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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
학벌사회와 서울대 개혁
안상헌
충북대 철학과 교수 ahnsah@chungbuk.ac.kr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hknsong@snu.ac.kr
김상봉
철학자·‘학벌 없는 사회’ 운영위원 oudeis@daum.net
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사회 jykim@hanshin.ac.kr
때: 2002년 1월 9일
곳: 창작과비평사 회의실
김종엽 쌀쌀한 겨울 날씨에 창비까지 어려운 걸음을 해주신 것, 깊이 감사드립니다. 먼저 사회자로서 오늘 좌담의 참석자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소개가 약간 길어질 수도 있는데, 그 이유는 오늘의 주제인 학벌사회와 서울대 개혁에 대한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좌담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좌담자 인선에 나름대로 신경을 썼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대학체제는 매우 복잡합니다. 국립과 사립이 혼재하며 이에 따라 입장차이도 크고 이해관계의 분할과 대립도 심하며, 여기에 수도권에 과도하게 집중된 사회발전 과정으로 인해 생긴 수도권대학과 지방대학 간의 입장차이와 대립이 겹쳐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런 점을 고려하여 토론자들을 모셨습니다. 각자가 처한 입장으로 인해 좁아질 수 있는 전망을 서로 부딪쳐봄으로써 더 나은 논의를 전개해보자는 뜻이지요.
먼저 사회자인 저부터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서울대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모두 마쳤고, 지금 수도권 사립대학에서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안상헌 선생님은 외국어대를 나온 뒤 서울대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지금 지방 국립대학에서 재직하고 계십니다. 김상봉 선생님은 학부와 석사과정을 연세대에서 마치고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그리스도신학대 재직중에 비리재단에 의해서 해임되었으며, 지금 ‘학벌 없는 사회’ 모임을 주도하고 계십니다. 송호근 선생님은 서울대의 학부와 석사과정을 거쳐 육사에서 교수로 재직하다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서울대에 재직하고 계십니다. 1차적으로 고려한 것은 아닌데 모셔놓고 보니 안선생님과 김선생님은 철학을 전공했고, 송선생님과 저는 사회학을 전공했네요. 아마 오늘 좌담이 철학과 사회학, 각각의 접근방식간의 대화로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들이 오늘 다룰 주제인 학벌사회와 서울대 개혁 문제의 윤곽을 간단히 짚어보겠습니다. 우리 사회는 학력사회이며, 더 나아가 학벌사회의 성격이 아주 강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 이런 학벌문제가 90년대 중반부터 한국사회 전체의 사회문제로 대두하고 있습니다. 창비에서 오랜 시간을 들여 기획한 오늘의 좌담주제에 대해, 몇몇 일간지들도 약속이라도 한 듯 신년기획 등으로 다루고 있지 않습니까? 특히 학벌문제의 경우 그 꼭지점에 서울대가 있기에 서울대 개혁에 대한 논의도 꾸준히 이루어졌습니다. 그렇지만 학벌사회와 서울대 사이의 깊은 연관에도 불구하고 서울대 문제는 학문정책 문제라든가, 대학의 통치체제(governance) 문제 같은 또다른 차원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도 합니다. 서울대 문제가 학벌문제와 등치되기는 어렵다는 거지요. 다시 말하자면 학력과 학벌, 그리고 서울대 문제는 연장선상에 있지만 일정한 위상차이를 가진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학력사회의 특성과 학력과 학벌의 연계 문제를 먼저 논의하고 이어서 서울대 문제로 나아가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학력주의는 근대사회의 일반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만큼, 사회학자인 송선생님이 먼저 학력사회의 구조적인 특질 그리고 그것과 학벌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해주시지요.
근대의 산물, 학력주의
송호근 글쎄요, 저는 서울대 재직중이라 이 좌담에서 아무래도 방어적인 입장이 되기 십상일 것이고, 개인적으로는 서울대에 대한 비판이 많이 제기되었을 때 “너무 그러지 마라”란 글을 좀 썼다가 완전히 보수주의자로 찍혀 있어서, 저부터 이야기를 하라니 좀 껄끄럽네요.(웃음) 저는 학벌이 문제지, 근대사회와 더불어 형성된 학력주의 자체는 건강하다고 생각합니다. 근대사회는 아무래도 인적 자원과 지식, 기술을 가지고 경쟁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학력을 중시하는 풍토가 매우 일반적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경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학력주의를 바탕으로 해서 역사적인 중심국가로 성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학력주의가 특히 강한 유럽 선진국을 든다면 프랑스가 대표적일 테고, 영국도 알게 모르게 귀족주의와 학력주의가 깊이 결합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미국의 경우는 학력주의가 한국보다 훨씬 강하게 작용하는 사회라 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학력주의는 학력과 능력을 연계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전제에 입각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제도적으로 장기화되면 고착화 현상과 부조리가 생겨나며 학벌주의로 변해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프랑스처럼 관료사회를 장악하는 몇몇 학교가 생겨나고, 영국처럼 ‘옥스브리지’를 중심으로 한 엘리뜨군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미국 역시 ‘아이비리그’라는 동부지역의 엘리뜨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죠. 이런 엘리뜨 카르텔에 들어가는 데 학력이 가장 중요한 기제로 작용한다고 레스터 서로우(Lester Thurow)가 1975년에 진단했는데, 25년이 지난 이 싯점에서 그것은 더욱 강해진 것 같습니다. 동아시아의 경우에는 중국·일본·한국 중에서 한국이 제일 학력주의와 학벌주의가 강하지 않은가 싶네요. 학력주의의 학벌주의로의 변형은 어떻게 보면 합리적인 기준이 비합리적인 준거인 연고로 바뀌는 과정이라고 하겠는데, 그것이 현상태의 문제로 보입니다. 사회자가 말씀하셨지만 변질된 학력 내지 학력이라는 공식적인 준거의 비공식적 전용으로 나타난 것이 학벌주의라면, 그같은 ‘전용’은 동시에 근대사회의 가장 중요한 발전에너지의 ‘사적 전용’이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가 극심해진 것은 지난 50년 동안 우리 사회의 발전과정에서 발생한 여러가지 왜곡현상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공식적이고 합리적인 준거의 사적인 유용이 매우 광범위하게 이루어져, 그것이 보이지 않는 사회조직 원리가 되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지요. 그러면서 학벌은 그 자체로 하나의 폐쇄적인 계급으로 작용하는 동시에 계급 재생산의 핵심적인 고리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런만큼 학벌문제가 현재 한국사회가 마주한 가장 중요한 사회문제라는 진단은 정확합니다.
김종엽 업적주의(meritocracy), 즉 학력과 능력을 일반적으로 등치시키는 체제와 제도는 근대사회의 일반적 현상입니다. 매우 급진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그것에 근본적으로 도전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봅니다. 하지만 문제를 발본적으로 검토하는 철학의 견지에서는 생각이 다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김상봉 원론적으로 근대사회에서 학력주의는 급진적인 입장이 아니면 피할 수 없는 것 아닌가라고 하셨는데, 저는 어떤 뜻인지 이해하기는 하지만 이제 그 문제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근대가 인간의 지적 능력의 계발이라는 것을 중요한 화두로 삼았고 그것이 근대사회 발전의 견인차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이면에 어떤 개인적인 동기가 있든간에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학교에 들어가고 자기계발을 하려고 한 것이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발전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학력이 능력과 비례한다고 일반화하는 것은 이제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능력은 학력으로 환원되기에는 너무 다양한 것입니다. 전통적 구분법에 따르기만 해도 인식(episteme)의 능력, 기술(techne)의 능력, 예술의 능력이 있는데, 그 모두를 어떻게 학력이라는 하나의 기준으로 싸잡을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지금은 사회가 매우 복잡해졌기 때문에 훨씬 더 분화된 재능과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에 비해 대학의 울타리 내에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이 계발할 수 있는 능력 중에서 굉장히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제는 학력과 능력을 등치시키는 신화에 이의를 제기할 때가 되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 사회는 학력과 학벌이 정치적인 권력과 깊이 유착되어 있다는 게 큰 문제입니다. 우리 사회의 경우 학력, 그중에서도 학벌 엘리뜨들이 정치적인 권력을 독과점하고 있는 상황이죠. 과거(科擧)제도의 전통 탓으로 지금까지도 공부를 한 사람들이 정치적인 권력을 담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의 막연한 합의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굉장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서양의 경우는 전통적으로 학문과 정치권력이 밀착되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근대 이후 학문 또는 학력과 정치권력이 아무리 가까워졌다고 해도 “저 친구는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하니까 평생 공부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면 좋겠다” 싶은 사람이 나중에 커서는 전부 법대 나오고 일류대학을 나와서 정치에 참여하는 나라는 아마 우리나라밖에 없지 않은가 싶습니다.
엘리뜨를 충원하는 방법, 혹은 권력 배분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관련해서 보면 과거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정치를 담당하는 사람이 기본적으로 군인이었습니다. 나라를 지킬 능력이 있고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군인들이 정치를 했죠. 서양의 경우 이는 학문에 일정한 의미의 진보성을 가지게 했고, 정치권력과의 긴장 또는 분업 때문에 학문도 전문성과 비판성을 담보하게 되었던 것인데, 우리의 경우에는 수백년 전부터 정치권력과 학력 혹은 학문이 같이 맞물려 있어서 정치에 전혀 재능이 없고 책상머리에 앉아서 집요하게 전문 분야만 탐구해야 할 사람들이 정치권에 들어가, 정치는 정치대로 이상해지고 학문은 학문대로 그야말로 수단화되어 전문성이 자꾸 저하되었습니다. 지금처럼 학문 또는 학력이 권력이나 출세와 더불어 동심원을 그리는 사회에서는 학문이 전문성을 추구하면서 자기의 역할을 다 하는 것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학벌주의와 학벌사회의 정착과정
김종엽 일리있는 말씀입니다. 중세 유럽의 경우에는 기사계급과 상인계급 혹은 승려계급이 정치적·경제적·이데올로기적 권력을 분점했고, 그것이 중세 봉건사회에 역동성을 주었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조선 사대부의 경우에는 유학자로서 이데올로기적인 권력, 관료로서의 정치권력, 그리고 재향 지주로서 경제적인 권력을 다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사회의 역동성을 떨어뜨렸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앓고 있는 학벌문제 같은 병리현상들이 조선조 혹은 그 이전의 전통에서 유래하는지는 한번 살펴봐야 할 문제입니다. 이는 학력주의가 한국사회에 어떤 경로로 정착했는지에 대한 규명과도 관련됩니다. 초·중등 교육 그리고 대학교육으로 이어지는 학력체제 자체는 기본적으로 서구에서 형성된 씨스템인데, 이 체제가 신식교육의 도입과 더불어 들어왔다고는 해도, 학력이라는 것은 가질 만한 가치가 있다는 인식이 우리 사회 안에 언제 어떻게 확립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의 학력 팽창속도는 세계적인 수준이거든요. 유럽이 2백년에 걸쳐 이룩한 것을 우리는 5,60년 만에 후닥닥 해치웠는데, 학력과 능력을 등치시키는 제도에 대한 믿음이 왜 우리 사회에서 빠르고 강력하게 자리잡았는지는 따져봐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송호근 그 문제를 다루기 전에 한가지 짚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김상봉 선생님이나 사회자는 학문과 여타 사회권력 간의 분화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학력 내지 학문이 높은 사람, 조선시대의 선비와 같은 사람이 경제적·사회적 권력과 힘을 다 지녔던 것은 우리의 독특한 상황이었고, 많은 문제를 야기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역으로 유럽의 분점구조도 나름의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중세 유럽처럼 무사계급이 정치를 해야 합니까? 그건 아니잖아요? 일반적으로 정치·경제·이데올로기, 이 세 가지 권력은 각각 분점될 수도 있고 다양하게 융합하기도 합니다. 중동지역의 칼리프체제는 정치와 종교가 결합된 것이죠. 그중 어느 유형이 특별히 우월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모든 제도는 그 사회의 상황에서 발원하는 것이니까요. 우리의 경우 식자에 의한 지배를 인정했던 전통이 있다면, 그것은 그 상황에서 사람들에 의해 합리적이고 공정한 메커니즘으로 인정받고 제도로서 채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왜 그런 식의 제도화가 일어났는지는 상세히 탐구해보아야 하지만, 현재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달라진 사회상황에서 왜 그런 제도적 유산이 왜곡·변형되어 나타났는가 하는 문제인 듯합니다. 제 생각에 그것은 우리의 혹독했던 현대사 경험, 특히 한국전쟁과 관련이 있습니다. 전쟁 전의 첨예한 이데올로기 대립이 전쟁으로 폭발하고, 그 과정에서 모든 사회의 제도와 관습이 파괴되었습니다. 전후에 겨우 수습된 사회는 다시 군부통치 아래 들어갔습니다. 이런 와중에 권력 배분을 둘러싼 경쟁에서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기준의 부재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국민들이 공감하며 말썽이 일어나지 않을 최소한의 합의는 무엇이었을까요? ‘학력’이 그것이지요. 다른 한편으로 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 신분의식이 제거되었고, 그것이 우리 사회 전체에 강력한 평등주의 문화를 확산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누구든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죠. 이 강력한 평등주의가 가져온 격심한 경쟁의 기준으로 학력이 채택되어 학력경쟁이 본격화된 것입니다.
이런 과정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닌데, 문제는 이런 경쟁이 점차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되지 않는 쪽으로 변화해갔다는 것이지요. 가령 군부통치는 정경유착뿐 아니라 학력주의와 학벌주의를 강화한 측면이 있습니다. 정당성 없고 실질적인 사회관리 능력이 약했던 군부가 통치를 위해서 지식인들을 요직에 등용하면서 그런 등용을 학력에 근거해서 합리화했습니다. 이런 엘리뜨 충원방식에 학벌이 강하게 관여되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군부통치가 등장하지 않고 시민사회가 나름대로 발전하면서 학력을 대체할 수 있는 또다른 기준을 가다듬어갔다면, 학력과 학벌을 둘러싼 경쟁이 현재처럼 치열해지지도 또 이처럼 병리적으로 되지도 않았을 겁니다.
김종엽 학력주의의 발생과 관련해서 송선생님이 주로 5,60년대 특히 전쟁 후의 상황을 강조하셨는데, 제가 자료를 찾아보니까 그 시기는 좀 앞당겨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910년대에 일제는 본토에서 그랬듯이 식민지에서 보통학교를 설립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근대적인 교육체제에 들어가려 하지 않고 주로 서당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1920년이 되면 상황이 반전됩니다. 우리나라에서 ‘교육열’이라는 말이 상당히 많이 쓰이는데, 이 말이 등장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잘 안 쓰이게 된 것이 ‘학구열’이라는 좋은 말이죠. 우리 사회는 교육을 열심히 시키려는 열망만 두드러진 사회인데, 이런 ‘교육열’이라는 말을 처음 쓴 것이 식민지 총독이었습니다. 1920년대에 보통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입시경쟁이 벌어졌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정도의 요인이 있었습니다. 남들이 안 가던 시절에 보통학교를 간 사람들이 사회적인 보상을 확실하게 받았다는 것, 또 하나는 3·1 운동 때 신식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열심히 독립운동을 함으로써 신식교육에 대한 거부감을 상당히 없앴던 것입니다. 다른 한편 당시 학교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은 주로 식민지 말단관료, 예컨대 면서기로 취직하게 되는데, 식민지 농촌현실에서 면서기는 매월 현금으로 월급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가 몰고 다니던 자전거는 지금으로 치면 거의 쏘나타 승용차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점이 식민지 민중에게 상당히 매혹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보통학교에 들어가려는 경쟁이 시작됐고, 이게 나중에 가면 식민지체제에서 중등교육 팽창까지 불러오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력경쟁이 극심해진 것은 송선생님 말씀처럼 학력과 능력을 등치시키는 문화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보상이 학력에 연계되어 있다는 확실한 인식이 형성된 해방 이후입니다. 저는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을 항상 박사라고 불렀던 것이 상당히 의미있는 상징조작이자, 사회적 신호였다고 생각합니다. 또 해방후 일제라는 지배층이 통째로 사라졌을 때 경기고라든가 경복고 출신 등 식민지시대에 중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상당히 빠른 속도로 지배계급으로의 진입에 성공했는데, 이런 점도 하나의 사회적 신호가 되어 학력주의와 학벌주의를 확산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이런 사회적 인식이 형성된 후에는, 노동운동을 통한 집합적 지위상승이 반공주의로 인해 이루어지기 어렵고 가족을 제외하면 아무런 복지제도도 없던 시대에 모든 계급이 교육을 통해서 개인적인 지위 상승을 꾀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안상헌 물론 우리 사회가 합리적이고 공정한 사회라면 지식이 우대를 받고 학력이 능력을 대변하는 현상이 부정적이거나 터부시될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역시 학벌이고, 또 학벌이 배타성을 지닌 하나의 거대한 권력의 속성을 띠게 됨으로써 그것에 속하지 못한 다른 집단은 차별받는 사회적 병리현상이지요.
제가 지방 국립대에 재직하기 때문에 늘 보는 현상인데, 지금 지방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서울대뿐만 아니라 서울에 있는 모든 대학을 ‘서울대학’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서울에 있는 여러 종류의 대학들을 모두 ‘서울대학’이라고 하고, 지방에 있는 대학은 국립대학이든 사립대학이든 지방대학이라고 한단 말이죠. 이는 지방대학 학생들이 대학 졸업 후 취업하려고 할 때 면접이나 서류전형에서 완전히 찬밥 신세가 되는 데서 비롯된 것이죠. 어떤 학벌집단에 소속되는가가 대학입시에서 완전히 결정되어버리기 때문에 그 뒤에 대학에서 자기 능력을 얼마나 함양했느냐 못했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점에서 지방대학생들의 심리적 조기좌절은 매우 심각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머리를 좋게 하는 DHA가 들어가 있는 분유를 먹여야 한다는 광고를 한번 보세요. 이는 아이의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결국 아이를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한, 입시전쟁에서 이기게 하기 위한 모습의 한 극단을 잘 대변해줍니다. 이런 풍토의 근저에는 어느 학벌집단에 귀속되느냐가 결정적으로 중요시되는 사회가 버티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벌사회가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학벌과 사회적 불평등
김종엽 학력 이야기를 다소 길게 나눈 까닭은 학벌사회의 뒤에 학력사회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아서였습니다. 학벌을 좀더 분명하게 정의한다면, 학교의 이력을 중심으로 해서 생기는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겠고, 학벌사회는 그런 네트워크가 권력에 접근하는 굉장히 중요한 징검다리가 되는 사회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 사회의 경우 서울대를 나온 사람들이 서울대 학벌을 형성해서 배타적으로 권력을 향유하고 있는데요. 문제는 서울대가 좋은 학교이고 거기에 들어가려면 공부도 잘하고 시험도 잘 보아야 한다는 식의 정당화 기제가 존재하기 때문에 학벌문제를 논파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학력과 학벌이 연계되어 작동하는 한, 학력의 형성 혹은 그 정당성 문제를 생각해볼 필요성이 계속 제기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학부모에게는 꼭 서울대나 연대·고대 같은 명문대가 아니라 해도 자식을 대학교에 보내는 일 자체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데, 학벌 못지않게 학력 또한 신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고졸 남성이 대졸 여성과 결혼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제가 있는 한신대에 서른살 넘은 편입생이 졸업 때 저에게 하는 말이 전문대 졸업장만 가지고는 결혼을 못하겠다는 겁니다. 부모로부터 사업을 물려받아서 괜찮은 중소기업의 사장을 할 전망이 있는 친구였는데도 결혼을 못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학벌 못지않게 학력 자체에 대한 열망이 있다는 것이죠. 학력주의 형성의 배경요인들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이야기를 나눈 셈이니 안선생님 말씀대로 이제 좀더 학벌문제에 집중해서 논의하도록 하지요.
김상봉 새 주제로 넘어가기 전에 간단히 그러나 분명하게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회자가 학벌 비판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려운 이유가 정당화되어 있는 학력과 연계된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일면 타당한 이야기지만, 좋은 학력 내지 학벌과 탁월성 간의 연계는 분명 신화적인 것입니다. 아마 그것을 정당화하는 가장 강력한 것이 시험제도일 것입니다. 대학입시는 물론이고 고시도 마찬가지인데, 시험에 의한 선발은 시험 자체에 대한 집착을 낳고 그 결과 제대로 된 선발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요즘 학생들은 모두 중·고등학교 때부터 토플이다 토익이다 해서 난리법석입니다. 그런데 막상 학교에서 가르치다 보면, 여기 계신 선생님들도 다 느끼실 테지만 저희가 대학 다닐 때에 비해서 오히려 학생들의 원서강독 능력이 낮습니다. 시험이 목적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대학의 철학과나 사회학과에 오고 싶은 학생이라면 중·고등학교 때부터 칸트와 베버를 읽고 맑스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또 그들의 글을 읽고 어느정도 이해하는 학생은 영재가 아니겠습니까? 제 경험에 비추어보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경쟁이 덜 치열했기 때문인지 지금의 서울대나 연·고대 학생들보다 과거의, 넓은 의미에서의 상위권 대학 학생들이 훨씬 더 나았습니다. 기본적으로 시험이 남과의 경쟁이 아니라 자기가 어디까지 와 있고 얼마만큼 성취해냈는가를 평가하는 과정이라면, 시험 잘 본 사람이 훌륭하겠지요.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시험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면 그것은 개개인의 심리상태 면에서나 사회 전체적으로나 심각한 폐해를 가져옵니다. 이제 시험에 의한 선발이 탁월성을 보증한다는 것은 한낱 신화가 되어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종엽 시험이 탁월성을 보장하지 않고 역기능이 많다는 점은 모두가 공감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경쟁이 강한 상황에서는 역설적으로 그것을 대체할 만한 무엇을 찾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좋은 대체방안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험제도에 묶여 있는 것 아닐까요.
김상봉 사회자의 이야기도 일리는 있지만 좀더 문제를 심화시켜보아야 합니다. 한쪽에 불평등한 사회가 있고, 다른 한쪽에 그 불평등 속에 사람들을 배분하는 선발기제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보는 것은 학벌권력을 공고하게 하는 상징조작입니다. 선발기제 자체가 하나의 권력기제가 된 것이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입니다.
김종엽 사회의 불평등은 우리가 뜯어고쳐야 하는 것이지만, 현재 우리가 불평등한 상태에 있다고 할 때 그것을 배분하는 장치가 대학 입학시험이든 대학 졸업 후의 입사시험이든 어딘가에 위치하게 되는 것 아닐까요.
김상봉 아닙니다. 그것이 어디에 위치하는가는 매우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기업과 대학을 비교해봅시다. 기업은 우리나라에 무수히 많고, 또 망할 수도 있고 흥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기업은 그 지위가 유동적입니다. 따라서 어떤 기업에 입사해서 다닌다는 것은 신분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예컨대 내가 삼성에 들어갔다가도 싫으면 현대로 옮길 수도 있고, 그것도 마땅치 않으면 창업을 해서 뜻을 펼 수도 있는 거죠. 그러니까 사회적인 불평등은 학벌에 의한 불평등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셈입니다. 학벌은 신분을 결정해버리니까 문제입니다. 학벌은 돈이면서 권력이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대학을 졸업한 직후뿐만 아니라 인생을 전부 결정하며, 자신뿐 아니라 주변의 부모나 형제, 자식의 삶에도 영향을 줍니다. 그러니 대학서열에 따른 불평등이 사회 자체의 불평등보다 훨씬 정도가 심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송호근 그 점은 저도 동의를 합니다. 우리 사회가 학력을 중시하던 것에서 학벌을 중시하는 것으로 바뀐 때가 70년대 중반 이후 대학교육이 대중화되면서라고 생각되는데요. 바로 이때에 문제점을 충분히 고민했다더라면 현재와 같은 상태는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70년대 후반부에 대학을 팽창시키지 말고 고등학교 졸업 이후 진출할 수 있는 직업학교를 다양화하는 등 여러가지 경로를 만들어줬다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하는 가정을 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전부 전문대학과 대학의 형태로 묶었다는 점이 정책의 실패라 하겠습니다. 물론 다르게 했더라도, 대학 졸업자가 엘리뜨군을 형성하는 현상이 고착화될 수 있었을 겁니다. 또 역으로 대학의 특권이 다른 쪽으로 분산됐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사태의 진행을 원천적으로 되돌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봐요. 현재 문제가 심각하지만, 앞으로는 학벌사회가 고착되거나 심화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게 보는데, 우선 그간의 학력 인플레의 결과 대학교육에 대한 투자보상률이 현격히 낮아지고 있는바, 사람들이 합리적인 투자를 고려할 때 대학교육에 대한 투자를 줄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앞으로 대학이 지식정보사회의 수요를 모두 충족시킬 수 없게 될 것이며, 그에 따라 대학에 필적할 만한 또다른 기관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전망되기 때문입니다. 그게 어떤 형태가 될지는 지금 예단하기 어렵지만, 그렇게 되면 대학의 중심성은 점차로 하락할 것입니다. 그리고 학벌사회의 폐단을 줄이기 위해서는 대학이 누리던 사회적 특권, 지식에 대한 배타적 특권을 분점해낼 기관이나 기회를 어떻게 만들어낼지에 대해 우리가 더 적극적으로 고민해야겠지요.
안상헌 학벌사회의 심화에 전체 사회의 발전경향도 작용했지만, 저는 그것에 대응하는 정부의 정책 실패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전후 베이비붐 세대가 성장하면서 강화된 학력경쟁에 대해서 정부는 중학교 무시험 진학, 고교 평준화, 대학 입학정원 확대 등 학교를 팽창시키는 방법으로만 대응했습니다. 또 학력경쟁으로 인한 고통과 불만에 대응하더라도 근시안적으로 입시제도를 바꾸는 데만 집착했는데, 입시제도의 잦은 변화는 대학의 서열을 심화하고 학벌사회를 강화하는 쪽으로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만 해도 대학은 일류대학군이 있고 이류대학군이 있고 삼류대학군이 있었지, 1등 2등 3등 대학이란 건 없었거든요. 70년대 중·후반까지 있었던 예비고사는 학생들이 일정한 점수만 얻으면 대학에 갈 수 있도록 하는 자격시험이었어요. 그러다가 이후 학력고사를 거쳐 수능시험으로 정착되는 과정에서는 몇십만명이나 되는 학생들의 석차가 매겨지고, 석차에 따라서 대학이 전형을 하면서 대학의 서열구조도 강화되었습니다. 만일 이른 시기부터 대학이 필요한 인원의 학생을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자율적으로 뽑도록 해왔다면, 지금처럼 학생들이나 대학이 점수에 의해서 서열화되지 않았을 거예요. 이런 서열화 속에서 대학은 학생선발의 자율성을 잃게 되어 대학이 원하는 학문적인 탐구열을 가진 학생들을 뽑을 가능성도 없어져버린 거죠.
학벌의 폐해를 말한다
김종엽 안선생님 지적대로 확실히 정부정책에 문제가 많았다는 점에 깊이 공감합니다. 하지만 국가정책만 해도 그리 폭넓은 선택지가 주어진 것은 아니었고, 여러 사회세력간의 힘에 의해 좌우되는 측면이 강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대학정원 정책을 좀 자세히 들여다보면 국가가 일정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박정희정권은 대학 정원, 실업계·인문계 고등학교 정원 비율과 대학의 이공계 비중을 경제기획원에서 관리하도록 했습니다. 매우 강압적인 방식이긴 했지만, 그렇게 이루어진 대학정원 관리는 산업화의 수요와 국가발전 전략에 맞추어져 있었고, 경제발전에 일정한 기능적 적합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70년대에 중화학공업화가 이루어지면서 대학졸업자의 수요가 상당히 증가합니다. 아마 송선생님이 그 학번대라서 잘 아실 텐데 70년대 중반 학번 경우에는 괜찮다는 대학을 졸업한 사람치고 취직시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모자라는 대졸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기업에서 입도선매를 하는 꼴이었지요. 제가 자료를 찾아보니, 그때 고등학교 졸업자의 생애소득을 100으로 했을 때, 4년제 대학 졸업자는 생애소득이 270, 즉 고졸자의 2.7배였습니다. 그러니까 대학을 졸업했다는 이유만으로 굉장한 사회적 보상이 주어진 겁니다. 대졸자가 많이 모자라자 전경련은 박정희정권에 대학정원을 늘려달라고 공식적으로 요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1979년 박정희정권 말기에 정부는 대학정원을 늘려줍니다. 우리는 대개 전두환정권 시절 졸업정원제 때문에 대학정원이 늘어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전에 이미 늘어났습니다. 자본의 요구가 정부정책에 큰 영향을 준 것이죠.
전두환정권으로 넘어오면서부터는 대학정원이 교육부의 관할사항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서 대학정원은 산업화전략과는 관계가 없어지고 학부모들의 수요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서 80년대 초에 대학정원이 또 늘어나게 됩니다. 아무튼 우리 사회는 좌충우돌하면서 ‘대학의 팽창’이라는 방향으로 흘러온 것 같습니다. 이제 대학정원을 제어하는 것은 출산력 감소로 인한 학령인구 감소라는 새로운 변수입니다. 대학 팽창은 대학에 갈 수 있는 기회를 늘림으로써 학력에 대한 열망을 어느정도 실현시켜주었지만, 대신 서열화된 대학들 가운데 좋은 대학에 가려는 경쟁은 격화되어갔지요. 서열체계의 병폐는 많이 이야기되듯이 천문학적인 사교육비, 학벌의 신분제적 고착과 학벌 네트워크에 의한 특권의 재생산 같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번 좌담을 준비하면서 우리 사회 학벌주의의 병리를 보여줄 수 있는 연구나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찾을 수 있는 것은 국회의원, 고급관료, 30대 재벌의 임원진, 법조계, 언론사 고위직의 몇 퍼센트가 서울대 출신이고, 몇 퍼센트가 연·고대 출신이다 하는 자료 정도였습니다. 그런 자료로도 현실을 진단할 수는 있지만, 학벌이 구체적으로 어떤 폐해를 낳는가에 대해서는 상세한 사회학적 보고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회학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움도 느꼈습니다. 우리가 경험으로 알고 있는 이런 폐해의 실태와 핵심적인 문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논의를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제 경험을 하나 짧게 말씀드린다면, 대학 다닐 때 친했던 사람이라고 해봐야 3,40명 정도인데, 졸업하니까 어떻게 친한 사람이 더 많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웃음)
안상헌 학벌집단은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에 존재하는 것처럼 같지만, 실제로 두드러지게 폐해를 드러내는 경우는 일부 집단에 국한된 것으로 보여요. 법조계·정계·학계·금융계 같은 곳이 그런 경우인데, 이런 곳일수록 권력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성향이 강하며 차별적 속성을 많이 갖고 있는 듯합니다. 요즘 부상하고 있는 IT산업의 경우는 그런 현상이 상대적으로 적어 다행이지요. 물론 벤처기업의 CEO에 대한 통계 같은 것을 살펴보지 않아서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신문지상에도 보도되듯이 IT업계에서는 중학교만 나온 사람일지라도 우수한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으면 사장이 되기도 하죠. 권력집단이거나 지배적 속성을 가진 집단일수록 학벌 네트워크가 강하게 형성되어 있지만, 그외의 경우에는 그런 현상이 덜 나타나는 것 같아요. IT산업뿐만 아니라 문화사업이라든가 대중문화산업의 꽃이라고 하는 연예계 쪽에도 학벌은 크게 작용하지 않는 것 같거든요. 그런 것으로 봐서는 결국 우리 사회에서 학벌문제가 심각한 경우는 몇군데에 집중되어 있고, 문제가 집중된 곳이 우리 사회의 지배구조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김종엽 저는 조금 이견이 있습니다. IT산업에 대해서 제가 들은 바로는, 초기의 기술개발 단계나 이럴 때는 학력이 전혀 관계가 없지만 기업의 모양을 갖추고 재정을 충당해야 할 때 가장 핵심적인 것이 국가지원 기업으로 선정될 수 있는가, 언론의 조명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최근의 각종 게이트들에서 잘 드러나듯이,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언론계나 관료와의 네트워크가 크게 작용합니다. 그래서 가장 첨단적인 것이 심각한 구악(舊惡)과 연관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연예계에서는 서울대나 연·고대의 인맥이 힘을 못 쓰기는 하지만 중앙대·동국대·서울예대 같은 그 나름의 강한 학벌이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압니다.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영역에서 학벌로 인한 심각한 병리현상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학벌문제는 상당히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안상헌 그건 저도 동감합니다. 그러나 새롭게 발흥하는 산업에서는 아무래도 신기술이 중요하고, 기업은 일반적으로 시장의 압박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연예계 같으면 인기의 부침이 있으니까, 아무리 학벌이 나쁜 연예인이라도 대중이 열광하면 각광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 학벌이 작용해도 정계나 관계, 법조계나 학계보다는 그 정도가 덜할 거고, 시장의 압력 때문에라도 학벌로부터 좀더 자유로운 영역이라고 해야겠지요.
학벌, 효율성 추구의 부산물인가 봉건적 지체현상인가
송호근 학벌의 작용방식이나 심도가 사회영역별로 다양하다는 말씀은 맞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사회생활 전반에서 학벌이 비공식적인 제도로, 그것도 매우 비중있게 작용하는 것 같은데, 이게 반드시 대학문제만도 아닌 듯합니다. 지방에 가면 지방 나름대로 고등학교를 중심으로 학벌사회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광주일고, 경남고, 경북고, 춘천고 출신자들은 대개 지방사회의 엘리뜨군을 형성하고 있죠. 학력이 학벌로 전환되고, 이것이 연고주의와 결합되면서 엘리뜨 충원이나 배출 기제로 사회조직의 각 영역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다른 나라에서도 다 나타나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유독 심한 이유는 이런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을 소유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프리미엄이 매우 크기 때문이죠. 병원에 가거나 재판을 받거나 하는 사회생활의 중요한 영역에서 학벌이라는 사회적 자본이 작용합니다. 최근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에서 했던 조사를 보면, 사회적 자본은 역시 상층에 있고 명문대학을 나온 사람일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개인의 지위와 소득에 더해 개인이 학벌을 통해 가진 사회적 자본이 계급형성의 기제로 작용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학벌이란 그냥 사람들간에 형성된 교우관계가 아니라 명백한 불평등 기제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학벌 같은 사적인 신뢰의 연줄망 내지 사회적 자본이 이토록 우리 사회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일까요? 저는 ‘불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불신이 높은 사회에서 신뢰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학벌, 연고, 또는 연고와 결합된 학벌일 가능성이 많고, 사람들이 가장 쉽게 그걸 선택하죠. 상하층을 막론하고 한국사람들이 가장 많이 연루되어 있는 모임은 동창회나 향우회 같은 연고형의 모임입니다. 이런 모임들의 의도는 사회적 자본과 정보를 그 집단 안에서 축적하고 순환시키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의 행위패턴은 행위자의 관점에서는 매우 합리적일 뿐 아니라, 나름의 효율성을 지니기도 합니다. 거래비용이나 교섭과 동의를 구하는 비용을 절약해주기 때문에, 신속한 판단과 결단 그리고 투자를 필요로 할 때 높은 효율성을 보이지요. 물론 그것은 그 집단 내부에서의 효율성이고 바깥집단에 대해서는 배타성으로 작용하므로 전체 사회의 불신은 더 높아집니다. 이런 점은 우리 사회의 경우 국가발전 전략에서도 나타나는데, 70년대 박정희정권의 국가발전 전략이 그 예입니다. 예를 들면 산업화정책 수립시 산업은행, 한국은행, 경제기획원의 관료 등이 결합해서 자기네들끼리의 인적 네트워크로 굉장히 신속한 결정을 했어요. 물론 그런 식으로 신뢰를 빨리 구축하고 거대 규모의 집중투자를 한 결과, 우리 사회의 상층부에는 지독하게 강한 연줄망이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아까 안선생님이 지적했듯이, 우리 사회의 지배집단이 이런 모습을 강하게 보임으로써 하위집단까지 이런 양태를 보이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김상봉 저는 송선생님의 분석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사회적 자본, 거래비용, 이런 서구에서 만들어진 개념은 우리의 학벌문제를 설명하기엔 부적합한 개념입니다. 옛날에 빗대면, 우리 사회에서 서울대를 나온 사람은 왕족이고, 연·고대나 비슷한 상위권 대학들을 나온 사람은 귀족입니다. 그렇게 대학서열에 따라 신분이 층층이 정해지는 게 현실입니다. 앞에서 이야기가 나왔듯이 대학 못 나온 남자는 대학 나온 여자와 결혼도 못합니다. 과거에 양반과 상놈이 통혼 못한 식이죠. 학벌에 의한 차별이 계급차별보다 더 나쁜 까닭은, 계급은 사회적인 범주이지 개인에 고유하게 귀속하는 범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재벌 총수도 완전히 망하면 그 순간 노동자계급에 속해서 공장의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나사를 돌려야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학벌은 한번 정해지면 평생 가는 거잖아요. 과거처럼 핏줄로 정해지는 신분이 아니라는 것뿐이지, 한번 정해지면 그건 준(準)신분입니다. 이런 심각한 신분제를 분석하는 데 사회적 자본이나 거래비용 같은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문제를 호도할 뿐입니다.
그리고 근대사회의 발전과 학력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그렇다 쳐도, 근대성이나 합리성 또는 효율성을 학벌과 연결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학벌, 이건 근대성과는 상관없어요. 학벌은 봉건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겉으로는 근대사회에서의 전문성을 익히고 습득하기 위한 학력과 맞물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 내용을 보면 대학이 서열화되어 있는데다가 배타적으로 문중화되어 있습니다. 외면적으로는 근대화의 견인차였던 것처럼 보이고 또 그런 측면도 없진 않지만, 본질적으로는 과거부터 내려온 한국적인 가족주의이자 문중주의입니다. 근대적 인간은 단독자 혹은 자율적인 시민으로서 이 세계에 존재하며, ‘일’과 ‘뜻’으로 사람을 만나고 또 헤어지는 존재입니다. 이런 근대적 인간을 형성하는 계몽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봉건적인 공동체 관계가 온존하게 된 것이죠. 학벌은 문화적 봉건성을 보여주는 봉건적 지체현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나 낯선 사람을 만날 때 제일 먼저 알고 싶은 것이 바로 어느 대학 출신이냐는 거잖아요. 상대가 어느 대학을 나왔는가에 따라서 바로 규정을 해버린단 말이죠. 대학에서 교수를 뽑을 때도 자기와 뜻이 같든 그렇지 않든 아무 상관이 없고 그냥 자기 후배면 되는 세상이니까요.
김종엽 그런데 저는 근대 이념의 차원에서는 학벌주의가 봉건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비판이 충분히 가능하고 또 올바르지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근대사회는 언제나 자신의 작동을 위해서 봉건성을 활용해오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성차별주의가 대표적인 현상이랄 수 있겠지요.
안상헌 학벌이 신분제적인 속성이 강하고 봉건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주장과, 불신의 벽이 높은 사회에서, 또 제도가 공정하지 못한 사회에서 학벌 중심의 연고나 네트워크가 기능적으로 또 합리적으로 선택된 것이라는 주장이 크게 상충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학벌뿐만 아니라 군벌, 재벌의 경우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되었지만, 요즘 와서 합리화 대상이 되고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결국 학벌문제도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대상이 된 거죠. 사회의 구조가 합리화되고 제도적 신뢰도가 높아지면, 특히 선발과정이나 사회 진출과정이 합리적이면서 투명·공정하게 이루어지면, 학벌은 의식 측면에서는 잔재로 남겠지만 그것이 야기하는 문제는 상당한 정도로 해결되리라고 봐요.
김상봉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부조리한 사회현실을 개인의 힘으로 어떻게 고치겠어요? 그리고 이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선택하는 모든 전략을 합리적이라고 한다면 세상에 합리적이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를테면 일류대학을 못 가면 사람 취급을 못 받는 사회에서 학생들이나 학부형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일류대학 입학을 위해서 애쓰는 것을 합리적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모든 이기적 행위도 합리적인 것이죠. 하지만 참된 의미의 합리성은 전체 사회씨스템이 얼마나 합리적이냐, 또는 얼마나 정당하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개인들이 이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 효율적으로 행동한다는 의미에서의 합리성은 근대성과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학벌의 확대재생산과 서울대 문제
김종엽 근대사회와 학력 그리고 학벌의 연관관계는 정말 복잡한 문제 같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연구가 좀더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러나 우리 사회의 최상위층이 학벌 중심의 강한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자신을 재생산하며, 그것이 그 아래층의 행동도 똑같게 만든다는 사실에는 어느정도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이 최상위층으로부터 시작되는 학벌의 확대재생산 문제를 살피자면, 서울대 문제를 논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안선생님이나 김선생님이 하실 이야기가 꽤 있을 것 같은데요.
안상헌 학벌문제가 서울대 문제로 귀착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일단 우리나라의 지배권력이나 지배집단에서 서울대 출신자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고 거기서 배제된 집단들이 굉장한 좌절감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육사도 지배층의 중요한 한 축을 차지했지만 이제는 전혀 안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서울대 문제를 논의할 때 주의할 점은 서울대 출신자 문제와 서울대라는 기관을 좀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다 나름대로 문제가 있지만, 그 수준이 다르다고 봅니다. 서울대를 나와서 지배집단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경우, 일단 그런 연고 네트워크를 통해서 지배층에 귀속되어 기득권을 유지하는 집단이라면, 서울대라는 기관은 학벌주의의 최대 수혜자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최대의 피해자로도 보입니다. 학생 선발과정에서 수능 상위 점수자 5천명을 싹쓸이하고, 이를 통해서 대외적인 명성과 기득권을 누린다는 점에서 서울대는 최대의 수혜자이지요. 그러나 거기에 들어간 학생들이 실제로 서울대의 교육제도나 교육과정을 통해서 개인의 능력을 제대로 키웠는가 하면 그건 아닙니다. 서울대 학생들은 사실상 고시공부든 취직공부든 전공과정과는 무관하게 거의 독학을 합니다. 물론 아예 전공 공부를 등한시하는 학생도 매우 많고요. 그들은 내용과 수준 면에서 보면 타대학과 별 차이가 없는 교육을 받으면서도, 사회 진출시 학벌 네트워크에 들어가는 것을 통해서 엄청난 이득을 얻는 거지요. 이런 점에서는 서울대가 서울대 출신의 학벌 네트워크의 힘에 기대어 대외적인 기득권이나 명성을 유지해왔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다보니 결국 서울대는 대외적으로나 대내적으로 대학의 본래적인 교육기능을 수행하는 데에는 매우 태만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측면이 강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서울대는 알게 모르게 피해자인 셈이지요.
우리나라에서 서울대 학부나 대학원에 들어가기는 매우 어려워요. 그런데 외국 유학의 경우, 지방대학 출신이나 비서울대 학생들이라도 기본적인 능력만 있으면 입학허가를 받지요. 외국에 가서 그쪽에서 가르치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거의 낙오하지 않고 전부 학위를 받아 돌아옵니다. 외국 대학은 학생이 열심히 따라가기만 하면 일단 일정한 자격에 도달하게 해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학교가 교육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는 거지요. 그러나 서울대는 그렇지 못한 실정입니다.
또, 과거 대학입시를 자율적으로 시행하던 경우에는 서울대가 일류대학 중에 좀더 나은 대학 정도로만 평가되다가, 70만명이나 되는 입시생의 서열이 매겨지고 서울대가 상위 석차의 학생을 독식하다보니까 결국 서울대 학벌주의는 증폭되고 강화되었어요. 입시정책과 관련된 문제지만 이런 점에서 서울대가 대학서열화의 정점에 서게 되는 측면이 있어요. 학생들의 자질이라든가 적성, 소질이 중요하고, 특히 기초학문이라든지 인문사회학 같은 비인기 학문의 경우에는 학생들이 학문적인 관심과 열정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중요한데, 이런 것들이 선발시 전혀 평가되지 못하니까, 입학하자마자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아서 전과(轉科)를 희망하는 학생들이 서울대 생활연구소에서 내놓은 자료를 보면 입학생 전체의 반을 넘는다고 해요. 그리고 고등학교에서 진학지도를 할 때 학생들의 전공을 먼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학생들이 들어갈 학교부터 정한다는 거예요. 고등학교에서 서울대에 몇명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교장이나 교사의 실적이 평가될 정도니까, 입시와 관련해서도 서울대를 중심으로 하는 학벌주의가 더욱 증폭된 측면이 있어요.
김종엽 서울대는 학벌주의의 최대 수혜자이자 피해자이다, 인재를 독식하고 그것에 안주해서 내부의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안선생님의 말씀은 서울대에 재직하고 계신 송선생님이 듣기에는 상당히 뼈아픈 얘기일 것 같은데요.(웃음)
송호근 제가 오늘 꼴이 아주 우습군요.(웃음) 학벌주의가 문제는 문제입니다. 학벌주의가 정말 좋은 인적 자본을 아예 원천봉쇄하는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학벌주의나 학벌사회의 핵심이 서울대 문제인가에 대해 저는 회의적입니다. 제가 지금은 서울대에 있지만, 지방대학에서 한 5년 동안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 지방대학에 재직중이라고 해도 같은 얘기를 했을 것 같아요. 학벌사회를 강화하고 심화시킨 것에 대해 서울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회적 비판은 일리가 있고 설득력도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서울대를 향한 대부분의 비판은 사실 서울대 문제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더욱 크게는 한국 대학교육 전체의 문제에 대한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학벌사회가 자꾸 심화되고 서울대가 그 정점에 놓이는 것은, 우리 사회가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에 취업시장과 연계된 여러가지 대안적인 기관을 만들어내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국민의 실패일 수도 있고 정부의 실패일 수도 있어요. 아무튼 취업시장과 노동시장에서 여러가지 평가기준을 만들어내는 데 전반적으로 실패했는데, 그것을 서울대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회피일 수도 있다고 봐요.
다른 한편 저는 서울대의 독점력이 강화되고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서울대의 독점력은 과거에 비해서는 떨어졌어요. 70년대에 우리 사회 고위직은 서울대 출신이 장악했지만, 지금은 그 비율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다른 대학들의 수준이 향상되면서 서울대가 갖고 있던 독점적인 지위가 상대적으로 떨어진 거죠.
다음으로는 내부구조의 문제가 있는데, 그건 안선생님이 정확히 지적하신 것처럼 서울대가 역할을 제대로 못한 탓입니다. 그런데 제가 문제를 자꾸 희석화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문제는 서울대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서울대를 포함해서 여러 대학들이 자구노력을 기울였지만, 우리나라 대학 대부분이 제대로 된 교육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된 데는 제가 보기에 교육부에 의한 대학의 관료적 통제 탓이 큽니다. 최근에 나온 국립대학교법 개정안을 보면 시대에 역행하는 발상이 들어 있는데, 그 핵심의도는 대학에 대한 교육부의 통제 강화입니다. 서울대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고 인정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서울대가 스스로 자신의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해본 적은 불행하게 한번도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내부적인 제약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첨언하면 저는 한국에서 엘리뜨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이 필요하고 봐요. 물론 그것은 정당성을 구비해야겠죠. 문제는 서울대가 실제로 엘리뜨를 독점하고 있으면서 그들을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서울대는 이 점에 대해 깊이 반성해야 하지만, 서울대를 ‘국민적 자산’으로 길러내려는 애정어린 지원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벌사회로 인한 모든 폐단의 책임이 서울대에 있다고 몰아붙이면서 다른 대안들을 만들지 않는다면, 또다른 기준의 학벌이 생겨날 것이고 그렇다면 학벌사회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김상봉 오늘 송선생님과 제 의견이 참 많이 대립하는 것 같습니다. 서울대가 교육부의 간섭으로 인해 자기혁신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이야기신데, 그 고충은 알겠지만 밖에서 보기엔 잘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서울대가 지금처럼 헤게모니를 쥘 수 있었던 데는 국가의 지원이 큰 몫을 차지했습니다. 국가의 지원을 많이 받은 대학이 국가의 간섭을 탓하는 것은, 글쎄요, 얼마나 설득력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엘리뜨 교육도 다시 한번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그건 엘리뜨를 키우면 우리 사회 전체가 이득을 본다는 전제가 있을 때만 가능한 것 아닙니까? 엘리뜨가 사회에 기여하기를 바라고 국가와 국민이 다른 일반 사립대학에는 주지 않는 유형, 무형의 지원을 서울대에 해주었는데, 과연 서울대를 나온 엘리뜨들이 그런 기여를 했습니까? 엘리뜨는 필요하지만, 왜 어느 한 대학이 독식하다시피 하고 또 사회는 그 대학을 계속 지원해주어야 하는 거지요? 예전에는 그것이 어느정도 일리가 있었다고 해도 지금에 와서는 곤란합니다. 학벌의 폐해가 이렇게 심한 지금 상황에서는 말입니다.
다음으로 10년, 20년 전에 정책적으로 대학만이 아닌 다른 유력한 대안을 만드는 데 실패해 학벌문제가 심화되었다고 말씀하셨는데, 누가 그것에 실패했습니까? 죄송한 얘기지만 사실 서울대 출신이 실패한 거예요. 그러니까 해방 이후 나라의 경영을 서울대학 출신, 혹은 경성제대 출신들이 맡아서 해왔는데, 송선생님처럼 서울대 계신 분이 남 탓하듯이 하시는 그런 말씀을 일반 국민들이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그리고 저는 송선생님과 달리 서울대 개혁이 학벌사회 개혁의 핵심고리이며, 제2의 서울대를 걱정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장회익 선생님께서 ‘서울대 학부 개방안’이란 개혁안을 얘기하실 때 제가 “그렇게 서울대가 10년 동안 학부생을 안 받으면 연대나 고대가 똑같은 짓을 할 텐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분 말씀이, “아니 우리 사회나 우리 정부 그리고 서울대 자신이 학벌문제를 고민해서 내 제안이 실현될 정도가 된다면, 그 다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할 까닭이 무엇이겠소?” 하시는 겁니다. 저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아직 어린애고 이분은 원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분은 운동의 시간성과 역사성을 생각하셨던 거지요. 사람이 첫 단추를 제대로 꿸 수 있다면 두번째 단추도 잘 꿸 수 있는 법입니다.
서울대 문제를 보는 올바른 관점은?
김종엽 송선생님 얘기는 서울대 비판론자들의 주장이 과도하거나 확실한 근거가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고, 김선생님은 학벌사회에서 꼭지점에 있는 대학인 서울대의 개혁이 절실하다는 점을 지적하셨다고 봅니다. 저는 김선생님 의견에 동감하는 편인데, 그와 관련해서 몇가지 더 보충해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제가 보기에 서울대는 입학생 수가 지나치게 많은데, 아마 전국 최대 규모일 겁니다. 교수 숫자나, 대학의 규모도 전국 최대입니다. 서울대가 수능을 기준으로 하면 1등부터 5천등까지의 학생을 거의 싹쓸이하다시피 하고, 그렇게 해서 서울대를 나온 사람들이 정치계·관료계·경제계·학계에 다 포진합니다. 이는 사실 세계적으로도 드문 현상이죠. 프랑스의 예를 들면, 고등사범대학(Ecole Normale Supérieure)만 해도 그것은 학계의 엘리뜨를 배출할 뿐이고, 관계의 엘리뜨는 국립행정학교(ENA, Ecole Nationale d’Administration) 같은 데를 통해서 배출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는 엘리뜨의 과점체제라고 생각됩니다. 일본의 경우도 우리보다는 훨씬 더 과점체제고요. 또 중국에도 뻬이징(北京)대학과 칭화(淸華)대학이 어깨를 겨루고 있습니다. 미국도 잘 아시다시피 아이비리그는 여러 개의 대학으로 이루어져 있고, 영국도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가 양대 산맥을 이룹니다. 독일은 대학이 평준화되어 있으니까 더 할 얘기가 없고요. 그래서 저는 송선생님 말씀처럼 엘리뜨 교육이 필요하다 해도 서울대가 모든 분야의 엘리뜨를 배출하는 것이 좋은 일인가에 대한 의문은 충분히 제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상헌 서울대가 모든 분야의 엘리뜨를 배출함으로써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분야의 엘리뜨간의 광범위한 유착이 형성되는 것은 큰 문제이긴 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까도 지적했듯이 서울대의 문제를 다룰 때는 기관의 문제와 서울대가 배출한 사람들의 문제를 분리해서 생각합니다. 서울대 문제를 외부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 두 가지 문제에서 곧잘 착종을 일으키고, 서울대 문제를 내부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전자의 문제, 즉 기관으로서의 서울대 문제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서울대 내부인사들이 후자의 문제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사회의 비판을 경청해야 한다고 보지만, 서울대 내부에서 나오는 이야기들도 중요하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까 제가 서울대도 피해자라고 말씀드렸는데, 대학에 대한 관료적 통제의 폐해는 우리 대학 전반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헌법 31조에 명시되어 있는 대학의 자치 이념은 교육관계법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실현된 적이 없습니다.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선 이래로 대학은 늘 관료적 통제하에 있었죠. 그러니 서울대가 구체적인 대학교육의 이념이라든지 목표를 갖고 자신과 학생들을 키울 수 있는 기회는 없었습니다. 서울대 자체가 대학의 자율적 발전을 위해 정치권력에 맞서 열심히 싸운 것도 아니지만 말입니다. 유일하게 시도해본 것이 몇년 전의 ‘서울대학특별법’ 제정 시도였지요. 물론 그것이 서울대가 정부로부터 특별지원을 받는 것을 핵심내용으로 했기 때문에 여타 국립대학이나 사립대학으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고 무효화되기는 했습니다만. 얼마 전 서울대학에서 자체 발전계획안이라고 내놓았는데, 그것도 여전히 강력한 교육부의 통제를 고려하면 실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이더군요.
송호근 안선생님께서 많이 도와주시는군요. 학벌주의와 서울대 문제를 등치시키는 것은 대중적 관점에서는 호소력이 있지만 실제로는 부풀려진 면이 많습니다. 아무튼, 서울대 출신자들의 학벌 네트워크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기관으로서의 서울대의 개혁이 요구됩니다. 즉 서울대 내부구성원의 개혁의지와 그것의 실현을 위한 환경조성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문제의 모든 원인과 책임이 서울대 내부에 있다고 한다면 굉장한 반발이 일어날 거예요. 물론 서울대 교수들이 교수사회 내에서는 상대적으로 이득을 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서울대가 학벌사회를 만들어내는 데 일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대 내부인사들은 실제로 그것을 개혁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했다는 지적도 정당합니다. 아카데미 내에서 보이는 교수 충원의 극심한 동종교배(inbreeding) 현상 내지 패거리 문화도 비판받을 일입니다. 비판받을 일은 이외에도 매우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만을 추궁하며 서울대를 맹공하는 것은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울대 비판에 집중하기보다는 서울대 학벌주의 문제를 사회적인 차원에서 조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상봉 그러나 그렇게 사회적 차원에서 조망하는 것은 자칫하면 논의를 남 이야기하듯 만들 수 있습니다.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서울대 출신자들이나 서울대 내부성원들이 서울대에 대한 여론의 질타를 좀더 깊이 경청하고 자기 문제로 아프게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울대 ‘문중’ 사람들이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에 들어와 아무 생각 없이 주어진 길을 따라 지금까지 왔는데, 생각해보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엄청난 학벌 메커니즘의 수혜자였구나, 이건 부당하구나, 사회 전체적으로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구석이 너무 많구나” 하고 각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개혁의 동기가 생겨나지 않겠습니까?
서울대 개혁을 위한 다양한 논의들
김종엽 서울대를 나온 많은 사람이 김선생님의 지적에 공감하리라고 봅니다. 송선생님도 그렇다고 생각하고요. 하지만 서울대 출신들 개개인은 자신들이 커다란 특혜를 받았다는 것은 수긍해도, 그 책임이 자신에 있느냐의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을 달리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것이 앞으로 책임감을 갖는 자세를 보이지 않겠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런데 학벌사회 문제가 서울대 문제와 직결되는 담론의 형성과정을 보면, 1995년부터 시작된 서울대특별법 논의의 영향이 컸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정형석 교수가 「서울대 폐교론」을 언론에 기고한 것이나 강준만 교수가 『서울대의 나라』라는 책을 쓴 것이 1996년이죠. 군사정권의 정치적인 의도를 반영한 관료적 교육통제가 1987년을 기점으로 어느정도 누그러지고 문민정부가 등장하자 서울대는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적극적으로 발전안을 마련하기 시작한 것 같은데, 그 첫번째 작품이 서울대특별법안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서울대가 당시까지 누리던 특권을 오히려 더 강화하려는 것으로 비춰졌기 때문에 강한 사회적 반발이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학벌사회 문제의 촛점이 서울대 문제로 맞춰지는 데에 서울대가 자초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울대특별법안은 어처구니없다라는 것이 그 당시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정서적 반응이었다고 봐요. 그것 때문에 서울대를 여러가지 방식으로 개혁하고자 하는 담론들이 나온 것이지요.
안상헌 서울대특별법은 결국 서울대로서는 고육지책이었다고 봐요. 교육관료가 국립대학 운영의 핵심사안들을 완전히 틀어쥐고 있는데,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서울대의 경우에는 ‘서울대학교설치령’이고 여타 국립대학의 경우에는 ‘국립학교설치령’입니다. 이 두 설치령은 국립대학을 정부가 시시콜콜 틀어쥐고 꼼짝 못하게 묶어놓는 이중삼중의 사슬이에요. 대학의 자율적 발전과 관련되는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가 대학에 배정된 예산을 대학이 자유롭게 편성해서 집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서울대뿐만 아니라 모든 국립대학이 그런 것을 전혀 할 수 없게 돼 있습니다. 예컨대 국립대학에서 건물을 하나 짓는다 하면 구체적인 안을 가지고 교육부에 예산을 신청해야 하는데, 교육부 다음에는 재경부로 가서 재경부의 대학예결담당관의 도장을 받아야 하고, 다음에는 그 안의 국회 통과를 기다려야만 하거든요. 학과 하나를 새로 만들거나, 정원 하나를 늘리려 해도, 설치령의 조항이 바뀌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사권과 예산권을 대학에 넘겨달라는 것이 ‘서울대특별법’의 구상 당시 의도였습니다.
그러나 법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것이 서울대 장기발전계획과 얽히면서 결과적으로 서울대가 욕심을 많이 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서울대가 독점적 지위를 누린다는 의심을 받고 있던 터에, ‘서울대특별법’이 제정되면 서울대의 지배와 독점이 더 강화되지 않겠느냐 하는 비판이 쏟아졌고, 그래서 그 안은 실현되지 못했지요. 저는 그 당시에 대학의 자치를 확보하는 일은 서울대만의 문제가 아닌만큼, 국립대학 전체를 꼼짝 못하게 하는 국립학교설치령도 함께 혁파하고 서울대와 여타 국립대학 모두를 아우르는 새로운 국립대학 관련 규정을 마련하자고 주장했습니다. 한데 그런 주장에 대해 서울대가 반대를 했어요. 왜냐하면 타 국립대학과 서울대는 다르다는 거죠. 확실히 서울대 안에는 강한 특권의식이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서울대학특별법’안은 한편으로는 서울대가 교육부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울대가 타 국립대학이나 사립대학과는 다른 특별한 지위를 유지하려는 것이었지요. 서울대는 그후에도 발전방안을 모색할 때면 늘 정부로부터의 특별예산 지원을 거론했습니다. 서울대가 전체 사회나 교육발전에 어떻게 이바지할 것인가 하는 데보다는 다른 대학과 차별화해서 서울대학을 세계의 경쟁력있는 대학으로 키우는 쪽에만 관심을 기울인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서울대의 나라’ ‘서울대 공화국’ 같은 얘기가 나오고 서울대에 대한 비판이 본격적으로 불붙은 거죠.
송호근 그 당시 제기된 ‘서울대 망국론’이라든가 ‘서울대 공화국’ ‘서울대 폐지론’ 등등의 얘기는 사실 서울대특별법안에 드러난 특권의식에 대한 굉장히 강력한 비판이면서 저항이었죠. 저는 그 점에서는 전적으로 동의하는데요. 그후에 김상봉 선생님이 하시는 ‘학벌 없는 사회’ 같은 운동단체가 형성되는 등 진전이 있었지만, 문제를 어떠한 형태로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담론은 그리 활발하게 전개되거나 사회적 합의를 형성하며 정교화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또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서울대가 어떤 식으로든 개혁에 나서야 하는데, 안선생님 말씀대로 서울대가 자율성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뭔가 변신을 이루고자 해도 그럴 수 있는 힘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회의적입니다.
김종엽 저는 학벌사회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울대 개혁이 필요하지만, 서울대 개혁은 나름의 합리적 원칙에 입각해야 하며, 그 원칙은 국민적인 제도로서 대학을 재구조화하는 관점에서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서울대를 개혁하면서 대학제도 전반의 개선을 꾀하고 그것이 학벌사회 해소로 이어지는 길을 모색하자는 것이지요. 이와 관련해서 우선 검토해야 할 점이 서울대를 포함하여 국립대학 체제 자체, 그리고 그것과 당연히 연동되는 국립대/사립대 체제인 것 같습니다. 그것과 더불어 지금까지 제안된 다양한 서울대 개혁안들에 대해 한번 점검해봤으면 합니다. 기존의 개혁안들은 방식은 다양해도 서울대 축소안이 지배적인 것 같습니다. 서울대 폐교론도 있기는 하지만, 그건 상당히 구호적 성격이 짙다고 여겨지며 현실성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서울대 문제 해결을 서울 중심적인 발전이 낳는 문제의 해결과 연계하기 위해서 서울대 이전론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대학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물질적 실체이며, 많은 수의 직원들이 그 공간을 중심으로 한 통근거리 내에 거주하면서 생활하고 있는데, 이전은 관련 당사자들의 반대도 반대이고 그 비용도 천문학적이어서 현실성은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방식이 되든 축소론은 한번 구체적으로 검토해볼 가치가 있는데, 이 점과 관련하여 선생님들의 의견들을 들어보았으면 합니다. 10년 동안 서울대가 학부생을 받지 말자는 장회익 선생님 안은, 얼마나 현실성이 있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와는 별도로 서울대 교수가 아주 구체성 있는 안을 내어 서울대 개혁을 논했다는 점에서 한걸음 진전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안선생님은 장회익 선생님에게 자문을 많이 해주셨으니 그때 가졌던 생각들이나, 되돌아보건대 짚어봐야 할 부분들에 대해 말씀해주시죠.
안상헌 국·사립체제와 관련해서는 ‘국립대 일원화론’과 ‘사립대 일원화론’이 모두 주장되고 있습니다. 먼저 국립대 일원화론은 프랑스나 독일 식으로 모든 대학을 국립대학으로 만든다는 것인데, 어마어마한 비용이 드는 것도 문제지만 사학재단의 반발도 대단할 것이기 때문에 장기적인 정책과제라면 몰라도 지금 당장은 어렵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리고 사립대 일원화론은 국립대학 민영화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다른 측면보다는 교육을 시장원리에 맡기게 되는 것이 문제라고 봐요. 결국 시장논리에 맡기면 수익성이 있는 분야는 발전하고 그렇지 않은 분야는 폐지되겠지요. 그러잖아도 지금 기초학문이 붕괴된다고 하는데 시장논리에 따르면 모 대학처럼 철학과가 없어지는 사태까지 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사립대 일원화론은 서울대 개혁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서울대는 학벌 프리미엄이 크기 때문에 사립대학이 되어 등록금을 두세 배 올려도 입학할 사람이 많겠지만, 지방 국립대학은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국립대학은 각 지역에 고루 분포되어 공교육적 기능을 수행하면서 지역의 균형발전에도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를 민영화했을 때 그런 기능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죠. 그래서 국립대 민영화론은 실현 가능성은 있겠지만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외에 ‘국립대학 통폐합안’이 있는데, 이것은 프랑스처럼 빠리 1대학, 빠리 2대학, 이런 식으로 하자는 발상인 것 같아요. 그렇게 했을 때 막상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그 경우엔 국립대학과 사립대학의 역할을 각각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서울대 폐지론이나 이전론 등에 대해서는 사회자의 의견과 같고요.
장회익 선생님 안은, 앞으로 몇년 동안 서울대에서는 학부정원을 지방의 10개 거점대학으로 완전히 넘겨주어 학부 졸업생을 내지 않는 대신에 각 지방 국립대학에서 서울대로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개방적인 강의를 해보자는 것인데요. 이 안은 무엇보다도 서울대 내부에서 제기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생각해요. 물론 입시과열로 인한 살인적인 사교육비 문제와 초·중등 교육의 파행성에 대한 하나의 처방이 될 수도 있고요. 뿐만 아니라 대학교육의 전반적인 부실화, 대학생들의 수학(受學)능력 저하, 대학생들의 학문에 대한 열의의 실종 등과 같은 대학교육의 내부적 위기에 대해 문제제기하면서 그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진지하게 논의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참신한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대학문제는 대학 스스로 풀어야지 교육부에 의존해서 풀 수는 없다는 측면에서, 대학 안에서 자율적으로 나온 이 방안을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국립대학으로서 서울대는 필요한가
김종엽 안선생님은 국립대학을 민영화하는 것에 대해서 상당한 거부감을 표현하셨는데요. 서울대가 서울대특별법을 구상하면서 탈관료화를 노렸을 때, 이것은 공영화를 시도한 것이라고 생각돼요. 그러니까 사립대학처럼 재단 주인이 있는 구조는 아니라 하더라도 자체 운영을 할 수 있도록 이사진이 동창으로 채워지고 대학교수가 이사진에 일부 들어가는 식으로, 국가의 재정적인 지원은 이어지지만 독립채산제를 시행하는 공영화 모델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탈국가화를 곧장 민영화라고 생각하지 말고요.
더불어 현재와 같이 세금에 의해 국립대학이 운영되는 체제가 어떤 정당성을 지니며, 어떨 때 그 정당성을 충족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현체제에서 교육세는 국민 모두가 내는데 그 이익은 국립대에 들어간 학생들만 보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 국립대학 체제의 정당성 제고를 위해서라도, 국립대학의 기능이 무엇인가 그리고 국립대학 체제 안에서 서울대는 어떤 위상을 가지며 어떤 기능을 해야 하는가가 우선 논의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런 문제를 포함하여 송선생님께서 서울대 개혁론에 대한 서울대 내부의 반응, 그리고 서울대 내부에서 제기되는 개혁론, 그리고 장회익 선생님 안에 대한 서울대 내부의 여론 등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시지요.
송호근 학벌주의 문제에 본격적으로 접근하려면 대학교육 자체 그리고 교육제도 자체의 문제를 논의해야 합니다. 그래야 거기에서 서울대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답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습니다. 개혁의 전제는 역시 자율성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대 교수들한테 정부의 지원을 다 끊고 알아서 한번 해보라고 하면 얼마나 많은 교수들이 찬성할지는 모르겠어요. 혹시 잘못했을 때 적자가 생기고, 실패가 거듭되고, 이것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불안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율성을 원하면서도 막상 자율적으로 해나가는 것에 대해 불안해하는 이중적인 정서가 서울대 교수들에게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역시 필요한 것은 나름대로 모델을 개발하고 목적지를 설정해서 그쪽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겠지요.
국립대학 일원화론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반대입니다. 경계를 터서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왕래하고 대학간에 학생교환이 활발해지게 하는 등 문호를 개방할 필요는 크지만, 그렇다고 서울대학에서 제주대학까지 하나로 일원화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고 그로 인해 생길 새로운 문제도 예측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다고 생각합니다.
국립대 민영화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반대합니다. 사실 국립대학이라는 제도는 좋은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대학등록금은 매년 올라만 가는데, 국립대학은 대학등록금 인상을 억제하여 저렴한 가격으로 고등교육이 이루어지게 하는 조정장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입시경쟁이 심해지면서 경제력이 학업성취의 큰 배경요인이 되었기 때문에 국립대학에 부유한 학생들이 집중적으로 입학한다는 점입니다. 특히 서울대가 심하지요. 국립대가 이런 문제를 해소하고 정당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다양한 자질을 가진 학생들을 광범위하게 수용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발기준을 지금보다 훨씬 다양화해야겠죠. 예를 들어, 궁벽한 농어촌지역의 학생들 가운데 특별한 의욕이 있거나 자질이 있는 학생은 과감하게 선발해서 교육하는 것이 저는 국립대의 위상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봐요. 서울대 내부에서도 그것을 반대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김종엽 그러나 실제 서울대 입시안은 역차별이라고 할까요, 사회 소외계층을 배려하는 데 굉장히 인색하지 않습니까?
송호근 그렇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에 대해 서울대 교수들이 내부에서 광범위한 토론을 안해서 그렇지, 논의한다면 그런 방향으로 합의를 이루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정도 변화의 여력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수능 3등급이라도 좋으니 학생회장을 했다거나, 어느 수준 이상의 수학능력이 인정되면 어려운 가정의 자녀들을 받아들이는 거죠. 정원의 50〜60%까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서열화의 문제, 서울대에 대한 심화된 경쟁 등도 완화될 거라고 봐요. 과거 2,3년 동안 입시제도의 변화를 위해 서울대가 노력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데, 서울대가 이를 과감히 추진하지 못하고 다른 대학의 눈치를 봄으로써 오히려 서열화를 재촉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아무튼 문호를 넓히는 방법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축소론에 대하여는 저는 반대입니다. 어설픈 축소론은 어떤 형태로든 졸업자들이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프리미엄을 누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국민의 대학으로 다시 위상을 재정립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입니다.
문제는 ‘대학원 중심 대학론’인데, 이 점에 대해서는 서울대 내부에 상당히 높은 수준의 교감(consensus)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대학원을 확대하면서 학부를 줄인다는 것이 국가방침이고 서울대가 지향하는 바이기도 한데, 저는 개인적으로 이것도 반대합니다. 대학원 졸업자에 대한 사회적 수요도 불확실한데다, 서울대가 대학원 인재들을 독식하게 됨으로써 다른 국·사립대학의 대학원 위축을 가져올지 모른다는 점도 문젯거리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어 걱정이에요. 같은 취지에서 저는 장회익 교수의 안도 반대합니다. 그 안은 서울대 안에서 찬성하는 사람이 매우 적고, 다른 국립대학의 위상을 위협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서울대 개혁의 요체는 서울대가 가지고 있는 특권을 상당부분 포기하고 국민에게 다가가는 대학으로 변신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서울대가 물러난 자리를 두고 여타 명문대학들간의 새로운 경쟁이 심화될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습니다. 학벌주의의 원인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울대만 변신한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가지 제안하고 싶은 것은 취업시장이나 노동시장에서 대학 이외의 다양한 교육기관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독일이 가장 전형적인데, 독일에서는 고등학교를 나와서 직업학교에 갔다가 다시 칼리지(college)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노동시장에 나가서 자격을 받으면 그 자격이 인정되는 거지요. 그래서 독일에서는 칼리지나 유니버시티(university)로 간 사람을 그렇게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또 미국의 경우도 커뮤니티 칼리지를 나오면 2년 있다가 바로 유니버시티로 진입할 수 있고, 사회에서 활동하다가 필요하면 다시 커뮤니티 칼리지로 가서 교육을 받을 수도 있지요. 우리의 경우도 지금 노동시장에서 여러 교육기구들을 활성화하고 있지만, 이것들이 실제로는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고등학교 졸업 후 자기 여건이나 능력에 맞춰서 갈 수 있는 곳을 선택했다가 이후 그런 기관들 사이에서 쉽사리 이동할 수 있는 방식, 예를 들어 대학이나 전문대학으로 쉽사리 진학할 수 있게 하는 방식 등을 도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대도 교환학생을 적극 받아들여 이들에게 서울대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자격증을 바로 줄 수 있는 식으로 개방성과 이동성을 증가시킨다면, 지금처럼 가장 우수한 학생을 독점하는 학교 이미지로부터 필요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교육을 제공하는 국민의 대학으로 이미지 변화를 이룰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국립대학은 헌법소원감?
김종엽 송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국립대학의 기능에는 우선 소외계층을 수용해주는 것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굉장히 비용이 많이 들거나 인문학같이 사회적으로 보면 수요가 낮아지는 학문들을 보호하고 기초학문을 육성하는 것 등이 있습니다. 서울대 안에서도 이런 견지에서 구(舊) 문리대만 학부에 두고 응용학문들은 대학원에 두거나 외부로 방출하자는 주장을 하시는 분들도 꽤 있다고 하던데, 그런 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경영대나 법대처럼 학벌 네트워크의 이익이 집중된 단과대학 경우에는 학부를 폐지하고 로스쿨(law school)과 경영대학원으로 전환한다면, 국립대학 기능의 정립과 더불어 학벌의 폐해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송호근 그런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실제로 가고 있는 방향은 오히려 세력을 확대하는 거죠. 경영대·법대·의대·치대·수의대 등은 학부를 유지하면서 전문대학원 체제를 도입해 사회적인 영향력을 키워나가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어요. 인문대와 사회대 교수들은 여기에 반대의견이 많습니다.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오히려 과거의 모순을 누적시키고 증폭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예 학부를 없애고 전문대학원으로 가라고 제동을 걸고 있지요. 그러나 지금 서울대 내부의 지배적인 흐름은 전문대학원을 설립해서 그쪽은 그쪽대로 키우는 동시에 학부도 유지하는 것입니다. 세력확대지요.
김종엽 이런 문제들에 대해 그동안 대학 평준화를 주장해온 김선생님께서 하실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요.
김상봉 우리나라 학벌문제에서 근본적으로 제기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국립대학 문제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서울대 문제 이상으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우스갯소리로 얘기하면 우리나라 국립대학은 헌법소원감입니다. 한 사회에 사립과 아무 차이가 없는 어떤 특정한 대학군을 국립이라는 이름 아래 정부가 지원하는 것은 피교육자 개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큰 불평등입니다. 그리고 그런 혜택이 학교 다닐 때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후에도 지방 국립대학이나 서울대 출신은 같은 지역의 사립대 출신보다 더 많은 프리미엄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국·사립 이원체제엔 아무런 정당성이 없습니다. 국립대학의 필요성을 주장하시는 분들 얘기를 들어보면, 약자·소외계층에 대한 배려와 엘리뜨 육성을 말씀하시곤 합니다. 국립대학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별로 하지도 않고 있거니와, 그것은 국립대학을 통해서 이루어질 일이 아니라 약자 또는 가난한 학생들 개개인에 대한 장학금 지급 같은 것을 통해 직접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소외계층을 위해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국립대학의 존재 근거를 확고히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게는 현상황에서 생색내기로만 보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서울대학이나 여타 국립대학이 사립대학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많은 특혜를 누리는 상황에서, 그런 얘기는 지배층이 우리가 자진해서 소외계층에 신경을 쓸 테니까 우리가 받고 있는 특혜를 용인해달라고 하는 말로밖에 안 들려요.
그리고 안선생님께서 신자유주의니 경쟁력 같은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시장성 없는 순수학문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국립대학에 대한 재정지원이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국립대학이 학문을 책임져야 한다는 발상 자체가 제가 보기엔 국가주의적인 발상이에요. 또한 국립대 옹호론자들처럼 국가가 지원해서 돈이 많이 드는 순수학문을 국립대학에서 책임지도록 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연세대 같은 사립대학에서는 기부금 입학만 허락되면 국립대학보다 더 잘 순수학문을 키울 수 있다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국립대학을 없애고 난 다음의 부작용을 많은 선생님들이 염려하셨는데, 그런 부작용은 지금 우리가 앓고 있는 학벌사회의 문제와 국립·사립 사이의 원천적인 사회적 부정의에 비하면 사소한 거예요.
대학평준화 얘기로 넘어가죠. 대학평준화를 이룩하는 것, 저는 의외로 간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준화는 예를 들어 공직자쿼터제만으로도 상당정도 달성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만 되면 서울대 문제, 더 나아가서 국립·사립대학 문제도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봐요. 우리 사회에서 자기가 원하는 바를 얻으려면 관(官)을 끼어야 하고, 그러다보니까 민간기업에서도 어쩔 수 없이 상대적으로 일류대학 학생들을 뽑을 수밖에 없죠. 물론 민간기업에 쿼터제를 강요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공직, 그리고 거기에 준하는 공익기관, 더 나아가서 대학에서 사람을 뽑을 때 쿼터제를 두는 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대학평준화를 위한 공직자쿼터제
김종엽 어떤 식의 쿼터제인지 좀 자세히 말씀해주시지요.
김상봉 지금 여성할당제에 대한 논의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 경우 몇 퍼센트까지는 여성에게 고용기회 내지 직위가 배분되어야 한다고 주장됩니다. 그런데 대학평준화를 위한 쿼터제는 예컨대 고위공직자를 뽑는 고시에서 특정 학부 출신 합격자가 일정 비율을 넘을 수 없도록 한정하는 것입니다. 행정고시에서 서울대 출신은 30〜40% 사이입니다. 그리고 고대나 연대 출신은 10% 정도입니다. 그러니 이를테면 같은 학부 출신이 10%를 못 넘게 하는 쿼터제를 하자는 거죠. 저는 장기적으로 볼 때 특정 대학 출신이 5%를 넘으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 사회에서 학벌에 의한 계급적인 불평등은 크게 해소될 것이고, 고3 학생들도 “야, 이제는 서울대 안 가도 되겠다. 괜히 역차별 받아서 불이익을 볼 필요가 있나” 하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그러면 대학 입시경쟁도 대폭 완화될 것입니다.
더불어 저는 대학평준화를 위해서는 대학입시에서 변별력을 떨어뜨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수능을 쉽게 출제해서 4만명이 만점을 받아 1등급을 얻게 하면, 그 4만명이 가는 대학만큼은 평준화될 것입니다. 대학의 교육여건이 나아지고 비슷해지는 수준에 따라서 그 수를 점차 늘려 5만명, 6만명, 10만명까지 1등급을 만들어나가면 됩니다. 그래서 장기적으로는 수능을 통해 학생을 A·B·C·D·E 정도의 등급으로만 구분하면 된다고 봅니다. 수능시험으로 1등부터 꼴찌까지 줄을 세울 필요는 없다는 거죠.
저는 공직자쿼터제와 수능 변별력 낮추기, 이 두 가지만 일관되게 추구하면 대학서열을 깨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해요. 굳이 서울대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도 없어지지요. 하지만 지금 당장 서울대 문제에서 출발한다면, 가장 현실적으로 고려할 만한 대안은 역시 장회익 선생님 안이 아닌가 합니다. 돈이 드는 일도 아니고 서울대 입장에서도 자신이 가진 자원이나 자산들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계속 활용할 수 있는 거니까요. 다만 거점대학에 국립대학만 포함하지 말고 사립대학도 넣어, 지방이나 서울 어디에서든 모든 대학생들을 위한 개방된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김종엽 공직자쿼터제는 아주 참신한 발상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게 드는 첫 느낌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 요인이 학벌만은 아닌데, 불평등 요인마다 쿼터제를 도입하는 게 가능하며 합리적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성할당제, 지역할당제, 학부할당제 이런 식으로 할당제가 중첩되어가면 그 효과가 어떨지…… 이런 김선생님 제안에 대해서 안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안상헌 경북대 박찬석 총장이 지역 인재할당제를 해보려고 지난 8년 동안 그야말로 심혈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이 생각납니다. 지금 말씀하신 공공기관의 인재할당제는 결국 역차별 제도를 전격적으로 도입하자는 건데, 취지는 좋아도 실현시키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에 비해 수능의 변별력을 약화시키자는 제안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 이유는 우선 현재 수능시험이 수학능력이 있는 학생을 뽑는 올바른 잣대냐 하는 것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기 때문입니다. 수학능력의 검증이라는 본래 취지에서 본다면 그렇게 세밀한 변별력은 불필요합니다. 또 하나는 수능과 대학입시로 인한 엄청난 사교육비 때문입니다. 작년 수능이 어렵게 출제되면서 강남의 아파트값이 급상승한 것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수능 등급을 5등급으로 하거나 영국처럼 ABC 등급으로 해 입시를 대학에 완전히 맡길 때에야, 아까 송선생님이 이야기한 서울대의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 역시 원할히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수능 변별력이 줄어드는 것에 대해서 걱정을 많이 하지만, 그렇게 되면 대학은 심층면접이나 자유토론과 같은 다른 방식의 기준을 마련해서 학생을 선발하게 마련입니다. 또 수능의 등급을 줄이는 것은 대학의 서열도 완화해주고, 서울대가 인재를 독점하는 문제도 상당히 해소해줄 것입니다. 어쨌든 저는 요즘 대학들이 열을 올리고 있는 ‘수능성적 우수자 특별대우’ 또는 ‘우수학생 유치’라는 유치한 슬로건은 청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신 기본적인 수학능력을 갖춘 보통 학생을 우수 인재로 키울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고, 그에 적절한 학생을 뽑는 방식으로 입시제도를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김종엽 송선생님도 김선생님 제안에 대해 하시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데요.
송호근 많죠.(웃음) 우선 김상봉 선생님의 학부할당제라고 할까요, 그건 참신하고 근본적인 치유책을 구상한 것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아이디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근본주의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회운동은 무(無)에서도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일이기는 합니다만, 동시에 항상 현실적인 여건을 고려하고 사회 전반의 공감을 사야 합니다.
쿼터제의 가장 큰 장애는 관료들의 저항일 것입니다. 관료집단의 저항은 정치인들의 저항보다도 훨씬 영속적이고 아주 교묘하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관료집단 안에서 기득권을 행사하고 있는 고위직의 50%가 명문대학 출신이라고 합시다. 그러면 그들이 그런 안을 받아들이겠습니까? 관료사회의 경쟁력과 전반적인 수준이 떨어지는 것을 눈뜨고 보고 있을 관료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김상봉 선생님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관료제의 폐단을 강하게 비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관료들의 우수성 때문에 한국사회가 이만큼 발전해왔다고 하는 보수적인 발언도 있습니다. 실제로 성장이든 뭐든 간에 관료들이 한국사회의 돌파구를 만들어온 것은 사실이죠. 그래서 정치권이 관료제에 기대어왔어요. 그리고 우리 사회는 아직도 관료의 우수성을 유지, 확보하는 문제가 중요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지금 김선생님 제안은 하나는 해결하겠지만 굉장히 많은 문제를 동시에 발생시킬 가능성이 많은 거죠.
안상헌 저도 동감입니다. 개별 기업이나 기관에서는 나름대로 우수한 사람을 뽑는 것이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입니다. 정말 뽑고 싶은 사람을 할당제에 걸려서 뽑지 못한다면 관료사회나 공공기관 등에서 대대적으로 저항할 것입니다. 물론 김선생님 안이 학벌 폐해의 심각성을 완화하기 위한 절박한 필요에서 나왔다는 점에서는 호소력이 있지만, 선발의 공정성 내지는 선발의 준거, 기회 균등의 보장 같은 측면에서 또다른 정당성 문제를 낳을 것 같습니다.
김상봉 하지만 어떤 제도든 득과 실이 있기 마련이고 그 가운데 어떤 것이 더 큰가가 중요한 문제 아니겠습니까? 똑같이 시험 치르는데 그 성적에 의해서 합격 여부가 정해져야지 특정학교 출신이라고 해서 불이익을 받으면 되겠느냐는 이야기가 당연히 나올 수 있겠지만, 그건 다분히 형식논리적인 것이죠. 그러나 지금 저의 얘기 같은 것은 하나의 집단화되어 있는 학벌문중이 국가 경영의 큰 축을 담당함으로써 생기는, 말하자면 내부거래라든지 그런 패거리 문화의 폐해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나오는 거죠.
안상헌 그러나 만만치 않은 저항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김선생님 안이 좋은 발상이기는 하지만, 너무 인위적이고 타율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학의 개혁은 대학 자치와 자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 아니겠습니까? 김선생님 안은 어떻든 문제를 국가주의적으로 해결하자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지금까지 우리나라 교육관료들은 구체적인 정책을 수립할 때 선의의 사회여론에 의해 형성된 안들 가운데 자기들에게 득이 되는 것은 받아들이고 자기들에게 손해가 되거나 그들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은 빼버리면서 교묘하게 왜곡해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과 관련된 문제를 교육관료들이나 정부의 획일적인 정책을 통해 해결하려고 할 때 그것이 뜻하지 않은 결과를 불러올 위험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학벌사회와 서울대 개혁의 미래
김종엽 교육문제나 학벌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워낙 심각해서 얘기를 꺼내면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 밤새도록 해도 끝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문제를 고민하는 사회운동 조직이 생겨나고 있고, 전체 사회의 관심도 깊어지고 있습니다. 창비가 이렇게 좌담을 마련한 것도 그 한 예라고 해야겠지요. 그러니 점차 여론의 가닥이 잡혀나가고 서울대 교수들이 서울대가 국민의 대학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노력한다면, 어떤 형태로든 서울대 문제, 학벌문제는 해결의 길이 열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분씩 학벌사회와 서울대 개혁의 미래에 대해서 전망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안상헌 지금 사회 자체가 다원화되고 있기 때문에, 학벌사회는 지금도 해체되고 있지만 앞으로는 상당정도 급속하게 해체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IT산업 같은 신종 산업의 발흥과 이런 산업에서의 학력파괴 현상은 특히 고무적입니다. 그리고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특히 전문대의 진출은 놀랄 정도입니다. 그러나 학벌사회가 자연스럽게 해체되기를 기다리기에는 현재 학벌이 너무 권력화되고 보수화되어 있고 이로 인한 인적·물적·사회적 낭비가 큰 것이 문제입니다. 특히 교육과 관련해서 낭비의 정도는 엄청납니다. 이러한 낭비구조를 청산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 사회의 발전은 지체될 것입니다. 결국 사회적 낭비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대학교육은 물론 초·중등 교육까지 완전히 파행으로 몰아넣고 있는 학벌사회와 대학서열화는 어떤 방식으로든 반드시 조속히 청산되어야 할 우리 사회의 당면과제입니다.
그리고 서울대와 관련해서는, 학벌문제도 있지만 현재 학부교육 자체가 위기에 처해 있고 또 대학원도 여러 학과에서 미달사태가 나는 등 대학교육의 본래적 기능이 붕괴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일 것입니다. 물론 이 문제는 우리 사회 전체 대학의 문제이기도 합니다만, 학벌의 폐해와 관련된 사회의 질타도 있기 때문에 서울대는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책적으로 그리고 외부의 힘으로 서울대를 바꾸려고 하는 것은 실질적 효과를 거두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서울대 내부에서 국민의 대학으로 거듭나는 여러가지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한 상황인데, 그런 점에서 장회익 선생님 안은 매우 고무적이기는 하지만 서울대 내의 반응은 싸늘한 모양입니다. 그것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외부압력에 대한 피해의식이 크게 작용한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결론적으로는 대학 개혁, 특히 서울대 개혁과 관련해서 이전론·분산론·폐지론·민영화론 등의 주장들이 쏟아져나왔는데, 이 싯점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산발적인 논의를 광범위하게 수렴할 수 있는 논의구조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저는 교육개혁의 경우 윈윈(win-win) 전략으로 가지 않으면 실현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합니다. 서울대 죽이기 운동을 계획하면 서울대는 안 죽으려고 할 것이고, 국립대를 죽이려고 하면 국립대들이 안 죽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죠. 국립대 죽이기, 서울대 죽이기, 교수 죽이기, 이런 식으로는 개혁성과가 가시화되기 어렵습니다. 교육문제는 이해 당사자가 전국민이라고 할 정도로 다양하기 때문에, 이러한 다양한 논의를 거를 수 있는 개방적이고 자발적인 논의구조를 마련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논의구조에 정부가 개입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김상봉 저도 학벌사회는 완화될 것이라고 전망하지만, 그 의미는 안선생님과 좀 다릅니다. 저는 사회가 정보화 등 새로운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기 때문에 학벌사회가 깨지는 것이 아니라, 학벌사회의 모순이 너무나 심각하고 더이상은 유지되기 힘든 임계점에 왔기 때문에 깨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짧게 말씀드리면, 이는 겉보기엔 단순한 교육문제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계급투쟁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침내 해묵은 우리나라 지배구조의 실체가 지금 질문대에 올라선 것이죠.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불평등을 문제삼으면서도 다른 것을 표적으로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지배계급의 실체가 학벌이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죠. 따라서 그것에 대한 저항이 점점 거세질 거라고 봐요.
개혁을 하려고 할 때 저항이 심할 것이라는 염려가 많은데, 학생과 학부형 모두의 입장에서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더 견디겠어요? 저는 대학평준화를 통해 대학서열을 철폐하고 학벌을 타파하는 것말고는 다른 아무런 제도적 대안이 없으므로, 결국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만큼 저는 장회익 선생님처럼 서울대 출신들 사이에서 이 문제에 대해 더욱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능동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분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똑같이 근대혁명을 겪어도 영국이 다르고 프랑스가 다른데, 영국은 지배계급 자체 내에서 뭔가 계속 합리적 방향으로 물꼬를 터주었기 때문에 유혈혁명을 겪지 않았지만, 프랑스는 절대왕정이 미련하게 버티다가 더 큰 화를 자초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바라건대 저 같은 사람이 나서서 핏대올릴 필요 없이 서울대를 비롯해서 우리나라 최상의 지배계급 쪽에서 이렇게 계속 가다가는 나도 망하고 나라도 망하겠다 하는 인식을 가져서 학벌타파운동에 나서줬으면 하는 것이 오늘 대담을 마치면서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송호근 그런 점에 대해서 저도 십분 동의합니다. 입시제도를 보면 갑갑하기는 마찬가지죠. 제 딸이 이번에 고3이 되어 저도 많이 긴장하고 있거든요.(웃음) 미래를 전망해보자면 학벌주의가 그렇게 급격하게 없어질 것 같지는 않고, 다만 사회의 주요한 지배계층이나 엘리뜨들이 어떤 방안을 만들어낸다면 조금 속도가 빨라지고 시간이 줄어들 가능성은 있다고 봅니다. 연고주의·지역주의 행태를 한번 보세요. 최근의 여러가지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여론이 입을 모아 비판하는 지역주의 행태가 젊은 세대에서는 다소 희석되었지만 삼십대 이상에서는 과거와 마찬가지거나 좀더 강화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문제를 척결하기 위해 사회의 근본적인 조직원리를 다 바꾸는 혁명적인 방법은 오히려 탁상공론이 될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업적주의’에 단점도 있지만 장점도 상당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실제로 지난 수십년간 우리 사회의 발전을 이끈 동력이고 우리 사회의 수월성(秀越性)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수월성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까 상태가 이렇게까지 변한 거죠. 얼마 전, 영국에 가보니까 교육부장관이 고3 학생들이 너무 공부를 안해서 한국을 좀 배워야겠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들리더군요. 학벌사회의 폐단이 너무나 큰 것은 사실이지만, 그걸 척결하기 위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생동력(vitality)까지도 없애버리는 것은 심히 우려가 됩니다. 또 학벌주의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서 대학교육 체제를 전환하는 것은 중대한 과제이지만, 내부저항이 너무나 많을 것이기 때문에 이 저항에 대한 여러가지 고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개혁의 현실성을 높이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저는, 그래도 장기적으로 보아 학벌문제에 대해 낙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벌이 가지고 있는 프리미엄들이 상대적으로 줄어들 조짐이 많기 때문이죠. 그것은 대학교육에 대한 보상률이 현재 급격하게 낮아져서 과거에 비해 계층상승 기제로서의 학벌의 효율성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사회학적으로 예측하건대, 학벌주의는 상대적으로 약화되지만 연고주의는 그 속에 상당기간 잔존할 것 같습니다.
대학교육과 관련해서 말씀드리면, 아무튼 그동안 우리가 여러가지 진통을 겪었으며 그 진통의 한가운데 서울대가 놓여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서울대를 없애는 식의 발상처럼 일거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야기되는 부작용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어요.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그 이면에서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들이 커질 때, 그걸 감당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숱한 입시제도와 교육제도의 개혁에서 보아왔듯이, 한 문제가 척결되면 또다른 하나가 튀어나오곤 했습니다. 이해찬 장관의 개혁은 그 대표적인 사례겠지요.
사실 우리나라 사회를 지배하는 정서와 정책기조에는 강력한 평등주의가 깃들여 있습니다. 김상봉 선생님이 주장하신 대학평준화도 그런 예에 속합니다. 그러나 대학평준화는 새로운 일류를 만들 겁니다. 중·고등학교 평준화의 예를 보면, 서열화는 없어졌지만 새로운 일류가 태어났지요. 바로 주민들의 경제력 때문입니다. 강남 8학군이 평준화 이후에 생겨난 대단히 고질적인 문제이며, 백방(百方)이 무효임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요. 아마 대학을 평준화하면 대학의 재정능력에 따라 그리고 대학이 위치한 지역의 주민들이 지닌 사회경제력에 따라 새로운 서열이 생겨날 거라고 봐요. 평준화 속에서도 새로운 명문학교가 형성된다는 것을 일본의 예에서 볼 수 있습니다. 평준화를 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집단간의 경제력 차이로 인해 일부 대학이나 중·고등학교가 명문학교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시간문제이지요. 그런 점에서 평준화와 쿼터제가 좋은 대안인지는 의심스럽습니다.
서울대 문제에 대해 이런 것들을 고려하며 접근해야 하는데, 이와 관련해서 시사적인 예가 하나 있습니다. 얼마 전 서울대학에서는 외국의 석학들을 초청하여 ‘블루 리본 패널’(Blue Ribbon Panel)이라는 것을 만들었고, 학교의 전반적인 운영을 진단하는 패널 보고서를 출간했습니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대가 미국의 중·하위 주립대학보다 못하다는 것이었고, 언론은 그것을 대서특필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블루 리본 패널’에서 제출했던 보고서 내용 중 빙산의 일각이에요. 실제로 그 보고서의 핵심내용은 ‘자율성’과 ‘재정 지원’의 문제였습니다. 이 공룡대학에서, 이렇게 우수한 학생들을 가지고 있는 대학에서, 관료제적 통제와 재정 통제 속에서 이 정도의 수준을 유지하는 것만 해도 사실은 ‘기적이다’라고 표현했더군요. 제 결론은 서울대의 자율성 확보가 서울대 문제 해결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입각하여 서울대가 나름대로 창의적인 모델을 창안하고 자구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런 노력 중에 특히 제가 중요하다고 보는 것은, 서울대가 가장 우수한 학생들을 받아들여 교육시키는 기관이 아니라, 성적·지역적·계층적으로 안배된 다양한 형태의 자질을 갖춘 학생들을 광범위하게 받아들여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선 서울대의 면모를 일신해야 하겠지요. 이러한 변신에 대한 논의는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겠지요. 서울대가 그렇게 방향을 선회한다면 대학교육 체제의 전반에 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다고 봅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이제 서서히 되지 않겠는가 하는, 조금은 낙관적인 생각입니다.
김종엽 저도 간단하게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학력의 기대수익이 실제로 많이 떨어졌습니다. 고졸자의 생애소득을 100으로 했을 때 대졸자의 생애소득은 160 내지 150까지 떨어진 것 같아요. 그와 연관된 학벌의 기대수익도 조금씩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학부모 세대들은 학력과 학벌의 이익을 가장 많이 봤던, 혹은 그 피해를 절감했던 세대에 속하기 때문에 그로 인해 형성된 아비뛰스(habitus)가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학력경쟁과 학벌경쟁을 그냥 방치한 상태에서 그것이 사라지기를 기다리자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가 학벌사회라고 할 때 그 학벌사회는 정오를 지났지만 아직 해가 지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남았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고통을 줄일 수 있는가는 그 속도를 얼마나 가속화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서울대 개혁은 파급력도 크고 전체 개혁의 물꼬를 트는 핵심고리입니다. 오늘 여러가지 논의가 많이 나왔는데, 이는 토의가 조직되는 과정이겠지요. 서울대 내부의 개혁논의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바깥의 논의가 활성화되어 기대와 압력 수준을 높여야 합니다. 서울대 안과 밖에서 이루어지는 개혁논의가 연계된다면 학벌로 인해 겪는 고통의 시간은 좀더 단축될 것입니다. 장시간의 좌담에서 좋은 이야기 많이 해주신 세 분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