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논단
교육개혁, 무엇이 잘못되었나
이정우 李廷雨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저서로 『소득분배론』 『세계의 노동자 경영참가』(공저) 등이 있음. joulee@knu.ac.kr
✽이 글의 초고를 읽고 유익한 논평을 해주신 김균·김민남·김장호·도정일·이종오·최원식·최장집 선생에게 감사한다. 이 글에서 남은 오류는 전적으로 필자의 것이다.
또 한차례의 수능시험이 있었고, 온세상이 대학입시로 난리를 겪었다. 텔레비전 뉴스의 단골메뉴는 대학입시였다. 신문의 여러 면이 수능시험 문제로 도배되다시피 하는 나라가 우리나라말고 또 있을까? 늘 그랬듯이 수능시험 아침에 또 몇명의 학생이 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이 우리를 참담하게 만든다. 우리는 왜 이렇게 교육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으며, 어떻게 하면 이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교육의 중요성을 피부로 느끼며 평생을 살아간다. 특히 최근에는 ‘정보화’가 강조되고, ‘지식기반사회’의 도래가 점쳐지면서 교육의 중요성이 날로 높아지는 것이 세계적 추세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현실은 어떠한가? “학생들이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 20년 전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우리의 학교현실은 낙후되어 있다. 학교의 건물과 시설뿐만 아니라 그 기관을 움직이는 사람과 쏘프트웨어도 별로 나아진 게 없다. 그래서 교육에 관한 한 우리의 장래는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다. 오히려 답답함, 걱정, 분노, 이런 것이 많은 사람들이 교육에 대해 갖는 느낌일 것이다. 최근 여론조사에 의하면 이민가고 싶다는 사람이 대단히 많은데, 그 이유로는 한심한 정치와 더불어 끔직한 교육도 큰 몫을 차지한다.
이 글은 한국의 교육문제를 걱정하는 한 사람으로서 필자가 평소에 관찰하고 생각한 것을 정리해본 것이다. 필자는 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교육전문가는 아니다. 그러나 “한국경제는 경제학자들이 망쳤고, 한국교육은 교육학자들이 망쳤다”고 하는 속설에 용기를 얻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글을 쓰는 데는 필자의 학교생활과 지난 4년간 학교운영위원 경험, 그리고 주위에서 보거나 들은 이야기 등이 바탕이 되었다.
1. 교육개혁의 끊임없는 실패
최근 정보와 지식의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세계 각국이 교육개혁에 한창이지만 아마 한국만큼 열심히 교육개혁을 해온 나라도 드물 것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육개혁을 추진하는 위원회가 설치되었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1 쉽게 기억할 수 있는 것만 해도 김영삼정부에서는 ‘교육개혁위원회’가 있었고, 현정부에서도 ‘새교육공동체위원회’라는 멋진 이름의 위원회가 있었는데, 그것도 부족했던지 ‘교육 및 인적자원위원회’라는 새로운 위원회가 출범했다.
한국의 교육개혁은 대학입시제도를 바꾸는 것과 거의 동의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입시제도 바꾸기에 매달려왔다. 다음의 표에서 보듯이 해방 후 지금까지 대학입시제도는 큰 틀만 해서 열두 가지나 시험해보았으니, 하나의 제도가 평균 5년도 못 간 셈이다. 대한민국은 입시의 시험무대요, 학생은 실험대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입시제도를 이처럼 자주 바꾼 것은 짐작컨대 우리나라의 고질병인 ‘입시지옥’으로부터 학생들을 해방하고자 하는 충정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런 충정이야 누가 나무랄 수 있을까? 그러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입시제도가 바뀌어왔으나 기이하게도 개선되기는커녕 그 반대의 길을 걸어왔다.
우리나라의 교육상황이 악화되었다는 증거는 충분히 많다. 첫째, 학생들의 고통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예전에는 입시지옥이라고 해도 일부 학생들이 일시적으로 겪는 고생 정도였는데, 이제는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여러 해에 걸쳐 일상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으며,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학교와 학원에서 시달리는 참상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한국 학생들이 받는 스트레스를 측정한다면 그것은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는 수준일 것이다.
둘째, 과외비 지출이 엄청나게 증가하였다. 과외를 망국병으로 지목하여 법으로 금지했던 전두환정권 시기에 과외가 엄청나게 많았으려니 짐작하기 쉽지만 사실은 지금에 비하면 애교에 불과하다. 과외가 이른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 의해 불법화된 1980년 7월 이전에 과외를 받고 있던 학생은 초등학생이 13%, 중학생이 15%, 고등학생이 26%로 조사되었고, 1년 과외비 총액이 3275억원이었다.2 그러나 그후 교육개혁을 거듭하고 난 1999년 12월 교육부가 코리아리서치에 의뢰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초등학생의 70%, 인문계 고등학생의 55.5%가 과외를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중앙일보』 2000.4.28). 학생 1인당 연평균 86만 5000원, 가구당 192만 5000원을 과외비로 썼다. 추계방법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과외비 총액은 연 7〜12조원으로 추산됨으로써 그동안의 물가상승을 감안해도 1980년에 비해 놀랄 만큼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한 추계에 의하면 1982년에 GDP의 0.4% 수준이던 과외비가 1998년에는 2.9%로 높아졌다.3 실제로 한국의 과외비 수준은 세계적으로 과외로 악명 높은 일본의 3〜4배에 달한다(『문화일보』 2000.2.18).
지금도 매년 각 대학에서는 연례행사처럼 입시제도를 바꾸고 있고, 한 해가 멀다 하고 제도가 바뀌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번잡과 호들갑에도 불구하고 입시제도가 좀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사실 우리나라처럼 학벌이 인생을 좌우하는 이른바 학력사회(credential society)에서는 일류대학에 대한 만성적 초과수요가 있을 수밖에 없고, 이런 상황에서는 입시제도를 어떻게 바꾸더라도 근본적인 문제해결은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학교육에 대한 초과수요 자체를 감소시키는 정책(예컨대 학력간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의 축소 등)이 있기 전에는 아무리 입시제도를 갖고 씨름을 하더라도 입시지옥을 해결하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다.
유럽에서는 대학 입학이 쉽고, 등록금도 무료인데다가 그것도 부족해서 국가에서 학비를 보조해주는 나라도 많다. 이런 좋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구태여 대학에 가려 하지 않고 각자 가고 싶은 진로를 선택하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사회구조가 우리나라와 같은 학력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나라에서 입시제도 위주의 교육개혁이 지금까지 실패를 거듭한 것은 정책선택이나 정책운용상의 실패라기보다 근원적 발상의 실패라고 할 수 있다. 즉, 입시제도를 획기적으로 바꾸어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보려는 발상 자체가 과욕이며,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듭된 교육개혁의 실패는 결과적으로 학생·학부모를 갈수록 더 혼란에 빠뜨리고 괴롭히며, 국가의 귀중한 자원을 낭비하는 것일 뿐이다.
2. 현 정부의 오류
현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우리나라의 교육문제는 개선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정책 실패는 다양한 방법으로 대학에 가도록 한다는 이른바 ‘무시험 입학’ 정책이다. 공부를 잘하지 못해도 대학에 갈 수 있는 것처럼 선전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학생들은 여전히 내신성적에 매달려야 하며 수능시험도 여전히 치러야 하는데, 이게 어찌 무시험인가?
학생들을 성적순으로 한 줄을 세우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평가하고, 여러 개의 문을 열어 대학에 입학시키겠다는 정책은 듣기에는 그럴듯하나 이미 많은 부작용을 드러내고 있다. 학생들의 공부 부담을 줄이고, 부모의 과외비 지출도 줄여보자는 취지는 좋지만, 현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학생들은 수행평가 때문에 쉴새없이 들볶이고, 한문·컴퓨터 등 자격증 따기, TOEIC과 TOEFL 시험, 논술·수학·과학·영어 경시대회 등 각종 대회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고, 이를 위해 신종 과외가 번창하니 부모들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지게 생겼다.
온갖 시험과 자격증에 덧붙여 학교공부는 그것대로 여전히 잘해야 한다. 그러니 공부만 잘하면 대학 가는 시대는 끝났다는 듯한 정부의 선전은 빛 좋은 개살구일 뿐, 실제로는 부담이 2중, 3중으로 늘어났을 뿐이다. 한 줄로 세우는 것이 문제라 하여 여러 개의 줄을 만들어놓았으나 어느 줄에 서느냐에 따라 당락이 좌우될 것이니 눈치작전은 더 심해질 것이고, 전보다 요행, 운수가 훨씬 크게 작용하게 되었다.
1999년부터 학생들의 중·고등학교 성적을 절대평가한다는 교육부의 새로운 시도도 한 줄 세우기를 극복하려는 사고방식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중앙일보』 1999.4.3). 교육부의 주장을 보면 수행평가방식이 도입되었으므로 구태여 상대평가를 할 필요가 없이 절대평가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국의 교육현실을 도외시한 순진한 발상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상대평가 대신 절대평가 방식을 도입했을 때 각 고등학교가 한명이라도 더 ‘수’를 주려는 것은 당연하며, 이미 여러 학교에서 문제 쉽게 내기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문제를 어렵게 내어 평균점수가 낮게 나온 고등학교에서는 점수 잘 주는 이웃학교로 전학가야겠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각 대학에서는 절대평가로 인해 학교 내신성적의 변별력을 믿지 못하게 되자 성적의 우열을 가려내는 방법을 짜내느라 골몰하고 있다. 이런 불필요한 번잡 때문에 억울한 학생들만 생기고 있다.
현 정부 등장 이후 나타난 또하나의 새로운 변화는 수능시험을 쉽게 출제하는 정책인데, 이 역시 잘못된 정책의 표본으로 손꼽을 만하다. 수능시험을 쉽게 내면 과외를 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라는 단순한 발상에서 수능시험을 쉽게 출제함에 따라 시험의 변별력은 크게 축소되었다. 2000학년도 수능시험에서 수학 만점자가 1만 6402명(1999학년도는 1744명), 영어 만점자가 1만 6675명(1999학년도는 5635명) 나오는 웃지 못할 현상이 발생하였다. 그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2001학년도 수능은 더욱 쉬워져 전년도보다 평균성적이 28점 올랐고, 전과목 만점자가 66명이나 나왔다. 거의 만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390점 이상 학생이 8천명이나 되는데, 수많은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1〜2점 때문에 눈치작전을 벌이고 발을 동동 구르는 안타까움은 필설로 형용하기 어렵다.
수능시험 문제가 너무 어려우면 학교공부를 착실히 한 학생보다 고액과외를 한 학생이 유리할 것이니 너무 어렵게 출제하는 것이 곤란하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문제가 쉬워지면 학생들의 실력을 정확하게 평가하기가 어려우며 수험생들은 한 문제의 실수가 당락을 좌우하므로 더욱 큰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공부를 아주 잘하는 학생도 이제는 안심할 수가 없다. 이것은 실력의 평가라기보다는 실수 안하기 경쟁이다.
일부에서는 쉬운 수능시험이 최고 3%의 학생들에게만 변별력이 없을 뿐 그 아래 대부분의 학생에게는 변별력이 있다는 주장을 펴지만, 사실 변별력 상실은 위에서부터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시험이라면 골고루 변별력이 있어야지 최고 3%의 수험생에게는 변별력이 없어도 무방하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그리하여 수능시험도 운이 크게 작용하고, 논술이나 면접, 혹은 운이 당락을 좌우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게다가 낙방생들에게는 ‘내년에는 다시’ 하는 기대감을 부추김으로써 재수, 삼수를 조장하는 부작용도 가져오고 있다.
수능시험을 쉽게 낸다고 과외가 줄어드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수능시험 문제가 어려우면 소수의 고액과외가 나타날 것이고, 문제가 쉬우면 다수의 저액과외가 있을 것이므로 어느 쪽이 꼭 낫다고 할 수도 없다. 오히려 전보다 훨씬 많은 수의 학생들에게 기대치를 높여주어 아마 과외비 총지출은 더 커질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위에서 본 것처럼 최근 몇년간 과외비 지출이 급증하고 있는데, 이것은 쉬운 수능시험의 여파일 가능성이 있다. 만일 수능시험이 불필요하다면 시험 자체를 폐지함이 옳지, 시험을 치면서 변별력을 없앤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정부 당국이 처음부터 수능시험의 변별력 축소를 원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1997년만 해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은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 문항수와 총점을 늘리면서 수리탐구I 영역에 주관식 문항을 도입하고, 외국어 영역의 듣기평가를 강화하는 등 출제의 질을 향상시키도록 하였다.”4 이 방향이 불과 1년 만에 변별력을 줄이는 방향으로 180도 선회한 것은 정권이 바뀌면서 수능시험을 쉽게 출제하라는 김대중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수능시험 문제가 쉬우면 학교교육이 정상화하고, 과외가 줄어들 것이라는 단순한 발상은 틀렸음이 이미 증명되었을 뿐 아니라 혼란과 부작용만 가져오고 있으므로 당국은 대통령의 눈치를 살피지 말고 소신껏 출제함이 마땅하다.
설상가상으로 2002학년도부터는 수능시험의 총점제를 없애고 등급제를 도입한다고 한다. 소수점 이하의 점수차이로 당락이 좌우되는 억울함을 없앤다고 하는 새로운 제도 때문에 새로운 억울함과 불공평만 늘어날 것이다. 예를 들어 두 학생 사이에 1점의 점수차가 과거에는 1점차로 끝나지만 등급제 아래에서는 서로 다른 등급으로 귀착될 수 있고, 이는 종전보다 훨씬 큰 불공평을 가져올 수 있다. 또한 동일 등급 안에 존재하는 수십점의 차이가 무시되면서 생기는 불공평 문제도 있다. 이런 새로운 불공평에 비교하면 과거의 소수점 이하의 억울함은 차라리 약과다. 개선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개악이 속출하는 이유는 철학과 청사진 없이 대증요법에 치중하기 때문이다. 이런 교육개혁은 제발 그만두자.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정부의 교육정책이 1〜2년 새 왔다갔다하는 것은 정말 큰 문제다. 고교 2학년 딸을 둔 어느 학부모는 이번 수능등급제 발표에 대해서 “딸이 1학년 때는 내신으로만 뽑는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수능성적 등급제를 쓴다니 학생들은 수능도 잘 봐야 하고 특기적성도 길러야 하고, 학생부 성적도 올려놔야 하고, 논술·면접 대비도 해야 하고, 너무나 많은 걸 한꺼번에 준비해야 하니 어떻게 하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한겨레』 2000.4.21). 이런 항변에 대해서 정부는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요컨대 현 정부의 실책은 각종 시험의 변별력을 축소하기로 작정한 데서 온 것이다. 학교 내신성적을 절대평가로 바꾸고, 수능시험을 쉽게 내는 것이 그 내용이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자. 한국처럼 대학입학에 대한 초과수요가 있는 상황에서 그래도 가장 공평한 입학기준은 성적이 아닌가? 성적 이외 무엇으로 학생들을 가려낼 수 있단 말인가? 선착순으로 할 것인가? 돈 많이 내는 사람을 뽑아줄 것인가? 그래도 대다수가 승복할 수 있는 기준이 성적인데, 교육부는 성적순으로 한 줄을 세우지 않는다는 그럴듯한 꿈에 빠져 연거푸 실책을 거듭하고 있다. 이제라도 현실을 인정하고, 시험의 변별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되돌아감이 옳다.
3. 극단적 처방=서울대 폐교론?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나라의 입시지옥은 우리 사회가 학력사회라는 사실에서 파생되는 것인데, 학력사회의 꼭대기에 서울대가 위치하고 있다. 심지어 연·고대에 다니는 학생들조차 적지 않은 숫자가 열등감을 느끼며, 그중에는 재수를 하는 학생도 나올 정도이니, 우리나라가 얼마나 서울대를 정점으로 한 학력사회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선진국에는 일류대학이 여러 개가 있어서 서로 경쟁적으로 발전하고 있고, 학생들은 그중 어디를 다녀도 자부심을 갖는 데 비해 우리의 실정은 서울대 1극체제하의 엄격한 대학서열화로 특징지을 수 있다.5 이것이 한국교육의 비극이요 문제의 근원이다.
우리의 교육문제가 워낙 심각하고, 또 해가 갈수록 문제가 풀리기는커녕 악화되기만 하다보니 일부 논자들은 아주 극단적인 처방을 내놓기도 한다. 즉, 우리나라 입시지옥의 화근이 서울대에 있으니 아예 서울대를 폐교하자는 주장이라든가, 그만큼 극단은 아니더라도 프랑스의 빠리대학처럼 서울대를 몇개로 분할하여 지방에 분산시키자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런 주장이 나올 정도로 서울대가 우리나라 교육계에서 갖는 문제점이 크다는 데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6
서울대 폐교는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교육문제를 상당부분 해결해줄 것이란 주장에 필자는 동의한다. 혹자는 서울대를 폐교하면 그 대신 연·고대가 서울대 위치가 되어 역시 서열화될 것이니 소용이 없다는 반론을 펴지만, 사실 서울대만 빼고 나면 그 바로 밑에 있는 몇개의 대학 사이에 그렇게 큰 격차가 없으므로 바람직한 경쟁체제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게 되면 학생들도 ‘일류대학 여러 개 중 하나만 가면 충분하다’는 식으로 생각이 바뀌면서 지금과 같은 결사적 입시경쟁이 상당히 완화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서울대가 없어지면 지금처럼 서울대가 모든 학과의 1등을 독점하는 체제 대신, 예를 들어 ‘물리학은 어느 대학이 좋고 역사학은 어디가 최고’라는 식으로 바뀔 가능성도 비로소 생긴다. 이것은 바로 상호경쟁 속에서 균형잡힌 발전을 하는 선진국의 대학 모습이다.
그러나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서울대 폐교론이 갖는 가장 큰 약점은 그 실현가능성이 낮다는 것이다. 혹시 앞으로 어느 대통령후보가 교육망국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를 선거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된 뒤 국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이를 범국민적 과업으로 추진한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는 한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차선책으로 서울대를 분산시켜 여러 개의 국립대학에 통합시키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공대는 강원대에, 인문대는 제주대에. 이렇게 되면 강원대는 공대가 강해지고, 제주대는 인문대가 강해지면서 일류 사립대들과 경쟁체제에 들어갈 수 있다. 이는 앞의 폐교론보다 온건하고 부작용도 적으므로 실현가능성이 조금 더 높은데, 이 역시 문제는 서울대 자체의 완강한 반대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과연 자신의 기득권을 희생해가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려는 자세가 되어 있는 서울대인이 몇명이나 될까?
또 어떤 사람은 대학입시 자체를 없애고 모든 학생들이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마음대로 입학할 수 있도록 하자는 유토피아적인 제안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모든 수험생들이 일단 서울대에 입학하고 보자는 상황이 벌어질 텐데, 그 일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또다른 파격적인 주장은 아예 대학을 없애자는 주장이다.7 이는 21세기에는 구태여 대학이라는 장소에 학생들을 모아서 가르칠 필요가 없고, 국내외 유명 교수들의 강의를 녹화하여 비디오나 CD롬에 넣어서 멀티미디어 식의 원격강의로 대체하자는 주장이다. 그러나 원격강의에 대해서는 학생들과 직접 눈을 마주치면서 질문과 토론을 할 수 없으므로 도저히 교육효과가 나지 않는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이처럼 파격적인 몇가지 주장은 우리나라 교육문제가 워낙 심각하기 때문에 나오게 된 극단적인 처방이다. 그 창안자들의 우국충정은 충분히 이해가 가나 처방의 실현가능성, 부작용, 비용 등을 생각하면 그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을지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이런 극단적 처방 이외에 부작용이 적고, 비용도 적게 들면서 당장 시행할 만한 중요한 개선방안이 여럿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4. 시급한 몇가지 개혁
지금까지 입시제도 위주의 거시적 교육개혁에만 매달리다보니 정작 해야 할 개혁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입시제도의 큰 틀을 건드리지 않더라도 당장 시급한 개혁이 많이 있다. 우리의 관심을 학교 수업과 시험에 국한하여 몇가지 시급한 개혁과제를 제시해보고자 한다.8
수업의 개선
첫째, 수업시간을 줄여야 한다. 한국의 수업시간은 초등학교가 연평균 1054시간, 중·고등학교가 1156시간으로서 세계적으로 가장 긴 편에 속한다. OECD 나라의 중학교 수업시간이 연평균 730여 시간에 불과한 것과 비교하면 우리나라 학생들이 얼마나 긴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렇게 장시간의 수업은 과거의 포드주의적 대량생산방식에는 잘 맞을지 모르나 지금 다가오고 있는, 창의력을 중시하는 지식기반사회와는 전혀 맞지 않다.
한국의 수업시간은 대폭 축소되어야 하며, 그 방법으로 우선 토요일 수업을 없애 주 5일 수업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현재 정부가 추진중인 주 40시간 근무제가 가장 먼저 실행 가능한 곳은 바로 학교다. 동시에 겨울방학을 연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겨울철에 난방을 제대로 해주는 학교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학생들은 하루종일 냉장 교실에서 동태가 되어서도 살아남는 훈련을 받고 있다. 또한 중3, 고3의 경우에는 학년의 실정에 따라 수업시간수를 교장 재량으로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학년 말에는 이미 진학은 결정되었고, 더 배울 게 없어서 교실에서 이런저런 비디오만 보다가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는 법정 수업시간만 해도 국제적으로 가장 긴 편에 들어가는데, 그것도 부족한지 고등학생들은 보충학습, 야간자율학습(말만 자율일 뿐 자율이 아닌 경우가 많다) 때문에 방학도 없고, 밤늦게까지 학교에 붙들려 있기 일쑤다. 다른 곳은 몰라도 대구의 거의 모든 고등학교에서는 밤늦게까지 야간자습을 하고 있다. 이런 것까지 포함하면 고등학생들의 수업시간은 아마 연 1500시간은 충분히 될 것이다. 이것은 교육이 아니라 차라리 고문에 가깝다. 어느 현직교사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하루 15〜17시간 동안 딱딱한 나무의자 하나에 몸을 의지함으로써 성장기의 우리 아이들은 등이 굽고, 체력이 약화되어 만성피로, 소화불량, 구토증세를 일으키고, 상당수는 변비에 시달리고 있다. 과중한 입시부담과 성적 비관으로 인해 자살충동 혹은 가출유혹을 느끼는 아이들이 70%가 넘는다는 통계가 나왔으며, 계속되는 수능문제 풀이 연습으로 아이들의 창의력이 마비되고 자신의 삶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나가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9
둘째, 교과과정을 전면적으로 개편해야 한다. 우선 국어·영어·수학의 비중이 지나치게 높은 것을 시정할 필요가 있다. 사실 국·영·수는 다른 과목을 공부하기 위해 필요한 이른바 ‘도구과목’이므로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에게는 매우 중요하지만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바로 사회에 진출하는 학생들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현재 고등학교의 수업시간수와 수능시험에서 차지하는 국·영·수의 비중은 지나치게 높으므로 대폭 감축해야 마땅하고, 그 대신 좀더 실천적인 과목들을 강조해야 한다고 본다.
예를 들어 필자는 문과계열 중에서 가장 수학을 많이 쓴다고 하는 경제학을 공부해왔지만 고등학교 수학시간에 삼각함수를 배운 이후 지금까지 한번도 그걸 구경조차 한 적이 없다.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고 이런 비슷한 내용이 부지기수로 많은 것이 우리나라의 교과과정의 현주소다. 이건 도대체 누구를 위한 공부인가?
국·영·수보다는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는 환경, 실기, 실용적 과학 과목이나 민주시민의 덕성을 함양하는 역사, 사회, 철학 과목을 가르치는 것이 더 쓸모가 많을 것이다. 특히 이웃 중국과 일본에서 역사교육을 강화하고 있는 것은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10 이과 학생에게 수학이 기초이듯이, 문과 공부에는 역사가 바탕이라고 생각한다.11
지금까지 중·고등학교의 교과과정과 수능시험의 배점은 여러 과목 사이의 치열한 세력 다툼의 결과 대단히 기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므로 앞으로는 ‘과목 이기주의’를 버리고 학생들에게 필요한 과목이 무엇인지 파악해 근본적으로 판을 새로 짤 필요가 있다.
셋째, 교과서를 새로 써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교과서는 지나치게 얇고, 암기 위주로 되어 있어서, 사고력·창의력 중심의 교육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한 페이지 안에 외어야 될 용어—연도, 사람 이름, 이론 이름, 제도 등 고유명사—가 열개 스무개씩 나오는 게 보통이다. 이런 교과서를 가지고 21세기의 지식기반사회를 대비하여 ‘창조적인 민주시민 육성’ 운운하는 것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워낙 얇은 책에다가 가르쳐야 할 온갖 사실을 나열하다보니 암기식이 될 수밖에 없고, 그런 점에서는 교과서 집필자들의 고충도 이해할 수 있겠지만, 현재의 교과서는 읽고 생각하기 위한 책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다.12
교과서를 개선하여 다소 두께가 늘어나더라도 내용이 좀더 풍부하고, 흥미있게 만들려면 두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하나는 현재 학생들이 한 학기에 배우는 과목수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과목수가 워낙 많으니 책이 얇아질 수밖에 없고, 또 학생들이 여러 과목으로 정신이 분산되어 공부하는 데도 어려움이 따른다. 이를 줄여서 한 학기에 6,7과목 정도만 공부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사회·과학도 여러 과목을 다 공부할 것이 아니고, 각자 취미에 따라 한두 개씩 선택해서 공부함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동일과목을 여러번 반복해서 배우도록 되어 있는데, 이를 시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경제’ 분야는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사회’ 책에서 나오고, 다시 고등학교에서 ‘일반사회’나 ‘경제’ 책에서 비슷비슷한 내용을 되풀이하여 배우도록 되어 있다. 이는 내용도 부실하고, 공부의 흥미를 떨어뜨리는 비효율적인 방식이다. 차라리 적당한 시기에 한번만 배우도록 한다면 교과서도 지금보다 세배쯤 두껍게 쓸 수 있고, 자연히 교과서 내용도 충실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초·중·고등학교를 통합하여 교과과정의 중복과 낭비를 줄이는 재편작업이 긴요하다. 교과과정을 지금처럼 중복 운영하는 이유는 아마 과거에는 많은 학생들이 초등학교나 중학교만 졸업하고 사회로 진출하니 조금씩 맛이라도 보여주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생긴 현상이라고 이해된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모든 학생이 고등학교까지는 다니므로 초·중·고등학교 12년을 놓고 교과과정을 새로 짤 필요가 있다.
시험의 개선
첫째, 시험과잉 현상을 해소해야 한다. 우리의 학교에서는 시험을 너무 많이 친다. 물론 시험 자체는 학생들이 배운 내용을 어느정도 이해하느냐를 확인하기 위해서 필요한 절차이긴 하지만 현재 한국의 학교에서는 너무나 시험을 자주 치르기 때문에 배우기와 시험의 비중이 불균형을 이룬, 말하자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많은 시험이 모두 어떤 형태로든 성적에 반영되므로 학생들에게는 끊임없는 심리적 압박감을 주고 있다. 시험을 치더라도 학생들의 이해도를 확인하는 것으로 끝나고 성적에는 들어가지 않는 시험(소위 쪽지시험)을 늘리고, 성적에 반영되는 시험은 지금보다 빈도를 줄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현재 정부에서는 과다한 시험을 줄이기 위해 개혁을 시도하고 있기는 하다. 그것이 이른바 ‘수행평가’라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종전의 시험이 결과의 테스트인 데 반해, 수행평가는 과정의 평가라고 하는 차이가 있다고 한다. 언뜻 보면 이것은 상당한 개선인 듯하다. 하지만 다른 많은 좋은 제도들이 한국에 이식되면 왜곡되거나 변종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수행평가 역시 그러하다. 여러 과목에서 동시에 너무 많은 수행평가 과제가 주어져 학생들에게 지나친 부담을 주고 있다. 또한 수행평가의 상당부분이 컴퓨터와 인터넷을 이용하도록 되어 있어서 그같은 환경을 갖추지 않은 가정은 상대적으로 불리하다.
교사들은 교사들대로 문제다. 그렇지 않아도 많은 잡무 부담에 수행평가 채점 부담이 보태졌다. 수행평가 분량이 많다보니 교사들이 일일이 채점하기가 어려워 형식적·양적 채점을 하는 경우가 많아서 학생들의 불신을 사고, 원래의 좋은 취지도 퇴색하고 있다. 이런 제도는 학급당 학생수가 20명 정도로 줄어들고, 교사들의 수업시간수도 줄어드는 먼 장래에 실시함이 옳을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실행해온 온갖 교육개혁보다는 학급당 학생수를 줄여나가는 것이 훨씬 실익이 있으며, 진정한 교육개혁을 위한 첫걸음이 된다고 본다.
둘째, 예·체능은 무시험으로 하자. 시험을 줄이는 데 가장 적합한 과목이 예·체능이다. 예·체능 과목은 꼭 점수차를 낼 필요 없이 학생의 수업참여 정도에 따라 평가하되 합격·불합격 정도만 가려도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체육과목은 각종 운동경기의 복잡한 규칙까지 모두 암기하여 시험을 치르고 있고, 미술·음악 과목도 유명한 화가, 작곡가 이름은 물론 온갖 어려운 이론을 암기시켜 필기고사를 치른다. 그러나 미술시간에는 그림을 그리고, 음악시간에는 좋은 음악을 감상하고 노래를 부르면 좋은 것이고, 학생의 참여 정도에 따라 합격·불합격만 가려도 충분하다. 그것이 오히려 진정한 미술·음악 교육이라고 생각된다. 체육도 운동장에 나가 열심히 공을 차고 체력을 단련하는 게 좋은 것이지 복잡한 경기규칙이나 경기의 역사 따위를 학생들이 암기할 필요는 없다. 그런 것은 나중에 체육전문가나 심판이 되는 사람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예능 과목이 다른 과목에 비해 덜 중요하거나 불필요하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예능 과목은 대단히 중요하며 사실 가장 재미있는 과목들이기도 하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교육을 해야 진정한 예체능교육이 되고 학생들도 즐겁게 수업에 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개혁이 필요한 것이다.
셋째, 수능시험의 개선이 필요하다. 첫머리에서 입시제도 개혁은 그 자체 한계가 있다고 했지만 그래도 약간의 개선 여지는 있다고 판단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내신성적만 갖고 학생을 선발하는 경우에 예상되는 문제점(같은 학교 친구들 사이의 지나친 경쟁이 가져오는 비인간적·비교육적 측면, 치맛바람 우려 등)이 너무 크므로 수능시험은 필요하되, 시험의 난이도는 지금보다는 약간 어렵게, 즉 몇년 전 정도의 난이도로 출제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리고 하루의 실수가 평생을 좌우하는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 수능시험을 2회 치르되 상대평가 방식을 도입하면 난이도 차이에서 발생할 문제점은 쉽게 극복될 것이다. 문제은행 식으로 출제한다면 출제교수들을 한달씩이나 호텔에 감금하여 고급인력을 낭비하는 지극히 불합리한 국가적 연례행사 없이도 여러차례 시험을 치르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13
그리고 수능시험에서 과목당 배점은 조정될 필요가 있다. 국어가 차지하는 비중(400점 중 120점)은 과다하므로 낮추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국어는 중요한 과목이기는 하지만 단일 과목으로서 이 정도로 높은 배점이 필요하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게다가 국어는 지극히 애매모호한 문제가 많아서 과연 어느 것이 정답인지를 웬만한 식자라도 알아내기 어렵고, 심지어는 국어교사들조차 답을 가려내기 어려운 문제가 많다.
국어과목은 책을 많이 읽고, 글을 많이 써보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함이 상식인데도 불구하고 현재의 국어교육은 전혀 그렇지 못하고, 난해하기 그지없는 사변적 문제를 갖고 학생들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데, 이런 식의 국어교육이 무슨 도움이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수능시험의 과목 명칭도 실명(實名)이 일치하도록 바꾸어야 한다고 본다. 즉, 언어→국어, 외국어→영어, 수리탐구I→수학, 수리탐구II→사회·과학으로 바꾸되, 국어·영어·수학·사회·과학 5대 과목이 똑같이 80점씩 되도록 함이 옳다고 본다. 다만 사회와 과학은 같은 비중으로 할 게 아니고, 문과의 경우에는 사회 비중을 높이고, 이과의 경우에는 과학을 높이는 조정이 필요할 것이다.
또 국제화시대에 발맞추기 위해 제2외국어를 살릴 필요가 있다. 지난 입시부터 제2외국어가 부활하였으나 각 대학간의 눈치작전 끝에 결국은 제2외국어를 시험과목으로 채택한 대학이나 학과는 소수에 불과하고 점수 반영비율도 아주 낮은 것으로 낙착되고 있는데, 이는 국제화라는 시대적 조류와 맞지 않는다. 일본처럼 외국어로서 영어·독어·불어 중 택일하여 시험을 보는 방법도 장점이 있어 보인다.14
참고로 중국과 일본이 택하고 있는 대입국가고사와 비교해보면 한국 수능시험의 특징 두 가지가 드러난다. 하나는 국어 배점이 높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교과목 수가 매우 많다는 점이다.15 중국은 문과의 경우 국어·영어·수학·정치·역사·지리의 여섯 과목이고, 이과의 경우에는 국어·영어·수학·정치·물리·화학·생물의 일곱 과목이다. 일본의 수험생은 국어·외국어(영어·독어·불어 중 택일)·수학·사회(택일)·과학(택일)의 다섯 과목을 준비한다. 더구나 사립대학에 지원하는 학생은 국가고사 없이 대학별 고사만 치르는데 평균 2.5과목에 불과하다. 영국·프랑스의 경우도 다섯 과목 정도이다. 이에 비해 한국의 수험생은 열 과목 이상을 공부해야 하니 너무 부담이 크므로 이를 줄여줄 필요가 있다.
넷째, 논술과 면접은 없애자. 방금 보았듯이 한국의 학생들은 학교에서의 과다한 과목의 공부와 시험, 그리고 수능시험만으로도 크나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그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만들어낸 것이 논술과 면접이다. 논술과 면접을 점수화해서 입시에 반영하는 대학이 많고, 특히 일류대학이라고 자부하는 대학이라면 여기에서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논술과 면접은 장점보다 단점이 훨씬 많으므로 폐지함이 옳다고 본다.
우리나라에서 많은 제도가 그렇듯 논술고사의 취지는 좋다. 지금까지의 주입식·암기식 공부의 병폐를 해소하고, 고도의 창의적 사고력을 묻는 논술고사를 치름으로써 학생들로 하여금 고전을 비롯한 광범한 독서를 권장하고 사고력과 글쓰기 훈련을 시킨다는 것이다. 문제는 독서할 시간은커녕 잠잘 시간도 부족한 것이 한국 고등학생의 현실이란 점이다.16 독서는 애당초 들어올 자리도 없고, 고전·명작에 대한 요점 정리와 글쓰는 요령 훈련에 치중하고 있는 것이 학생들의 논술 대비이며, 이런 새로운 시장을 노리고 동·서양 고전을 요점 정리한 책들이 서점을 채우고, 고액 논술과외가 침투하고 있다. 특히 지난번에는 수능시험이 쉬워 논술이 당락을 좌우하게 됨에 따라 심지어는 1천만원짜리 고액 논술과외가 등장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로 보인다.
각 대학의 논술고사 출제는 어떤가? 출제자를 제외하고는 아마 대학교수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도 쓰기 어려운 문제가 태반인데, 친절하게도 우리나라 신문들은 이를 전면을 할애하여 기사화한다.17 그러니 다른 대학에 뒤질세라 각 대학 출제교수들은 호텔에 갇힌 채 매년 더욱더 난삽하고 추상적인 문제내기 경쟁을 벌인다. 결국 논술고사는 학생들의 입장은 무시한 채 교수들이 고도의 지식을 자랑하는 장일 뿐이다.
게다가 논술의 채점도 문제가 많다. 채점교수들은 그 많은 답안을 짧은 시간에 읽다보니 공정하게 채점하기가 어렵다. 대개 두 명의 교수가 한 학생의 답안을 읽고 채점을 하는데, 두 채점자 사이에 큰 점수 차가 나는 경우가 꽤 많다. 논술고사에서 어떤 채점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몇점 정도의 점수는 예사로 달라질 수 있다. 학생들의 3년간의 고생을 생각하면 정말 이건 근본적으로 불공정한 일이므로 논술고사는 폐지함이 옳다고 본다.
면접시험은 또 어떤가? 수험생이 심지를 뽑은 문제에 따라 난이도에 상당한 차이가 있으므로 운이 많이 작용한다는 문제점 이외에 더 근본적으로는 말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똑똑한가 하는 점이다. 그런데도 불과 몇분 동안 학생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몇점의 점수차를 낸다. 교수들 중에는 학생 1인당 1분 정도만 물어보고 후딱 채점해버리는 고능률을 발휘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건 면접시험보다 관상시험에 가깝다. 이런 식으로 점수를 매겨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정말 묻고 싶다.
5. 맺는 말
이상에서 우리는 한국의 교육개혁이 얼마나 실패를 거듭해왔는가를 보았다. 이제는 상식에서 출발하여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교육문제에 대해 무언가 획기적인 해결책을 내놓겠다는 영웅심리를 버려야 한다. 임기중에 단칼에 문제를 해결하여 불후의 업적을 쌓으려는 정치가나 관료의 욕심은 대단히 위험스러우며, 지금까지 숱한 실패와 시행착오의 근본원인이었으므로 특별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입시지옥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우리의 사회구조가 학력사회를 탈피한 먼 장래에야 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특히 현 정부가 추진한 교육개혁의 핵심은 대학입시에서 성적순으로 줄 세우기를 하지 않는다는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역효과를 낳는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수능시험의 변별력 축소와 등급제 실시, 다양한 통로를 통한 입학 등은 언뜻 보면 그럴듯하지만 실은 부작용만 클 뿐이다. 대학입학에 대한 초과수요가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그래도 가장 신뢰성있는 기준이 성적일 텐데, 이를 억지로 무시하는 것은 자가당착일 뿐 아니라, 혼란과 불공정을 가져올 우려가 크다. 이것은 개혁이 아니라 개악이다. 이제부터는 근본적 발상을 바꾸어 수업내용과 교과서의 개정, 수업시간의 축소, 시험방법의 개선 등 내실을 다지는 교육개혁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개혁이 그러하듯 교육개혁에도 일부 피해자가 생길 것이다. 그러나 개혁으로 인한 피해가 사회적으로 용인할 만한 범위에 있고, 개혁의 이익이 충분히 클 때는 개혁을 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우리나라는 시급한 교육개혁이 필요하다. 다만 지금까지의 근시안적이고 대증요법적인, 그리고 전문가 위주의 교육개혁이 아닌 학생을 위한 진정한 교육개혁을 해야 한다.
--
- 우리나라 교육개혁의 역사에 대해서는 김인회 외 『교육개혁의 종합평가와 새 정부의 과제』, 한국교총 1997; 강만철 외 『한국교육의 이해』, 교육과학사 1999, 제10장 참조.↩
- 김영철 외 『학교교육정상화를 위한 과열과외 해소대책』, 한국교육개발원 1981, 23〜29면.↩
- 이주호 「학교교육의 경제분석과 정책개혁」, 미발표원고, 2000.10.↩
- 김신복 외 『고교 및 대학입학전형제도 개선방안 연구』, 한국교총 1998, 65면.↩
- 선진국의 대학과 비교했을 때 한국 대학이 갖는 근본적인 문제는 대학간의 경쟁이 무의미할 정도로 서울대 1극체제로 되어 있다는 점인데, 정부가 추진하는 BK21은 이를 더 심화시킬 것이다. 더구나 BK21은 전제조건으로 학부정원 축소를 요구하는데, 이는 하등 개선이 아니며, 결과적으로 서울대생을 ‘진골’에서 ‘성골’로 격상시킬 뿐이다(이종각·오성숙·김종엽 「교육개혁은 이제부터다」, 『창작과비평』 1998년 겨울호 31면 참조).↩
- 강준만 『서울대의 나라』, 개마고원 1996, 167〜70면.↩
- 이항규 『대학 없애야 우리가 산다』, 한겨레신문사 1995.↩
- 학교의 민주화도 대단히 중요한 교육개혁 과제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언급할 여유가 없고, 이수인 「교육개혁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할 것인가」, 『창작과비평』 1999년 여름호를 참고하기 바란다.↩
- 정도원 『우리 교육, 무엇이 문제인가?』, 온누리 1999, 110면.↩
- 한국교육학회 교육철학연구회 『한국교육의 개혁과 철학』, 문음사 1997, 93〜99면.↩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국사교과서는 오류와 문제점이 너무 많다. 국사교사들은 유신 시기인 1974년에 그전까지 검인정이던 국사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바꾼 것을 이제 다시 검인정으로 돌려 자유로이 집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뉴스피플』 2000.5.4).↩
- 국사교과서를 재미있고 두꺼운 책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윤종영 「학생 중심 교과서 만들어라」(『뉴스피플』 2000.5.4)에서 찾을 수 있다. 한편 현직 국어교사 장세진 선생은 국어교과서가 상·하권 합쳐서 656면이나 되므로 얇아져야 한다고 주장하는데(장세진 『교단을 떠날 각오를 하고 쓴 교육개혁 비판』, 신원문화사 1999, 100〜103면), 이는 시간수가 많이 배정된 국어에만 타당하며 다른 과목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된다.↩
- 연구·강의에 종사해야 할 대학교수들을 장시간 호텔에 감금하여 수능시험, 대학별 고사의 출제를 맡기고 있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드물다(김선호·김애란 『대학입시제도와 대학교육』, 장락 1999, 175〜85면).↩
- 정범모 외 『교육의 본연을 찾아서』, 나남 1993, 185면.↩
- 단, 중국은 대학별 고사는 없고, 고교내신성적은 무시되며, 오직 ‘전국통일학력고사’라는 이름의 국가고사 성적만으로 대학 입학이 결정된다. 일본의 국공립대학은 ‘대학입시쎈터시험’이라는 국가고사를 1차 시험으로 하고, 대학별 고사를 2차 시험으로 다시 치른다. 그 대신 대학생 수의 80%를 차지하는 일본의 사립대학은 국가고사 없이 대학별 고사만 치른다.↩
- 자원봉사활동도 마찬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자원봉사활동을 점수화하는 데 따른 문제점에 대해서는 김대유 『지금 아이들은 우리 곁에 없다』, 내일을 여는 책 1997, 31〜42면 참조. 이 책은 학교현장에서 바라본 교육개혁 비판서다.↩
- 우리나라의 교육문제를 더욱 꼬이게 하는 데는 언론의 기여도 만만치 않다. 교육개혁에서의 신문의 역할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글로는, 교육문화연구회 편 『신문의 교육론 비판』, 경북대 출판부 2000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