의 과정은, 그런 점에서 정체성 논의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정체성이란 궁극적으로 어느 집단에 공유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역사적 운동 속에서 구성되고 변형되며 재창안된다. 다시 말하면 정체성이란 혼성적이고 유연하며 다문화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준 구엔 하츠시바 「씨클로-1999-꿈과 현실 사이」

준 구엔 하츠시바 「씨클로-1999-꿈과 현실 사이」

앞서 아시아 미술이 에피소드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의 맥락이 그것이다. 일례로,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말굽들을 천장에서 아래로 매달아놓은 다우크도르즈(Dagvadorj)의 「애원/길」은 역사적 오브제를 박물관적인 개념으로 좁혀버린 작품이다. 몽골민족의 생활도구를 소재로 몽고가 처한 정치·사회적 갈등을 묘사한다는 의도에도 불구하고, 전통과 역사를 하나의 예술적 물품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오히려 이국적 향수와 쎈티멘탈리즘이 더 강하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자국의 특수한 역사를 정체성 논의의 준거로 절대화하면서 민속학적으로 박제화하는 일은 아시아와 제3세계 미술이 범하는 가장 흔한 오류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과거를 역사화하고, 당대적 문화변동의 생생한 흐름을 관통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문제로, 쎈티멘탈리즘의 다른 얼굴인 것이다. 베트남의 주요 교통수단이었던 ‘씨클로’를 설치하여 베트남 사회의 변화상을 묘사하였다는 준 구엔 하츠시바(Jun Nguyen Hatsushiba)의 「씨클로─1999─꿈과 현실 사이」의 경우도, 씨클로를 통한 동시대적인 문화담론이 형성되지 못함으로써 단지 어떤 기억의 대상으로만 남게 된다.

정체성 논의의 미흡함은 작품의 주제에서도 드러난다. 이번 아시아관의 대부분의 작품이 대형 설치로 일관되면서 전체적으로 주제는 거창하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으로 비쳐졌다고 할 수 있다. 거의 비슷한 크기로 나뉜 전시공간은 예외없이 설치와 영상물로 꽉꽉 채워져 너무도 혼란스럽고 장황한 분위기였는데, 이는 작품의 언어와 개념적 측면을 스펙타클의 효과로 대체해버린 결과라 하겠다. 스펙타클은 일종의 거대주의로서,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작품 개념을 물신화하는 방식이다. 전시장 바닥을 낙엽으로 뒤덮고, 사자 형상의 상상의 동물 일곱마리가 비디오 모니터를 바라보도록 설치한 후, 인도네시아의 전통의식의 이미지를 배치한 크리스나 무르티(Krisna Murti)의 작품은 현대 통신매체 기술의 공격성과 권력의 구도를 비판적으로 드러냈다고는 하지만, 그런 의미구조가 읽히기는 분명 어려웠다. 볼거리가 앞서면서 의미구조의 연관관계가 왜소해졌다고나 할까. 또 인도와 파키스탄 분쟁을 이야기하되 이를 보스니아전쟁과 원폭실험 등의 전지구적 문제와 연관하여 제시하는 경우에도, 전시장 벽과 바닥을 뒤덮은 영상물이 차라리 현란하여 그 의미론적 연관성에서 설득력을 갖기에는 사실 역부족이었다고 할 수 있다.

 

큐레이팅과 작품성에서의 열세

유감스럽지만, 아시아 작가들이 대거 진출했다는 사실이 아시아 정체성에 대한 비평적 쟁점과 담론을 담아내지 못했음은 물론이거니와 큐레이팅과 작품성에서의 열세를 확인해줬을 뿐이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한국을 오세아니아와 묶어버림으로써 아시아와는 별도로 분류한 것이다. 이같은 분류는 1회와 같은 방식인데, 한편으로는 오세아니아를 여타의 대륙과 묶기 어려운 점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광주비엔날레 주최국으로서 한국에 더많은 공간을 배려한다는 정도의 이유 때문이라 하겠다. 하지만 아시아 정체성을 부각한다는 기왕의 의지와 달리 한국을 아시아의 구도 내에서 볼 수 없었다는 점은 아쉬운 일이다.

아쉬움은 ‘한국관’(커미셔너 金弘姬)의 전시를 보면 더하게 된다. 출품 작가들 대부분이 동시대 문화변동에 대한 구도 속에서 한국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약했고, 이에 따라 문화적 정체성 논의로 문제를 모아내지 못했다. 전시공간 연출 면에서도 주제상의 내적 결합 내지는 연결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산만해진 것도 큐레이팅의 한계라 하겠다. 게다가 오세아니아 ]션은 한국관과 분리되어 ‘중남미관’ 옆에 배치됨으로써 관람객이 식별하기가 거의 어려웠다. 결국 한국과 오세아니아를 묶은 이유가 사라져버린 셈이다. 상대적으로 르네 블록(René Block)의 ‘유럽·아프리카관’이 그나마 대륙별 구분을 하나의 전략으로 받아낸 경우이다. 그는 기존의 중심논리에 대응하여 주변부적인 문화와 삶을 부각시키면서 그 대상을 유럽의 주변부 국가로 분류되는 북구와 중동, 아프리카로 한정함으로써 주제적 맥락을 일관되게 이루어내 좋은 대비를 보였다. 하지만 어차피 대륙별 구분이라는 점에서 서유럽 국가를 배제한 사실은 불안정한 해결책이라 하겠다. 한편 ‘북미관’(커미셔너 Thomas Finkelpearl)은, 초상화를 소재로 혼성의 문화를 제시함으로써 시의적절한 문화적 쟁점을 구체화한 것도 주목할 만했고, 전시 연출 면에서도 매우 탁월한 기량을 보여준 편이라 하겠다.

 

크리스나 무르티 「예술의 줄서기 교육」

크리스나 무르티 「예술의 줄서기 교육」

 

아시아를 역동적인 개념으로 바라보지 못한 점은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인+간’이라는 주제는 너무도 보편적이어서 동시대적인 이슈를 특화하고 쟁점화하는 데는 크게 모자란다. 인간의 개념이 얼마나 다층적이고 열린 개념으로 인식되고 있는지를 전제하지 못하는 다소 도덕주의적 성향의 규정적 시각이 또다시 현대미술을 좁은 범위로 닫아버린 것이다. 이번 주제를 설정한 오광수 총감독의 입장은 그런 점에서 설득력을 얻기가 힘들다. 게다가 전체 전시장에 무작위적으로 ‘특별코너’를 설치한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본전시의 5개 커미셔너의 공간에 오광수 총감독이 선정한 9명의 작가의 공간이 불쑥 나타나는 것이 전체 전시회의 흐름을 차단하는 장치 외에 다른 기능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특별전의 아시아

특별전의 경우를 보면 확실히 아시아 작가들의 참여비율이 더욱 높아진다. ‘한·일 현대미술의 단면’전은 한·일 양국의 모더니즘 주류미술로 불리는 일본의 ‘모노하(物派)’와 한국의 단색화를 모아놓은 전시회다. 무엇보다도 이번 전시가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한일교류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고 할 만하다. 비록 모노하에 한정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동안 일본의 현대미술에 대한 비평적이고 역사적인 조명이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일본 모더니즘 미술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된 셈이다. 그러나 자칫 이같은 유의 전시회가 한·일 주류미술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기념비적인 성격으로 국한될 소지가 있다는 점이 유감이라면 유감이다. 실제로 일본 모노하에 비하면 한국 단색화의 문화적 정체성과 역사성이 상대적으로 빈약했고, 결국 보수적인 형식주의로 귀결될 소지가 처음부터 잠재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는데, 오히려 이런 부분이 비평적으로 활발하게 논의돼야 할 내용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술과 인권’전은 인권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온 일본의 원로평론가 하리우 이찌로오(針生一郞)가 기획한 전시회다. 하리우의 기본관점은 이미 잘 알려진 편인데, 일본인이면서도 일본제국주의에 분개하는 지식인으로, 그의 문제의식은 주로 열강의 침략과 파괴로 일관된 아시아의 근대화에 집중되어왔다. 그런 점에서 80년대 한국의 민중미술을 일본에 소개하고, 일본의 반전(反戰)운동과 인권문제를 다룬 미술을 한국에 소개하는 등 실제로 한·일 리얼리즘미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히로시마 원폭피해의 상황을 서사적으로 표현한 마루끼(丸木) 부부의 대형작품과, 아시아 각지에서 벌어졌던 일본군 종군위안부 여성에 대한 만행을 묘사한 토미야마 타에꼬(富山妙子)의 작품, 일본의 국수주의를 공격한 구와바라 시세이(桑原史成)의 사진 등 일본의 주요작품이 소개되었고, 서구 작가의 경우도 2차대전의 만행과 유태인학살 등에 관련된 주제가 많이 등장했다. 신학철(申鶴澈)을 비롯한 한국의 민중미술 작가들의 주요작품도 많이 보였는데, 결과적으로 인권문제를 다룬 현대미술의 기념비적인 전시회로서 큰 의의를 갖는다고 하겠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묘하게 지정학적 구분에 따른 제3세계적 시선으로 좁혀진 인상이고, 동시에 과거의 역사적 과오를 상기시키는 데 집중하는 계몽주의적인 역사전(展)으로 비칠 위험부담도 안고 있다는 데 있다. 실제로 인권 개념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가 있을 텐데, 하리우의 시선은 분명 아시아에 국한되어 있고 서구의 문제를 바라볼 때도 그것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아시아나 서구의 인권문제는 매우 복합적인 문화적 맥락으로 얽혀 있는 것이어서 2차대전을 계기로 한 역사적 반성에 의해서만 환기되는 것이 아니고, 또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 주제가 얼마나 동시대적이고 전지구적인 문제로 끌어올려질 수 있느냐에 주요 쟁점이 있다고 하겠다. 확실히 (좁은 의미의) 리얼리즘미술은 역사적 범죄를 과거로, 기억으로 보존해버림으로써 도덕적 분노를 현재와 만나게 하기가 어렵다는 데 그 한계가 있다고 하겠다.

결과적으로 광주비엔날레가 아시아 정체성을 내세웠지만, 그 비평적 담론의 생산은 빈약하기 그지없었고, 게다가 묘한 아시아 근본주의의 이데올로기로 2000년 광주비엔날레의 성과를 포장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국제적인 행사를 지역행사로 축소해버렸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