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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어느 ‘존재론적 드라마’의 정치적 빈곤
A. 네그리·M. 하트 『제국』, 이학사 2001
박영도 朴榮道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사회학 parksoam@freechal.com
막강한 군사력과 금융투기로 전세계를 ‘찍히면 죽는다’는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 미국의 안하무인격 작태를 보노라면 ‘제국주의’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이런 정황에서, 누군가가 제국주의는 오늘의 세계질서를 이해하는 데 적합하지 않을뿐더러, 미국의 글로벌 기획은 제국주의가 아니라고 한다면, 아마도 부시의 홍보보좌관의 말이려니 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급진 좌파의 전형인 이딸리아 자율주의 운동의 이론적 대변자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그의 제자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가 함께 쓴 『제국』(Empire, 윤수종 옮김)의 주요 명제이다.
세계화에 대한 대표적인 포스트맑스주의적 저작인 이 책은 객관적 필연론이나 누군가 배후에 있다는 식의 음모론을 모두 피하고 세계화를 국민국가적 주권으로부터 글로벌 주권 형식인 제국으로의 이행으로 해석한다. 흔히 거론되는 ‘정부 없는 통치’라는 덤덤한 형상에 제국이라는 색깔 있는 이름을 붙인 셈이다. 이 책에 따르면, 제국주의가 국민국가적 주권의 확장인 데 반해, 제국엔 외부가 없으며 영토적 권력중심도 없다. 또 제국주의가 기율권력의 확장인 데 비해, 제국은 삶을 대상으로 하는 생체권력의 형태를 띤다.
‘제국주의가 아니라 제국’이라는 명제는 몇가지 정치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첫째, 반제투쟁과 반자본주의 투쟁의 좌파적 동일시가 무너진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정치권력이자 반자본주의 투쟁의 적은 제국주의가 아니라 제국이라는 것이다. 둘째, 좌파의 반미성향도 방향을 잘못 잡은 셈이 된다. 제국의 질서에서 미국이 특권적 위치를 갖는 것은 군사력과 달러 때문이 아니라 헌법의 공화주의적 경향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국에서 주권은 다중의 규제가 아니라 다중의 생산성의 산물이며, 주권의 팽창 경향은 배타적이지 않고 포용적이라는 것이다. 셋째, 이제 국지적 전략은 제국에 대항하는 효과적 전략이 아니다. 좌파 보호주의 전략은 국민국가적 주권에 대해 무비판적이다. 그러나 차이를 강조하는 탈현대적 전략도 별 효과는 없고, 오히려 제국적 주권의 논리에 쉽게 포섭될 수 있다. 제국은 차이를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포용한 후에 구별하여 관리하는 작동방식을 갖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국과 동일한 맥락에서 제국에 내재적으로 대항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정치적 함의엔 수긍할 만한 면이 있지만, 의문도 남는다. 저자들은 왜 막강한 군사력과 금융력이라는 분명한 사실은 제쳐두고 미국 헌법에 관한 미심쩍은 추론에 기대어 분석하는 것일까? 제국적 권력행사의 특징인 폭력적 평화주의의 역설은 왜 주목하지 않는가?
이 의문들을 다루기 전에 먼저 제국에 대한 내재적 대항의 문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저자들은 제국의 대항개념으로 다중(multitude, 번역서에선 대중)을 제시한다. 사실 이 책의 모든 논증과 수사는 제국과 다중의 대립관계로 집중된다. 특이한 것은 그 대립의 운명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운명을 풀이해주는 ‘존재론적 드라마’에 따르면, 제국의 출현은 반자본주의 투쟁의 실패가 아니라 성공을 일러주는 지표이다. 더 중요한 점으로, 제국이 삶을 권력의 대상으로 설정한 것은 결정적 패착이다. 통제될 수 없는 특이성과 복수성을 지닌 삶이 도처에서 제국을 직접 타격하기 때문이다. 제국을 낳은 다중의 존재론적 생산력이 제국을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이 존재론적 드라마가 정말로 진행되어 ‘비참한 세계’가 ‘지상의 신국’으로, ‘저주받은 역사’가 ‘축복의 역사’로 반전될 수 있을까? 현실을 보면 아무래도 미심쩍다. 그러나 저자들은 이 드라마를 의심하는 기색은 별로 없고, 오히려 예언의 색조까지 가미한다. 이런 강한 메시아적 성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무래도 그 원천은 현실이 아니라 사유 속에 있는 듯하다. 저자들이 대변하는 자율주의 운동은 맑스의 산 노동과 죽은 노동의 변증법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네그리는 부의 생산논리에 포섭된 산업노동계급은 사회혁명의 에이전트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노동거부’라는 전략도 산 노동의 자율성을 긍정적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이 때문에 네그리는 푸꼬의 생체권력과 들뢰즈와 가따리의 욕망하는 생산 개념을 끌어들여 삶의 생산을 자율성의 장으로 설정한다. 이와 동시에 전복의 문법도 생산력(산 노동)/생산관계(죽은 노동)의 변증법에서 역능과 권력 간의 스피노자식 존재론적 드라마로 바뀐다. 이제 네그리의 모든 작업은 이 원본 드라마를 다양한 형태로 각색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제국과 다중도 다름아니라 세계화의 무대 위에 등장한 권력과 역능이다.
맑스로부터 ‘철학의 그리스도’ 스피노자로의 존재론적 개종은 형이상학으로의 이상한 귀의일 뿐 아니라, 실재 역사와 그림자 역사의 전도도 가져온다. 네그리는 스피노자를 따라 초월성의 철학을 거부하고 철저한 내재성의 평면에 서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 내재성은 권력/역능, 존재자/존재의 구도에 조응하여 실재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으로 구별된다. 이렇게 보면, 역능의 잠재적 내재성은 초월성의 부정이 아니라 초월성의 존재론화인 셈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초월성에 산출능력을 부여하면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실재세계의 모습은 그것을 구성하고 산출하는 역능의 역동성에 종속된다. 따라서 실재적 내재성 차원의 권력이나 우리 자신들에게 역능은 알 수 없는 운명적 힘으로 경험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제국』의 ‘존재론적 드라마’에서 어떻게 다중이 신비한 능력을 발휘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다중에게 귀속된 역능의 존재론적 구성력 때문이며, 권력의 잎은 결국 역능의 흙으로 되돌아간다는 존재론적 명제 때문이다. 또한 저자들이 다중에 대한 시적 서술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는 이유도 알 수 있는데, 시적 언어야말로 역능의 혁명적·존재론적 운동을 포착할 수 있는 언어일 것이기 때문이다. “예언자는 자신의 인민을 창조한다”는 말이 저자들에게 각별했던 이유도 짐작할 수 있다. 예언이야말로 다중에게 역능을 일러주고, 다중을 공통의미와 공통방향으로 인도하는 효과적 채널일 터이기 때문이다. 『제국』이 상당히 길긴 하지만 예언적 정치선언이란 성격을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역능/권력의 도식 속에서 『제국』의 정치는 존재론화된다. 이는 확실히 형이상학적 풍요를 가져오지만, 이 풍요 속에서 정작 빈곤을 겪는 것은 정치 자신이다. 현실적 세력관계의 분석, 정치적 방향을 인도하는 규범적 방향설정 등은 정치 본연의 장에서 추방된다. 따라서 『제국』은 두 가지 의미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답하지 않는다. 제국의 전복에 필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해방에 대한 다중의 욕망과 또 그 해방의 존재론적 드라마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이런 혁명적 의지의 낙관주의 앞에서 혁명적 기획의 역사적 검증이란 생각은 발붙이기 힘들다. 저자들은 부정적 존재론이 사회의 명백한 부정성을 존재론적 부정성의 안개로 가려버렸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론적 긍정성의 안개라고 해서 시야를 가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우리 시대 민주주의 딜레머의 명백한 장소인 군사적 평화주의의 역설과 이 역설 속에 구체화되어 있는 미국의 위치는 존재론적 안개에 묻혀 형체조차 분간하기 힘들다. 혁명의지의 존재론적 과잉, 객관적 분석 및 검증의 실종과 규범적 방향설정의 부재, 정치적으로 명백하고 시급한 문제들의 존재론적 차폐(遮蔽), 이것은 형이상학적 풍요로 대신하기엔 너무 큰 정치적 빈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