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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시대의 염의(殮衣)를 마름질하는 손
고정희론
나희덕 羅喜德
시인. 시집으로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등이 있음. poempoet@netian.com
고정희(高靜熙, 1948〜91) 시인은 첫시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를 낸 1979년부터 1991년 지리산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될 때까지 11권의 시집(유고시집 포함)을 남겼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만에 다시 그 시집들을 읽으면서 우선 그 왕성한 창작열과 실험정신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80년대를 온몸으로 돌파해낸 정신의 족적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황무지와 같았던 여성시의 영역을 개척한 그의 노력이 없었다면 90년대 이후 여성시의 개화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이처럼 서정시의 좁은 틀을 과감하게 부수고 새로운 형식의 가능성을 부단히 탐구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부정의 현실 속에서 정치적으로나 성적으로 금기시되던 시적 언술들을 해방시켰다는 점에서 고정희 시인은 그 선구적인 역할을 인정받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고정희에 대한 평가는 기독교 시인이라는 종교적 범주 안에서, 또는 생경하게 목소리만 높은 페미니스트나 민중주의자로 단순화되고 일면화된 측면이 없지 않다. 이러한 현상은 시인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의 기반이나 객관적 거리가 충분히 확보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지만, 현대시사를 소재나 주제 중심으로 분류해온 도식적 태도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고정희의 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기독교’ ‘민중’ ‘여성’이라는 화두는 그대로 80년대 이래 한국 현대시가 통과해온 주요한 필터에 해당한다. 그러나 파편화된 상태를 넘어서 그 문제들을 통합해내려는 시도는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정희를 현싯점에서 새롭게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러한 통합이 얼마나 절실하면서도 어려운 과제인가를 여실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세 층위는 서로 연결되거나 친연성을 가지기도 하지만 근원적으로는 각기 다른 세계관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조화보다는 충돌을 일으킬 때가 더 많다. 그런데 고정희의 시는 어느 한 범주 안에 안주하기보다는 그 거대한 축들 사이의 충돌과 긴장을 정신의 고유한 동력으로 삼고 있다. 그의 시가 몇개의 수식어로 쉽게 포괄되기 어려울 만큼 광범위한 문화적 토양과 시적 형식을 지니는 것도 여기서 비롯한다. 따라서 고정희의 시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 세 층위들간의 갈등양상과 그것이 통합·변화되어가는 역동적 과정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 글에서는 특히 그 역동적 과정을 관류하고 있는 ‘죽음’에 대한 인식을 살펴봄으로써 고정희 시의 존재기반을 밝혀보려고 한다. 고정희에게 죽음은 종교적인 문제이자 사회·역사적인 문제였고, 또한 여성문제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첫시집의 첫시에서부터 마지막 시집의 마지막 시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는 죽음의 그림자들로 미만(彌滿)해 있다. 죽음에 대한 집요한 의식이 그로 하여금 죽음을 향한 때이른 걸음을 내딛게 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개인적 운명에 대한 예언을 넘어서 시대적인 죽음을 현시하고 있다. 아울러 시대의 죽음을 정화하고 치유하기 위한 제의로서의 시적 형식을 탐구하고 있다. 그가 짧은 생을 다해 마련하고 닦았던 “보속(補贖)의 거울”(「사십대」)은 이제 그 ‘살아 있는 죽음’을 통해 오늘의 ‘죽어 있는 삶’을 비추어주고 있다.
1. 아우슈비츠, 낙원 밖의 삶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배재서관 1979)와 『실락원 기행』(인문당 1981)과 같은 고정희의 초기시는 단순히 성서의 비유나 어법만을 차용하는 것을 넘어서 기독교적 세계관의 전형을 보여준다. 현실을 어둠으로 가득 찬 ‘실낙원’으로 인식하고 있고, 그 어둠을 밝힐 “찬란한 빛의 임재”(「서울 사랑─어둠을 위하여」) 또는 낙원의 복원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에덴은 여전히 불꽃에 싸이고/당신들 영혼은 江岸에 갇혔다”(「살풀이」)라든가 “우리는 영원히 낙원 밖을 떠돌며/일생을 두고 칼 아래 붙박여/검불 같은 목숨 한쪽 버티는 거야/버티다 버티다 사라지는 거야”(「巡禮記 4」) 등의 구절에서도 낙원으로부터 쫓겨난 자의 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낙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굳게 잠기고
어둠속에 떠도는 하나님의 불칼 아래
독 묻은 열쇠 하나 빛나고 있었지
외로울 때 만지고 말
독 묻은 열쇠 하나
수천년 낙원 밖에 기다리고 있었지
─「失樂園 記行 2」 부분
보세요. 일렬횡대로 서서 유태인의 고아들이 가고 있어요. 아우슈비츠로 가고 있어요. 노래를 부르며 가는 고아들은 아우슈비츠로 가는 고아들은 히틀러의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며 행복한 꿈에 젖어 가고 있어요. 고요히 제 몫의 삶 빛내는 햇살처럼 행복한 꿈에 출렁이며 가는 고아들, 조금만 더 가면 홍해를 건너고 조금만 더 가면 천국으로 들어가는 꿈, 꿈 같은 궁전으로 들어가는 꿈, 하느님의 축제에 들어가는 꿈을 꾸는 고아들이 일렬횡대로 서서 가고 있어요.
조금만 더 가면 홍해를 건너요
조금만 더 가면 천국으로 들어가요
조금만 더 가면 아으,
하느님의 축제가 기다리고 있어요
─「迷宮의 봄 6」 부분
인용한 두 시는 낙원 자체를 노래하기보다는 그 낙원에 도달하는 과정으로서의 삶이 결국 죽음을 향한 행진과 다를 바 없음을 보여준다. “어둠속에 떠도는 하나님의 불칼 아래/독 묻은 열쇠 하나 빛나고 있”다 해도 그 열쇠를 집는 순간 낙원으로 가는 길은 끊어져버릴 위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시에서는 홍해를 건너 천국으로 들어가는 행렬을 “아우슈비츠로 가는 고아들”에 비유하면서 섬뜩한 살육의 현장을 죽음의 카니발로 묘사하기도 한다. 이처럼 비관적인 세계인식을 보이는 한편 고정희 시에는 특유의 건강성 또는 낙관성이 드러나기도 하는데, 그것은 바로 기독교의 메시아주의와 관계가 깊다.
실낙원 이야기는 신의 편에서는 추방의 선포이지만, 인간의 편에서는 탈출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그 이야기 속에는 인간의 선과 악의 문제만이 아니라, 왜 인간은 고통을 겪어야 하며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본향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그리고 왜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가 등의 문제가 들어 있다. 구약성서의 내용 또한 실낙원과 출애굽이라는 두 사건의 변주라고 볼 수 있는데, 죄의 댓가로 에덴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아담과 이브와는 달리 출애굽은 새로운 인간의 역사를 세우기 위한 과정을 의미한다. 인간의 역사는 이처럼 끝없는 탈(脫)과 향(向) 사이의 도정이다.1
고정희 시에 「디아스포라」 연작이 많은 것도 그가 현실을 정신의 가나안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야 할 광야생활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며, 「迷宮의 봄」 「아우슈비츠」 「失樂園 記行」 「巡禮記」 등의 연작들 역시 고통스러운 현실을 견디며 신의 임재(臨在)를 기다리는 실존적 자세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들에서 기다림의 대상은 ‘그대─어머니─고향─낙원─가나안─하나님’으로 자연스럽게 전이될 수 있다. 결국 그의 시는 ‘아우슈비츠’와도 같은 현실과 ‘에덴’ 또는 ‘가나안’이라는 이상 사이에서 느끼는 절망을 노래하면서도 그 절망을 극대화함으로써 구원에 이르려는 갈망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때, 유일신으로서 ‘야훼’를 인정하고 신의 섭리로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은 현실참여적인 경향의 다른 작가들과 비교해볼 때 고정희에게 또하나의 난관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고정희의 시는 마치 김수영의 시가 그러했듯이 시인을 깨어 있지 못하게 하는 외부의 억압과의 싸움으로 점철되어 있다.(…)그러나 그와 김수영이 다른 것은 김수영이 억압자와의 싸움을 시인의 근원적인 싸움이라고 생각한 것에 견주어 그는 인간에겐 그 억압을 받아들이려는 무의식적인 속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실락원 기행』 뒤표지 글)이라는 김현의 지적은 바로 “자기보다 더 큰 힘”(같은 글)에 대한 긍정이 고정희의 시적 싸움을 근거짓는 중요한 요소이자 한계임을 간파해내고 있다.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상한 영혼을 위하여」 부분
이 시에서도 구원의 가능성은 ‘하늘 아래’서 오고 있다. 그의 시에서 ‘하늘’로 표상되곤 하는 초월자는 ‘뿌리깊은’ 믿음의 대상으로서 시인으로 하여금 모든 고통과 설움을 넘어서게 하는 힘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러한 메시아주의적 색채에도 불구하고 고정희의 시는 개인적인 차원의 구원이나 신비화된 초월의 방식에 빠져들지는 않는다. 그의 기독교적 인식은 줄곧 정의를 결여한 시대와 고통받는 민중의 현실에 대한 비판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정희 시가 갖는 이 두 개의 환부를 지적하면서 김주연(金柱演)은 “고정희 시의 발상이 원천적으로 기독교에서 발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에 전통적인 한(恨)의 그림자가 많은 것은 이 까닭”(『이 시대의 아벨』 해설)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글에서 그는 민중의 고통을 노래한 다른 시들과 고정희 시가 갖는 변별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즉 고정희의 시는 사회과학적 발상보다는 종교적 비전 속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찾고 있으며, 현실에 대한 일방적인 비판보다는 근원적인 죄의식에 기초한 시적 자아가 사랑의 중요성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위의 시에서도 시인이 찾는 구원의 가능성은 “하늘 아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하늘 자체가 아니라 “마주잡을 손 하나”에 있다. 이는 곧 기독교적 세계관이 인본주의와 결합한 역사의식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고정희의 초기시에는 어둠을 물리치려는 의지보다는 어둠을 어둠으로서 끌어안으려는 실존적 몸부림이 더 강하게 나타난다. 낙원에의 갈망을 지니면서 지금 여기의 삶을 견디는 일이란 “더 큰 어둠의 땅으로 내려오고 내려오고 내려오는 일”(「서울 사랑─어둠을 위하여」)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한 공동체의식과 역사의식이 기독교적 세계관과 긴밀하게 결합되면서 견고한 형상미를 지닌 시집이 『이 시대의 아벨』(문학과지성사 1983)이다. 이 시집에서 상처받고 압박받는 민중의 대명사로 ‘아벨’을 선택하고 있는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정착민인 카인이 유목민이었던 동생 아벨을 죽인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을 통해 시인은 온몸이 찢겨져 땅에 묻혔으나 결코 은폐될 수 없는 약자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동시에 강자의 불의를 예언자적 목소리로 질타한다.
오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너희 안락한 처마밑에서
함께 살기 원하던 우리들의 아벨,
너희 따뜻한 난롯가에서
함께 몸을 비비던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너희 풍성한 산해진미 잔치상에서
주린 배 움켜쥐던 우리들의 아벨
(…)
어둠의 골짜기로 골짜기로 거슬러오르던
너희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이 시대의 아벨」 부분
그런데 『이 시대의 아벨』에서 그는 시대의 타락과 불평등을 질타하면서도 그것이 꼭 사회·역사적인 맥락에서의 민중해방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나의 시가 관심하는 문제는 삶 자체이지 결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왔다”(『이 시대의 아벨』 뒤표지 글)는 말이나 “‘민중’을 신분이나 계급으로 규정짓는 것이 아니라 그의 결단의 자리, 그의 신념의 방향에 의해 좌우되는 문제”2로 보는 입장에서도 그것은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그의 시적 지향은 사회·역사적인 ‘민중해방’보다는 ‘참된 민주적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기독교적 ‘자유의지’에 더 가깝다.3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고정희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초기에는 민중적인 또는 여성해방적인 입장과 그리 순탄한 결합을 보이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부조화의 증표가 고정희 초기시에서 종종 발견되곤 하는데, 예컨대 고향의 철쭉제를 노래하면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강/완벽하게 쓰러진 성벽에 앉아/하프를 뜯으며 타오르는 사람들아/타오르다 타오르다 숯이 되는 사람들아/고향땅 천리 밖에 두눈 감아도/이 깊고 공고한 칠흑의 계곡에/그대들 꽃불은 환히 와 닿는구나”(「철쭉제」)와 같은 구절을 볼 수 있다. 여기서 ‘하프’라는 이국적인 악기는 단순한 소도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우리나라의 전통 악기 대신 ‘하프’가 들어간 것은, 자신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히브리인들의 ‘가나안’에 대한 그리움과 등치시킴으로써 그 상징적인 차원을 확장시키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하프’와 ‘철쭉제’라는 두 기호가 일으키는 문화적 마찰은 생각보다 큰 것일 수도 있다. 『이 시대의 아벨』이 발간된 1983년에 마당굿 형식의 장시집 『초혼제』가 나란히 나온 것도 그 문화적 간극을 넘어서려는 의도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2. 죽음의 제의를 통한 삶의 정화
『초혼제』(창작과비평사 1983) 후기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시인이 마당굿 형식을 차용하게 된 것은, 인간성 회복의 문제를 다루되 서구적 취향을 벗어나 그것을 우리의 전통적 가락과 새롭게 접목시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첫시집의 「짜라투스트라」처럼 서구적 취향을 짙게 풍기는 시가 「우리들의 殉葬」으로 개작된다든지, 4·19나 오월항쟁 등을 둘러싼 구체적이고 체험적인 역사가 도입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과 관련된다.
따라서 초기시에 자리잡고 있던 이국적인 비가의 분위기나 알레고리적 수법 역시 풍자적 미학에 힘입어 토속적이고 민중적인 언어로 바뀌게 된다. 이처럼 슬픔의 국적을 찾는 작업의 일환으로서 한국적인 언어와 풍습과 시대인식을 결합하려는 변화에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문화적 마찰을 해소해보려는 의도와 더불어, 김정환(金正煥)의 지적(『초혼제』 발문)처럼, 개인적인 구원과 고통의 문제로 고민하던 기독교주의에서 벗어나 ‘3인칭의 바다’에서 민중의 고통을 발견하려는 의지가 깃들여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러가라 물러가라 도시귀신 물러가라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식은밥 한숟갈 뜨는 둥 마는 둥
십리 공장길 걸어 지하 3층으로 내려가
한여름 같은 기계실에 혼 빼주고 넋 빼주고
마음도 다 빼주니
한달 수입이 3만 5천원이라
구내식당비 5천원 주고
인세 갑근세 주민세 사글세 문화세 주고 나면
빈─주먹이나 먹어라 사람 없구나
(징소리─장고소리─북소리에 맞춰 한바퀴 칼춤을 휘두른 뒤 박수 고개꺾기.)
─「사람 돌아오는 난장판」 ‘둘째마당’ 부분
김정환은 발문에서 『초혼제』의 두드러진 특징을 고향정신과 풍자정신의 결합으로 보고, 고정희의 이러한 작업을 김지하의 풍자미학과 비교하고 있다. “김지하의 경우는 그것이 체질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는 반면 고정희에게서는 그것이 무언가 어색해 보이는데 이는 고정희가 ‘공공연한’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인 듯싶다. 김지하의 ‘밥’은 고정희의 ‘빵’이며 김지하의 ‘술’은 고정희의 ‘포도주’인 것이다”(같은 글). 이 진술 속에는 기독교적 요소를 억압하면서 이루어지는 전통양식의 차용보다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좀더 일상화된 체험으로 밀어올림으로써 고통의 보편적 차원을 보여주는 것이 고정희의 진면목이라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고정희의 시가 풍자적 형식을 차용함에 있어 충분히 체질화되지 못했다는 평가에는 어느정도 동의할 수 있지만, 그것을 반드시 남성적 풍자방식의 미달로 보아서는 안된다. 고정희의 마당굿시를 현실 풍자의 ‘무기’로서 볼 때 내려질 만한 이런 평가와는 별도로, 시인이 그러한 형식을 취한 의도는 정작 다른 데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초혼제』 속에는 다양한 민예형식과 리듬이 들어와 있고, 공격적이고 해학적인 풍자의 칼날이 번득이고 있는 부분도 적지 않다. 그런데 가장 주된 형식인 마당굿의 경우는 현실에 대한 ‘풍자’보다는 죽은 영혼에 대한 ‘진혼’과 ‘정화(淨化)’의 의식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특히 「還人祭」의 경우 전체가 불림소리, 조왕굿, 푸닥거리, 삼신제(三神祭), 환인제(還人祭), 이렇게 다섯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굿이 진행되는 동안 시적 화자로 설정된 무당은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을 위로하고 간곡하게 살아 돌아오기를 기원한다.
여기서 죽음은 더이상 ‘주제적 죽음’에 머물러 있지 않고 문학적 장치로서 죽음을 직접 살아내는 ‘기능적 죽음’으로 나아간다.4 죽음의 제의를 통해 삶을 정화하고 치유하려는 문학적 시도로서 일찍이 강은교의 「비리데기의 여행노래」 연작이나 「황혼곡조」 연작5이 나온 바 있고, 최근 무조신(巫祖神)인 바리데기 설화를 재해석하면서 거기서 여성적 글쓰기의 존재론적 기반을 읽어내는 김혜순의 작업6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여기서도 드러나는 것은 여성시에서 굿형식의 도입이 남성적 풍자방식과는 전혀 다른 미학적 효과를 배려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굿의 주술성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영혼을 치유하는 역할을 하며, 그것이 지닌 구어체적 언어방식은 수많은 타자들이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연행의 공간을 가능하게 한다. 바로 이 점에서 굿형식은 여성성 또는 여성적 글쓰기와 밀접한 연관을 맺어왔다.
실제로 고정희는 민중성과 여성성의 탐구가 단순히 주제적인 데 그치지 않고 문체의 변화를 동반해야 된다는 것을 일찍부터 자각하고 있었던 듯하다.7 그리고 그 일환으로서 도입된 굿형식은 기독교적 정신과 샤머니즘의 정신적 융합이 가져다준 시적 고뇌의 산물8로서, 시인의 정체성이 전환되는 커다란 계기와 징후로도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김승희가 『초혼제』에 나타난 형식의 변용을 “기독교적, 일신교적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더이상 정체성을 구하지 못하고 자신이 그 상징질서 속의 타자임을 인식하여 ‘어머니들의 세계’로 몸을 돌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치”9로 이해하는 것도 매우 적절한 지적이다.
물론 『초혼제』가 나오던 당시만 해도 굿이나 판소리 사설조, 민요체 등의 구비적 문학형식들이 여성적 글쓰기의 주된 전략으로 인지되지 못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초혼제』의 형식이 지니는 실험성은 빛나는 대목이 있다. 그렇게 본다면 「還人祭」 「사람 돌아오는 난장판」 등이 지니는 문학적 의미는 현실비판을 위한 전통형식의 현대적 변용이나 풍자정신의 채택에만 머무르지 않고, 역사의 원혼들을 달래는 주술적인 효과와 그를 통한 여성적 글쓰기의 탐색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하겠다.
그럼 고정희는 왜 좀더 합리적인 현실비판 대신에 죽은 영혼들을 부르고 살려내는 주술적 제의의 언어를 선택했을까. 그것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인의 의식과 무의식 깊이 자리잡고 있는 ‘희망’과 ‘죽음인식’의 대립관계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시인 자신도 시집 『초혼제』 후기에서 “결국 나는 ‘죽어 있는 삶’과 ‘살아 있는 죽음’에 대해 많은 콤플렉스를 숨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고백하고 있듯이, 죽음에 대한 선험적인 인식은 이미 초기시부터 강렬하게 나타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어둠과 나란히 돌아와
문에 굳게 잠긴 열쇠를 끄를 때
문틈에 꽂힌 하얀 봉투가
저승에서 부쳐온 喪章임을 알았다
깊은 밤 내 남은 삶에
검은 리본을 꽂고
喪章에서 떨어지는 주검을 쓸어모아
수년째 잠든 죽지 못 박고 있을 때
밖을 적시는 게 비인 것을 알았다
─「예수 前上書 1」 부분
죽음에 대한 이 섬뜩한 예감은 윤동주의 “故鄕에 돌아온 날 밤에/내 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또다른 고향」)는 구절을 연상케 한다. 이 시에서 “깊은 밤 내 남은 삶에/검은 리본을 꽂고/喪章에서 떨어지는 주검을 쓸어모아/수년째 잠든 죽지 못 박고 있”는 모습은 시대를 대속해 스스로의 삶을 못 박은 예수의 수난과 고스란히 겹쳐진다. 초기의 이러한 인식이 기독교적 실존을 바탕으로 하면서 다소 관념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것이 좀더 공동체적 차원을 확보하게 되는 것은 ‘오월 광주’라는 시대적 죽음을 통과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참혹한 죽음의 사건에 대한 진혼으로서 나오게 된 것이 『초혼제』를 비롯해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 『광주의 눈물비』 등이다.
입 열개라도 어미는 외로와
귀 스무개라도 어미는 멍멍이
저승 극락세계라도 이승만 못해
몇 굽이 돌아오는 추위에 기대어
빈자리 적막에 기대어
장승백이 웅지 밑에 기대어
사시나무 떨듯 기다리는 어미
갸륵해라 갸륵해라 갸륵해라
다만 사람 하나 간절한 방
떠난 그대 殮衣를
마름질하는 손
(마름질하는 손 〔추임새〕 불이 꺼진다.)
─「還人祭」 ‘다섯마당’ 부분
이 부분은 「還人祭」의 마지막 장면이다. 여기서도 볼 수 있듯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드나들며 한 개인의 영혼뿐 아니라 잘못된 역사를 돌이키고 화해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주술적 목소리의 중심에는 ‘어머니’의 이미지가 가로놓여 있다. 그런데 어머니는 독립된 입과 귀를 가진 얼굴로서가 아니라 “떠난 그대 殮衣를 마름질하는 손”으로 나타난다. 「상한 영혼을 위하여」라는 시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마주 잡을 손 하나”에서 찾았던 것처럼, 이 시에서 어머니가 앉아 있는 공간 역시 “다만 사람 하나 간절한 방”일 뿐이다. 남성적 풍자방식이 지닌 미학적 파괴력이나 현실적 파급력에 비하면 이러한 제의적 언어는 다소 무력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의사(疑似)죽음이 만연한 시대에 순결한 죽음의 옷 한벌을 마름질하는 ‘어머니’의 손은 이데올로기적인 비판이 감당할 수 없는 근원적인 영역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3. 유랑하는 이브에서 어머니 하느님으로
고정희에게 있어 여성문제가 본격적인 주제로 표출되기 시작한 것은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창작과비평사 1989)부터라고 볼 수 있다. 아마도 1984년 『또하나의 문화』 창립 동인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 여성문제에 대한 관심을 좀더 체계화시킬 수 있는 계기였을 것이다. “한편에서는 여성의 고통을 가볍게 아는 ‘머슴아’들에 치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민족의 고통을 가볍게 아는 ‘기집아’들에 치이면서, 그 틈바구니에서 누구보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살던 그대”10라는 조혜정(趙惠貞)의 조사(弔辭)처럼, 고정희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민중적 세계관의 갈등을 거쳐 다시 여성해방적 입장을 그에 통합시키려는 노력을 감행하게 된다. 그러나 그 세 가지 층위를 분리가 아닌 상호보완의 관계로 밀고 나가려고 하기 때문에, 그는 그러한 갈등의 증폭을 스스로 ‘행운’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이다.
고정희는 여성성의 원형뿐 아니라 가장 본래적인 인간성의 모델을 ‘어머니’에게서 찾고 있다. 그의 시에서 어머니는 참으로 다양한 의미망을 거느리고 있고, 시기에 따라 변모되는 모습을 보인다. 초기시에서 ‘어머니’는 ‘이상향’ 또는 ‘고향’의 동의어로서 다소 낭만적인 동경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어머니’가 되기 이전의 ‘유랑하는 이브’의 시절이 고정희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아이 하나 낳고 싶어서
때늦기 전 아이 하나 얻고 싶어서
삼백육십날 비린 구토에 젖은 여자
능수버들로 서서 풍상 비끼고
나무등걸로 서서 한세월 버티면서
뼈마디 욱신대는 노동 휘어잡고
온갖 비린 것들은 풀무질하는 여자
─「유랑하는 이브의 노래」 부분
이 시뿐 아니라 고정희의 초기시에는 ‘어머니가 될 수 없는 슬픔’이 종종 토로되고 있다. 「방랑하는 젊은이의 노래」에서도 “어머니일 수 없는 나는/어머니인 千在純을 보았어 그것은/나와 千在純의 거리일 수도 있지만/어머니인 자와 어머니일 수 없는 자의/고독일 수도 있어 늘 웃는 자와/웃을 수 없는 자의 아픔일 수도 있어/집이 그리운 자의 눈물일 수도 있어”라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다. 그리고 이러한 갈망이 “人力으로만 될 일은 아니기에/드디어 한 알 밀알로 썩는 여자”(「유랑하는 이브의 노래」)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그것은 스스로 딸로서 죽고 어머니로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에는 어머니의 죽음도 한몫 하게 되는데, 『지리산의 봄』(문학과지성사 1987)에서 어머니의 부재가 주는 상실감은 ‘눈물’의 잦은 출몰을 불러오기도 한다.
그러다가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에 이르면 ‘어머니’는 수난받는 여성의 대표이자 역사적 해원(解寃)의 주체로서 등장하게 된다. 이 시집에서 ‘어머니’는 “마음 어질기가 황하 같고/그 마음 넓기가 우주천체 같고/그 기품 높기가 천상천하 같은”(「사람의 본이 어디인고 하니」) 대모신으로까지 격상된다. 그러나 시집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예찬이나 미화가 아니라, 탄생부터 죽음까지가 질곡과 억압으로 가득한 여성의 역사이다. 특히 「넷째거리─진혼마당」에서는 ‘오월’로 대변되는 어머니의 슬픔을, 「일곱째거리─통일마당」에서는 분단의 슬픔을 노래함으로써 여성의 역사를 민족의 역사와 결합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광주의 눈물비』(도서출판 동아 1990)에 나오는 “저 죄악의 대낮에/피에타 피에타 피에타/얼굴 없는 시신을 가슴에 파묻으며/광주의 누이들이 울부짖었다/어머니 하느님이 울부짖었다”(「통곡의 행진─암하레츠 시편 7」)에 이르면 ‘하나님 아버지’는 어느새 ‘어머니 하느님’이 되어 있는 것이다.
『여성해방 출사표』(동광출판사 1990)에 오면 여성문제에 대한 인식이 좀더 심화될 뿐 아니라 다양한 시적 방법론을 구사하게 된다. 「이야기 여성사」 연작을 통해 시인은 여성의 역사(歷史가 아니라 逆史)를 다시 쓰기도 하고, 신사임당·황진이·이옥봉·허난설헌 등 조선조 여성들의 목소리를 빌려 서간체 형식을 취하기도 하는데, 이는 시공의 경계를 넘어선 대화의식을 보여주고 현대의 여성문제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한다.
『여성해방 출사표』와 『광주의 눈물비』가 나온 1990년에 고정희는 필리핀에서 열린 ‘탈식민지 시와 음악 워크샵’에 참여하게 된다. 그곳에서의 체험을 기반으로 쓰여진 것이 바로 유고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창작과비평사 1992) 속에 들어 있는 「밥과 자본주의」 연작이다. 특히 제3세계 매춘여성들의 삶을 그린 부분에서는 앞선 장시들에서 충분히 발휘되지 못한 풍자적이고 해학적인 묘미가 한껏 살아난다.
이런저런 물건들이
그 잘난 좆대가리 하나씩 들고
구멍밥 고파 찾아오는 곳이 홍등가여
그러니까 홍등가는 구멍밥 식당가다, 이거여
그것도 다 정부관청 인가받은 업소이제
아 막말로 지 구멍 팔아먹는 장사처럼
정직한 밥장사가 또 어디 있으며
씹할 때처럼 확실한 인간이 또 있어?
─「밥과 자본주의─몸바쳐 밥을 사는 사람 내력
한마당」 ‘구멍 팔아 밥을 사는 여자 내력 한 대목’ 부분
조옥라(趙玉羅)는 이 시를 두고 ‘어머니’에 대한 혈연적인 집착을 넘어선 ‘자매애’의 실현이라고 말한다(『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발문). 일반적인 페미니스트들에게는 고정희의 ‘어머니’에 대한 애착이 아무리 저항적인 메씨지를 동반하고 있다 해도 그것이 가부장제를 용인하고 강화시키는 기제로 작용될 수도 있다는 점이 다소 불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11 그렇기 때문에 그가 여성문제에 대한 좀더 폭넓은 관심과 구조적인 접근을 보였다는 점은 환영할 만한 일일 것이다. 또한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에서 굿의 형식을 채용하면서도 구어체적 특성을 충분히 살리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밥과 자본주의」 연작에서 구사되는 과감한 사설조의 가락은 비판적인 주제의식에 걸맞은 활달한 문체를 형성하고 있다. 이것은 문학적 숙련의 결과이기에 앞서 여성문제에 대한 인식과 체험이 더욱 구체화되고 성숙해진 결과로 여겨진다. 그리고 대상에 대한 감정적 거리를 확보함으로써 오히려 문제를 객관화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시기에 씌어져 시인이 세상을 떠나기 6개월 전에 나온 연시집 『아름다운 사람 하나』(들꽃세상 1990)는 유고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와는 여러 모로 대조적이다. 물론 두 시집 모두 고정희 특유의 강렬한 정서와 거침없는 어법은 유지되고 있지만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의 비판적인 사회의식과는 달리 『아름다운 사람 하나』에서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랑에 고뇌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간극은 고정희 시인의 시세계가 그만큼 폭넓고 다채로운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일 수도 있지만 개인과 공동체 간의 문제, 또는 실존적 차원과 관념적 차원이 다소 분리된 형태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하기도 한다.
물론 에로스(Eros)란 원래 타나토스(Thanatos)와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며 인간을 좀더 높은 단계로 고양시키기 위해서는 양자의 긴장이 필수적이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의 이러한 양면성은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아름다운 사람 하나』는 신작시집이 아니라 그동안의 시 중에서 연시들을 따로 묶은 시집으로서, 사람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고통의 승화과정이 진솔하게 그려져 고정희 특유의 감수성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일면이 있다. 그러나 때로 ‘너’에 대한 ‘나’의 감정이 걸러지지 않은 채 날것으로 분출되고 있어 통속성의 위험을 보이고 있다는 박혜경(朴蕙慶)의 지적12은 이 시집 전체는 아니라 해도 일부의 연시에는 해당될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고정희의 현실비판적 시들 중에서 감정적 몰입과 스케일에 대한 강박이 충분한 미적 거리를 확보하지 못한 경우에도 그 정련된 밀도에 대한 주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예술작품이 정치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질수록 그만큼 더 사회변혁을 가능케 하는 계급간의 갈등과 변혁의 본질적인 궁극의 목표를 격감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브레히트의 교훈적인 희곡보다는 보들레르나 랭보의 시에서 훨씬 더 변혁의 가능성을 가진 잠재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13는 마르쿠제(H. Marcuse)의 말을 반추해볼 때, 고정희의 시 역시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직설적인 토로나 비판에 그치는 경우 그 진지하고 정당한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시로서는 변혁의 가능성을 덜 가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삶과 시에 대한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속도가 빚어낸 추월에 대한 약간의 아쉬움에 불과할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고정희는 기독교, 민중, 여성이라는 커다란 화두들을 자신의 내면 속에서 하나로 녹여내려고 했던 용광로 같은 시인이었다. 이 화두들은 대체로 순차적인 양상으로 작품의 문면에 드러나고 있지만, 그것은 강조점이 바뀔 뿐이지 내부에서는 계속 중첩되거나 혼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기에 그 세 층위가 서로 의심없이 ‘분리’된 양상으로 나타나기보다는 한 편의 시에서 정직한 ‘균열’과 ‘부재’를 통해 드러날 때 고정희의 시는 정치적 선언이나 윤리적 호소 이상의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그의 유고시집을 읽다보면 그러한 균열과 부재를 견디며 스스로의 속도를 늦추고 뒤를 돌아보는 시인의 모습이 엿보인다. 그런데 그 창조적 균열을 좀더 심화시켜야 할 시점에서 그는 죽음이라는 “더 큰 여백을 일으켜/막막궁산 오솔길로” 홀연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부재 뒤에는 “둥근 여백”(「외경읽기─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만이 남아 있다.
뒤늦게 달려온 어머니가
내 시신에 염하시며 우신다
내 시신에 수의를 입히시며 우신다
저 칼날 같은 세상을 걸어오면서
몸이 상하지 않았구나, 다행이구나
내 두 눈을 감기신다
─「독신자」 부분
자신의 죽음을 섬뜩하리만치 예언하고 있는 듯한 그의 마지막 시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칼날 같은 세상”을 살아오면서 시를 통해 너무도 많은 죽음을 바라보고 너무도 많은 죽음의 옷을 지어온 그의 영혼을 이제 또하나의 어머니가 염습(殮襲)하고 있다. “떠난 그대 殮衣를 마름질하는 손”(「還人祭」 ‘다섯마당’) 위로 그대가 그토록 기다리던 “아름다운 사람 하나” 돌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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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무 『그래도 다시 낙원에로 환원시키지 않았다』(한국신학연구소 1995) 1장 참조.↩
- 고정희 「민중과 시」, 김우규 편 『기독교와 문학』(종로서적 1992) 447면.↩
- 유성호 「자유의지와 ‘남은 자’의 그리움」,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하늘연못 1999) 247면 참조.↩
- 고현철 「한국 현대시와 장르 패러디」, 『한국 현대시와 패러디』(현대미학사 1996) 175〜80면. 이글에서 고현철은 1980년에 고정희·하종오 등에 의해 무가 패러디가 이루어지는 현상을 광주항쟁을 통한 죽음의 체험에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이러한 굿시들은 사회비판적 기능을 수행함과 동시에 ‘집단적 저류’를 형성하는 사회통합적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또한 죽은 자에 대한 진혼을 통해 산 자들의 자기결단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굿시는 ‘기능적 죽음’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 강은교 『풀잎』(민음사 1974).↩
- 김혜순 「연인, 환자, 시인, 그리고 너─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단상」 1·2, 『문학동네』 2000년 봄호·여름호.↩
- 고정희는 여러 글에서 여성적 문체성을 강조했는데, 공교롭게도 그가 마지막 지리산행을 떠나던 날 ‘또하나의 문화’ 월례발표회에서 발표한 주제가 바로 「여성주의 리얼리즘과 문체혁명」이었다고 한다(박혜련 「토악질하듯 어루만지듯 가슴으로 읽은 고정희」, 『또하나의 문화』 제9호, 1992 참조).↩
- 최동호 「80년대의 시와 문학적 지평」, 『불확정 시대의 문학』(문학과지성사 1987) 227면.↩
- 김승희 「상징 질서에 도전하는 여성시의 목소리, 그 전복의 전략들」, 『현대시 텍스트 읽기』(태학사 2001) 215면.↩
- 『또하나의 문화』 제9호(1992) 70면.↩
- 모성에 대한 과도한 긍정과 부정에는 모두 한계가 있으며, 모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부정보다는 ‘희생적 모성’과 ‘주체적 여성’ 사이의 거리를 해결할 때만이 비로소 모성성에 대한 올바른 자리매김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지적에도 귀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모성을 둘러싼 오해와 왜곡을 벗겨내고 모성성을 페미니즘의 하위담론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최근의 시도는 이와 관련되어 있다(서강여성문학연구회 편 『한국문학과 모성성』, 태학사 1998, 서문 참조). ↩
- 박혜경 「연시와 통속성의 문제」, 『한길문학』 1991년 봄호, 234면 참조.↩
- H. 마르쿠제, 박순광 역 『예술의 미학적 차원』(영학 1982) 20〜2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