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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놋쇠하늘에 맞서는 몇가지 방법

리얼리즘·모더니즘·민족문학

 

 

윤지관 尹志寬

문학평론가. 평론집 『희망의 문학』 『불을 찾아서』 등이 있음. jkyoonjk@hotmail.com

 

 

1. 놋쇠하늘의 안과 밖

 

임규찬(林奎燦)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둘러싼 세 꼭지점」(『창작과비평』 2001년 겨울호)을 흥미롭게 읽었다. 이 글은 최원식(崔元植) 황종연(黃鍾淵) 두 분의 평론집과 함께 졸저 『놋쇠하늘 아래서』(창작과비평사 2001)를 다루고 있는데, 그의 구도에 따르면 나의 ‘리얼리즘론’은 삼각형의 한 꼭지점을 이루기는 하지만 밑변에 위치해 있어서 왠지 저 높은 곳에 있는 다른 꼭지점을 보필하는 한 항목으로 동원된 것처럼 보인다. 이 모형은 철학적으로 리얼리즘(윤지관)과 모더니즘(황종연)을 각각 정(正)과 반(反)으로 하고, 그것들의 회통(최원식)을 합(合)으로 하는 헤겔식의 변증법 삼각형을 연상시키고, 역사적으로 필경 통일고려로 끝장날 후삼국지처럼 여겨지기도 해서 재미있다. 개인적으로야 밑변에다 지양의 대상이 된 딱한 처지이긴 하지만, 이처럼 활달한 접근을 보는 독자로서의 마음은 흔쾌하다.

이 삼각형 그림은 그간 간간이 이루어졌던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의 불씨를 되살려놓았다는 점에서도 사줄 만하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립틀과 그를 둘러싼 물음은 근대성과 맺어진 자본주의체제가 지속되는 한 의미있고 창의적인 문제들을 내장하고 있다는 소신을 가진 사람으로서, 우리 비평담론에서 이 ‘억눌린 것의 귀환’이 가지는 의의는 작지 않다고 본다. 돌이켜보면 미국의 대표적인 한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이 서구 비평담론에서 일어난 수많은 귀환들 가운데서도 가장 극적인 것이 바로 이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임을 환기한 것도 벌써 20여년이 지난 일이 되었지만, 그가 당시 이 귀환의 계기로 본 포스트모던의 도전이라는 새로운 국면은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더욱 절실한 과제로 던져져 있는 것이 아닌가? 탈근대적 상황에서의 문학적 대응을 모색해본 제임슨의 다음 대목이 새삼 눈길을 끄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상황 아래서, 어떤 새로운 리얼리즘의 기능이 분명해질 수도 있다. 즉 소비사회에서 사물화의 힘에 저항하고, 오늘날 삶과 사회조직의 모든 차원들에 존재하는 파편화에 의해 체계적으로 와해되어 있지만 점점 더 하나의 세계체제가 되어온 다른 나라들에서의 계급투쟁뿐 아니라 계급들 사이의 구조적 관계를 투사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인, 저 총체성의 범주를 재창조하는 것이다. 이런 리얼리즘 개념은, 경험이 습관들과 자동화의 덩어리로 굳어져온 그런 세계 속에서 격렬한 인식의 재생에 역점을 두는 경향, 즉 모더니즘이라는 변증법적인 반개념을 통해서 늘 가장 잘 구체화되었던 것을 통합할 수 있을 것이다. (Fredric Jameson, “Reflections in Conclusion,” Ronald Taylor 〔ed. & tr.〕,  Aesthetics and Politics: Debates Between Ernst Bloch, Georg Lukács, Bertolt Brecht, Walter Benjamin, Theodor Adorno, NLB 1977, 212〜13면)

 

서구 비평 대가의 권위를 앞세운다고 정당성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제임슨의 모색은 임규찬이 나에게 혐의를 두고 있고 어느정도는 사실이기도 한 ‘리얼리즘의 심화’를 통한 ‘모더니즘의 통합’이라는 구도와 거의 그대로 일치한다. 이 포스트모던한 시대에 철지난 리얼리즘을 고수하는 고집쟁이라는 식의 질책을 하도 받다보니 주장의 옳고 그름은 둘째치고 내 인간성에 뭔가 문제가 있나 하는 위기감조차 드는 사람에게는, 반가운 원군이 아닐 수 없다.

제임슨이 1970년대 말 리얼리즘의 재창조를 하나의 명제로 제시해본 것은, 미학에서 총체성의 복원이야말로 그가 후기자본주의라고 일컬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도전, 즉 생산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소비중심의 사회로 이행하면서 철저한 사물화가 삶의 전국면에 관철되어가는 추세에 맞서는 가장 실천적인 대응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같은 판단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단계에 대한 변별과 유관한데, 그에게 있어 예술에서의 모더니즘은 비록 파편화를 겪고 있지만 과거의 유산들이 여전히 숨을 쉬고 있던 시기라는 특수한 조건, 즉 ‘불완전한 근대화’의 소산이자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 속에서 가능했던 성취였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기에 이르러 이같은 과거와 자연의 흔적은 사라져버렸고, 이로써 모더니즘의 기법혁신들이 심층의 현실에 대한 접근을 가능케 했던 황금시절은 지나간 것이다. 모더니즘의 핵심기법인 ‘낯설게 하기’는 소비사회의 기제에 휘말려 새로운 인식에의 힘을 상실한 채 현대예술의 관습으로 떨어지고 만다.

사물화와 파편화로 망각된, 삶의 실상으로서의 인간관계를 살려내기 위해 ‘총체성’ 범주의 복원이 하나의 가능성이라는 제임슨의 판단은, ‘당위’의 제시인 면이 없지 않다. 하나의 문제제기로서 던져질 뿐 리얼리즘 자체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지지는 않은 것이다. 제임슨의 요청은 우리 문학에서 리얼리즘의 심화라는 명제와 만나는 곳이 없지 않음에도, 모더니즘의 일정한 성취에 대한 인정을 넘어 리얼리즘의 살아 있는 힘에 천착하지 못한 한계는 한계대로 남는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리얼리즘을 말하고 ‘총체성’의 범주를 되새긴다 하더라도, 자연의 영역이 완전히 사라진 탈근대의 공간으로 당대를 바라보는 제1세계적 관점이 여전하다면, 대체 어디에서 해방의 서사를 복원해낼 자원을 찾아낼 수 있을지부터가 막연해진다.

탈근대의 조건에 대응하는 서구 비평의 한 진지한 문학적 반응을 참조하되, 우리 문학의 현실과 겹치면서도 갈라지는 면을 바로 보는 것이 필요한 것도 이런 까닭이다. 20세기 전반기 모더니즘의 대폭발 이후 모더니즘이 주류를 형성해온 서구문학 일반과는 달리, 다름아닌 서구 모더니즘의 개화기에 본격화된 우리 근대문학이 모더니즘의 지배가 아니라 리얼리즘의 지향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온 사정의 ‘특수성’에 우선 주목하자. 지금까지도 우리 문학에서 리얼리즘의 힘이 살아 있고, 더구나 서구에서 상실되어버린 것으로 여겨지는 모더니즘의 가능성조차 열려 있다면(즉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이 아직도 우리에게는 유효한 국면이라면) 제임슨이 명제로 제시한 그 ‘새로운 리얼리즘의 기능’은 우리 현실에서 더 구체적인 내용을 획득하게도 된다.

그런데 참으로 딱하게도, 포스트모던 시대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리얼리즘의 심화를 말하는, 어찌 보면 가장 멀쩡한 이론적 대응을 두고 ‘원론주의자’의 명패를 붙이는 관행은, 임규찬의 이번 글에서조차 예외는 아니다. 임규찬은 내가 “80년대와 별반 분리되지 않는” “그때 다져진 철길을 따라 철마가 의심없이 질주하고 있는 듯한 목소리”를 낸다고 하는데, 80년대 후반에 성행한 ‘원론적인’ 계급문학론자와는 다른 ‘절충론자’라는 평(최원식 「생산적 대화를 위하여」, 1991)까지 듣기도 한 처지에서는 금석지감이 들기도 하거니와, 모더니즘을 ‘퇴폐적 감수성’의 소산이라고 매도하던 당시의 과격풍토에 맞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이분법적인 대립으로만 파악하는 태도는 오히려 리얼리즘의 이론창출에 장애가 될”(「제3세계 문학론의 현단계」, 1988) 수 있다고 지적한 사람에게는 좀 부당한 대접이 아닌가 한다.

임규찬의 비판은 두 대립항 가운데서 나의 ‘리얼리즘’ 편향이라고 할 만한 것을 되짚어보게 한 점에서는 고마우나, 모더니즘을 일면적으로 이해하고 배격했다는 단정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일일이 이견을 밝히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앞으로 모더니즘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논의하는 가운데 대개는 자연히 해결되리라고 본다. 다만, 『놋쇠하늘 아래서』라는 제목에 빗대어 내 논의가 ‘쇠의 기운에 장악’되어 있다거나, ‘쇠에는 쇠로’라는 태도를 보여준다는 식의 정리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놋쇠하늘’은 중간계급을 중심세력으로 하는 꿰뚫기 힘든 기성질서를 지칭하는 비유로, 사물화의 지배와 자본의 지구화로 현상하는 탈근대 사회에 대한 제임슨의 관찰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이같은 전일적 지배는 단순히 정치권력의 장악만이 아니라 상징화와 이데올로기 작용을 통해 인간심리의 심층에까지 미치게 마련이다. 놋쇠하늘은 우리의 바깥에만 존재하지 않고 우리의 내면에도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 ‘안’의 싸움을 도외시한 대응이 일면적임은 분명하겠으되, 거꾸로 내면의 놋쇠조각을 마치 거울처럼 들여다보는 태도도 문제이기는 마찬가지다. 이처럼 자신 속의 이 놋쇠 ‘타자’에 매몰되는 흐름을 거슬러, “머리 들어 창밖의 놋쇠하늘을 보라”고 일러주는 것이 ‘원론주의자’의 고집만은 아니다.

‘쇠에는 쇠로’라는 구호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함무라비 법전의 가혹한 징벌을 연상시키기 십상이니, 원론주의자의 ‘과격함’과 ‘일면성’을 환기하기에 제격일 것이다. 놋쇠하늘의 인식이 그처럼 단순소박한 것이 아님은 되풀이할 필요가 없겠으되, 한편으로 격렬한 변화의 와중일수록 원론의 되새김이 중요하다는 점은 그것대로 진실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새로운 리얼리즘’을 거론한다 해도, 후기자본주의 문화논리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을 궁구하는 제임슨을 두고 ‘원론주의자’라 칭하기는 아무래도 어렵겠지만, 적어도 제임슨이 사물화에 맞서는 힘으로 되살리려 한 루카치(G. Lucács)에 대해서라면 기꺼이 그럴 사람은 많을 듯하다. 그러나 루카치의 리얼리즘 옹호는 모더니즘 문학이 전성기를 이루던 서구문학의 풍토 속에서였고, 당시 모더니즘 문학에 나타난 창조활동에서 무엇이 빠져 있으며 어떤 방향의 문학이 자본주의적 근대성에 올바로 맞서는 길인가를 질문하는 치열한 문제의식에서였다. 루카치를 20세기 모더니즘을 배격하고 19세기 리얼리즘을 옹호한 인물로 정리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이자 오해이다. 오히려 그는 리얼리즘 정신으로 당대에 지배적이었던 모더니즘의 혁신을 도모한 모더니즘의 진정한 친구였다고 할 수 있다. 임규찬 자신도 인용하다시피, 루카치는 리얼리즘-모더니즘의 이분법에 매몰된 영혼이 아니라 “두 기본적인 경향들 사이의, 동일한 작가 내에서뿐 아니라 동일한 시·희곡·소설 내에서도 종종 다툼이 일어나는 그런 갈등”1으로 둘의 관계를 파악할 정도의 심도를 지녔던 것이다. 원론주의자 루카치의 이 뜻밖의 유연성과 사려는 국내외의 리얼리즘 옹호자들이 위기에 처한 모더니즘 문학에 더 절실한 지원군일 수 있음을 말해준다.

 

 

2. 리얼리즘의 쇠퇴인가 모더니즘의 죽음인가?

 

1990년대 이후로 리얼리즘의 쇠퇴에 대한 지적과 담론이 무성했고 이런저런 반성과 모색도 이어져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반성론에서 정작 리얼리즘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는 그다지 깊지 않았다. 소박한 모사론에 머물거나 일정한 유형의 양식으로 환원하는 경우가 많고, 때로는 80년대 말에 다른 어느 때보다 활성화되었던 ‘노동문학’을 비롯한 민중문학의 퇴조가 리얼리즘 자체의 쇠퇴인 것처럼 거론되기도 하였다. 흔히 80년대 문학의 한계 운운하는 논의에는 크든 작든 이 후자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임규찬의 ‘낯익은 80년대의 잔영’이라는 식의 어법에도 그러하다.

80년대의 일부 문학에서 ‘도식성’과 ‘교조성’이 보인다면 그것은 리얼리즘이 충분히 실현되지 못한 폐해일 뿐이지 그것 자체가 리얼리즘의 쇠퇴를 증거하지는 않는다. 작품에서 드러나는 리얼리즘의 빈곤은 누가 뭐라고 하기 전에 바로 리얼리즘의 기준에서 비판받을 일이며, 다름아닌 루카치가 누누이 역설한 바도 리얼리즘에 미치지 못하는 이같은 ‘자연주의적’ 작품은 리얼리즘보다는 오히려 파편으로서의 세계상이라는 모더니즘의 관점과 맺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90년대 문학에서 거론된 리얼리즘의 쇠퇴란 리얼리즘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라기보다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용법, 즉 어느정도 진영적인 구분이 동반된 속화된 이해에 바탕한 것이다. 가령 80년대 상승기의 ‘리얼리즘’과 90년대 하강기의 ‘모더니즘’이라는 최원식의 도식도 매력적이기는 하나, 리얼리즘-모더니즘의 대립틀에 대한 기성관념에서 벗어나 있지는 않다.

임규찬의 논평을 계기로 나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개념이나 범주에 대한 합의와 논의가 좀더 깊어져야 하지 않나 하는 반성이 들었다. 분명 이 두 핵심개념은 서구적인 기원을 가지는 것이면서 상당한 정도까지 토착화되어 우리 식의 의미가 첨부되어 있고, 논자에 따라 이해의 방식과 수준에도 무시 못할 편차가 있다. 그 때문에 이 두 용어를 두고 “제아무리 갈고 닦아도 구원의 가망이 없는 용어”라는 탄식(최원식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 1999)조차 나오는 것이다. 여기에 조건없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도대체 어떤 작가가 리얼리스트이고 어떤 작가가 모더니스트인가라는 기본적인 갈래에서부터 확실한 정답이 없으니, 가령 백석(白石)을 리얼리스트로 읽을 수도 있다고 보는 나로서는,2 백석은 물론 김수영(金洙暎)까지 모더니스트로 규정하는 최원식의 판정에는 역시 어렵구나 하는 나대로의 탄식이 나온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이데올로기 투쟁의 과정’에서 이 두 용어에 ‘얽히고 설킨’ 저주받은 역사가 실려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리얼리즘 이론을 형성하는 데 꼭 장애가 될 까닭은 없다. 오히려 형식의 차원만이 아닌, 한 민족의 역사성과 맺어진 이론을 구축할 여지조차 남긴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논의는 이들 용어에 달라붙어 있는 ‘진영’개념을 버리지도 답습하지도 않으면서 거기에 새로운 정치적 내용을 담아나갈 때 깊이를 얻는다. 어떤 특정한 작가나 작품은 작가의 성향이나 신원 즉 그 작가가 어느 ‘진영’에 속해 있느냐가 아니라 ‘기본적인 경향들’의 싸움이 벌어지는 루카치적인 현장으로서 읽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백석이나 김수영처럼 두 가지 측면이 뚜렷이 공존하는 작가나 작품은 어느 일방으로 규정하기보다 두 개념이 사활을 걸고 다투는 싸움터로 이해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모더니즘적인 경향이 강한 작품들이 거둔 성취는 성취대로 보아야겠지만, 애초 리얼리즘-모더니즘의 대립이라는 설정부터가 근대에 대응하는 문학의 길을 찾아보자는 취지이지, 둘 사이에 그야말로 만리장성을 쌓고 결별하자는 것은 아니다. 리얼리즘이 삶의 진상에 다가가려는 노력이요 리얼한 것에 대한 추구라면, 모더니즘은 모든 것이 전에 비해 좀더 불투명해진 국면에서 실험과 혁신을 통해 바로 그 리얼한 것에 도달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겉으로의 적대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즘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리얼리즘일 수밖에 없다. 모더니즘이라는 용어의 애매한 성격부터가 그것이 특정한 ‘지향’을 가진 완결된 이념이 아니라 반(反)리얼리즘으로서의 입지를 지님을 말해주며, 모던한 혹은 포스트모던한 상황에서 리얼리즘이 자기실현을 위해서 뚫고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하나의 도전으로서 존재한다. 이렇게 말하면 역시 ‘리얼리즘 흡수통합론자’의 마수가 드러난다고 혀를 찰 분도 있겠지만, 리얼리즘-모더니즘의 대립을 무슨 편가르기 싸움이나 난 것처럼 보려는 습벽부터가 이 두 대립의 허상에 묶여 있는 형이상학일 것이다.

우리 문학에서는 90년대 들어 리얼리즘의 쇠퇴라는 현상이 되풀이 거론되었지만, 실상 모더니즘의 본산지인 서구에서는 진작부터 큰 소리로 울리던 조종(弔鐘)은 다름아닌 모더니즘을 향해 있었다. 서구에서 모더니즘의 예술적인 성취가 20세기 후반으로 오면서 현저히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판단은 거의 일반화되었고 여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여는 결정적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엘리뜨주의와 정전화를 비판하는 한편으로 거기에 남아 있는 ‘총체성’의 흔적과 의미구축에의 충동을 비판하고 나왔는데, 이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주의적 발상은 모더니즘의 이념에 이미 내재된 것으로, 결국 모더니즘의 예술적 실천이 그 이념에 미치지 못함을 지적한 꼴이다. 그러나 이 ‘모자람’이 오히려 자산일 수가 있으니, 달리 보면 모더니즘의 예술적 성취 속에 모더니즘의 이념에 포괄되지 않고 심지어는 맞서는 어떤 창조적 요소가 살아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결국 이념적으로 리얼리즘의 지향과 맺어져 있음은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모더니즘의 종언을 포고하는 또다른 방향에서의 목소리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반대하는 입장에 선 진보적인 이론가로부터 나온다. 버먼(M. Berman)이나 모레띠(F. Moretti) 같은 맑스주의 비평가들은, 모더니즘의 범주를 아주 확장하거나 아예 포기하는 방식으로 좁은 의미의 모더니즘의 종언을 선언한다.3 가령 버먼은 모더니즘이란 말을 근대문학 일반에 확장하여 적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근대성에 대한 20세기 고유의 대응으로서의 모더니즘의 특권을 부정한 셈이며, 한편 모레띠는 모더니즘이라는 불확실한 용어를 포기하고 근대 이후의 서사를 세계체제의 발생 및 진행과 관련짓는 ‘근대 서사시’(modern epic) 개념을 내세운다. 모더니즘 범주의 이와같은 와해현상은, 모더니즘이 더이상 의미있는 문학적 생산의 원천이 되지 못하는 서구문학의 위기를 반영한다.

서구의 문학적 상황과 우리의 여건이 같은 것은 아니고, 이론적인 방향도 그것을 답습할 이유는 없다. 우리의 과제는 세계적인 차원에서 모더니즘의 죽음이 당연시되는 상황에서, 우리에게서 과연 모더니즘 문학의 가능성은 어떠한지 묻는 일이며, 이것은 한국 모더니즘의 성취가 리얼리즘의 실현에 얼마나 근접해 있는지를 묻는 일과도 통한다. 나는 한국에서의 모더니즘을 논의하는 과정에서(「민족문학에 떠도는 모더니즘의 유령」, 1997), 서구와는 달리 한국의 20세기 후반에는 모더니즘이 꽃필 만한 여건, 앤더슨(P. Anderson)의 말로는 ‘종합국면’이자 블로흐(E. Bloch)의 표현으로는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이 존속한다고 볼 수 있고, 그만큼 모더니즘의 예술적 에너지가 발현될 가능성이 살아 있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모더니즘이 서구와 같은 폭발적인 성취를 내지 못한 채 상대적인 빈곤을 보여준 이유로 반공이데올로기의 개입과 신식민지적 상황의 특수성을 꼽은 적이 있다. 이같은 요소들의 작용으로 모더니즘이 민중성과 단절된 한국적 자유주의와 결합했고 이로써 모더니즘의 예술적 성취에 제약을 초래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었다.

임규찬은 이같은 나의 가설과 설명에 대해 이번 글에서, “민족문학과 리얼리즘 대 자유주의와 모더니즘”이라는 대립적 도식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는 80년대적 인식론의 기계적 확장이라고 비판하였는데, 이것은 한마디로 오해다. 모더니즘과 자유주의가 결합된 양상에 대한 나의 지적은 그 문제성을 읽어냄으로써 결국 그 두 결합체를 분리 해체하여 각각 제자리에 돌려놓자는 것이니, 그같은 대립도식을 그대로 인정하는 ‘80년대적’ 관념과는 오히려 상반된다. 전위적인 실험성을 통해 해체와 구축을 행하는 모더니즘의 기획은 전위파 예술이 그러하듯 일정한 역사적 국면에서 변혁성을 띠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형식실험과 존재론적 인식에 스스로를 묶어버린 한국 모더니즘의 불운은 분단체제의 형성과 맞물린 왜곡된 한국사의 한 소산이기도 하다. 자유주의와의 결합이라는 사건도 이와 유관한데, 한국 모더니즘의 가능성은 자유주의 이념의 굴레를 벗어나 잃어버린 정치성을 획득하는 순간 온전히 열릴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나의 모더니즘관이 부정적이고 일면적이며 단순화라는 임규찬의 비판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지만, “모더니즘의 이념에 반대하는 것이지 우리 현실에서 배태된 모더니즘의 작품적 성과에 적대적이 아니”라는 나 자신의 입장을 좀더 구체화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기실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에 대한 논란은 구체적인 작품을 들이대며 하지 않고서는 앙상한 주장처럼 여겨지기 쉽다. 작품 이야기를 길게 할 만한 사정은 아니지만, 최소한 임규찬이 문제삼은 조세희(趙世熙)에 대한 나의 ‘침묵’도 깰 겸, 최근 주목할 만한 성과를 보인 몇몇 모더니스트를 거론해볼까 한다.

90년대 모더니즘에 과연 어느 정도의 성취가 있었으며 또 앞으로 어떤 전망이 있는지의 물음은 한두 마디로 답하기는 어렵다. 내가 보기에 백민석(白旻石)과 장정일(蔣正一)의 작업이 역시 모더니즘의 가능성을 재는 한 척도가 될 수 있을 듯한데, 그것은 특히 이 둘에서 모더니즘 특유의 전위파적인 실험정신이 살아 있고 정치성에 대한 나름대로의 추구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자유주의의 이념적 굴레조차 뒤엎어버리려는 진정한 파괴적 충동이 엿보이고, 흥미롭게도 공히 성장기의 가난체험이 작품 깊은 곳에 배어 있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같은 특성이 이들을 다른 유형의 모더니스트들, 가령 「강 어귀에 섬 하나」(『강 어귀에 섬 하나』, 문학과지성사 1999)에서처럼 현실과의 접점을 망실한 채 모호한 수사로 일관하는 중견 모더니스트 이인성(李仁星) 같은 작가와 구별되게 한다. 가난체험까지 포함한 삶의 현실적·심리적 질곡에서 감행하는 자아형성의 모험이 모더니즘의 실험정신과 맺어져 추구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시도는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장정일이나 백민석의 파괴로서의 실험성이 결국 ‘낯설게 하기’로 요약되는 모더니즘의 중심기법에 붙들려 있고, 받아들일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삶의 비밀을 해독하려는 이들의 숨은 의지에도 불구하고, 기성관습을 깨뜨림으로써만 생명을 얻는 모더니즘의 기제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데 이들의 비극이 있다. 이 두 유망한 작가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다. 장정일의 경우 성의 관습에 대한 가속적인 파기와 이와 맞물린 소설 기술방식의 관례에 대한 해체라는 놀이가 그것인데, 겉보기의 자유찬가에도 불구하고 어떤 새로운 인식도 약속되지 않는 점에서는 역설적이게도 기성관념에 갇혀 있다. 백민석의 경우에도 사정은 유사하다. 그의 역작 『목화밭 엽기전』(문학동네 2000)은 엽기적인 파격과 기괴성의 극단을 통해서 무언가 충격효과를 노리지만, 그의 세계인식은 모더니즘의 논리가 만들어놓은 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 점에서 이 작품은 자폐적이며 자멸적이다. 한때 가짜 낙원에서의 저주받은 삶을 철저히 살아냄으로써 성장에 도달하고자 한 장정일의 의미있는 모색(「아담이 눈뜰 때」, 1990)이 이후 성에 대한 금기깨기 게임이라는 악순환으로 소멸되듯이, 이러한 멈출 수 없는 깨기 메커니즘의 곤경은 이를테면 백민석의 ‘알궁둥이 내놓고 연주하기’ 식의 충격수법이 다음번에는 더이상 놀라움을 주지 않는다는 간단한 모순 때문에 생겨난다. 모더니즘에서 태작들이 숱하게 산출되는 것은, 이처럼 모더니즘의 이념틀을 일정하게 복사하고 환기하는 글쓰기가 관습화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80년대의 ‘자연주의적’ 소설들이 앙상한 리얼리즘의 이념틀에 얽매여 있던 현상을 연상시킨다.

장정일과 백민석의 곤경을 부각하는 나의 태도가 이 두 작가의 작업에서 한국문학의 새로운 돌파구를 발견하는 관점과 상반되는 것은 물론이다. 임규찬식 삼각형의 다른 한 꼭지점인 황종연이 이 후자의 대표적인 사례다. 이 두 작가는 그가 90년대 문학의 중심적인 성과로 파악해낸 ‘비루한 것의 카니발’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이다. 과연 이 두 작가의 작품세계는 밝은 대낮의 세계가 아닌 지하생활자의 강렬한 이미지를 담고 있고, 어두운 심리의 내면 드라마를 통해 근대성의 이면으로서의 억눌린 비이성 혹은 반이성, 광기어린 욕망의 분출조차 포함하는 ‘살아 있는 혼돈’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혼돈’에 대한 황종연의 지나친 의미부여는 극복되어야 할 80년대의 ‘실패’만이 아니라 되살리고 풍성하게 가꾸어나가야 할 7,80년대의 유산의 의미를 소홀히한 결과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고, 그런만큼 ‘생산적 대화’의 좋은 상대라고도 할 수 있겠다.

90년대 모더니즘의 성격과 그 성취를 비루한 것의 해방과 연결짓는 방식은, 현상에 대한 설명으로는 설득력이 있다. 여기에는 80년대를 이성 중심의 모던 시기로, 90년대를 반이성 중심의 포스트모던 시기로 양분하는 익숙한 전제가 깔려 있고, 황종연의 작품론들은 이 일반화의 관철양상에 대한 충실한 해설인 셈이다. 그러나 이같은 편리한 이분법이 한국사회의 복합성에 미치지 못함은 새삼 상론하지 않겠거니와, 90년대 모더니즘에 대한 조망은 과거의 모더니즘적 성과, 가령 70년대의 ‘모더니스트’ 조세희와 대비할 때 더 뚜렷해질 수 있다. 조세희가 꼭 모더니스트냐는 물음에는 백석이나 김수영의 경우처럼 나로서는 유보적이지만, 그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이 어떤 점에서는 황종연이 말하는 ‘비루한 것’의 원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주인공인 ‘난장이’를 비롯해서 그 친구 ‘꼽추’와 ‘앉은뱅이’라는 인물들은 왜소하고 기형화된 삶의 표상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세희가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모더니스트와 구별되는 지점은, 이 ‘비루한 것’의 삶을 그것의 억압된 욕망의 존재태에 한정하지 않고 궁극에서는 70년대 산업사회의 한 특정국면에서 야기되는 계급적 간극에 대한 의식과 맺어두는 곳이다.

이 연작소설의 프롤로그에서 제시된 ‘뫼비우스의 띠’는 작품 전체의 구조와 의미를 푸는 열쇠라고 할 수 있다. 안과 밖이 구별되지 않는 이 평면은, 일단은 난쟁이의 세계와 부자의 세계가, 혹은 노동자와 고용자의 세계가 별도의 공간이 아니라 결국 안팎이 연결되듯 이어져 있음을 전한다. 어떤 점에서는 안과 밖, 중심과 주변, 선과 악 등 모든 이분법적인 세계인식의 허상을 해체하고자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인식과도 통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뫼비우스의 띠가 이 후자와 다른 것은, 모든 인간의 욕망과 운명이 구별없이 추상화되고 계급분리를 포함한 경계가 상실되어버린 기괴한 공간이 아니라, 공동체 성원들이 겪는 개별적인 삶의 왜곡과 비극들이 서로 얽히고 부딪침으로써 깊은 사회적 모순을 소환해내고 환기하는 장(場)이라는 점이다.  

주목되는 90년대 모더니스트 백민석의 근작들에도 안팎이 구별되지 않는 이 뫼비우스의 띠에 대한 강렬한 인식이 있다.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문학동네 2001)이 그 한 예인데, 여기서 백민석은 안과 밖의 경계가 무너진, 자아와 세계의 경계가 무너진 상황의 무서움과 기괴함을 그려낸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에서 심부름꾼 소년의 세계와 장원의 세계 사이의 대비는 마치 조세희의 부자/빈자 세계의 대비와 유사한 동화적인 모티프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백민석에게 장원의 존재는 기성질서와 제도의 어떤 절대적인 힘처럼 신비화되어 소년의 성장과 자아형성 자체가 그 추상적인 힘의 반복이자 복사에 불과함을 보여주려 한다. 이 결말은 확실히 충격적이나, 뫼비우스의 띠의 존재는 여기서 갈등의 계기가 아니라 전적으로 그 공포와 괴기성을 확인하는 논리로 기능하며, 이것은 백민석이 조세희에 비해서 모더니즘의 이념에 그만큼 홀려 있다는 증좌이기도 하다.

나는 90년대 모더니즘의 경향들이 결국 해체론과 맺어진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적인 틀에 지나치게 종속되어 있고, 이 틀에서 벗어나는 일이야말로 백민석을 비롯한 한국 모더니스트들의 숙제라고 본다. 이것은 80년대식의 ‘리얼리즘론’에 붙들린 의식에서 벗어나는 일이 리얼리스트에게 중요한 과제인 점과 대응한다. 근년의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에서 부각된 서구 이론가 버먼은, 20세기 특히 그 후반의 모더니스트들이 낙관적이고 맹목적인 근대예찬과, 근대를 벗어날 수 없는 질곡으로 보는 막스 베버(Max Weber)적인 비관론 사이를 오락가락한다고 비판한다. 백민석의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의 세계는 그 매력에도 불구하고, ‘쇠로 만든 우리’ 같은 벗어날 수 없는 세계의 안팎 없는 지배를 환기하고 그 관념에 매몰되어 있다는 점에서 버먼이 비판하고 경계한 베버적인 모더니즘의 문제에 노출되어 있다.

안과 밖의 경계 없는 지배에 대한 인식은 앞에서 언급한 ‘놋쇠하늘’의 상징성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같은 현실을 되풀이 폭로하거나 혹은 언어의 카니발을 벌이는 것만으로는, 놋쇠하늘의 억압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거나 도리어 놋쇠의 영구불변함을 예찬하는 길로 전락할 수도 있다. 카니발이 워낙 지배체제의 온존에 필요한 기제임을 짚고 넘어간 황종연의 경계도 이와 유관한데, 결국 ‘비루한 것’의 존재와 그 성향을 증언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사회적 맥락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사회 심층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원천으로서의 역사성과 대면할 때, 놋쇠하늘에 대한 더욱 깊은 문학적 대응이 가능해질 것이다. 황종연이 거론하고 90년대의 모더니스트들이 원용하는 도스또예프스끼(F.M. Dostoevskii)의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가 러시아 문학에서 가지는 의미도, 도시인의 뒤틀린 자의식과 욕망 그 자체의 포착보다는, 뿌리깊은 봉건 구질서 속에 편입되지도 못하고 한편으로 민중과도 유리된 하층관리 혹은 서기계급의 특수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가 아니겠는가? 모더니스트의 질문이 이 망각된 계급의 구조에까지 닿을 때, 모더니즘은 우리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일 수 있다.

 

 

3. “민족문학이라구? 이제 그만 좀 하게나!”

 

확실히 민족문학에 대한 논의는 90년대를 거치면서 줄어들었다. 애초부터 한국문학이면 한국문학이지 민족문학이라니 그거 수상하다고 생각하던 사람들만이 아니라, 민족문학의 주장을 버리지 않던 사람들까지 말을 아끼는 분위기다. 여기에는 민족문학이라는 말의 남용에 대한 자의식이나 반성이 있는 듯 보인다. 몇년 전 임규찬이 발표한 「세계사적 전환기에 민족문학론은 유효한가」(『창작과비평』 1998년 여름호) 정도가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민족문학론의 유효성을 본격적으로 질문해본 것이고, 반성을 지나서 “민족문학은 이제 끝이다”라거나 “민족문학은 해체되어야 한다”는 식의 돌출성 선언도 이어졌다. 지구화라고 통칭되는 세계적인 변화, 즉 근대적인 국민국가나 민족범주의 해체라는 추세가 반영된 것은 짐작되는 일이다. 이러하니 민족문학이란 것은 이제 최소한 간판 정도는 내려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게도 된다. 이런 시국이라 민족문학을 또 말하다가는 안팎으로 모두 “민족문학이라구? 이제 그만 좀 하게나!”라는 반응조차 각오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대세적인 흐름이 꼭 올바른 판단인지는 의문이고, 민족(문학)이라는 범주가 놋쇠하늘의 지배 아래서 모종의 새로운 의미를 획득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다. 여기서는 특히 리얼리즘-모더니즘 문제와 관련하여 몇가지 원칙적인 것들을 따져보고자 한다.

우선 지구화의 시대가 준 민족범주에 대한 충격과 영향은 우리 담론에서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민족범주의 ‘해체’와 국민국가의 경계 ‘와해’가 지구화의 한 추세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국지적인 실천에 대한 요청과 그에 대한 이론적 대응도 강화된다. 세계적인 체제와 교섭하고 각 지역들의 요구를 매개하는 국민국가의 기능은 더욱 활발해진 셈이며, 민족은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귀환하는 현상도 곳곳에서 나타난다. 민족의 귀환이라는 여건에 제대로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지구화시대의 문학적 모색이 민족문제와 그와 관련된 민족범주에 대한 이론적인 물음을 떠나서 이루어지기는 어렵다.

민족범주의 해체설에 큰 무게를 실어주고 있는 문화론적인 민족이해가 가지는 문제도 더 짚어져야 할 것이다. 대체로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의 ‘상상된 공동체’로서의 민족개념에 의존하는 이같은 민족해체론은 민족이 상상의 산물이며 문화적인 구성물이라는 관점을 따른다. 이 관점은 민족을 영구불변의 본성처럼 상정하는 그릇된 본질주의에 대한 적절한 비판을 동반하지만, 구성되었으니 언제든 해체도 가능하다는 식의 발상은 앤더슨의 속화이기도 하거니와, 실제로 그 ‘상상’이란 것이 허공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에서 무엇보다도 민중적인 상상력에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4 집단적 삶의 체험과 맺어져 우리 속에 뿌리박힌 민족정체성이 불시에 무너지리라고 여기는 것은 해체론자들의 머릿속에서나 존재하는 환상일 뿐이다.

이처럼 지구화라는 조건은 민족문제를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리게 하고, 국민국가는 열국적인 세계체제의 일원이면서 자기이익을 위해 이 체제에 맞서고 대응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지구화의 국면에서도 분단상황이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또 구성해나가는 현실을 벗어날 수도 없는 한, 분단을 체제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 극복을 모색하는 민족문학론적 시각은 더욱 예각화하고 깊어져야 할 싯점에 놓여 있다. 세계적인 자본주의체제라는, 놋쇠하늘처럼 꿰뚫을 수 없는 단단함을 과시하는 이 안팎 경계 없는 세계의 어디에서 그 파열점을 찾을 수 있을까? 지구화 과정이 분단상황에 일단의 균열을 야기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떤 방향의 문학적 모색이든 민족문학론의 사유와 이론이라는 자산을 방기할 까닭은 전혀 없는 것이다.

민족문학론의 이해에서 불식되어야 할 고정관념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리얼리즘과 맺어져 있으니 모더니즘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대개 개인주의와 해체론에 편향된 모더니즘 이론에서는, 민족공동체가 문제틀에서 삭제되거나 비판된다. 그러나 모더니즘 문학도 민족어를 통해 하는 활동이고 다른 곳이 아닌 국민국가의 영토와 그 공동체 안에서 이룩되는 것인 한, 민족범주의 규정력과 형성력을 벗어난 무슨 무중력 공간에 위치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한국 모더니즘이 처해 있는 곤경의 일부는 이처럼 민족문제 혹은 정체성 문제와의 의미있는 대결이 비어 있는 탓이기도 한 것이다. 가령 서구 모더니즘의 대표자 중의 한 사람인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만 하더라도, 그의 상상력의 핵심에는 그 자신 속의 해명해야 할 어떤 수수께끼로서의 민족이 웅크리고 있다. “영혼의 대장간에서 창조되지 않은 내 민족의 양심”을 벼려내겠다는 식민지의 한 젊은 예술가의 다짐이야말로, 모더니즘 대작 『율리씨즈』(1922)를 탄생시킨 원동력이다. 비단 조이스뿐 아니라 프루스뜨(M. Proust)나 포크너(W. Faulkner) 등 각 민족문학을 대변하는 모더니스트들에게 민족이나 인종의 문제가 예술적 고투의 중요한 고리임은 분명하니, 한국 모더니즘이 민족문제를 강 건너 불 보듯 하고, 그것 너머의 ‘보편적 개인’이란 것을 자기영역으로 삼는 태도야말로 한국문학의 후진성의 한 징표라고도 할 법하다.

모더니즘의 민족문학적 발현은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 등 대개 제3세계 문학에서 두드러지는데, 최근 우리 문학에서 두드러진 지하생활자의 영상에 영향을 미친 도스또예프스끼가 이같은 제3세계적 모더니즘의 한 원천이자 중요한 사례임은 되새겨봄직하다. 황종연도 그러하지만 이 지하생활자의 고독과 왜곡상은 이성에 대한 반이성, 정상에 대한 광기라는, 계몽주의적 근대성에 대한 반발이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고 그것이 일면의 사실이기도 하다. 반면 서구적인 근대성의 도래에 맞선 슬라브주의라고 지칭되는 민족주의적 정서와 논리가 도스또예프스끼의 인물형상에 깊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은 모더니즘론자들에 의해서 종종 간과된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모더니즘’이 리얼리즘의 성취이기도 함은 바로 계급과 민족문제의 고리들이 그의 고독한 인간의 존재학과 깊이 연관되어 당대 러시아사회에서 배태되던 혼란과 변화의 예감을 박진하게 전해주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한국 모더니즘에도 민족범주와의 고투가 드러나는 작품의 성과가 없지는 않고, 나 또한 가령 이상(李箱)의 모더니즘의 ‘민족문학적’ 성격을 규명해보고자 하기도 했다(「모더니즘의 세계관과 정직성의 깊이」, 1988). 식민지 모더니즘의 주요 성취 속에는 근대성과 식민성의 결합양상에 대한 관찰이 잠재하기 마련이며, 이에 대한 민족문학론적 읽기를 통해 봉쇄된 형태로나마 박혀 있는 민족적 인식을 복원해내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모더니즘론자든 리얼리즘론자든 각각 이유는 다르지만 모더니즘의 작품적 성과 속에 깃들인 민족 요소의 창조적 개입을 간과해왔던 셈이다. 반드시 식민지문학이 아니더라도, 가령 김수영의 후기작들이 그 한 예이듯이, 근대성과의 마주침이 야기한 내면의 파장과 외부 현실이 구체적으로 교섭하는 과정에서 분단이라는 민족문제가 불가피하게 끼여들고, 이 새로운 깨달음이 홀연 모더니즘의 경계를 넘어 리얼리즘의 지평을 바라보는 계기가 된다.

90년대 모더니즘이 민족에 대한 사유를 기피하고 때로는 냉소하는 듯한 양태를 보이는 것은 90년대 문학의 문제성을 반증한다. 민족문제를 남의 일 보듯이 하는 자세로 모더니즘의 독자성이 확보되리라고 여기는 것은 어리석다. 존재의 근저에 자리한 정체성의 몸체에는 계급과 뒤엉킨 민족의 요소들이 여기저기 끼여 있기 마련이며, 자아의 내면의식을 탐사하는 과정에서도 어두운 심리의 구렁에서 분단을 포함한 민족현실의 재현들과 부딪치는 체험이 일어나게 된다. 모더니즘이 굳이 민족문제를 괄호치고자 하는 이론적 관념에 얽매임 없이 곧바로 자기의 내면적 실체(혹은 환상) 속으로 직핍해 들어갈 때, 그리하여 해체를 통해서든 재구축을 통해서든 이 문제로의 통로를 뚫어나가는 순간, 모더니즘의 위력도 부활의 단초를 얻고 동시에 리얼리즘의 순간이 도래할 전망도 열리게 될 것이다.

민족문제가 이 시기에 중대한 문학의 과제로 등장하기는 리얼리즘을 표방하는 문학 쪽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외부적인 변화를 그려내는 차원을 넘어서, 분단체제의 흔들림이 민족의 집단무의식과 개개 구성원들의 심리에 주는 충격과 그 여파들에 대한 관찰이 동반될 때 더욱 실감을 얻게 될 것이고, 포스트모던 시대의 갱신된 총체성의 요구에도 좀더 부응하는 것이 될 것이다. 나는 이같은 리얼리즘의 새로운 도전의 한 징후를 황석영(黃晳暎)의 『손님』(창작과비평사 2001)에서 발견한다. 대개 『손님』은 맑스주의와 기독교라는 두 외래적인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이 땅의 현실에서 초래한 비극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이해되고 또 그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이 두 외래종 이데올로기는 마치 마성(魔性)을 지닌 물신처럼 개인들의 삶과 관계들을 좌우한다. 그럼에도 『손님』은 이 마적인 것에의 탐닉으로 떨어지지 않고 그것이 삶에 준 공포와 원초적인 정서는 그것대로 살리면서, 이들의 대립이 단순히 상이한 믿음의 체계라는 차원만이 아니라 계급이라는 최종심급과 결탁해 있음을 늘 환기시킨다. 인간 삶의 개별적 운명들은 덧없는 것이면서도 세계 속의 모순구조에 피할 수 없이 얽혀 있다는 실감은 바로 여기서 생겨나며, 그 전율은 단순히 살인과 폭력의 적나라한 제시만으로는 획득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작품에 묘사된 집단학살의 현장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엽기적인’ 폭력성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현실 그 자체에서 솟아나는 만큼이나 리얼리스틱하다. 『손님』의 엽기성은 가령 백민석의 『목화밭 엽기전』이 그려낸 폭력과 제도적 질곡의 알레고리와는 달리 추상화되지도 신비화되지 않은 채 지금도 진행중인 민족사에 대한 살아 있는 물음을 야기하는 것으로서의 구체성을 띤다. 이것이 『손님』을 민족문학의 성과로 올려놓는 리얼리즘의 요건이기도 하다.

 

 

4. 물건의 부족인가 이론의 궁핍인가?

 

나는 지금까지 거의 상식이 되다시피 한 몇가지 관념에 의문을 던져왔다. 달라진 현실에서 리얼리즘의 ‘원론’을 고수하는 태도를 탓하지만, 새로운 국면일수록 원론의 재점검이 더 절실한 과제가 된다는 점, 리얼리즘의 쇠퇴와 모더니즘의 성세가 90년대 문학의 이름으로 당연시되지만, 실인즉 서구에서처럼 모더니즘이 죽음을 맞지 않기 위해서라도 리얼리즘을 고취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 또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의 모더니즘을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모더니즘의 이념에서 해방해 그 혁신적 창조력이 제대로 구현되게 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민족은 지구화의 시기에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귀환하고 있으며, 리얼리즘은 물론 모더니즘도 민족문제와의 대결을 통해서 거듭날 수 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이 주장들 자체는 검증도 요구되고 세련도 필요한 사안들이며, 그만큼 논란의 여지도 많을 법하다. 무슨 소리냐고 도외시할 수도 있겠지만, 대세를 거스르는 이같은 활동은 또한 이 시대 비평의 몫이기도 한 것이다. ‘생산적 대화’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왕 이같은 상식뒤집기를 해온 마당이니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추가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하다. 90년대 이후 민족문학의 쇠퇴를 거론할 때마다 되풀이된 “물건이 없다”는 푸념이 그것이다. 출판량은 늘어났지만 좋은 작품이 그다지 많지 않고 어떤 이는 “읽을 만한 작품이 없기 때문에 문학평론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까지 했다지만, 한국문학의 작품적인 성과가 그렇게 비관할 지경에 처해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물건의 부족’이 아니라  ‘이론의 궁핍’에 있다. 이론의 과잉을 탓해온 사람들로서는 터무니없어 보일지 몰라도, 이론영역에서도 창작과 마찬가지로 “출판량은 늘어났지만 제대로 된 논의는 태부족이었다”는 말을 그대로 갚아줄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내가 말하는 이론의 궁핍이다.

물론 이론의 궁핍을 사실로 받아들이더라도 ‘물건이 부족’하다는 판단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물건의 부족이라는 명제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만 진실이니, 지금에 와서 가령 소설의 경우만 하더라도 황석영의 성공적인 재기와 현기영·박완서 등 원로작가들의 꾸준한 활동, 중견작가 최인석 등의 의미있는 모색, 또 신경숙·공선옥·이혜경·하성란 등 90년대에 부각된 여성작가군의 활동력과 아울러 천운영을 비롯한 무서운 신인들의 가세, 그리고 소위 신세대 가운데서도 김종광·전성태 등 농촌적 정서와 현실에 착반한 일군의 작가들과 백민석·장정일·김영하 등의 주목할 만한 몇몇 모더니스트들만 떠올려보아도, 리얼리즘론이 더이상 기능하지 않을 정도로 ‘물건’이 달린다는 풍문을 잠재우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물건의 부족을 리얼리즘 및 민족문학론의 곤경과 연결짓는 논의는 흔한데, 이를테면 백낙청이 90년대 초 신경숙과 김기택을 리얼리즘의 관점에서 면밀히 검토한 것(「지구시대의 민족문학」, 1993)을 두고 “리얼리즘 쪽에서 물건이 모자라니 궁여지책으로 다른 것을 끌어들이는 책략”이라는 식으로 받아들인 것도 그 한 사례이다. 그러나 이같은 시각이야말로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작품의 성취도가 아니라 좁은 의미의 진영이나 적대관계로 설정하는 기존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그같은 관행에 얽매이다 보니 리얼리즘이라는 테두리를 좁힐 대로 좁혀두고, 작가를 신원이나 정치적 성향에 따라 분류하는 폐단조차 없지 않았다. 이 모두는 다름아닌 이론의 궁핍이 초래한 혼란이며, 작품 탓을 댈 것이 아니라 이론의 강화를 통해서 극복해나갈 문제인 것이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이라는 화두를 내세운 최원식의 모색이 현단계에 필요한 이론심화의 한 계기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것은 이 두 항목을 대립으로만 파악하지 않고 근대성에 대한 대응의 안과 밖을 이루면서도 또 연결된 일종의 뫼비우스의 평면으로 이해하는 나의 관점과도 상통한다. 여기서 회통의 성격을 결정하는 관건은 회통의 대상인 각 항목의 내용이 무엇이냐에 달려 있다. 최원식의 회통론이 그 자신도 경계하는 것처럼 “통상적인 리얼리즘과 통상적인 모더니즘을 설정하고 양측의 두루뭉실한 화해로 문제를 풀어가려는 고식(姑息)”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그 통상적인 것으로서의 두 항목이 제대로 된 리얼리즘에 미달한다는 정도의 합의가 있어야만 최소한 리얼리즘론자로서의 정체성을 말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최원식의 회통론은 지나치게 조심스럽다. 그에게는 두 용어가 모두 동등하게 자기 식의 집단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기본적으로는 이미 훼손되어 더이상 써먹지 못할 정도로 저주받고 있다. 판단할 자리에서 판단을 유보하는 이같은 신중함이 결국 “비평담론 안에 갇힌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을 창작측으로 방(放)”해야 한다는 대목에 이르러, 이론의 포기선언으로 이어지고 만다. 모처럼 제기된 이론화의 요구에 비추면 너무나 맥빠지는 귀결이다.

창작이 비평보다 우선이라는 명제는 옳지만, 그렇다고 창작의 풍토를 조성하고 방향을 모색하고 평가의 기준을 마련해나가야 하는 비평의 책무가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지금은 창작에 앞서 이론이 기승을 부리는 시대로, 온갖 해체론들과 현학적인 용어들이 비평현장에서 낭비되고 범람하는 상황이다. 이 와중에서 창작은 진정한 창조성의 거처가 아니라 이론을 풀어먹는 놀이터가 되는 현상조차 생겨난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작품의 창조성과 맺어주는 이론적 고투가 더욱 긴요하며,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둘러싼 논의가 의미를 가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창작은 소중하다. 그러나 그 창작을 위해서도 이론은 해체론의 수렁을 헤쳐나가며 길찾기를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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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eorg Lukács, “Franz Kafka or Thomas Mann,” The Meaning of Contemporary Realism(Merlin Press 1963) 48면. 번역은 필자의 것.
  2. 졸고 「순수시의 정치적 무의식: 정지용과 백석」, 『민족현실과 문학비평』(실천문학사 1990) 참조.
  3.  Marshall Berman, 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 The Experience of Modernity(Penguin 1988); Franco Moretti, Modern Epic: The World-System from Goethe to García Márquez (Verso 1996).
  4. 이 점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졸고 「지구화에 대한 한 고찰: 근대성, 민족 그리고 문학」, 『놋쇠하늘 아래서』 82〜84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