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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21세기 문학의 향방: ‘창비시선 200’ 기념 대토론회

 

한국소설과 리얼리즘에 대한 나의 생각

 

 

황석영 黃晳暎

소설가. 소설집 『객지』, 장편소설 『장길산』 『무기의 그늘』 『오래된 정원』 등이 있음.

 

 

어려서부터 교실을 싫어했어요. 교실이 싫어서 수업중에 주로 딴짓을 하거나 슬그머니 밖으로 빠져나가고 그랬는데, 올 가을에는 씸포지엄이 왜 그리 많은지 난리가 나서 제가 좀 바빴습니다. 발제문 원고 독촉을 받다가 마감일자를 넘기고, 그냥 평소에 생각하던 대로 여러분들과 대화하는 식으로 말씀드리려고 마음을 편하게 먹고 나왔습니다.

고은 선생께서는 문학의 위기를 강조하면서, 위기가 있어도 좋다, 바람이 불어와도 좋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원래 비관과 낙관은 종이 한장 차이입니다. 그래서 저는 낙관적 비관주의, 또는 비관적 낙관주의의 자세로 장래 우리 문학, 제가 바라보는 문학에 대한 얘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사실 지금 와서 갑자기 이 말이 나온 것이 아니라 소설가와 시인은 태어나서부터 살아가는 것 자체가 벤처입니다. 우리가 벤처 아니었던 적이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위기가 와도 우리는 원래 벤처니까, 하는 생각으로 대처하면서 나아갈 것입니다.

제가 한국문학에 대해서 심각하게 돌이켜보게 된 것은…… 그렇죠. 집을 떠나서 여행을 해보면 집 생각이 나고, 가족들의 소중함이라든가 또 자기가 그동안 집안에서 섞여 부대끼면서 살 때는 발견하지 못하던 가족들의 장점이나 약점, 이런 것들을 멀리 떨어져 있으면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제가 한국문학에 대해서 깊이 반추하게 된 것은 베를린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기간이었습니다. 1989년 11월 9일에 베를린장벽이 무너졌죠. 저는 야행성이라 늘 밤에 일하고 낮에는 자고 했는데, 오후에 작곡가 윤이상(尹伊桑) 선생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전화를 받으니까, 목이 메인 소리로, 독일이 통일되고 있는 과정이다, 지금 거리에 나가봐라, 장벽이 무너지고 있다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어둑어둑한데 나갔죠. 나가보니까, 그때 막 장벽이 터지기 시작해서 각 검문소에서 물밀듯이 동독주민들이 쏟아져나오고 양쪽 장벽 위에, 또는 바리케이드를 쌓아놓은 데에 서독 젊은이들이 올라가서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고 환호를 하고 난리가 났어요. 저는 광장 모퉁이에서 생각했습니다. 아, 20세기가 이렇게 끝나는구나. 바로 20세기 종말의 현장을 거기에서 봤습니다. 그러고는 집에 돌아와서 생각했죠. 아마 세계가 엄청난 변화를 겪을 것이다. 그러면 사람의 생활도 달라지고 생각도 달라질 것이다. 물론 동아시아, 유라시아대륙 끝에 있는 한반도에도 커다란 변화가 올 것이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역시 얼마 못 가서 소련연방이 무너지고, 차례로 동구가  사회주의체제에서 이른바 시장경제체제로 전환을 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보면서 오랫동안 제가 해왔던 여러 작업들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게 됐어요.

우리가 7,80년대에 군사파쇼와 싸우면서 설정한 몇가지 명제들이 있었어요. 민중문학, 그리고 민중문학을 떠받치고 있는 실내용은 리얼리즘이고, 이것을 더 심화·확대시켜서 민족문학, 이렇게 몇가지 명제가 있었는데, 이 명제들에 피할 수 없는 변화가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리얼리즘이라는 말을 쓰기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리얼리즘’은 당대 예술가들의 현실에 대한 고민의 출발점으로서 인생과 예술의 방법과 태도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었지만, 그것이 ‘사실주의’로 번역되면서 세계와 사물의 객관성만을 사진처럼 보여주는 하나의 기법처럼 오해되었기 때문입니다. ‘현실주의문학’이라고 하면, 생동하는 현실 속에 누구나 살고 생각하고 하니까, 모든 문학은 그곳을 토대로 시작하게 된단 말이지요. 그래서 그 현실에 대응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예술의 기본적인 과제라고 여겼습니다.

한국문단에서 ‘사실주의’라고 번역되었던 ‘리얼리즘’은 1980년대초에 ‘현실주의’라고 번역이 바로잡혔습니다. 그야말로 19세기 사실주의 식의 리얼리즘에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환상적 리얼리즘, 초현실적 리얼리즘, 내면적 리얼리즘 등 소설에서 여러 경향의 분화를 겪으면서도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떼어버리지 못했던 것은 구미를 중심으로 한 문학의 자의식이나 자책 같은 것 때문입니다. 애초부터 성격이 다른 여러 갈래의 문학경향들이 서로가 리얼리즘을 자처했던 것입니다. 예컨대 어떤 평론가의 경우에는 심지어 카프카적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을 보기도 했는데요.

우리가 서양사에서 배웠듯이 유럽의 민중은 몇차례 혁명을 겪으면서 결국 부르주아에게 권력을 넘기고 반동화한 부르주아는 자국 내의 모순을 제국주의를 통해서 밖에서 해결했죠. 즉 식민지를 경영해서 얻은 재부로 내부 문제를 해소하는 길로 나아가지 않았습니까? 이럴 때 예술가에게 몇가지 길이 남아 있었습니다. 저항하느냐, 먹히느냐, 도피하느냐의 길이죠. 현실에 대한 저항도 있었지만 미미했거나, 자기파괴의 길로 가버리고, 부르주아 사회를 피해서 달아나거나 그랬습니다. 그런데 부족적 공동체사회나 봉건사회에서 막바로 제국주의의 침탈을 겪고 근대적 혁명의 열기를 경험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사회는 이와 달랐습니다. 자기 사회 내부의 보편적인 삶의 요구들과 자신의 예술이 간격 없이 일체화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해방과 6·25전쟁을 겪고 나서 남한 문단은 친일 잔재와 파쇼독재에 기생하는 문인과 문학이 주류세력을 이루었는데, 여러분들이 성장하면서 배웠던 교과서에는 그 사람들 일색으로 편집되어 있죠? 일종의 문화적 폐허였던 것이죠. 일제에 항거했던 진보적 문학인들은 당시 친일세력과 미군정 당국의 반민족적인 정책들에 실망하고 대거 월북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조건들에 대해서 한국문단이 반성을 시작하게 된 것은, 겨우 정신을 추스르게 된 4·19 이후부터라고 논의되고 있습니다. ‘민중문학이다, 민족문학이다, 그리고 현실주의 문학이다’ 하며 논의가 진행되어온 바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시작은 이런 문단의 조건들을 일단 부정하는 데서 나아가, 일제시대 선배들의 누더기가 되어버린 유물들의 먼지를 털고 원칙들을 다시 세워나가야 했습니다. 지난 30년간 번개처럼 진행되어온 남한의 자본주의를 천민자본주의로 인식하고 남한의 문화를 신식민지적 문화로 규정했던 조건은, 지금은 좀더 번성하고 세련되었을지 모르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죠. ‘지금도 리얼리즘이냐? 또 리얼리즘이냐? 하는 소리는 너무 낯익고 성급한 질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의 저널리즘은 십년 단위로 세월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장삿거리를 들고 나오는데, 이때 들고 나오는 ‘새것’은 언제나 바다 건너에서 들여온 것입니다.

한데 우리가 규정한 용어가 현실주의인 한, 현실주의 문학예술은 늘 살아 생동하는 생물입니다. 어느 형식에도 매일 필요는 없겠지요. 현실주의 예술세계의 확장을 위해서 창작자는 언제나 자기 작품을 새롭게 갈고 닦아나가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기 마련입니다. 형식은 무슨 사조나 유행에 따라서 변하는 게 아니라 자기 사회 속에서 살고 실천하는 예술가의 창작과정에서 형성된 필연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고정불변한 삼인칭 시점과, 주관이 배제된 선택된 객관, 기계적 구성과 시간의 일치 등등 과거의 이른바 자연주의적 사실묘사와 문체에 대해서는 동료들 사이에서도 비판의 말이 많았습니다. 저도 단편소설을 쓸 때는 몇몇 작품만을 빼고는 엄격하게 이른바 객관성 일변도였는데요. 그러나 특히 『장길산』을 쓰면서는 서구식 문체라든가 서술방법을 벗어나기 위한 실험들을 여러 대목에 했습니다. 그러면서 겪어보니까 우리가 새롭게 뭘 쓴다는 것은 단순한 문체의 문제가 아니라, 통틀어서 구성·형식·세계관까지 다 변해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근대문학을 공부하면서 서구문학만 계속 공부해왔기 때문에, 18세기 이래로 자생적 근대를 준비해온 당시의 우리 민중들이 만들었던 여러 풍부한 예술작품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게 많습니다. 판소리라든가 탈춤, 또 동네마다 있었던 대동놀이나, 서사무가라든가 민요, 민담 등 엄청난 보물창고가 있어요. 그래서 저는 리얼리즘의 발전적 변용을 위해서는 이러한 민중연희의 양식들을 유심히 살펴야 한다고 여러 지면에서 말해왔습니다. 베를린 망명중에 쓰다가 중단해버린 소설에서도 문체를 변화시키려는 작업을 시도했지만, 사실은 제가 70년대에 묶었던 세 권의 단편집에도 여러 모양의 구성과 문체를 적용시킨 흔적들이 보입니다. 아직은 시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지요.

과거의 리얼리즘 형식을 좀더 과감하게 좀더 풍부하게 해체해서 재구성해야 합니다. 삶은 놓친 시간과 그 흔적들의 축적이며, 그것이 역사에 끼여들기도 하고 꿈처럼 일상 속에 흘러가버리기도 하죠. 역사와 개인의 꿈 같은 일상이 함께 현실 속에서 연결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어서도 안되고, 화자도 어느 누군가의 관점이나 1인칭, 3인칭으로 고정된 것이 아닌데…… 과거에 리얼리즘을 기계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3인칭이어야 한다고 고집을 했죠.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지 않으면 1인칭과 3인칭이 같이 혼융될 수 있는 것이죠. 등장인물 각자의 시점에 따라 서로를 교차하여 그려서 완성시켜줄 수도 있습니다. 나와 너, 그리고 세상은 피차에 상대적인 것이니까요. 그는 나에게 객관이고 나는 주관이지만, 나는 그에 의해서 객관화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한 인물과 사건을 두고도, 모든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생각과 시각의 다양성으로 수를 놓듯이 총체적인 것에 가깝게 그려나갈 수 있다는 것이죠.

객관적인 서술방법도 삶을 그럴싸하게 그린다고 할 뿐이지, 삶을 현실의 모양대로 재현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차피 삶이 산문에 의해서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면, 삶의 흐름에 가깝게 산문을 회복할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 저의 형식에 관한 고민입니다. 우리 민담은 그런 점에서 화자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뛰어넘어 현실과 직접 대립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피해 가지도 않으면서 고통과 비애를 넘어섭니다. 저는 민담의 자유롭게 열린 서사성의 비밀이 과거는 물론 현재까지도 소멸해가는 삶이 중간 얘기꾼을 통해서 본래의 모양대로 자연스럽게 복원된 데서 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이고 싶은 것은 민담이나 서사무가가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옛날 틀 그대로 가져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형식의 본질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말이죠. 이를테면 이건 형식의 문제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우리네 사고의 문제이기도 한데, 유명한 진도의 씻김굿 같은 제의를 보십시오. 이게 장례의식에서 온 건데, 처음부터 끝까지 죽은 사람을 천도하고 저승에 보내고 하는 아주 슬픈 이별을 전제하고 저승과 이승이 갈라지는 그런 진행을 합니다. 그러다가 중간에 ‘다시래기’라고 하는 극중극 형식을 집어넣어요. 그래서 이제까지의 장례와는 전혀 상관없는 우스개 광대극이 슬픔의 클라이맥스에 등장해서 사람들을 마구 웃깁니다. 죽은이를 흉내내어 슬피 울던 무당이 나와서 뭐라고 하냐면, 야 밥식구 하나 줄었으니까 상주가 얼마나 복이냐? 그것 참, 잘 죽었어, 하면서 반전을 시킵니다. 그래서 그때까지 슬픔에 겨운 가족들이 저승 문턱까지 따라가서 기진맥진해 있던 상태를 튼튼한 일상생활의 현장으로 다시 끌어오는 거예요.

잠깐 얘기가 옆으로 빠지는데요. 이러한 생각은 이를테면 이웃나라 일본의 감성과는 서로 다르지요. 샤미센(三味線)을 가르치는 스승을 따르기 위해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되는 것과 같은 감성구조는 우리들 민중연희에는 없지요. 진도 씻김굿의 다시래기 대목이나 탈춤의 미얄 대목에서 보듯이 비극의 와중에도 감성적으로도 털털하고 넉넉하게 열려 있습니다.

과감한 형식적 비약들을 탈춤이나 꼭두각시놀음 등 민중연희의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령 서사무가나 민담에서 보이는 시간의 불일치, 과거와 현재로 장애 없이 넘나들고 말이죠. 그야말로 수십년이 말 한마디로 현장에서 그냥…… 이쪽에서는 십년 전이고, 저쪽에서는 백년 후인, 이렇게 돌아서기만 하면 되는 그런 것 말이죠. 그리고 그 의도된 과장과 반전 같은 전위적인 요소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얘기가 길어졌는데요. 하여튼 그래서 새로운 산문에 대한 가능성을 머릿속으로만 모색하면서 망명생활을 보내다가 1993년 한국에 돌어와서 감옥에 들어갔는데, 그때 마침 80년대에 대한 반동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국의 출판계는 최대의 성황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웬만한 책은 찍어내기만 하면 오십만 부, 백만 부가 팔릴 때였으니까요. 근데 나는 팔자가 사나와서 시절이 좋을 때는 나가 있거나 감옥에 있고…… 그래서 하여튼 80년대에 대한 반동이 진행되는 것을 봤는데, 거기서 혼자 생각을 했어요. ‘역사나 세월이라는 것은 에누리가 없구나.’ 군사파쇼에 저항하는 동안 우리 사이에는 이중의 억압이 있었다고 봅니다. 하나는 군사독재의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억압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들끼리의 억압입니다. 타도하려는 상대방을 닮은 억압을 우리들 사이에도 만들었어요. 집단, 규율, 의무, 책임, 희생, 헌신 같은 가치들이 개인들의 작아 보이는 사생활, 일상, 개인주의, 내면, 감성, 행복추구에 대한 가치들을 억압하고 유보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90년대의 한국문학이 서사를 상실하고 사소설적인 개인주의화, 신변잡기화, 감각화, 파편화의 길을 걸어온 것은 어찌 보면 80년대적 편향에 대한 반동이었지요. 세계사적 변화가 있고 나서 두 가지 현상이 만연했습니다. 파시즘에 기생하던 지식인들은 ‘거 봐라, 망했지? 우리가 이겼지?’ 하면서 득의양양해졌고, 진보를 자처하던 지식인들도 은근히 홀가분해졌지요. 이들은 거의 ‘아, 지긋지긋한데 잘됐다’ 하면서 얼른 시치미를 떼고 돌아서거나 ‘아, 다 끝나버렸다’ 하고 한 일도 없이 엄살을 피우는 것이었지요. 이를 제도권의 청산주의와 때마침 수입된 포스트모더니즘이 함께 부추겼습니다.

저는 감옥에서 하나와 많은 것의 문제는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 따라서 질서와 창조, 주관과 객관, 다원주의 등이 함께 존중되어야 하고 우리가 파시즘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것은 바로 귀한 개인들의 소중한 삶과 행복을 존중하기 위한 것이어야 했다고 생각했지요.

저는 80년대와 90년대의 좌우편향을 극복하고자 하는 생각으로 문단에 복귀하는 첫번째 작품으로 『오래된 정원』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이들 양자가 만나지 않고는 지난 세기를 뛰어넘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은 거기에 대한 대응으로 저의 ‘20세기 3부작’이라고 정한 첫번째가 『오래된 정원』이고 두번째가 『손님』이고 세번째가 『병사의 길』인데, 이제 겨우 3부작의 1편을 끝낸 셈입니다.

저는 성차별을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먹고 살아야 하는 경쟁이 점점 치열해져서 그런지, 요즈음에는 직접 식구부양을 담당하지는 않는 여성작가들이 소설문학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어요. 여성작가들이 많다고 해서 나쁜 건 아니지만, 워낙 쓸만한 남성작가들이 희귀해져가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독자들도 어떻게 됐냐 하면…… 요새 출판인들이 그렇게 얘기하더군요. 아동과 여성 상대의 출판물은 죽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미 책을 읽는 연령이 국민학교 6학년에서 끝나고, 중·고등학교만 가도 입시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책을 읽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더구나 요새 대학생들은 인터넷이다 취직이다 해서 책을 거의 안 읽는대요. 그러니까 여성들, 특히 가정주부들이 오히려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요. 그런 경향들에 90년대적 시대상황이 맞물리면서, 사실 서사(敍事)가 다 죽어버렸습니다. 소설이 뭡니까? 기본적으로 서사예요. 소설은 서사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게 다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조금 그런 요소가 보이기만 해도 반가운 거예요. 그래서 뭐가 있나 하고 들여다보면 호흡이나 끈기, 토대나 이런 것이 너무 허약해서 중간으로 넘어가면 다 흐지부지되어버리죠. 처음에는 잘 출발하다가도 말입니다. 이런 것을 느꼈습니다.

감옥에서 나와 보니까 세상이 바뀌었잖아요. IMF의 경제대란중에 10년 만에 남한사회를 보니까 세상이 정말 많이 바뀌었더구만요. 우선 전지구적인 신자유주의가 ‘세계화’라는 미명 아래 뒤덮이고, 이미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독점자본의 지구에 대한 재편성이 다 끝나버리고 말이죠. 그리고 인터넷이다 뭐다 해가지고 정보화시대……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그렇게 우르르 몰려다니는지 한번 떠들면 그리로 다 몰려가요. 출판은 과거의 오분의 일로 줄었다고 하던데요. 처음에는 뉴욕이나 빠리도 그랬다지요. 프랑스에서 온 작가들도 얘기하던데, 80년대 중반에 1년에 신작소설이 280권 정도 나왔대요. 그런데 요새는 신작소설이 5백권에서 6백권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배로 늘어났다는 거예요. 미국의 경우는 어떠냐 하면, 고전을 중심으로 한 출판이 막 일어나서 출판계가 호황을 누린대요. 말하자면 인터넷의 열기가 오르고 디지털 운운할수록 그 내용을 채우려는 욕구가 커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고전을 다시 읽고 당대의 현실과 삶을 다룬 문학작품을 새로이 찾아 읽게 된다는 겁니다. 한데 우리는 정반대예요. 그렇잖아요? 맨날 인터넷상에서 외마디 소리만 할 겁니까? ‘방가, 추카추카, 안뇽, 싸랑해, 내 꿈 꿔……’ 이런 것만 할 건가요?

말하자면 내용을 채워야 할 거 아닙니까? 벤처기업의 거품이 뭐예요? 바로 컨텐츠가 없는 거예요. 그냥 벌여놓으면 될 줄 알았지만, 생각해보세요. 어떻게 도구가 삶을 결정합니까? 절대 그럴 수 없어요. 인터넷은 삽이나 곡괭이 같은 겁니다. 그것은 사용하는 방법을 배워서 사용하면 되는 거예요. 곡괭이로 삶을 결정합니까? 그건 땅을 파는 도구인데요. 그걸로 금을 캐거나 다이아몬드를 캐거나, 혹은 오이를 심거나 배추를 심거나 해야 할 것 아닙니까? 말하자면 기본 텍스트가 없는 사고는 기계의 부속품이나 한가지입니다. 기본적으로 아날로그가 없는 디지털은 절대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삶, 밥 먹고, 새 우는 소리를 듣고, 별을 보고, 하는 이 아날로그는 영원히 변치 않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저 ‘패션이 바뀌었구나’ 하고 봤어요.

제가 얼마 전 서울대학교로 강연을 하러 가서 보니까…… 거기가 옛날에는 대단하던 데였거든요. 다들 눈에 핏발이 서가지고 사구체 논쟁하려 들고 말이죠. 그래서 옛날에는 애들이 “선생님, NL입니까 PD입니까?” 그랬거든요. 그런데 요즘 보니까 걸어다니는 모양이 아주 가뿐가뿐해요. 머리도 노란 물도 있고 빨간 물도 있고 울긋불긋한 게 보기가 좋더라고요. 그게 다 패션이다, 별게 아니다, 이거예요.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심각한 현실이에요. 미국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잖아요. “인터넷은 미국의 신영토일 뿐만 아니라 미국의 신식민지이다” 하고 노골적으로 얘기를 했어요. 미국의 신문들에서 그렇게 쓰고 있어요. 제가 볼 때에는 정보의 세계화라는 현실이 그래요.

그래서 저는 소설을 형식과 내용, 이런 것을 바꿔나가야 함과 동시에 당대인들과 함께하는 문화운동을 벌여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7,80년대에 글을 쓰면서…… 이 자리에 고은 백낙청(白樂晴) 최원식(崔元植) 선생 등도 있지만, 글쓰는 행위를 민족민중문화운동이라고 명명을 했어요. 그래서 농담삼아 “야, 그놈 황석영이 글은 안 쓰고 작가로서의 의무를 방기하고 15년 동안이나 헛지랄이나 하러 다니고 저게 뭐하는 짓이냐?”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출발할 때부터 자기규정을 이렇게 했어요. 작가란 글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 민중의 삶을 담는 그릇인 문화를 바꿔나가고 변혁해나갈 의무가 있다, 글쓰는 일과 더불어 이러한 실천이 만나야 문화운동이다, 이렇게 규정을 한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작가의 문화운동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거라는 얘기지요. 우리가 잡지를 내고, 이런 자리를 만들고, 또 어디 나가서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좋은 말을 하고, 무슨 형식을 만들어서 작품이 아닌 방식으로도 전파하고 말이죠. 가령 신경림(申庚林) 선생이 민요연구회를 만들어서 민요를 가지고 지방에 돌아다니면서 농민들과 대화하고, 거기에서 프로젝트를 만들고 그렇게 해왔던 것처럼, 지금은 바뀌었으니까 우리는 이 바뀐 도구들을 활용해야겠다는 겁니다.

고은 선생의 말씀에는 인터넷에 대한 공포도 많이 들어 있는 것 같아요. 한데 그거 별것 아닙니다. 젊은 친구들하고 1시간만 같이 앉아서 연습하면 금방 할 수 있습니다. 뭐 빨리 할 것 있습니까? 그냥 천천히 하면 다 됩니다.

인터넷에는 좋은 점이 있고 나쁜 점이 있어요. 먼저 나쁜 점부터 얘기하자면, 정보의 양은 많은 것처럼 보이는데 취사선택하는 데 어려움이 있고 깊이가 없다는 것이지요. 상업주의적인 엔터테인먼트가 광범위하게 문화를 잠식해가는 현상들이 걱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동차생활 이후 컴퓨터문화는 가족 단위에서 밀폐된 개인으로 사회관계를 더욱 축소시키고 있어요. 좋은 점은 미시적 권력들을 축적해서, 요즘 ‘안티조선운동’이니 ‘딴지일보’니 하는 것들이 있죠, 물론 아직은 한계가 많지만 이런 것들이 기성 질서에 압력을 가하는 일종의 유격전을 벌인단 말입니다. 그런 축적을 통해서 각 분야가 무정형한 연합들을 만들어나갈 수 있어요. 말하자면 우리가 주저하지 않고 대안미디어를 창조하는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도 대안적 미디어를 내놓자는 겁니다. 미디어를 민주화하고 대중화하자는 겁니다. 왜 제도언론이나 텔레비전 방송국만 이를 독점하느냐 이겁니다. 우리도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대중매체를 만들자는 거죠.

제 생각은 인터넷을 두려워하거나 경멸하지 말고 잘 활용하자는 겁니다. 그래서 저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등록도 하고 몇개 나라의 외국어로도 내보내자 해서 번역팀도 짜고 말이지요. 아직 우리에게는 할일이 있단 말이죠. 지금 제3세계는 먹고 살기는커녕 구매력도 없어요. 우리는 그래도 좀 나은 편이에요. 금융자본 돈 받아서 먹고 살 것도 생기고 국물도 좀 떨어지고 그래요. 1200만 노동자는 고통받기도 하지만 말이죠. 그러나 제3세계는 개발 이전 단계에서 질병과 굶주림으로 거의 멸종을 당할 것 같은 상태죠. 다 끝났다는 그런 판인데, 멕시코 치아빠스의 정글에서 마르꼬스(Marcos)가 속삭인단 말예요. 마르꼬스가 어떻게 합니까? 이미 인터넷 게릴라전을 벌였어요. 체 게바라 이후의 새로운 전술 개념이에요. 여러분 세대는 바로 그런 세대란 말이지요.

그러니까 젊은이들과 조금 늙은 우리가 연대해서 그런 새로운 운동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비관적이냐 낙관적이냐 하는 논의보다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냉혹한 현실에 입각해서 다시 태어나자는 것이죠. 할 얘기는 많지만, 이것으로서 정리되지 않은 제 객담을 끝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