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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통신
대안초등학교 리포트
김환용 金煥龍
대한매일신보사 『뉴스피플』 기자. dragonk@kdaily.com
1. 일상 속의 자그마한 기쁨을 잃어버린 생활이 새삼스레 상실감으로 다가온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3년 전 성냥갑 같은 아파트 생활을 접고 서울 마포구 성산동 주택가로 이사할 때 느꼈던 야릇한 흥분을 기억한다. 빼곡히 들어찬 집들(어린 시절의 단층 단독주택이 아니라 3〜4층짜리 다세대주택이 대부분이지만)의 어지러운 배열이 만들어놓은 미로의 골목길을 보며 어린 시절 친구들과 헤집고 다니던 동네를 떠올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새 집에서 하루 이틀 지내며 그때와 다른 점을 발견했다. 골목길은 그대로건만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거의 사라진 사실이다. “까르르……” 간혹 귓가를 간질이는 꼬마들의 재잘거림조차 자동차의 난폭한 굉음에 묻히기 일쑤다. 동심이 숨쉬기조차 힘든 도시의 흉물스런 자화상은 새삼스럽게 상실감을 느끼게 했다.
2. 언론보도 등을 통해 최근 세간에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대안초등학교의 탄생은 따지고 보면 동심을 잃어버린 아이들에게 그것을 되찾아주려는 부모들의 소망이 빚어낸 ‘사건’이었다. 자신들의 어린 시절처럼 자녀들이 흙에서 마음놓고 뛰놀 수 있게 해주고 싶고, 비만증에 걸린 아이에게 억지로 밥 먹이듯 하는 과도한 교육열에서 벗어나게 해주고픈 부모의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는 것이다.
또 일부 부모들이 제도권 밖에서 대안을 찾겠다고 나선 ‘용기’는 초등학교의 비교육적 현실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하다.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학급당 학생수가 40명 안팎인 현실에서 수요자 중심의 교육이란 ‘공염불’에 불과하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6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교사의 고백은 이런 실상을 잘 보여준다.
“토론과 실기 위주의 눈높이 교육은 사실상 빈 껍데기일뿐이에요. 토론학습을 한다고 하지만 실제 교사가 토론내용을 점검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답니다. 실기교육도 과정에 참여하기는커녕 결과를 평가할 시간조차 모자라 학생의 절반 가량은 아예 검사도 못하고 넘어가곤 하죠. 더욱이 부장을 맡은 교사들은 공문서 처리 등 과도한 행정잡무로 인해 자습을 시키는 경우가 허다해요.”
내가 기자의 신분으로 대안초교를 처음 찾은 것은 지난 2월이었다. 경기도 시흥시 산어린이학교. 소래산 기슭에 고즈넉하게 자리한 이곳은 370평 대지의 개인 농원을 빌려 교실로 쓸 자그마한 목재건물과 방 한칸짜리 사무용 가건물을 설치한 게 고작이다. ‘대안’이라는 구호의 거창함이나 ‘학교’라는 도식적인 이미지 모두 찾아보기 힘든 소박한 시골집의 외관은 오히려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뭔지 궁금하게 만들었다.
지난 3월 10일 6명의 학생과 전담교사 1명, 시간제 객원교사 3명으로 단출하게 문을 연 이 학교에선 엄한 규율과 일사불란함을 미덕으로 여기는 일반 학교의 답답한 분위기를 느낄 수 없다. 자연친화를 모토로 한 교육이념이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편안함이 봄햇살처럼 학교 구석구석에 배어 있다.
학교 공간이 좁은 것은 굳이 교육현장이 따로 필요없기 때문이다. 수용소처럼 운영되는 제도권 학교는 큰 건물과 일정 규모의 운동장을 필요로 하지만 이 학교는 이런 도식에서 자유롭다. 무엇보다 나들이 중심의 교육방식 때문이다. ‘나무와 숲’은 6명의 1학년 ‘꼬맹이’들에게 주어진 1년간의 기본주제다. 나무와 숲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학습의 장이 될 수 있다. 일주일에 사흘은 학교울타리를 벗어나 소래산·관악산·성주산·용문산 등 아이들의 힘에 부치지 않은 거리에 있는 산들을 차례로 오른다. 나무와 숲이 주제라고 해서 그와 관련된 지식을 가르치려는 게 아니다. 산행을 통해 아이들의 기초체력을 키워주고 자연에 익숙하게 해주자는 취지다. 나들이길에 마주치는 별의별 나무와 꽃, 풀 들의 이름 맞추기는 아이들에게 시험이 아니라 놀이에 불과하다.
병아리, 말뚝이, 사과나무, 오이꽃─아이들은 선생님들을 이런 친근한 별칭으로 부른다. 존댓말을 구태여 쓰지 않는 것도 집단주의의 산물인 강요된 예절보다는 아이들 스스로 예절의 필요성을 터득하기를 기다리는 느긋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능학습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은 인천에 있는 공방을 찾아가 공예를 실습하거나 구연동화을 듣는 일, ‘말뚝이’에게서 풍물을 배우는 일 등이다. 교육과 놀이의 구분을 허문 것은 기능을 가르치기보단 정서를 심어주려는 속깊은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
국어와 산수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지적 능력이라는 점에서 그 나이에 맞는 적정한 수준의 교실수업이 이뤄지고 인근 시흥도서관의 공간과 책들을 활용하기도 한다.
요즘처럼 조기교육이 당연시되는 풍토에서 그게 무슨 교육이냐고 따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대안초교의 강점은 아이들 개개인의 개성과 눈높이에 맞춘 1대 1 교육이 가능하다는 데 있다. 제도권에선 생각할 수 없는 선생님과 학생의 엇비슷한 비율은 대안초교의 교육방식과 이념을 현실화하는 기본조건이다.
3. 대안초교는 공동체적인 운영이 불가피하다. 학부모가 운영의 주체이고 그 아이들이 운영의 객체라는 점에서 주객이 통일된 자율조직이자 자구조직이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은 교육에 관한 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지만, 형식적으로 보면 ‘교육조합’의 운영주체인 학부모들이 고용한 적극적인 조력자이다. 따라서 경비는 물론 운영의 상당부분을 학부모들이 맡기 때문에 책임의식을 가져야 함은 물론이고 실제 업무도 함께 나눠야 한다. 산어린이학교의 경우 유일한 상근직인 행정실장이나 교장직을 학생의 엄마가 맡고 있다. 그렇지만 ‘교육조합’은 학교운영과 교육내용에 대해 모든 조합원들이 수시로 회의를 통해 의논하고 결정하는 집단적 의사결정 구조를 갖고 있다.
빠듯한 재정 때문에 이를 보충하기 위해 김치를 담가 파는 수익사업도 학부모들의 몫이다. 3월부터 매주 20포기씩 담가 인근 주민들에게 팔아서 돈을 만드는데, 월 30만원 정도의 수입을 기대하고 있다. 6명의 엄마들이 가사나 직장일 가운데 짬을 낸다는 게 보통일이 아니지만 부모들간의 돈독한 유대가 학교를 건강하게 만든다는 공동의 믿음이 힘을 내게 하는 원천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공동체 삶에 익숙한, 현대사회의 별종이라고 지레 짐작한다면 오해다. 공무원·회사원 등 평범한 직업인들이고 여느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공교육의 파행을 깊이 걱정하는 보통의 이웃들이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주류에서 벗어난 행동은 커다란 모험과 부담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대안초교도 예외는 아니다. 돈 문제만 해도 그렇다. 시설임대료와 교사인건비 등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부모들은 각기 6백만원의 출자금(졸업 때 돌려받는다고 한다)과 30만원의 월 교육비를 내야 한다. 하지만 돈 문제만이라면 차라리 마음이 가벼울 수 있다. 초등학교 과정이 의무교육이라는 이유로 대안초교는 정식학교로 인가받는 게 지금으로선 난망한 일이다. 가개교 상태의 산어린이학교에 입학한 6명의 아이들에 대해 학부모들은 일단 관할 시교육청에 1년간의 입학유예를 신청했다. 이들의 정식입학은 일반 학생들보다 1년 늦어지는 셈이어서 부모들에게 심적 부담이 적지 않다. 더 큰 문제는 내년이라고 해서 학교인가가 나온다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이다. 인가도 받지 못하고 제도권 학교에도 보내지 않을 경우 의무교육 방기로 인해 과태료 100만원을 물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아이들은 검정고시를 통해서만 초등학교 과정을 인정받을 수 있다. 이것까지는 기회비용으로 감수하겠다는 게 지금 부모들의 각오이다.
4. 대안초교를 꾸려나가는 부모와 선생님들은 현재의 고달픔과 미래의 불안감을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으로 씻어버리는 모양이다. 병아리 선생이 학교 홈페이지(san.edufree.co.kr) 게시판에 실은 짤막한 글은 아이들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반성하는 교육자의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아이들과 만나는 일이 어떤 때는 행복하게 어떤 때는 정말 난감하게 다가온답니다. 그것도 높은 산에 올랐다가 갑자기 떨어지는 것처럼…… 대안교육이라는 거창한 말에 정유성 교수님은 ‘교육’은 곧 ‘삶’이라고 했죠. 삶을 고민하게 하는 장이라고. 정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쓴맛 단맛 보느라고 정신이 없군요. 아이들과 봄볕 따사로운 마당에서 풍물을 쳤습니다. 행복한 시간들이지요. 아이들은 너무나 자유롭게 자기를 보여주고 있답니다. 아이들을 보면서 웃고 울고 합니다.”(2000.3.21)
또 한 학부모의 글에선 그들의 꿈이 얼마나 소중하고 견고한 것인지를 느끼게 한다. “오늘은 소중한 우리의 식구들이 더욱 소중한 하루입니다. 누구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 조금씩 길을 찾고 노력하면서 처음처럼 현실의 보람과 미래의 희망을 위해(…)서로에게 격려자임을 확인하는 하루입니다.”(2001.3.14)
대안초교를 취재하며 “오죽 현실이 뒤틀렸으면……” 하는 애처로운 심정이 든 것도 사실이다. 아이들과 자연의 너무도 당연한 만남에 부모들이 돈을 들이고 시간을 쪼개느라 요란을 떨어야 하는 현실에서 21세기 정보화사회를 구가하는 현대인들의 슬픈 역설을 본다. 그나마 그런 서글픈 노력조차도 위법으로 단죄하는 현행 법규정은 ‘다원화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한국사회의 기막힌 이중성이 아니겠는가.
대안초교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실험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처한 비교육적 현실의 반영이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거울 밖의 실물이 없어지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는 법. 교육현실의 모순이 깊어질수록 대안교육의 바람이 거세지리라는 예측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