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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양요환 梁堯煥
신천연합병원 원장
시대의 꿈과 아픔을 안고 살다 간 사람
제정구를 생각하는 모임 『가짐 없는 큰 자유』, 학고재 2000
새천년 벽두 2월 9일, 프레스쎈터에서는 한 정치인의 1주기 추모식과 더불어 그의 자전적 기록인 『가짐 없는 큰 자유』의 출간기념회가 열렸다. 고인이 정치가로서 산 삶은 길지 않았지만 그의 신선한 의정활동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총선 직전의 분위기 탓이었는지 수많은 거물 정치인들이 운집하여 주최측도 놀라는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정작 추모식의 백미는 그의 생애와 빛깔에 어울리는 당대 예술인들의 진정 어린 참여와 연주로 인한 숙연한 감동의 물결이었다. 황지우(黃芝雨)의 추모시 낭독에 이어 화가 신학철(申鶴澈)·이종구(李鍾九)의 초상화 증정, 김영동(金永東)의 연주 그리고 춤과 북, 마지막으로 그를 위해 특별히 지었다는 장사익의 애간장이 녹아나는 추모노래 등은 고인의 생애를 풀어낸 한바탕의 서사극이었다.
과연 제정구(諸廷坵)가 누구기에 그토록 절절한 애도가 이어졌을까. E.H. 카는 시대의 영웅이란 그 시대의 꿈과 아픔을 품어안고 체현(體現)하는 삶을 산 사람이라 했던가. 그런 점에서 제정구는 영웅 없는 이 시대에 우리 곁을 살다 간 위인(偉人)이었다. 억압의 시대를 정치학도로 산 그의 청년시절은 저항의 연속이었다. 개발독재시대에 농촌공동체가 해체되면서 도시빈민이 무더기로 양산될 때 그는 그들과 함께 있었다. 강제철거로 그들의 보금자리가 깨어져나갈 때 무너지는 공동체를 끌어안고 그 속에서 희망을 두레박질하며 살았다. 온 국민이 혼탁한 정치로 희망을 잃어갈 때 그 탁류를 온몸으로 막아서서 그들과 함께 아픔과 희망을 나누었다. 폭력과 부패가 넘쳐나는 한국현대사에서 그토록 투지와 구도적 자세로 저항과 희망의 몸짓을 그치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가짐 없는 큰 자유』는 급작스런 죽음으로 하마터면 변변한 기록 하나 남기지 못할 뻔한 그의 생애를 조명할 귀중한 자료이다. 여기 실린 그의 글들은 정치가로서 자전적 저서를 낸다는 것이 혹 자기선전용 허섭쓰레기를 만들어내는 일로 비춰질까 하여 몹시 저어하면서 씌어진 것 같다. 이 책은 출판사를 차린 한 후배의 끈질긴 권유로 세상에 나온 『신부와 벽돌공』(1997)이란 책을 근간으로 하고, 거기에 그를 추모하는 지인들의 서문과 발문들을 보태 추모문집으로 꾸며졌다. 아쉬우나마 뒤에 남은 사람들의 허전함을 겨우 달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가 생전에 쓴 『신부와 벽돌공』 서문에는 겸연쩍은 가운데서도 분명하고 당당하게 그의 정치적 행로가 구도의 길임이 밝혀져 있다.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은 그가 수도자와 같은 고뇌를 통하여 정치가로서의 삶에 대한 결단을 내렸음을 잘 이해하고 있다. 얼마 전 고인과 내가 함께 존경해온 분으로부터 그가 생전에 내린 정치적 판단에 문제가 있었다는 걱정하시는 것을 듣고 충격을 받은 바 있다. 그분께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그러면 그분도 김지하(金芝河)씨가 발문에 쓴 대로, “그가 비록 그것의 실천에서 아직 완벽하지 못하고, 그의 의정활동 과정에서 혹시 다른 속되고 잡스러운 중력 중독적인 요소들과 비초월적인 면모들을 드러냈다 하더라도 그런 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도리어 그가 나의 기대를 버리고 ‘사발모임’이라는 안전하고 탄탄한 담론형의 생명운동의 길을 버리고, 위험하기 짝이 없고 부패하고 파렴치하고 위선과 장삿속으로 가득 찬 더럽고 속물적인 중력장의 복마전인 의사당으로 뛰어들었다는 것, 그럼에도 동시에 그와 정반대되는 초월적 영성에의 갈구와 변함없는 혁명가적 정열과 우주생명에의 경건한 집착을 끝끝내 유지했다는 것”(320면)에 동의해주실 것으로 믿는다.
힘든 선거전 끝에 이번에 새로 당선된 고인의 후배이자 동지인 어느 의원의 당선 축하모임에서, 선거전에 정신이 없다가 이제야 의정활동 계획에 열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그의 말을 듣고 이 책을 보내주었다. 고인이 등원하여 첫발을 내디딘 복마전의 안방 같은 국회 건설위에서 고인이 수행했던 빛나는 선한 싸움을 그가 마저 싸워주리라 믿는다. 나아가 386세대를 자처하며 이번 총선에 참여한 분들께도 이 책을 권한다. 국민에게 떳떳할 수 있는 정치가의 길이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온 생을 불사른 그의 정치철학을 배우기 바란다.
미완의 삶이기에 더욱 애절한 연민을 가지고 그의 지난날을 더듬어 읽다보면, 그는 다 되지 못해 쓸모없는 토기가 아니라 반지르하게 완성되지 않았기에 더욱 멋스런 그것의 삶을 살았다는 믿음이 살아온다. 그는, 그가 생전에 “내 삶이 작품일 수 있다면 그 작품을 만들어낸 분이 하느님이란 사실이 감지될 수 있었으면 한다”고 한 그대로 살다 갔다. 그리고 뒤에 남은 우리는 부패한 우리의 삶과 세상에, 등경(燈)처럼 드리워진 그를 보게 된다.
“당신을 생각할 때마다/우리가 이렇게 가슴 저린 것은/당신이 못다 쉰 목숨이 아니라/저물어가는 포구에 당신이/서둘러 부려놓고 간 삶이/너무 아름다운 까닭입니다./당신 뒤에 남은 우리는 아직도,/질척거리는 저자거리에서 녹은 발을 터는데/털면 털수록 제 발이 길을 더럽히는데/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저 雪景 같은 삶 한폭,/걸어놓고 갈 수 있을까요?/(…)/마침내 포구의 격렬한 발동기 소리도 멎고/사위가 숨죽인 한순간의 차가운 눈물 속에서/우리는 당신이 넘어가신 풍경 뒤편/당신의 발자국을 마음으로 따라갑니다./하, 한밤에 스스로 빛나는 그 눈길!/여기 한 생애가 경치가 된 사람의 길!”(황지우의 추모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