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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시대와의 화해를 꿈꾸는 문학토론
영광독서토론과 이문열 『술단지와 잔을 끌어당기며』
김용규 金容圭
문학평론가·부산대 강사 kyk3686@kornet.net
2002년을 열흘 정도 남겨둔 작년 12월 19일 부산의 영광도서에서 이문열의 신작 중단편집 『술단지와 잔을 끌어당기며』에 대해 제76회 영광독서토론이 열띠게 벌어졌다. 여느 해 같으면 12월 독서토론은 연말의 분위기를 반영하듯, 작가와 토론을 맡은 비평가 사이에 화기애애하고 따뜻함이 묻어난 비판과 대화 들이 오가고 그 분위기가 뒤풀이 자리로 이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토론회는 처음부터 심상치 않았다. 지난 한해 ‘홍위병’ ‘권력의 나팔수’ ‘친북세력’ 등 무수한 문제성 발언으로 문화계 전체를 뜨겁게 달군 작가 이문열씨가 참석한데다 그를 비판하는 안티조선의 입장에 선 시인이자 평론가인 노혜경씨가 지정토론자로 나섰으니 토론에 대한 관심은 배가될 수밖에 없었다. 150석 남짓한 영광도서의 사랑방에 그 두 배가 넘는 독자들이 몰려 많은 이들이 복도에까지 들어찼으며 상당수의 사람들은 입장조차 못한 채 돌아서야 했다. 특히 이날은 인터넷서점의 등장으로 가뜩이나 어려워진 부산의 서적상들이 곧 있을 교보문고의 부산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항의로 일제히 서점의 문을 닫아건 날이었음을 생각하면, 300여명의 청중들은 오로지 이 토론회에 참석하러 온 사람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석한 청중들 사이에 서울의 몇몇 신문이나 시사잡지의 기자, 토론회를 중계하기 위한 시민방송의 취재진, 그리고 최근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는 이문열씨의 책 반납운동을 주도한 주체들도 보였다. 물론 젊은날 이문열의 소설을 열병 앓듯이 읽었던 기억 때문에 찾아온 독자들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영광독서토론회는 관례적으로 토론작품에 대한 작가의 변으로 시작된다. 이어서 지정토론자는 이번 토론작품과 관련된 날카로운 질문들을 풀어놓는다. 단순히 독자와의 만남 정도로 생각하고 찾아온 작가들은 느닷없이 날아오는 질문에 곤혹스러워하기도 한다. 이문열씨는 이날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의식한 듯, 이번 작품을 쓰게 된 경위를 얘기하는 대신 ‘패러디, 해체, 그리고 안티’를 자신의 변의 제목으로 삼았다. 찾아온 작가로서는 이례적이었다. 어쨌든 작가가 자신의 작품과는 무관해 보이는 제목을 붙인 것은 이미 우리 시대의 문제작가로 평가받고 있는 이문열씨의 대담한 면모를 엿보게 하며, 어떤 의미에서 그가 영광독서토론회를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설명하기 위한 장으로 ‘선택’한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을 자아냈다. 작가의 주장을 정리하자면, 니체와 노자는 비판을 하되 비판에만 그치지 않는 대안들을 제시했다. 가령 노자의 경우 무위(無爲)가 유위(有爲)가 되는, 곧 무위가 그 자체로서 대안이 되는 경지를 보여준 데 반해, 안티는 현재 우리 사회의 거대한 힘이지만 유용성과 실용성을 갖춘 대안이기는커녕 부정과 부인만 일삼는 우리 시대의 사회현상이라는 것이다. 안티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고 난 후 작가는 비록 토론의 후반부에 철회하긴 했지만 내친 김에 안티조선은 친북세력의 혐의가 간다고까지 말의 수위를 높였다.
약간은 계산된 듯한 작가의 주장에 대한 응수로 지정토론자 노혜경씨는 중단편집에 수록된 「김씨의 개인전」에서 아마추어리즘과 약자에 대한 지독한 냉소를, 「달아난 악령」에서는 운동권이나 전교조 교사와 같은 타자들을 악령으로 몰아세우는 불쾌함을, 그리고 「술단지와 잔을 끌어당기며」에서는 시민연대와 안티조선을 공격하기 위해 문학을 이데올로기로 활용하는 음흉한 전략을 읽어냈다. 이어 노혜경씨는 이번 작품집이 작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신의 적들을 공격하기 위한 개인 무기로 이용하는, 즉 전혀 반성의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 일방적인 서사라고 비판하면서 “왜 소설을 쓰느냐? 소설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통해 이문열 소설의 전략에 근본적인 회의를 표시했다. 작가의 도발적인 주장과 지정토론자의 칼을 세운 비판은 2시간 반 동안 진행된 토론의 내용과 분위기를 결정해버렸다. 일부 독자들까지 가세하여 “지금의 이문열에게 시대사적 사명과 자전적 고민을 결합했던 초심이 보이지 않는다” “작가가 자신의 입장을 수세적으로 표명하다보니 보수언론들에 의해 이용당하는 것이 아닌가” 등 충고어린 질문들이 나왔다. 이날의 생생한 토론은 백마디의 말보다 시민방송(www.citizen.tv)에 올라와 있는 동영상을 직접 보는 것이 좋으리라.
이문열씨의 답변은 시종일관 자신의 입장을 방어하고 옹호하는 것이었다. 노혜경씨의 질문에는 모든 문학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경향적이며 「술단지와 잔을 끌어당기며」는 동아시아의 서사체계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시도해본 것일 뿐이라는 말로, 최근의 작품에서는 초심이 보이지 않는다는 한 독자의 질문에는 그때의 소설이라고 반드시 좋은 작품은 아니며 오히려 서양에서 알아주는 것은 『시인』과 『금시조』 같은 작품들이라는 말로, 언론에 이용당하는 것 아닌가 하는 질문에는 자신이 언론을 이용하는 측면도 있다는 말로 대응했다. 하지만 그의 답변은 상대방의 질문에 대한 충실한 응수였다기보다는 질문 자체의 예리함을 회피하는 노련한 화술만을 보여준 것에 가까웠다.
격해진 토론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고 토론의 줄기를 다른 주제로 옮기기 위하여 사회자 구모룡씨(해양대 교수)가 개입했다. 구모룡씨는 “작가 이문열에게서 아버지와의 싸움이 좌파에 대한 싸움으로 옮겨간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대해 이문열씨는 “누구든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과정을 겪기 마련이고 40세 이전에는 그것을 나 개인의 특수한 문제로 여겼지만 40세 이후에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났다”고 답했다. 단순한 개인사적 고백처럼 들리는 답변이었지만, 그것을 토론 내내 자신의 입장을 완강히 고수한 작가의 모습과 연결지어보면 그가 말한 그 그림자는 아버지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 성싶다. 독재권력이 대학을 마치 제집 드나들듯이 하던 시절 이문열씨는 부산의 한 대학에서 강연하면서, 하나의 원이 있는데 권력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한 사이 그곳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권력의 시선이 원을 향하는 순간 재빨리 발을 빼는 것, 그것이 바로 참여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바로 그 비유 때문이리라. 그 당시 이문열씨는 우리 사회의 참여세력에 대해 궁색한 설명을 했지만, 청중들한테는 그것이 오히려 거대한 독재권력 앞에 무력하고 왜소한 인간의 모습에 대한 자조 섞인 동정과 거대한 슈퍼에고(superego) 앞에 주눅들어 있는 작가 자신의 자의식에 대한 연민을 토로하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이제 타자들을 악의 화신으로 형상화하는 ‘증오문학’(hate literature)의 장르에나 들 법한 「달아난 악령」에서 딸애를 타락한 운동권의 나락 속으로 빠지게 만든 ‘악령’을 끝까지 쫓는, 전혀 반성적이지 못한 아버지의 모습은 그가 개인사적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났을지는 모르나 그 자신이 또다른 유형의 완고한 아버지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선택』 이후 이문열씨의 소설들은 우리 사회의 문화적·이데올로기적 장 내부에서 한쪽 입장을 일방적으로 대변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으로 유명한 『선택』이나, 운동권의 일부 타락한 모습을 진보적 지식인 문화 전체에 대한 비난으로 확대한 「달아난 악령」, 그리고 전통적 동아시아 서사의 실험이라는 구실로 현정권과 시민연대 및 안티조선을 엮어 풍자한 「술단지와 잔을 끌어당기며」 등 그의 소설이 우리 사회 속에서 기능하는 방식은 보수적이다 못해 지극히 퇴행적이다. 그의 최근 소설들은 영국 새처 정권 당시 새처와 그의 이데올로그들이 사회의 소수자들에게 행한 이데올로기 전략과 많이 닮아 있다. 치솟는 실업률와 청소년 범죄를 직장여성의 탓으로 돌려 “여성이여! 가정으로”를 열심히 외쳐댄 새처의 반여성적 이데올로기와, 그녀의 보수주의에 편승해 지식인 사생활 파헤치기를 통해 진보적 지식인 문화 전체를 공격했던 신우파 지식인들이 영국사회에서 기능한 방식이 『선택』과 「달아난 악령」이 우리 사회에서 움직이는 방식과 갖는 유사성은 단순한 우연 이상의 것이다.
이번 토론회는 서울의 몇몇 신문의 문화면을 대거 장식하기도 하고 인터넷의 핫이슈로 등장하기도 하는 등 끝난 뒤에도 적잖은 소란과 파장을 남겼다. 하지만 그러한 소란과 파장 뒤에 한가지 간과되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홍위병 발언의 문제작가 이문열과 안티조선의 평론가 노혜경의 대결”이라는 시사적이고 도발적인 신문기사나 이번 토론의 방청기를 쓴 인터넷의 글 그 어디에서도 이번 토론회가 ‘76회 토론회’라는 점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했다. 횟수가 중요한가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지만, 76회를 이어왔다는 말에는 거의 7〜8년 동안 이 토론회에 의미를 부여하며 이끌어온 사람들과 독자들의 무서운 ‘관성’이 묻어 있다. 바로 이 관성 덕분에 영광독서토론회는 시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만드는 문화행사이자 대중적 제도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영광도서가 주최하고 ‘오늘의 문예비평’이 주관한다고 해서 이들이 이 토론회의 주인은 아니다. 영광독서토론회는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힘을 행사하는 장이 아니라 작가, 사회토론자, 지정토론자 그리고 독자로 구성되는 다양한 견해들이 충돌하고 조우하는 독특한 문화적 장이다. 즉 그중 하나만 제외되어도 장 자체의 존립이 어려운 우리 시대의 보기드문 문화공간인 셈이다. 이번 토론회에서도 작가 이문열씨의 폐부를 찌르는 질문을 던진 것은 그 누구보다 독자들이었다. 독자들은 작가나 토론자와 마찬가지로 그 장 속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 점이 간과될 때 토론회는 출판사와 서점이 행하는 일방적인 판촉과 홍보의 장으로 보일 것이다. 오늘날 문학시장이 거대한 출판자본에 의해 지배되고 작가들이 또하나의 대중스타가 되면서 비평의 기능과 비평가의 역할이 줄어들고 토론회 역시 적잖은 변화를 겪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럴수록 토론회 내에 작동하는 힘들을 더욱 능동적이고 깨어 있는 시민주체를 형성하려는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한 과정 속에 『술단지와 잔을 끌어당기며』와 같은 소설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러한 주체형성을 위한 텍스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80년대 진보문화의 한계는 이념의 과격성이나 순수성의 타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튼튼한 시민주체를 구성할 수 있는 제도를 건설하고 그 제도를 유연한 훈련의 장으로 구체화하지 못한 경험 미숙에 있었다. 지금은 이념도 중요하지만 작지만 함께할 수 있는 공간들을 계속적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