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문학상
제15회 만해문학상 발표
만해 한용운 선생의 업적을 기념하고 그 문학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창작과비평사가 제정한 만해문학상의 제15회 수상자가 심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선정되었음을 알립니다. 시상식은 11월 17일(금) 오후 6시 프레스쎈터 국제회의장에서 백석문학상·신동엽창작기금·창비신인소설상·창비신인평론상과 함께 열립니다.
■ 제15회 萬海文學賞 수상작
임형택 지음 『실사구시의 한국학』
2000년 10월
만해문학상 및 신동엽창작기금 운영위원회
심사경위
만해문학상 운영위원회는 김병익·백낙청·황석영·최원식을 제15회 만해문학상 심사위원으로 위촉하였다. 심사위원회는 9월 6일 실무진에서 작성한 대상목록을 검토, 장편 4편, 시집 2권, 그리고 비창작 2편을 집중적으로 검토하기로 하였다. 평론집이 대상으로 오른 적도 없지 않았지만, 주로 창작분야에 관심을 기울였던 기존의 관행을 넘어 ‘문학’의 외연을 유연화하기 위해 차제에 비창작분야에도 주목한 것이다. 10월 18일 다시 회동한 심사위원회는 자유토론을 거쳐 창작분야의 성과가 손색이 있음을 확인, 비창작분야의 두 편을 놓고 의견을 교환하였다.
유홍준의 『나의 북한문화유산답사기 상: 평양의 날은 개었습니다』(중앙M&B 1998)는 1997년 가을에 이루어진 북한방문기다. 이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3권을 통해 기행산문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한 저자답게 치밀한 준비, 예민한 관찰, 섬세한 안목, 그리고 뛰어난 문학성으로 북한의 문화유산을 남한 독자들에게 소개한 이 저서도 앞의 책들의 성취에 비해 결코 손색이 없다. 12일간의 짧은 방문으로 이런 성과를 거둔 저자의 솜씨에 경탄을 금치 못한다. 이는 단순한 솜씨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솜씨가, 그동안의 반북이데올로기로 말미암아 남한 사람들에게 금단의 땅으로 강제 소외된 북한을 포옹하는 저자의 강렬한 도덕적 열정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 종요롭다. 그럼에도 몇가지 옥의 티가 지적되었다. 유적과 유물에 대한 분석이 전작들만큼 충실치 못한 느낌이고, 북한의 관점에 대한 비판적 개입을 우정 유보한 점도 눈에 띄며, 균형을 잃은 해설도 없지 않다. 예컨대 춘원(春園)을 비판하느라고 동인(東仁)을 과대평가한 대목은 특히 그렇다. 심사위원회는 이 책의 하권이 완성되는 날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실사구시의 한국학』(창작과비평사 2000)은 돈독한 학구로 학문에 힘쓰되 책을 함부로 매지 않는 옛 선비의 풍모를 간직한 임형택의 두번째 저서다. 이 책은 지난 10여년간 온축한 글 가운데 정수를 가려 모은 논문집이다. 군자불기(君子不器)의 풍부한 통학문적(通學問的) 교양 위에 그는 전공의 한국한문학 분야를 가로질러 문학과 예술과 사상과 역사를 하나로 꿰어 학문의 장관을 보여준다. 그 장관이 엄밀하고도 정밀한 고증작업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귀중하다. 하나의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때로는 몇년에 걸친 추적을 마다 않는 학인의 노고, 그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궁행(躬行)한다. 그에게 실사구시는 단순한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강렬한 현실성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 그의 논문은 논문으로서의 전문성을 확보하면서도 날카로운 현실비판으로 편편이 평론으로 전화한다. 오늘의 관점에서 과거를 봄으로써 과거의 현재성을 생동하게 살려내는 저자의 실천적 안목으로 말미암아 그의 글은 발랄하기조차 하다. 그 어렵게 획득된 발랄성은 논문 쓰는 일도 창작 못지않은 예술적 숙련이 요구된다는 그의 엄숙한 자각에서 비롯된 부단한 정진의 결과라는 점에 주목하라. 물론 부족점도 없지 않다. 오늘의 현실을 보는 눈이 과거를 파악하는 눈길보다 더러 성근 점이 보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관점에서 과거를 볼 뿐 아니라 과거가 오늘을 향해 발언하는 더 깊은 경지로 나아갈 것을 믿으며, 임형택을 제15회 만해문학상 수상자로 추대하는 데 심사위원회는 기쁘게 합의하였다.
〔金炳翼 白樂晴 黃晳瑛 崔元植〕
수상소감
‘文’의 가치를 되살리는 첫걸음
임형택
나는 『실사구시의 한국학』이 금년도 만해문학상 수상대상으로 결정되었다는 말을 듣고서 먼저 얼떨떨한 느낌이 들었다. 연륜이 14회나 쌓이도록 학적인 성격에 주어진 적은 없었으니 분명히 파격이고 오늘의 문화지식에 비추어도 상당히 걸맞지 않은 일이지 않은가. 나 자신의 평소 지론으로 말하면 문학을 시 소설 중심의 ‘문예’에 국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보며, 논문도 작품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쓰느라고 써왔다. 나의 이런 취지가 공감을 얻었는가 싶어 은근히 반가운 기분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만해 선생을 기리는 이 상을 받게 되는 데 대한 부끄러움과 두려움은 내내 가셔지질 않는다.
나는 선생을 마음으로나마 만나볼까 하고 『한용운전집』을 꺼내 들었다. 「문예 소언(小言)」이란 전에 별로 유의하지 않았던 글이 펼쳐졌다. 만해도 언제 이런 글을 썼던가? 문학개론의 제1장처럼 동서고금의 문학에 대한 정의를 나열한 내용이어서 범상한데다 현학적으로까지 보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결론 대목에서 눈이 번쩍 뜨였다. “문예만을 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꽃 피고 새 우는 것만이 봄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어서 전편을 끝맺는 단락이 나온다.
꽃 피고 새 우는 것이 봄이지마는, 봄은 거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인생으로서 감정보다 생활이 필요하다면 봄비의 남은 물을 상평(上坪)^하평(下坪)에 실어두고, 밭 갈고 논 갈며 씨 뿌리고 김 매는 것이, 사람의 주관으로서 꽃 피고 새 우는 것보다 더욱 좋은 봄이 아닐까?
그야말로 시적이다. 근대적 관점에서 문학의 범위 밖으로 돌려진, 논 갈고 밭가는 봄이 꽃 피고 새 우는 봄과 함께, 그에 못지않게 싱그러운 감동으로 다가서는 것이다. 그의 이 문학에 대한 발언은 왜 세상에서 잊혀지고 말았을까? 거기에는 깊은 연유가 있다. 근대적인 문학관, 우리나라에서 더더욱 편협해진 문예중심주의에 거역하는 논조는 시적 설득으로도 먹혀들지 않았다. 근대적인 지식의 분류체계에서 그의 논리는 용납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만큼 ‘근대’에 빠져 있었던 셈이다.
문학이 ‘문예’로 독립한 한편, 분화된 학문은 과학성을 맹신하여 문학성을 금기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규정된 결과는 문학에도 학문에도 문제점을 무한히 양산한 듯하다. 문학은 문학대로 탈인간화를 감행한 나머지 이제는 곧 인간에서 문학이 퇴출당하게 되는 모양이다. 학문은 학문대로 발전론의 우상을 좇아 제각기 분주하지만 지혜에는 눈이 멀고 사랑이 재로 변한 ‘이성의 형해’로서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자본주의 주도의 근대문명에 거역하는 함성이, 조용한 반성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휴머니즘의 회복을 위한 노력, 동양적 개념으로 말해서 ‘文’의 가치를 다시 찬연하게 살리려는 지적 모반은 근대적 문명의 방향수정을 위해, 그 속에서 잃어버린 ‘인간의 얼굴’을 되찾기 위해 소중한 첫걸음이 되리라 믿는다. 만해 선생의 위의 말씀은 바로 이 점을 우리에게 일깨우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
끝으로 나의 변변찮은 책에 각별한 관심을 주신 심사위원들께 이 지면을 빌려 경의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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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 告
본사에서는 지난 10월 6일 연세대학교 연세공학원 대강당에서 개최한 ‘창비시선 200’ 출간기념 씸포지엄 ‘21세기 문학의 향방: 디지털 세상과 시적인 것’에 서신과 전자우편을 통하여 정기독자 여러분을 초청한바, 많은 정기독자께서 흔연히 참여해주셔서 참으로 뜻깊은 자리가 되었습니다. 함께해주신 정기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11월 17일 통합시상식에는 여러가지 여건상 모든 정기독자께 알려드리지 못하고, 전자우편으로 연락가능한 분들만 초청하게 된 점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본사의 여러 행사에 창비를 아끼시는 정기독자 여러분이 늘 함께하실 수 있도록 각별히 노력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2000년 11월
(주)창작과비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