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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어느 혁명적 낙관주의자의 초상
김학철론
김명인 金明仁
문학평론가. 평론집 『희망의 문학』 『불을 찾아서』 등이 있음. CRITIKIM@chollian.net
✽ 이 글을 쓰는 데는 장춘 길림대학 윤해연 교수의 도움이 컸다. 그는 내게 김학철 선생의 문집들과 선생에 대한 추모특집이 실린 잡지 『장백산』을 보내주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뜻을 전한다.─필자
1. 한 시대가 문을 닫는다
2001년 9월 25일, 중화인민공화국 길림성 조선족자치구 연길시 연변병원에서 향년 86세의 한 노인이 눈을 감았다. 그가 지니고 떠난 이름은 김학철(金學鐵). 하지만 그가 1916년 식민지 조선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룡동리(현재의 원산시 용동)에서 태어나 지녔던 이름은 홍성걸이었다. 1916년에서 2001년까지, 원산에서 연변까지, 그리고 홍성걸에서 김학철까지, 한 사람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전유했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이름이라 부르는 존재의 기표가 차지하고 있는 이 좁은 듯 넓은 영역에는 참으로 많은 것들이 들어 있다.
김학철. 1916년 원산에서 누룩제조업자의 장남으로 출생. 서울 보성중학 재학중 1935년 상해로 건너감. 민족혁명당의 테러활동에 참여. 1937년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전 황포군관학교) 입교. 1938년 민족혁명당의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의 전신)에 참여. 1941년 태항산 팔로군 근거지에 합류. 이 무렵 중국공산당에 입당. 그해 12월 호가장 전투에서 일본군과 교전중 다리에 총상 입고 일본군에 피체. 나가사끼 형무소에서 4년간 복역, 부상 악화로 한쪽 다리 절단수술. 해방 직후 서울에서 10편의 단편소설 발표. 1946년 월북하여 『로동신문』 기자, 외금강휴양소 소장, 민족군대(인민군)신문 주필 등 역임. 1950년 중국행. 북경 중앙문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1952년 연길에 정착, 전업작가로 활동.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 등 창작. 1957년 ‘반우파투쟁’ 과정에서 탄압받음. 1967년 모택동 우상화와 ‘반소 히스테리’, 경제파탄 등을 격렬히 비판하는 미발표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 필화사건으로 이후 10년간 복역. 1985년 이래 장편 『격정시대』 등 여러 권의 소설과 수필, 자서전 등을 연변과 남한에서 간행.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역임. 1994년 KBS 제정 해외동포 특별상 수상. 2001년 사망.1
이것이 그의 생애의 이력이다. 그 이력이 차지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 역사와 지지(地誌)는 길고도 넓다. 그 안에는 한국과 중국, 일본이라는 동아시아 3국의 근대의 시간들이 대부분 녹아들어 있다. 일본의 제국주의화와 한국과 중국에 대한 침략, 한국의 민족해방투쟁과 내전과 분단, 중국의 항일전쟁과 혁명의 성공과 오류 등이 그의 이력 속에서 구체적 육체성을 지니고 살아 있다. 또한 그 안에는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여러 공간들이 역시 구체적 물질성을 지니고 그 역사시간을 가로지르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이 이 생애의 주인공의 삶과 의식 속에서 모순적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한 인간(김학철) 속에 동아시아(공간)의 근대(시간)가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생애는 이제 종언을 고했다. 그리고 아마도 그의 죽음과 함께 독특한 시공간적·물리적 체험으로 충만한 이 모순적 통일도 이제 시효를 잃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동아시아 지형과 그가 생을 마감한 싯점의 동아시아 지형은 이미 현격히 달라져 있다. 더이상 그가 살았던 시대와 같은 격변과 유동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 당시에는 얼마든지 있었던 김학철 같은 삶의 모델들, 즉 ‘동아시아 일체형’의 모델은 이제 다시 등장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의 죽음과 함께 고전적 의미의 혁명의 시대 역시 종언을 고하고 말았다고 할 수 있다. 민중들이 직접 무기를 들고 자기에게 들씌워진 운명과 싸워 이길 수 있었던 시대, 격렬한 유동과 변전의 시대, 그 시대를 혁명의 시대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제 다시 그런 시대는 오지 않는다. 한 소년이 어느날 유도복을 넣은 트렁크 하나를 들고 서울을 떠나서 의주를 지나고 만주를 거쳐 상해로 가는 시대, 한 청년이 대륙을 무대로 간난의 전장을 종횡편력하고 제국주의 일본의 감옥과 사회주의 중국의 감옥에서 도합 14년 동안 갇혀 있게 되는 시대는.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안정과 성숙인지 정체와 부패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시대는 더이상 파란만장의 시대는 아니다. 김학철의 시대는 끝났다. 분명히 그렇다. 하지만 이 종결선언 속에는 끝내 총을 들 기회를 갖지 못한 세대가 총을 든 세대에게 느끼는 어떤 종류의 선망이 뒤집힌 채로 들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부러움과 동경 가득한 낭만적 노스탤지어(nostalgia)의 다른 표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지금 내가 예를 갖추어 장송하고 있는 것은 한 시대의 성격이고 그 시대를 바로 그 시대답게 살아간, 당대의 구현체로서의 한 인간이다. 하지만 나는 그 시대가 넘겨준 과제와, 그 시대가 그 과제를 이행하기 위해 축적했던 방법과 양식까지도 함께 땅에 묻고 싶지는 않다. 김학철이 살았던 시기도 지금도 근대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김학철이 총을 들고 맞서 싸웠던 대상도 근대라는 이름의 리바이어선(Leviathan)이고, 지금 우리가 총 없이 맞서 있는 대상도 여전히 그것이다. 단지 역사적 국면이 변화하고 생활세계가 달라졌을 뿐이다. 최원식(崔元植)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기본적으로 근대 전기에 속해 있었고, 우리는 근대 후기에 속해 있다는 차이뿐일 것이다.2
김학철은 생전에 연변에서 5권의 소설집과 두 편의 장편소설, 그리고 전집에 해당하는 네 권의 『김학철문집』을 간행했고, 남한에서 한 권의 소설집, 세 편의 장편소설, 한 권의 자서전, 두 권의 산문집을 간행했다.3 해방 직후 서울에서 약간의 단편소설을 발표하고 1952년에서 1957년까지 5년 동안, 그리고 1980년대 중반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약 15년 등 20년 정도밖에 안되는 기간에 쓴 것으로는 적은 양이 아니다.
‘김학철론’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했지만 이 글은 그의 전체 저작을 대상으로 하는 본격적인 작가론에는 크게 못 미친다. 이 글은 단지 그가 각각 1954년, 1965년, 그리고 1986년에 집필하거나 발표했던 『해란강아 말하라』 『20세기의 신화』 『격정시대』 등 세 편의 장편소설만을 대상으로 하고, 그의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을 참고로 해서 ‘혁명전사’이자 작가인 김학철의 삶과 문학에 대해, 그것이 오늘의 우리에게 남겨준 것들에 대해 산만한 생각을 늘어놓는 것을 넘지 못한다.
2. 『해란강아 말하라』—김학철을 가둔 김학철 소설
김학철은 1952년 북경의 중앙문학연구소 연구원직을 사임하고 연변에 정착하여 연변문학예술계연합회 주임으로 일하다가 반년 만에 사표를 내고 ‘전업작가’의 길로 나섰다.4 그가 전업작가의 신분으로 쓴 첫 장편소설이 이 『해란강아 말하라』이다. 한마디로 말해 이 작품은 식민지시대 이래의 우리 장편소설적 전통에 잘 어울리는 규범적 작품이지만, 김학철의 작품세계에서는 좀 외떨어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세계는 기본적으로 실기(實記)의 세계이다. 단편소설들 중 일부가 간혹 허구적으로 제작된 경우가 있지만 그의 소설들은 대부분 미학적 가공을 최대한 절제하고 자기 경험의 일부를 그대로 재현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재현도 어떤 의도적인 플롯의 장치에 의지하지 않는 무정형인 것이 바로 김학철의 득의의 서사법이다. 『20세기의 신화』와 『격정시대』는 그 대표적인 경우로서 대부분 작가의 경험 속에 들어 있는 인물들과 사건들이 실제의 진행과정을 따라 방사형으로 쉬임없이 퍼져나가고 작가는 그것들을 가급적 통제하지 않고 그대로 놓아둔다. 그리고 그 사이에 끝없이 작은 에피소드들이 끼여들어 하나의 다성적인 서사의 큰 다발로 묶이는 것이다. 그것은 해방 직후 나가사끼 감옥에서 갓 출소하여 서울에 와서 발표한 「균열」 「담뱃국」 등의 단편에서부터 일찌감치 나타나는 김학철 서사의 기본문법이다. 하지만 『해란강아 말하라』는 이와는 달리 정형적인 짜임에 의존하고 있는 작품이다.
1920년대 말에서 30년대 초반 무렵 해란강변의 유수툰 마을, 조선인 이주자들이 촌락을 이루고 살고 있는데 지주─자작농─소작농─농업노동자 또는 머슴─룸펜 프롤레타리아 등의 전형적인 반(半)봉건적 계급구성이 존재하고 있다. 물론 처음에 소작농들은 지주의 권력에 눌려 병작반수, 즉 5할이라는 고율의 현물소작료를 납입하면서도 소작권을 박탈당할까 무서워 지주에게 대항하지 못한다. 그러나 시간이 가고 중국공산당과 연계된 농민협회 조직이 점차 힘을 얻어가면서 소작농들은 소작쟁의를 벌여 삼칠제를 관철시키게 되고, 이를 수용하지 못하는 지주계급은 일변 지주동맹을 결성하고 일변 호시탐탐 만주 침략의 구실을 찾고 있던 일본제국주의자들과 내통하여 무장자위대를 결성한다. 그 과정에서 빈곤한 소작농들은 점차 계급적·민족적으로 각성해가고, 자작농은 분해되어 소작농 편에 합류하거나 지주측에 가담하거나 하게 된다. 이렇게 계급투쟁이 점차 진전되고 제국주의자들의 간섭이 강화되면서, 투쟁은 전형적인 반제반봉건 무장투쟁으로 발전되어간다. 이 과정에서 가난하고 즉자적이던 농민들은 계급적으로 각성한 항일무장투쟁 세력이 되며, 중국공산당과 연대하여 반제반봉건투쟁을 전개해나감으로써 그 역사적 정체성을 확보하면서 연변 조선족의 고난의 형성사를 이루게 된다.5
이 작품은 대체로 무리없이 하나의 서사적 완결성을 지닌 채 연변조선족의 반제반봉건투쟁의 전통을 형상화하고 있다.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형상도 각각의 계급적 전형성을 비교적 선명하게 구현하고 있다. 말 그대로 교과서적이고 규범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여기엔 결정적인 결락이 있다. 그것은 작가의 개성이다. 이 작품은 어딘가 김학철의 것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구석이 많다. 마치 이야기꾼이 사랑방에 앉아서 끝없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나가듯 해학과 위트가 넘치는 무수한 에피소드들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동안 어느새 기본 줄기가 잡혀나가는 김학철 소설 특유의 개방형 서사구조는 찾아지지 않고 전체적으로 상당히 엄격하게 통제된 서사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형화된 서사구조가 전형적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적 서사의 특징이라고 할 때 김학철의 소설은 확실히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과는 다른 계열에 놓여 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서사구조 속에 김학철 자신의 경험이 투사될 여지가 없었던 것이 그 하나고, 이 작품이 김학철 개인의 창작이 아니라 거의 집단창작에 가깝다는 것이 또 하나다.6 두 가지는 모두 김학철 특유의 서사적 운신폭을 좁히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3. 『20세기의 신화』─비극과 해학, 정치와 미학의 통일
『20세기의 신화』는 김학철이 1957년 중국을 휩쓴 ‘반우파투쟁’의 와중에 발표의 자유를 잃고 전업작가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난 후, 대약진운동 등을 통해 드러난 모택동 1인독재와 인민생활의 피폐로 요약되는 중국사회주의의 타락을 고발하기 위해 집필한 장편소설이다. 1965년에 탈고한 이 소설은 원고상태로 당국에 압수되었고 이로 인해 그는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 10년 동안 영어의 몸이 되었다.
소설은 전편 ‘강제노동수용소’와 후편 ‘수용소 이후’로 나누어져 있는데 전편은 임일평이라는 작가의 시점으로 반우파투쟁 과정에서 우파분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이 수용된 강제노동수용소의 참경을 고발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우파로 지목되어 수용소에 들어온 작가·음악가·혁명가·교사·노동자 등이 살인적인 환경 속에서도 인간적 존엄을 지키려는 의지가, 수용소를 지배하는 타락한 공산당원들의 감시와 전횡에 맞서 어떻게 승리해가는가가 잘 드러나 있다. 그리고 후편은 수용소에서 나와 사회로 돌아온 이들의 눈에 비친 1960년대 초·중반 무렵, 즉 인민공사운동과 대약진운동, 그리고 중·소분쟁의 소용돌이가 휘감아돌던 시기의 동요하는 중국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은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김학철의 세 장편소설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전편 ‘강제노동수용소’의 경우 수용소의 참상을 리얼하게 드러낸 것을 넘어, 그 참경 속에서도 결코 희망과 낙관을 잃지 않는 인간들의 위대함을 절실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또한 비장과 해학, 풍자의 절묘한 균형으로 읽는 이들을 비극적 감상주의나 패배주의, 근거없는 주관적 낙관주의와 기계적 역사관으로 이끌지 않으면서, 인간의 미래에 대한 굳은 믿음에 이르게 하는 미학적 승리를 거두고 있다.
사실상 김학철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의용군 출신 수용자 심조광의 아들의 일화, 즉 학교에서 소풍을 간 아이들이 ‘인민의 적’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찾아내는 보물찾기 놀이에서 자기 아버지의 이름이 씌어진 쪽지를 찾아내고는 그 자리에 엎어져 끝없이 울었다는 일화7 같은 것은 이른바 반우파투쟁의 광기가 어떻게 인민의 영혼을 파괴했는가를 비극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그 비극적 정서 속에 몰입하지 않고 수용소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극(笑劇)들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웃음보따리를 풀어놓으며, 이를 때론 해학으로 때론 풍자로 조형하여 비참이 사랑으로 그것이 다시 그 비참을 만든 것들에 대한 정당하고도 웅숭깊은 거부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끔 하고 있다.
이같은 미학적 성취는 이 작품에 나타난, 이견과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은 작가의 정치적 입장에 상당한 설득력을 부여하고 있다. 사실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 그리고 『8억인과의 대화』 등 리영희의 3부작을 통해서, 또 『중국의 붉은 별』이나 『번신(飜身)』 등을 통해서 1930년대에서 70년대에 이르는 중국혁명 과정에 대한 우호적 입장을 가지게 된 우리나라의 ‘진보적 지식인’들의 경우 50년대 말에서 60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 중국에서 있었던 이른바 ‘위대한 실험’의 나날들을 이처럼 격렬하게 부정하고 비판하는 김학철의 태도 앞에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김학철은 원칙적인 사회주의자의 입장에서, 그 사회 내부에서의 경험을 통해 반우파투쟁이라는 명목의 권력투쟁과 그 반이성적 광기, 모택동 1인 우상화와 1인독재가 몰고 온 사회적 침체, 인민의 빈곤을 가속시킨 인민공사식 실험의 무모성,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배반한 반소 히스테리 등을 격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어느 편이 옳은가를 판정하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넘는 일이지만8 이 소설은 여기저기 산재한 작가의 메가폰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체적 형상과 미학적 직조에 의해 이러한 비판에 강한 설득력을 부여하고 있음은 틀림없다.
어쩌면 이 작가에겐 원칙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고 그것을 방해하는 온갖 현실에 대한 고려는 나중이기 때문에 이러한 격렬한 비판이 나오는지도 모른다. 아닌게아니라 이 소설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정치적 견해는 어떤 때는 좀 지나친 것 아닌가 할 때가 없지 않다. 이를테면 김일성의 이른바 반종파투쟁과 숙청을 철두철미 1인독재의 확립이라는 목적의 수행과정으로만 본다거나(이런 견해는 정파적으로 ‘연안파’에 속할 수밖에 없는 조선의용군 출신으로서 함께 싸운 동지들이 해방된 조국에서 전부 파멸해가는 과정을 목도한 그로서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는 “조선반도의 통일은 이북 정권의 붕괴를 전제로 한다”9는, 국내 극우파의 입장과 방불한 극단적인 언사까지도 불사한다거나, 타계하기 2주 전, 9·11 뉴욕테러에 접하고 “탈레반과 빈 라덴은 철저한 응징을 받아야 한다”고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거나10 하는 것 등이 그렇다. 하지만 그가 평생을 사회주의적 도덕성에의 복무를 최우선의 원칙으로 삼고 살아온 불퇴전의 원칙주의자임을 상기한다면, 그의 이러한 돌출적 발언들은 사실은 돌출적인 것이 아니라 일관된 신념의 소산에 다름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들이 너무나 많은 비원칙적인 것들에 둘러싸여 너무도 아무렇지도 않게 비원칙적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그의 올곧은 발언이 돌출적으로 들리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4. 『격정시대』─열린 서사구조에 담긴 혁명적 낙관주의
『격정시대』는 김학철의 자전적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이 연변에서 처음 출간된 것은 1986년으로 그의 연치가 벌써 칠십을 넘긴 때였다. 62세가 되던 해인 1977년에 10년의 징역형을 살고 나온 그가 10년의 시간 동안 자신의 젊은날들을, 자기 생애에서 가장 빛나던 시기의 경험과 기억들을 가다듬어 3천매가 넘는 큰 화폭에 담아낸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1916년 식민지의 항구도시 원산에서 태어나 보통학교 시절 원산총파업을 겪고 서울에 유학온 후 광주학생사건, 윤봉길 거사 등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민족의식에 눈떠가던 한 소년이 본격적 민족해방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중국 상해로 건너가 의열단을 거쳐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하고, 다시 독립혁명당 소속의 조선의용대의 일원으로 태항산 근거지에서 팔로군과 함께 항일전쟁에 참가하는 혁명전사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려낸 이 소설은, 우선 성장소설의 전통이 일천한 우리 소설사에서 두드러진 성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성장소설이 한 개별자로서의 인간이 성장하면서 자기 삶의 객관적 조건들에 부딪히고 그것을 극복해가면서 하나의 보편적 역사주체로 서는 과정을 그리는 것이라면, 이 소설은 바로 이런 정의에 부합하는, 그리고 안정된 부르주아 사회로의 편입과정을 그리는 서구형 성장소설과 구별되는 제3세계형 성장소설의 보기드문 한 모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작품은 그 넘치는 낙관주의로도 우리 문학사에서 독특한 지위를 차지한다. 객관적으로 절박하기 짝이 없는 위기의 순간에도 이 소설 속의 수많은 ‘혁명투사’들은 낙관적 태도를 버리지 않으며 우스개와 객담을 늘 총보다 더 요긴하게 지니고 산다. 주저와 동요, 실패와 좌절, 패배의식에 익숙한 한반도 남쪽의 정서뿐만 아니라, 승리적 관점, 주체적 관점의 견지라는 강박으로 질식하기 십상인 한반도 북쪽의 정서로도 이러한 도저한 낙관주의는 경이로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작가는 이 작품의 이러한 낙관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 조선의용대(나중에는 의용군)는 혁명적 낙관주의로 충만된 애국자들의 집단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우리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청춘을 고스란히 바치고 있다.
이런 긍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독립운동’ 하면 곧 ‘비장함’과 ‘처절함’에다 연결시키는 경향들이 있는데 그것은 일면만을 너무 강조하거나 부각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우리들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렇지 혈육과 친지들을 다 고국에 남겨두고 단신 외국으로 뛰쳐나와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5년씩 10년씩 또는 15년, 20년씩 풍찬노숙의 간고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일년 열두달 삼백예순날을 밤낮없이 우국지심에 잠겨만 있다면 사람이 과연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 지레 말라죽어버리지.
그러므로 장난기와 농담은 언제나 우리와 더불어 있었다. 아무리 어려운 경우에도 장난기는 우리를 떠나지 않았고 또 아무리 위급한 고비판에도 재치있는 농담은 역시 오갔다. (『최후의 분대장』 201면)
엄밀한 의미에서의 혁명적 낙관주의란 혁명의 성공에 대한 확신에서 우러나오는 낙관적 사고방식과 삶에 대한 태도를 말한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사상과 생활이 통일된 대단히 높은 수준의 정신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격정시대』의 인물들을 관류하는, 또는 그 인물들의 언행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작가 김학철이 지니고 있는 낙관적 또는 낙천적 분위기는 정치사상적 신념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된 어떤 것이 아니라, 대단히 일상적이고 감각적인 수준의 어떤 것에 가깝다. 그것은 삶과 죽음이 늘 함께하는 자리에 있음으로 해서 생겨난, 그리하여 모르는 사이에 삶과 욕망에 대한 집착에서 놓여난 달관에 가까운 경지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좁은 의미의 ‘혁명적 낙관주의’를 넘어선 것이며, 의도보다 과정이 더 살아나는, 생동하는 과정 속에서 의도의 정당성이 저절로 설득되는 한걸음 더 나아간 경지로 보인다. 이 작품을 지배하는 낙천적 달관은, 역사적 정당성을 지니지 못함으로 해서 그러한 낙천적 달관을 가지려야 가질 수 없는 안타고니스트(antagonist)들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도덕적 우위를 확보한다.
이 점은 앞서 살펴본 『20세기의 신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부당한 고난을 겪는 인물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펼쳐 보이는 낙천적 달관과 거기서 발생하는 해학은 숨막힐 듯한 통제와 억압의 기제에 어느새 눈에 보이지 않는 균열을 일으키고 그것의 절대성을 해체하여 상대화하고 희화화한다. 이러한 미학적 힘은 중국현대사의 한 시기를 지배한 우상을 근저에서부터 파괴하는 정치적 힘으로 전화하는 것이다.
한편 『격정시대』의 열린 서사형식은 이러한 낙관주의적 주조를 아주 잘 뒷받침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김학철의 소설들은 다성적이고 개방적인 서사구조를 가장 주요한 특징으로 갖는다. 그것은 우리 전통의 민담과 같은 서사구조에 가깝다. 작자는 마치 옛날의 이야기꾼처럼 자신의 삶 속에서 보고 듣고 직접 겪은 수많은 이야깃거리들을 한 보따리 싸안고서 큰 줄거리가 흘러가는 중간중간에 틈나는 대로 하나씩 꺼내놓는다. 그 이야깃거리, 즉 에피소드들은 나름대로 또 발전하면서 소설 전체를 넉넉하게 열어놓는 데에 기여한다. 또 이러한 이야기에 걸맞은 해학과 골계의 민중적 정서가 이 소설의 도처에서 지천으로 배어나오고 있으며, 그 정서를 가능하게 하는 민중적 풍속과 생활에 관한 묘사가 전편을 관류하고 있다.11
흔히 근대소설의 특징으로 드는 ‘문제적 개인이 훼손된 방식으로 훼손된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라거나 ‘비극적 아이러니’ 등은 기본적으로 닫힌 서사구조를 전제한 것들로서, 이 소설의 개방적 서사구조와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또한 이 소설이 지닌 낙관과 해학이라는 미학적 특질들은 비극적 아이러니를 기본으로 하는 근대소설의 일반적 특징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다. 그것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유·무명의 낙천가 투사들의 투쟁과 일상이 근대적 일상성의 바깥에서 근대를 넘어서는 지점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이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의 작위적 규율로부터도 자유롭다. 김학철 소설의 이러한 낙관과 해학으로 가득한 열린 서사구조는 그 낙관과 해학이 인간의 미래에 대한 더욱 구원(久遠)한 신념에서 온다는 점에서, 또 그렇기 때문에 그 미래의 인간을 성마르게 구속하는 어떤 닫힌 서사도 거부한다는 점에서 낡은 과거의 것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이런 낙관주의야말로 말의 올바른 의미에서 진정한 ‘혁명적 낙관주의’에 값하는 것이 아닌가.
5. 누가 더 세계인인가
김학철이 쓴 세 편의 장편소설을 지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앞에서 그의 생애에 동아시아의 근대가 모순적으로 통일되어 있다고 한 바 있다. 그는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났지만 중국 대륙에서 일본제국주의와 싸웠다. 지금 우리는 이런 이력을 가지려야 가질 수 없다. 혹 일본과 중국, 심지어는 북한까지 다니면서 장사꾼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삶에도 동아시아의 근대가 통일되어 있다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김학철의 생애는 동아시아의 근대를 한몸에 통일하면서 동시에 그 극복을 향해 나아갔다는 사실에서 온다. 그는 작고하기 직전까지도 싸웠다. 제국주의와 싸웠고 잘못된 사회주의와 싸웠다. 그러면서 그는 진정한 사회주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기다렸다.
다른 측면에서 접근해보자. 김학철의 삶의 행로를 살펴나가는 동안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가 지닌 개방성과 세계성이었다. 그의 행로와 행동영역이 기본적으로 국제적일 수밖에 없었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혹은 제3세계 인민의 연대라는 원칙 아래서 협애한 민족주의의 울타리를 일찍이 넘어섰다. 민족해방투쟁의 주체로서 그는 ‘조선사람’이었지만, 민족해방투쟁을 포함하고 그것을 뛰어넘는 사회주의적 인간해방의 길에서는 그는 철저히 ‘세계인’이었다. 그는 조국을 사랑하고 조국을 위해 몸바쳤지만 조국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는 중국에서 살았지만 중국에 자신을 끼워맞추지 않았다. 그의 눈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그러나 언젠가 다가올 새로운 인간의 세계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협애한 일국주의적 국경선과 민족적 편견 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희화적 낙관의 힘으로 이를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늘 미래의 세계인이었다.12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그리고 내면화하고 있는 세계성이라는 것이 자신도 모르게 이루어지는 자본주의적인 비주체적 소외의 결과라면, 그의 세계성은 높은 이념적 주체성에 기초한 의지적 선택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자본주의적 세계화와 그에 대한 일국주의적 저항을 벗어나 진정한 세계성의 맥락에서 근대극복의 전망을 획득하는 것이라면, 김학철이 이미 체현한 바의 이러한 세계성은 과거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앞날의 것으로 다가서고 있다. 세계의 변방, 연변의 한 누옥에서 살다 간 낡은 중산복의 노인─우리 중 누가 그보다 더 세계적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글을 마치고
김학철 선생이 마치 두 다리가 성한 젊은 청년이기라도 한 것처럼 아직 강건하고 민활(敏活)한 젊은 노인이었던 1990년 여름 무렵 나는 선생을 처음 만났다. 나는 그해 봄에 나온 나의 첫 평론집을 선생께 드렸다. 선생은 얼마 후 연변에 돌아가서 내게 편지 한장을 보내셨다.
김명인 선생
우리가 서울 시내를 달리며 차 속에서 나눈 이야기들은 우리 모두가 진리를 탐구하는 길에서 부닥친, 행동하는 길에서 부닥친 난점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을 제기하는 법이지요. 그러니까 우리의 노력은 결국에 가서 모든 난문제들을 깡그리 다 해결하고야 말 것입니다.
선생의 글들은 (일어로 된 것까지) 다 읽었습니다. 글이 노성한 데 비해 작자가 너무 좀 젊은 것 같은 느낌인데 당자는 어떻게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재용(김희민) 내외분께 다정한 안부 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김학철
’90. 10. 1.
나는 벌써 날긋해지기 시작하는 누런 미농지로 된 선생의 편지를 앞에 두고 지금 내 앞에 닥쳐 있는 난점들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다. 그중에서 도대체 어떤 것들이 해결할 수 있는 단계에 와 있는 것인지, 혹시 선생은 이미 넘어선 문제들을 나는 아직도 못 넘어서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지금 그것들을 문제라고나 생각하고 있는지……
머리 숙여 선생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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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간략한 연보는 김학철의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문학과지성사 1995)과 한홍구 외 편 『항전별곡』(거름 1986), 그리고 연변에서 발행되는 격월간 문예지 『장백산』 2001년 11-12월호의 ‘김학철 선생 추모특집’을 참조하여 작성되었다.↩
- 최원식 「80년대 문학운동의 비판적 점검」, 『민족문학사연구』 제8호(1995년 하반기) 64면. 여기서 최원식은 해방 이전을 근대 전기, 해방 이후를 근대 후기로 나누고 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김학철은 근대 전·후기를 공히 살았던 사람이지만 그의 생애의 성격은 근대 전기에 주조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 현재 확인된 그의 저작 목록은 다음과 같다.
연변: 소설집 『군공메달』(1951) 『뿌리박은 터』(1953) 『새 집 드는 날』(1953) 『고민』(1956) 『김학철단편소설선집』(1985),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1954) 『격정시대』(1986), 저작집 『김학철 문집』 전4권(1998〜1999).
서울: 소설집 『무명소졸』(풀빛 1989),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풀빛 1988) 『격정시대』(풀빛 1988) 『20세기의 신화』(창작과비평사 1996),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문학과지성사 1995), 산문집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실천문학사 1994) 『우렁이 속 같은 세상』(창작과비평사 2001). ↩ - 『최후의 분대장』 351면. 여기서 ‘전업작가’란 글만을 써서 생활을 하는 작가라는 뜻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전업작가와 같으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글을 팔아서 생활을 하는 반면 사회주의 사회인 중국에서는 원고료뿐만 아니라 국가공무원으로서 봉급을 받아 생계를 보장받는다는 점이 다르다. 김학철은 이 제도를 무위도식하는 건달패를 육성하는 제도라고 비판하고 있다.↩
- 이 소설의 이런 서사골격은 1927년 중국공산당 만주성 임시위원회, 1929년 동만구위원회가 성립되고, 이어 1930년 「전만농민투쟁강령」이 만들어지면서 동만주 일대에 ‘붉은 5월투쟁’이 벌어져 일제와 악질지주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히는 등 강력한 반제반봉건투쟁이 전개되던 일련의 실제 역사의 과정과 대부분 일치한다. 연변조선족 자치주개황 집필소조 『중국의 우리민족』(한울 1988) 65〜66면 참조.↩
- 작가의 머리말은 “『해란강아 말하라』 이 소설은 나 한 사람의 창작이 아닙니다”로 시작되어서 “『해란강아 말하라』 이 소설은 그러기에 나 한 사람의 창작이 아닙니다”로 끝난다. 이것이 단순한 겸사가 아님은 머리말에 많은 조력자들의 이름이 열거된 데서도 알 수 있다. 이 소설은 조직의 결정으로 여러 사람들의 조력을 받아 만들어진 김학철 대표집필의 집단창작품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작가는 이 작품을 자신의 작품목록에 올리는 것을 그다지 마뜩찮아했다. 김학철이 연변에 정착한 것은 1952년, 이미 그전에 연변조선족의 해방투쟁사는 종결되었고 그는 조선의용군 출신이라는 또다른 개인사를 지닌 채 그 역사의 끄트머리에 접합되었던 것이다. 이런 점이 이 『해란강아 말하라』에서 작가의 개성이 드러나지 못하게끔 한, 그리고 이 작품이 작가의 애착을 얻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 『20세기의 신화』 136〜37면.↩
- 최근에 이르러 반우파투쟁을 위기에 직면한 공산당의 이성적 비판에 대한 봉쇄책략으로, 대약진운동을 합리성을 무시한 무모한 실험으로 단정하는 견해가 제출되고 있는 것은 이 문제에 하나의 시사점을 던져준다. 오꾸무라 사또시, 박선영 역 『새롭게 쓴 중국현대사』(소나무 2001) 참조.↩
- 『최후의 분대장』 409면.↩
- 김해양 「마지막 스무 하루의 낮과 밤」, 『장백산』 2001년 11-12월호 9면.↩
- 꼼꼼한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이 소설의 이러한 특징은 홍명희(洪命憙)의 『임꺽정』이 지닌 어떤 면과 대단히 근접해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런 점에서 우리의 전통적 민중문학과도 밀접하게 잇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 그가 ‘김학철’이라는 가명을 쓴 것은 중국에서 항일활동시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필요성이 사라진 후에도 ‘홍성걸’이라는 본명을 되찾아 사용하지 않고 아들의 이름까지 ‘김해양’으로 지은 것 역시 그가 협애한 민족적 집착에서 자유로운 인간이었음을 말해주는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