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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통신│7차 교육과정의 허실을 짚는다

 

위기의 실업교육 그리고 희망 만들기

 

 

하인호 河仁鎬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교육선전실장. 오류여자중학교 역사과 교사. chamho@orgio.net

 

 

1. 오늘의 실업고는 고교 전체의 약 절반을 차지할 만한 규모를 가졌음에도 실업교육은 완전히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온 국민이 해마다 총동원되곤 하는 대입수능시험에서조차 소외되어 있고, 몇년째 진행중인 교육개혁 논의에서도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으며, 나아가 2002년 시행을 앞두고 있는 7차 교육과정에서도 실업계 고등학교는 고려대상도 되지 못한 채 주변으로 내몰려 있다.

입시교육의 병폐를 지적하면서 인문계 학생들의 보충·자율학습이나 고액과외·수능 등은 늘 사회적인 문제가 되지만, 정작 실업계 학생들이 뭘 배우고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이들은 그저 대학 못 가고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취직을 하는 정도로 취급될 뿐이다.

사실 실업계 고교는 사회 전반에 걸쳐 남아 있는 직업에 대한 귀천의식 때문에 그 나름의 장점이 도외시되고 있으며, 학생 개개인의 적성과 능력보다는 성적순으로 진학이 이루어짐으로써 비교적 성적이 낮은 학생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 교육내용은 학생들의 이러한 전반적 특성이 고려되기보다는 이론과 개념 중심으로 이루어짐으로써, 학생들은 학업에 흥미를 잃게 되고, 학교는 산업체의 요구에도 부응하지 못하고 학생들의 직업적 요구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이름뿐인 ‘실업교육’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때문에 인문계 고교에 비해 수업 분위기가 산만할뿐더러 그 수준 또한 낮을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이처럼 학생들이 학교생활 자체에 관심이 없고 교육을 받고자 하는 의욕도 없는 상태이니, 졸업한 선배들의 별볼일없는 모습을 보면서 계속 학교를 다녀야 하느냐를 두고 고민하다 자포자기하게 되는 건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취업을 하자니 희망이 없고, 진학을 하자니 성적이 모자라 갈팡질팡하는 것이다.

이처럼 실업교육이 현재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총체적 부실을 면치 못하게 된 원인은, 세간에서 얘기되듯이 전체적인 학생수의 감소나 학생들의 실업계 고교 진학기피 현상의 심화라는 표면적 이유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실업교육을 관장하는 정부당국의 철학적 인식과 정책일관성의 부재가 직접적 원인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로 인해 실업교육은 교육의 원래 목적과는 동떨어진 부실 덩어리의 교육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2. 우리의 실업교육 정책은 경제확장기에는 양적 확대정책으로, 침체기에는 방치로 일관하는 등 해방 이후 악순환되어왔다. 교육부 내에서 실업교육 관련 부서의 계속적인 축소, ‘50:50 실업계 고교 확대정책’(1990년 초 대학진학의 병목현상과 산업체의 기능인력 문제를 함께 해소할 목적으로 인문계와 실업계 고교생 비율을 50:50으로 조정한 정책), ‘2+1제도’(공고 1,2학년 학생은 학교에서 이론수업을 받고 3학년 학생들은 산업체 현장에서 실습 위주의 교육을 받는 제도로, 산업체에 부족한 인력을 채우기 위한 노동착취 수단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음), 개방대와 산업대 및 전문대학의 성격 변화, ‘2+2 연계교육제도’(교육기회를 계속 제공하기 위해 실업계 고교 2〜3학년과 전문대학을 연계 운영하는 제도), ‘통합형 고교’(1990년대 말 실업계 고교 정원을 가능하면 줄이기 위해 실업계 고교의 인문계 고교로의 전환 정책과 함께 도입된 제도로, 한 학교에서 계열구분 없이 학생을 모집하여 2학년 때 학생의 희망에 따라 진학계열과 직업계열을 선택하도록 하는데, 오래 전에 실패한 종합고등학교와 유사하다) 도입 등의 실업교육 정책들이 그러하다. 결과적으로 실업교육 정책은 실업계 교육과정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 없이 정치·경제적인 측면에서 결정되고 일관성 없이 집행됨으로써, 인력수요와 사회수요의 균형을 적절하게 조절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실업교육에 대한 사회적 홀대와 무관심을 더욱 부채질하여 실업계 고교를 매력이 없는 학교, 가고 싶지 않은 학교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서울 시내의 한 여자상업고등학교(사진은 이 글의 특정사실과 관계 없음)

서울 시내의 한 여자상업고등학교(사진은 이 글의 특정사실과 관계 없음)

 

교육부는 이렇듯 실패한 실업교육 정책에 대한 평가와 반성 없이 지식기반사회가 도래하며 수요자인 학부모와 학생이 실업계 고교를 원하지 않고 산업체에서도 실업계 고교 출신자를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내세워서 실업계 고교를 구조조정(실업계 고교의 인문계 고교로의 전환과 통합형 고교의 도입 등)하고, 직업교육의 중심축을 현재의 고등학교 단계에서 전문대학 이상으로 이동시키는 등 오직 대학 문을 여는 데만 촛점을 맞춘 나머지 ‘모두가 대학’ 풍조를 더욱 부추겨 전국민을 대졸자로 만들려 하는 것이다. 이에 발맞춰 교육청과 사립 실업계 고교도 학교운영비가 많이 드는 실업계 고교를 인문계 고교로 전환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부는 건국 이래 처음으로 벌어지고 있는 현장교사들의 국가 교육과정 거부선언 속에서도, 우열학교를 만들고 평준화를 해체하며 실업계 고교를 말살할 7차 교육과정을 강행하려 하는 것이다.

7차 교육과정은 인문계·실업계의 계열구분을 없애고 개별학생이 선택한 과목들을 모아 개별교육과정을 만들어가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학생의 선택이 많고 적음을 떠나서 교육과정의 근본 지향점이 바로 선택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적 접근은 결국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배우면 된다는 발상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실업계 고교는 종합고등학교나 통합형 고교 단계를 거쳐 발빠르게 인문계로의 전환을 추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가령 통합형 고교에서 학생들은 정서적으로 볼 때 자신의 수학능력에 관계없이 무조건 진학계열을 선택할 가능성이 매우 크며 이는 학부모도 마찬가지인데, 학교경영자에게 이같은 상황은 인문계로의 전환을 위한 매우 좋은 명분이 된다. 그렇다면 학교 교육의 역할과 의미는 무엇이며, 대학을 원할 때는 무조건 대학에 진학하도록 하는 것이 수요자 중심의 교육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학교 교육에서 ‘학생이 배우고 싶어하는 것’을 존중하고 이를 적절히 반영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기초·공통 교육단계에서는 ‘학생이 꼭 배워야 할 것’과 ‘학생이 배울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이를 우선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성화=선택 확대라는 단순한 논리를 적용함으로써, 학생 각자의 개성과 적성을 살릴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기초·기본의 토양이 황폐화되어 개성화와 다양화의 줄기와 열매가 오히려 빈약해지는 결과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3. 7차 교육과정에서 교육부가 한 일은 실업계 고교는 약간 유연하게 시행해도 된다는 ‘윤허’를 내려준 것뿐이다. 그리고 7차 교육과정의 기본지침(국민공통기본교육과정과 고교 선택중심교육과정)이, 10학년(고1)에서 재량활동과 기술·가정 대신 전문교과를 이수할 수 있으며, 11학년(고2)에서도 국민공통기본교과를 배울 수 있다는 교육과정 편성·운영지침 및 “현재의 교사들도 보호하고 학생의 희망도 들어주는 절묘한 운영이 요구된다”는 지역교육청의 지침 등으로 운영기조가 바뀌었음에도 교사들의 7차 수정고시 요구를 묵살하고 있다. 이같이 의도된 방치 속에서 실업계 고교의 인문계 고교로의 전환이 가속화하고, 시장의 원리 속에서 그 수가 충분히 줄어들 때까지 가만히 놔두는 것이 교육부의 유일한 대책이다. 정부의 방치 속에 계속 왜소해지기만 하는 우리의 농업과 농고의 현실이 공고와 상고 등의 실업교육에 또다시 재현되는 것이다. 실업계 고교에 필요한 것은 7차 교육과정을 대충 시행해도 된다는 지침이 아니라 실업교육 정상화를 위한 근본적인 대책임을 강조하고 싶다.

최근 정부는 고등교육기회의 확대가 곧 평생교육체제의 근간인 것처럼 제시하고 있지만, 고학력자가 팽창된다고 해서 무조건 국가의 경쟁력이나 개인의 삶의 질이 향상되지는 않을 것이다. 현행 제도하에서도 고교의 기능인력 양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직업교육의 중심을 전문대 이상으로 옮기고, 7차 교육과정으로 개별 학생이 수학능력에 관계없이 대학진학에 유리한 계열과 교과목을 선택한다면 실업계 고교의 붕괴와 함께 기능과 기술인력 저변의 붕괴가 발생할 것이 우려된다. 전문대학 이상의 학력을 요구하는 직업이 늘어나기 때문에 실업계 고교의 존립 필요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인력의 수준이 과거보다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전문대 수준의 교육이 충실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라도 실업교육이 더욱 내실있게 운영되어야 한다. 중등단계의 실업교육이 부실화되어 있는 상태에서, 2년간의 짧은 전문대 교육만으로 양질의 우수한 중견인력을 양성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기초가 튼튼해야 높은 빌딩을 지을 수 있다는 소박한 진리가 직업교육에도 적용되어야 하며, 그 기초는 바로 실업계 고교 교육이다.

한데 현재 학생과 학부모들이 실업계 고교를 회피하는 가장 큰 현실적 이유는 대학진학의 불리함(실업계 교육과정에 따라 수업을 받고, 인문계 위주로 출제하는 수능에 의해 평가받아야 하는 모순) 때문이다. 현재도 그렇지만, 7월 20일 발표되었듯이 2005학년도 대입 수능의 경우 수능 I과 II로 나누고, 수능 I은 국·영·수 등 국민공통기본과목 중심으로 고교 2학년말에 치르며 수능 II는 선택과목으로 3학년에 치를 경우, 교육부의 배려로 국민공통교육기간에 속하는 1학년 때도 전문교과를 배우게 돼 있는 실업계 학생들은 수능에 실업계열을 따로 신설하지 않는 한 인문계 학생들보다 불리하다. 이처럼 인문교육을 중시하고 실업교육을 경시하는 잘못된 인식과 공정한 경쟁을 저해하는 실업계에 불리한 교육제도나 사회제도 등 부당하고 차별화된 대우는 갈수록 실업계 고교 진학 기피현상을 심화시키고 실업계 교육을 황폐화하고 있다.

 

4. 일반적으로 직업교육 대상은 학력수준이 낮은 소외계층이다. 그럴수록 사회와 국가의 배려는 총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이는 단순히 기회균등의 차원을 넘어 보장적 평등의 개념이 도입될 때 가능하다. 노동 천시의 문화구조와 학력 위주의 사회적 환경을 개선하고 경제적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를 통해 기회의 평등을 적극적으로 보장하려는 국가·사회적 노력이 우선되어야 한다. 실업교육은 빈곤층 학생에게 최소한의 경쟁력 있는 생존기술을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입시 중심의 교육과정에서 탈락할 학생들이라 해도, 그 때문에 더욱더 희망이 필요하다. 이러한 희망은 실업계 고교생들이 대학진학이나 졸업 후 현장에서 실업계 출신이라는 이유로 어떠한 정신적·경제적 차별을 받지 않는 교육제도(수능시험에 실업계열 신설, 시설 투자와 소득 재분배 차원에서 실업계 학생들에 대한 학비 면제 등)와 사회제도의 마련과 더불어, 학생·교사·학부모 그리고 사회 전반에 걸쳐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질 때 가능해질 것이다.

최근 실업계 고교를 정상화하기 위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정부 당국이나 시·도 교육청이 그와 같은 의견들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교육부나 시·도 교육청 내부에서도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단일화된 주장을 통해서만 정부 당국자들의 사고를 바꿀 수 있는 상황에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상화를 촉구하는 주장들은 개별화되고 분산되어 있다. 이제는 그 방안에 대하여 논의하는 단계를 벗어나 이들 방안을 어떻게 정책으로 구체화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에 촛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우선 실업계 고교는 산업체의 요구에 부응하는 학과를 신설하거나 이를 개편하는 등의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야 하며, 국가는 실업교육이 발전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교원단체는 시민단체와 함께 실업교육을 감시하고, 실업계 고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불식시키면서 실업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이와같이 국가·교육청·학교·교원단체·지역사회 등 모든 관련 주체들의 결집된 노력이 있을 때 실업교육은 발전할 수 있다. 우리 모두 실업계 고교 희망 만들기에 나서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