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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21세기 문학의 향방: ‘창비시선 200’ 기념 대토론회

 

생태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그리고 시

 

 

나희덕

시인. 시집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가 있음.

 

 

90년대 이후의 시들이 독자적인 지형도를 그려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생태주의와 여성성에 대한 탐구가 그 밑그림을 이루는 중요한 성과임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주변적인 가치들의 복권은 그동안 거대담론에 가려진 시적 가능성을 발굴하고 새로운 시적 주체에 대한 모색을 가능케 했다. 생태주의와 여성주의는 이성과 남성 중심의 근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일 뿐 아니라 그에 대한 대안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특히 최근 활발해지기 시작한 에코페미니즘의 이론화 작업은 두 관점이 실천적 필요에 의해 결합할 뿐 아니라 자연과 세계에 대한 태도를 공유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물론 시에 있어서 양자의 자각적 결합을 보여주는 예는 아직 풍부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진정한 생태시가 여성적 가치에 대한 존중을 담고 있고 진정한 여성시가 대상과 언어에 대해 생태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접점을 확인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이것은 자연에 대한 파괴와 여성에 대한 억압이 같은 맥락에서 진행되어온 까닭도 있겠지만, 시적 언어가 존재하는 방식 자체가 어떤 장르보다도 생태적이고 여성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시라는 양식이 구현할 수 있는 본원적인 태도로서 ‘생태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의미를 천착해보는 것은 시의 현재적 역할과 존재방식에 대한 반성적 질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생태담론과 페미니즘담론의 활발한 유통과 생태시·여성시의 양적 증가가 반드시 우리 사회와 문학의 근본적인 전환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생태적’이라는 접두사가 붙은 것들의 일시적인 유행이 뿜어내는 악취가 도처에서 진동한다”1는 신랄한 비판이 생태학자인 머리 북친(Murray Bookchin)의 입에서 나올 만큼 생태주의의 번성이 또다른 역작용을 낳은 것도 사실이다. 시에 있어서도 범박한 소재주의나 새로운 유행에 편승한 문학상품이 양산되었으며, 직설적인 주장을 반복하거나 담론의 단순한 적용에 머무른 시들 또한 적지 않았다. 물론 그 당위적 요청의 긴박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그 시들이 보여주는 시적 언어로서의 취약성은 부차적인 결함 이상의 문제로 여겨진다. 더욱이 ‘환경시’ ‘생명시’ ‘생태시’ 등 장르의 명칭조차 통일되어 있지 못한 실정에서 어떤 작품을 기계적으로 생태시의 범주 속에 귀속시켜버릴 경우 그 작품이 내장하고 있는 미학적 특질의 복합성은 사상(捨象)되기 십상이다.

이러한 사정은 ‘여성시’를 논할 때도 마찬가지여서 그 분류나 가치평가의 기준이 페미니즘의 다양한 갈래만큼이나 각양각색이다. 그 다양한 입장들과 전개과정을 변별하며 생태시와 여성시 전반을 포괄하기에는 지면 사정도 필자의 능력도 부족하거니와, ‘생태시’ ‘여성시’라는 이미 범주화된 장르개념보다는 ‘생태적’ ‘여성적’이라는 말의 근본적인 의미를 중심으로 논의를 풀어가려고 한다.

 

 

나는 이제 그 눈의 순결을 의심하네

 

‘생태적’이란 말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자연이다. 생태주의는 우리에게 자연을 이용하고 지배하던 태도로부터 벗어나 자신이 자연의 일부이며 만물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라고 권유한다. 또 거대한 그물망과도 같은 자연의 순환적 질서를 되찾기 위한 실존적 노력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러한 생태적 상상력과는 달리 역사적 상상력은 자연해방보다는 인간해방을 강조하고 그것이 실현될 미래의 한 싯점을 기다린다. 그런 점에서 생태적 상상력과 역사적 상상력은 자연에 대한 태도가 사뭇 대조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생태계의 전면적인 위기나 세계사적 상황이 이 두 가지 상상력 모두를 위축시키거나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봄이 갱생과 부활의 장르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 현대 시인의 상징체계에 들이닥친 일대 재난”2이라는 도정일(都正一)의 진단은 현대 시인들이 겪고 있는 고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봄은 더이상 역사의 해방도 자연의 부활도 상징하지 않는다. 그리고 눈은 더이상 순결의 상징이 될 수 없다.

 

자연은 때로 저렇듯 소나무로 퍼렇게 눈을 뒤집어 쓰고

서 있네.

나는 이제 그 눈의 순결을 의심하네.

—이하석 「소나무」 전문

 

그러나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는 전언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아직 갈 수 있다고, 가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제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지만

아직도 숲속 골짜기에는

산 절로 물 절로 하는 호수들이 있긴 있는

것이다. 마을 뒷산 속에 있는

그 중 하나를 나는 황혼 무렵이면 찾는데

늘 산영이 잠겨 푸르게 물들어버린

호수 위로 우선 밀잠자리며 실잠자리들

편대 지어 날아오르고

아무런 욕심이 없어야만 열릴 것 같은

깊고 그윽하고 투명한 숲속의 호수는

물 위에서 제 몸을 잽싸게 튀기는

소금쟁이로도 잔물결 가득 일으킨다.

—고재종 「여름 다 저녁 때의 초록 호수」 부분

 

위의 두 시를 빌려 다소 거칠게 말해본다면, 오늘날의 생태시는 ‘의심’과 ‘낭만성’ 사이에 있다. 물론 시인의 관심이나 개성에 따라 다양한 층위가 있을 수 있겠지만, 생태에 대한 시적 관심은 대체로 이 두 경향으로 수렴된다고 볼 수 있다. 한편에서는 문명에 의해 여지없이 파괴된 자연 앞에서 느끼는 공포와 의심이, 다른 한편에서는 남아 있는 자연의 생명력에 대한 믿음과 낭만성이 동시대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심과 낭만성의 거리를 젊은 시인들에게서 찾아보자면,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고 말하는 유하와 “바람 부는 날이면 한계령에 가야 한다”고 말하는 박용하가 떠오른다. “욕망의 통조림 공장”인 압구정동이 도시문명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면, 나무들이 “몸 벗고 두 팔 들고 이백 킬로미터 행군하는” 한계령은 생명의 시원에 대한 동경을 보여준다. 그런데 유하의 경우에는 ‘압구정동’과 ‘하나대’라는 대조적인 공간이 한 내면 속에 중첩되어 나타나면서 해체와 서정이 서로 길항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모순은 유하뿐 아니라 문명의 편리에 깃들여 살면서 생태적 양식으로서의 시를 쓰는 시인들이라면 누구나 피해가기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근래의 생태시들을 보면 어느 한쪽으로 경사된 채 단순해지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실존에 잠재된 다양한 생태적 감각을 덮어둔 채 논리적인 차원에서만 전개되는 문명비판 시들이나, 생명의 질서를 위협하는 세력 또는 구조에 대해서는 방관하면서 자연을 미화하고 또다른 관념으로 신비화하는 생명시들이나, 현실의 총체적인 위기를 대변하고 극복하는 데 일면적이기는 양자가 마찬가지이다. 예술에 있어 단순화란 삶에 대한 중층적 인식을 포기한 안이함의 표지일 수 있고, 감정이나 주장의 과잉은 동일자 이외의 타자가 들어설 자리를 배제하기 마련이다. 원래 생태주의란 근대의 계몽성에 대한 근원적인 반성으로부터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생태시가 언어적 방식에 있어서 여전히 계몽적 한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상을 주는 것도 그런 피상성에서 비롯된다.

앞의 시에서 “나는 이제 그 눈의 순결을 의심하네”라는 구절이 훼손된 자연에 대한 아픈 자각을 보여주고 있다면, 이제는 생태시 속에 나타난 자연의 순결성에 대해서도 회의해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이러한 회의는 그동안 생태문제에 바쳐온 시적 노력과 성과를 무효화하기보다는 좀더 근본화하기 위한 것이다. 훼손된 자연이 여전히 우리에게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위장된 미화보다는 상실의 감각에 대한 깊은 일깨움을 통해서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연을 묘사하고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의심과 낭만성 사이의 긴장을 견디며 ‘자연으로서의 시’를 창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새는 날아다니는 자요 나무는 서 있는 자

 

그럼 ‘자연으로서의 시’를 창조한다는 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 속에 들어온 자연은 이미 자연 자체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진우는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은 ‘문화’에 가까운 개념이라고 하면서 이제는 지배의 대상도 신비의 대상도 아닌 문화적으로 해석된 자연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역설한다.3 여기서 다른 방식이란 우선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 자연의 시각에서 인간의 문제를 바라보아야 함을 의미하며, 이는 시의 내용뿐 아니라 언술방식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다음 시는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 여겨온 근대문명의 오만한 편견을 경쾌하게 전복시킨다.

 

새는 날아다니는 자요

나무는 서 있는 자이며

물고기는 헤엄치는 자이다

세상 만물 중에 실로

자 아닌 게 어디 있으랴

벌레는 기어다니는 자요

짐승들은 털난 자이며

물은 흐르는 자이다

스스로 자인 줄 모르니

참 좋은 자요

스스론 잴 줄을 모르니

더없는 자이다

—정현종 「자〔尺〕」 부분

 

이처럼 자연의 질서는 저마다의 본성에 충실하면서도 서로를 억압하지 않는 다양한 척도를 지니고 있다. 나아가 진정한 자는 스스로가 척도임을 의식하지 않을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지도 모른다. 시가 근본적으로 생태적인 것은 바로 그러한 공존과 생동의 상태를 가장 가깝게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물의 경계가 지워지고 안팎의 구별이 없어지는 순간 열리게 되는 끝없는 역동의 상태를 정현종(鄭玄宗)은 ‘인공자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한 편의 시가 시인이 매순간 감행하는 ‘천지창조’의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전존재와 감각을 동원한 언어적 기투가 필요한 것인가. ‘인공자연’을 지향하는 시의 언어란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자연과의 얼마나 큰 거리감을 전제로 한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절망과 충일을 동시에 체험하는 ‘인공자연’으로서의 시는 관념적 충만감으로만 채워진 ‘유사자연’보다는 ‘자연’에 가깝다. 아니, 그 ‘인공성’이 지닌 존재의 깊이를 통해 시는 순간적으로나마 자연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과 자연이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들이라 하더라도 그 역동성이 내밀한 생동의 상태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자가발전한 도취에서 비롯된 것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만일 실재감을 점점 잃어가면서 관념에 가까워지는 자연을 인위적으로 재현해놓은 것이라면 그 시는 또하나의 가상현실 외에 무엇이겠는가. 또 그러한 가상현실의 생생한 실감을 높이기 위해 동원된 과도한 수사는 사물들이 지닌 본래적 질서를 드러내기보다는 서정적 자아의 감정에 의해 일방적으로 채색된 시어들을 양산할 위험까지 지니고 있다.

따라서 자연의 생명력을 노래하고 생태적 관심을 표방하고 있다 하더라도 사물과 관계맺는 방식이 생태적이지 못하면 자연에 대한 또다른 대상화로 빠질 가능성은 늘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시적 주체는 자신의 감정으로 대상을 지배하고 영토화하기보다는 생겨나는 의미망에 부단히 틈을 냄으로써 대상을 해방시켜야 한다. 자연과의 합일을 보여주겠다는 의지와 욕망, 그것이 오히려 살아있는 자연이나 있는 그대로의 사물과 만나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차라리 자연과의 완전한 합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한 겸허한 절망이 생명의 광휘가 사라진 시대에 역설적으로 생명에 대한 개안을 가능케 하는 것은 아닐까.

 

 

우주적 감기의 시작이다

 

자연에서 생명의 광휘가 사라졌다는 것은 예술작품에 있어 아우라(Aura)의 상실로 나타난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일찍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아우라가 위축되어가는 현상에 주목하였는데, 그러한 현상은 예술작품뿐 아니라 현대인의 존재방식이나 지각작용 전반에 걸쳐 일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벤야민은 아우라를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어떤 먼 것의 일회적 나타남”4이라고 정의내린다. 그러면서 그는, 어느 여름날 쉬고 있는 사람이 문득 자신을 향해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를 바라보는 동안 그 산과 나뭇가지가 숨을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상태를 예로 든다. 그러나 기술적 사유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중력에 의해 움직이고 측정 가능한 대상이 되기 때문에 자연적 대상의 아우라가 현현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도 사물과 함께 호흡함으로써 일회적인 아우라를 포착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영역이 시일 것이다.

 

며칠 전부터 날씨가 쌀쌀하기 시작하더니 맞은편 석조 건물이 먼 잿빛 하늘 속으로 빨려들어가면서, 한 순간 땅덩이 전체가 번쩍 들어올려졌다가 다시 내려온다 이 가벼움 속에는 무언가 불편한 것이 있다 중심과 질서에 대한 배반, 그럴 때 나는 으슬으슬 추워지기 시작한다 싸늘한 공기와 내 살갗이 통정하는 것이다 식어가는 등골이 굳어가는 대지와 교신하는 것이다 우주적 감기의 시작이다

—이성복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31」 전문

 

이 시는 분명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공간에서 시작되지만, 확고하게 서 있던 석조건물이 갑자기 “먼 잿빛 하늘 속으로 빨려들어가면서” 현실적 공간에 균열이 생긴다. 그로 인해 “땅덩이 전체가 번쩍 들어올려졌다가 다시 내려온다”는 것은 중력의 법칙이 여지없이 깨어진 공간으로의 전이를 의미한다. 가까운 사물은 멀어지고 무거운 사물은 그 무게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한 현기증을 느끼며 시인은 “이 가벼움 속에는 무언가 불편한 것이 있다”고 말하는데, 거기에는 우리의 삶을 획일화하는 중심과 이성적 질서에 대한 배반 없이는 사물과의 새로운 교섭이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이성적 질서와 기술적 사유에 비추어 본다면 전도(顚倒)나 착란(錯亂)에 불과할 이런 체험이 오히려 만물과 “내 살갗이 통정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시는 잘 보여준다. 이 시뿐 아니라 이성복의 많은 시들은 대상에 대한 논리적 사유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독특한 분위기 속에서 사물과 내밀하게 만나는 감각의 직접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사물과의 이러한 교감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자신을 부단히 비우는 일종의 ‘방념(放念)’이 필요하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방념’이란 “모든 사물이 만나는 자유공간의 개방성에 자신을 열어놓고 맡기는 것”5으로서, 자신의 언어로 사물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스스로 말을 걸어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동성을 의미한다. 비록 생태적인 소재나 주제를 직접 다루지 않더라도 사물에 대한 이러한 태도를 보여준다는 것은 그의 시가 근본적으로 생태적 상상력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뒷받침해준다.

시인이 이 시에서 아우라의 숨을 쉬는 순간 느끼는 것은 ‘추위’에 가까운 감각이다. 이러한 떨림은 단순히 쌀쌀한 날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가 지배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인지할 때에 가지게 되는 원초적인 두려움이며,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을 내던지면서 비로소 접근하게 되는 사물의 깊이에 대한 발견이다. 그 존재론적 떨림을 느끼게 되는 순간을 시인은 “우주적 감기의 시작”이라고 부른다. 마치 정지용이 「春雪」에서 멀리 눈 쌓인 산을 바라보며 “문 열자 선뜻!/먼 산이 이마에 차라”라고 노래했던 것처럼.

 

 

내 등엔 역사가 없다

 

앞에서 생태적 지향을 지닌 시들조차 계몽적 한계로부터 그다지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했는데, 근대적 의식의 견고한 외피를 뚫고 내려가 자신의 무의식 속에서 새로운 현실을 발굴해낸 여성시인들의 활동은 그 한계를 넘어설 새로운 가능성으로 주목할 만하다. 특히 90년대 이후 여성시의 개화는 앞서 말한 시대적 변화도 한몫했겠지만, 무엇보다도 여성적 정체성에 대한 탐구를 당위적이고 추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실존적인 자기탐구와 연결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언술방식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통해 여성적 글쓰기의 독자성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 등은 휘어져 있다, 내 등엔 역사가 없다

나는 고개를 수그린다, 내 모가지엔 세계가 없다

내 등엔 역사의 한줄기 뼈가 새겨지지 않았고

내 모가지는 세계의 한 모형을 세우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두말할 나위 없이, 이 물렁한 삶의 순살에 한 그릇 질게 반죽되었다

—이선영 「자화상」 부분

 

남성들처럼 “역사의 한줄기 뼈”나 “세계의 한 모형”을 세우지 못했지만, 그 굽은 등과 수그린 고개가 여성들에게 더이상 순응의 표지일 수만은 없게 되었다. “내 등엔 역사가 없다”는 자각과 더불어 한 그릇 질게 반죽된 “이 물렁한 삶의 순살”은 여성시인들이 스스로를 발견해내는 질료였던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의 육체성은 이념적 언어로는 밟기 어려운 상상력의 회로와 다양한 타자들이 공존하는 생태적 공간을 가능하게 하였다. 여성시인들에게 있어 생태적 특성은 의식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거의 생래적이라 할 만한 대목이 있는데, 이것은 자연과 자신이 하나라는 사실이 관념적으로뿐 아니라 몸의 감각을 통해 직접적으로 체험되기 때문이다.

여성과 자연을 동일시하는 태도는 그 연원이 매우 오래된 것으로서, 가부장적 입장뿐 아니라 그것을 비판하며 여성적 정체성을 추구하는 입장에서도 두루 나타나고 있다. 프란씨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자연을 처녀에 비유하면서 그 자궁 안의 쓸모있는 것들을 캐내기 위해 과학이라는 연장을 깊숙이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비유에서 나타나듯이 여성과 자연을 지배와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게 된 데에는 근대 과학혁명의 영향이 매우 크다. 그에 반해 에코페미니즘은 서구의 발전 개념과 가부장제가 자연─여성의 식민화를 통해 이루어져왔음을 비판하고, 그 이분법적 사고에 의해 끌어내려진 여성적 가치의 회복을 모색한다. 생태주의와 페미니즘의 상호연관성도 여기서 생겨난다. 그런데 시에 있어서 생태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만남은 단순한 이념의 결합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데 어려움이 있다. 시인의 몸 자체가 살아있는 생태적 공간이 될 때 그것은 가능해진다.

 

나는 지금 두 손을 들고 서 있는 거라

뜨거운 폭탄을 안고 있는 거라

 

부동자세로 두 눈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는 거라 빠빳한 수염털 사이로 노랑 이그르한 빨강 아니 불타는 초록의 호랑이 눈깔을

 

햇빛은 광광 내리퍼붓고

아스팔트 너무나 고요한 비명 속에서

 

노려보고 있었던 거라, 증조할머니 비탈밭에서 호랑이를 만나, 결국 집안을 일으킨 건 여자들인 거라, 머리가 지글거리고 돌밭이 지글거리고, 호랑이 눈깔 타들어가다 못해 슬몃 뒤돌아 가버렸던 거라, 그래 전재산이었던 엇송아지를 지켰고, 할머니 눈물 논밭에 굴러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최정례 「햇빛 속에 호랑이」 부분

 

이 시에서 화자는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아스팔트 위에 서 있다.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 동안 햇빛의 “조용한 비명”은 그녀를 비롯해 모든 여성들이 안고 살아온 “뜨거운 폭탄”으로, 신호등의 불빛은 “불타는 호랑이 눈깔”로 변한다. 그러면서 도시에서의 일순간은 구비적 상상력이라는 이스트 덕분에 밀가루 반죽처럼 한없이 늘어나 여성의 오랜 역사를 끌어안는다. 앞에서 인용한 이성복의 시가 공간적 전도를 통해 우주적 질서를 감지하는 순간을 포착했다면, 이 시에서는 공간의 혼융과 시간의 순환이 함께 일어난다. 그리고 앞의 시에서는 그러한 체험이 방념을 통해 우연히 임하는 어떤 것에 가까웠다면 이 시에서는 한결 의식적이다. 뜨거운 햇빛을 안은 채 “부동자세로 두 눈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는” 화자의 몸을 매개로 문명적 공간과 원시적 공간이, 현재와 과거가 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여성에게 끊임없이 팔과 다리를 내놓으라고, 머리통 염통 콩팥까지 다 내놓으라고 강요해온 그 희생과 능욕의 역사에 대해 목소리 높여 비판하지 않는다. 다만 구비적인 이야기의 구조와 어법을 통해 고통스러운 현실을 해학적으로 전달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집안을 일으킨 건 여자들”이라고 말할 때조차 그것이 직설적이고 배타적인 주장으로 들리지 않는 것은 대상을 끌어안는 포용력과 다층적인 의미망에 힘입어서일 것이다. 이 시뿐 아니라 많은 여성 시인들의 시에서 풍경이나 자연은 그 자체로 묘사되지 않는다. 존재 전체가 움직이는 사물들 속으로 들어가 그 내면을 읽어내고, 거기에 자신들의 기억을 적어넣는다. 그 기억들은 현실적인 삶에서 나오기도 하고, 무의식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기도 한다. 그것은 아주 개인적인 기억이기도 하고, 하나의 사물 속에 오랫동안 깃들여 있던 집단적인 역사이기도 하다. 이렇게 시적 주체를 끊임없이 분산·해체하면서 나아가는 시적 육체에는 이미 안팎의 구별도, 주체와 대상의 분리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꿈과 현실이 중첩되어 나타나거나, 과거와 미래가 현재의 공간 속에 자연스럽게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사물에서 다른 사물로 옮겨가는 환유적(換喩的) 과정 자체가 여성 시인들에게는 ‘자연으로서의 시’이다.

 

 

떠도는 환유의 목소리들

 

환유적 글쓰기에 대한 관심을 가장 적극적으로 보여준 시인으로 김승희와 김혜순을 들 수 있다. 김승희(金勝熙)의 「떠도는 환유」 연작은 삶속에 부유하는 다양한 목소리들을 그대로 들려준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하나로 겹쳐지는 은유와는 달리 환유의 목소리들은 계속 미끄러지면서 존재를 휘돌고 있다. 그 부유하는 소리들을 밖으로 나가게 해주는 것이 시인의 임무이기에, 그녀는 “갇혀 떠도는 먼지처럼/생 비슷한 것들을 이루고 있”는 그것들을 향해 “무어라고 불러야 좋을까” 고민한다. “찜통 같은 똥통 위의 좁다란 현세/그 두 널판지에/간신히 양다리를 걸치고 서서/박꽃처럼 뿌우옇게 꽃피어 오르며/희미한 벽보 속에서/나를 찾는/몽타주된 전생의 소리를.”(「떠도는 환유 4」)

그리고 이런 탈중심화의 욕망이 좀더 분명한 문명비판의 목소리를 띠고 나타난 것이 「유목을 위하여」 연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연작에서도 확인되듯이 김승희가 문명이나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을 통해 생태주의적 지향을 구체화한다면, 김혜순은 문체의 전복을 통해 언어 자체에 생태적인 질서를 부여하고자 한다. 김승희가 은유와 환유를 혼합해 쓰면서 메씨지의 전달에 주력한다면, 김혜순은 소재나 내용보다는 환유적 말하기 방식을 여성성의 존재론적 근거로 삼아 아버지의 언어질서를 해체·전복시킨다. 그러면서 김혜순은 시에 있어 환유적 정황들을 주로 구사하는 것과 은유적 이미지를 주로 구사하는 것은 “단순히 어떤 수사를 즐겨 쓰느냐 하는 차이가 아니라, 세계관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6이라고 말한다.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김혜순 「잘 익은 사과」 전문

 

이 시의 앞부분에서 들려오는 다양한 소리들은 전통 서정시의 문법에서 볼 때는 필연적 질서도 없이 배열된 환상들의 조합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인과관계 없이도 사물들과 그것이 내는 소리들은 무질서하게 부유하기보다는 서로의 접촉을 통한 친연성을 가지고 있다. 시인이 부여한 의미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살아있음에 의해서. 이처럼 김혜순의 시는 단일한 서정적 자아가 의미를 보태고 쌓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시적 주체의 자리를 대상에게 내어준 채 의미를 해체하고 분산시키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이 시에서처럼 존재를 태운 자전거 바퀴가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을 때마다 그녀는 그만큼 고향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고향에서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는 모습은 대지의 어머니 가이아(Gaia)를 연상시킨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여성성에 대한 강한 자의식과 환유적 문체를 결합한 김혜순의 최근 시들이 생태적인 세계와 자연스럽게 만나는 한 지점을 보여준다.  

이제까지 여성시와 생태주의와의 연관 중에서 그동안 별로 논의되지 못했던 환유적 글쓰기의 가능성을 중심으로 다루었지만, 그것은 여성시의 풍요로운 지반 중 일부일 뿐이다. 문체적인 자각이나 실험성 대신에 좀더 현실적인 맥락에서 삶의 문제들을 진솔하게 담아냄으로써 물화된 세계를 극복할 생명력을 불러일으키는 시인들도 적지 않다. 강은교 천양희 최승자 김정란 황인숙 양애경 조은 허수경 박라연 이진명 김선우 등의 시세계는 여성성에만 국한되지 않는 우리 시의 자산으로서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의 시세계를 몇개의 수식어로 한정할 수 없듯이 여성적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방식 또한 매우 다양하며 대립적이기까지 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여성이 생물학적 특성상 남성보다 자연의 질서에 더 가깝다고 보는 견해와 그것을 생물학적 본질주의라고 비판하면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문화적·사회적 특성에서 찾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모성적 원리로서 조화와 균형, 보살핌의 태도를 강조하는 입장과 그것을 남성이데올로기에 대한 순응적 태도로 치부해버리는 입장이 있다. 또 전세계적인 환경파괴 및 성차별, 인종차별, 계층차별 등을 동일한 궤도에서 바라보며 사회적 실천에 기울이는 쪽이 있는가 하면, 내면의 변화에 촛점을 두고 새로운 영성의 발견이나 여성적 글쓰기의 전략을 개발하는 데 주력하는 쪽도 있다.

이러한 다양성은 여성시나 여성운동에 있어서 때로는 전략적인 불편함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생산적이고 생태적인 가능성을 그만큼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내 안에 무수한 내가 살고 있는 불편함은 단일한 힘 아래 무수한 존재가 잊혀지는 편안함보다 더 생태적이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언제나/그렇게도 많은 나를 데리고/선인장이 양쪽으로 빽빽하게 심겨진/가시통로의 좁은 길을/우왕좌왕 찔리면서 걸어간다는 것”(김승희 「떠도는 환유 3」)이라고 할 때, 병든 나무들 사이로 걸어가는 혼돈과 통증을 단순화시키지 않고 온몸으로 겪어내려는 모든 시가 어찌 진정한 의미에서 생태적이고 여성적이라고 할 수 없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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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머리 북친, 문순홍 옮김 『사회생태론의 철학』, 솔 1997, 136면.
  2. 도정일 「풀잎, 갱생, 역사」,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민음사 1994, 25면.
  3. 이진우 「문화로서의 자연─생태문학의 철학적 의미」, 『현대문학』 2000년 7월호 참조.
  4. 발터 벤야민, 반성완 옮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1983, 204면.
  5. M. Heidegger, Gelassenheit, Pfullingen: Neske 1959, 57면; 이진우 『녹색 사유와 에코토피아』, 문예출판사 1998, 167면에서 재인용.
  6. 김혜순 「여성성, 모성, 환유」, 『문학사상』 1999년 12월호, 12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