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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경미 金慶渼
1959년 서울 출생.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이기적인 슬픔을 위하여』 등이 있음.
비망록—그렇게 사랑이
옛 사람들은
치자꽃열매에서 배어나오는 노란색 물이며
관목과 바위 밑 푸른 이끼에서 꺼낸
염색물을 가져다 썼다지
흰 광목천을 자목련빛이며 남청색으로 바탕을 바꾸었다지
내 안에 혹 치자 소리 나는 꽃잎들이며
그늘에서만 오래 묵은 녹색 이끼 같은
타고난 염료 있어
그대에게 물감 들어 영영 빠지지 않았으면
저기 옛 애인들 지나간다 5
모텔시대
모텔들은 잎이 자동차만한 활엽수만 키운다
서로 다른 승용차의 그 現부부는
서로의 선글라스를 알아보지 못한 채 스쳐가고
─모든 기혼의 주민등록증에는 선글라스 낀 증명사진을.
─현대에는 모든 관계에 現,자를 넣어 불러야 한다. 현부부.
현이웃집여자. 현친구 애인. 현양말. 현침대…… 그러니까
모두가 현지처,인 것이다
─하긴 삶이 언제는, 애초부터, 몽땅, 현지처 아니었던가
비누 향기처럼 무사히 휘발시킨 도덕 뒤로
모래성모텔, 활엽수들이 플라스틱손을 흔들고
모래성모텔, 그만큼 정직한 모텔 이름도 없다고 그들
잠깐 속죄인 듯 쓸쓸한 옆모습을 하기도 하매
이에 너희가 돌을 던져 치려거든 먼저 죄 없는 자들만,
집에서 권태의 돌을 맞고 있으리라
사랑은 뷔페음식 같은 것.
함께 덜어가기도 하고 혼인도 독차지하지는 못하지
생선내장 같이 얽히지 않으면
통과해나갈 수 없는 길 위의 관계들
표지판들마다 근교의 붉은 궁전들을 가리키고
집 뜨락엔 박하향처럼 향기만 유령 삼아 떠돌 뿐,
모든 결혼은 외출중이다
있는 것들이 더하다며 미혼남녀들 투덜대매
이에 모든 쓰라림은 원래 소유에 있는 법이거늘
때론 꼭대기잎처럼, 그만 좀, 허공에 떠서 살고 싶다
수평선 빈 돛단배처럼
인간,이라는 뿌리에서 되도록 머언 듯
머언 듯
잃어버린 지상을 찾아서
우체국은 어디쯤인가
편지를 들고
빌딩 옥상에 올라가 퇴근하는 저녁바다를 내려다본다
파도 위로 자동차 불빛들 주황색 구명조끼처럼
헤드라이트 불빛을 껴입은 채 파닥이고
길을 잃었음을 잊은
시든 물고기들이
정거장에서 반복과 번복의 물방울을 서로에게 뿜는다
플라스틱꽃처럼 아무도 마음까지는 젖지 않고
드물게 몇은 흙과 먼지로 빚던 인간의 숨을 기억하기도 하지만
기억이 깊으면 붉은 폭죽 같은 두통의 생에 시달려야 한다
먼 원양어선들 끝없이 식인의 물고기들을 데려오고
인근해부두에선 날마다 태풍이 숙박계를 쓴다
종이꽃들마다 나무젓가락처럼 자주 다리를 벌리고
언제나 목이 탄다
무슨 일이 일어나긴 날 것인가
어둔 하늘 위 돋아오는 저 빛조각들은
별이 아니라
혹은 일제히 겨눈 총구들인가
혹은 구원의 방주로 불려올라간 우체국인가
내 편지 받을 땅의 몸 맑은 나무들인가
아무도 몰래 어둔 심해 속 손톱처럼 형광빛으로 떠다니는
도망한 땅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