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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 | 테러, 전쟁 그리고 그후

 

미 테러사태 이후의 한반도

 

 

이원섭 李元燮

『한겨레』 논설실장 겸 통일연구소 소장. 서강대 신방과 대우교수. 저서로 『새로운 모색─남북관계의 이상과 현실』 등이 있음. wslee@hani.co.kr

 

 

1. 들어가는 글

 

지난 9월 11일 미국 뉴욕과 워싱턴에서 동시다발 항공기 테러가 발생했을 때 순간적으로 한반도에 미칠 부정적 여파를 머리에 떠올리지 않은 한국인은 아마 드물었을 것이다. 14년째 미국의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라 있는 북한의 처지를 익히 알고 있는 터에, 미국의 테러응징 파고에 혹시 북한이 휩쓸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인식은 한반도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지난해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군사적 긴장관계가 상당히 완화됐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계기로 북한과 미국의 대립이 격화되면 한반도는 우리의 바람과 상관없이 긴장이 고조되고 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도 있는 냉엄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기치 못했던 테러사태에 북한은 이례적으로 발빠르게 대응했다. 북한은 테러사건 다음날인 12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이번 테러에 유감을 표시하면서 테러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리형철 유엔주재 북한대표부 대사는 10월 5일 유엔총회 연설을 통해 테러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다시 한번 공식적으로 천명하기도 했다. 북한은 또한 6개월여의 공백 끝에 재개하기로 약속했던 5차 남북장관급회담을 테러사태와 상관없이 9월 15일부터 예정대로 서울에서 열고 이산가족 상봉, 경의선 연결, 금강산 육로관광 협의 등 주요 현안에 대한 합의사항을 발표했다. 그 뒤 큰 성과는 없었지만, 금강산관광 활성화를 위한 1차 회담도 예정대로 진행했다.

그러나 북한은 5차 장관급회담 합의에 따라 진행하기로 했던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불과 나흘 앞둔 10월 12일 돌연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연기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북한은 그 이유로 ‘불안한 남조선 정세’를 들었다. 북한은 남북간 대화는 계속하자는 뜻을 밝히면서도 앞으로의 회담은 ‘안전한 금강산’에서 하자고 고집했다.

북한의 이산가족 상봉행사 유보 통보로 가뜩이나 여론상 수세에 몰린 김대중정부로서는 이런 북한의 요구를 선뜻 수용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북한에 끌려만 다닌다’는 비난에 시달려온 정부로선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가급적 금강산에서의 회담을 피하려 했고, 남북간에 장소문제를 둘러싸고 실랑이를 벌이는 과정에서 예정됐던 회담들은 줄줄이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금강산관광 활성화를 위한 2차 회담과 대북 쌀지원 문제를 다룰 경제협력추진위 2차 회의가 연기됐고, 남북간 현안을 다룰 주 채널인 6차 장관급회담마저도 연기되기에 이르렀다. 잠시 냉각기를 가진 정부는 대승적 차원에서 장소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금강산회담’을 수용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남북관계의 앞날은 그리 밝지 않다.

 

 

2. 북·미 관계와 남북관계의 삼각함수

 

6개월여의 교착상태를 거쳐 어렵게 재개된 당국간 대화에 북한이 새로운 난관을 조성하는 정확한 이유에 대해서는 분석이 엇갈린다. 일단은 테러사태 이후 전개된 국내외 정세에 영향을 받아 남북관계도 당분간 속도조절을 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많다.

또 금강산을 회담장소로 굳이 고집하는 것은 미납된 금강산관광 댓가를 지불하라는 압력임과 동시에, 앞으로 경제적 여력이 없는 현대그룹에 미루지 말고 남쪽 정부가 책임을 지고 관광사업을 챙겨 댓가 지불을 보장하라는 뜻이라고 분석하는 견해도 있다. 그동안 금강산관광 문제를 둘러싸고 남북이 줄다리기를 벌였던 속사정을 감안할 때 이런 분석은 일정한 설득력을 지닌다. 외화가 부족한 북한으로서는 어렵게 승인한 금강산관광이 중단될지도 모르는 상황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베를린선언을 통해 약속한 사회간접자본 건설 지원, 특히 절실히 필요한 전력지원이 미국의 견제로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는 데 대한 누적된 불만도 작용했을 터이다. 그러나 이런 분석은 전체 틀을 설명해주기에는 미흡한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 유보의 이유로 내세운 ‘남조선 정세’에 대해 좀더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남조선 정세가 불안해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할 수 없다는 주장은 정치선전의 색채가 짙지만, 미국이 테러에 대한 보복공격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한반도 정세에 평상시와 다른 측면이 분명히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테러사태 직후 김대중 대통령이 육·해·공군 전군에 비상경계 태세를 내리고, 이어 미 공군 1개 대대가 남한에 추가 배치된 데 대해 강력한 불만을 표시했다. 한·미 양국은 “서태평양 지역에 위치한 항공모함 키티호크호를 중동지역에 투입함에 따라 역내 전투력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미 공군전력을 한반도에 추가 배치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국방부 관계자는 이어 미 본토에 주둔하고 있던 1개 대대급 항공전력이 한반도 중남부지역 ◯◯공군기지에 배치됐다고 밝혔다. 이는 서태평양을 지키는 미 7함대의 주력인 키티호크호가 이동함에 따라 이미 정해져 있던 전술 매뉴얼에 근거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남쪽의 정서로 볼 때, 우리 군의 경계태세 강화는 북한을 겨냥한 것이라기보다는 전세계적 테러전쟁에 대비한 의례적 조치이며, 미군 항공모함 키티호크호의 이동에 따른 F-15E기의 한반도 증편 역시 테러전쟁에 따른 전술적 군사이동으로 북한을 크게 자극할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이 테러반대 입장을 신속히 밝히는 등 유연하게 반응하는 데 대해 안심하는 분위기였다. 따라서 갑자기 ‘불안한 정세’를 강조한 북한의 주장은 이산가족 상봉 약속을 깬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변명쯤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북쪽의 입장에서 보면 다르다는 견해가 나온다. 북한은 과거 미국과 남한이 연례적인 합동군사훈련인 팀스피리트 훈련을 실시할 때마다 준(準)전시태세에 돌입하곤 했다. 한 탈북자의 증언에 따르면, 남쪽에서 팀스피리트 훈련을 실시할 때마다 모두 일손을 놓고 산에 올라가거나 진지에 들어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고 한다.

이런 북한의 처지에서 볼 때, ‘이례적인’ 미 항공전력의 남한 추가배치를 예사롭게 넘기기 어려웠을 것이란 분석이 설득력을 갖는다. 특히 북한체제에서 커다란 목소리를 내는 군부가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그 입김이 상당히 작용했으리란 분석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군부를 확실히 장악하고 있다는 데 대해서는 별 이견이 없다고 해도, 북한의 군부는 가볍게 무시할 수는 없는 집단이다. 북한군부로선 이런 ‘비상상황’에서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이산가족들이 만나고, 대표단이 남북을 오가며 회담을 하는 것에 반대하고 나섰을 가능성이 크다. 비무장지대를 뚫고 지나가야 하는 경의선 연결 및 도로건설과 금강산 육로관광에 대해서도 반대입장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남쪽 정서로 볼 때는 ‘과민대응’으로 비치기도 하는 이런 북한의 상황인식은 동북아 정세 및 북·미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분석할 때 상당한 근거가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한은 부시행정부의 적대적 인식에 상당한 피해의식을 지녀왔다. 클린턴행정부의 대북 유화 자세를 비난해온 공화당 인사들은 부시행정부 출범 초기부터 북한의 ‘못된 버릇’을 고쳐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고, 북한으로선 한번 밀리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는 생각에 팽팽한 기세싸움을 벌여왔다.

부시 대통령의 북한에 대한 불신과 부정적 인식은 여러차례 공개적으로 드러났다. 지난 3월 김대중 대통령과의 첫 한미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 대해 “약간의 회의를 갖고 있다”며 불신감을 드러냈다. 그는 햇볕정책의 당위성과 효용성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려는 김대중 대통령의 발언을 중간중간에서 끊고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보여 회담에 배석한 사람들을 당혹하게 했다는 후문이다.

대북정책에 대한 종합검토를 끝내고 6월 6일 발표한 미국의 대화재개 선언 때도 부시의 북한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고압적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그는 북·미 대화 의제로 세 가지를 일방적으로 제의했다. ‘제네바 핵합의 이행 개선, 북한 미사일계획의 검증 가능한 규제와 미사일 수출 금지, 그리고 북의 재래식무기 감축과 북쪽 군사력의 후방으로의 재배치’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의제들은 모두 북한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제네바 핵합의 이행 개선 요구는 조기 핵사찰과 플루토늄 추출 여부에 대한 현장검증을 뜻하는 것이고, 미사일계획의 검증 가능한 규제와 미사일 수출 금지 요구는 북한을 직접 방문해 미사일 배치 상태 등을 확인 점검하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재래식무기 감축 및 후방배치는 북한이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일 부분이었다. 북한으로서는 가뜩이나 열세인 군사력을 후방으로 재배치하면 군사력의 균형이 무너진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나마 주한미군 가까이, 휴전선 근처에 전진배치함으로써 공격을 억제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서울을 사정권 안에 두고 있는 것이 그들로서는 최대의 ‘안전판’ 구실을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을 터이다.

한국정부 역시 미국이 북한의 재래식무기를 협상의제로 들고 나올 경우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 주장을 펼 것이므로 논쟁만 가열시킬 뿐 실익이 없다고 보고, 이 문제는 한국정부에 맡겨줄 것을 여러차례 요청했다. 재래식무기를 협상의제로 삼겠다는 미국의 태도는 한국정부의 노력 등에 의해 그후 어느정도 강도가 누그러졌으나 아직도 의제에서 빠지지는 않은 상태다.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만을 놓고 협상을 벌인 전임 클린턴 행정부 때와는 질적으로 다른 강성 접근법이었다.

9·11 테러 발생 후에도 부시 대통령의 대북인식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는 중국 샹하이에서 열린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직전 국내 ‘연합통신’과 가진 특별회견에서 “우리와의 협상뿐 아니라 남한정부와의 약속도 이행하기를 거부하는 이 사람을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하느냐”며 강한 불신감을 감추지 않았다. 부시는 미국의 테러응징에 적극 협력하겠다는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답례’ 차원에서 햇볕정책을 지지한다는 뜻을 밝히기는 했으나, 북한과의 협상은 미국이 이미 제시한 틀 안에서 해나가겠다는 고압적 태도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북한이 즉각 반발하고 나선 것은 당연하다. 북한은 “초강대국의 대통령 체모에 어울리지 않는 경솔한 행동”이라며 대화중단 책임이 미국에 있다는 주장을 반복했다. 그리고 북한이 미국에 대해 근본적 의구심을 지우지 못한 상태에서 발생한 테러사태와 미국의 아프간 보복공격은 북한으로 하여금 불똥이 자신에게 튈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깊게 한 것으로 보인다. 테러응징을 빌미삼아 전세계 국가를 상대로 미국 편에 설 것인지 테러집단 편에 설 것인지를 선택하라는 줄세우기가 노골화하는 상황에서 북한으로서는 테러에 반대한다는 원론적 입장 표명 이외에 더 나아가기는 힘든 것이 사실이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압박은 토머스 허바드(Thomas C. Hubbard) 주한 미국대사와 잭 프리처드(Jack Pritchard) 한반도 평화회담 특사 등의 각종 회견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프리처드 특사는 북한이 테러국가들과 거래한 전력을 상기시키면서 북한이 국제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행동의 예로 이들 국가들에 대한 과거와 현재의 정보를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 어느 편에 설 것인지를 분명히하라는 강요로 해석될 수 있다.

미사일방어계획(MD)을 추진해온 부시행정부의 정책도 의구심을 높이는 요소다. 부시정부로서는 대(對)테러 보복공격 후 나타난 탄저균 살포 등 국내에서 발생한 생화학 무기공격으로 인해 MD무용론이 번지고 MD정책에 대한 비판이 이는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MD 추진 명분을 얻기 위해서라도 아프간 공격이 어느정도 정리되는 싯점에서 이른바 ‘불량국가’ 가운데 어느 국가를 미사일 보유국의 위협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새로운 희생양으로 삼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북한으로서는 가질 만하다. 미국 내에서는 차제에 아프가니스탄뿐 아니라 이라크의 후세인정권까지 전복해야 한다는 강경론이 공공연히 거론되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이 2개의 주요 전역에서 동시에 승리하겠다는 종래의 ‘윈-윈(win-win) 전략’(동시승리전략)을 수정해 2개의 주요 지역에서 동시에 적을 격퇴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이 가운데 1개 지역에서는 정권교체와 영토점령을 포함해 결정적 승리를 거둘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한다는 이른바 ‘윈-앤드-홀드’(win and hold)를 명시한 「4개년 국방정책 검토보고서」의 내용도 북한에 긴장감을 고조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는 테러발생 상황을 감안해 미국 본토방위를 최우선 순위에 두었다. 중국이나 북한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계산에서 위협국가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의도적으로 뺐지만, 동아시아지역을 가장 불안정한 지역으로 꼽고 있다.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커져 한미군사동맹과 주한미군의 중요성이 비례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는 분석도 있고 보면 북한으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테러사태를 틈타 일본이 전시에 자위대의 해외파병이 사실상 가능하도록 법적·제도적 규제를 푸는 움직임도 북한은 심상치 않게 보고 있음이 틀림없다. 이지스함 등 첨단무기를 갖춘 일본의 빗장 풀린 재무장 움직임은 동북아의 군사균형을 흔들고 향후 동북아 정세에 큰 파고를 몰고올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이 미국과의 대화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화를 간절히 원하고 있음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북한의 처지에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과의 적대적 대치는 곧 체제안전이 걸린 문제다. 군사적으로도 위협을 느끼지만, 경제적으로 심각한 곤경에 처해 있는 터에 어려움이 더욱 가중될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미국이 ‘테러지원국’ 굴레를 벗겨주어야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구의 자금지원을 기대할 수 있다. 일본과의 관계정상화 및 이에 따른 전후보상금도 미국과의 관계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가능함을 잘 알고 있다. 김정일 위원장이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개혁·개방정책에는 서방세계의 자금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북한이 미국에 대해 한편으로 비난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대화를 원한다는 메씨지를 보내는 것도 이런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북한으로서는 미국이 북한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버릴 것, 다시 말해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서로간에 협상하고 의견이 접근했던 수준에서 대화를 시작하자는 것이고, 미국은 정권이 바뀌었으니 원점에서 새로 출발하자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서로가 먼저 변화된 모습을 보이라는 대치구도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보면, 미국이 북한에 은신한 것으로 알려진 일본 적군파를 테러단체에서 제외해 북한의 부담을 덜어주는 등 유화적 태도를 보이고 있고, 국무부를 중심으로 대화의 문이 열려 있음을 강조하는 등 대화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희망적 관측을 할 수도 있다. 또 미국이 아프간에 대한 공격을 위해 국제연대의 틀을 결성하는 등 종래의 힘에 의한 일방적 외교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낙관론보다는 비관론에 훨씬 무게가 실리는 것이 사실이다.

북·미 간의 이런 냉랭한 대치는 남북관계의 진전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고 또 앞으로도 끼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부시행정부의 대북 강경책에 불만을 표시하며 남한정부와의 대화를 6개월여 중단했다. 그사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러시아와 중국을 차례로 방문해 우호관계를 다졌다. 김정일 위원장의 이런 행보는 북한이 전통적 우방국인 중국과 러시아와의 관계를 확고히한 바탕 위에서 미국과 대화하려 한다는 분석을 불러왔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 9월 북한이 남쪽과의 대화를 재개한 것은 대화 쪽으로 결단을 내리려는 뜻이 아닌가 하는 관측이 유력했다.

물론 남북대화 재개 여부를 북·미 관계라는 함수에서만 찾을 것은 아니다. 8·15 평양통일축전 참가 인사들의 ‘돌출행동’ 파문 이후 남쪽 분위기가 급속히 나빠진 데 대한 부담도 부분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방북대표단 7명이 구속되고 ‘햇볕정책의 전도사’로 불린 임동원 통일부장관 해임건의안이 가결되는 등 상황악화에 대한 부담이 대화 제의를 앞당겼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그러나 예상치 않던 테러사태로 한반도의 앞날은 다시 불투명해졌다. 북한체제의 속성상 김정일 위원장의 결단이 가장 중요할 터인데, 김위원장이 중국 등을 방문하면서 개방 쪽으로 방침을 정한 것은 확실해 보이지만, 아직 최종 결단을 못 내린 채 머뭇거리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3. 향후 전망과 과제

 

미국·중국·러시아·일본 등 주변강국들에 둘러싸인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볼 때 남북관계가 독립변수로 작동하기 힘든 구조로 되어 있음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그중에서도 남한에 3만 7천명의 주한미군이 주둔해 있는 미국의 입김은 거의 절대적 영향을 끼친다. 그동안 남북관계와 북·미 관계는 동전의 양면처럼 한반도 정세변화에 상호작용을 해왔다.

이런 구조적 여건은 당분간 변할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북·미 관계가 단시일 안에 눈에 띄는 진전을 보이지 못하더라도, 남북관계의 끈만은 이어져야 한다. 이는 남쪽에 필요할 뿐만 아니라 북쪽에도 긴요하다. 북한이 테러응징이라는 미국 주도의 국제적 물결에 편승하기가 쉽지 않다고 보면, 국제적 고립이나 예기치 않은 상황이 조성되는 것을 남북대화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막아야 한다. 남쪽 정부가 ‘북쪽에 끌려다닌다’는 여론의 호된 비판을 감수하면서 금강산회담을 수용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이해된다. 현실적으로 북한의 안전을 앞장서 담보하고 북·미 대화 추진에 부분적으로나마 기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남쪽 정부이다.

이렇게 볼 때 남북 정권은 각기 중요한 과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남한정부는, 첫째 대북 강경자세를 누그러뜨리지 않는 미국에 대해 햇볕정책의 실효성과 적실성을 설명하고,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음을 더욱 적극적으로 설득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미국이 핵·미사일·재래식무기에 대한 제한 등 기왕에 내건 대북협상 전제조건을 다소라도 완화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또한 북한이 ‘테러지원국’ 굴레에서 벗어나 국제사회의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와 함께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정치군사적 종속에서 벗어나 자주적 태도를 견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중국이나 러시아 등을 적절히 활용하는 외교적 능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둘째, 대북정책에 대한 국민 공감대를 확산하는 데 더욱 힘을 쏟아야 한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대북지원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한나라당의 견제심리를 약화시켜야 한다. 정부가 남북관계 진전의 과실을 독점하려 한다는 의구심을 해소할 필요가 있다. 국민여론도 문제가 되지만, 현실적으로 의회에서 제동이 걸리면 꼭 필요한 대북지원을 제때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를 위해 중요한 대북정책을 야당에 미리 알려주는 등 함께 상의하는 모습을 보이는 정치력이 필요하다.

북한 역시 상황에 현명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현상황을 직시해, 과욕을 부리다가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방문 기회를 살리지 못한 것이 대표적 예다. 좀더 얻어내려고 까다로운 요구조건을 내걸다가 아까운 시간을 보내,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평양행을 성사시키고도 결국 임기말에 쫓긴 클린턴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지 못했다. 만일 클린턴의 방북이 이뤄졌다면 한반도 정세는 획기적으로 변화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자 아쉬움이다.

둘째, 남한정부나 대북화해를 주장하는 인사들에 대해 고려해야 한다. 지난번 8·15 통일축전 참가차 평양을 방문한 인사들에게 굳이 개막식 참여를 종용한 것이라든지,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일방적으로 연기해 협상파트너인 김대중정부를 곤혹스럽게 만든 일 등은 전략적 차원에서 볼 때 ‘소탐대실’의 우를 범한 것이다. 자신의 논리에만 충실하고 경직된 태도를 보여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상대를 곤혹스런 처지로 몬다면 결국 손해를 자초한다는 전략적 사고를 해야 한다. 김대중정부가 임기말이 다가오고 힘이 떨어지는 상황이 될수록 이런 점을 더욱 고려해야 한다. 실기(失機)를 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