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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백욱인 白旭寅

서울산업대 교수, 사회학

 

 

책의 종말과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노르베르트 볼츠 『구텐베르크-은하계의 끝에서』, 문학과지성사 2000

 

 

최근 커뮤니케이션과 미디어에 관한 수많은 논의가 쏟아져나왔지만 정작 그 핵심을 시원하게 파헤치는 연구는 그리 많지 않다. 많은 논의가 근거 없는 장밋빛 유토피아를 그려내거나 도덕주의자의 푸념을 넘어서지 못한다. 변화하는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밝혀내고 미디어와 인간의 인터페이스(만남)가 어떤 변화를 보이는가에 대한 깊이있는 연구는 매우 드문 형편이다. 대부분의 커뮤니케이션 연구는 인터넷을 포함한 뉴미디어가 우리의 생활에 끼칠 영향을 기술적인 관점에서 조망하거나, 그것의 빛과 그림자를 가르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정책적인 틀에서 제시하는 수준을 맴돈다. 그런데 이러한 접근으로는 사람들의 감각체험이나 지각에 어떤 변화가 이루어지는가를 밝혀내지 못한다.

그래서 커뮤니케이션과 미디어의 철학이 필요하다. 우리는 디지털 시대의 미디어 특성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다. 기껏해야 멀티미디어나 쌍방향성을 들먹이는 정도다.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철학적 접근이나 깊이있는 분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노르베르트 볼츠(Norbert Bolz)의 책 『구텐베르크-은하계의 끝에서』(Am Ende der Gutenberg-Galaxis, 윤종석 옮김)는 쉽게 읽히지는 않지만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상황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저자는 커뮤니케이션의 의미를 찾아 근대철학에서 출발하여 현대철학에까지 이론적 여정을 펼친다. 라이프니츠(G.W. Leibniz)의 단자론에서 아도르노(T.W. Adorno)의 미학에 이르기까지 그가 섭렵하는 커뮤니케이션 문제에 대한 이론적 전사(前史)는 그다지 즐거운 여행은 아니다. 왜 이런 전사에 대한 검토가 필요할까? 그것은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철학적 논의와 뉴미디어의 새로운 현실을 연결하여 이해하려는 그의 전략 때문이다.

저자는 맑스주의 붕괴 이후 커뮤니케이션과 관련된 이론의 흐름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포스트모던이론과 하버마스(J. Habermas)의 ‘모던의 철학적 프로젝트’, 그리고 루만(N. Luhmann)의 ‘체계이론’이 그것이다. 그는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과 체계론적 접근을 비교한다. 하버마스와 루만으로 대표되는 현대 사회과학자의 커뮤니케이션 이론이 어떤 철학적 전사들과 연결되는가를 보여주려는 의도이다.

볼츠는 하버마스의 커뮤니케이션 행위이론과 루만의 사회체계이론을 비교하면서 현대적 상황에서 루만의 이론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루만의 손을 들어준다. 그가 지적하는 하버마스식 담화이론의 문제점은, 이성적이고 의사소통에 지향된 커뮤니케이션을 특권화하는 바람에 다른 형태의 의사소통을 평가절하했다는 점과 언어를 과대평가하였다는 점이다.

108-402저자는 사회를 인간의 의식이 아니라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자율적인 커뮤니케이션 기계’라고 본다. 그는 루만의 체계이론에 기대어 이런 주장을 전면화한다. 사회를 자율적 커뮤니케이션 기계로 보는 것은 디지털 시대의 기능주의와 통한다. 1960년대를 풍미하던 싸이버네틱스와 구조기능주의의 체계론이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기반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저자의 사회관은 인간주의가 아닌 체계론적 사회관이다. 그래서 그는 “사회는 비록 그것이 인간과 인간의 의식에 의존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코 그것들로 환원될 수 없는 자율적인 커뮤니케이션 기계”(14면)라는 루만의 지적에 동의한다. “이제 우리는 현재의 수사학을 그것을 담고 있는 테크놀로지로부터 판독해야지 결코 그 테크놀로지를 통해 이루어지는 담론들로부터 읽어서는 안된다”(15면)라는 볼츠의 주장은 맥루언(M. Mcluhan)을 떠올리게 한다. 루만의 기능주의(체계이론)와 맥루언의 결합에서 21세기 디지털 이데올로기의 전조를 읽을 수 있다.

저자가 한국어판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의 중심 테마는 도서문화의 종말과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상황에 관한 비평이다. 이 책의 3장 이하에서는 인터페이스와 지적 디자인을 중심으로 문자의 종말과 하이퍼텍스트의 새로운 세계에 대해 다루고 있다. 언어와 문자는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상황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차지해왔다. 그러나 전자매체의 등장으로 인간 상호간의 의미전달이라는 의미론적 요소와 이를 지탱하는 문자의 중요성이 극단적으로 약화되고 있다.

1960년대에 릭라이더(J.C.R. Licklider)가 ‘컴퓨터는 통신’이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긴 이후 실제로 인터넷의 대중화를 통해 인터넷의 커뮤니케이션 기능이 강화되었다. 컴퓨터가 계산기에서 미디어로 바뀌면 인간과 컴퓨터의 인터페이스가 중요해진다. 미래에는 인간과 사회 모두 이러한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자신을 새롭게 정의하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인터페이스는 디자인의 진화과정이 어떻게 세계에 대한 지각을 만드는가를 보여준다. 그래서 인터페이스의 역사는 미디어의 역사이자 미디어에 관한 인간의 관점의 역사이다. 볼츠는 문자와 이별을 고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지식 디자인’을 그린다. 그것은 ‘시각적으로 직관할 수 있는 사고’와 ‘형상을 지닌 하이퍼텍스트의 시대’이다.

그런데 이미지가 문자를 대체하는 세상의 언어는 더이상 존재의 집이 아니다. 디지털 세상의 인간 존재는 언어의 집이 아니라 수학적 알고리듬(algorithm)이라는 집에서 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자는 감히 쏘프트웨어에 대한 지식이 정치경제학 고전에 대한 독서보다 유용하다고 말한다. 디지털 세상에서는 이념에 바탕을 둔 실천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조작 여부에 따라 판세가 달라진다. 이념지향적 실천은 기계언어의 조작을 통한 실행에 자리를 내주는 그런 시대가 된 것이다. 조정과 조작이 비판과 의사소통을 대신하는 사회는 공론이 설 수 없는 사회다.

그렇다면 기계언어의 조작과 실행이 비판적 이성과 실천을 대신하는 시대에 비판이론이 설 자리는 과연 어디일까? 갖가지 미디어의 조작에도 불구하고 ‘자발적 커뮤니케이션’의 샘물이 솟구치고, 그 샘물들이 연대하면 ‘커뮤니케이션의 생산력’을 낳을 수 있다. 여기에 대한 기대와 의미조차 저버린다면 뉴미디어의 새로움과 내일은 없다. 연대하는 자발적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하다면 뉴미디어의 신시대는 결국 권력과 자본의 힘이 지배하는 구시대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