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평론
이데올로기 너머의 화해와 그 원리
황석영의 『손님』에 대하여
성민엽 成民燁
문학평론가. 서울대 중문과 교수. 저서로 『지성과 실천』 『문학의 빈곤』 『고통의 언어 삶의 언어』 등이 있음. junaura@snu.ac.kr
1
7,80년대 한국문학의 성과를 돌이켜보면 그 중심에는 항상 황석영(黃晳暎)이 있었다. 거기에서 황석영은 때로는 기원이고 때로는 전형이며 때로는 최대치였다. 그런 그의 문학이 1989년부터 10여년간 중단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주지하듯, 황석영은 89년에 북한을 방문했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독일·미국 등지에서 체류했으며 93년 귀국 이후에는 투옥되어 98년 석방되기까지 옥중생활을 했다. 그동안 그는 한국문학에서 동시대의 작가가 아니라 점차 문학사적 과거로 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90년대의 한국문학은 전시대의 그것과 날카로운 단절을 이루면서 전과는 아주 다른 모습을 갖게 되었는데, 그 변화가 급속히, 압도적으로 진행되는 동안 황석영 문학은 공백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황석영은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과 『손님』을 2000년과 2001년에 잇달아 발표함으로써(창작과비평사 간행) 10여년의 공백을 단숨에 건너뛰었고, 그러면서 그 공백이 단순한 공백이 아니었음을 알려주었다. 『오래된 정원』은 5년간의 옥중체험 없이는 씌어지지 못했을 것이고, 『손님』은 북한방문과 해외체류의 경험 없이는 씌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손님』의 경우, 작가 자신이 밝힌 바에 따르면, 북한방문시 호적상의 원적이며 부친이 소년기에 살았던 황해도 신천군을 방문하고 그곳에 있는 ‘미제 학살기념 박물관’을 참관한 경험, 베를린장벽의 붕괴를 보면서 시작한 작품구상, 미국에서 만난 류아무개 목사의 소년시절의 목격담, 그리고 옥중에서의 작품형식에 대한 고민 등이 이 작품을 낳았다. 그러니까 89년부터의 10년간의 삶은 작품발표의 부재라는 점에서는 공백이지만 새로운 작품들의 온양(醞釀)이라는 점에서는 생성인 것이다. 당겨 말하면, 이 공백·생성의 건너뛰기에는 80년대 문학과 90년대 문학의 대립을 변증법적으로 지양하는 새로운 한국문학의 계기가 잠재되어 있다. 물론 그 계기가 반드시 긍정적인 형태로만 있는 것은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그 계기를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적절한 비판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2
우선, 『손님』은 7,80년대 분단소설의 연장선상에서 파악될 수 있다. 분단소설로서의 『손님』에 특징적인 것은 좌우이데올로기의 대립에서 우익 쪽을 기독교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종래의 수많은 분단소설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설정이다. 한국에서의 좌우이데올로기 대립의 내용이 사실상 그렇게 명료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시간적으로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까지로 제한하고 보아도 여전히 그렇다. 그래도 좌익 쪽은 상대적으로 명료하다고 할 수 있다. 맑스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스딸린주의 등 몇가지 명명이 다 가능하지만, 그것들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일관성을 갖는다. 하지만 우익 쪽은 그렇지 않다. 자유주의·민주주의·민족주의라고 흔히 이야기되지만, 기실 그것은 전체주의·식민주의와 맞물려 있으며 스스로 뚜렷한 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을 갖는다기보다는 반공주의라는 대타적 자기규정이 더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익이데올로기의 내용은 경우에 따라 상당히 다르게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손님』에서의 이데올로기 대립은 맑스주의와 기독교의 대립으로 나타나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기독교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종교이므로 맑스주의/기독교라는 이데올로기 대립구도의 설정은 그다지 적절하지 못하다고 지적될 수 있다. 확실히 종교와 이데올로기 사이에는 보편성/특수성, 전통적/인위적, 피안/차안이라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일찍이 맑스가 “도덕·종교·형이상학, 그밖의 이데올로기와 그에 상응하는 의식형태들은 이로써 더이상 자립적이라는 가상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라고 말했을 때, 여기서 이데올로기는 도덕·종교·형이상학 등을 포괄하는 일종의 상위개념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맑스의 관점이 황석영의 근거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현대사회에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 종교와 이데올로기 사이의 유사성과 상호연관성의 증대를 황석영을 위한 근거로 제시할 수 있을 것 같다. 『손님』에 그려지고 있는 1950년 늦가을의 신천 양민학살사건에서 종교와 이데올로기는 유사성과 상호연관성을 확연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1
그러나 황석영 자신의 의도에 비추어보면, 그가 중시한 것은 맑스주의와 기독교가 함께 갖는 외래성이라는 성격이다. 「작가의 말」에서 황석영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기독교와 맑스주의는 식민지와 분단을 거쳐오는 동안에 우리가 자생적인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타의에 의하여 지니게 된 모더니티라고 할 수 있다.”(261〜62면) 황석영에게는 양자의 차이나 양자 사이의 대립보다도 그것들이 “하나의 뿌리를 가진 두 개의 가지”(262면)라는 점이 더욱 중요했고, 그래서 그는 기독교와 맑스주의를 다같이 ‘손님’이라고 규정했다. 이렇게 되면 대립되는 맑스주의/기독교는 그보다 더 넓은 범위에서의 대립, 즉 본래적인 것/외래적인 것의 대립(‘손님’이라는 비유를 사용하자면, 주인/손님의 대립)의 한 항목으로 수렴된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 이의를 제기해볼 필요가 있겠다. 그 이의는 본래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과 관련된다. 본래적인 것을 전통적인 것에서 찾는다면 지금 우리가 전통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과거에는 외래적인 것이었다는 반론에 부딪힌다. 유교가 그렇고 불교가 그렇다. 뒤집어 말하면 지금 외래적인 것이 미래에는 전통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황석영이 찾은 본래적인 것은 유교와 불교 이전의 고대로부터 계승되어온 샤머니즘이다. 오해 없기를! 지금 말하는 샤머니즘은 넓은 의미의 문화로서의 샤머니즘이다. 그것은 본래적인 토착문화, 토착적 공동체의 문화적 정체성을 내용으로 한다. 이런 의미의 샤머니즘은 오늘날에도, 물론 독립적이고 순수한 형태로는 아니지만, 우리 삶의 기층에서 작용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극복하고 화해에 도달할 것을 모색하며 그 화해의 원리로 근대적 인간을 제시하는 것이 종래의 분단소설의 주류였다. 샤머니즘적 계기가 차용된 경우도 적지만은 않았으나 그 차용은 부분적이었다. 그러나 황석영은 샤머니즘적 계기를 전면화하고 있다. 맑스주의와 기독교의 대립에서 초래된 신천 양민학살사건의 쌍방 당사자들, 그들은 한편으로 피해자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가해자이기도 하다. 그들의 영혼은 한(恨) 맺힌 영혼이다. 그 한은 샤머니즘적 동질성 속에서 해소된다. 여기서 기독교/맑스주의의 대립은 부차적인 것이 되고 양자의 ‘손님’이라는 공통점이 앞으로 나선다. 서로간에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인 그들은 ‘손님’에 의한 똑같은 피해자인 것이다. 기독교/맑스주의의 대립은 그 대립 너머에서 화해를 이룬다. 외래적인 것의 부정과 본래적인 것으로의 회귀가 그 화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제 남는 대립은 외래적인 것/본래적인 것의 대립인데, 이는 전자에 대한 부정과 후자에 대한 긍정이라는 가치판단이 분명하게 전제되어 있는 대립이라는 점에서 기독교/맑스주의의 대립과 구조적으로 다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본래적인 것으로서의 샤머니즘 또한 이데올로기일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질문이다. 샤머니즘을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마치 기독교가 이데올로기와 유사성 및 상호연관성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문화로서의 샤머니즘 역시 그러할 것이다. 좌우이데올로기 대립 너머의 화해의 원리를 근대적 인간에서 찾는 많은 분단소설들의 경우, 좌우이데올로기는 모두 이데올로기라는 점에서 공통되지만 근대적 인간이라는 원리는 비(非)이데올로기적인 보편적인 것임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적 인간이라는 것이 과연 그 자체 보편적인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문맥과 상황에 따라 그것은 얼마든지 이데올로기와 연관될 수 있다. 본래적인 것으로서의 샤머니즘 역시 그 점에서 다르지 않다.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손님』의 서술형태이다. “문체나 구성에 대해서 이른바 ‘객관성’이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260면)에 대한 반성이 이 작품의 서술형태의 출발점이었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 스스로 인용한 자신의 창작노트를 다시 인용해볼 필요가 있겠다.
과거의 리얼리즘 형식은 보다 과감하게 보다 풍부하게 해체하여 재구성해야 된다. 삶은 놓친 시간과 그 흔적들의 축적이며 그것이 역사에 끼여들기도 하고 꿈처럼 일상 속에 흘러가버리기도 하는 것 같다. 역사와 개인의 꿈같은 일상이 함께 현실 속에서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어서도 안되고, 화자는 어느 누군가의 관점이나 일인칭 삼인칭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 각자의 시점에 따라 서로를 교차하여 그려서 완성시켜줄 수 있을 것이다. 한 인물과 사건을 두고도 모든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생각과 시각의 다양성으로 자수를 놓듯이 그릴 수는 없을까. 객관적인 서술방법도 삶을 그럴싸하게 그린다고 할 뿐이지 삶을 현실의 상태로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노릇이다. 삶이 산문에 의하여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면, 삶의 흐름에 가깝게 산문을 회복할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 나의 형식에 관한 고민이다. (260〜61면)
여기서 ‘객관적인 서술방법’이라고 얘기되는 것은 전통적 리얼리즘 소설의 서술방식을 가리킨다. 이 서술방법은 삶을 현실의 상태로 재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소극적 측면을 지닐 뿐만 아니라, 그것이 삶을 그럴싸하게 그린다고 할 때 그 그럴싸함은 이데올로기적 왜곡을 뜻한다는 적극적 측면도 지닌다. 그것은 19세기 유럽에서는 시민적 이데올로기를 내용으로 했고, 20세기의 사회주의리얼리즘에서는 교조적 맑스주의(그 극단적인 예는 스딸린주의·마오주의·김일성주의 등이다)를 내용으로 했다.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는 아마도 중산층 이데올로기가 그 주된 내용이 될 것이다. 앞의 인용에 나타나는 황석영의 고민은 귀중한 것이다. 그것은 황석영 리얼리즘의 근본적 발전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이 고민과 새로운 탐색이 낳은 성과가 『손님』의 서술형태이다. 과연 『손님』은 시간순서에 따른 선조(線條)적 서술을 하지 않고 현재와 여러 층위의 과거가 부단히 교차되는 서술을 하고 있으며, 한 인물에 시점을 고정하지 않고 여러 인물들 각각의 시점을 부단히 교차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 교차서술에서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다성적 구조이다. 하나의 사건을 여러 인물들 각각의 시점으로 반복 서술함으로써 빚어지는 이 다성적 구조는 각각의 인물들 사이에 대화적 관계를 형성하고 각 인물들 자신에 대해 반성적 작용을 일으킨다. 다른 하나는 전체적 구조이다. 우선, 12개 장의 구성이, 작가 자신이 밝힌 바에 따르면, 황해도 진지노귀굿 열두 마당의 구성에 상응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교차서술의 진행은 얼핏 무질서해 보이지만, 가령 그 각각의 단편들의 선별과 배치가 엄정히 통제되고 있는 데서 보듯 사실은 전체적인 치밀한 계획 아래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계획은 진지노귀굿의 구성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죽은 자의 영혼들이 화자가 되고 있는 것도 진지노귀굿의 형식을 차용한 결과이다. 이 대목이야말로 전통적 리얼리즘의 개연성 원칙과 정면으로 위배된다. 이 두 가지 원리의 결합에 의해 산 자들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도 등장하고(오히려 죽은 자들의 등장에 더 큰 비중이 실린다) 그들의 상호이해와 자기반성이 가해/피해의 대립을 넘어서는 화해를 가능케 한다. 이렇게 보면 『손님』의 주제의식과 서술형태는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이 분명하다. 흔히 말하는 내용과 형식의 통일의 모범적인 예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3
이상으로 이데올로기 너머의 화해와 그 원리에 대해 큰 윤곽은 살펴보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우리의 고찰은 좀더 세밀해질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류요섭 목사라는 인물에 촛점을 맞추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은 류요섭의 꿈에서 시작해서 꿈으로 끝난다. 처음 꿈의 내용은 어린시절 고향에서의 기억의 단편들이고 마지막 꿈에서는 사람들의 끝없는 행렬이 들판을 지나 큰 산맥으로 이어진 구불구불한 길을 가는 모습, 즉 망자들이 한을 풀고 저승으로 건너가는 모습을 본다. 이 두 꿈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은 류요섭이 미국을 떠나 북한에 가서 고향을 방문하는 것이다. 그가 미국을 떠나기 직전에 형 요한이 죽고 요섭은 요한의 뼈 한토막을 가지고 가 그것을 고향땅에 묻는다. 영혼이 나타나는 것은 이미 미국에서부터이다. 죽기 직전 요한이 순남이 아저씨의 귀신을 보고 귀신과 대화하는 것이다. 요한이 요섭에게 말해주는 바에 의하면 요한은 옛날 서울에 있을 때도 가끔 귀신을 보았고 최근 3년 전부터는 수없이 귀신을 보았다. 요섭이 영혼을 보는 것은 이륙한 비행기 안에서 시작되는데 그것은 요한의 영혼이다. 그러니까 요섭은 요한의 뼈 한토막뿐 아니라 요한의 영혼과 함께 고향을 방문하러 가는 것이다. 죽은 자들이 모두 등장하여 산 자와 함께 대화하는 일은 제8장에서 이루어진다. 신천 양민학살사건 당시의 각자의 체험이 번갈아가며 고백된다. 서로간에 가해자이며 동시에 피해자인 죽은 자들은 그 대화가 끝나자 저승으로 간다며 사라진다. 이때 요한은 요섭에게 “이제야 고향땅에 와서 원 풀고 한 풀고 동무들두 만나고 낯설고 어두운 데 떠돌지 않게 되었다. 간다. 잘들 있으라”(250면)고 말한다. 요섭이 요한의 뼈를 고향땅에 묻는 것은 그 다음날의 일이고, 그런 뒤 요섭은 마지막 꿈을 꾼다.
제8장에서 죽은 자들의 영혼과 산 자가 함께 대화할 때 그 자리에 참가하는 산 자는 요섭과 요섭의 외삼촌 두 사람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북한에서 한편으로는 당원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회개하는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외삼촌은 사건 당시 남을 해치지 않았고, 어린 소년이었던 요섭 역시 그랬던 것이다. “저나 삼촌은 가해자가 아니잖습니까?”라는 요섭의 물음에 외삼촌은 “가해자 아닌 것덜이 어딨어!”라고 말하지만(175면), 좌우간 직접 개인적으로 죄를 짓지는 않았다는 의미에서 두 사람은 무죄한 사람들이다. 무죄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귀신을 보고 귀신과 대화할 수 있고, 또 영혼의 해원(解寃)을 가능하게 해주는 매개가 될 수 있다. 다성적 구조에도 불구하고 요섭이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이 작품을, 전체적으로 일관된 요섭의 시점으로 현실적으로 서술된 것으로 읽을 수 있다면 우리는 아주 다른 해석에 도달할 수도 있다. 즉, 다른 인물들(산 자든 죽은 자든)의 시점으로 서술한 부분들을 전부 요섭의 간접진술이나 환상으로 본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보는 데는 많은 난점이 있다. 가령 죽기 직전 요한의 시점으로 서술된 부분은 요섭이 결코 알 수 없는 일이니 요섭의 간접진술은 불가능하다. 또 죽은 자들과의 대화 부분이 만약 요섭의 환상이라면 그 고백내용의 객관적 진실성은 상실된다. 그것이 객관적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요섭이 그 내용들을 미리부터 알고 있어야 하는데 이 작품의 서술은 그런 가능성을 조금도 암시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작품은 샤머니즘의 틀을 수락하고 초현실적이거나 환상적인 여러 장면들을 서술된 그대로 받아들여 읽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관된 요섭의 시점으로 현실적으로 서술된 것을 읽는 데에 미련이 남는 것은 요섭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이 작품이 강렬한 메씨지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 꿈에 나오는 바이올린 소리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은 제8장에 가서이다. 그 바이올린 소리는 어린 소년 요섭이 숨겨주었던 인민군 누나들이 연주하던 것이다. 그 누나들과의 만남은 어린 요섭에게 일종의 원초적 체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대목은 다음과 같이 서술되고 있다.
바이올린은 고음으로 올라갈 때 더욱 흐느끼는 것 같았고 노랫소리는 여운을 길게 남겼다. 나는 얼굴이 뜨거워지면서 갑자기 목젖이 아프고 눈물이 울컥 몰려나왔다. 옷소매로 얼굴을 쓰윽 닦고 코를 훌쩍 들이마셨다. 아아, 갑자기 다른 세상이 보이는 것만 같다. 나무도 바위도 하늘도 모두 다르게 보인다. 세 사람 모두 제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말이 없다. (233면)
그런데 이 원초적 체험은 은밀한 죄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자신에게 인민군 누나들의 은신처를 캐물은 형 요한이 그녀들을 살해해버린 것이다. 바이올린 소리의 꿈을 꾸고서도 결코 그 일을 회상하지 않던 요섭이 마침내 묻어두었던 기억과 다시 마주치는 것은 다른 인물들이 돌아가며 자기 고백을 하는 제8장에 와서이다. 그렇다면 요섭 역시 무죄한 인물은 아니다. 그 역시 그 은밀한 죄의식으로 40여년을 내면 깊숙한 곳에서 고통받아온 것이다. 제2장의 비행기 안에서 요섭은 “갑자기 자신이 타인인 듯한 느낌”(37면)이 든다. 이 느낌은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들린 형 요한의 귀신을, 다른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죄의식의 활성화를 뜻하는 것이다. 요섭이 그 죄의식으로부터 놓여나는 것은 제11장에서 꾸는 꿈 이후의 일이다. 그 대목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류요섭 목사는 또 새벽 꿈에서 깨어났다. 아직은 떠날 시간이 안되었다. 그는 커튼을 젖히고 인적이 없는 거리를 내다보았다. 평양은 가로등까지도 모두 꺼진 채로 캄캄했다. 맞은편 아파트 건물에는 중간쯤과 꼭대기 부근에 불빛이 보인다. 누군가 새벽부터 일 나가려고 일찍 일어났을까. 빈 도로에 자동차 한대가 천천히 지나갔다. 그는 유리창에 희끄무레하게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낯익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257면, 강조는 인용자)
요섭의 자기회복은 비록 그가 지금 나이 오십이 넘었지만 일종의 성장인 것처럼 읽힌다. 『손님』의 지엽에서 이처럼 성장소설의 구조를 발견하는 필자에게는 아마도 필자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어떤 깊숙한 마음의 움직임이 있는 모양이다. 이 마음의 움직임이 필자로 하여금 이 작품을 자꾸 분열적으로 읽게 만든다.
샤머니즘의 틀을 온전히 수락하고 초현실적이거나 환상적인 여러 장면들을 서술된 그대로 받아들여 읽는 것이 작가의 의도에 부합하는 독법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독법은 반성의 기제를 희석시킨다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 너머에 있는 보편적인 것에 대한 의심없는 믿음과 상응한다. 필자로서는 샤머니즘이라는 원리보다는 이 작품의 서술형태가 보여주는 다성적 구조에서 더욱 설득력있는 원리를 발견한다. 이데올로기적 대립은 상호대화와 자기반성을 통해서 극복과 화해가 가능할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좌우대립뿐만 아니라 외래적인 것과 본래적인 것 사이의 대립에서도 그러할 것이다.
--
- 이 단락에서의 종교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의는 페터 지마, 허창운·김태환 공역 『이데올로기와 이론』(문학과지성사 1996) 50〜58면을 참조하였다. 다만 지마가 두 개념이 동의어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한 것과 달리, 지금 우리는 양자의 유사성과 상호연관성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