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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21세기, 어떤 시대인가

 

테크놀로지 시대의 동도서기론

 

 

김상환 金上煥

서울대 철학과 교수. 저서로 『해체론시대의 철학』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 등이 있음. kimsh@snu.ac.kr

 

 

21세기초 한반도에서 중요한 지적 성찰의 과제로 부상하는 것이 있다. 아시아적 가치 혹은 동아시아론의 가능성이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로서 대두한 것은 단지 최근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동아시아가 서양의 제국주의와 대결할 때 처음 수태되었다. 패자로서의 동아시아인은 이 문제가 동서문화의 융합이 일어나는 지점에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믿어왔다.1 세계사적 현실을 주도하기 시작한 서양문화를 수용하는 차원을 넘어 동양문화의 미래적 계승과 재구축 가능성을 내다보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런 입지점에 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융화의 의지는 19세기말 한반도에서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통하여 표명되었다. 당시 중국의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이나 일본의 화혼양재론(和魂洋才論)과 어깨를 나란히한 이 동도서기론에서 서양문화의 핵심은 과학과 기술로 파악된다. 지금 되돌아보면 동양과 서양, 정신과 물질, 안과 밖 등 확고한 이분법에 기초한 동도서기론은 무척이나 단순하고 소박해 보인다. 분명 어떤 해결책으로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전략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제기한 과제는 여전히 급박한 문제로서 살아 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사실 동아시아인은 100년 전의 이 문화전략을 포기한 적이 있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알게모르게 동도서기의 이념, 그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념 안에서 살아왔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의 근대화가 아직 불충분하다면, 이는 우리가 이 잊혀진 전략의 실패 원인을 충분히 자각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도서기론은 아직 언제 끝날지 모르는 동아시아인의 역사적 운명 안에서, 그 운명에 대한 대결과 맞물려 태어났다. 동서문명의 세계사적 충돌 이후 서양의 극복이 단지 동양적 사유의 전통을 심화하는 배타적 방식으로는 더이상 불가능한 시대,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 동도서기론은 이 시대의 운명적 필연성을 자발적으로 긍정하는 동시에 그 필연성 안에서 이 시대의 본질적 과제를 지시하고 있다. 이 과제는 어떤 전회(轉回)의 요구라는 점에서 그 무게를 더한다. 단순한 이분법적 구도에서 말하자면, 동도서기론은 서양의 세계사적 주도력에 대한 역전의 의지를 담고 있다. 서양 주도의 시대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며, 이 시대는 오늘날 테크놀로지 시대라 불린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동도서기론이 지금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은 테크놀로지 시대의 극복 가능성이다.

테크놀로지 시대의 극복, 그러나 이 극복의 과제는 단지 동아시아인만의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M. Heidegger)의 존재사유와 데리다(J. Derrida)의 해체론, 그리고 이에 근거한 탈근대론은 테크놀로지 시대를 하나의 역사적 분기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인식에 따르면, 이 시대는 그리스에서 시작된 서양적 사유가 그 문화적 잠재력을 극단적으로 실현하는 지점, 따라서 서양적 사유의 전통이 비서양적인 것으로 전환되기를 기다리는 지점이다. 형이상학의 극복, 철학의 종언, 서양적 사유의 변형 등으로 집약되는 해체론적 이념과 더불어 서양인은 이미 동쪽으로 향하고 있다. 동쪽으로 온 것은 다만 서양의 함대만이 아닌 것이다.2 이런 관점에서 보면, 동도서기론은 지극히 동양적인 동시에 서양적인 과제, 이 시대 보편의 사상사적 과제를 지시하고 있다.

동도서기론은 테크놀로지 시대에 동양적 가치가 지니는 의미를 묻는다는 점에서 첨예한 화두로서 살아 있다. 우리가 ‘동아시아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다면, 이 기다림이 역사적 시간에 대한 우리의 체험을 규정한다면, 그리고 이 기다림 안에서만 동아시아적 사유가 그 역사적 운명의 하중을 견딜 수 있다면, 동도서기론이야말로 이 기다림과 견딤의 시간을 표시했던 가장 뚜렷한 이정표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귀환을 기다리는 동아시아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의 역사적 유래에서 언명된 동도란 무엇인가?

동도서기론은 분명 동도를 언명하였으나 아직 그 내용을 충분히 개진하거나 변형하지 못했다. 그것은 동도가 재탄생할 수 있는 기회였으나 실패한 기회로 그쳤다. 이 모든 것은 동도에 대한 방어적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동도서기론이 부딪쳤으되 방치한 것은 무엇보다 기술의 본성에 대한 물음이다. 이 물음의 방치에서 동도에 대한 방치가 귀결된다. 기술이란 무엇인가? 테크놀로지 시대란 무엇인가? 동도서기론 이후 이 물음이 우리에게 아직까지 보류된 채 남아 있다.

과거의 동도서기론자는 동도에 대한 확신 속에서 서기에 관계했다. 그러나 21세기를 내딛는 우리에게 동도는 아직 자명하지 않은 어떤 것이다. 그것은 다만 기다림의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왜 기다리는가? 100년 전의 복수를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다만 우리는 동도를 서기가 극복되는 지점, 서기를 맞이하되 다시 돌려보낼 수 있는 지점, 테크놀로지 시대의 전환을 내다보는 근거로서 기다려야 할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이 동도는 고정된 장소에 완결된 내용을 갖는 어떤 것으로 숨어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서양의 기술 앞에서 물러갔다 되돌아오는 것, 그 물러감과 되돌아옴 속에서 달라져 있을 어떤 것, 죽었다 되돌아올 유령 같은 것, 따라서 그 낯선 귀환에 우리가 놀라게 될 어떤 것일 것이다. 왜 낯설 수밖에 없는가? 테크놀로지 시대의 전환점에서 돌아올 그 동도는 서양적인 것이 아닌 것처럼 동양적인 것도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아마 이 점은 여전히 동도서기론이 보류했던 기술의 본질에 대한 물음에 충분히 머무른 이후에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 기술의 바깥

 

동양에서건 서양에서건 고대인의 사유를 유발했던 근본 기분은 동일했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감탄과 경외였다. 이 감탄과 경외야말로 진·선·미에 대한 인간의 이해가 태동한 모태였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떠한가? 왜냐하면 언젠가부터 자연은 더이상 위대한 것으로 체험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연은 연민과 동정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인간이 자칫 실수하면 크게 다치거나 교란을 겪는 지구, 그것이 테크놀로지 시대의 자연이다.

과거의 시인들은 흔히 이렇게 노래했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자연이여, 너의 비밀은 끝이 없구나!” 반면 요즘의 서정시는 이렇게 읊조린다. “산아, 들아 신음하고 있구나” “자연이 불쌍해요!” 이런 연민과 동정의 배후에는 어떤 죄책감이 숨어 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죄책감, 이것이 오늘의 서양에서 과거의 종교적 죄책감을 대신한다. 최근에 생태주의가 어떤 보편적 설득력을 획득해가고 있다면, 이는 이 새로운 원죄의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를 지배하는 근본 기분은 다른 데 있다. 그것은 자연을 왜소한 대상으로 전락시킨 것, 첨단기술 앞에서의 경악과 불안이다. 테크놀로지 시대의 황폐성은 위대한 것, 모든 경이적인 것이 자취를 감춘다는 데 있다. 이미 자연이, 신적인 것이, 그리고 인간마저 그 위대성을 상실했다. 요즘 거론되는 예술의 위기나 인문학의 위기도 이런 상황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테크놀로지 시대에 위대한 것은 오로지 기술뿐이다. 이 시대의 근본 기분인 경악과 불안은 저 홀로 위대한 이 기술에 인간이 적절하게 관계맺을 수 있는 방식을 찾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

사실 왜 테크놀로지 시대인가? 이는 이 시대에 들어서 비로소 기술의 중요성이나 위험성이 처음 경험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런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언급되거나 강조되었다. 노자와 장자, 플라톤, 베이컨, 루쏘, 비꼬 등이 아니더라도 이런 문맥에서 기억해볼 만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테크놀로지 시대는 기술이 인간의 손을 대신할 뿐 아니라 인간의 손을 지배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시대에 기계는 인간의 도구도 아니고 확장된 인간의 손도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기계의 도구이자 그 일부로서 기능한다. 기술은 독자적 진화의 논리를 획득한 자율적 체계로 탈바꿈한 지 오래다. 그렇게 변모된 첨단기술체계는 사회를 조직하고 재편하는 중심의 자리에 들어섰다. 날로 자기일관성의 범위를 확장해가는 기술적 참조체제, 이 체제의 촘촘한 그물망을 벗어나서 일어날 수 있는 사회적 사건이나 정치·경제적 사건을 생각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기술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도 기술에 빚져야 하는 지경이다. 기술에 대한 저항마저 저항기술에 의존해야 하는 시대, 그것이 테크놀로지 시대이다.

이 시대에 인간은 기술을 통해서만 지구와 우주에 정착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귀의할 장소를 찾지 못하고 있다. 기술의 재난은 단지 원자력발전소의 방사능 누출이나 상업적 의도의 인간복제만이 아니다. 그 진정한 재난은 인간이 정신적 고향이나 안식처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기술적 사고나 재난에도 불구하고 그 불안을 씻어줄 희망이나 경이감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는가? 개발경쟁 이외의 다른 방식, 기술에 관계하는 다른 방식은 없는가? 기술적인 것 이외의 위대성, 그 위대성 안에서 기술에 대응하는 길은 없는가? 이것이 테크놀로지 시대의 근본 물음일 것이다.

지극히 하이데거적인 이런 물음에서 볼 때, 기술은 그저 단순한 기술적 현상이 아니다. 경제적 현상이나 정치·군사적 현상으로 그치는 것도 아니다. 기술은 인간학을 포함한 과학 일반의 범위를 넘어선다. 테크놀로지 시대에 기술은 과학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과학이 기술 다음에 온다. 호모 싸피엔스(homo sapiens)는 호모 파베르(homo faber)의 요구와 도움 아래 있다. 인간이 기술을 무작정 추구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포기할 수 없는 이유도 도구사용의 문맥에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기술이 근본적으로 존재론적 현상이라는 사실에서부터 찾아야만 한다.

기술이 존재론적 현상이라는 것은 문화에 속하는 모든 것이 기술적으로 매개되거나 보완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다. 기술이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윤리적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도 아니다. 다만 테크놀로지 시대라 불리는 이 시대의 역사적 정체성이 사물에 대한 기술적 태도를 일반화하는 특정한 존재이해 양식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의 본질, 그리고 그 위험은 이 특이한 존재이해 양식로부터 유래한다.

기술의 본질은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하이데거의 명제가 말하고자 한 것이 바로 이 점이다.3 한 시대의 문화에 역사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라면, 테크놀로지 시대를 특징짓는 존재이해 양식은 무엇인가? 이것이 기술에 대한 하이데거의 물음이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테크놀로지 시대를 낳고 보존하는 존재론적 관계,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런 존재론적 물음은 자본주의 시대에 대한 맑스의 물음과 유사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맑스는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생산양식과 생산관계의 역사적 성격을 물었다. 하이데거 또한 테크놀로지 시대를 역사적으로 뒷받침하는 존재이해 양식과 존재론적 관계,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차이관계를 묻는다. 자본의 비밀은 자본이 아니라 자본을 둘러싼 특정한 생산양식과 생산관계에 있다는 것이 맑스의 통찰이었다. 마찬가지로 하이데거는 기술의 본질을 기술이나 그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서 찾는 관점을 비웃었다. 기술의 본질은 그 배후의 가능조건, 존재론적 가능조건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맑스의 시각에서 볼 때, 현대사회에 대한 기술의 지배력이 본격화된 것은 자본주의의 팽창과정, 즉 산업자본이 출현할 때부터이다. 테크놀로지 시대는 단순히 증기기관 같은 거대한 기계적 동력이 등장했기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계가 노동자의 손을 떠나 그와 대립해 있는 자본의 편에 서게 됨으로써 시작되었다. 기술이 자본과 결합되는 이때부터 기술은 역사의 순환주기를 가속화해왔다. 자본과 기술의 복합체에 의한 역사의 가속화, 바로 여기에서 자본주의 시대를 특징짓는 불안이 유래한다. “부르주아지는 생산도구를, 따라서 생산관계를, 따라서 사회적 관계 전반을 부단히 혁신하지 않고는 존립할 수 없다. (…) 부르주아 시대를 그 이전의 모든 시대와 구분시켜주는 것, 그것은 생산의 끊임없는 전복, 모든 사회적 제도의 지속적 혼란, 요컨대 영원히 계속되는 불확실성과 동요이다.”4 이 지속적 불확실성과 동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맑스의 관점에서 자본주의 시대는 테크놀로지 시대로서 본격화되고 완성된다. 이 시대에는 자본의 창출과 집중, 노동분업을 위시한 사회적 관계의 조직과 재편, 그리고—맥루언(M. Mcluhan) 이후 확인된 것처럼—인간의 감각 사용비율과 지각의 양태가 기술혁신의 장단에 따라 춤추듯 변해간다. 그러므로 대중정치나 언론이 날마다 외치는 구호, 기술경쟁력 추구라는 구호는 자본과 결합된 기술의 요구, 더욱 커다란 효율성을 향해 나아가는 기술형 경제의 요구에 체념적으로 적응하자는 구호일 것이다. 이 구호는 기술에 관계하는 한층 적절한 방식의 모색을 방해하는 것이 아닌가?

기술에 적절히 관계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술의 바깥, 그것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하는 외면을 찾아야 한다. 그럴 때만 우리는 기술에 거리를 두고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동도서기론이 동도와 서기라는 단순한 이분법에 의지하여 구하고자 한 것도 서양의 기술에 거리를 둘 수 있는 그런 바깥이었다. 이 이분법 안에서 기술의 바깥으로 설정된 것은 동도이다. 여기서 동도는 기술에 이중으로 관계한다. 기술을 끌어들이고 가까이함과 동시에 그 기술을 멀리하고 끝내 외면에 두고자 하는 것이다.

동도서기론이 실패한 전략이라면, 이는 가까이하는 동시에 멀리한다는 본래의 취지를 살리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모든 이유는 오로지 기술에 바깥이 있다는 통속적 생각 자체에 있다. 이 생각이 동도서기적 이분법에 선행하며, 그 이분법 자체를 유인했다. 과연 기술의 바깥, 가령 기술로부터 안전하되 기술에 손을 내밀 수 있는 그런 바깥을 생각할 수 있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기술의 바깥은 어떻게 있는가? 동도서기론이 그 실패를 댓가로 생산한 잉여의 물음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이 근대적 기술의 바깥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 해체론의 관점에서 이는 서양의 바깥에 대한 물음과 같다.

 

 

2. 기술과 세속적 복음

 

사실 기술의 바깥을 생각한다는 것은 자본의 바깥을 생각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맑스는 자본의 한계는 자본일 뿐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자본에 한계를 만드는 바깥이 자본 안에, 자본의 확대재생산 과정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그 안에 자리한다는 말과 같다. 자본은 차이와 불일치를 스스로 초래하면서 확장을 꾀하는 변증법적 성격을 지닌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자본주의 이전 단계의 사회에서는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모순에 봉착하면 사회체제의 변형이 일어난다. 반면 자본주의 사회는 양자가 일치할 때 위기에 빠진다. 양자가 모순에 놓일 때만 잉여가치가 발생하고, 따라서 자본의 확대재생산이 이루어질 수 있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끊임없이 모순에 빠뜨려온 역사, 그 모순으로 초래된 동요와 불균형을 이용하여 자본의 몸집을 불려온 역사이다. 때문에 맑스는 이 자본을 몸속에 또다른 몸을 지닌 괴물로 묘사하였다. “자본가는 화폐를 (…)상품으로 변형시키고 죽어 있는 대상으로서의 그 상품에 살아 있는 노동력을 이식함으로써 가치, 즉 과거화되고 대상화된 노동을 자본으로 변형시킨다. 스스로 증식해가는 가치로 변형시키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태어난 괴물(beseeltes Ungeheuer)은 마치 몸속에 몸을 지닌 듯 일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5

자본이 몸속에 다른 몸을 지닌 괴물이라면, 산업시대에 출현한 기계 또한 그런 괴물이다. 맑스의 눈에 자본과 기술은 언제나 한 편이다. 이것들은 한 몸이며, 각기 두 몸을 지닌 악마이다. 그러므로 자본이 그런 것처럼 기술의 한계는 기술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닐까? 기술의 바깥은 기술 안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맑스가 기술의 악마성을 서술하는 대목을 읽기 전에 기억해둘 일이 있다. 그것은 17세기초의 서양인에게 기술은 천사였고 신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근대의 서양인은 인간과 세계를 기술의 신적 위대성 안에서 해석했다.

이 점을 대변하는 인물이 베이컨인데, 그의 대표적 저서 가운데 이런 구절을 읽어보자. “어떤 사람에게 가장 문명화된 유럽지역의 인간생활과 아메리카의 가장 야만적인 지역의 인간생활을 서로 비교해보라 하자. 그는 하등 주저할 필요 없이 (…)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신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토양이나 기후 혹은 인종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기술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6

인간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기술은 인간을 자연에 대해서도 어떤 지고한 지위에 올려놓는다. 기술을 소유한 인간은 ‘지구의 주인’(dominus terrae)이라는 의미에서 신적이다. 인간은 기술을 앞세워 자연을 정복하고 통치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베이컨에게 있는 그대로의 자연, 자연 그대로의 자연은 무용할 뿐 아니라 무의미하다. 자연은 기술에 의하여 조작될 때만 자연으로서 현상한다. 기술적으로 “강요되고 간섭받는 자연, 다시 말해서 인간의 기술과 손을 거쳐 강제로 자연적 상태에서 벗어났을 때의 자연, 즉 압착되고 특징지어진 자연”이 진정한 자연이다. 왜냐하면 “사물의 본성은 자연적이고 자유로운 상태에서보다는 기술의 닦달과 요구에 놓일 때 훨씬 쉽사리 그 정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7

근대의 서양인이 생각하던 역사의 진보는 자연에 대한 기술적 개입을 바탕으로 이룩해야 할 과제였다. 그들은 자연을 기술적으로 눌렀다 폈다 하면서, 자연을 닦달하고 볶아대면서 역사의 진보에 필요한 에너지를 뽑아내고자 했다. 과학과 기술로 해서 인간이 “자연의 지배자요 소유주”가 될 수 있다고 말한 데까르뜨에게서도 역시 그런 의도를 읽을 수 있다.8 오늘날 생태주의운동의 배후에 있는 죄책감, 자연에 대한 인간의 죄책감은 베이컨과 데까르뜨가 대변하는 근대인의 이런 정복자적 자연관에 그 역사적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런 정복자적 자연관이 17세기 이래 서양인의 공유된 믿음으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기독교의 특정한 교리도 한몫했음을 기억해두자. 기독교의 창조론에 따르면, 신은 아담을 위하여 식물과 동물을 창조하였고 아담으로 하여금 이들의 이름을 짓도록 하였다. 지구상의 생명체에 대한 지배권과 소유권을 인간에게 준 것이다. 인간은 원죄를 범한 이후 이러한 권리들을 박탈당하였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구속(救贖)의 역사는 이 권리상실의 역사가 심화, 전도되는 과정과 같다. 역사의 완성과 종말은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주였던, 실낙원 이전의 상태로 복귀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17세기의 서양인은 이런 복귀가 신의 개입 없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자연에 대한 잃어버린 권리를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복귀의 힘은 물론 과학과 기술이 가져다준다. 과학과 기술은 종교적 복음을 대신하는 세속적 복음인 것이다.

이 점은 데까르뜨가 학문체계 전체를 한 그루의 나무에 비유하는 대목에서 한층 구체적으로 읽을 수 있다. 그에 따르면, 형이상학은 학문의 뿌리에 해당한다. 순수 자연과학은 줄기에 대응하며, 그 줄기에서 뻗은 가지들이 기타 응용학문인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가 기계학·의학·윤리학이다. 학문 자체의 조직원리와 순서를 따를 때, 이 학문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학문은 뿌리인 형이상학일 것이며, 뿌리에 가까운 쪽이 먼 쪽보다 상위에 놓일 것이다. 그러나 실천과 유용성의 문맥에서 이 순서는 전도된다. “왜냐하면 나무에서 열매를 따는 것은 뿌리나 줄기에서가 아니라 가지 끝에서이기 때문이다.”9

그렇다면 왜 기계학·의학·윤리학인가? 먼저 기계학은 기계를 제작하는 학문이고, 이 기계는 인간을 노동의 수고로부터 면제시켜준다. 노동, 그것은 실낙원 이후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러므로 기계에 힘입어 노동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종교적 복음이 약속하던 실낙원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인간, 그것은 실낙원 이전의 아담이다. 과학과 기술은 종교를 대신하여 낙원을 약속한다.

기계학 다음은 의학인데, 이때 의학은 단순히 질병을 치료하는 데 그치는 통념적 의미의 학문이 아니다. 데까르뜨가 말하는 의학은 인간이 병에 걸리는 이유뿐 아니라 자연적으로 늙고 쇠약해지는 원인을 밝히는 학문, 죽음을 치료하는 학문, 그래서 인간에게 영생을 기약하는 학문이다. 노동과 마찬가지로 죽음 또한 실낙원 이후 인간이 감당해야 할 저주였다. 이제 과학과 기술은 신을 대신하여 이 저주를 물리칠 것이다.

마지막으로 윤리학이 있다. 과학과 기술이 인간을 자연의 지배자요 소유주로 만들어준다면, 이 윤리학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내면세계의 지배자요 소유주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데까르뜨의 생각이다. 인간의 내면에 ‘의지의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 윤리학이고, 이 학문이 완성될 때 인간은 전적으로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존재자로, 신적 인간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이컨과 데까르뜨가 대변하는 근대적 인간은 과학과 기술로 신과 경쟁한다. 종교적 주술성을 대신하는 과학과 기술은 세속적 마술이다. 그러나 종교적 주술성이 중세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족쇄였다면, 이 세속적 주술성은 근대인의 운명을 제약하는 또다른 족쇄로 경험되기 시작했다. 과학과 기술이 역사의 무한한 진보를 약속했다면, 이제 그 약속이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3. 테크네와 텍스트

 

이런 전환이 일어나는 지점은 19세기 중반이다. 우리는 맑스의 저작에서 기술이 일으키는 불안을 읽을 수 있다. “기계생산이 도달하는 최고의 발전형태는 노동기계들로 이루어진 조직화된 체계, 즉 전달장치를 통하여 중앙자동장치로부터 운동을 공급받는 기계체계이다. 여기서는 하나의 단일한 기계를 대신하여 그 자리에 어마어마한 기계적 괴물이 등장한다. 이 괴물의 몸뚱어리는 공장 전체를 차지하며, 그 악마적인 힘은 처음에 그 거대한 사지들의 엄숙하고도 규칙바른 운동 때문에 감추어져 있지만, 마침내 열병에 걸려 발광하듯 춤을 추는 그 수많은 작동기관들을 통하여 터져나온다.”(KA, 373면)

17세기의 진보적 서양인에게 기계는 인간을 종교적 주술성의 질곡에서 해방시키는 새로운 천사였지만, 19세기의 맑스가 기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비관적이다. 이 천사는 어떤 괴물로 변하였다. 데까르뜨는 기계의 제작을 통해서 인간이 노동에서 면제된 유토피아에 이를 것이라 믿었지만, 현실적으로 유토피아에 이른 것은 기계를 소유한 자본가이지 노동자는 더욱 열악한 상황에 빠져버렸다. 왜 그런가? “노동수단 자체의 본성에 의해서 강요된 기술적 필연성”(KA, 377면)이 노동 자체를 비인격화하고, 그 필연성에 의한 분업적 질서의 재편과정에서 자본가는 연령이나 성별의 차이에 관계없이 인간의 노동력을 구매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녀자나 아동에게까지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맑스의 비관적 서술은 계속 이어진다. 즉, 조직화된 기계생산에서 노동자는 노동의 주체가 아니다. 단지 기계의 작동을 돕는 보조기구에 불과하다. 노동자에 있었던 자율성이 기계로 넘어간 것이다. 기계는 자신에 필요한 기계를 스스로 생산하며, 그렇게 몸을 키워가는 기계적 조직체는 점점 더 인간의 도움 없이 움직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 자신만의 다리로 일어서서 걸어가게 되는 것이다.”(KA, 376면) 기술이 자율적 증식체계를 이루는 시대, “자동화된 장치가 주체이고 노동자는 단지 의식을 지닌 기관으로서 그 의식 없는 기관에 부속품처럼 종속되어 있는”(KA, 408면) 시대, 이런 시대가 맑스적 의미의 테크놀로지 시대이다.

이 시대에 기계는 단지 괴물적 자동성을 띠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기계는 저 홀로 움직일 뿐 아니라 저 홀로 통치한다. 기계는 ‘자동장치’ (Automat)인 동시에 ‘독재자’(Autokrat)이다. “이 거대한 작업장 안에서 기계적 체계의 중심인 증기기관의 자비로운 힘은 자기 주변에 수많은 백성을 불러모은다. 〔그리고 그들 각각에 책임질 과제를 할당한다.〕”(KA, 360면)

이런 맑스적 시각에서 기술의 자동화와 독재화는 자본의 논리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과학과 기술을 노동자의 손과 분리된 자립적 생산체제로 전환시키는 것은 스스로 움직이는 괴물, 자본의 농간이다. 자본주의의 탄생과 생존의 조건이 노동과 생산수단의 분리라면, 다시 말해서 자본가에 의한 생산수단의 독점이라면, 공업적 생산은 이런 독점화를 최종적으로 완료한다. 그리고 그렇게 완료되는 자본주의는 그 자체가 하나의 기계, 노동자를 부품으로 거느리는 기계와 같다. “만일 고전적 프롤레타리아 경제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기계에 불과하다면, 자본주의는 이 잉여가치를 더 큰 자본으로 만드는 기계에 불과하다.”(KA, 559면)

산업기계 앞에서 맑스가 느낀 공포는 이 기계가 어떤 유기적 생명체처럼 독자적 진화의 논리를 갖춘 자기증식 체계로 탈바꿈한다는 것이다. 기계는 인간의 논리는 물론 자연의 논리와 구분된 어떤 새로운 논리, 그 본성에 고유한 기술적 필연성에 따라 움직인다. 이 기술적 필연성이 어떤 닫힌 공간을 형성한다. 특히 21세기적 상황에서 기계가 악마적이라면, 그 진정한 악마성은 노동자의 피를 빤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자기증식적 조직체가 형성하는 폐쇄회로에 있다. 맑스가 지적한 것처럼, 기계를 앞세운 노동력 착취는 노동운동을 통하여 얼마든지 저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술적 공간의 자기확장 논리는 노동운동이나 사회적 실천으로 저항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맑스적 대응을 뛰어넘는 현상이다.

기술은 맑스적 관점을 넘어설 뿐 아니라 모든 인간학적 관점을 넘어선다. 인간학적 관점은 인간의 편의를 위해 봉사하는 도구의 생산과 사용의 문맥에서 기술을 파악하는 도구주의적 관점과 하나를 이룬다. 맑스가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들 중 하나는 자본을 단순한 생산수단으로 보는 태도, 그래서 자본을 토지 등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태도였다. 자본을 생산수단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착취구조가 은폐되고, 이로부터 자본주의가 어떤 자연적이고 정상적인 경제로 둔갑하는 착시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기술을 단순히 도구사용의 문맥에서만 파악한다면, 우리는 유사한 오류를 범할 것이다. 테크놀로지 시대의 역사적 본성을 놓치고, 그 진정한 위험을 간과하게 될 것이다. 동도서기론이 서양의 기술에 관계하는 데 실패했다면, 이것도 도구주의적 관점에서 그 기술에 관계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도구가 아니라면 기술은 무엇인가? 기술의 본성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스적 어원으로 돌아가서 생각한다면, 우리가 ‘기술’로 옮기는 ‘테크놀로지’는 테크네(techne)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이 테크네는 텍스트라는 말과 함께 ‘짓다’ ‘짜다’ 등의 의미를 지닌 테크(tech)를 어간으로 한다. 기술의 본성은 일단 테크네와 텍스트의 어원적 친족관계 안에서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기술은 본성상 어떤 관계망, 그물망 안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닐까? 기술은 텍스트와 마찬가지로 그 자체가 어떤 관계적 질서의 조직체가 아닐까? 그러므로 원격통신 기술만이 아니라 모든 기술은 이미 자기 안에 원격통신 능력을 지닌 것이 아닐까?

우리는 앞에서 테크놀로지 시대에 대한 맑스적 체험의 일면을 살펴보았다. 이 체험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하나의 단일한 기계를 대신해서 그 자리에 거대한 기계체계가 등장하는 사건이었다. 맑스는 이 사건에서 악마적인 힘을 느꼈다. 이 악마적인 힘의 체험, 그것은 곧 기술의 본질에 대한 현상학적 체험, 그러나 불완전한 체험이었다. 왜냐하면 그 본질과 마주쳤으되 그것의 본질됨을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의 기술은 다른 기술과 원격통신 관계에 있다는 사실, 우리가 기술의 어원적 유래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는 이 사실에 대한 완전한 현상학적 체험을 위해서, 맑스의 문장은 다음과 같은 하이데거의 문장으로 보충되어야 할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만의’ 도구란 존재하지 않는다. 도구라는 존재에는 그때마다 언제나 도구 전체가 속해 있고, 이 전체 속에서 도구는 바로 그 도구로서 있을 수 있다.”10

『존재와 시간』에 나오는 이 대목에 따르면, 도구는 물리적 공간 안에 존재하지만 그와는 다른 공간을 형성한다. 이 도구는 저 도구를, 저 도구는 또다른 도구를 지시하거나 전제하면서 상호함축적 질서를 이룬다. 도구는 이 질서 안에서 도구로서 태어나고 죽는다. 도구는 언제나 도구 전체와 더불어, 그 도구적 연관의 일부이자 매개자로서 배당된 존재자이다. 각각의 도구들이 반영하는 질서, 그 질서를 구성하는 도구적 상호참조체계는 실천적 삶의 진정한 터전이다. 하이데거가 강조하는 것은 이 점이다. 즉, 실천적 문맥에서 세계는 도구들이 만드는 원근법, 도구적 관계의 그물망 안에서 처음 개방된다. 물리적 시공간이 추상적이라면, 그것이 추상한 것은 무엇보다 이 도구적 개방성, 그 개방성이 지닌 구체성이다.

우리가 맑스의 기계체험에서부터 이런 하이데거의 도구분석으로 옮겨갈 수 있다면, 이는 기술의 텍스트성 때문이다. 기술에 관계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바깥, 그 외면에 대한 물음은 이 기술의 텍스트성에 대한 성찰에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그 유명한 데리다의 명제를 기억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텍스트의 바깥은 없다.’ 이 명제를 참조하여 하이데거의 도구분석을 집약하면 이렇게 된다. ‘도구적 질서의 바깥은 없다.’ 따라서 기술적 질서의 바깥은 없는가? 있다면 어떻게 있는가?

 

 

 

4. 사물의 운명: 상품과 부품

 

기술의 바깥을 묻는 것은 기술의 위험에 관계하고 대처하기 위함이다. 기술의 텍스트성을 생각한다면, 기술의 위험은 닫힘과 열림의 차원에서 규정될 수 있다. 즉 기술이 본성상 체계형성적이라면, 그리고 그 체계가 완결성을 이루려는 경향이 있다면, 그 위험성은 기술내재적 경향인 폐쇄화에 있다. 기술의 위험에 관계한다는 것, 그것은 이 기술적 질서의 폐쇄성에 저항하는 것이며, 그 닫힌 체계가 열릴 수 있는 가능성을 찾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도구분석, 그리고 그후 훨씬 심각해진 그의 기술론도 실제로 이런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하이데거의 도구분석은 이론적 합리성의 패권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 분석을 통해 드러난 것은 이론적 인식의 관점에서는 전혀 해석할 수 없는 실천적 인식의 고유한 특성이다. 데까르뜨 이래 서양인은 정량적 시공간의 좌표를 중심으로 이른바 사물의 객관적 질서를 고안했다. 하이데거가 도구적 그물망을 현상학적으로 분석한 것은 이 지배적 표상의 빈곤성과 파생적 성격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인간이 실천적 삶 속에서 사물과 관계하는 것은 기하학적 시공간의 질서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 다만 도구들 사이에 성립하는 상호 지시와 배당의 질서에 따른다는 것, 그리고 이 질서는 인간의 세계내적 거주를 규정하는 원초적 질서라는 것, 즉 행위하는 인간에 대하여 세계는 도구적 질서의 고유한 원근법에 따라 처음 개방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원근법 안에서 현상하는 멀고 가까움은 이론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시선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하이데거가 배시(配視, Umsicht, 배려하고 염려하는 시선)라 부르는 실천적 태도에서만 현상한다. 이론적 시선은 이 실천적 시선이 있은 후에야 성립하고 그 안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 “실천적 태도는 봄(Sicht)이 없다는 의미에서 무이론적(atheoretisch)이 아니다. 실천적 태도와 이론적 태도의 차이는, 후자는 관찰하고 전자는 행위한다는 것도 아니며, 또 행위가 맹목적인 것으로 끝나지 않기 위하여 이론적 인식을 응용한다는 점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행위가 자신의 고유한 시선을 지니고 있듯이, 근원적으로는 이론적 관찰도 실천적 배려이다. 이론적 태도란 비배시적으로 단지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다.”(SZ, 93〜94면)

이 문장이 말하는 것은 이론적 시선에 대한 실천적 직관의 우위, 이론적 인식에 대한 실천적 인식의 근원성이다. 만년의 하이데거가 기술의 문제를 존재사적 관점에서 접근할 때도 이론적 인식의 권위에 의하여 망각된 비이론적 인식의 가능성을 중시한다. 이런 문맥에서 그는 고대 그리스에서 테크네와 에피스테메, 즉 기술과 인식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상기시킨다. 기술은 사물의 선후관계나 인과관계에 대한 통찰을 함축하므로 일종의 앎의 양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서부터 출발하여 하이데거가 정녕 말하고자 한 것은 더 큰 규모의 이야기다. 즉, 기술은 세계가 그 전체로서 개방되는 여러가지 방식들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이때 개방된다는 것, 특정한 원근법 안에서 나타난다는 것은 숨겨진 상태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방한다는 것, 그것은 은폐에서 탈은폐의 상태로 오도록 하는 것, 데려오는 것, 즉 산출(Her-vor-bringen)이다(TK, 13면). 산출하는 것, 그것은 무엇보다 자연이다. 무수히 저장하고 무수히 내놓는 자연 외에 시적 산출도 있고 수공업적 산출도 있다. 이것들은 어떤 전체가 열리고 원근화되는 개방적 산출의 여러 사례이다. 게다가 옛날로 올라갈수록 이 개방의 형식들은 분리되지 않았다. 서로 이어지고 보충하고 포괄하였다. 특히 테크네와 포이에시스(poiesis), 기술적 개방성과 시적 개방성은 하나를 이루었다(TK, 34면). 테크놀로지 시대의 빈곤, 그것은 기술적 개방성이 시적 개방성으로부터 분리되고 고립되었다는 사실로부터 설명해야 하지 않을까? 기술의 위험성은 다른 종류의 존재론적 개방성을, 근원적 개방성을 무력화하거나 추상화하는 데 있지 않을까?

이런 하이데거의 물음 안에서 부각되는 것은 기술이 어떤 타락한 세계개방 형식, 극단적으로 위험한 개방의 형식이라는 점이다. 이 점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서, 하이데거는 테크놀로지 시대의 고유한 세계개방 형식을 ‘게슈텔’(Ges-tell)이라는 특이한 신조어를 통하여 명명하였다(TK, 19면).이 신조어는 ‘몰아세움’이나 ‘공작(工作)’으로 옮길 수 있지만, 어느 말로도 완전하게 번역할 수 없다. 그 일차적 의미는 “과도하게 닦달하는 주문”에 뿌리내리고 있다. 자연의 자연스러운 산출능력을 초과하여 요구하는 태도, 볶아대는 방식으로 자연과 관계하는 존재론적 태도, 그것이 게슈텔의 기본적 의미내용을 이룬다.

여기서 베이컨의 말이 저절로 떠오를 것이다. 이 기술찬양론자는 무어라 했는가? 자연의 숨겨진 본성을 알기 위해서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방치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술과 손으로 이리저리 조이고 쥐어짜야 한다고 했다. 하이데거는 그런 닦달과 쥐어짜기를 테크놀로지 시대 전체를 규정하는 지배적 존재이해 방식으로 간주한다. 자연을 도발적으로 몰아세워서 무엇인가를 더 내놓으라고 주문하는 태도, 그것이 이 시대의 존재론적 진상이라는 것이다.

맑스가 그리는 풍경, 즉 자본가가 노동자를 쥐어짜는 풍경은 이런 하이데거적 풍경화의 일부에 불과하다. 이 존재론적 그림에서 인간이 인간을, 사물을, 그리고 자연 전체를 쥐어짜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의미 외에도 게슈텔은 다른 뜻을 내포한다. 이 말은 작위적이고 인공적인 세계가 지속성을 더해가는 방식을 나타낸다는 의미에서, 다시 말해서 자연에 토대를 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근거한 지속적 명령체계가 자연 위에 군림한다는 의미에서 ‘공작’으로 옮길 수 있다.11 공업생산의 현장에서 맑스를 놀라게 한 것은, 기계가 제 발로 선 동물로 변해서 그 작업장의 독재자로 군림하는 모습이었다. 하이데거가 게슈텔이란 말로 표현하고자 한 것은, 이 독재자의 명령이 체계화될 뿐 아니라 영구화된다는 점이다. 인공물은 썩지 않는다. 그러나 그보다 더 오래가는 것은 스스로를 대체하고 혁신해가는 기계적 체계의 몸이며, 그 안에 깃들이게 된 기술적 지능이다.

이런 테크놀로지 시대에 사물 일반은 다른 시대와 다르게 경험된다. 맑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이 상품으로 전락한다는 사실을 고발했다. 하이데거는 기술사회에서 모든 존재자가 어떤 부품이자 내구재(Bestand)로 현상한다는 사실에 역점을 둔다(TK, 34면). 즉 자연은 근본적으로 공업생산을 위한 에너지저장소나 재료창고로, 사물 일반은 지속적 기술체계를 위해 소모되는 부품으로, 그러나 끊임없는 대체가능성 안에서 자연적인 것보다 더 오래가는 내구재로 이해된다. 이로써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이 계산·조작될 수 있고 도구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물건으로 파악된다. 특히 자연적 사물은 그 자연성을 상실하고 기술적 명령을 따르는 부속품으로 경험된다. 이 명령체계 안에는 근대적 의미의 대상마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대상들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계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대상성이 없는 이 상태는 고정된 근거가 없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또다른 종류의 항구성이 이 비대상적인 것 안에서 나타나고 있다.”12

데까르뜨 이후의 사상사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유하는 주체에 대립하여 서 있는 것, 즉 대상이다. 이 시대에 주체는 자신을 정립하는 동시에 자신에 대하여 대상을 정립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런 데까르뜨 이후의 사상사는 니체에 이르러 그 마지막 국면에 들어선다. 여기가 서양 형이상학이 완성되는 동시에 테크놀로지 시대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여기서는 사물이 더이상 대상으로조차 파악되지 않는다. 다만 부품이나 내구재로 이해될 뿐이다. 그리고 이 내구재의 상존 근거는 자연에 있는 것도, 인간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맑스가 말한 바대로 기계의 본성에 내재하는 기술적 필연성 자체에 있다. 사물은 기술의 자기확장과 지속의 논리 속에서, 그리고 언제나 대체가능한 부품으로 존재한다. 부품으로서의 사물, 그것은 맑스적 의미의 상품과 가까운 혹은 동일한 장소에 있다.

맑스적 의미의 상품물신이 자본주의 사회의 왜곡된 사물관의 뿌리라면, 이 무차별한 상품화는 일차적으로 교환가치의 일반적 지배력 때문에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모든 사물이 등가적 교환의 문맥에 놓임으로써 초래되는 현상이다. 하이데거의 시각에서 보자면, 19세기말 이후 사물은 무한한 대체가능성 속에 놓여 있다. 이는 사물의 일반적 부품화로부터, 그리고 이 부품화는 테크놀로지 시대에 고유한 존재이해 방식, 즉 게슈텔로부터 시작된다. 상품화와 부품화, 이는 자본과 기술의 복합체 안에서 사물이 겪는 일반적 운명을 지칭한다.

 

 

5. 기술과 역사의 유령

 

사회학자들은 테크놀로지 시대의 중요한 특성으로 위험의 상존을 든다. 이는 다른 시대에는 사고나 재난의 위험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어느 시대에나 사고나 재난은 있어왔다. 그러나 사고나 재난의 종류, 그것이 일어나는 방식과 발생장소는 달라질 수 있다. 가령 전통적 형태의 사회는 홍수나 흉작 같은 자연적 재난에 시달렸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이런 자연적 재난은 점차 정복되어 사라진다. 하지만 그 자리를 대신해서 어떤 제조된 사고, 인위적 재난이 늘어간다.13

테크놀로지 시대에는 많은 경우 기술 자체에 의해서 사고가 일어난다. 이 시대에 재난은 문화의 밖에서가 아니라 문화의 안쪽에서, 마치 기술적 체계의 내재적 속성인 양 발생한다. 사고는 일상적 삶의 일부를 이루고 재난의 망령은 어떤 집단적 편집증을 일으킨다. 보드리야르의 말이다. “사회가 정상화될수록 그 주변부에서 광인과 비정상인이 나타나는 것처럼, 이성과 자연에 대한 기술적 지배가 심화될수록 그 주위에서는 ‘자연의 유기적 신체’가 파국을 맞고 비이성이라는 약체현상(dérision)이 출현한다.(…)어떤 악령이 거기 있어서 그토록 멋진 기계가 언제나 고장을 일으킬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이 합리화된 문화는 집단편집증에 걸리게 된다.”14

테크놀로지 시대에 고유한 재난, 유령처럼 출몰하는 재난의 가능성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더욱 진보된 기술을 통해서만 대응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새로 고안된 기술은 좀더 진화된 형태의 사고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위험이 기술적 체계 자체를 구성하는 내재적 요소라는 데 있다. 따라서 “기술형 국가는 기술의 힘을 감시하는 가장 굴종적이고 맹목적인 교도관일 것이다.”15 이렇게 말하는 하이데거에 의하면, 진정으로 위험한 것은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테크놀로지 시대를 정초하는 존재이해, 게슈텔이라는 존재이해 자체에 있다.

이 특이한 존재이해 양식은 맑스의 자본주의처럼 둔갑술을 부린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는 존재망각의 역사이다. 이때 존재란 이성적 사유를 넘어서되 그것을 가능케 하는 개방적 사건이며, 이 존재를 신비한 것으로 폄하·배제한다는 데 서양 형이상학의 탄생과 유지의 비밀이 있다. 데리다 식으로 옮기자면, 형이상학의 역사는 곧 유령의 추방과 망각의 역사이다. 테크놀로지 시대는 이 망각이 극치를 이루는 시대, 그 망각 자체가 망각되는 시대이다.

이 이중의 망각 속에서 잊혀지는 것은 게슈텔의 위험성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게슈텔 이외의 존재론적 개방성에 대한 관심이다. 테크놀로지 시대의 진정한 위험은 이런 존재론적 이해의 기만적 독점과 독재에 있다. 이 기만적 독점과 독재의 위험성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무엇보다 맑스가 자본주의에 대처한 것처럼 이 시대를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 시대를 도덕적으로 비난하거나 건너뛰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이 시대의 역사적 필연성과 상대성을 동시에 발견하기 위해서이다.

자본주의를 어떤 특수한 역사적 시기의 경제체제로 보아야 한다고 말할 때 맑스가 비판하고자 한 것은, 자본주의를 어떤 자연적 현상으로 간주하는 시각, 영속화하고 보편화하는 태도였다. 자본주의는 있을 수 있는 여러가지 경제체제들 중의 하나라는 것, 그것은 어떤 사건(가령 원시적 축적) 이후 필연적으로 성립하지만 또한 그 동일한 필연성에 의하여 소멸한다는 것, 이런 것이 맑스가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구도이다.

이런 구도 안에 놓고 볼 때, 자본주의는 진보를 가져오는 동시에 퇴행을 가져온다. 나름의 보편성과 특수성, 자기 고유의 객관성과 그것을 넘어서는 신비성을 동시에 지닌다. “부르주아 경제의 범주들은 현행의 사회적 관계를 반영하는 한 객관적 진리를 지닌 지성의 형식들이다. 그러나 이 사회적 관계는 역사적으로 규정된 시기, 즉 상품생산이 사회적 생산양식인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만 속할 따름이다. 따라서 우리가 또다른 종류의 생산양식을 내다본다면, 상품세계의 신비, 상품생산을 기반으로 노동의 산물을 안개처럼 뒤덮고 있는 모든 마술과 유령성은 곧바로 사라질 것이다.”(KA, 104〜105면)

자신의 비정상성과 위험을 위장하는 자본주의의 신비, 그것의 마술과 유령성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그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구분되는 다른 종류의 생산양식을 내다보지 못하는 몰역사적 표상, 그 표상의 무능력에서 비롯된다. 자본주의의 위험을 극복할 가능성은 비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나아가서 이상적 형태의 생산양식에 입지점을 두는 역사적 사유에서 움튼다. 하이데거 역시 테크놀로지 시대의 존재이해 양식과 구분되는 또다른 존재이해 양식, 이상적 형태의 존재이해 양식에 입지점을 둘 때만 이 시대의 위험성에 대처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테크놀로지 시대를 상대화하는 이상적 형태의 존재이해 양식은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그것을 시적 존재이해에서 찾는다(TK, 34면). 여기서 다시 부각되는 것은 테크네와 포이에시스의 역사적 관계이다. 포이에시스로부터 분리된 테크네, 그것이 하이데거가 규정하는 테크놀로지 시대의 기술이다.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는 이 분리가 심화되어온 역사이며, 이 역사의 마지막 국면인 테크놀로지 시대는 그 분리 자체가 망각에 빠져버린 시대이다. 따라서 테크놀로지 시대로부터의 전회는 그 망각에서 탈피하여 테크네와 포이에시스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재촉할 때만 기대할 수 있는 사건이다. 이 시대의 역사적 전회, 그것은 시적 사유를 요구한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맑스와 달리 어떤 철학이나 이론적 사변이 현실을 직접 변혁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인하였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철학은 결코 현재 상태의 세계를 직접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단지 철학에 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순전히 인간적인 모든 생각이나 의도에도 해당하는 말입니다. 오직 어떤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SG, 671면) 그러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별로 없다. 특히 “존재에 그 본질을 두고 있는 기술은 결코 인간을 통하여 극복될 수 없다.”(TK, 38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위험 속에 자라나는 구원’을 예비하는 것, 그 위기 속에서 몰락하거나 도래하는 구원자로서의 신을 맞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 시적 사유를 통해서 길을 닦는 것이다. 하이데거적 의미의 시작(詩作)과 시적 사유, 그것은 신과 관계하는 사유이다.

이런 체념적인 듯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의 기술론은 맑스의 자본론 못지않게 혁명적인 데가 있다. 서양의 시대를 완성하는 테크놀로지 시대의 근본 위험에 관계하고자 하기 때문이며, 이를 위하여 다른 시대의 가능성을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혁명은, 역사적 전환의 가능성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다른 시대는 어디에서부터 도래하는가? 그것은 극복될 시대, 테크놀로지 시대 자체로부터이다. “내 생각에는 오로지 현대의 기술적 세계가 성립했던 동일한 지역에서부터 어떤 전회가 준비될 수 있습니다. 선불교나 그밖의 동양적 세계체험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런 전회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사고방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유럽적 문화유산의 계승과 재전유가 필요합니다. 사유는 오로지 동일한 기원과 동일한 본성을 지닌 사유를 통해서만 변형되는 것입니다.”(SG, 679면)

이런 하이데거의 말은 동도서기론의 가능성을 처음부터 부정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 말은 일단 이렇게 들린다. 기술은 그 바깥에서부터, 그에 반하는 반대운동을 통하여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술의 바깥은 없다. 기술의 위험에 대응하는 입지점은 기술 안에서 찾아야 한다. 테크놀로지 문명은 그것이 뿌리내리고 꽃을 피우던 동일한 장소에서, 그 문명의 진화논리 자체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을 뿐이다. 테크놀로지 시대의 구원은 이 시대의 위험 속에서 자라나고 있다. 따라서 기술의 근본 위험을 치유하기 위해서 선불교나 그밖의 동양사상, 가령 도가사상이나 유교사상에 의존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동양문화는 전지구화되고 있는 첨단기술문명에 어떤 대안이 될 수 없다. 대안은 이 문명의 뿌리, 서양적 사유, 서도(西道) 안에서 구해야 한다. 기술과 자본을 통하여 서양문명이 지구 전체를 석권하고 있다면, 이제 서양의 바깥은 없다.

동아시아론은 이 말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성급한 대응을 피하기 위해서 우선 그 말이 어떤 계승의 논리이자 전회의 논리, 역사의 혁명적 전회의 논리에 대한 진술임에 주목하자. 그 말 속에 언급된 동양, 그리고 동양과 서양의 관계는 이 전회의 논리 안에서 재음미되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이 전회의 논리는 다시 한번 맑스적 역사인식을 상기시킨다. 맑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시대 이후는 자본주의 자체 안에서 일어나는 ‘부정의 부정’을 통해서 시작된다. “자본의 독점은 그와 더불어 그리고 그것의 보호 아래 성장한 생산양식에 대하여 속박이 된다. 생산수단의 중앙집중화와 노동의 사회화는 더이상 자본주의적 외피 속에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지점에 이른다. 이 외피는 산산조각이 난다. 자본주의적 소유의 종말을 알리는 조종이 울린다.”(KA, 712〜13면)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에 조종을 울리고 무덤을 파는 것은 독점화에 성공한 자본가 자신이다. 자본에 대항하는 최고의 무기는 자본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자본주의의 최대 적은 자본주의 자체인 것이다(MK, 468면).

이런 자기전복의 역설은 자본주의 시대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변화 전체를 지배하는 보편적 논리다. “새로운 사회의 요소들은 과거의 사회 안에서 형성된다. 낡은 관념의 와해는 과거의 삶의 조건이 스스로 와해되는 과정과 병행한다.”(MK, 480면) 과거 안에서 자라나는 미래의 요소, 거기서 한 시대를 전복할 수 있는 치명적 무기의 재료가 나온다. 맑스는 자본주의 안에서 자라나는 그 미래적 요소를 악마적인 힘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토록 위력적인 생산수단과 교통수단을 번성케 한 근대 부르주아 사회는 마법사를 닮았다. 이제는 자신이 불러들인 악마적인 힘을 더이상 쫓아낼 수 없는 마법사를 닮은 것이다.”(MK, 467면)

자본주의 시대에는, 그리고 모든 역사적 시대에는 악마적인 힘, 유령이 살고 있다. 그것은 그 시대 자체에 의하여 태어났고 불림을 받았지만, 더이상 그 시대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그 시대에 종말을 알린다는 의미에서 유령이다. 테크놀로지 시대의 유령, 보드리야르가 기술적 체제의 내재적 속성으로 지적한 악령은 이런 맑스적 역사전환의 논리 안에서 다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테크놀로지 시대로부터의 전회는 이 시대 자체 안에서만 준비될 수 있다는 하이데거의 말도, 그가 시적 사유를 통해 기다리는 구원의 신도 이런 맑스적 영감의 유령론 안에서 다시 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6. 동도의 길

 

이런 작업을 구체적으로 실행한 것은 『맑스의 유령들』의 저자 데리다이다. 이 책에 따르면, 맑스의 저작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유령의 비유는 다른 비유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아마 모든 비유들의 배후에 숨은 비유일 것이다.”16 즉 맑스의 유령은 단순한 수사학적 비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맑스적 수사학의 뿌리, 맑스적 역사인식의 뿌리다. 맑스는 유령을 과학의 이름으로 혼낼 때, 가령 종교의 유령, 자본의 유령, 상품의 유령, 기계의 유령을 추방할 때조차 유령의 비유에 빚지고 있다.

이는 유령이 복수적이고 위계적이라는 것을 말한다. 쫓아낼 수 있는 유령이 있는가 하면, 쫓아낼 수 없는 유령, 환원불가능하고 해체불가능한 유령, 그래서 미래를 준비하는 모든 역사적 담론이 다시 불러들여야 하는 유령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테크놀로지 시대에도 여전히 어떤 유령이 거주하는 것이 아닐까? 이 시대에 태어났으되 이 시대 이후에 속하는 유령이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데리다에 의하면, 테크놀로지 시대의 유령은 “테크네, 기술형 과학, 혹은 원격조종기술의 차연적(différantiel) 전개” 속에서, 즉 첨단기술의 가능성이 실현되는 지점에서 전개되는 가역적이고 자기부정적인 지연과 보충의 논리에 의해 출몰한다. 간단히 설명하면, 기술은 이론적이고 합리적인 사유, 계산하고 조종하는 능력, 계획과 통제의 능력과 하나를 이룬다. 그러나 테크놀로지 시대가 무르익어갈수록 계산하거나 조종할 수 없는 것, 계획되거나 통제할 수 없는 것, 모든 논리적 사유의 근간인 이분법적 분류를 넘어서는 요소들이 늘어간다. 도구적 계산능력인 이성은 무수한 기술을 번성케 했지만, 그 번성하는 기술로부터 비합리적이거나 초합리적인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기술적 이성은 “자신이 불러들인 악마적인 힘을 더이상 쫓아낼 수 없는 마법사”이다. 근대의 과학과 기술은 종교적 주술성에 대항하면서 자신의 영토를 넓혀왔지만, 그렇게 탈주술화된 영토는 재주술화되고 있다. 가령 “시간과 공간의 가상화, 〔여러가지 이분법, 가령─인용자〕 현전(現前)과 재현, 현행적 시간과 지연된 시간, 현실과 씨뮬라크르, 살아 있는 것과 아닌 것, 간단히 말해서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이면서 살아 있는 환영들’ 사이의 대립을 더이상 허락하지 않는 가상적 사건의 가능성 및 그 사건의 운동과 속도”(SM, 268면)에서부터 우리는 이 시대의 유령을 경험할 수 있다.

이 유령은 국가·사회조직·가정, 심지어 연애장소를 배회하면서 기존의 지정학적 질서 및 사회적 공간을 탈구시키고 있다. 고착화된 코드와 제도의 형식 안에서 예상되던 순서를 어긋나게 만들기도 한다. 위기를 초래하고 불확실성을 동반하지만 새로운 연대와 결속의 양식이 형성될 기회를 창출하기도 한다(SM, 268면). 여기서 다시 테크네와 텍스트의 어원적 동근원성을 기억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즉 테크놀로지 시대가 깊어갈수록 기술적 공간은 탈구와 어긋남으로 짜이는 텍스트성, 따라서 기술적으로 계산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텍스트성, 초기술적 텍스트성을 띠게 된다. 거기에는 기술로부터 태어나 기술을 교란하는 유령, 기술적 유령이 출현한다.

연대·결속·짜임·틀의 탈구, 기술적 유령이 일으키는 이 일반적 탈구 속에서 정치는 변할 수밖에 없다. 대의민주주의는 활성화되는 동시에 다른 종류의 정치를 요구하는 양 교란되고 있다. 정치뿐 아니라 경제가 변하고 있고 사회 자체가 변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만나고 엮이는 방식, 가령 연인이 만나는 방식마저 달라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종교가 변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언젠가 엥겔스가 신비주의에 몰두할 때 언급했던 것처럼, 종교(religion)는 묶기, 결속하기(religare)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기술의 텍스트성과 기술적 유령을 생각할수록 이 시대는 “종교와 기술을 독특한 지형 안에 묶어주는 모든 것”(SM, 265면), 신비한 것과 기술 사이의 관계가 중요한 철학적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데리다는 기술적 유령을 포함하여 한 시대에 속하면서 다음 시대의 가능성을 몰고 오는 유령을 메시아적인 것, 메시아 없는 메시아성으로 명명했다(SM, 96면). 그것은 곧 주어진 시대의 바깥과 그에 대한 희망을 약속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우리의 실존적 결단을 조건으로 새로운 종류의 결속과 연대를 약속한다는 점에서 메시아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실체적 내용이 없다는 의미에서 메시아 없는 메시아성이다. 기술의 지배력 안에서마저 자라나는 이 종교적 희망이 테크놀로지 시대 이후를 기대할 수 있는 근거이다. 테크놀로지 시대의 위험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할 신, 하이데거가 기다리던 신은 첨단기술의 가역적인 전개에서 출현하는 유령, 메시아적 유령으로 고쳐 읽을 수 있다. 이 메시아적 유령은 현전과 부재, 현실과 가상, 삶과 죽음 등의 모든 이분법을 뛰어넘는 것처럼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의 대립을 넘어선다. 동양적인 것도 아니고 서양적인 것도 아닌 것, 그것이 테크놀로지 시대로부터의 전회를 생각할 때 도달해야 하는 가장 높은 수준의 준거점, 마지막 존재론적 준거점이다. 이 준거점에서 되돌아볼 때, 동도서기론과 그후의 모든 동아시아 담론이 나아갈 방향은 이렇게 그려질 것이다.

20세기말 혹은 그 이전부터, 도(道)의 개념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적 사유의 전통에 서서 로고스(logos)를 중심으로 한 서양사상사의 한계를 드러내고 비판하는 시도들이 있어왔다. 이런 국내외의 시도들은 주로 비교철학이나 비교문학의 영역에서, 그리고 해체론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제공한 영감과 기회를 이용하면서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져왔다. 하지만 이런 비교학적 연구가 묻는 것은 많은 경우 동도서기론이 제기했던 물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왜 도가 길인가?

최근에는 이와 다른 문맥에서, 정확히 말하자면 분단체제의 한반도에서 제기되는 ‘근대성에 대한 적응과 극복이라는 이중과제’를 논하는 자리에서, 백낙청 교수는 그 물음에 관련하여 몇가지 성찰의 결과를 내놓았다.17 왜 도가 길인가? 간략히 옮기면, 그것은 과학을 중심으로 한 근대적 진리개념, 협소한 이론적 진리개념을 넘어서는 도의 포괄성 때문이다. 동도는 “진과 선의 융합”이라는 점에서, 그리고—필요한 상황에서는 기존의 가치가 만드는 “모든 위계질서의 일시적 정지를 전제하는”—역동적 성격의 “지혜의 위계질서”를 함축한다는 점에서 근대적 진리개념에 대하여 미래적이다. 그러나 이 미래성은 아직 전미래적 미래성, 미래완료적 미래성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지난날 과학과 기술의 진보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한 점과 오랜 동안 억압적이고 불평등한 사회체제와 공모관계에 있었던 점에 대한 근대적 이성의 비판작업을 겪어낸 도(道)라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비판의 견딤은 동도가 21세기 사상사에서 부활하기 위한 조건, 죽었다 살아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일 것이다. 사실 동도가 20세기 사상사에서 퇴장해야 했다면, 그것은 근대적 이성의 역사적 지배력 때문이었다. 이 무대로 다시 등장하기 위해서 동도는 이 무대의 연출자, 근대적 이성의 심문과 검열을 통과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근대적 이성과 말이 통해야 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동도의 길, 그것의 도는 언어적 학습과 번역에 있다.

동도는 자신의 범주들을 합리적 언어의 문법 안에서 번역할 수 있어야 다시 살아날 수 있다. 동도는 자신의 속내를 근대적 이성의 범주들로 옮기고 담아내지 않고는 근대적 이성이 지키는 시대의 문턱을 넘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이동의 노동을 통해서만 동도는 과학과 기술의 역사적 전개과정과 근대 민주주의의 이념을 동아시아적 전통의 기억과 이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번역·옮김·이동 속에서 동도는 그 모습을 바꿀 수밖에 없다. 그것이 원래 숨어 있던 장소를 떠나기도 해야 할 것이다. 그 옮김과 이동 속에서 동도는 이미 죽어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 살아 있는 것도 아닌 것, 유령처럼 떠다녀야 할 것이다. 동도는 유령이 되어야 역사의 문턱을 넘어 미래에 부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도가 그렇게 진입할 무대, 근대적 이성이 연출하는 무대에는 또다른 유령, 서귀(西鬼)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이미 맑스가 경험했던 유령, 하이데거와 데리다, 심지어 보드리야르와 같은 저자들이 서로 다르게 서술하는 귀신, 테크놀로지와 더불어 태어났으되 테크놀로지 시대 이후를 재촉하는 서귀가 출몰하고 있다. 이 유령은 하이데거의 입을 통하여 여전히 동도와 대화할 것을 거부한 바 있다. 이 거부는 서양의 탈근대적 사유 속에 잠재하는 또하나의 중심주의, 또하나의 위험을 암시하고 있는지 모른다.18 이 거부의 장벽과 그 뒤의 함정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

그것은 근대성의 문턱을 지날 때와 동일한 방법으로, 즉 번역을 통해서, 그러나 역방향의 옮김과 이동을 실행하면서 넘어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동도는 자신의 범주들을 근대적 이성의 범주들에 맞춰 번역하는 것 못지않게 그 서양의 범주들을 자신의 범주들로 옮기고 이동시켜야 한다. 근대적 사유의 범주, 테크놀로지 시대의 범주들을 다른 그릇에 담고 다른 장소에 이르도록 하며 다른 길로 들어서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서양의 범주들을 죽였다 살려야 하고, 아직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죽어 있는 것도 아닌 것, 귀신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출몰한 서귀, 그러나 동양적인지 서양적인지 애매모호한 이 귀신의 신통력이 동도를 근대극복의 문턱, 그 장벽을 통과하도록 만들어줄 것이다. 과거에 죽었다 귀신처럼 다시 살아날 동도는 우리가 서도를 죽인 후에 나타날 귀신,­ 서귀의 길을 따라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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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백영서 『동아시아의 귀환』(창작과비평사 2000) 17면 이하 참조.
  2. 졸저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민음사 1999) 2장 ‘철학이 동쪽으로 간 까닭은’ 참조.
  3. “기술은 기술의 본질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기술의 본질은 전혀 기술적인 것이 아니다.” M. Heidegger, Die Technik und die Kehre (Pfullingen: Neske 1962) 5면. 이 저서의 본문 내 약칭은 TK.
  4. K. Marx/F. Engels,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 MEW 제4권(Berlin: Dietz 1983) 465면. 약칭 MK.
  5. K. Marx, Das Kapital, MEGA II-8권(Berlin: Dietz 1989) 207면. 약칭 KA
  6. F. Bacon, Novum organum, E.A. Burt의 원문편집, The English Philosophers from Bacon to Mill (New York: Random House 1967) 129항, 85면.
  7. F. Bacon, Instauratio magna, 같은 책, 20면.
  8. R. Descartes, Discours de la méthode, AT VI권(Paris: J. Vrin 1982) 6부, 62면.
  9. R. Descartes, Principes de la philosophie, AT IX-1권(Paris: J. Vrin 1971) 서문, 15면.
  10. M. Heidegger, Sein und Zeit, 전집판 제2권(Frankfurt am Main: V. Klostermann 1977) 15절, 92면; 『존재와 시간』(소광희 옮김, 경문사 1995) 102면 참조. 약칭 SZ.
  11. 이진우 「기술과 방념」, 한국하이데거학회 편 『하이데거의 존재사유』(철학과현실사 1995) 284면 참조.
  12. M. Heidegger, Der Satz vom Grund (Pfullingen: Neske 1957) 65〜66면.
  13. 앤서니 기든스, 박찬욱 옮김 『질주하는 세계』(생각의 나무 2000) 62〜64면, 69면 등 참조
  14. J. Baudrillard, L’Échange symbolique et la mort (Paris: Gallimard 1976) 246면.
  15. M. Heidegger, “Spiegel-Gespräch mit Martin Heidegger,” 전집판 제16권(Frankfurt am Main: V. Klostermann 2000) 671면. 약칭 SG.
  16. J. Derrida, Spectres de Marx (Paris: Galilée 1993) 194, 237면 참조. 약칭 SM.
  17. 백낙청 「한반도에서의 식민성 문제와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 『창작과비평』 1999년 가을호 6〜28면, 특히 23면 이하 참조
  18. 최근의 동아시아론에서도 동일한 위험, 새로운 중심주의의 위험이 비판의 과제로 자각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최원식 「한국발 혹은 동아시아발 대안?」, 정문길 외 엮음 『발견으로서의 동아시아』(문학과지성사 2000) 40〜54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