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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자연의 존재론과 무위의 윤리학
따르꼬프스끼의 「쏠라리스」의 경우
이진경
연구공간 ‘너머’ 연구원. 저서로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 『필로시네마』 등이 있음. trans@korea.com
영화로 시를 쓰고 영화로 철학을 하는 안드레이 따르꼬프스끼(Andrei Tarkovsky)는 소설로 철학을 하던 러시아 문학의 전통에 아주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폴란드의 저명한 SF 작가 스따니스와프 렘(Stanislaw Lem)의 동명의 원작(1961)1을 각색한 영화 「쏠라리스」(Solaris, 1971) 역시 그가 서 있는 자리를 재확인해주는 작품이다. 어떤 해설자의 말대로 렘의 소설 『쏠라리스』가 인간중심적 사고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갖고서 “우주는 은하계 규모로 확대된 지구가 아니다”라는 명제로 요약되는, 우주에 대한 어떤 비판적 성찰을 전개한다면,2 따르꼬프스끼에 의해 각색된 영화 「쏠라리스」는 그토록 다른 어떤 우주의 본질을 인간인 우리 자신의 주위로 끌어당겨, 그것을 통해 우리 자신의 삶과 행동, 사고 자체를 당혹 속에서 반추하게 한다는 점에서 우주보다는 인간에 대해서 매우 심오한 비판적 성찰을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19세기 이래 모든 사유와 판단의 중심에 선 존재, 푸꼬(M. Foucault) 식으로 말하면 ‘선험적-경험적 이중체’로서의 인간3에 대한 새로운 인간학적 명제를 찾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혹스런 형태로 나타나는 우주와 자연을 통해 당연시된 인간의 관념과 행동, 그리고 그것을 현재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근대적 사유 전체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하자고 제안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쏠라리스」는 우리에게 무엇을 다시 사유하도록 촉발하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인가?
1. 경이: “무엇이 과학자들을 당혹하게 하는가?”
「쏠라리스」가, 혹은 쏠라리스가 던지는 이 첫번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그 반대의 질문에서 시작해야 한다. “무엇이 과학자들을 당혹하지 않게 하는가?” 왜냐하면 과학자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현상이나 사태 앞에서도 놀라지 않으며 당혹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 역시 그렇게 시작한다. 수십년을 끌면서도 별다른 성과를 남기지 못한 쏠라리스 연구 프로젝트의 ‘정리’를 위해 쏠라리스로 떠날 크리스의 집에, 아버지의 친구가 찾아오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쏠라리스 초기 탐사단의 한 사람이고, 실종자를 찾아 쏠라리스에 아주 가까이 다가간, 그래서 쏠라리스에서 벌어지는 지극히 기이한 현상을 직접 목격한 이 일급 조종사는 자신이 과학자와 행정가가 모인 중앙의 한 위원회에서 증언했던 기록을 크리스의 가족들에게 보여준다. 전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한 현상을 발견한 그는 그 사실들을 자세히 관찰하여 증언하지만, 기록물에 등장하는 어떤 과학자도—물론 행정가도—그 놀라운 사실에 대해 전혀 놀라지 않는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러나 역시 과학자(심리학자)인 크리스도 그의 증언에 대해, 그리고 화를 내면서까지 그것이 진실임을 설파하는 그의 발언에 대해 전혀 놀라지 않는다. 이 역시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리고 그 이야기를 보는 우리도, 그 이야기를 전해 듣는 여러분 중 누구도 그런 사실 앞에서 전혀 놀라지 않을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나무들이 동물로 변하고, 동물이 사람의 모습으로, 더구나 자신의 모습으로 변하는 저 놀라운 현상에 대해 그들은, 또 우리는 어째서 이토록 놀라지 않는가? 물론 나나 여러분이나 놀라지 않는 방법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즉 그것은 착각이거나 착시 현상 혹은 환각이라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말의 혐의마저 있는 공상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증언의 기록에 등장하는 과학자들이나 크리스의 반응도 그것이었으며, 여러분의 반응 또한 그것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면, 아무리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녹음기에 똑똑히 녹음되었다고 해도 환각이나 착각 등 믿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야말로 정말 놀라운 것이 아닐까?
하이데거(M. Heidegger)가 지적한 바 있지만,4 그리스시대에 과학, 기술을 뜻하던 ‘테크네’(techne)란 사실 놀라움과 경이에 결부된 개념이었다. 1년이 지나면 정확히 저 자리로 다시 돌아오다니, 저 별의 운행은 놀랍지 않은가? 같은 모양, 같은 크기를 갖는 것인데, 나무로 된 건 물에 뜨고 돌로 된 건 가라앉으니, 이 또한 놀랍지 않은가? 등등. 이러한 경이가 대체 왜 그럴까 하는 질문을 낳은 것이고, 바로 이것이 세상의 운행과 우주의 질서(cosmos)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해준 시동력(始動力)이었다.
반면 근대의 과학자들은 다르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들이 알고 있는 법칙에 따라 운행된다고 생각하며, 그것에 따라 이해하려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 들어맞지 않는 일이 일어날 경우 그들은 놀라움과 경이로 그것을 보면서 “왜 그럴까?”라고 질문하지 않는다. 다만 아무리 끌어다 맞추려고 해도 되지 않는 그 현상이 반복하여 나타나면, 그들은 그것에 대해 불안해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때론 그것을 사소하거나 예외적인 것으로 밀치며 시야에서 지워버리고, 때론 멀지 않아 설명될 것으로 유예해둔다. 그리고 아예 법칙이나 개념에서 벗어나는 것이 나타나면, 환상이나 환각, 착시로 ‘설명’하거나(대체 무얼 설명했다는 걸까?), 미신이나 신비주의적 공상으로 간주하여 비난한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그건 마치 놀람을 어떻게든 피하고 모면하려는 집요한 노력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놀라운 현상을 눈앞에서 지워버리고, 진실에서 몰아내며, 거짓과 착각으로 만듦으로써, ‘비놀람’의 세계와 비당혹의 세계 안에서 안주하고 안심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과학자들은 놀라고 당혹한다. 그 정도가 너무도 강렬해서, 크리스가 우주정거장에 도착했을 때 그의 친한 친구이자 우수한 물리학자 개버리언은 이미 자살해버린 뒤였다. 조종사의 증언에 전혀 놀라지 않았고, 진실임을 강변하는 그의 주장을 쉽게 조소해버릴 수 있었던 크리스도 놀라며, 그것을 통해 과학적 사유에 익숙한 우리도 놀란다. 무엇이 저 과학자들을 당혹하게 만든 것일까? 무엇이 과학에 대해 확신하고 우주정복을 꿈꾸는 조종사를, 그리고 그 조종사를 비웃었던 크리스마저 한없는 당혹 속으로 몰아넣었는가?
이해할 수 없는 사태를 미신이나 착각으로 간주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령 강한 신념을 가진 과학자의 바로 앞에 직접 다가온다면 어떻게 될까? 가령 과학자는 ‘유령’ 앞에서 놀라지 않을까? 아니, 이건 ‘터무니없는 얘기’니 접어두고 다시 묻자. 과학자들은 악몽에 놀라지 않을까? 과학적으로 터무니없는 사건이 자신의 목전에서 실제로 벌어질 때, 그들은 전혀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손님들’의 출현으로 지칭되는 새로운 사건 때문에 쏠라리스는 그것을 연구하기 위해 우주정거장에 거주하고 있는 과학자들에게 극도의 불안을 수반하는 극한적 놀라움을 야기한다. 마치 말로만 듣던 유령을 직접 대면하게 된 아이들과도 같은. 이 경우 이해될 수 없는 사실조차 미래의 이해를 기대하며 미루어둠으로써 불안을 제거하던 이전의 방법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 또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미신이나 환각으로 간주하던 치사하지만 편리한 ‘과학주의’도 힘을 쓰지 못한다. 여기서 쏠라리스란 과학자들의 모든 양식(良識, bon sens)을 벗어나는 사건이고, 모든 종류의 ‘알음알이’를 벗어난 사건인 것이다. 그것은 어떤 것에도 당혹하지 않는 이 과학자들을 극도의 당혹 속으로 몰아간다. 양식이 파괴되는 곳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는 시도가 행해지기 시작한다.5
2. 인식: “레아는 누구인가?”
우주정거장에 도착한 크리스는 두 가지 점에서 놀란다. 먼저, 그는 있어야 할 것이 없음에 놀란다. 그를 마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우주정거장 전체는 마치 인적이 끊긴 폐허마냥 텅 빈 채로 쓸쓸하다. 친한 친구 개버리언은 죽고 없고, 헤매다가 찾아낸 쉬나우트 박사는 나중에 다시 오라며 그를 돌려보낸다. 싸르토리우스 역시 그를 피하기는 마찬가지다. 다음에는 없어야 할 것이 있음에 놀란다. 쉬나우트 박사의 방 한 구석에 감추어져 있는 사람의 팔, 싸르토리우스 박사의 방에서 튀어나온 난쟁이, 그리고 딸랑거리는 방울소리를 내며 우주정거장을 돌아다니다 개버리언의 시신이 있는 냉동실에서 사라져버린 반라의 여인. 그가 아는 한 그곳에는 개버리언, 쉬나우트, 싸르토리우스 세 사람만 있어야 했다. 하지만 정작 놀란 것은 당혹과 피로 속에서 깊이 들었던 잠이 깨면서이다. 방안, 어슴푸레 미명이 스며든 그 밀폐된 공간의 저편 창가 의자에 여인이 앉아 있다. 10년 전에 죽은, 자살할 때 사용한 주삿바늘 자국마저 그대로인 그의 아내가 침상의 자신에게 다가와 포옹하고 함께 눕는 것이다!
자신을 남편으로 알고 그렇게 대하는, 오래 전에 죽은 아내 레아와 똑같이 생기고 똑같이 행동하는 그 여인을 끔찍한 비명소리와 함께 우주선에 실어 ‘보내버리고’ 돌아온 크리스에게 쉬나우트 박사가 알려준다. 그 여인은 ‘손님’이라고, 조사를 위해 쏠라리스에 X선을 다량으로 쏘아보낸 뒤 우주정거장 안에 출현하기 시작한 쏠라리스의 손님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크리스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존재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란 점에서, 자기 마음의 손님이기도 한 셈이다. 따라서 그의 마음속에 레아가 있는 한, 그 여인은 다음날 아침 영락없이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나서 그에게 다가와 안긴다. 이 여인은 대체 누구인가? 이 여인은 인간인가 아닌가? 거듭하여 나타나는 이 여인‘들’이 동일하게 남편으로 대하는 크리스는 대체 누구인가?
냉정하고 철저한 과학자 싸르토리우스는 확신을 갖고 답한다. 그는 레아의 손가락을 찔러 얻은 피의 성분을 분석한다. 마치 쏠라리스를 분석하기 위해 쏠라리스에 X선을 쏘았던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이런 방법을 ‘분석적 방법’이라고 부르는데, 데까르뜨R. Descartes에 의해 17세기초 명료하게 정식화된 바 있으며, 근대과학 전반을 특징짓는 방법이다). 그의 답은 ‘명료하고 뚜렷하다’. 그 여인의 신체는 ‘중성미자’로 이루어져, 원자로 이루어진 인간의 신체와는 성분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고, 따라서 그 여인은 ‘인간’이 아니며, 크리스의 아내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 말한다. “당신이 허락한다면 이 여인을 해부해보고 싶소.” 그렇다. 과학은, 우리는 이렇게 사유하고 판단하고 행동한다. 우리는 그리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이러한 사유와 인식이 알아낸 거대한 성과에 대해서, 적어도 그것의 거대함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다. 과학 없이, 혹은 ‘과학적’이라는 관형어 없이 대체 누가 사유하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반면 크리스는 무언가 달라졌다. 그는 과학자로서의 ‘합리성’을 잃고 이렇게 대답한다. “그는 나의 아내요. 나는 그를 사랑하오.” 여기서 그의 분석적 사고는 정지된 것이 분명하다. ‘손님’ 레아를 자신의 아내로 느끼고 그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크리스의 태도는, 싸르토리우스의 분석적 사고와 정면으로 대립한다. 그런데 우리는 확실히 과학과는 거리가 먼 이런 판단에 대해 싸르토리우스처럼 ‘비과학적’이라는 한마디 말로 비웃지 못한다. 반대로 어쩌면 더 타당하다고 느끼는지도 모른다. 왜 그럴까?
짐 끄는 말은 경주마와 더 가까운가, 아니면 짐 끄는 소와 더 가까운가? 할머니 품 안의 고양이는 개와 가까운가, 호랑이와 더 가까운가? 과학자라면 주저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짐끄는 말은 말이고, 호랑이와 고양이는 같은 고양이과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동물이 우리에게 주는 느낌(affection)으로 보자면 짐 끄는 말은 짐 끄는 소와 다를 바 없고, 경주마는 전혀 다른 느낌의 감응(affect)을 낳는다. 고양이는 개처럼 애완용 동물이고, 호랑이는 그와 달리 맹수다. 생물학과는 무관한 이런 판단이 유아적인 것이고, 따라서 잘못이고 거짓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동물들의 힘이나 능력, 행동학적 습속, 신체적 강렬도의 분포를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고 보면 호랑이를 고양이과에 집어넣은 분류학자의 도식처럼 유아적이고 인간중심적인 것은 또 어디 있을까?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B. Spinoza)는 변용/촉발(affection)에 의한 사고와 분류를 제안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호랑이와 사자는 개목 고양이과로서 한데 묶이는 게 아니라 ‘맹수’로서 한데 묶이고, 고양이는 ‘애완동물’로서 (호랑이·사자가 아니라) 개와 한데 묶이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이다. 늑대 울음소리와 같은 변용/촉발을 야기하는 조플린(J. Joplin)의 목소리는 차라리 늑대소리라고 해야 적절하리라는 것이다(이는 흉내 내지 모방과는 다른 것이다). 집과 재산을 지키려는 일념으로 하루종일 건물에 드나드는 사람을 체크하고 문을 잠그며, 드나드는 모든 이를 두려움과 불안감을 지닌 채 경계하고 감시하는 사람을 ‘개’라고 보는 것은 단지 감정적 욕설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확실히 이 점에서 크리스는 하나의 문턱을 넘었다. 즉 자기 앞의 여인이 아내와 동일한 모습에 동일한 느낌, 동일한 변용을 야기한다면, 그리고 아내로서 동일한 관계를 실행한다면, 그것은 아내라고 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의 판단도, 그의 사랑도 헛된 착각이나 유치한 동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분석적 사유와 대비되는 이러한 변용적 사유가 과학자가 살아가는 세계와 아주 상이한 세계, 상이한 삶을 만들어내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3. 존재: “쏠라리스란 무엇인가?”
이 영화 전체에서,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이 일관해서 던지는 명시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쏠라리스란 무엇인가?” 바다와도 같이 일렁이며 때론 이런저런 형상들을 만들지만 어떤 형상에도 고정되지 않는 거대한 ‘액체적’ 행성, 동시에 뇌와 비슷한 세포구조를 갖고서 사유하고 판단하며 행동하는 거대한 ‘물질’, 따라서 모든 것을 만들어내지만, 만들어진 그 모든 것을 자신 안에 포함하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실체. 스피노자라면 오히려 쉽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생산적인 능력을 갖고 모든 것을 산출해내는 신적인 실체며, 동시에 만들어진 개체 전체를 포괄하는 실체로서의 자연이며 신이라고. 다시 말해 능산적(能産的) 자연(natura naturans)이자 소산적(所産的) 자연(natura naturata)이요, 그런 자연과 다를 수 없고 그와 분리될 수 없는 신이요 실체(substance)라고.6 그런 점에서 그것은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외계에 있지만, 사실은 지구 자체, 혹은 지구를 포함하는 우주 전체로서의 자연이며, 우리가 사는 세계 자체이기도 하다고.
영화의 모두에서 조종사가 보았다는 것은 이 생산적 능력으로 쏠라리스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형상과 개체의 일부였으며, 그러한 능력 자체였다. 개버리언이나 쉬나우트가 접했으며, 아내의 형태로 크리스를 찾아왔던 저 ‘손님’들 역시 모든 생산적 능력 전체를 포괄하는 쏠라리스의 소산이고, 그런 한에서 쏠라리스의 일부다. 그러나 동시에 그 손님들을 만들어낸 것은 기억이나 소망, 꿈이나 희망 등의 형태로 크리스나 쉬나우트 등이 갖고 있던 것이고, 그런만큼 그것들은 그들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다. ‘손님’ 레아는 다른 누구도 아닌 크리스 자신이 산출한 것이고, 방울을 끌며 다니는 여인은 개버리언이, 난쟁이는 싸르토리우스 자신이 산출한 것이다. 이 점에서 산출된 모든 것은 확실히 그들 자신의 ‘마음’7이 만든 것이다. 그것이 과거에 죽은 아내든, 악마의 꼴을 한 동료든, 매끈한 몸매를 한 요부든. “거울 앞에 중국인이 서면 중국인이 나타나고 오랑캐가 서면 오랑캐가 나타난다.” 그렇다면 과학자들 역시, 불안과 두려움에 떨면서 쏠라리스와 적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 능산적인 자연 쏠라리스의 일부인 것은 아닌지?
그러나 때로는 재물에 끌리고, 때로는 사랑에, 또 때로는 명예 혹은 혁명에 끌리기도 하는 나의 마음이야말로 재물을 둘러싼 그리고 사랑을 둘러싼 관계의 소산은 아닐까? 레아가 크리스의 소산이라면, 그만큼 크리스의 마음 역시 죽은 아내와 10년 전 삶의 소산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딱히 ‘나의’ 마음, ‘크리스의’ 마음이라고 부를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차라리 ‘나의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런 수많은 삶의 흔적들, 그런 흔적으로 남은 욕망과 집착, 슬픔과 기쁨, 쾌락과 고통의 다른 이름은 아닐까? 그렇다면 레아 역시 크리스가, 그의 욕망이, 그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그의 마음에 새겨진 채 지워지지 않던 과거의 기억, 그 기억을 구성하는 그의 아버지, 어머니, 대지를 덮은 하얀 눈, 작은 불꽃이 흰 연기를 피우는 장작불, 브뤼겔(P. Brueghel)의 그림처럼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적막하게 얼어붙은 개천, 함께 걷던 언덕길 등등의 무한한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무한히 이어지는 사물의 연쇄와 연기(緣起), 그것이 바로 쏠라리스와 반응하여 밤새 레아를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크리스의’ 욕망, ‘나의’ 마음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인가? 차라리 나의 마음조차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밖에 있는 저 무한한 세계와 함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레아와 난쟁이, ‘방울여인’을 산출해낸, 그 일체를 만들어낸 마음이란, 이미 시방(十方)으로 삼세(三世)로 무한히 이어진 무수한 마음들의 집합이고, 순간순간의 물결과도 같은 그런 마음들 전체를 포함하는 거대한 바다로서의 마음, 쏠라리스가 아닐까?
4. 윤리: “쏠라리스의 ‘손님’들은 상인가 벌인가?”
레아를 비롯한 쏠라리스의 ‘손님’들은 그것을 납득할 수 없었던 우주선의 과학자들로선 너무도 불편한 대상이다. 언제 어디서 나타나는지도 모르고, 또 내일 아침이면 무엇이 나타날지, 그것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자신들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이 작용하여 나타나는 것이지만, 무엇이 나타날지, 어떻게 될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다. 과학자들은 이 손님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중 ‘어느 것’에 대해 크리스가 자신의 아내라고 말하고 그렇게 대한다 해도,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크리스 역시 그 손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로선 이처럼 견디기 힘든 대상이 없다. 따라서 그들에게 이 손님들이란, 자신들이 쏠라리스에 X선을 방사한 댓가로 주어지는 징벌이다. 그들로선 손님들의 존재 자체가 인정할 수 없는 대상이고, 자신들을 불편하고 불안케 하는 저주인 것이다. 쉬나우트도, 싸르토리우스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는 레아로 나타난 첫번째 손님의 존재를 용인할 수 없었던 크리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손님을 비명소리와 함께 우주선에 태워 어두운 허공으로 날려보낸다. “발사에 의한 이혼.”8 그의 눈앞에 나타난 그 여인은, 그가 받아들일 수 없는 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한갓 유령이거나 ‘모조인간’일 뿐이다. 혹은 자신의 슬프고 고통스런 과거를 ‘상기시키는’ 상(像)일 뿐이다. 따라서 그 여인은 그로 하여금 여러가지 중첩된 방식으로 고통을 느끼게 하는 ‘징벌’이다.
그러나 그가 ‘손님’들에 관해 알게 되고, 그 여인을 아내 레아로 받아들이면서 사태는 달라진다. 그는 다른 과학자들처럼 그 여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니라, 그 여인의 성격은 물론, 그 여인 자신도 모르는 과거의 행적까지 알고 있으며, 그 여인에 대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알며, 그녀가 어떻게 행동할지도 대충은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그 여인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잃어버린, 그리고 그때까지도 그리워하던 자신의 아내를 다시 찾은 것이다. 이 경우 레아는 더이상 징벌이 아니며, 반대로 ‘상(賞)’이라고 해야 할 존재가 된다. 물론 쉬나우트나 싸르토리우스는 동료 과학자의 이러한 행동을 전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더 곤혹스러워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여기서 이미 「쏠라리스」는 또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 손님들은 징벌인가 포상인가?” 크리스는 이 질문에 대해 명확하게 답하고 있는 셈이다. 그들은 징벌도 포상도 아니라고. 다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바라던 경우라도 아주 견디기 힘든 징벌이겠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긍정할 수 있는 사람에게 그것은 행복을 주는 포상이라고. 그것은 자신의 마음이, 자신의 욕망이 만들어낸 대상이기에 말이다.
이게 어디 「쏠라리스」의 공상적 공간 안에서뿐이랴. 우리 역시 우리 눈앞의 존재들에 대해 때론 얼마나 힘들어하고, 때론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가? 마치 그것이 자신에게 내린 운명의 저주라도 되는 듯이.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다.”9 그러나 프로이트도 잘 지적한 바 있듯이,10 마음을 열고 그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되는 순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밉고 증오스런 존재가 된다. 언제나 ‘나’에게 이롭고 좋은 것에 대해서는 ‘선’이요 ‘복’이며 ‘상’이라고 생각하고, 그 반대의 경우면 그것은 ‘악’이요 ‘화(禍)’며 ‘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니던가.
확실히 독을 먹으면 나의 신체는 해체되고 죽어버리기에, 그것은 나에게 ‘나쁜 것’이고,11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에게 길을 막으며 나타나는 가시밭은 ‘나쁜 것’이며, 느닷없이 끼여드는 자동차는 나에게 위협이고 ‘나쁜 것’이다. 하지만 레아는 크리스에게 행복을 주기 위해 나타났고 상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난쟁이나 ‘방울소녀’는 싸르토리우스나 개버리언을 당혹하게 하기 위해, 그들을 벌주기 위해 나타난 것인가? 말해보라, 당신 앞에 가로놓인 저 강, 저 가시밭은 당신의 발길을 막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얄미운 저 자동차는 급한 당신의 갈길을 막으려고 끼여드는 것인가? 오랜 가뭄 끝에 마른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당신이 농사지으라고 내리는 것인가?
이러한 분별 없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리고 그런 일은 있을 수만 있다면 또 얼마나 감동적인지. 세상이나 대상, 사태를 ‘있는 그대로’, 여여(如如)하게 받아들이는 것. 정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일 뿐’인 것이다. 스피노자나 니체가 그토록 강조하는 긍정의 철학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노자가 말했던 무위(無爲)의 철학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조주(趙州)가 말했던 지극한 도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가려 선택하지 않을 뿐이라(至道無難 唯嫌揀擇).”
하지만 좋은 것과 나쁜 것, 상과 벌을 가리고 분별하며 살아야 하는 우리들에게, 저 ‘지극한 도’란 지극히 어려운 것이 틀림없다. 아마도 그 ‘도’를 깨치지 못한 우리를 위해 「쏠라리스」는 근사적(近似的)인 하나의 윤리학적 명제를 제안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에게 모든 것은 포상이며,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자에게 모든 것은 징벌이다.” 따라서 세상을 행복하게 사는 방법, 다시 말해 언제나 상(賞)과 함께 사는 방법은 간단하다. 가능한 모든 것을 향해 자신의 마음을 열고, 그것을 상으로, 적어도 자신과 상생(相生)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것이다. 그것은 단지 생각을 바꾸는 문제가 아니라, 실천과 삶의 방식을 바꾸는 문제이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관계를 바꾸는 문제이다. 옆에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도, 그리고 ‘환경/매개’(milieu)라는 이름으로 공동의 삶을 구성하는 나무도, 땅도, 돌멩이도, 건물도, 기계도, 물도, 공기도 서로 상생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 요컨대 모든 것과 상생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내려는 이러한 윤리학을 ‘상생의 윤리학’이라고 부르자. 그렇다면 나와 ‘나를 위한’ 대상·환경이 아니라, 나와 더불어 혹은 나·너 없이 더불어 하나의 꼬뮌적 존재를 구성하는 실천방침으로서의 꼬뮌주의(commune-ism)란, 이러한 상생의 윤리학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일 수 있을까?12
5. 무위자연, 혹은 인간의 죽음
레아는 죽는다. 그것도 크나큰 고통 속에서 여러번 죽는다. 그리고 사랑하는 크리스의 곁을 떠나 자청하여 사라져버린다. 여기서 「쏠라리스」는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무엇이 이 여인을 큰 고통 속에서 여러번 죽게 만들었는가? 무엇 때문에 이 여인은 스스로 사랑하는 사람의 곁을 떠나 사라져버렸는가?”
그러나 레아라는 여인은 그 자신의 고통 이전에 다른 사람의 고통이다. 과학자로서, 다른 손님과 마찬가지로 그 여인을 받아들일 수 없는 쉬나우트나 싸르토리우스, 혹은 크리스의 고통, 그리고 크리스가 그 여인을 받아들인 이후에는 쉬나우트 등이 받았을 고통. 이들에게 ‘손님’ 레아는 존재 자체가 고통인 그런 존재이다. 한편 레아 역시 존재와 더불어 주어진 고통 속에 산다. 인간이 아니라는 고통, 크리스의 아내가 아니라는 고통, 그리고 자신의 존재가 다른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사실이 주는 고통. 레아는 자신에게도 존재 그 자체가 고통인 그런 존재다. 그래서 그 여인은 고통 속에서 죽는다. 한번은 영문도 모른 채 사랑하는 사람에 이끌려 우주의 심연 속으로 ‘발사’됨으로써 처절한 비명 속에 죽는다. 다른 한번은 자신이 냉정한 과학자 싸르토리우스 말대로 인간이 아니며, 크리스의 아내도 아니라는 사실을 견디지 못해 액체산소를 마시고 자살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쏠라리스의 거울에 비친 크리스의 마음이 그대로인 한 그 여인은 되살아난다. 고통은 더욱더 심해지고, 그런 고통 앞에서, 레아는 자청하여 다른 모든 손님들과 더불어 사라져버린다. 자신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고, 또 그리하여 자신에게 더없이 큰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의 곁을 떠나 스스로 사라지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13 이로써 고통의 인과적 연쇄는 중단되고, 사태는 ‘평화’를 되찾는다. 함께 사는 사람들을 위해 ‘나(我)’를 버리는 이 반(反)주체적 행동은, 역사를 이끈 어떤 영웅들의 죽음 못지않게 장엄하고 위대하다. “나를 버리고 가마.”
과연 레아의 사라짐과 물러남의 의미는 무엇인가? 자신의 존재가 고통의 원인일 때, 스스로 사라짐으로써 고통을 제거하는 극한적 사례를 통해 상생의 윤리학의 한 경계를 보여주려는 것일까? 아니면 상생의 세계란 그처럼 나(我)를 버리는 무아의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혹은 함께 만들어내는 상생의 세계, 꼬뮌적 세계에는 이미 ‘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내가 사라짐으로써 만들어지는 상생, 레아가 받아들인 그 역설적 상생은 상생의 윤리학의 하나의 극한이다.
그런데 레아는 어디로 갔는가? 레아는 자신의 신체도, 자신의 영혼도, 그 어떤 형상도 잃고 쏠라리스의 저 능산적(能産的)인 세계 속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의 고양이도 사라지면서 웃음을 남기는데, 잠시지만 그토록 강렬한 ‘죽음’을 선택한 사람이 사라지면서 다만 숄 하나만을 남긴다는 게 대체 어떻게 가능할까? 누구보다 그 여인은 자신을 고통으로 느끼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강렬한 흔적을 남겼을 것이 분명하다. 고통을 주는 손님의 하나로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고통을 주던 이들을 위해 스스로 사라져간 감동적인 포용력으로. 또한 자신을 사랑한 남자에게, 자살한 아내가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랑의 방식과, ‘주체도 대상도 없는 사랑’을 보여준 위대한 여인으로. 따라서 레아는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애당초 사라질 누군가가 따로 존재했던 게 아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애당초 그는 크리스의 마음속에 있었고, 크리스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죽은 것은 레아만이 아니다. 훌륭한 물리학자인 개버리언 역시 죽었다. 어쩌면 가장 먼저 쏠라리스의 ‘의미’를 파악했다고 할 수 있는 그는 자살했다. 왜 죽었을까? 동료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레아의 죽음을 통해서, 그리고 죽지는 않았지만 죽음과도 같은 열병 속으로 끌려들어갔던(죽었던!) 크리스를 통해서 개버리언이 죽은 이유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저 거대한 지식이라는 성과를 통해 신앙과도 같은 확신을 주었던 ‘과학’이라는 이름의 분석적인 사고가, 그리고 그러기에 이제는 모든 것이 과학의 법정에 서야 한다는 독단적 사고방식이 그것을 비켜선 쏠라리스의 저 당혹스런 힘 앞에서 죽은 것이다. 또 그것은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모든 것을 경멸하고 비난하며 무시하던, 그리고 모든 것이 인간이라는 판관(判官) 앞에 서야 하며 그 처분(가령 해부와 같은!)에 따라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인간’들조차 감싸안으면서 그들을 위해 스스로 죽을 수 있었던 레아의 위대한 포용능력 안에서 죽은 것이다. 크리스의 말대로 개버리언이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죽은 것이고, ‘수치심’으로 인해 죽은 것이라면, 결국 그것은 ‘인간’이란 이름으로 행해진 ‘비(非)인간’에 대한, 아니 자연 자체에 대한 모든 억압과 가해(加害)의 한없는 수치심으로 죽은 것이다. 그것은 한사람의 과학자의 죽음일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며, 모든 것을 그 이름으로 밀어붙이고 모든 것을 그 이름으로 정당화하던 ‘인간’의 죽음인 것이다.14
레아를 받아들인 크리스 역시 레아를 따라 ‘인간’의 문턱을 넘은 그곳으로 간다. 따라서 그는 지구로,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고향’이란 이름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인간의 대지, 이전의 영토로 되돌아가기엔 그는 너무 멀리 나아간 것이다.15 그가 ‘돌아간’ 곳, 그곳은 쏠라리스의 바다 한가운데이다. 얼어붙은 강가에 나무들이 늘어선 곳, 레아가 있고, 개가 달려오고, 아버지가 있는 조그만 섬. 그것은 알다시피 그의 마음이 만드는 세상, 아니 그의 마음 자체다. 따라서 그는 아무 곳으로도 돌아가지 않으며, 돌아갈 필요가 없다. 그곳은 자기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고,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돌아가지 않는 돌아감이다. 우주를 사로잡은 저 분석적 사유의 오만함과, 세상을 재단하던 독단적 분별지심을 던지고(無爲), 위대한 자연의 품속으로, ‘스스로 있는 그대로 그렇게 존재’하며, 모든 것이 생성되고 또 소멸되는 쏠라리스로 돌아간다. 절대적인 생성의 세계 속으로. 그는 이제 다투고 떠나온 아버지 앞에, 다툼의 원인이었던 최초의 쏠라리스 증인 앞에, 아니 쏠라리스 앞에 절할 수 있다. 이전에 쏠라리스-레아 앞에서 그럴 수 있었던 것처럼. 그것은 긍정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 여여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절대적 긍정, 혹은 무위자연(無爲自然).
브뤼겔의 그림 같은 적막한 강가, 그 그림처럼 얼어붙은 나무들 옆을 천천히 크리스가 걷는다. 그리고 저 멀리서 개가 그를 반기며 달려온다. 그 개가 온 길 저편에 집이 있고, 그 안에는 아버지가, 떠나온 일상적 삶이 있다. 그러나 그 집안에는 비가 내리고, 그 비를 더듬어 올라가듯 카메라가 올라간다. 섬이 보이고, 그 섬을 둘러싼 바다가 보인다. 쏠라리스의 바다, 대자연의 품 안이다. 그리고 거기서 카메라가 더 멀어지면 조그마해진 섬 사이에 구름들이 한가롭게 끼여든다. 카메라는 더 멀리 간다. 더욱더 멀리 간다면 아마도 쏠라리스가 있는 행성이 담길 것이고, 더 멀리 가면 그 행성을 섬처럼 둘러싼 우주의 ‘바다’가, 그리고 더 멀리 가면 그 바다 저편에 한가로이 떠 있는 지구가 시야에 들어올 것이다. 쏠라리스, 그 전체가 바로 쏠라리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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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 렘, 강수백 옮김 『쏠라리스』, 시공사 1996.↩
- 같은 책 288면.↩
- M. 푸꼬, 이광래 옮김 『말과 사물』, 민음사 1986, 365〜69면 참조.↩
- 박찬국 「현대기술문명의 본질과 위기에 대한 하이데거의 사상」, 『시대와 철학』 제4호, 44면.↩
- G. Deleuze, Logique du sens, Minuit 1969, 93〜94면.↩
- B. 스피노자, 강영계 옮김 『에티카』, 서광사 1990, 1부 정리 29의 주석(47〜48면), 정리 31(48〜49면).↩
- 여기서 ‘마음’이란 물질이나 신체와 대비되는 정신이나 영혼이 아니라 차라리 무언가 하고자 하는 의지요 욕망이란 점을 지적해두어야 한다.↩
- S. 렘, 앞의 책 110면.↩
- 이 말은 부조리한, 하지만 애초부터 주어지는 일종의 절대인 실존을 체험하는 싸르트르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다(G. 뿔레, 김기봉 외 옮김 『인간의 시간』, 서강대 출판부 1998, 619면에서 재인용).↩
- S. 프로이트, 박찬부 옮김 「자아와 이드」, 『프로이트 전집 14: 쾌락원칙을 넘어서』, 열린책들 1997, 134〜38면; 김석희 옮김 「전쟁과 죽음에 대한 고찰」, 『프로이트 전집15: 문명 속의 불만』, 열린책들 1997, 71〜72면 등.↩
- B. 스피노자, 앞의 책 4부, 정리 38, 39 및 증명; G. 들뢰즈, 박기순 옮김 『스피노자의 철학』, 민음사 1999, 83〜84면.↩
-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일종의 극한적 개념으로서 ‘절대적 꼬뮌주의’에 대해 정의할 수 있다. 그것은 무한한 요소들로 구성되며 절대적 상생으로 정의되는 무한한 존재 그 자체이다. 반대로 절대적 개인주의 역시 정의될 수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나를 위한’ 정도에 의해 호오(好惡)의 선(線)을 따라 위계화하고, 오직 그러한 원칙 아래서만 관계를 맺고 실천하는 극한적 개인주의이다. 그것은, 그 ‘나’가 다른 위치로 한순간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나를 위함’의 극한적 상충으로 인해 어떤 것과도 상생할 수 없는 절대적 상쟁(相爭)의 세계를 조성한다. 여기서는 누구든지 소소한 이익을 다투는 무한한 상쟁과 징벌, 저주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건 스스로 초래한 것이기에 누구도 구원해줄 수 없는 징벌이요 저주다.↩
- 여기서 우리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는 이른바 ‘따르꼬프스끼식’의 테마를 반드시 떠올릴 이유는 없다. 모두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는 이러한 행동에서, 그는 기독교적 전통에 따라 예수의 죽음을, ‘희생’과 대속(代贖)을 상기시키고 싶겠지만, 기독교보다는 ‘쏠라리스적 전통’에 충실하려는 우리는 차라리 자신을 버림으로써 상생의 세계를 산출하는 무아(無我)의 윤리학을 떠올린다. ‘주체의 죽음’이라는 현대의 철학적 테마는 최소한 여기까지 나아갈 때 그것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난다.↩
- 니체가 말한 ‘신의 죽음’을 푸꼬는 이러한 ‘인간의 죽음’으로 이해한다.(M. 푸꼬, 앞의 책 390면; G. 들뢰즈, 권영숙·조형근 옮김 『들뢰즈의 푸코』, 새길 1995, 199면) 들뢰즈는 그것을 ‘자아의 소멸’—無我!—로 해석하는데(G. Deleuze, Différence et répétition, Minuit 1968, 81면), 이러한 맥락에서 양자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 이 점은 때묻지 않은 자연, 고향과도 같은 원초적 자연, 따라서 우리가 되찾고 돌아가야 할 기원에 대한 루쏘(J.J. Rousseau)식의 자연주의와 스피노자의 자연주의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스피노자주의자 크리스는 ‘우주’를 향해 열리는 절대적 탈영토화의 선을 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