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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21세기 과학, 낙관과 비관 사이

 

게놈, 생명의 지도인가 인간 종의 역사인가

 

 

강신익 姜信益

일산백병원 치과 과장. 인제대 의과대학 교수, 의학철학. 주요 논문으로 「앎과 삶으로서의 몸」 「동서 의학의 신체관」 「의학의 문화적 구성」 등이 있음. sikang@ilsanpaik.ac.kr

 

 

1. 들어가는 글

 

“피는 물보다 진하다” “그 아비에 그 자식이다” 등의 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형질의 유전(heredity) 현상을 평범하게 표현한 것들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우리는 혈액형이란 걸 배우는데, 이 혈액형은 일정한 유전의 법칙에 따라 후세에 전해지며 이를 근거로 혈연관계를 확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혈액형은 의료현장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도 배운다. 또 동·식물을 선택적으로 교배시키는 육종(育種)을 통해 그 형질을 인간에게 유용한 형태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이것들은 모두 우리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유전에 대한 상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왜?’라는 막연한 의문을 가질 수는 있지만, ‘무엇이’ 이런 현상을 있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멘델의 법칙’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면서부터는 이 ‘무엇’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멘델(G.J. Mendel)에 따르면 생물체의 어떤 형질은 우성과 열성의 ‘유전자형’(genotype)을 가지며, 이 유전자형은 교배에 의해 후세에 전해진다고 한다. 이 우성과 열성 유전자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어떤 형질이 발현되며, 각 형질이 표현형으로 나타나는 비율을 결정하는 수학적 법칙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는 아주 과학적인 관찰과 설명이 가해지며 그런 현상을 있게 한 ‘무엇’을 상정하고 있다.

1885년 바이스만(August Weismann)은 유전의 모든 정보가 각각의 세포 속에 들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결정자(determinants)라 불렀지만, 그것의 물질적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1943년이 되면 DNA라는 물질이 세균에서 형질을 유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한 개의 유전자와 한 가지의 효소가 대응한다는 가설이 제출된다. 1953년에는 그 DNA 분자의 이중나선구조가 밝혀짐으로써 바야흐로 분자생물학적 유전학의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힌 당사자 중 한 사람인 웟슨(James D. Watson)이 “과거에 우리는 우리의 운명이 별들에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 운명의 대부분이 유전자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Time 1989.3.20)고 선언함으로써, 이제 유전자는 대를 이어 나타나는 체질적 특성뿐 아니라 개체의 운명까지 좌우할 수 있는 물질로 여겨지게 되었다. 바로 이런 사유양식이 인간 게놈, 즉 유전체를 해명하는 인간유전체연구사업(Human Genome Project)의 뼈대가 된다. 다시 말하면 ‘유전’이라는 상식적 담론에서 ‘유전자’(遺傳子, gene)라는 과학적 담론으로 이행하게 된 것이다.

2000년 2월에는 미국에서, 그리고 2001년 6월에는 한국에서 각각 인간유전자 지도의 초안을 완성했다는 발표가 있었다. 인체의 구조와 기능, 그리고 인간의 운명을 결정할 설계도를 손에 넣은 셈이다. 이제 적절한 방법으로 그 암호를 풀어내기만 하면 우리는 인간의 생로병사에 관한 모든 것을 미리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도 있게 될 것으로 믿게 되었다.

한편, 유전자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이제 논쟁의 핵심은 선천(Nature)이냐 후천(Nurture)이냐의 대립구도가 되며, 우리의 운명이 유전자 속에 ‘있다’고 주장하는 쪽과 ‘없다’고 주장하는 쪽의 대결구도가 형성되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어떤 질병이나 형질이 ‘유전’에 의해 결정되는지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지 알고 싶어한다. 그래서 이제 진영은 유전자가 핵심이 되는 생물학적 결정론과 후천적 여건과 환경을 강조하는 환경결정론으로 나누어진다. 하지만 이 양 진영은 모두 선행요소가 결과를 좌우한다는 결정론적 시각을 가진다는 면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이 글은 이러한 단선적 사유양식에 근거한 인과론적 담론의 문제점을 검토해보고, 좀더 유연한 대안적 담론구조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모색해보기 위한 것이다. 과학적 방법으로 획득된 지식이 어떻게 취사선택되며 그 선택의 기준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살펴봄으로써, 유전자가 중심이 되는 담론의 구조를 비판적으로 재구성해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2. 유전자의 지위

 

‘유전자’란 말은 1909년 요한센(Wilhelm L. Johansen)이 처음 만들어 사용했다. 하지만 그 말을 만들어낸 의도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맥락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는 다윈(C.R. Darwin)의 범생설(汎生說)에 기반을 둔 소아(小芽, gemmules), 바이스만의 결정자, 드 브리스(H. de Vries)의 범생자(汎生子, pangens) 등이 가진 사전결정론의 요소를 극복하기 위해 이 말을 만든 것이다. “유전자는 다른 것과 쉽게 결합할 뿐 아니라 다양하게 응용할 수 있는 하나의 작은 낱말(a little word)에 불과하다”1고 함으로써 그는 유전자 속에 미래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결정론을 분명히 거부하고 있다. 그는 그것이 실재하는 구체적 존재인지 아니면 은유적 개념인지도 분명히 구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전자는 점차 실체를 가진 물질적 존재로 자리매김되어갔다. 1953년에 DNA의 이중나선구조가 밝혀짐으로써 유전자는 확실한 물질적 근거를 확보하게 되며, 1970년대 중반에는 제한효소가 발견되어 DNA를 재조합할 수 있는 기술이 확보되고 이를 응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 DNA는 생명체의 형질을 전달하는 유전의 물질적 단위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인간의 모든 염색체에 들어 있는 DNA의 염기서열을 밝히려는 야심찬 계획이 추진되었고, 이제 우리는 이른바 인간의 유전자지도라는 것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30억쌍에 달하는 인간의 염기서열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생명의 설계도’ 또는 ‘신의 암호’라 불리는 이 유전자지도 또는 그 속에 존재하는 유전자는 우리의 운명인가? 신(神)의 메씨지인가? 생명 그 자체인가? 아니면 단순한 물질에 불과한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현대 분자생물학이 정의하는 유전자의 개념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1943년 비들(George W. Beadle)과 테이텀(Edward L. Tatum)은 ‘일 유전자-일 단백질 설’을 제창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30억쌍에 이르는 DNA의 염기서열 중 mRNA로 전사(轉寫)되어 tRNA에 실려온 아미노산을 연결함으로써 일정한 단백질로 번역되는 DNA의 단위를 하나의 유전자라고 한다. 예컨대 인간 글로빈의 알파 체인을 구성하는 아미노산 배열을 만들기 위해서는 426개의 염기쌍이 일정한 순서로 배열되어야 하는데, 이 426쌍의 염기서열을 이 단백질에 해당하는 유전자라 한다는 것이다.2 인체에는 약 10만종의 단백질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이 가설에 따르면 인체에는 같은 수의 유전자가 존재할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유전체(genome)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적은 약 3만종의 유전자만이 존재한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고 있다. 어찌됐거나 현대 분자생물학에서 유전자는 일정한 단백질을 생산하는 DNA의 염기서열이라고 규정된다. 유전자는 물질적 실체(DNA)인 동시에 어떤 유기체가 생산할 단백질에 대한 정보(염기서열)이다. 그렇다면 유전자의 집합인 유전체는 인체의 설계도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약 3만 또는 10만 개의 유전자에 대한 정보만 모두 파악한다면 인체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모든 사항을 조절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적어도 인간유전체연구사업 초기의 일반적 정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유전체사업이 진행됨에 따라 사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점이 점차 밝혀졌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하나의 단백질을 생산하는 실체(entity)이자 선천적으로 형질을 결정하는 유일한 요인으로서의 유전자라는 개념은 다음과 같은 새로운 발견들에 의해 이제 근거를 잃어가고 있다.

첫째, 30억개의 염기 중 단백질을 생산하는 부분, 즉 유전자를 구성하는 부분은 전체의 2%에 불과하다. 나머지 98%의 기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나마 유전자를 구성한다고 알려진 2%에 대한 연구도 이제 겨우 걸음마를 시작했을 뿐이다. 물론 전체 염기에서 차지하는 비중만을 따져 기능이 밝혀진 유전자의 중요성을 경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머지 98%의 염기서열을 모두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질적인 차이가 없이 배열된 염기 중에서 어떤 것은 단백질 생산의 정보로 사용되지만(exon) 어떤 것은 무시되는(intron) 이유나 메커니즘에 대해 우리는 알지 못한다. 또 유전체의 많은 부분에서 동일한 염기서열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이유나 그 기능에 대해서도 우리는 명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떤 텍스트의 철자배열을 완벽하게 파악했다고 그 텍스트의 의미를 안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3 우리는 유전체라는 텍스트의 극히 일부만을, 그것도 아주 단편적으로 파악하고 있을 뿐이다.

둘째, 그나마 밝혀진 30억쌍의 염기서열의 상당부분이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른바 순수 샷건(Pure Shotgun)방식4의 유전자조합 방법으로 작성된 유전자 서열은 약 50% 정도는 그런대로 정확하다고 할 수 있지만, 나머지는 심각한 오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샷건방식이 아닌 직접 실험을 통해 그 서열을 밝혀야 한다는 것인데, 그럴 경우 얼마나 많은 시간과 자본이 투자되어야 할지는 상상만 해도 끔찍할 정도이다.

셋째, DNA를 전사하여 단백질을 만드는 mRNA와 그것에 의해 생산된 단백질을 비교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그 둘이 이론적으로 예상한 것처럼 일치하지 않는다.5 이는 유전자학의 기본가정이었던 한 개의 유전자→한 개의 단백질이라는 도식이 더이상 적용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생명체의 기능이 유전자에 기록된 코드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 상호간, 세포내, 유기체내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유전자의 구조와 기능이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유전자지도 완성 이후의 연구방향이 구조유전체학(structural genomics)에서 기능유전체학(functional genomics), 또는 단백질학(proteomics)으로 이동해간다는 것은 유전자의 역할이 애초에 생각한 것처럼 절대적이고 단순하지 않으며 훨씬 더 상대적이고 복잡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넷째, 한 개의 유전자와 한 개의 형질이 정확히 대응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한 개의 유전자가 여러 형질의 발현에 관여(多面發現, pleiotropy)하거나, 여러 개의 유전자가 하나의 형질의 발현에 관여(多因子發現, polygeny)하기도 한다. 이는 유전자 상호간에, 또는 각 유전자에 의해 생산된 단백질 상호간에 다양한 영향을 주고받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유전자가 어떤 형질이 발현되는 하나의 원인(遠因)일 수는 있으나, 둘 사이의 직접적 인과관계를 상정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말이다.

다섯째, 지금까지 기능이 알려진 유전자라 하더라도 그 인과관계가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그리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설사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 해도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단지 통계학적 연관성이 주어질 뿐이다.

유방암을 예로 들어보자. BRCA1은 17번 염색체에 있는 유방암 유전자로서 1994년에 그 DNA 염기서열이 밝혀졌다. 지금까지 이 유전자에는 100여종의 변이가 있으며, 이 중 몇가지는 종양의 증식과 관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종양증식 유전자를 지닌 사람 중에서도 정말로 증식을 일으키는 경우는 거의 예외없이 유방암과 난소암의 가족력(家族歷)이 있는 경우에 한정된다. 대부분의 유방암 환자는 BRCA1과 관계없이 유방암에 걸린다는 말이다. 가족력이 있는 경우라 해도 이 유전자를 가진 그 가정의 모든 여성이 암에 걸리는 것은 아니다(이들의 유방암 발병률은 85%로 알려져 있다).6 이 경우 유전자는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정한 방향으로의 ‘영향’을 줄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유전자에 부여했던 절대적 결정요인으로서의 지위는 철회되어야 한다.

이처럼 ‘세포핵의 염색체 속에 들어 있는 일정부분의 DNA분자’로 정의되는 유전자는 지금까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물질로 생각되었지만, 개체의 세포 속에 담겨진 유전정보와 그 생물학적 의미 사이에는 현재로서는 극복하기 어려운 간극이 존재한다. 물론 이런 간극은 앞으로의 연구를 통해 충분히 채워질 수도 있겠지만, 그 관계가 일방적 지시와 복종의 관계로 밝혀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유전자 또는 유전체는 그로부터 모든 다양성이 생겨나는 불변의 독립적 ‘실체’로서가 아니라, 주위 맥락과의 관계 속에서 세포 및 유기체와 함께 진화해가는 역동적 ‘과정’의 일부로 보는 것이 더 그럴듯하다.7 유전자지도는 생명의 설계도나 신의 암호라기보다는 인류 진화의 족적이 기록된 역사책이다. 여기에 앞으로 어떤 것들이 기록될 것인가는 순전히 우리들에게 달렸다. 새로운 역사책을 쓰기 위해서 우리는 새로운 역사관을 가져야만 하며, 그것은 바로 유전과 유전자에 대한 새로운 인식구조이다.

 

 

3. 유전자 담론의 인식구조

 

유전자를 설계도가 아닌 역사책으로 볼 경우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담론이 형성될 것이다. 그러나 대안적 담론의 가능성을 탐색해보기 전에 지금 현재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유전자 담론의 구조가 어떠한지를 돌아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첫째, 현대 유전체학은 세계와 우리의 몸을 자동기계로 보는 기계적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마음과 몸을 철저히 구분하며 몸을 물질의 기본적 속성의 연장(延長)에서 찾는 데까르뜨(R. Descartes)의 철학과 그 연장의 세계에 수학적 체계를 부여한 뉴튼(I. Newton) 물리학은 근대과학의 패러다임이 되었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전통적으로 목적(telos)과 조화가 강조되던 생물학과 의학에도 적용되어 정신을 제외한 몸은 한갓 기계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의 몸은 각 부분의 집합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 부분의 단위도 점차 미세영역으로 내려가, 몸 전체의 조화를 중시하던 의학은 점차 장기(organ), 조직(tissue), 세포(cell)의 수준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리고 급기야는 유전자라는 단위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단위가 작아지더라도 그 작동원리는 항상 기계적이다. 각 분자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해 어떤 물질이 생성되는 과정에도 기계의 작동원리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메커니즘이라는 이름이 붙여진다. 유전자가 단백질을 생성하고 형질을 발현하는 과정에도 이와 동일한 메커니즘이 작동할 것으로 가정된다. 기계적 세계관은 이처럼 사태를 단순화해 바라보기 때문에, 앞서 지적했듯이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생체반응을 이해하는 데 곤란을 겪는다. 설사 그러한 복잡한 과정을 정확히 파악하여 기술했다고 해도 그러한 과학적 사실들을 담는 그릇은 언제나 기계론적 틀이었다.

둘째, 현재의 유전자 담론은 근대과학의 환원주의적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사태의 본질을 가장 기초가 되는 최소단위로 나누어보고자 하는 환원주의는 물질의 근원을 찾으려던 물리학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지금은 생물학에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위에 논한 기계론적 세계관에 근거한 것이며, 현대과학의 각 부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각 분과과학에서 연구대상의 최소단위들이 고안되었다. 물리학의 미립자와 분자생물학의 유전자가 대표적이지만, 음향학에서는 음소(音素, phoneme), 인류학에서는 문화유전자(culturgen),8 사회생물학에서는 기억소(記憶素, meme)9 등의 개념이 고안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이보다 상위의 개념들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 고안된 도구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계에 대한 원자적이고 기계적인 관점에 너무도 익숙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은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은 채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곤 한다. 물론 DNA의 이중나선구조가 밝혀지고 그것이 단백질로 번역되는 메커니즘이 밝혀진 마당에 유전자의 실재 여부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유전자의 생물학적 행동은 밝혀진 메커니즘보다 훨씬 더 유연하고 다양하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할 필요가 있다.

셋째, 유전체학의 옹호자들은 대체로 생물학적 행동이 유전자에 기록되어 있다는 유전적 결정론을 따른다. 하루가 멀다 하고 대중매체를 장식하는 새로운 유전자나 치료법의 발견 소식은 모두 그 유전자가 어떤 질병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전제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심지어는 약물이나 알코올 중독과 같은 후천적 상태마저도 이른바 경향성이란 이름으로 유전자에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바야흐로 대대적인 ‘유전자 사냥’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유전자결정론은 바이오테크놀로지(BT)에 의한 개입과 짝을 이루고 있다. 유전적 결정론이 우리의 운명이 선천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주장이라면, 바이오테크놀로지의 개입은 그 운명을 인위적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유전체 연구가 강조하는 무병장수의 꿈은 이러한 조작을 전제로 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유전자 담론의 이데올로기적 속성이 숨어 있다.

 

 

4. 유전자 담론의 정치경제학

 

인간유전체연구사업은 인류역사상 가장 거대한 사업 중 하나라고 한다. 이 사업에 관한 소식은 그대로 대중의 담론에 스며들어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다. 하지만 연구실에서 생산된 과학적 사실이 대중적 담론으로 전환되는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일정정도의 선택과 단순화가 있기 마련이다. 어떠한 사실이 선택되고 어떤 방향으로 조직·구성되는가에 따라서 과학적 사실은 이데올로기가 될 수도 있는데, 그런 점에서 유전자 담론은 다음과 같은 정치적·경제적 함의를 가진다.

첫째, 이 사업은 엄청난 경제적 잠재력을 지녔다. 벌써부터 사람들은 21세기는 바이오테크놀로지의 시대라고 이야기한다. 미국정부는 인간의 유전체에 대한 정보를 인류 공통의 자산으로 공개할 것을 약속했지만, 이제 연구의 방향이 구조유전체학에서 기능유전체학으로 전환되면 어떤 알려진 기능10을 가진 유전정보에 대해서는 틀림없이 특허권이 부여될 것이고 그것을 가진 사람은 엄청난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 문제는 이 사업에서 주도권을 가진 사람들이 이러한 잠재적 특허권자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들이 엄청난 양의 과학적 정보 중에서 어떤 것들을 취사선택하고 어떤 방향으로 이것들을 정리해서 대중에게 전달할 것인지는 자명하다.

예컨대 유방암 유전자 BRCA1은 유방암의 가족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유용한 미래예측의 지표가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95%의 유방암 환자에게는 거의 아무 쓸모가 없는 정보이다.11 이러한 상황에서 그 유전자의 발견자 또는 연구지원기관은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까? 당연히 이 발견을 확대 적용하고 싶을 것이다. 이때 뭔가 충격적인 기삿거리를 찾던 언론이 은근히 이들을 거들고 나선다. 그들은 이 연구결과에서 ‘유방암 유전자 발견’이란 제목을 뽑는다. 정보의 소비자인 대중은 이 연구의 맥락을 파악하기에는 너무 바쁘고 할 일이 많다. 한편 새로운 사업아이템을 찾던 바이오벤처 기업은 재빨리 이 기사에 착안해 DNA검사 써비스를 상품화하면서 유방암 유전자 항목을 추가한다. 이 검사가 유방암의 가족력을 가진 사람에게만 유용한 정보를 준다는 사실은 생략하거나 아주 작게 표시한다. 그리고 ‘머리카락 하나에 내 아이의 미래가!’라는 광고문을 내건다. 순진한 소비자는 돈을 내고 자신의 운명을 산다. 하지만 첨단과학의 옷을 입은 그 운명은 점쟁이가 손금에서 읽어내는 운명이 과학적인 만큼만 과학적이다.12 여기서 우리는 과학이 아니라 과학이 만들어낸 이미지를 팔고 사며 그 상품이 주는 정보에 따라 울고 웃는다.

둘째, 이미 많은 비평가들이 적절히 지적했듯이 유전자 연구의 진전은 차별의 이데올로기를 고착시킬 가능성이 높다. 아리안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유대인을 절멸하려고 했던 나찌의 우생학, 범죄자의 얼굴 형태를 범주화한 우생학적 범죄학, 민족간의 외모 차이를 민족차별에 이용했던 인류학적 우생학, 두개골의 형태로 사람의 내면을 분류했던 골상학(骨相學, phrenology) 등은 과학의 권위를 빌려 차별을 고착화하려 했던 대표적인 예들이다. 유전학이 발전하고 대대적인 유전자 사냥이 시작된 21세기에 이르러 우리는 새로운 우생학의 출현을 눈앞에 두고 있다. 당뇨나 고혈압, 암과 같은 순수한 의미의 생물학적 질병뿐 아니라 알코올중독이나 동성애, 심지어는 공격성·순응성·수줍음·대담함·소심함 등 후천적·사회적으로 형성된 성격에까지 유전자의 기준이 적용된다. 이제 고혈압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보통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보험료를 내야 할지도 모른다. 반골 성향의 유전자를 가진 사람의 공직 채용이 거부될 수도 있다. 어떤 사회가 정상으로 여기는 것 이외의 유전자를 가진 사람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정당화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차별의 근거가 되는 과학적 증거는 없지만, 어떤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데는 과학적 증거가 그다지 중요치 않다. 과학의 권위를 등에 업은 그 시대의 주도적 담론이 문제일 뿐이다. 바로 여기에 유전자 담론의 정치적 함의가 있는데, 유전자 담론이 현상고착의 이데올로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단순하고 직선적이며 기계적인 사유양식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셋째, 유전자 담론은 감시의 일상화를 가져올 뿐 아니라 얼마든지 변경 가능한 소인─체력·신장·장수·비만·인성·지능·적성·중독 등─에 대해 일찌감치 낙인을 찍음으로써 인간사회의 역동성을 잠재울 가능성이 있다. 유전자지도의 초안이 완성되었다는 보도가 있자마자 매체들은 벌써부터 DNA칩으로 신분증을 만든다든가 유전자 검사를 통해 각 개인의 유전적 소인을 밝힐 수 있다며 흥분한다. 이제 모든 사람의 유전정보를 기록한 거대한 데이터뱅크가 완성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이렇게 되면 이러한 정보를 독점하는 집단이 생겨날 것이고, 그들에게 권력이 집중될 것은 뻔한 노릇이다.

앞에서 누누이 강조했듯이 DNA 염기서열이 인간의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유전자 담론의 구조 속에서는 정도에 관계없이 유전자가 미래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만이 강조된다.

따라서 정보의 독점을 통한 권력의 획득이라는 씨나리오는 오도된 지식, 또는 왜곡된 담론구조에 그 뿌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전제가 있어야만 유전자 정보의 독점을 통해 권력이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막는 일은 그 정보의 독점을 방지하는 제도적 장치를 통해서도 가능하겠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유전자 속에 미래의 모든 것이 있다는 결정론을 재평가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5. 문화현상으로서의 유전자 담론

 

유전자 담론은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면서 우리의 의식 속에 깊이 자리잡아가고 있다. 언어학적 허구(linguistic fiction)13에 불과했던 유전자는 이제 당당한 물리적 실체일 뿐 아니라 인간의 물질적·정신적 상태를 결정하는 신적(神的) 존재로까지 격상된다. 이는 물론 생물학 분야의 눈부신 연구성과 때문이겠지만, 그러한 연구성과가 문화로 번역되는 과정에는 그밖에도 많은 정치적·사회적 요소가 개재되어 있다.

DNA에서 모든 현상의 근원을 찾으려는 현재의 유전자 담론은 유전적 본질주의(genetic essentialism)로 요약할 수 있다. 유전적 본질주의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과정을 통해 우리의 의식과 생활을 변화시키며 새로운 문화를 형성한다.

첫째, 질병, 행동, 생리적 기능 등 개인간의 모든 차이를 유전자의 차이로 환원하여 생각하는 유전자화(geneticization)가 진행됨에 따라 생물학적·심리적 현상의 다양성과 복잡성이 단순화·기계화된다. 이 유전자화의 극단에 사회생물학의 주창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이기적 유전자’라는 것이 있다. 이 주장에 의하면 인간은 어떠한 주체성도 없으며 단지 이기적으로 자신을 증식해가려는 유전자가 잠시 머무르는 장소에 불과하다. 남을 동정하고 도우려는 이타적 행위나 사랑의 감정마저도, 내 속의 유전자가 자신을 증식하려는 의도로 나의 행위를 조절하기 때문에 나타난다고 한다.14 이러한 사회생물학의 논의는 과학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유전자화의 극단에서 나타나는 문화적 담론의 하나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유전자를 독립적 실체로 가정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얼마든지 용납 가능한 일이지만, 그러한 가정이 몇몇 생명현상을 잘 설명했다고 해서 마치 그것을 유전자의 실재를 증명하는 것으로 여기거나, 바로 사회현상에 확대해서 적용하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무리한 외삽(外揷, extrapolation)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외삽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우리의 의식 자체가 유전자화된 탓이다.

둘째, 이렇게 모든 현상을 유전자로 설명하면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도 자연스럽게 유전자가 된다. 모든 생명현상과 심지어는 사회현상마저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어지며, 정상의 판단기준도 생활 속에서 우러나오는 가치가 아니라 유전체 속의 염기서열이 된다. 노화와 죽음과 같이 정상적 생리현상으로 여겨지던 변화마저도 질병으로 간주되기에 이른다. 생리적 현상과 병리적 현상을 구분하는 기준도, 선과 악을 구분하는 도덕 기준도 염기의 서열로 환원된다.15 아이들의 도벽(盜癖)도 도둑질을 유발하는 유전자 때문에 생기는 질병이며, 성적이 부진한 아이는 학습 유전자에 이상이 있는 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기준에서 벗어나는 모든 생명활동과 사회적 행위를 유전자의 이상으로 보게 되는, 모든 현상의 병리화(pathologization)가 일어난다. 사회 전체가 거대한 병원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셋째, 이렇게 유전자의 질병을 가진 비정상인이 양산되면 아주 평범한 일상사까지도 의학의 관리대상이 되는 의료화(medicalization)가 대대적으로 진행된다. 의료화는 이미 상당히 진행된 것으로 판단되지만(출산과 임종 같은 생애의 중요한 사건은 거의 예외없이 가정이 아닌 병원에서 발생한다), 유전자마저도 의료의 관리대상이 된다면 이제 병원은 거대한 행정기관으로 바뀌게 될지도 모른다.

이와같은 일상의 유전자화·병리화·의료화는,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의식 속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에서 우리 시대의 특이한 문화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6. 대안적 담론은 없는가?

 

인간유전체연구사업이 시작된 1989년 무렵에 과학자들이 가졌던 유전에 대한 기본개념은 대체적으로 유전자결정론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생물학자들은, 유전체의 모든 염기서열이 완전히 밝혀지기만 하면 모든 생물학적 기능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 다양한 상상력이 발휘되었고, 대부분의 질병이 정복될 것이라든지, 한 인간에 대한 모든 정보를 CD 한 장에 담게 될 것이라는 등의 예상이 뒤따랐다. 일부에서는 인간이 신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다고 흥분하기도 했으며, 포유동물에서 체세포 이식을 통한 복제가 성공하고 이 기술을 인간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복제양 돌리와 복제소 영롱이의 탄생은 유전자결정론을 확인시켜주는 결정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16 지금의 유전자 담론은 대체로 이와같은 맥락에서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담론에는 유전체연구사업이 진행되면서 새로이 밝혀진 사실들에 대한 과학적·철학적 성찰이 결여되어 있다.

역설적이게도 유전자결정론의 신화는 바로 그것에 토대를 두고 시작된 인간유전체연구사업의 성과로 인해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사업의 완성은 새로운 시작을 예고할 뿐이다. 이미 많은 생명체에서 유전체의 염기서열이 완전히 밝혀졌지만, 그 생명체(예컨대 대장균이나 초파리)를 완전히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과학자는 거의 없다. 이제 많은 과학자들이 구조유전체학의 시대에서 기능유전체학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고 진단한다. 유전정보와 그 정보의 생물학적 의미 사이의 엄청난 간극을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엄청난 과학적 성공의 끝에서 오히려 겸손을 배우고 있다.

지금까지의 유전자 담론은 다양하고 역동적인 삶의 현실을 유전자라는 물질적 정보로 환원한다. 유전자 담론은 유전자가 발현되는 생물학적 과정의 다양하고 풍부한 맥락을 생략한 채 일대일 대응의 인과론으로 모든 현상을 설명한다. 유전자 담론은 끊임없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지만, 한편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유전자는 과학적으로 추론된 생물학적 개념이지만, 그 상징적 의미는 생물학적 의미와는 관계없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한다. 유전자는 상징이고 메타포이며, 인간성·정체성·관계 등을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방식으로 규정하는 편리한 방편이다.”17 지금까지 받아들여져온 유전자의 메타포는 ‘신의 암호’ ‘생명의 설계도’ 등이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했듯이 인간의 유전체는 ‘인간 종(種)의 역사’이다. 그리고 유전체 속의 유전자는 역사 속의 사건이다. 역사(유전체) 속의 중요 사건(유전자)은 항상 다른 사건(다른 유전자)이나 알려지지 않은 다수의 주인공(기능이 알려지지 않은 염기서열)과의 관계 속에 존재하며, 그 역사를 바라보는 맥락(세포와 유기체의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된다(재접합·편집의 과정을 통해 다양한 단백질을 생산한다). 역사 속의 사건들은 역사를 구성하지만, 그것들의 단순한 축적이 바로 역사인 것은 아니다. 동일한 종류의 사건(유전자)이라 하더라도 그 사건의 주인공(개체)이 누구인지에 따라서, 그리고 그 사건이 일어난 맥락(환경)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유전자·유기체·환경을 서로 독립된 개별적 실체로 생각해서는 유기체의 발육과 기능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유전자가 유기체를 결정하고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 유기체가 환경에 적응한다는 단순 도식으로는 생명현상의 다양함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유기체는 성장·발육·생존하는 동안 지속적으로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또한 자신의 일부인 환경을 끊임없이 창조하고 변화시키며 선택한다. 생물학자 리처드 르원틴은 유전자·유기체·환경의 상호연관 구조를 ‘삼중나선’(triple helix)이라 표현한다.18

앞으로도 유전자는 생물학의 중요한 주제로 남게 될 것이며, 유전자가 가진 상징은 상당기간 동안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담론의 맥락은 지금까지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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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velyn Fox Keller, The Century of the Genes, Harvard University Press 2000, 2면에서 재인용.
  2. Ruth Hubbard and Elihah Wald, Exploding the Gene Myth, Boston: Beacon Press 1999, 51면.
  3. 같은 텍스트라도 그것을 읽는 사람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로 번역되기도 한다. 같은 염기서열을 가진 유전자라 해도 주변상황에 따라서 다른 종류의 단백질을 생산하기도 한다.
  4. 전체 유전자를 임의의 크기로 무작위로 잘라서 그것들의 상대적 위치를 엄청난 용량의 컴퓨터를 통하여 추적하는 기술이다. 이 방식을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같은 호수의 잡지 8권을 구입해서 그것들의 페이지를 각각 임의의 크기로 마구 잘라서 그들간의 일치되는 부분을 봐가면서 다시 잡지의 원래 페이지 순서를 재구성하는 방식이다.(조환규 「믿을 수 없는 ‘인체 설계도’」, 『한겨레21』 2001.6.14)
  5. Ron Orlando, “Proteomics,” Journal of Vascular Surgery 33(6), 2001, 1312〜13면.
  6. Hubbard and Wald, 앞의 책 168〜70면.
  7. 1983년 노벨의학상 수상자인 매클린톡(Barbara McClintock)은, 유전체를 가리켜 “유전적 활동을 감시하고 오류를 수정하며 예상치 못했던 사건을 감지하고 거기에 반응하는 매우 예민한 세포내 기관”(Keller, 앞의 책 33면에서 재인용)이라고 불렀다.
  8. 리처드 르원틴 『DNA 독트린』, 김동광 옮김, 궁리 2001, 33면.
  9.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홍영남 옮김, 을유문화사 2001, 제11장 참조.
  10. 여기서 ‘기능’은 유전자에 대한 연구에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얻어진 정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유전체학은 자체로서는 아무런 정보를 주지 못하며 인체의 기능을 연구하는 생리학과 결합함으로써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
  11. James Le Fanu, The Rise and Fall of Modern Medicine, Abacus 1999, 300면.
  12. 이 이야기 중, 유방암 유전자 BRCA1에 관계된 사실을 제외한 대부분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필자가 임의로 구성해본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이야기가 상당부분 현실화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13. Dorothy Nelkin and M. Susan Lindee, The DNA Mystique: The Gene as a Cultural Icon, W.H. Freeman and Company 1995, 3면.
  14. 리처드 도킨스, 앞의 책.
  15. 이때 무엇을 표준적 염기서열로 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될 터인데, DNA의 염기서열이 그 자체로 어떤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므로 결국 염기서열의 표현형을 근거로 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ATG(아데닌·티민·구아닌)의 서열이 GCA(구아닌·싸이토신·아데닌)의 서열보다 가치가 높다거나 그 반대라고 말할 이유는 전혀 없다. 만약에 그 서열의 상대적 가치를 말하기를 원한다면 그 염기서열이 운반하는 아미노산의 가치를 평가해야 할 것이지만, 아미노산의 상대적 가치를 평가할 기준 또한 없다. 결국은 그 아미노산 또는 아미노산으로 구성된 단백질의 기능을 보고 평가해야 할 것인데, 이렇게 되면 이미 유전자 서열 자체가 아닌 유기체의 기능을 말하는 것이다. 유전자화는 모든 기준을 유전자에 두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지만, 무엇을 정상으로 정하는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시 삶의 현장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전자 담론에서는 이러한 맥락이 무시되고 유전자 자체에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상정된다.
  16. 체세포 이식기술이 유전자결정론을 결정적으로 지지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체세포 이식은 성체의 유전정보를 배아에 이식함으로써 새로운 개체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사건이지만, 성체의 핵만으로 개체가 발생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개체가 발생되기 위해서는 모체의 세포질과 자궁이라는 환경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그런 요인에 대해서 우리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또한 일란성 쌍생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동일한 유전정보를 가졌다고 동일한 인간일 수는 없다. 따라서 유전자 정보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모든 생물학적 성질을 결정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17. Nelkin and Lindee, 앞의 책 16면.
  18. Richard Lewontin, The Triple Helix: Gene, Organism and Environment, Harvard University Press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