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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형기 李炯基
1933년 경남 진주 출생. 1950년 『문예』지로 등단. 시집으로 『적막강산』 『보물섬의 지도』 『그해 겨울의 눈』 『심야의 일기』 『죽지 않는 도시』 등이 있음.
코뿔소
내가 사는 아파트엔
코뿔소 한마리가 살고 있다
내가 데려온 것은 아닌 그 녀석은
틀림없이 몰래 숨어들었을 게다
코에 뿔이 우뚝 솟은
그 우람한 덩치가
언제 어떻게
이 좁은 집에 숨어들었을까
낮 동안은 쥐죽은듯 기척이 없다가
밤이면 어디선가 나타나
온 마룻바닥을 어슬렁거린다
가끔은 벽에 코를
아니 코 같은 뿔을 문질러대면서
씩씩거리는 그 녀석
무얼 어떻게 하자는 건지
그 존재 자체가 또한
허황한 수수께끼다
아 그렇구나
허황하기에 그것은 바로 내 꿈이구나
안개
오늘도 이 도시엔
새벽부터 안개가 자욱하다
새벽부터라 했지만 사실은
초저녁이고 밤중이고 가리지 않고
밀려드는 안개
미세한 물방울인 그것들은
한데 뭉쳐서 강력한 안개
군단을 이룬다
그 군단의 포위 속에서
시민들은 눈만 뜨면 안개를 마시고
다시 안개로 녹아서
실체 없는 소문으로만 떠돈다
하늘과 땅이 하나로 합쳐져
구분이 없는 이 도시
그리하여 모든 것이
필경 안개로 돌아간다
안개가 전부다
세월
봄이 오면 이윽고 겨울
겨울이 오면 또 이윽고 봄
그렇게 돌고 도는 세월
실은 지구가 자전할 뿐이다
그러니 자취가 있을 수 없는
텅 빈 허공이여
그 속도 아무리 빨라도
우리는 그냥 태연하다
아무 일도 없구나 백치처럼
그래 그래 지겨운 백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