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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점검 | 의료대란과 의료개혁
의료다원주의 관점에서 본 의료개혁
박형욱 朴亨旭
예방의학 전문의.
1. 윤리적 인간론과 윤리적 제도론
의료계의 2차파업과 관련하여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이하 ‘인의협’)와 한국가톨릭병원협회는 각각 성명서를 발표했다. 두 단체는 의료계의 파업을 반대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한쪽은 ‘인도주의’의 이름으로, 다른 쪽은 ‘가톨릭윤리’의 이름으로. 그러나 두 개의 성명서가 사회적으로 수행하는 기능은 전혀 다르다. 일반 시민이 인의협의 성명서를 읽으면 의사들을 윤리적으로 비난하겠지만, 한국가톨릭병원협회의 성명서를 읽으면 비윤리적 의료현실을 만들고 또 이를 방치해온 정부의 정책에 대한 성직자들의 분노를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윤리적 의료는 분명히 우리가 지향해야 할 한 지점이다. 그러나 윤리적 의료가 ‘법적 강제’와 ‘윤리적 강요’로 이룩될 수는 없다. 우리 사회는 사회적 사건에 대하여 근본적인 진단과 처방이 이루어지기보다는 항상 윤리적 비난과 처방이 압도하는 뿌리깊은 병폐를 갖고 있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윤리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윤리주의는 언뜻 손쉬운 해결을 가져오지만 문제의 본질을 덮어 결국 사회적 불합리를 재연하거나 또다른 불합리를 야기한다. 만일 언론과 시민단체가 의료사태에 대해 윤리적 인간론이 아니라 윤리적 제도론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또 이를 시민에게 전달했다면 윤리적 의료를 만들어나가는 데 커다란 힘이 되는 시민사회의 진지한 토론을 유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2. 의약분업과 의료(보험)체계
의약분업으로 드러난 파행적 의료현실의 뿌리는 우리나라의 의료(보험)체계에 있다. 따라서 현재의 의약분업과 의료사태에 대한 판단은 우리나라의 의료(보험)체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와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일반적으로 의료체계를 이해하는 데 시장기능의 허용정도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뢰머(Milton I. Roemer)는 이러한 요소를 감안해 전세계의 의료체계를 기업가형, 복지지향형, 포괄적 의료써비스형, 사회주의형의 네 가지로 구분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정부가 의료부문을 완전히 시장에 방임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1도 있으나 이는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개발독재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비합리적 정책을 법의 이름으로 강요한 법의 도구화경향이 의료부문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행정법(제)을 관통하는 가장 큰 특성인 법의 도구화경향은 사실상 우리나라의 의료공급체계를 좌우하는 의료보험법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김창엽(金昌燁)이 의료대란의 해법과 관련해 우리나라의 의료씨스템을 기형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우리의 의료체계가 단순한 시장형이 아님을 암시해준다.2
김창엽은 미국은 ‘시장적’ 의료씨스템, 영국은 ‘공영’ 의료씨스템, 프랑스·독일 등은 ‘중간형’ 의료씨스템인데, 우리의 의료씨스템도 외형적으로는 ‘중간형’이지만, 실제 내용은 매우 기형적이라고 설명한다. 즉, 같은 중간형인 일본만 해도 의료체계의 근간은 공공의료기관인 데 반해, 우리나라는 민간의료기관이 압도적으로 많은 상황에서 외형적으로는 ‘중간형’을 선택함으로써 대단히 기형적인 의료체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의료씨스템에 대한 정부의 역할이 최소한으로 머물러 있어, 의료기관의 사적 성격이 가장 큰 문제가 된다고 한다. 따라서 앞으로 시장형을 택할 것인지, 공영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명실상부한 중간형을 택할 것인지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하며, 이를 위해 국민·의료공급자·정부 3자가 이익과 손해를 주고받는 ‘빅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같은 분석은 ‘윤리주의’에서 벗어나 객관적·과학적인 시각으로 의료사태를 바라봄으로써 문제의 근원적 해결을 지향하는 사회적 논의를 촉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이다. 물론 김창엽의 분석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의 관점은 예방의학자(보건관리학자)3들의 전통적 견해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김대중정부 출범 이후 의약분업 등 의료개혁을 주도하고 있는 이른바 ‘의료개혁세력’4은 대체로 이러한 관점을 수용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의료체계의 왜곡과정에서 정부가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우리나라의 민간의료기관이 어떠한 성격을 지녔는지를 균형있게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분석이 현재의 불균형적이고 현실성 없는 의료개혁의 근거가 되며, 이 과정에서 의료인들에게 과도한 제도적·윤리적 책임을 지우고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른바 ‘의료개혁세력’이 현 의료체계를 해석하는 관점을 ‘고전적 의료개혁론’이라 부르고, 이의 한계와 대안을 논의해보고자 한다.
3. 의료체계의 왜곡과 정부의 책임
일반적으로 정부는 ‘재정투자’와 ‘규제’라는 두 가지 수단을 중심으로 정책을 수행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의료체계에 대한 정부의 정책은 ‘재정투자’ 대신에 거의 전적으로 ‘규제’라는 수단에 의존해왔으며, 이러한 불균형이 의료체계를 왜곡시킨 가장 큰 원인이다. 그런데 고전적 의료개혁론에서는 의료체계에 대한 국가의 역할이 최소한에 머무르고 있다고만 판단한다. 이러한 분석은 최소한의 재정투자 이면에 최대한의 수준을 넘어 정당성을 잃고 폭력적인 형태로 강요되었던 정부의 규제를 간과한 것이다.
물론 의료부문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경제학적 측면에서는 시장실패(market failure)를 이유로, 법적인 측면에서는 공공복리를 위한 기본권 제한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된다. 그러나 경제학적 측면에서 볼 때 시장실패를 치유하기 위한 정부의 개입이 적절하지 않을 경우 정부실패(govern-ment failure)가 발생한다는 점에서, 법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공공복리를 위한 기본권 제한이 과잉금지의 원칙에 위배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에서 모든 개입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의료부문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 지나치게 적었는지 혹은 지나치게 과도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존재한다.5 그러나 생존이 시장에 맡겨진 상황에서 아무리 공익을 명분으로 한다 하더라도 정부가 개인의 영업에 대해 원가 이하의 가격6을 강제한다면, 이를 두고 정부의 개입이 없다거나 정부의 개입이 적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것은 시민의 인권과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폭력적이고 과도한 규제라고 보아야 한다.7
한편 조병희(趙炳熙)는 그동안 정부가 의료수가 규제를 통해 의료인들의 의료행위를 간접적으로 통제했을 뿐, 의료의 생산방식에 대하여 직접적인 통제를 가한 적이 없다고 한다.8 그리고 지난 수십년간 누려온 ‘시장의 자유’를 정부가 합리적으로 통제하려는 데 대한 의사들의 거부가 명목상 ‘의권’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고 분석한다.9그러나 이러한 그의 주장은 의료보험법체계를 진지하게 관찰하지 않고 부분적인 현상만을 확대해석한 오류이다. 예를 들어 정부는 그동안 의료보험법(실질적으로는 보건복지부 고시)으로 보험적용을 받는 급여 의료행위를 설정한 뒤, 나머지 의료행위 중 일부만을 합법적 비급여 의료행위라 규정하고 그외의 모든 의료행위는 불법적 의료행위(이른바 ‘임의비급여’)로 규정지었다. 결국 구조적으로 상당수의 의료행위(대부분 양질의 의료재료와 최신기술)가 의학적으로 타당하고 환자의 동의를 얻는다 해도 불법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규제는 의료의 생산방식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를 의미한다.
보험급여 의료행위에 대한 비합리적 심사기준 역시 수많은 의료인을 범죄자로 만들면서 의료의 생산방식을 통제하고 있다. 의료보험법은 보험 급여의료의 수준을 ‘보편적 진료’라는 말로 표현하지만, 열악한 보험재정 때문에 그것은 실질적으로 ‘저질진료’가 되어왔다.10 즉 부당진료·과당진료의 판정이 너무 낮은 수준의 의료를 기준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1999년도에 서울대학교 병원이 부당청구 1위(9억 3200만원), 과잉청구 2위(30억 8800만원)를 기록했다.11 물론 부당청구·과당청구가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기본적으로 국가에서 생존을 책임지는 서울대학교 병원의 의사들이 그토록 부당청구·과잉청구 행위를 저질렀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12 그것은 기본적으로 비합리적 심사기준을 강요하는 의료보험법체계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종합하면, 지금까지 정부는 의료보험법으로 ① 모든 의료기관을 강제로 요양기관으로 지정하고 ② 비급여 의료행위를 포함한 거의 모든 의료행위의 내용을 통제하며 ③ 거의 모든 의료행위의 가격을 통제하고 ④ 거의 모든 의료행위의 정당성을 심사하는 4단계의 중층적 규제를 동원해왔다.13 이는 슈퍼마켓이나 중국음식점 등 일반적인 자영업자들이 감내하는 규제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강력한 규제이다. 물론 의료부문에 대한 정부의 규제는 없을 수도 없고 없어서도 안된다. 그러나 정부는 열악한 보험재정의 문제점을 숨기기 위하여 폭력적 저수가정책과 비합리적 심사기준을 내용으로 하는 의료보험정책을 폄으로써, 규제의 한계를 벗어난 것은 물론이고 의료체계의 왜곡과 규제의 악순환을 초래하고 있다. 현실적 이해관계가 전혀 다른 개원의·봉직의·전공의·대학교수 들이 한 목소리로 ‘의권(진료권)’을 외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폭력적 규제 속에서 자의반·타의반으로 의료체계의 왜곡에 가담하면서 쌓인 억눌린 심정, 정상적 진료행위가 부당청구·과당청구로 매도당해온 데 대한 분노의 한 표현이 바로 ‘의권(진료권)’인 것이다.
4. 민간의료기관의 공적 성격과 의료체계 운영원리의 부정합성
고전적 의료개혁론은 민간의료기관의 ‘사적 성격’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의 민간의료기관은 소유자 자체는 민간이지만 정부의 강력한 규제 속에서 실질적으로는 공공의료기관에 준하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방의학자들은 전통적으로 민간의료기관의 ‘공적 성격’을 외면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그리고 이는 이 사회에 대한 민간의료기관의 기여는 외면하고 그 부조리한 면에 대해서만 비난의 칼날을 세우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의 불균형적 시각의 근원적인 한 뿌리가 되고 있다. 하지만 민간의료기관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공적 성격을 지녔다고 보아야 한다.
첫째, 정부는 요양기관 강제지정 제도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의료의 공공성을 들고 있다. 민간의료기관의 공적 성격은 이러한 명분하에 강제적으로 의료보험에 동원되었다는 사실 자체로 확인된다. 둘째, 원가에도 모자라는 의료보험수가로 20여년간 의료보험에 강제로 동원되었다는 사실로도 민간의료기관의 공적 성격은 확인된다. 셋째, 민간의료기관은 매우 강력한 규제 속에서 다른 자영업자와는 달리 공급하는 써비스의 종류와 가격을 주도적으로 결정할 수 없었다. 넷째, 민간의료기관은 의료수가에 대한 규제 등에서 공공의료기관과 동일한 규제를 받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공의료기관과 달리 민간의료기관은 그 생존을 스스로 도모해야만 했다.
한편 고전적 의료개혁론은 의료공급자의 존재양식(민간의료기관의 압도적 비중)을 파행적 의료현실의 근본적 원인으로 적시하고 있다. 물론 의료공급자의 존재양식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공공의료기관을 확대하지 않으면 파행적 의료현실을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극단적이고 획일주의적인 생각이다. 이는 ‘공영’씨스템을 운영하는 영국의 개원의와 ‘사적 성격’이 지배하는 우리의 개원의를 비교하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영국이나 우리나라나 개원의들은 모두 자영업자이다. 그런데 우리의 의료체계는 개원의를 원가에도 못 미치는 수가로 의료보험에 강제로 동원했으면서도, 생존은 스스로 해결하고 의료사고 발생시에도 스스로 책임지도록 하는 이중성을 띠고 있다. 반면, 영국은 자영업자인 개원의를 공적 의료씨스템에 편입시키는 대신 생존을 보장해주며, 의료사고가 발생했을 때도 일차적으로 NHS(National Health System)에서 먼저 보상해준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볼 때 우리나라 의료체계의 왜곡은 민간의료기관의 압도적 비중보다는 의료체계 운영원리의 부정합성에 더 큰 원인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5. 의료획일주의와 의료다원주의
의료자본주의 대 의료사회주의의 시각에서 의료체계를 ‘시장형’ ‘중간형’ ‘공영’으로 바라보는 고전적 견해는 국가권력이 ‘획일적’ 체제를 폭력적으로 강제한 우리나라 의료체계의 특성을 전혀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의료체계의 획일적 특성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관점에서 그 의미가 새롭게 이해되어야 한다.
첫째, 우리의 의료체계는 합리적 환자보호를 넘어서 환자의 자유로운 선택권을 박탈하고 국가가 모든 것을 간섭하고 결정하는 극단적 형태의 ‘부권적(paternalistic) 의료체계’로 변질되었다. 때문에 환자 자신이 돈을 더 부담해서 양질의 진료를 받기를 원해도 국가가 의료보험재정을 이유로 허락하지 않으면 불법의료행위가 된다.14 이는 ‘공영’ 의료씨스템이라는 영국의 의료제도조차 갖고 있지 않는 기이한 특성이다. 예를 들어 ‘공영’ 의료씨스템을 운영하는 영국에는 NHS 밖에서 운영되는 사병원(private hospital)이 존재하며, 따라서 환자가 오래 기다리기가 싫다거나 양질의 의료를 원하면 자신의 부담으로 이러한 의료써비스를 구매할 수 있다. 둘째, 우리나라 의료체계의 획일적 특성은 의료체계의 왜곡을 가속화했다. 예를 들어 의료보험 도입시 원가에도 못 미치는 의료보험수가를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 요양기관 강제지정제도는, 지금까지 합리적 수단(원가+적정이윤)이 아니라 일방적인 통제와 명령으로 의료체계가 운영되도록 함으로써 오늘날의 극단적인 의료체계 왜곡의 근원이 되었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보았을 때, 의료개혁 논의는 어떠한 제도 자체의 도입보다는 그 제도가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토양의 문제에 집중되어야 한다. 즉 미국식 제도보다 영국식 제도가 더 우수하다는 차원의 논의가 아니라, 영국식 의료제도의 토양은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지, 혹은 그것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이 필요한지에 대한 논의가 더 절실한 것이다. 예를 들어 포괄수가제를 도입하기 이전에 그 제도가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토양의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 우리의 의료체계는 포괄수가제에 비하여 양질의 의료써비스가 특징이라는 행위별 수가제마저도 질 낮은 의료로 둔갑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의료자본주의 혹은 의료사회주의라는 특성보다는 일방적 통제와 명령을 가능하게 하는 획일적 의료씨스템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의료자본주의 대 의료사회주의라는 관점보다는 의료획일주의 대 의료다원주의라는 관점이 우리의 현실을 풍부하게 드러내주며, 올바른 의료개혁 담론을 형성해줄 것이다. 순수자본주의와 순수공산주의의 싸움을 보는 듯한 의료개혁 논의는 이제 그쳐야 할 때이다.
6. 고전적 의료개혁론의 한계와 문제점
이상에서 살폈듯이, 고전적 의료개혁론은 민간의료기관의 공적 성격을 외면하고 사적 성격만을 거론하며, 의료체계 운영원리의 부정합성은 인식하지 못하고 민간의료기관의 압도적 비중만을 문제삼고 있다. 때문에 고전적 의료개혁론은 민간의료에 대한 규제 강화와 공공의료기관의 확대를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닌다.
첫째, 고전적 의료개혁론의 제안은 현실적 대안이 되기 매우 어렵다. 공공의료기관의 확대를 위해서는 ① 민간의료기관을 공용수용하거나, ② 정부의 재정투자로 공공의료기관을 많이 세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러나 전자는 시장경제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위헌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므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한편 후자는 정부 재정정책의 변화를 통해 어느정도 가능하겠지만, 그 이상을 위해서는 국민의 조세부담을 늘려야 한다는 어려움이 존재한다. 또 공공의료기관이 그렇게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 고전적 의료개혁론은 규제로 발생한 문제를 규제로 풀겠다는 비합리적 주장을 펴고 있다. 예를 들어 3차 의료기관의 외래기능을 폐쇄함으로써 의료전달체계를 바로잡겠다는 발상이 그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이 대학병원인 3차 의료기관에 대한 환자 집중 현상은 획일적 규제가 아니라 국가의 재정투자가 동반된 자율적 규제를 통해서 해결할 문제이다. 대학병원에서 환자 진료에 몰두하지 않고도 ‘교육’과 ‘연구’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환경이 된다면 대학교수들은 1,2차 의료기관에서 진료해야 할 환자를 유치하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다.
셋째, 고전적 의료개혁론은 정치권에 수용되면서 공공의료에 대한 투자가 생략된 기형적 의료개혁 담론으로 변질되고 있다. 원래 고전적 의료개혁론에는 공공의료에 대한 투자의 한 형태로 의료보험재정을 확충하기 위한 정부의 재정지원이 포함되어 있으며, 의료계 역시 보험재정의 확충이 의약분업의 성공을 위한 필수요소임을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외면한 채 의약분업을 추진했다. 현 의약분업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또다른 형태의 투자 없는 규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포괄수가제 등 정부가 추진하는 의료개혁이 최소한의 균형감각도 없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7. 새로운 의료개혁 담론을 위하여
현재 우리나라의 의료체계는 지극히 왜곡된 채 시민의 건강권을 보장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같은 의료체계의 개혁을 위한 사회적 합의에 이르지 못함으로써 많은 시민과 의료인이 커다란 고통을 겪고 있다.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시민의 건강권을 보장할 수 있는 의료개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의료체계를 사적 의료와 공적 의료로 분화시켜 그 구성원리를 일관되게 하고, 통제와 명령이 아닌 유도와 조정을 통해 의료체계를 운영해야 한다.
첫째, 의료체계는 사회구성원의 능력과 수요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구성되어야 한다. 즉, 스스로 의료비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은 국가에서 책임지며, 어느정도 재정적 능력이 있는 사람은 사회적 연대(사회보험)를 통하여 의료써비스를 제공받고, 양질의 의료써비스를 제공받을 재정적 능력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해결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공적 의료와 사적 의료의 양 날개를 가진 의료체계를 구성해야 한다.15 물론 시민사회와 의료인은 공적 의료가 의료체계의 중심이 될 수 있도록 사회적 투자와 정부의 재정정책을 유도하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둘째, 각각의 의료체계 안에서는 일관된 운영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운영원리의 부정합성이 우리의 의료체계를 왜곡시킨 큰 원인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적 의료와 사적 의료에는 각자의 운영원리가 일관되게 적용되어야 한다. 즉, 공적 의료는 수가를 통제하되, 의료기관의 적정한 운영을 보장해야 할 것이며, 의료사고, 특히 무과실 의료사고 발생시 국가나 보험자가 일차적으로 책임지고 배상해야 한다. 다시 말해, 생존에 대한 보장과 적절한 인쎈티브를 매개로 민간의료기관을 공적 의료씨스템으로 편입시키는 것이다. 또한 공적 의료씨스템 안에서 피보험자(시민)는 자신이 받을 급여(권리)를 고려하여 자신이 부담할 보험료(의무)의 수준을 보험자와 함께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반면 사적 의료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일반기업이 감내하는 이상의 규제를 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국가 혹은 보험자가 공적 의료를 위한 적절한 하부구조와, 민간의료기관이 공적 의료씨스템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적절한 인쎈티브 구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셋째, 민간의료기관은 각각의 형태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의료체계가 왜곡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국가(보험자)가 통제와 명령으로 의료체계를 운영해왔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국가가 요양기관 강제지정제도를 통해 모든 의료기관을 공적 의료로 통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료기관이 생존을 보장받는 대신 공적 의료 형태로 남을 것인지, 생존이 불확실하지만 양질의 의료로 승부를 걸 수 있는 사적 의료 형태로 남을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어야 이러한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공영 의료씨스템을 운영하는 영국도, 우리가 의료보험제도를 벤치마킹한 일본도 의료인이 원할 때는 NHS나 의료보험체제 밖에서 의료기관을 운영할 권리가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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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춘 「의사의 ‘권리’와 의료의 공공성」, 『작가』 2000년 가을호, 156〜57면↩
- 김창엽 「기형적 의료체제가 ‘파국’ 불렀다」, 『주간조선』 2000.8.24. 김창엽은 1999년 7월 13일 경실련 주최 ‘시민의 참여를 통한 21세기 의료개혁방안에 대한 씸포지엄’의 주제발표 「적정의료를 위한 의료정책과 행정개혁의 방향과 과제」에서도 이와 같은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주간조선』에 기고한 글은 짧지만 핵심적인 사항을 담고 있으므로 필자는 이를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 의학은 일반적으로 기초의학과 임상의학으로 구분된다. 예방의학은 기초의학의 한 분야로 인구집단을 대상으로 인간의 건강과 질병을 연구하는 분야이며, 그중 한 분야인 보건관리학은 의료보험과 같은 의료정책과 보건사업 등을 대상으로 한다.↩
- 김창엽의 견해는 현 의약분업을 주도한 김용익(金容益)의 ‘의료개혁 빅딜론’과 거의 동일하다.↩
- 예를 들어 이규식은 의료체계의 비효율을 지나친 관료제적 통제와 연결짓는 반면(이규식 「의료보장제도의 과제와 경쟁전략」, 『건강보장연구』 1997 제1호, 104〜24면), 조병희는 의료체계의 비효율이 정부의 무간섭(non-intervention)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조병희 『의료문제의 사회학—한국의료체계의 모순과 개혁』, 태일사 1999, 287〜94면). 물론 CT, MRI와 같은 고가장비의 경쟁적 도입이라는 현상을 본다면 ‘정부의 무간섭’이라는 표현은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의료체계에 대한 정부의 개입에 대한 판단은 부분이 아닌 전체의 관점에서 판단해야 한다.↩
- 정부에서는 의료보험수가가 원가의 80% 수준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의료계에서는 의료보험수가의 원가보전율이 이보다 훨씬 낮다고 판단하고 있다.↩
- 따라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 일부 시민단체가 ‘의료기관의 투명성’을 구실로 의료보험수가가 원가의 80%라는 정부의 고백을 차단하는 것은, 해결해야 할 사안의 우선순위를 잘못 파악함으로써 시민의 권리를 시민의 이름으로 침해하는 것이며, 그 단체의 활동이 집단이기주의의 한 형태인 시민이기주의에 근거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 조병희, 앞의 책 287〜94면.↩
- 조병희·김창엽·이왕준·이종찬 긴급좌담 「한국의료, 무엇이 문제인가」, 『당대비평』 2000년 가을호 참조.↩
- 신현호 「한국사회 의료부문 정상화를 위한 의료보험 제도의 합리화 연구」, 한국의료법학회 씸포지엄 발제문(1998.2), 30〜45면.↩
- 『한겨레』 2000.9.22.↩
- 서울대병원 교수·전임의·전공의협의회의 반론문 중 일부분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말하는 소위 과잉진료·부당진료란 그 실체를 알면 알수록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항암제를 쓸 때 심한 구토를 억제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항 구토 주사제를 써야 하는데, 이는 하루밖에 보험 인정이 안되고 그 이상 쓰면 불법입니다. 백혈병환자는 혈액응고 수치가 아무리 낮아도 쓸 수 있는 신선동결혈장의 수혈량은 8봉지뿐입니다. 그 이상을 쓰면 의사는 부당청구의 주범이 됩니다. 서울대병원 의사들은 환자를 살리는 길이라면 기꺼이 과잉진료를 계속 하겠습니다.”(『조선일보』 2000.9.27 광고)↩
- 박형욱·한동관·황덕남 「헌법적 질서에서 바라 본 의료보험관련법의 변화」, 『한국의료법학회지』 1999년 6권 1호, 23〜39면.↩
- 구 의료보험법제는 요양기관이 허가되지 않는 임의비급여를 시행할 경우 환자의 동의 여부를 불문하고 전액 환불조치하고 최고 10배의 과징금을 부과하도록 규정하고 있다(구 의료보험법 제77조, 진료비심사지침집). 또한 ‘국민건강보험 요양급여의 기준에 관한 규칙’(보건복지부령 158호, 2000.6.30)은 임의비급여의 시행시 요양기관의 업무정지나 과징금처분을 규정하고 있다.↩
- 한동관·손명세·박형욱·박민 『의료보험법 분석』, 동림사 1998, 10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