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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차분한 논어 읽기, 튀는 논어 읽기
이우재 『이우재의 논어 읽기』, 세계인 2000
김용옥 『도올 논어(1)』, 통나무 2000
성태용 成泰鎔
건국대 철학과 교수. 저서로 『오늘의 동양사상』(공저)이 있음. tysung@hanmail.net
1. 몇년 전 철학연구회의 청탁으로 시중에 나와 있는 『논어(論語)』 번역본 또는 해설서들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검토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30종 가까이를 검토하여 서평이라고 하기에는 좀 많은 분량인 원고지 150여매의 글을 썼다. 그토록 많은 것들 가운데 만족할 만한 수준의 저작은 몇개 되지 않아 우리나라의 동양고전에 대한 번역·해설 수준에 대하여 적잖이 실망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한문 공부를 겸한 교양의 수준에서 『논어』를 해설한 책들이 많았던 것은 바로 『논어』를 비롯한 동양고전에 대한 우리나라 독자층의 관심을 대변하는 것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한 수준에 맞춘 번역이나 해설이, 동양고전을 제대로 이해함은 물론 이를 바탕으로 현실의 삶에 적극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을 정도로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는 것은 이 분야를 전공하는 필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바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요즈음 들어와 동양고전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또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도 알고 있다. 바로 김용옥(金容沃)씨의 ‘노자 강의’, 그리고 그 인기를 업고 다시 이어지고 있는 ‘논어 강의’가 그러한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주역인 것이다. 노자 강의는 일단 논외로 하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논어 강의에 대해 살펴보면, 그 저본으로 『도올 논어(1)』이 나와 있는데 그 내용 자체가 지금까지 나와 있던 어떤 번역서나 해설서와는 전혀 다르다. 굳이 그 책을 보지 않더라도 그의 강의를 들은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러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강의에 대하여 긍정적인 또는 부정정인 시각들이 들끓는 것은 그의 노자 강의 때와 마찬가지이다.
전혀 다른 틀의 김용옥씨 『논어』 강의, 그것은 과연 우리나라 고전 번역과 해설의 영역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그토록 떠들썩하게 대중의 관심을 끄는 만큼, 그 질에서도 이전의 『논어』 해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는 일시적 쇼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이에 답을 내리기 위해서는 차분히 그의 저작을 뜯어보는 길밖에 없다. 동양고전 가운데 가장 많은 수의 번역과 해설이 있는 『논어』이기에 김용옥씨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위해서도 이만큼 좋은 소재는 없다.
그런데 김용옥씨의 『논어』 강의보다 조금 앞서서 『논어』에 대한 새로운 해설서가 나왔음을, 그리고 그 해설서가 이전의 『논어』 번역·해설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이고 있음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바로 『이우재의 논어 읽기』이다. 저자가 누구임은 책 이름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이렇게 자신의 이름을 당당하게 내세우고 있는 것이 두 저작의 첫번째 공통점이다.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다는 것은 그만큼 그 책의 내용에 자신의 독특한 관점이 있다는 자부심의 표현일 것이리라. 이우재(李愚才)씨의 논어 읽기는 김용옥씨처럼 ‘튀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차분하면서도 『논어』에 대한 충실한 이해를 보여준다. 우선 이우재씨의 책을 살펴보고 그 다음 김용옥씨의 ‘튀는’ 『논어』 해설을 살피는 것이 재미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2. 이우재씨의 『논어』 읽기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차분한 가운데 『논어』를 심도있게, 또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고전적인 해석에 매달려 있지는 않으며, 『논어』를 당시의 살아있는 역사적 공간 속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때문에 책의 머리 부분에 간략히 춘추전국시대의 사회경제사적 배경을 제시하여 기본적 이해를 도모하고 있으며, 필요한 대목마다 다시 『논어』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해설해주어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공자는 박제화된 성인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 속에서 백성을 위한 정치를 내세우고, 새로운 기준에 의한 신분질서를 세우려 했던 개혁적인 사상가로 조명된다.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신분의 제자인 중궁(仲弓)을 남면(南面)시킬 만하다고 한 공자의 발언으로부터 새로운 신분질서의 이상을 제시한 그의 면모를 발견하는 이우재씨의 날카로운 안목은, 분명 오늘의 역사에 대한 그의 치열한 의식이 작용한 것이다. 공자가 주례(周禮)를 복원하려 했다는 점에서 표면적으로는 복고주의자요 반동적인 사상가로 보일 수 있지만 그 실질적 주장에는 진보적인 요소가 훨씬 더 많았다는 것은 물론 이우재씨만의 특별한 주장이 아니다. 그러나 이우재씨처럼 전문적인 논문이 아닌 『논어』 전반에 대한 평이한 해설 속에서 이러한 점들을 설득력있게 제시하기는 어렵다. 중궁을 임금 시킬 만하다는 말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는 말의 공자적인 표현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과격한 이해라고 할 수 있는데도, 이우재씨의 담담한 해설 속에서는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면이 있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운동권의 투사로부터 사회운동가로 이어져온 이우재씨의 평범치 않은 이력을 알게 된 평자의 선입견일 수 있겠다. 그러나 그의 『논어』 해설을 읽으면서, 그의 오늘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논어』를 이해하는 바탕이 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은 평자만이 아니리라 생각된다.
또하나 이우재씨의 『논어』 해설이 지닌 장점은 지금까지 나와 있는 『논어』에 대한 주석이나 해설서를 폭넓게 참조하여 적절한 취사선택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 학자의 저술, 한국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 나아가 일본 학자와 서양 학자들의 주석까지 폭넓게 참조하고 있다. 어떤 주석을 선택하여 해설한다는 관점도 비교적 분명하게 제시된다. 어떤 곳에서는 단지 어떤 주석을 따랐다고 밝히는 것으로 넘어가고 있으나 그러한 소략함이 큰 흠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자신의 관점이 확실하지 않은 것을 일단 보류해두는 이우재씨의 겸손함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필자가 관심을 가지고 보았던 ‘인(人)’과 ‘민(民)’에 대한 해석에서 이우재씨가, 백성이란 개념 속에 노예가 포함된 것인지 아니면 노예가 아닌 피복속 인민만 의미하는지는 아직 불분명하다면서, 중국 고대사회의 구조에 대한 좀더 진전된 연구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한 것에 대하여 필자는 오히려 대단히 기꺼웠다. 확실치 않은 대목에 대하여는 일단 보류하고 접어둔다는 『논어』의 가르침에 부합하기도 하려니와, 이런 대목에서 오히려 이우재씨가 자신이 옳다고 보는 것에 대하여는 확고한 주장을 펴는 사람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우재씨는 일단 『논어』 전체를 일관된 맥락 속에서 이해해보려는 태도를 취한다. 이는 뒤에 이야기할 김용옥씨의 『논어』 이해와 대비되는 점이기에 좀더 분명히 밝혀야 할 부분이다. 이우재씨는 비슷한 개념이나 논의가 나오는 장들에 대하여는 일일이 이와 관계된 이야기가 무슨 편의 몇장에 나온다는 것을 부기하고 있다. 그리고 중요한 개념들이나 주장들에 대하여는 그것들을 일관되게 해석할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점들은 작은 것일 수 있으나 『논어』를 있는 그대로, 전체적으로 이해해보려는 독자들에게는 큰 도움을 주리라 생각된다. 일단 『논어』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이해해보려고 노력하고, 그러한 일관된 해석에 들어오지 않는 부분들에 대하여는 다시금 주의를 기울여 전체적 이해 속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고전을 대하는 중요한 태도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우재씨가 무조건 『논어』의 기록을 공자와 그의 문인들 사이에 이루어졌던 대화의 충실한 기록이라고 신봉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논어』 자한편 “봉황새도 나오지 않고, 황하에서 그림도 나오지 않으니, 나도 이제 그만인가?” 하는 장에 대하여는 일단 일반적인 해설을 한 뒤에, 이를 후세의 위작으로 보는 크릴(H.G. Creel)의 설을, 특별한 논평을 붙이지 않은 채 소개하고 있다. 이런 점은 이 책이 『논어』를 통달한 사람의 입장에서 『논어』를 다시 떡 주무르듯 주물러 자기 관점대로 정리한 책이 아니라, 『논어』를 공부해가는 사람의 입장에서 씌어진 것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단순히 『논어』를 옛날 방식으로 읽어가면서 공부해가는 것이 아님도 분명하다. 오늘의 시각에서 사회경제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논어』를 이해해가는 과정, 그러한 과정에 있는 진지한 학도의 눈에 보여지는 『논어』에는 분명 이전의 주석에서 찾을 수 없었던 것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하기에 이 책은 『논어』에 대해 알고 싶은 초심자나, 어느정도 『논어』에 대한 이해를 지니고 있는 중급 수준의 독자들에게 나름대로 『논어』 이해의 심도를 높여줄 수 있는 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평자의 입장에서 이 책의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에 대한 지적을 하라고 한다면 몇가지 구체적인 주문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선 이 책을 보고 나서 대단히 만족스럽고 기쁜 느낌에 젖었다는 것을 우선 말해야 하겠다. 정말로 『논어』를 진지하게 읽고 공부하는 비전문가에 의하여 이러한 책이 나왔다는 것은 우리 학계에 큰 고무가 되는 일이며, 또 전문적인 학자들에게는 분발의 채찍이 될 것이다. 이러한 느낌이 아직도 지배적이기에 가벼운 지적으로 이우재씨의 귀를 간지럽게나 하고 싶다.
『논어』의 첫 편 첫 장의 번역을 보면서 조금은 아쉬웠던 점, 그러한 아쉬움이 그의 번역을 읽어가면서 거듭 확인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의 구절에서 맨 뒤의 구절을 이우재씨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 문장의 구조상으로 보아 여기의 군자는 명사가 아니다. 그러하기에 문장에 충실하더라도 “또한 군자답지 않은가?”로 번역해야 옳다. 그리고 “불역〜호”의 구는 “얼마나 〜한가” 정도의 관용적 표현으로 볼 수 있기에, 매끄럽게 번역한다면 “얼마나 군자다운가?”로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고전을 번역할 때는 그 번역문만을 읽고도 그 고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할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문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우리 번역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우재씨의 『논어』 읽기는 해설의 측면에 있어서는 비교적 충실하지만 『논어』 원문의 번역에서는 상대적으로 노력이 부족하지 않은가 생각된다. “골라 머물기를 인에 처하지 않는다면……”(里仁편) 등의 우리말로도 어색한 표현들을 다듬어 번역만 읽고도 『논어』의 뜻을 음미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있었으면 한다. 이러한 점들이 가다듬어지고, 『논어』에 대한 이우재씨의 이해가 좀더 깊어지고 확고해져서 보류하고 접어두었던 문제들에 대한 확고한 판단까지 제시되는 새로운 ‘논어 읽기’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3. 이우재씨의 ‘논어 읽기’에 비하면 김용옥씨의 『도올 논어(1)』은 말 그대로 ‘튀는’ 『논어』 해설이다. 그야말로 『논어』를 통달한 자, 아니 『논어』뿐만 아니라 고금의 학문에 통달한 자의 입장에서 『논어』를 떡 주무르듯 주물러 다시 펴낸 책이라 해야 할는지? 고전적인 『논어』 해설에 젖어 있던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정말 기겁을 할 정도의 이야기들이 쉴새없이 튀어나오는 책, 그것이 바로 김용옥씨의 『논어』 해설서이다.
‘공자는 천민출신으로 그의 구(丘)라는 이름 자체가 우리말로 말하면 ‘짱구 대가리’에 해당한다. 그의 어머니는 무당으로 그의 아버지 숙량흘과 들판에서 만나 공자를 낳았다.’ 이런 대목부터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공자의 어머니가 무녀였다는 주장은 김용옥씨가 인용한 일본 학자의 공자 전기에서도 이미 제기된 주장이다. 그러한 주장을 비롯하여 고금의 여러 주석, 서양학자들의 『논어』 해석까지 종횡무진으로 인용하면서 새로운 시각에서 『논어』를 조명한다. 그런데 김용옥씨가 이러한 주장을 자기의 시각에서 취사선택하여 인용하면서 펼쳐내는 『논어』 해설은 그가 인용한 어떤 사람들의 주장보다도 파격적이고 충격적이다. 그러하기에 그의 『논어』 해설은 새로운 모험이요, 학계에 논란을 일으킬 만한 충격적인 요소를 듬뿍 지니고 있다. 또 고전의 고매하고도 현학적인 분위기에 염증을 느꼈던 독자들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요소도 듬뿍 지니고 있다.
고금의 많은 주석들을 참조하여 『논어』를 해설한다는 점, 공자를 개혁적인 사상가로 본다는 점, 이런 점들에서 김용옥씨의 『논어』 해설은 이우재씨의 『논어』 해설과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나 이용한 자료의 다양성과 결론으로 제시되는 몇가지 점을 제외한다면 너무도 극단적인 대조를 보이는 것이 또한 두 사람의 『논어』 해설이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점은 『논어』를 이해하려는 기본태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김용옥씨는 『논어』를 전체적으로 일관된 맥락에서 설명하려 하기보다는, 문헌학적인 비평과 자신의 공자 이해라는 선행적인 틀을 적용하여 분해하는 작업부터 시작하고 있다. 공자의 발언도 시기별로 나누어볼 뿐 아니라 『논어』 가운데 제자들의 잘못된 이해, 후기에 왜곡되어 첨가된 것들을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를 휘둘러 제거하는 김용옥씨의 용맹무쌍한 활약을 먼저 감상해야 한다. 그러한 작업을 통해 진정한 ‘공자’의 육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 도달하고, 이를 통해 다시 『논어』를 이해하려는 것이 김용옥씨의 논어 해설방식이다.
이러한 작업을 거쳐 제시된 김용옥씨의 『논어』 해설을 통해 우리가 만나는 것은 김용옥씨의 실존적 느낌에 잡힌 공자이다. 그러하기에 기존의 학문적 틀을 바탕으로 하여 이해되던 『논어』, 성인으로 높이 떠 있어 ‘가까이하기엔 너무도 먼 당신’으로 존재하던 공자가 우리 현실 속으로 들어오고, 공자가 우리의 가까운 이웃아저씨인 ‘공짱구’로 느껴질 수 있다. 이 점이 김용옥씨의 『논어』 해설이 거둔 최대의 성과요 영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는 다시 말할 필요도 없고, 또 필자도 그의 큰 영향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렇게 종횡무진 휘두르는 김용옥씨의 전가의 보도로 인하여 우리가 가능하면 있는 그대로 전체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전에 『논어』가 갈가리 찢기고 부서진 아쉬움도 있다. 물론 엄밀한 고증과 학문적인 논의를 통해 그러한 작업이 이루어졌다면, 이는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쓸데없이 『논어』나 공자의 권위에 매달려 연연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그러나 김용옥씨가 주장하는 충격적인 결론들이 너무도 졸속하고, 또 그의 주관적인 판단에 근거하고 있는 듯하다는 점에서는 결코 그의 이러한 작업들에 선뜻 찬성표를 던지고 싶지 않기도 하다. ‘『논어』 그 자체가 육감’이라고 하는 김용옥씨의 육감에 의존하여 제출된 결론들은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과감하고도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맹자야말로 공자의 최대 이단이다” “미자편은 장자 학파들에 의한 날조이다”, 그러면서도 공자를 이해하는 데 “장자를 가장 중시한다”는 그의 현란한 주장들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평가를 해야 할 것인가? 공자와 더 가까웠던 시대에 이루어진 저작들, 공자와 가장 가까웠던 제자들의 공자 이해를 넘어설 만한 충분한 전거(典據) 없이는 그러한 것들을 쉽게 부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데도 김용옥씨는 아주 중요한 대목에서 많은 경우에 대충 “◯◯ 아닌가 싶다”, “××한 인상을 떨쳐버리기 힘들다”라는 그의 육감에서 나온 듯한 발언으로 이러한 큰 주장들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가 공자의 아버지를 숙량흘로 보는지도 분명치 않은데 공자의 거구는 숙량흘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 하며, 공자가 천민 출신이라고 하면서 그 천민의 조상인 숙량흘이 역사기록에 몇번씩 나오는 것을 그대로 인용하는 등, 김용옥씨의 주장 전체에 관해 우선 물음표를 달아야 할 것이다.
김용옥씨의 『논어』 강의가 일으킨 파장에 비하여 그의 『논어』 해설에 담긴 주장들에 대한 검토를 자세히 할 수 없는 데는 이유가 있다. 주장의 근거로 제시된 것들이 너무도 자의적이며, 그러한 주장을 펴나가는 방식이 학문적이거나 논리적인 것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결론이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결론을 제출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다. 김용옥씨는 ‘『논어』는 소설’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러하기에 그의 『도올 논어』 또한 소설의 방식으로 쓴 것이라면 『논어』 해설로서 평가할 일이 아니다. 만약 소설이라면 오히려 후한 평가가 가능할 것도 같다. 그러하기에 기존 학계의 보수성을 때려부수는 신선하고도 충격적인 요소로 충만하며, 대중들에게 『논어』를 오늘의 『논어』가 되게 하고, 공자를 이웃의 친근한 아저씨로 다가가게 하는 효과를 거둔 책이 바로 『도올 논어』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