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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소용돌이 속의 동아시아

 

일본의 ‘철의 삼각구조’

 

 

개번 머코맥 Gavan McCormack

1974년 런던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 받음. 현재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 아시아태평양사학과 교수. 오스트레일리아 학술원 회원. 1962년 이래 일본을 꾸준히 방문하였고 쿄오또대·코오베대·리쯔메이깐대 객원교수 역임. 본지에 「일본사회의 심층구조와 ‘국제화’」(84호) 「일본 ‘자유주의사관’의 정체」(98호) 등의 글을 발표한 바 있음. 그의 저서 중 『일본, 허울뿐인 풍요』(The Emptiness of Japanese Affluence, 창작과비평사 1998)가 번역되어 소개됨.

ⓒ Gavan McCormack 2002 / 한국어판 ⓒ 창작과비평사 2002

 

* 이 글은 『뉴 레프트 리뷰』(New Left Review) 13호(2002년 1-2월호)에 실린 “Breaking the Iron Triangle”을 일부 축약하여 옮긴 것으로, 생략한 부분은 표시를 해두고 영어로 번역된 일본 관련 어휘들은 일본어로 되돌려놓는다.–––옮긴이

 

 

9·11 사태 직후 급히 워싱턴으로 달려간 일본 총리는 부시와 그 보좌진의 관심사가 테러와의 전쟁과는 아주 먼 데 있음을 알고 당황했다.1 자위대를 파병하겠다는 코이즈미(小泉)의 제안은 제쳐놓고, 대통령 자문위원들은 곧장 핵심문제로 들어갔다. 그들이 알고 싶은 것은, 일본이 심각한 부채를 언제 해결할 작정인가 하는 점이었다. 80년대의 거품이 꺼진 이후 10여년 동안 일본은 세계자본주의의 환자 격이 되어왔지만, 지금도 상황은 급속히 악화되고 있다. 질병은 금융과 재정 부문에서 체제 전체로 번져나가며 한때 자신감과 위용을 자랑하던 경제에서 활력을 앗아갔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02년 3월까지 1년 사이에 국내총생산(GDP)이 0.9% 줄어들고 그다음 1년 사이에는 1.3%가 더 떨어질 것이라 예고했는데, 이는 50년대 이후 일본이 겪은 경기하강 중 가장 지속적인 것이다.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손댈 수 없는 규모에 이르렀다. 암울해지는 국제상황에다 국내적으로는 물러갈 줄 모르는 ‘거품 후 불황’에 직면한 미국에 오늘날 진정으로 위협적인 것은 한줌의 와하비(Wahabi) 광신도가 아니라 일본의 경제위축이다. 이제 가속도가 붙어가는 쇠락의 과정은 지구 전체는 아니라도 이 지역 전체를 빨아들일 수 있는 내파(內破)를 촉발할 위험이 있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일본은 부와 생산성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내 지도적 위치를 바라볼 수 있었다. 21세기 초엽인 지금 일본은 1등 채무국이다. 빛은 물론 서서히 스러져간다. 1990년대에 일본의 GDP 증가율은 평균 1.3%로 높지는 않았지만 총량으로는 여전히 엄청난 규모로 미국 다음이며, 1인당 GDP는 16% 높아졌다. 일본은 여전히 세계 최대의 부국으로, 일본의 높은 저축률과 과소소비(過少消費)는 낮은 저축률에 높은 부채비율의 미국 체제를 떠받쳐주고 있다. 일본의 상품은 아직도 세계시장에서 높게 평가되며 무역수지도 줄어들고는 있으나 아직 흑자다.2 그러나 이런 정상적인 겉모습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된다. 일본은 전후 시기에 만성적인 디플레이션을 겪은 유일한 산업국가다. 닛께이(日經, 日本經濟新聞社가 산출·발표하는 주가지수---옮긴이)---1989년에는 3만 8천 포인트까지 치솟았지만 코이즈미 내각이 집권한 2001년 4월에는 그것은 이미 먼 기억이 되어버린---는 일시적일지는 몰라도 1만 포인트 저지선이 무너졌다. 거품이 꺼진 이래로 1364조엔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이 국가 자산에서 날아가버린 것이다. 1989년 이래 토지 자산이 775조엔, 채권이 589조엔 감소하여 각기 1989년 수준의 약 1/3 정도로 줄어들었는데, 그러고도 여전히 매우 불안정한 상태다.3

 

 

천국으로부터의 전락

 

매년 약 1%씩 물가가 하락하고, 기업들의 파산이나 해외 이전으로 실직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일본이 극심한 디플레이션의 악순환과정에 빠져들 위험이 심각하게 존재한다. 완전 ‘평생’고용이 한 세대도 안되는 사이에 사라져버렸고 실직자 수는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중략---옮긴이] 한때 막강하던 일본이 어찌하다 이 지경으로 전락했는가? 이 나라가 직면한 복잡한 문제들은 세계경제와 관련된 전지구적 차원과 국지적 차원을 모두 지닌다. 후자의 핵심 면모는 ‘토건국가’(土建國家)라는 독특한 체제에 있다는 것이 이 글의 주장이다. [이어 일본의 사적·공적 부문의 부채 규모 및 그 심각성이 상세한 수치와 함께 제시되어 있다.---옮긴이 요약]

 

 

토건국가의 기초

 

이런 심각한 사실들은 일본에서 비밀이 아니어서, 경제학자들이 이 나라가 파산했다거나 파산 직전이라고 선언한 지도 이미 여러 해 되었으며, 임박한 파멸에 관한 논의가 늘어나고 있다. 방심한 순간에 한 말이겠지만, 베테랑급 재무장관 미야자와 키이찌(宮澤喜一) 자신도 2001년 3월 이 나라가 “거의 파산지경”이라고 말함으로써 이 합창단에 합류했다.4 1990년대 중반에 재무장관을 지낸 타께무라 마사요시(武村正義)에 따르면 “나라가 망했다”. 일본이 이처럼 절망적인 재정궁핍에 시달린 것은 전쟁이라는 비상시말고는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악어의 눈물이다. 재무성의 자금운용 부는 수십년 동안 공공토목사업에 기반한 토건국가체제라는, 일본이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게 된 핵심고리인 그 독특한 체제의 주역을 맡아왔던 것이다.

토건국가는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일본 제조업자들이 아니라 정치인 및 관료, 금융기관, 건설업체로 구성된 ‘철의 삼각구조’(Iron Triangle)를 중심으로 한다. 그 작동방식은 불투명하고 책임소재가 불분명하며 따라서 개혁하기도 힘들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이 나라의 힘센 관료들로 하여금 국민의 노후자금을 빚투성이인 광범위한 공공단체들---이를테면 간선도로·교량건설·댐과 개발발의권을 담당하는 기구들---에 돌릴 수 있도록 해주며, 바로 이 관료 중 많은 사람은 은퇴 후 이런 기구에서 높은 보수의 한직(閑職)을 차지하기를 기대한다. 지역 정치인들에게 토건국가란 선거구에 새로운 공공토목사업계획---가능한 것이든 아니든---을 약속하고 그대신 자금과 표를 얻어낼 수 있음을 뜻한다.

이 체제에 심각한 결함이 있으며 개혁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는 이제 일반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다. 그러나 대개의 정치인들, 많은 관료들, 수천의 기업체와 수백만의 사람들이 얼마간이든 거기 의존하고 있다. 일본의 공공토목사업부문은 영국·미국·독일보다 3배 큰 규모까지 늘어나, 매년 40조엔에서 50조엔---GDP의 8% 내지 다른 산업국가들의 2배 내지 3배---에 해당하는 지출을 하고 있다. 당연히 많은 사람에게 단기적인 이익을 창출해주었는데, 1990년대의 오랜 경기후퇴 국면에서 실직률이 더 떨어지지 않도록 해준 것도 작지 않은 한 예다. 그러나 점차 공공토목사업으로 건설되는 기반시설(infrastructure)은 ‘외부시설’(extrastructure)---그 자체를 위해 수행되는 개발들---로 대체되었고, 한편으로는 체제의 핵심에서 일어나는 결탁으로 정치와 사회 모두 부패되었다. 현재 일본은 토지 단위당 댐과 도로의 수가 대륙에 위치한 미국보다도 더 많다. 일본 해안선의 절반과 강의 대부분이 콘크리트로 포장되었고, 간만에 따른 습지대(tidal wetland)가 배수시설로 말미암아 사라져버렸으며, 지하수가 완전히 고갈되고 생물학적 다양성도 위협받고 있다.

토건국가의 핵심에는 일본 특유의 두 가지 제도가 자리한다. 첫째는 자이또오(財投) 즉 재정투융자계획(財政投融資計劃)으로, 이 계획 아래 재무성의 자금운용부가 우정국 계좌와 ‘국가 연금·보험 계획’에 들어 있는 방대한 규모의 국가여신의 투자에 사실상 무제한의 재량권을 행사하고 있다.5 일본의 제2예산이라 불리고 실제로 그렇게 불릴 만한 자이또오는 민간부문 자금의 조달 여부와는 무관하게 국가의 장기적 발전에 필요한 공공토목사업 기획들을 수행해나갈 수 있게 한다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두번째 제도인 젠소오(全總) 즉 전국총합개발계획(全國總合開發計劃)은, 그 원형은 일본이 2차대전 전에 만주에서 시도한 국가건설 노력에 있으나, 1950년대에 전후(戰後) 재개발을 지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전후 초기 20년간은 사회 기반시설의 공공개발 수요가 분명했고, 성장이 매우 급속해서 대규모 공공투자계획들도 금방 채산을 맞출 수 있었다. 그러나 1973년 1차 오일쇼크부터 ‘기적적인’ 성장률은 3% 및 그 이하 수준으로 물러났고, 1974년만 해도 9.7%로 아직 낮았던 GDP 대 부채 비율은 올라가기 시작했다.

전후 시기에 성장은 보수적 재정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케인즈(Keynes) 식의 적극적 재정(fiscal activism)은, 국가가 경기부양을 위해 국채를 발행하여 자금을 지원하는 공공토목사업 패키지들을 늘려가기 시작한 1973년 이후에야 비로소 채택되었다. 타나까(田中) 총리 및 후임자들 치하에서, 토건국가는 나라 전체에 권력과 부패의 망을 뻗어나가면서 엄밀한 의미의 정치를 이해관계 대변(interest-representation)---거간꾼 역할---으로 바꾸어놓았고, 이는 그 단기적 이득 및 그것이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 성장의 견인차로 정당화되었다.

 

 

열도의 콘크리트화

 

자이또오는 일본 자민당과 결탁한 대규모 건설업체들 및 은퇴한 관료가 대표로 있는 정부산하 기업들---시장의 차가운 바람이 뚫고 들어가기 힘든 영역---을 지원하는 기구가 되었다. 거품이 꺼진 1990년대 초 이후 만성적인 불황으로 접어들면서 정부는 더 큰 규모의, 효율성은 점점 감소하는, 케인즈식 재정적자(불황기에 유효수요를 확대하기 위해 공공사업 등을 통해 정부지출을 늘리는 정책---옮긴이)에 의존하였다. 눈덩이 효과에 통제 불가능한 추진력이 붙게 된 것은 이 단계에서였으며, 수십년 동안 이 공공토목사업 중핵을 확대해온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 진상이 드러났다. 그것은 ‘미래를 잡아먹는’ 지속 불가능한 사업으로 엄청난 환경적·사회적 비용만이 아니라 내장된 결탁, 부패 그리고 재정적 무책임을 특징으로 하는 것이었다. 1990년대 후반 무렵에는, 재정적자는 갈수록 부정적인 압력을 행사하여 일본경제를 현재의 최하점으로 끌어내리는 데 일조하면서, 만성적이고 구조적이며 지탱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렸다.

지금도 일본 지역의 풍경에는 1969〜76년 타나까가 추진한 ‘열도 재건설’ 젠소오 하에 세워진 재앙의 산업개발 기획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홋까이도(北海道)의 동(東) 토마꼬마이(小牧)와 아오모리현(靑森縣)의 개발기획들은 엄청난 채무로 붕괴하거나 역시 막대한 비용이 드는 다른 계획으로 변경되었다.---옮긴이 요약] 투기거품이 절정에 이른 1980년대에는 타나까의 거대 산업설비 대신 나까소네(中曾根)의 ‘리조트 열도’ 구상이 들어섰고, 민·관 합작기획이 대세로 자리잡았다. [그중 가장 대규모인 미야자끼현(宮崎縣)의 ‘가이아 바다의 해양돔’(Sea Gaia’s Ocean Dome)이라는 리조트 계획 역시 2001년 엄청난 빚을 남기고 파산, 미국 기업에 넘어갔다.---옮긴이 요약]

동 토마꼬마이와 미야자끼처럼, 일본 전역에 걸쳐 현재 수많은 도시와 부락들이 타나까와 나까소네 유형의 붕괴하는 토건국가의 유산 덕분에 재정위기에 봉착해 있으며, 청산자가 자산을 팔아치운 한참 후까지도 주민들은 부채의 짐에 계속 짓눌릴 것이다. 1990년대에 지방정부의 부채는 70조엔에서 187조엔, 즉 GDP의 15%에서 36%로 치솟았고, 현들은 잇따라 재정위기에 빠져들었다. 다리와 간선도로, 문화쎈터, 경기장, 화랑, 음악당을 건설하면서---개중에는 토오꾜오(東京) 중앙정부에서 90%까지 자금을 댄 경우도 많은데---수십년간 공공토목사업의 여물통에서 맘껏 뒹군 끝에, 축적된 부채와 늘어난 시설관리비용이 복지써비스를 압박하고 있다. 마침 노령인구의---특히 연금 및 의료·간호의---비용이 늘어나고 있는 싯점에 말이다.6 이 기획들이 케인즈식 경기촉발효과를 제공할 것이라는 주장은 이미 먹혀들지 않는다. 철의 삼각구조가 투여해온 경기부양용 주사액은 경제를 튼튼하게 만드는 대신 부풀게 만드는 스테로이드 구실을 한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에 토건국가는 고스란히 살아남았다. 2010년까지 국가개발의 청사진으로 1998년 3월 발표된 현재의 젠소오는 새로운 철도노선·고속도로·공항·정보씨스템, 섬들을 잇는 6개 이상의 새 교량, 대규모 댐, 핵관련 시설 등을 건설하고, 나아가 토오꾜오로부터 많은 기능을 인수할 새로운 수도까지 건설하겠다고 하는 웅장한 기획으로서, 수도 건설 비용만 해도 14조엔 가량에다가, 이를 보조할 운송 기반시설 비용으로 3조 내지 6조엔이 더 들어갈 예정이다. 중앙 및 지방 정부들이 공기업들과 함께 1995〜2007년에 걸쳐 납세자의 돈 630조엔을 투자하는 ‘공공투자 기본계획’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7

[그러고도 다른 여러 계획들이 있는데---옮긴이 요약] 200년에 한번쯤 닥치는 홍수에 대비해 주요 하천을 보호하도록 계획된, ‘슈퍼제방공사’라는 병적인 공정(工程) 역시, 완성까지는 1000년이 걸리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계획대로 진행중이다. 정부는 또한 오는 2001〜2010년에 최소한 10기의 새 핵발전소를 세울 작정인데, 이것은 굉장한 건설비용만이 아니라 적대적인 지역의견을 무마하기 위한 위로금으로 막대한 지출을 초래할 것이다. 한편 정부가 미 해군을 위해 오끼나와(沖繩)에 건설할 작정인 새 기지는 대략 1조엔의 가격표를 달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야마또(大和) 전함(1945년 4월 미군이 오끼나와에 상륙하자 발진하였으나 미 폭격기의 공격으로 침몰한 일본의 초대형 전함---옮긴이)처럼, 재무성 관할 공공토목사업체제는 더없이 장려한 건조물로 구상되었으나 선회할 수 없다시피 할 정도로 너무 거대하고 조종하기 힘든 물건으로 드러났다.

 

 

공식적 전략들

 

코이즈미는 근본적인 구조개혁이라는 공약을 기반으로 2001년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그가 다가올 고통을 경고하면서 자주 되풀이한 구호는 ‘성역은 없다’이다. 그러나 토건국가는 코이즈미가 속한 자민당의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 사실상 ‘또다른 나’(alter ego)이며, 그가 직무를 시작한 지도 1년이 다 되어가지만, 자신을 낳은 체제를 정말 해체할 계획이라는 조짐은 아직 없다. 그의 온갖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부채문제에 대한 코이즈미의 대처 방안들---연간 국채발행의 한도를 정하고, 은행에 공적자금을 더 투여하고, 더 많은 민영화를 추진한다는---은 두드러지게 온건하다. 연간 국채발행액의 최고한도를 30조엔으로 하는 것은 새로운 부채창출을 제한하는 조치일 뿐이다. 그러자면 지출을 4조엔 삭감해야 할 것이므로 재정정책상 함의(含意)하는 점은 과감한 바 있지만 무슨 진정한 해결책이 아니라 그 서곡에 불과함은 여전하다.

일본의 주요 은행들은 이미 다량의 공적자금을 흡수했고, 거기에는 1999년 2월 7조 5천억엔의 자본재구성 패키지도 포함된다. 그 댓가로 은행들은 철저한 구조조정을 감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많은 대도시 은행들은 서로 합쳐 ‘너무 커서 실패할 수 없는’ 4개의 거대 금융그룹들을 만들어내고는, 이전의 방식 그대로 경영해나갔다. 현재 코이즈미는 정부가 운영하는 정리회수기구(整理回收機構)가 부실대출을 납세자의 돈으로 인수함으로써 은행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제안한 상태이다. 더이상의 공적자금 투여는 없다던 1999년 2월의 약속을 저버린 것도 그렇지만, 이 계획에는 중요한 문제점들이 있다. 채무를 시장가격으로 처분할 수 있다면, 정리회수기구에 도움을 청할 필요가 전혀 없을 것이다. 반면, 이 기구가 청산할 대출을 선별한 다음 그 가격을 정하는 등, 중대한 관료 개입의 매개체가 된다면, 결탁에 의한 조작과 부패를 불러올 공산이 크다. 이 계획안이나 법률 초안 모두 책임소재 조항은 하나도 두지 않았으므로, 청산된 채무 대신 그저 새 채무가 생겨날 뿐이며, 그럼으로써 또하나의 싸이클이 시작되어 결국 미래의 언젠가는 부실대출 뭉치가 이 기구로 또다시 떠넘겨지지 않으리란 보장은 전혀 없다.

일본 정부는 어떤 종류의 시간표를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2001년 8월 금융청장 야나기사와 하꾸오(柳澤伯夫)는 가장 악성적인 채무 17조 4천억엔을 다 없애는 것도 아니고 반으로 줄이는 데만도 7년이 걸릴 것이라고 시사했다. 거기다 이 금액은 IMF나 미국 재무부 및 기타 분석가들이 ‘악성’이라고 간주한 총액의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 앞서 언급한 바, 9·11 이후 워싱턴회담에서 최종기한을 언제로 잡고 있느냐는 부시의 퉁명스러운 물음에 코이즈미는 “2,3년”이라고 가볍게 답변했다. 나중에 그는 자신감을 잃은, 그러나 분명 정신을 차리지는 못한 모습으로, 백악관 잔디밭에 모여든 기자단 앞에 나타나 영어로 즉석 연설을 했다. 그는 “나는 우리가 우방임을 말하면서 매우 즐거운 마음입니다”라고 선언했다.

 

멋진 대화를 친근하게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전합니다. 우리 일본인은 테러리즘을 분쇄하는 데 있어 기꺼이 미국정부 편에 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전지구적 목표를 확실히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결단과 인내를 가지고 테러리즘과 싸워야 합니다. 아주 좋은 만남이었습니다. 환상적인 만남이었지요.8

 

전쟁기금과, 백악관이 강조한 바, 아프가니스탄만이 아니라 그 주변 지역의 전후 재건에 일본이 실제로 무엇을 기여할 것이냐는 질문이 나오자 코이즈미는 즉각 대답했다. “모든 것”이라고. 미국 투자회사와, 여기 일본에서는 하게따까(禿鷹, ‘대머리독수리’라는 말로 약자를 희생시키는 무자비한 자를 뜻함---옮긴이)라고 알려진 헤지펀드(hedge fund)들이 일본의 ‘채무불이행’ 자산들을 공짜나 다름없는 헐값에 인수한 최근 사태는 그의 말이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이아 바다’ 리조트는 이중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일 뿐이다.9

민영화는 코이즈미 개혁안의 핵심조항이지만, 기록을 보면 과연 이것으로 뭔가 많이 해결될지 의심스럽다. 최근의 가장 두드러진 민영화 사례는 37조엔이라는 막대한 채무를 이유로 1987년 나까소네 내각이 추진한 일본국유철도(日本國有鐵道)의 민영화였다. 14년이 지난 현재 자산은 다 매각되었지만 채무는 그대로 남았고, 38조로 불어난 상태에서 1998년 구국철채무처리법(舊國鐵債務處理法)이라는 특별법에 의거해 국가로 넘겨졌다. 코이즈미의 민영화 후보에는 현재 우정국과 일본간선도로공사가 들어 있는데, 후자 하나만도 23조엔 가량의 채무를 안고 있고 민영화 직전 일본국유철도의 상태보다도 더 나쁜 재정상태에 놓여 있다고 여겨진다.10 채무변제대상자산 사냥꾼이 삼킬 또다른 먹이 가운데는 현재 두 섬을 잇는 세 개 교량을 책임지고 있으며 4조엔 가량의 채무를 안고 있는 혼슈우(本州)–시꼬꾸(四國) 교량 당국, 1조엔 적자를 보았고 서서히 오오사까(大阪) 만의 진흙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칸사이(關西)공항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항은 1조 5600억엔이 추가지출되는 확장 ‘제2단계’로 진행하라는 청신호를 받은 상태다.

 

 

관료의 요새

 

결국은 세금인상과 지출삭감이 불가피해 보인다. 저명한 강단 경제학자였던 타께나까 헤이조(竹中平藏)는 1998년에 소비세 14% 인상안을 오부찌(小淵) 총리의 경제전략위원회에 공식적으로 제안했다.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지는 듯했으나 채택되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전의 마지막 세금인상 때---1997년 3%에서 5%로 인상---약한 회복세의 추진력이 즉각 사라지고 자민당에 대한 정치적 지지가 줄어들었다는 이유에서일 것이다. 타께나까는 현재 경제재정담당상으로 코이즈미의 오른팔이다. 비록 현재의 추산으로는 20%나 그 이상까지 인상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나오지만, 어쨌든 타께나까의 세금인상은 정치상황만 허용한다면 언제라도 시행될 것으로 추정된다.

지출삭감을 살펴보면, 공공토목사업 계획들을 재심(再審)하는 공식적 정책이 1999년 이후 자민당과 그 연정 파트너들에 의해 추구되어왔지만, 이것은 외과수술이라기보다는 성형수술이다. 그 결과, 검토된 8천여개 개발계획 가운데 0.5%도 안되는 계획만이 취소되었으며, 거기에는 경제학자와 환경운동가로 이루어진 영향력있는 모임에서 ‘최악의 100가지’로 손꼽은 계획은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 가장 악명높은 한 경우가 나가사끼현(長崎縣)의 아리아께(有明) 바다---일본 최대의 습지대이나 현재 말라들고 있으며 지역 명물인 조개들이 대규모로 죽어나가고 해초양식업도 붕괴하고 있는---의 이사하야(諫早) 습지대를 배수·간척한다는, 비용도 막대하고 필요도 없으며 환영도 못 받는 기획이다. 총리로서 첫 의회에서 이 점에 대해 질의를 받은 코이즈미는 그가 거느린 한 관료정치 파수꾼이 집필한 변명문을 낭독함으로써 유서깊은 방식으로 대응했다. 핵발전과 미·일 군사동맹의 고수(固守)가 건드릴 수 없는 가장 신성한 성역으로 남으리라는 점 또한 분명하다.

코이즈미가 간선도로 건설---거기에 자이또오 공적자금의 거액 보조금이 정기적으로 보충되는---의 주된 배분몫인 연간 6조엔의 기금이라는 또하나의 성역을 잠시 위협했을 때, 사실상 전국의 모든 지방정부들이 한 목소리로 항의했고, 이어진 소란은 만일 그가 토건국가 전체를 진지하게 공격하려 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미리 맛볼 수 있게 해주었다. 도로건설은 일본 토건국가에 중핵이 되어왔으니, 이어지는 5개년 계획들 아래서 쏟아부은 금액도 1967년 6조 6천억엔에서 현재 78조엔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늘어왔다. 그 수혜자는 건설작업에서 올리는 부수입에 의존하는 지역 농민들로부터, 은퇴 후 국유도로를 관리하는 다양한 정부산하 기업에서 많은 월급을 받으며 한자리 차지하고 살쪄가는 아마꾸다리(天降り, 낙하산식 인사를 가리킴---옮긴이) 관료들에 이른다. 간선도로 건설 축소가 발표된 지 한달도 못 되어 자민당은 그 문제를 ‘연구’하겠다는 이야기일 뿐이라며 발을 뺐다.

아마도 일본에서 토건국가에 관한 제1의 권위자일 이가라시 타까요시(五十嵐敬喜)가 지적하듯, 코이즈미의 도로 관련 제안은 가령 5개년계획에서 물관리와 하수처리에 배분된 자금(각기 24조 및 23조엔) 등 모든 신성불가침한 계정(計定)들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그의 제안은 관료들이 막대한 금액의 납세자 돈을 공공의 감시나 책임성 없이 전유하는 통로인 젠소오체제 전체에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한편, 행정의 구조개혁이 거론되는 가운데서도 바로 얼마 전 이전의 건설성이 상당히 격상되어, 건설성이 운송성·국유지청·홋까이도개발청과 합치면서 국토교통성(國土交通省)이 되었는데, 이 국토교통성은 7만명의 관료가 재직하며 공공토목사업에 투입되는 전체 세액의 80%, 즉 40조에서 50조엔을 관장하는 초대형 부처이다. 이런 개편이 회계 및 공공토목사업 예산의 호된 삭감의 서곡이 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 2001년 10월 이 새 부처는 1987년 젠소오에서 정한 간선도로건설 비용을 조금이라도 삭감하는 데 단호히 반대하는 것으로 보도되었다.

 

 

환경적 불만들

 

그러나 민주적이고 지속가능하며 근본적으로 다른 대안에 대한 요구가 진지하게 고려되기 시작한 지역 차원에서는 토건국가에 대한 저항의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다. 격렬한 지역운동이 벌어지면서, 시꼬꾸의 토꾸시마현(德島縣)에 있는 요시노강(吉野川) 삼각주 댐과 키또오(木頭) 부락의 호소고오찌(細川內) 댐 계획이 (요시노강의 경우 주민투표를 거친 연후) 모두 다 취소되었다. 시마네현(島根縣)에서는 나까우미(中海) 호수의 넓은 부분을 담수화·간척하는 사업이 거의 작업완료 단계임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중지되었다. 아이찌현(愛知縣)의 오랜 시민운동은 부지에 대한 환경적 영향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계획된 엑스포를 일부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나가노(長野)·토찌기(梔木)·찌바(千葉)처럼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현들에서도 최근 선거민은 이익집단에 뿌리를 둔 자민당의 공공토목사업구조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 지사(知事)를 당선시켰다. 나가노현 지사인 타나까 야스오(田中康夫)는, 인간공학적인 해법을 강요하는 대신 태풍이나 홍수 같은 현상에 대한 자연의 대응능력을 강화해야 한다며, 콘크리트 댐 대신 ‘녹색 댐’을 짓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토건국가의 특수이익집단들이 아니라 주민과 시민사회에 의해 지역정치의 방향이 결정되는 방안을 만들어보려는 타나까의 시도는 폭넓은 주목을 받고 있다.

코이즈미 프로그램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설득력있고 경제적으로 실행가능한 대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 내용의 널리 알려진 글에서, 경제학자 카네꼬(金子)와 지노(神野)는 광범한 구조개혁을 요청한 바 있다.11 국가 문서-따라서 그것을 관리하는 관료들의 행위-를 철저한 비판적 검토에 부치는 데에 입각한 이들의 제안은 일본 국가의 발본적 재검토를 수반하는 것이다. 식량·에너지·간호(care) 등 핵심업무를 그 관리에 필요한 재정자원과 함께 전적으로 지방정부의 손에 쥐여주는 탈중심적인 체제를 통해 주요 정부기능들을 토오꾜오 중앙정부에서 지역으로 이관하자는 것이다. 이제 책임성있는 지역의 통제하에 놓이고 대손충당금(deficit funding)도 박탈당한 공공토목사업은 지역의 필요에 부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재 토건국가의 동맥경화증에 걸린 혈관 속을 돌고 있는 자금들은 복지나 노령층 간호, 주택, 환경, 교육 등 사회적으로 필요한 부문으로 돌려질 것이다.

중앙정부는 복지에 대한 최소한의 국가기준을 정하고 지역간 격차를 조절하는 책임은 지겠지만, 다른 면에서는 내치 기능을 대폭 축소하여 ‘채무관리형국가(債務管理型國家)’로 재편될 것이다. 부채의 경우는, 우선 동결하고 나서, 주가가 높을 때는 국가자산에 편입된 주식을 팔고, 이자율이 낮을 때는 국채를 차환(借換, 새 공채를 발행해서 그 자금으로 구 공채를 상각하는 일---옮긴이)하는 장기적인 국가재정관리 전략을 통해 부채를 서서히 줄여나간다는 것이다. 카네꼬와 그의 동료들이 제안하는 것은 다름아니라, 1889년 메이지헌법에서 결집해냈고 그후로는 거의 의문없이 받아들여온 근대 국민국가 계약을 재작성하자,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전근대 에도(江戶) 시기의 고도로 탈중심화된 양태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재지역화’는 국내의 재정·경제 위기에 대한 대응일 뿐 아니라 소외를 가중시키는 지구화의 힘들에 대한 대응, 지구적 혹은 미국적인 기준을 지역의 기준으로 대체하려는 대응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의 목표가 그럴듯하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들은 일본에 근본적인 민주적 변화욕구에 대한 광범위한 인식이 자리잡고 있음을 시사하는 사례다.

 

 

개발 자본주의를 넘어서?

 

토건국가는 일전에 챌머즈 존스턴(Chalmers Johnston)이 분석한12 바 있는 ‘개발 자본주의’(developmental capitalism)의 한 국면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존스턴의 분석은 통상산업성(通商産業省)을 촛점에 둔 것이었으나, 그보다는 재무성이 훨씬 더 막강하고 그 산하 자금운용부의 행태가 통상산업성 정책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갖는다. 지난 30년 사이에 토건국가 형태의 개발은, 성장 및 그에 수반된 세수증가가 중대한 적자누적을 막아주는 동안은 재정적으로 양호하거나 중립적인 상태였다가, 1980년대의 인플레된 세수가 사라지고 성장이 실질적으로 멈추면서는 악성의 형태로 서서히 변해왔다. 제조업부문이 신자유주의 질서에 적응---커다란 사회적 댓가를 치루면서나마---해온 반면, 핵심 건설부문은 오히려 더 단단히 국가를 붙잡고 늘어졌다. 토건국가 주위에 들러붙은 정치적·관료적·경제적인 기득권층은 엄청나게 가지를 친, 난공불락처럼 보이는 구조물을 건설해냈다. 그 건설의 명분이 된 가설들---계속 올라가는 상승곡선---이 다 무너져내리는 마당에서도 말이다.

건설업 및 그 재정적 후원자들이 토건국가를 지탱하는 인공적인 생명유지 씨스템 위에서 살쪄가는 동안, 나머지 경제부문에서는 지원이 빠져나갔으니, 특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사하는 중소기업부문이 그러했다. 코이즈미는 그의 개혁이 가져올 고통을 즐겨 강조한다. 그러나 정부의 과거기록---거품과 부채를 부풀린 장본인인 은행과 건설업체들에는 재정지원을 해주는 반면 정치적으로 힘이 없는 소기업들은 무시한---을 보면 고통이 그 원인에 대한 책임과 반비례하는 방식으로 배분될 가능성이 크다. 책임을 어디다 돌릴 것인가에 대해서는 코이즈미는 당연히 침묵을 지킬 뿐, 일본인이 직면한 극심한 손실이 철의 삼각구조의 영주들이 저지른 탐욕과 배임행위 때문이 아니라, 마치 신의 뜻에 따라 일어난 것처럼 처신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여전히 일본은 가장 안전하고 가장 편리하며 번영을 누리는 국가 중 하나이지만, 그 재정적·금융적 기반은 무너지고 있다. 붕괴의 단층선은 여럿이다. 민간부문 대출을 정리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 체제의 안녕은 여전히 엄청난 공채를 차환(借換)하거나 확대하는 능력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인구학적인 면에서만 보더라도, 일본이 연간 50조엔 이하라는 현재 수준의 재정으로 국가의 책무를 수행하기란 곧 불가능해질 것이다. 2003년경부터는 노령화가 급속히 진전되고 있는 이 사회에서 복지와 공공연금에 들어가는 지출이 급상승하여 70조엔 이상의 계산서가 나올 것인데, 이를 맞추기는 분명 불가능하다. 더욱이 채무를 계속 차환할 수 있으려면 체제에 대한 투자자의 신뢰가 유지되어야 한다. 일본국가가 여전히 견실한 보증인임은 분명하지만, 국제기구들은 일본의 국가 신인도를 계속 낮추어왔다. 부채규모가 좀더 널리 알려지게 된 1999년 이후 민간투자자들은 채권시장에서 손을 떼기 시작했고 그 대신 기관투자자와 은행 들이 들어서고 있다.13 제로 이자율 정책과 경제불황 상황에서 은행들로서는 이제껏 부담을 도맡아 떠안아온 중소기업부문보다는 국채나 미국 재무부증권에 투자하는 편이 훨씬 더 합리적이었다. 엔화가 더 약화된다면 일본의 우정국·생명보험·연금기금의 적립금들은 더 나은 이율을 제시하는 다른 기구들로 빠져나가기 시작할 것이다. 금융기관과 연금기금 기관들로 하여금 국채를 대량 인수하도록 강요할 관료들의 힘도 아마 침식되기 시작할 것이다.

 

 

증가하는 지역적 긴장들

 

‘구조개혁’이니 ‘성역은 없다’ 등의 구호를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대중의 박수를 받고 있지만 코이즈미는 어떤 신뢰할 만한 프로그램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사실, 이해관계 정치의 거간꾼 체제가 너무나 뿌리깊은지라, 그도 한편으로는 자기 선거구---카나가와현(神奈川縣)의 요꼬스까(橫須賀)시에서 찌바현의 훗쯔(富津)시까지 토오꾜오만을 가로지르는---에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를 건설하기 위해 막대한 ‘선심성 정부사업계획 교부금’(pork fund)을 확보하고 있다고 한다. 디플레이션의 악순환이 눈앞으로 다가왔으나 어떤 종류의 새 질서를 추구할지 아무런 전망도 없는 상황에서, 부실대출을 처분하려는 금융부문의 움직임들과 예산삭감은 더 나은 결과에 대한 확신은 주지 못한 채 사회적 긴장만 강화시킬 조짐이다.

코이즈미가 집권한 첫 여름 동안 총리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는 90%라는 유례없이 높은 수준까지 치솟았다. (몇달 전 모리森 내각하에서 8%라는 역시 유례없는 낮은 수준으로 떨어진 다음의 일이다.) 그의 이메일 매거진은 200만의 구독자수를 자랑했고, 티셔츠·포스터·휴대폰마다 그의 얼굴로 장식되었다. 59세인 코이즈미는 비교적 젊으며 신선한 얼굴, 깨끗한 배경 그리고 좀더 열린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인기몰이에 정치적 뿌리가 있다면, 그 가장 큰 요인은 아마 그가 자민당 정치를 끝장낼, 달리 말해 그 자신 정치생활 내내 헌신해온 그 정당과 맞서 싸우고 심지어 무너뜨릴, 가장 나은 희망으로 여겨진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직에 오른 지 1년 가까이 된 지금 행복한 기대감은 사라져가는 한편 위기가 깊어지고 있다. 어떤 가능한 개혁을 이루자면 적어도 10년은 걸릴 것이며 토건국가의 뿌리깊은 이해관계와 맞서 싸워야 할 것이다. 그 사이에 일본인은 늘어나는 사회적·정치적 긴장과 급격한 수입 감소를 겪게 되어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코이즈미의 대중주의가 좀더 권위주의적인 흐름에 문을 열어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한편 2001년 9월 IMF에 ‘특별감사’를 요구한 것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밀고 나가기 위해 ‘외부압력’에 기대는 비겁한 정치인들의 이제는 낯익은 행태처럼 보인다.

일본은 상품수출을 충분히 지원하여 경제를 회생시켜보자는 희망에서, 미국의 암묵적인 찬성하에 엔화를 상당히 평가절하할 수 있었고, 2001년 9월 이래 달러 대비 엔화 가격은 8% 하락하였다. 작전의 여지는 상당히 좁다. 충분히 평가절하된 엔화는 자본 이탈을 초래하여 이자율 상승의 압력을 낳을 수 있다. 막대한 규모의 부채를 감안할 때, 지극히 경미한 상승도 파국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동시에, 정말 효과를 보자면 엔화 가치를 훨씬 더 떨어뜨려야 할 것이다. HSBS(영국계 은행으로 세계 10대은행 중 하나---옮긴이)는 엔화를 10% 평가절하해도 2년간 GDP 성장이 0.5%밖에 늘어나지 않으리라고 계산하고 있는데, 일본이 경기후퇴에서 빠져나오기에는 모자라는 수치다.14 엔화의 가치하락이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에 평가절하 경쟁의 악순환을 불러와, 1997년 금융위기로부터 아직도 회복중인 이 지역에 새로운 경제불안 물결이 몰아닥칠 위험이 크다는 날카로운 경고가 이미 중국·한국·말레이시아에서 나온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미국의 호황이 절정에 달했던 때보다 그런 외상(外傷)적 경험에 대처할 능력이 훨씬 줄어든 세계경제에 일본의 디플레이션을 수출할 위험이 있다. 1990년대에는 일본의 경제악화가 근본적으로 대내적인 문제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코이즈미의 포스트모던한 브랜드의 속류 민족주의는 이미 늘어나고 있는 지역적 긴장을 악화시키게 될 뿐이다.

〔金英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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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霍見芳浩 「米國から見た‘對米7つの協力’」, 『週刊金曜日』 2001년 10월 5일자. 충고와 비판, 제언을 준 Jennifer Amyx, Aoki Hidekazu, Kaneko Masaru, Mark Selden, Andrew Glyn에게 감사한다.
  2. “낙천적인 미국인들이 자신들이 생산한 것보다 4〜5% 더 소비한다면, 조심스런 일본인들은 생산한 것보다 2〜3% 적게 소비하고 태평양 너머로 저금을 보냄으로써 미국의 호황을 유지해주는 소비자 부채를 뒷받침할 수 있게 도와준다.”Ronald Dore,“Will Global Capitalism be Anglo-Saxon Capitalism?”New Left Review6호(2000년 11-12월호)112면.
  3. Hideo Tsuchiya, “Time for Industry to Cede to Intellect,”Nikkei Weekly2000년 1월 17일자.
  4. 미야자와의 표현은 “破局に近い”였다. “Japan Nearly Bankrupt,” Sydney Morning Herald 2001년 3월 9일자; “To Grieve Over the Fiscal Deficit?” Asahi Shimbun 1999년 12월 31일자.
  5. 미출간 원고인 아오끼 히데까즈(靑木秀和)의 「財政投融資論」이 이 제도에 대한 최상의 논의를 보여준다. 이 원고를 접하게 해준 아오끼씨께 감사드린다.
  6. 神野直彦·金子勝 『財政崩壞お食い止める―債務管理型國家の構想』,東京 2000,32〜33면;21世紀環境委員會 『巨大公共事業』,東京 1999,42면.
  7. 平本一雄 「新首都誕生」, 『實業の日本』 특별호(1996년 6월)52〜57면.
  8. Office of the Press Secretary의 보도자료 “White House,”2001년 9월 25일자.
  9. 霍見芳浩 앞의 글;“Why is the US Urging Japan to Dispose of Bad Loans?”JPS News2001년 7월 18〜21일.
  10. 加藤秀樹·構想日本 「道路公團‘健全經營’のかうくり」, 『中央公論』2001년 8월호 154면;“Review of Public Bodies Increases Sad Reality,”Nikkei Weekly2001년 6월 25일자 6면.
  11. 金子勝·神野直彦·野村容康 「財政崩壞お食い止める–債務管理型國家の構想」, 『世界』 2000년 10월호;金子勝 『日本再生論』,東京 2000,143면 이하.
  12. Chalmers Johnston,MITI and the Japanese Miracle:The Growth of Industrial Policy,1925~75,Stanford1982.
  13. 국채의 은행보유고는 1990년대 내내 30조엔 가량의 수준을 유지해오다가 1999년 4월에서 2001년 4월 사이에 79조 4천억엔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14. David Pilling and John Thornhill, “Japans Currency Trap,”Financial Times2002년 1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