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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소용돌이 속의 동아시아
중국의 체제개혁과 미래
정재호 鄭在浩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저서로 『중국의 중앙-지방관계론』 『중국정치연구론』(편저) 『중국 개혁-개방 20년』(편저) 등이 있음. cjhir@snu.ac.kr
1978년 11월의 제11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三中全會)를 기점으로 체제변환을 위한 중국의 대장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1 마오 쩌뚱(毛澤東)이 근 30년간 추구했던 ‘평균주의 낙원’의 건설이 참담한 실패로 끝난 것과는 달리 떵 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노선이 지난 20여년 동안 만들어낸 성과는 괄목할 만하다. 1978년에 3624억 위안(元)에 불과한 국내총생산(GDP)이 2000년에는 8조 9404억 위안으로 무려 25배나 증가하였다. 1978〜2000년의 기간에 중국이 기록한 9.4%라는 GDP 연평균성장률은 매우 놀라운 수준이다. 이는 같은 기간 중국이 세계 연평균성장률(3.3%)의 세 배에 가까운 고성장을 지속해왔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통계를 과다 계상된 것으로 간주하여 실제 성장률을 7〜7.5% 정도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이 경우에도 세계 평균성장률의 두 배가 훨씬 넘는 성과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대외교역의 규모 또한 1978년에는 206억 달러에 불과했으나 2000년에는 4743억 달러로 늘어나 2001년 기준으로 중국은 세계 6대 교역국으로 부상하였다. 또 중국은 에어컨·텔레비전·카메라 등의 생산에서 이미 최대생산국이 되었으며, 2001년 말 현재 2천억 달러를 가진 세계 2위의 외환보유국으로 성장하였다. 중국은 1979〜2000년 기간 동안 총 3466억 달러에 이르는 해외직접투자(FDI)를 유치하였고 중국의 국민총생산(GNP)에서 대외무역이 차지하는 비중 또한 1978년의 9.8%에서 2000년에는 44.5%로 무려 4배 이상이나 급증하여 중국경제가 급속히 국제화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중국의 경제총량은 구매력(PPP) 환산 기준으로 이미 미국에 이어 2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절대액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2001년에 이미 이딸리아를 앞질러 세계 6위로 도약하였으며 2002년에는 프랑스를, 그리고 2006년경에는 영국까지 추월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급속도로 커져가는 국내시장을 기반으로 향후 50년간 최소 5%의 연평균성장률을 유지할 것으로 예측되는 중국경제가 늦어도 2050년경에는 미국과 대체로 상응한 규모로 성장하거나 오히려 미국을 앞지를 수도 있다고 추정된다.
1989년 씨엔엔(CNN)을 통해 생중계된 천안문 광장에서의 시위는 불안정한 중국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심어주었으며 중국도 구 소련과 같은 해체의 길을 가게 될 가능성이 제기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10여년이 지난 지금 붕괴는커녕 중국은 오히려 ‘중국위협론’의 당사자가 되었는데, 이는 ‘중국붕괴론’과는 정반대로 매우 강력한 중국을 전제로 하는 씨나리오이다. 중국은 국제연합(UN)의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자 핵무기 보유국이며 1997년 이후 동아시아에 불어닥친 금융위기 속에서도 자국 화폐인 위안화의 가치를 절하하지 않음으로써 지역 내의 안정과 공익을 도모하는 지도자적 역할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중국은 또한 개혁·개방기에 들어 다양한 국제기구와 레짐(regime)에도 매우 전향적으로 참여하고 있는데 아세안(ASEAN)의 10+3의 성원으로 활동하고 있고, 또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위한 4자회담의 당사자로도 참여하고 있다. 중국의 주도적 역할로 만들어진 ‘뽀아오 아시아포럼(博鰲亞洲論壇)’과 ‘샹하이 6국(上海合作組織)’ 등에서도 보이듯이 150년 만에 처음으로 중국은 ‘대국외교(大國外交)’를 시행할 수 있는 능력과 공간을 갖게 된 것이다.
자산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했을 13억의 인구를 지니고 중국이 20여년에 걸쳐 지속적인 고성장을 이루어내었고, 또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정치·사회적 상황을 유지해왔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개혁기 중국의 괄목할 만한 성과를 비슷한 규모의 러시아와 인도와 대비할 경우 그 차이는 더욱 극명해진다. 이 글에서는 우선 지난 20여년간 시행된 체제개혁의 핵심내용과 그 부작용들에 대한 평가를 내린 후, 중·장기적 관점에서 중국이 다다르게 될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몇가지 논의를 제시하고자 한다.
사상해방과 실험주의
러시아나 동유럽의 경험과 비교해보면 중국이 지닌 구조와 조건 들이 매우 상이함을 발견하게 된다. 우선 공산정권의 붕괴로 인한 국가능력의 급격한 쇠퇴를 중국은 경험하지 않았으며 경제·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파생시키는 가격자유화나 사유화의 과정 또한 강력한 정부에 의해 통제된 상태에서 점진적으로 진행되어왔다. 또 러시아나 동유럽 국가들이 공히 겪었던, 방위산업에 기반한 국유기업에 대한 경제수요가 급속히 줄어드는 경험도 중국은 겪지 않았음을 지적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체제전이의 용이도(容易度)가 일반적으로 과거 공산체제 수용의 심도 및 그 기간의 길이에 반비례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러시아나 동유럽 국가들보다 비교적 낮은 수준의 공산체제를 유지했으며 그 기간 또한 상대적으로 짧았던 중국의 경우, 시장체제로의 전환이 더욱 용이하며 그 변환의 고통도 적을 것이라는 평가가 가능해진다.2
구 소련이나 동유럽에서처럼 급속한 체제변환을 수반하지 않고도 중국이 고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다. 하나(실험주의학파)는 중국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입장으로 점진적 개혁의 과정에서 나타난 실험성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며, 중국의 경험이 중국과 비슷한 상황에서 출발하는 탈(脫)공산주의체제나 개혁적 사회주의국가들에 적용가능한 모델임을 시사한다. 반면에 이에 대응되는 관점(수렴주의학파)에 따르면 중국의 개혁 또한 국가주도의 노동집약적 수출위주의 발전이라는 동아시아 발전모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는 사유화·자유화·국제화를 수반하는 발전경제의 일반 추세를 따를 수밖에 없음이 강조된다.3
기실 이 논쟁은 유리잔에 반 정도만 있는 물을 가지고 “반이나 남았다”라고 하는 것과 “반밖에 남지 않았다”라고 보는 시각이 상황에 따라 각기 옳을 수 있음과 매우 흡사하다. 우선 ‘점진성’(gradualism)과 관련하여 그 기준을 구체적으로 정의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논의가 상당부분 무의미하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겠다. 필자가 보기에 이 논쟁의 핵심은 시기적 편차와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 즉, 1980년대 중국개혁의 점진성은 아마도 이념적 고려와 정치적 타협으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이며, 따라서 이 시기와 관련해서는 ‘수렴주의학파’의 주장이 더욱 설득력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체제개혁의 전체적인 그림이 잡히기 시작한 1990년대 점진성의 배경에는 정치적 타협보다는 오히려 실험주의 규범의 확산을 드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실험주의의 확산이 가능했던 핵심적 배경으로 ‘사상해방(思想解放)’을 들 수 있다.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된 ‘진리의 표준에 대한 논쟁’과 ‘건국 이래 당의 역사에 대한 평가’ 등을 통하여 극좌이데올로기의 위상이 현저하게 축소되었고, 각급 단위에서 지속적으로 이뤄진 복권(平反과 飜案)과 문화혁명 수혜파 숙청이 이데올로기의 ‘편재성(遍在性)’을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감소시켜나갔기 때문이다.4 또한 실험주의의 확산을 통해 ‘개괄식 개혁’이 추진될 수 있었으며 이같은 ‘개괄식 개혁’이 가능했던 이유로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용인할 수 있었던 리더십의 개방적 정향(定向)을 들 수 있겠다. 물론 이는 1970년대 말 중국의 리더십이 민주적이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경제적 난국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기층의 의견을 중시하는 ‘열린’ 모습을 보였다는 점을 가리킨다.
체제개혁의 정치경제
실험성과 점진주의를 기반으로 한 중국의 체제개혁은 분권화, 시장화, 소유제 다변화, 자유화, 그리고 국제화 등 다섯 영역에서 주로 전개되어왔다. 분권화(分權化)란 개혁기에 들어 다양한 정책영역에서 마오 쩌뚱 시기의 주된 특징이던 고도의 중앙집중적 구조와 규범에 큰 변화가 도입된 것을 지칭한다. 즉, 수직적 권위(條條)를 통해 직능계통별로 중앙정부가 일괄규제를 시행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제는 ‘각급 정부에 의한 분할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계획·투자·대외경제·재정·세무·외사 및 인사관리를 포괄하는 넓은 영역에서 ‘권한이양(放權讓利)’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왔다. 예를 들면 중앙정부의 국가계획발전위원회가 성(省)급 정부에 하달하는 지령성 지표(반드시 달성해야 하는 목표지수)의 경우, 농산물은 2000년 현재 해당 지표가 하나도 없으며 공산품의 경우에 30개 정도(1978년에는 200여개), 상품분배와 수출규제 품목은 10개 미만(1978년에는 각 256개와 1000여개)에 불과하다. 또 성급 정부와 일부 시의 경우, 미화 3천만 달러 한도 이내의 투자항목에 대해서는 중앙과의 협의 없이 자율적으로 허가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분권화의 지속적 시행으로 파생된 문제점에는 정부조직의 비대화, 재정의 취약화, 중복투자의 심화, 지역격차의 확대, 국유자산의 유실, 금융부실 등이 포함된다. 정부조직의 증가란, ‘정부 돈(皇粮)’으로 지원해야 하는 관리의 수가 너무 많아 국가재정에 큰 부담을 주는 비효율의 문제가 발생했음을 가리킨다. 매년 늘어나는 정부 재정능력의 60% 이상이 인원관리 경비로 지출되고 있는 실정이다. 자체 생산수입이 없는 기구이면서 국가의 재정지원을 받는 ‘사업기관(事業單位)’의 수 또한 1996년의 경우 131만여개나 되었으며 그 인원만 2500여만명에 달했다. ‘기구개혁’의 지속이 필수 불가결함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분권화와 관련하여 가장 두드러진 ‘폐해’는 바로 세수확보와 관련한 중앙정부의 능력감퇴라고 하겠는데, 1980, 85, 88년 등 여러차례에 걸쳐 중앙정부가 자신이 의도한 대로 재정집중화를 이루는 데 실패한 것을 들 수 있다. 반면에 1994년 이후 전국적으로 시행된 분세제(分稅制)는 공상세(工商稅)의 분리를 통해 중앙의 재정확충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인플레와 예산외 자금도 상당한 정도로 통제했다고 평가된다. 다만 여전히 중앙과 지방정부들 간의 기능과 지출범위가 명확히 확정되지 못한 데서 오는 다양한 문제들이 있으며 이로 인한 국가능력의 문제가 향후 지속적 장애요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분권화가 파생시킨 또하나의 문제는 지역간 격차이다. 소위 ‘서부대개발(西進工程)’의 성공을 위해서는 용수·전기·도로·가스 및 정보망의 건설에만 최소한 2조 위안이 소요되며 지난 20여년 동안 중서부의 19개 성(省)들이 유치한 외자규모가 전국 총액의 12%에 불과했음을 감안하면 이에 대한 중앙의 세수확보와 재정지원은 필수적이다. 다만 현재의 분세제 구도하에서는 중앙과 성(省) 간의 양자적 세수분배의 경로만 있을 뿐 중앙에 의한 재정이전(財政轉移支付)은 매우 빈약한 상황이기에 분권화의 규범을 약화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강한 중앙’의 회복이 매우 필요하다.5
분권화와 시장화가 파생시킨 복합적 부작용으로 국유자산의 유실과 금융부실의 문제가 있다. 지방정부들이 자율적 정책결정권을 갖게 되고 관 주도의 경제발전과 이에 따른 부패가 만연하면서 토지자산의 유실, 국유기업의 개혁과 구조조정으로 인한 손실액이 연 1조 5천억 위안에 이르고 있다. 금융체제의 개혁도 중국이 가진 가장 핵심적 과제라고 할 것이다. 이는 1983년 ‘재정지원에서 은행대출로(撥改貸)’의 전환 이후 지방정부에 의한 지방은행(分行)의 ‘장악’이 가져온 다양한 폐해를 시정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즉, 지방정부에 의한 은행자금의 임의적 전용을 통제하기 위하여 1998년 말 성(省)급보다 상위에 9개의 ‘대지역 분행(跨地區分行)’을 설치했던 것 같은 과감한 정책들이 지속되어야 할 것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규범의 내재화를 통한 ‘투명한 경영’의 실천이라고 할 것이다.
중국 체제개혁의 두번째 내용으로 시장화를 들 수 있는데, 이는 개혁 이전 시기 사회주의 경제운용의 근간이었던 국가에 의한 계획관리의 비중을 지속적으로 줄여나가는 과정을 가리킨다. 즉,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공급·유통 및 가격책정의 영역에서 전지적(全知的) 역할을 자임했던 국가의 ‘보이는 손’의 기능이 서서히 시장으로 전이되어가는 역동적 과정을 지칭한다. 1979년 국가에 의한 통일분배 비율이 각각 36, 77, 85%에 달하던 시멘트·철강재·목재의 경우 1993년에 이미 그 비율이 4, 20, 10%로 급감하여 시장의 역할이 대폭 확대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개혁 이전 시기에 1336개의 품목에 대해 정부가 가격을 책정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1998년에는 국가통제의 대상이 58개에 불과했다.6
시장화와 밀접히 연계되어 있는 것이 소유제 개혁이다. 이는 특히 국유기업의 다양한 문제들을 개혁의 충격을 극소화하는 가운데 해결해야 한다는 딜레머를 안고 있다. 1985년부터 시작된 도시에서의 체제개혁이 여전히 완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중국지도부의 이러한 번민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체제개혁에 대한 가장 보편적 정책권고가 소유제 개혁이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사유화(privatization)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중국의 경우 그동안 상당한 정도로 ‘중국적 특색’을 가진 실험을 수행해왔다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중반에 ‘계획체제하에서의 상업화(有計劃的商品經濟)’가 강조되었다면 1990년대 초에는 ‘사회주의 시장경제(社會主義市場經濟)’라는 표현이 널리 사용되었으며 1997년 제15차 중앙위원회의 성립과 더불어 사유를 포함한 ‘다양한 소유제 형식의 병존(多種所有制形式的竝存)’이라는 제법(製法, recipe)이 채택되어 더욱 개방적인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시장화와 사유화로 인해 파생된 문제로 실업의 확대와 민공조(民工潮), 사회보장제도의 붕괴, 은형경제(隱形經濟) 등을 들 수 있다. 국유기업의 효율성 증대를 위해 시행된 파산·해고 등의 조치들이 기존의 단위제도를 약화시키고 그에 연계되어 실시되던 사회보장제도를 붕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1998년 중국의 도시등록실업률은 3.1%였으며 2001년 말에는 4.5%로 상승했으나 실제 도시실업률은 7〜8%에 달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범주의 ‘비공식실업자(隱形失業者)’까지 포함할 경우 그 총수는 무려 4천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실업의 만연과 단위제도의 약화, 그리고 사회보장제도의 붕괴가 가져온 부작용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그 대표적 예로 파룬꿍(法輪功)을 들 수 있는데, 시장화된 의료체계에 쉬이 접근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예전처럼 단위가 운영하는 의료복지에만 의지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파룬꿍의 자기치료(自己治療) 효과에 상당수 사람들이 매료되었던 것이다.7
시장화는 또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을 위해 ‘도시와 농촌의 분리(城鄕分隔)’를 유지해온 호구제도를 완화하고 많게는 1억 1천만명에 이르는 농민공을 만들어내었다. 이는 도시로 이주는 하였으되 ‘도시민’으로서의 특혜를 누리지 못하는 가운데 나름의 ‘사회공간’을 만들어가는 세력의 형성을 의미한다. 농촌에서의 실업 또한 치명적 장애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농촌노동자 총수는 1978년의 3억 6백만명에서 1998년의 4억 9300만명으로 급증하였고 2001〜2005년의 ‘10차 5개년계획(十五)’ 기간 동안 매년 988만명이 새로 늘어날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1996〜2000년의 기간보다 매년 무려 230만명 이상이 추가로 늘어날 것을 의미한다. 1980년대에 연평균 7백만명 이상의 농촌노동자들을 흡수해주던 향진(鄕鎭)기업이 1990년대에 들어 연평균 409만명밖에 소화해주지 못하고 있어 WTO 가입으로 이미 20%에 달하는 농촌의 실업률은 향후 더욱 악화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중국 체제개혁의 또다른 내용으로 ‘자유화’가 있다. 앞서 논의한 분권화, 시장화 및 소유제 다변화 등이 ‘탈규제’(deregulation)라고 할 수 있는 데 비해 자유화는 매우 상이한 성격의 변화를 의미한다. 즉, 정치적 규범의 완화와 새로운 정치조직과 정치행태(行態)의 등장 및 전통의 새로운 부활 등을 포괄하는 넓은 개념을 가리키는 것이다. 지속적 사상해방으로 인해 공백이 생긴 이데올로기의 영역에 사유의 공간이 형성되고 전통의 부활과 함께 다양한 이념과 사상이 급속히 확산됨을 가리킨다. 호구통제의 약화와 단위제도의 붕괴를 통해 여러 이념과 사조 들이 이전보다 훨씬 빠르게 전파되고 있음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기층단위에서의 획기적 선거실험과 지방인민대표대회가 수행하는 대(對)정부 감독의 기능 또한 이러한 자유화의 정향을 구조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며 제도화해가는 데에 일조하고 있다.8
자유화는 마오 쩌뚱 이념의 전반적 퇴조에 기반하며 대체 이데올로기가 부각되지 않은 상황에서 배금주의적 경향이나 풍수 및 기공(氣功)과 같은 전통의 부활을 포괄한다. 더 나아가 국가권력의 기반을 흔들 수 있는 씨족공동체의 재건과 민주화를 위한 비밀결사체의 등장, 그리고 ‘농민영수(農民領袖)’라 불리는 농민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조직화된 저항도 포함된다. 1999년 한해에만 무려 2천건 이상의 농민시위가 기록되었으며 2000년 8월 쟝시성(江西省)에서의 시위에서는 2만여명의 농민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에는 여섯 성에서만 농민문제가 심각했던 반면, 2000년에는 무려 열여섯 성이 농촌 불안정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중국의 WTO 가입은 농촌경제를 더욱 피폐하게 만들 것이고 기층의 저항도 더욱 심각해질 가능성이 크다. 사이비 기독교적 교리와 맑스주의가 19세기 태평천국의 난과 20세기 공산혁명세력에게 치열한 투쟁정신을 제공했던 것처럼 이들 농민에게 무엇이 어떤 상황에서 투쟁의 명분과 힘을 제공할 것인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9
마지막으로 국제화를 들 수 있겠다. 1978년, 총 99개국과 수교관계를 유지했던 중국은 전방위 개방의 결과로 현재 총 162개의 나라와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이는 대만과 수교한 28개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를 망라하는 것이다. 또 2001년 기준으로 중국은 세계 6대 교역국이 되었으며 중국의 국민총생산(GNP)에서 대외무역이 차지하는 비중 또한 1978년의 9.8%에서 2000년에는 44.5%로 무려 4배 이상이나 급증하였다. 뿐만 아니라 유엔개발계획(UNDP),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World Bank), 아시아개발은행(ADB), 그리고 최근에는 WTO에 가입하였으며 군사안보 부문에서도 핵확산금지조약(NPT),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 화학무기금지협약(CWC), 쟁거위원회(Zangger Committee), 우주조약(Outer Space Treaty), 해저무기규제조약(Seabed Arms Control Treaty) 등에 가입하여 그 국제화 및 세계화의 폭을 넓히고 있다.
중국은 전방위 개방을 통해 무역과 투자의 확대라는 막대한 이익을 얻은 반면, 중국이 보기에 바람직하지 않은 이념과 제도 들이 국내로 유입되는 것을 상당부분 그냥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외부에 의한 정치체제의 변화라는 ‘화평연변(和平演變)’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간헐적으로 표현하면서도 지난 20년 동안 중국은 가능하면 ‘밖으로 나가’ 외부 행위자들과의 접촉과 연계의 폭을 넓히는 ‘국제화’에 몰두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향후 중국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서는 단순한 국제화를 뛰어넘어 적극적인 ‘세계화’에 참여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즉, 외부에서 널리 통용되는 규범과 기준을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체화’(internalization)가 이루어져야 하며 이에는 법제화도 포함된다. 더 나아가 중국이 원하든 원치 않든 인터넷과 싸이버폴리틱스(cyberpolitics)를 통한 세계화의 추세가 당위로 다가올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어렵다.10
중국 체제개혁의 다섯 가지 내용의 근저에 자리잡은 가장 핵심적인 정신은 바로 부유하고 강력한 중국을 만들려는 민족주의적 에너지라고 하겠다. ‘낙후의 잇점’(advantages of backwardness)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후진국가들이 많이 있음을 감안할 때, 중국을 ‘떠오르는 강국’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지도자들이 두 세기 가까이 놓지 않고 있는 부국강병에 대한 강력한 의지와 집념이다. 물론 폐쇄적 민족주의 정서의 강화가 중국의 민주화와 대외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어렵지만 마오 쩌뚱 사상이 빠져나간 큰 공백을 경제발전에 대한 자부심에 기반한 민족주의로 대체하고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중국의 미래
경제총량 지표만을 보면 중국의 체제개혁에 대해 긍정적 평가가 가능하다. 이는 이미 ‘반환 불가점’(point of no return)을 넘은 것으로 보이는 시장화, 소유제 다변화 그리고 국제화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분권화와 자유화의 경우, ‘지방에 대한 중앙의’ 그리고 ‘사회에 대한 강성국가의’ 관용의 폭이 임의로 변환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아무리 점진적인 개혁일지라도 기존 이익체계에 수정을 가한다는 의미에서 일정부분 정치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고, 따라서 지난 20년간의 개혁과정이 안정되었다고 해서 향후의 과정 또한 그럴 것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사유화와 재산권의 개혁만을 중시하고 ‘기업경영의 투명성’(transparency of corporate governance)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중국 체제개혁의 전도가 낙관적이라고 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영의 투명성 부재 때문에 경제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던 한국의 경우가 좋은 예라고 하겠다.
지난 20년간 개혁과 개방의 결과가 큰 성공을 거둔만큼 향후 이에 상응하는 고도성장이 지속되지 않을 경우 다양한 계층과 영역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것이며 이로 인한 정치·사회적 불안이 조성될 수 있다. 경제의 지속적 성장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가 가능한 반면, 정치체제의 전이 및 민주화와 관련해서는 그 평가가 더욱 복잡해진다. 기층단위에서의 획기적 실험들이 상급정부나 중앙으로까지 적용될 것으로 보는 전문가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경제수준이 지속적으로 제고되면서 소위 ‘후기 물질주의적 가치’가 사회전반에 걸쳐 공유되고 정치참여에 대한 적극적 요구가 형성되는 상황을 상정해야 한다. 이르면 2010년경에 중국 총인구의 40%(약 5억명) 정도가 중산층의 의식을 갖게 된다고 할 때 과연 ‘민주화가 결여된 자유화’(liberalization without democratization)만으로 이들의 요구를 충분히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중국의 미래에 대한 여러 가능성들을 하나의 연장선 위에 배열할 때 한쪽 끝에는 약한 모습의 중국, 분열과 붕괴의 가능성이 높은 중국을 상정할 수 있다.11 중국의 종착점을 유고슬라비아로 상정하는 이 씨나리오는 구 소련과의 단순비교에 집착한다거나 일정부분 반(反)공산당 정서를 나타내는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편, 이 연장선의 반대쪽 끝에는 매우 강한 중국, 패권을 목표로 현상황에 대한 수정을 도모하는 중국의 모습을 상정할 수 있다.12 이 가능성을 제시하는 대부분의 연구에서는 아쉽게도 경제발전과 군사력의 성장만을 집중적으로 보고 있어 “힘과 의도는 동일하다”라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 논의를 전개할 뿐 아니라 가장 핵심적 변수인 내부적 문제들에 대하여는 무관심한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중국의 미래에 대한 담론들은 지금까지 대개 이와 같은 이분법적 논의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들 양 극단의 씨나리오 사이에 실제로 다양한 가능성들이 존재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분열되지는 않더라도 상당히 약한 모습의 중국을 상정하는 것으로 ‘인도네시아 모델’이 있다. 이는 중국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성공적 체제전이를 이루지 못하고 덩치만 큰 비효율의 실패 사례로 전락할 가능성을 가리킨다. 이 경우에도 중국의 분열/붕괴 씨나리오 못지않게 주변 및 전지구적 문제(식량·난민 등)를 파생시킬 가능성이 있다.
‘인도네시아 모델’의 옆에는 ‘인도 모델’이 있는데 이는 민주체제가 유지되기는 하나 국가능력은 매우 취약하여 지속적 경제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그저 지역적 세력(regional power)으로서의 위상에 만족해야 하는 상황을 가리킨다. 또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구체적인 예를 들기는 어려우나 중국과 같은 규모의 국가가 비민주적인 체제를 유지하는 상황에서 성공적인 시장화 개혁과 고성장을 지속하여 상당한 국제적 위상을 얻게 되는 것이다.13 이보다 훨씬 성공적인 씨나리오로 ‘프랑스 모델’을 상정할 수 있는데, 이는 시장화와 민주화 양자 모두에 성공하여 비록 유일 패권국이 되지는 못하나 국제체제에서 패권국에 대해 효과적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중국을 의미한다.14
과연 미래의 중국이 다다르게 될 종착점은 어디에 더욱 접근할 것인가? 1995년에 행해진 ‘종합국력현황분석(綜合國力槪況分析)’에 따르면 중국의 자원총량과 군사력 그리고 경제발전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된 반면, 과학기술력과 사회발전(민주화 포함)은 매우 낙후된 것으로, 그리고 대외경제활동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동일한 지표를 적용하여 2020년의 중국 국력수준을 추정한 결과 미국·일본·독일·프랑스·캐나다에 이어 세계 6위로 나타났다. 중국의 부국강병에 대한 염원을 감안할 때 캐나다는 이미 그 목표선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현재 중국은 ‘프랑스 모델’을 향해 매진하고 있다고 보겠다.
중국이 위에서 언급된 장점들을 앞으로 지속적으로 발휘하며 또 단점들을 제대로 보완할 경우 ‘프랑스 모델’로의 성공적 진입은 물론 패권국의 위상을 갖는 ‘미국 모델’로의 접근까지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자원(식량 및 에너지) 문제, 정치개혁의 충격, 내부통제의 문제를 지속적 발전의 장애요인으로 꼽는 이들도 적지 않다.15 즉, ‘인도 모델’이나 ‘인도네시아 모델’로의 회귀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선 중국 자신이 강국 건설에 대한 집념과 비전을 가지고 있으며, 내부현상으로서의 발전을 외부에서 원천적으로 막을 방법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위협을 기정사실화한다거나 중국의 등장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기보다는 ‘부상’하는 중국을 어떻게 규범을 공유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만들어나갈 것인지에 대한 건설적 논의이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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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삼중전회를 분수령으로 삼는 데에는 그 상징적 의미가 더 크다고 할 것이며, 실질적 정책변화의 기점과 폭은 영역별로 상당한 편차가 존재한다.↩
- Richard Layard, “Why So Much Pain? An Overview,” in Peter Boone, Stanislaw Gomulka, and Richard Layard (eds.), Emerging from Communism: Lessons from Russia, China, and Eastern Europe (Cambridge: MIT Press 1998) 1~7면 참조.↩
- ‘실험주의학파’(E-School)와 ‘수렴주의학파’(C-School) 사이의 논쟁과 관련하여 The China Journal, No. 41(January 1999) 115〜56면 참조.↩
- 馬立誠·凌志軍 『交鋒―當代中國三次思想解放實錄』(北京: 今日中國出版社 1998).↩
- 졸고 “Regional Disparities, Policy Choices, and State Capacity in China,” China Perspectives, No. 31(September-October 2000) 36~51면 참조.↩
- 桂世鏞 『中國計劃體制改革』(北京: 中國財政經濟出版社 1994) 9면과 成致平 (主編) 『中國物價五十年(1949~1998)』(北京: 中國物價出版社 1998) 922면 참조.↩
- 中國科協促進自然科學與社會科學聯盟專門委員會 (編) 『‘法輪功’現象的心理學剖析』(北京: 黨建讀物出版社 2001) 참조.↩
- 예를 들어 The China Quarterly, No. 162(June 2000) 465~512면 참조.↩
- 『半月談 內部版』 第2期(2000年) 8~31면과 第1期(2001年) 40~42면 참조. ↩
- 졸고 「파룬공, 인터넷과 중국 내부통제의 정치」, 『한국정치학회보』 제35집 3호(2001년 가을호) 304~5, 310~12면 참조.↩
- Gordon Chang, The Coming Collapse of China (New York: Random House 2001)↩
- Steven W. Mosher, Hegemon: China’s Plan to Dominate Asia and the World (San Francisco: Encounter Books 2000) 참조.↩
- Harvey Nelson, “The Future of the Chinese State,” in David Shambaugh (ed.), The Modern Chinese Stat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230~36면 참조.↩
- 寵中英 「如果日本成爲亞洲的德國」, 『世界知識』 第9期(2001年) 17면 참조.↩
- Bates Gill, Jennifer Chang, and Sarah Palmer, “China’s HIV Crisis,” Foreign Affairs (March-April 2002) 96~110면 참조.↩
- 중국의 부상이 한국에 대해 갖는 전략적 딜레머에 대하여는 졸고 “South Korea Between Eagle and Dragon,” Asian Survey, Vol. 41, No. 5(2001) 777~96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