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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애니메이션은 문화상품의 대명사인가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치킨 런」

 

 

김의찬 金宜燦

영화평론가 sozinho@hanmail.net

 

 

예술가의 손끝으로 빚어낸 작품들. 애니메이션 작품에 대해 상찬하는 것은 어쩌면 기묘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애니메이션은 아이들이나 보는 것 아닌가. 디즈니 만화영화를 보며 굳이 감탄할 이유가 뭐지? 그러나 최근 국내에 개봉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치킨 런」은 ‘아동용’으로 구분되곤 했던 애니메이션 장르에 대해 변화된 인식을 재촉한다. 이 작품들의 경우 실사영화에서도 접하기 힘든 명료한 주제의식이 저변에 깔려 있으며 오랜 시간 동안 작품에 심혈을 기울인 장인정신이 장면마다 배어 있기도 하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치킨 런」이라는 두 작품은, 이제까지 아동용 장르로 치부되곤 했으며 흔히 ‘황금알을 낳는 문화상품’ 영역으로 단순하게 사고되었던 애니메이션의 본질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제대로 된 답변을 요구하는 수작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신화적 모티프를 기반으로 한다. ‘나우시카’라는 주인공 이름도 서구 신화에서 차용한 것이다. 이 애니메이션은 먼 미래사회가 배경이다. 산업문명이 붕괴된 뒤 지구는 균류의 숲으로 뒤덮이고 인류는 생존의 위기를 맞는다. 바람계곡에 살고 있는 나우시카 공주는 마을사람을 이끌고 인간과 벌레, 거대한 파괴병기 사이의 위태로운 불균형을 조화로운 상태로 돌이키고자 애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신화에서 끌어온 상징, 그리고 종교적 기운을 감지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바람계곡 사람들은 하나의 전설을 마음으로부터 믿는다. “푸른 옷을 입고 황금의 들판에 서서 잃어버린 대지와의 끈을 잇고 사람들을 푸른 청정의 땅으로 인도할지니”라는 전설인데, 이는 마치 연인을 기다리듯 구원자의 등장을 애타게 기다리는 것이다. 구원자의 부활에 대한 전설은 작품에서 현실로 둔갑한다. 즉, 벌레들과 인간의 평화로운 공존상태를 성취한 나우시카는 죽음으로부터 부활해 다시금 생명을 얻고, 바람계곡 사람들과 생존한 인류는 그녀의 귀환을 기꺼이 반긴다. 작품엔 이같은 서구적 신화 외에도 일본 전통 민속종교의 색채를 간직한 부분도 있다. 예컨대 ‘청정과 오염’이라는 주요한 대립항은 일본 민속신앙에서 그 원형을 한치의 어긋남 없이 빌려온 것이다. 서구의 신화와 일본 전래의 민속종교가 작품주제의 영역에 응축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 작품이 단순한 오락용이 아니라,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심오한 철학적 깊이를 내포하고 있음을 웅변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명사.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만든 미야자끼 하야오(宮崎駿) 감독에겐 이런 수식어가 붙곤 한다. “아이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내 임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는 이 애니메이터는 함축적인 메씨지를 지닌 애니메이션 작품으로 아동과 성인 관객을 공히 만족시키는, 몇 안되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그의 애니메이션, 즉 이후 제작한 「이웃의 토토로」 「붉은 돼지」 「원령공주」 등의 모태라고 할 만한 작품으로 선악이라는 절대적 구분이 없는 세계, 정령이 등장하는 일본 토착종교의 영향을 보여주는데다, 감독이 늘상 설파하는 ‘생존의지와 약자에 대한 보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미야자끼 하야오는 일본뿐 아니라 유럽 등지에서 널리 알려진 애니메이션 감독이다. 서구의 비평가들은 그에 대해 “단순한 연출자가 아닌 완벽한 작가”라고 추어올리곤 하는데 이를 단순한 열광이나 형식적인 칭찬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씨나리오에서 제작, 그리고 연출과 그래픽에 이르기까지 미야자끼 하야오는 애니메이션의 전 공정을 꿰뚫고 있으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창조해가는, 보기드문 장인(匠人)이자 언제나 일관된 목소리를 들려주는, 작가의 면모를 겸비한 연출자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한 장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한 장면

 

「치킨 런」의 세계는 조금 다르다. 혹시 「월레스와 그로밋」이라는 애니메이션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닉 파크(Nick Park)가 만든 이 진기한 소품은 클레이메이션이라는 장르를 세인들에게 재평가받도록 했다. 점토인형을 이용해 각 장면을 따로 찍고, 이를 편집해 완성된 움직임을 부여하는 클레이메이션은 애니메이션 작품이 간직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 즉 평면성을 뛰어넘은 입체감을 자랑한다. 「치킨 런」도 제작과정은 과거 「월레스와 그로밋」에 비해 달라진 바 없다. 3년간의 제작기간, 약 11만 샷으로 완성된 「치킨 런」은 이야기에 앞서 험난한 제작방식으로 여느 애니메이션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점이 있다. 축약하자면, 같은 씨리즈 속편을 만든다고 가정해도 비슷한 시기가 걸릴 것이라는 의미다. 3년 정도는 족히 필요할 것이다. 필연적으로 상업성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월레스와 그로밋」을 제작한 영국의 아드만스튜디오는 「치킨 런」을 만들면서 할리우드의 드림웍스라는 메이저와 손잡고 작업을 벌였다.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월레스와 그로밋」 시절부터 싹이 보였던 기발한 상상력, 유머감각이 배어 있는 캐릭터 외양은 「치킨 런」에서도 변함없이 힘을 발휘한다. 귀엽게 눈썹을 씰룩거리는 강아지가 「월레스와 그로밋」의 스타였다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머리에 고무장갑을 뒤집어쓴 듯한 닭들, “난 한때 공군이었어”라고 잘난 체하는 닭들이 「치킨 런」의 영웅이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미국적 스펙터클, 즉 이야기를 대신하는 ‘볼거리’라는 측면에 다소 힘이 실려 있다는 것이다. 클레이메이션의 특징, 다시 말해서 고된 노동을 요하는 작업이 표면에 노출되는 대신, 한없는 가벼움이 작품에 스며들게 된 것은 이 작품에 엔터테인먼트의 특성을 덧입히는 역할을 했다.

「치킨 런」은 여느 탈주영화를 연상시킨다. 트위디 부인이 경영하는 양계농장에선 닭들이 탈출을 결심한다. 아침에 알을 낳지 못하면 바로 통닭이 되어야만 하는 서늘한 현실 앞에서 용감한 닭들이 벗어나기로 작정한 것이다. 트위디 부인이 치킨파이 기계를 들여놓자 닭들의 공포심은 배가되기에 이르고, 이 양계농장에 미국 수탉 로키가 발을 들여놓자 암탉들은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그를 반기며 농장을 벗어나자고 부추긴다. 이 우습고 기발한 소품 앞에서 「위대한 탈출」 같은 실사영화를 떠올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포로수용소는 양계장으로 대체되었으며 어둡고 음울한 캐릭터는 활기 넘치는 닭들로 변형되었을 따름이다. 영국식 유머를 근간으로 미국적인 스펙터클을 겸비한 「치킨 런」은 어느 지점에선 유태인 수난사를 연상케 하는 암시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미국사회에 대한 낯뜨거운 찬사를 내포하는 이데올로기적 한계를 지니기도 한다. 그럼에도 작품이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드만스튜디오의 정교하고 탁월한 작업방식과 클레이메이션 장르의 독창성이 눈에 띄게 부각되는 탓일 것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치킨 런」은 하나의 질문을 포함한다. 애니메이션이란 과연 캐릭터 상품과 21세기형 문화산업으로 간명하게 정의될 수 있는 것인가. 애니메이션 관련 직종이 유망한 영역으로 떠오르고 있으며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열광하는 세대가 속속 등장하는 싯점에 이러한 질문은 유용하다. 그런데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치킨 런」이 제시하는 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대답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애니메이터의 자의식과 부단한 인내심, 이것이 두 작품을 관통하는 공통점이자 연출자들에게서 빠짐없이 발견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치킨 런」은 일본과 영국의 애니메이션 장르가 현재 어느 지점까지 가닿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줌과 동시에 애니메이션을 부가가치 높은 상품으로만 정의하기 어렵도록 만든다. 그것이 평면이 될지, 진흙으로 만든 인형, 혹은 디지털이라는 혁신적 기술 중 어느 것이 될지는 모르지만 모든 애니메이션은 궁극적으로 손끝으로 만들어낸 하나의 ‘작품’일 수밖에 없음을 두 작품은 우리에게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