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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민중의 ‘웃음문화’와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M. 바흐찐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 아카넷 2001
전승희 全丞姬
하바드대 강사, 비교문학 sjeon@fas.harvard.edu
스딸린 치하 1930년대에 박사학위 논문으로 집필되어 심사, 재심사, 조건부 승인, 국외출판을 거쳐 198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 주목을 받게 된 미하일 바흐찐(Mikhail Bakhtin)의 ‘라블레론’이 마침내 우리말로도 번역 출판되었다. 민중적인 ‘웃음문화’로 중세의 공식문화를 비판한 라블레(F. Rabelais)를 이용, 우회적으로 소련의 정치를 비판한 탓에 그 길고도 험난한 심사와 승인의 과정을 겪었다고 알려져 있는 이 책(이덕형·최건영 옮김)의 집필의도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라블레에 대한 정당한 재평가이다. 바흐찐에 따르면 라블레가 르네쌍스기 유럽문학의 거장들이었던 단떼, 세르반떼스, 셰익스피어 등과 어깨를 나란히하는 대가임에도 작품의 핵심인 민중문화적 요소에 대한 후대의 몰이해로 인해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바흐찐은 이 저작에서 민중문화, 특히 민중의 웃음문화의 전통이 라블레 작품의 언어와 이미지에서 어떻게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는지, 그 함의는 무엇인지를 세심하게 따지고 있다.
책의 본론에서 바흐찐은 라블레 작품의 민중문화적 기원을 ① 민중적 웃음문화의 다양한 형식, ② 광장의 언어, ③ 민중축제적 형식과 이미지, ④ 향연의 이미지, ⑤ 그로테스크한 몸의 이미지, ⑥ 물질적·육체적 하부의 이미지 등의 카테고리로 나누어 추적한다. 이렇게 민중적인 언어와 이미지의 형태와 역사와 의미를 논한 뒤, 마지막 제7장에서는 그런 요소들이 당대현실 및 인류역사와 관련해 갖는 의미를 분석하고 있다. 논의를 관통하는 바흐찐의 주장은 라블레의 언어와 이미지가 중세 공식담론의 관념성과 폐쇄성에 대항해 민중문화 특유의 건강하고 낙천적인, 육체와 물질에 근거한 세계관, 그 개방성과 자유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흐찐에 따르면 라블레의 이런 관점은 르네쌍스 당대 현실에서 가장 급진적인 입장과 통하는 것이면서 그 한계를 뛰어넘는 진정으로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흐찐의 이 책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져 있는 그의 박학다식이다. 그는 논의전개의 핵심이라 할 고대 및 중세의 민중문화뿐 아니라 그 시대의 고급 장르, 그리고 단떼, 셰익스피어에서 괴테, 위고에 이르는 근대 유럽의 주요 작가들과 작품에 대해 백과사전 수준의 지식을 예사롭게 구사한다. 이런 지식은 물론 단순히 과시를 위해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라블레에 대한 기존의 몰이해를 교정하기 위해 서구 문화사에 대한 거시적 비교 조망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동원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흐찐의 뛰어난 점은 그런 거시적 안목이 작품의 디테일 하나하나를 꼼꼼히 분석하는 미시적 섬세함과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온갖 우스꽝스러운, 그러나 단순히 우스꽝스러운 것만은 아닌, 언어와 이미지의 유익하고도 유쾌한 ‘성찬’을 즐길 수 있다.
바흐찐이 쓴 라블레론인 이 책을 우리 독자의 대부분은 라블레보다는 바흐찐에 대한 관심에서 펼쳐들 것 같다. 1980년대 후반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소설론과 도스또예프스끼론을 비롯해 몇몇 주요 저작들이 우리나라 말로 번역되었지만, 이론가 바흐찐의 전모나 핵심을 알기에 충분한 것은 못되었다. 최근의 논의에서 그의 이름이나 그가 창안한 용어들이 자주 거론되기는 하지만, 다소 부정확하게 사용되거나 왜곡되게 받아들여지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이 책은 그런 상황의 개선에 도움이 될 것이다. 가령 역자 후기에서도 언급된 바 있지만,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에는 민중적 웃음문화와의 연관을 밝혀준 바흐찐의 역사적 조망이 참고가 될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언어는 세계관의 표현이며, 문학작품에서 세계관의 ‘교향화’가 이루어진다는 바흐찐의 주장을 기표와 기의, 혹은 언어와 사물 사이의 간극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해체론의 논의와 동일시하는 것이 부당함을 분명히 알려준다. 본문에서 간간이 언급되는 것처럼 ‘자연주의’와는 다른 객관성을 추구하는 ‘리얼리즘’은 바흐찐 문학논의의 당연한 전제이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해체론에서는 논의의 지평에 들어가지 않는 민중과 그 문화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바흐찐에게 얼마나 핵심적인지도 이 책을 읽으며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바흐찐은 라블레적인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 르네쌍스 시대 특유의 산물이라 했고 그것은 타당한 지적이지만, 중세 공식담론의 특징이었던 관념성과 폐쇄성이 존재할 경우(혹은 존재하는 한), 민중문화 고유의 입담과 해학을 도입해 그 유물론적이고 개방적인 세계관으로 공식담론의 한계를 폭로하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문학, 문화적 전략은 언제 어디서나 유효할 것이다. 우리 문학사에서도 가령 김지하의 「오적」이나 「비어」 「똥바다」 등은 민중의 웃음문화를 계승해서 우리 문학 특유의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으로 승화시킨 훌륭한 예가 아니었을까 싶다. 혹은 장르는 다르고, 건강한 낙천성의 정도는 들쭉날쭉하다 하겠지만, ‘딴지일보’가 창안해서 장안에 유행시킨 ‘그로테스크한 몸의 이미지’나 ‘물질적·육체적 하부의 이미지’를 부각하는 ‘구어체’ 언어는 오늘날 우리의 사고에 존재하는 경직되고 폐쇄된 부분에 대한 풍자의 기능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다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러시아문학의 전문학자들이 러시아어 원본을 토대로 하고 다른 언어의 번역본도 참조해서 4년여의 공을 들여 이같이 훌륭한 우리말 번역본을 낸 것은 정말 기쁜 일이다. 원주 외에 우리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붙인 친절한 각주와 연보, 라블레의 초상화와 그의 작품표지 등을 수록한 화보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이렇게 훌륭한 업적에도 약간의 흠은 있으니, 간혹 부주의한 번역이 눈에 띄어 아쉬웠다. 가령 중요한 용어에 원문을 병기한 것은 전문 연구자들을 위해 도움이 되는 현명한 처리였다 싶지만, 번역 없이 원문을 노출한 부분 중에는 납득이 가지 않는 경우들도 있었다. 일례로 358면에 ‘vendange’라고 한 것은 ‘포도수확축제’라고 못할 이유가 없다. ‘흐로노또프’는 원음대로 표기한 것이겠지만, 이전에 ‘크로노토프’로 번역된 적이 있는만큼 각주가 있었더라면 더 좋았겠다. 긴 문장을 끊어 번역하느라 수식어가 생략되어 주어의 뜻이 변한 경우도 있었고(161면), 원본의 오식임이 분명한 ‘시편’ 인용의 출처는 영역본을 참조했더라면 정확히 알려줄 수 있었을 것이다(144면). 끝으로, 인용된 라블레 작품의 번역에 대해 한마디 하자면, 정평 있는 기존의 번역을 사용하기로 한 것은 타당한 결정이겠지만, 한차례의 재점검은 필요했지 싶다. 가령 인용문 중에 팡타그뤼엘이 친척인 조프르와가 불태웠다 나중에 다시 세운 수도원을 방문했다는 설명이 있는데(672〜73면), 바흐찐이 문장 하나하나를 짚어 논의를 전개하는만큼(674면) 정확한 번역은 필수적이다. 유감스럽게도 인용문에는 “불태웠다 나중에 다시 세운”이라는 수식어구가 빠져 있고, 또한 ‘충실한 친척답게’라는 팡타그뤼엘의 묘사는 ‘특이한 인간처럼’이라고 엉뚱하게 번역이 되어 있다. 전체의 논지를 파악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겠지만, 아쉬움을 남기는 옥에 티이다. 자잘한 실수를 언급한 감도 있지만, 이 번역본 자체가 워낙 방대하고 훌륭한 업적인만큼 작은 흠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것이 도리일 듯하다. 하지만 새삼 강조하지만, 전문학자에 의해 이만한 규모의 책이 이만큼 책임있게 번역된 일도 흔치 않다. 그리고 이만한 규모의 전문 비평·이론 서적이 이처럼 재미있게 읽히는 일도 흔치는 않다. 모두들 이 ‘웃음’의 ‘축제’에 동참해보는 게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