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조정 趙晶
1956년 전남 영암 출생. 200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창밖에 비닐봉지가 날아갔다
창밖에 검은 비닐봉지가 날아갔다
참수된 내 머리인 줄 알았다
숨을 죽인 허공에
검은 머리채가 들려 있었다
허전한 목이 무릎을 떨며 더듬거렸다
내 머리가 저기 있으면 내 팔다린들 여기 있겠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가는 시나이 광야는
수만 장 비닐봉지가 수만 그루 가시덤불에 끼여 휘날렸다
내 출애굽을 배웅해주던 때 전 바람
더럽고 낮은 지평선이 눈물겹게 작별의 입을 맞추었다
참수된 내 머리도 그리로 가라
낙타 냄새 나는 누런 비닐들과 함께
혼자 출발하는 길에게 맹렬히 손 흔들어주러 가라
돌아서다 팔꿈치로 한란 꽃대를 쳤다
파르스레 맺힌 꽃망울이
톡 부러져버렸다
꽃이여, 눈부신 참수였다
그림자 없는 몸짓이었다
참회하지 않는 내 머리는 날마다 잘려도 괜찮다
꽃 없이도 한란은 깨진 돌 틈에
향기를 내리고 있었다
겨울강
고요한 힘이 한 세상을 이루었다
둑 아래 새가 걸어간다
강변 나무들은 침묵을 서원한 사제처럼 차다
부러져나간 기도
용서는 아직 이른 처방이다
서풍이 몰고 와 가지마다 얹어놓은
눈, 눈이 식는다
잔가지 끝에 눈빛이 희다
새는 비우지 못한 제 무게의 모서리를 쪼아
어디에 걸어두는지
겨울에는 좀처럼 울지 않는다
산 위에서 들판까지 사선으로
빛나는 또 눈발!
단단하게 얼어붙은 강의 어깨를 잡고
풍경은 잠시 몸을 떤다
그들은 오늘 헤어지지 않는다
길을 아주 버리지 못하는 사람의
길고 긴 얼음장 아래 누가 드러눕는다
물을 열어라 새여
깃을 치며 날아오르는 짧은 향기
백련사
새들이
꽃 지는 소리를 입에 물고 날아갔다
요사채 댓돌에 젊은 중 앉아 있었다
러닝셔츠 바람에 썬글라스 끼고
어깨가 쎅시한
꽃 한송이 떨어져 있었다
이만 총총
짧은 인사처럼
바람에 색이 묻어났다
길이 멀어서 허공도 짐이 되었다
대웅전 벽화는 보지 않고 산을 내려왔다
새들이 알 속으로 돌아가 보이지 않았다
누가 꽃 속에
절을 매고 빨래를 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