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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촛점 | 팔레스타인 노트

 

국제작가회의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방문기

 

 

빈첸쪼 꼰쏠로 Vincenzo Consolo

딸리아 소설가. 1933년 씨칠리아 출생. 대표작으로 『알지 못하는 선원의 미소』(Il sorriso dell’ignoto marinaio, 1976) 등이 있음. 1994년에 자신의 전집으로 International Union Latin과 Flaiano 상을 받았다. 이 글의 원제는 “The IPW’s Journey to Israel/Palestine”임

ⓒ IPW 2002 / 한국어판 ⓒ 창작과비평사 2002, Reprinted with permission from IPW

 

 

그녀는 색깔있는 널따란 치마 밑으로 다리를 꼬고 머리에는 하얀 스카프를 쓴 채 울퉁불퉁한 인도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 그녀 앞에는 들판에서 자생하는 박하 종류인 작은 칼라민트 송이로 가득 찬 바구니가 놓여 있다. 그녀는 거친 손으로 재빨리 둥근 낫을 치마 밑에 숨긴다. 그녀는 몇시인지 모를 이른 새벽 라말라 근처 사막의 바위언덕에 올라 이 방향성(芳香性) 약초를 채집하는 데 그 낫을 사용했다. 이 약초를  달여마시면 장에 새기운이 돋고 여러가지 병을 예방하며 신경을 가라앉혀서 근심과 두려움을 없애준다. 더위와 추위 탓에 얼굴이 굳어진 이 당당한 농부 여인은 칼라민트, 치커리, 엉겅퀴, 야생 아티초크 등을 팔아서 자식들을 부양하고 있는 어머니임에 틀림없다. 그녀는 「사아드의 어머니」(Umm Saad, 가싼 카나파니 Ghassan Kanafani의 작품---옮긴이)라는 단편소설에 나오는 사아드의 어머니를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또다른 작가들이 그려낸 영웅적인 어머니들, 예컨대 고르끼(M. Gor’kii)의 ‘어머니’, 브레히트(B. Brecht)의 ‘억척어멈’ 그리고 비또리니(E. Vittorini)의 『씨칠리아에서의 대화』(Conversazione in Sicilia, 1939)에 등장하는 어머니를 생각나게 한다. 그녀에게도 싸우고 있는 아들 사아드가 있을까? 그녀에게도 사이드(Said)처럼 벌써 사격훈련을 하고 있는 다른 어린 자식이 있을까? 의심할 여지 없이 그녀는 진창투성이 난민촌의, 양철판 벽으로 만들어진 조그만 방에서 살고 있다.

나는 스페인 작가 후안 고이띠쏠로(Juan Goytisolo), 중국 시인 뻬이 따오(北島), 팔레스타인 작가 엘리아스 산바르(Elias Sanbar)와 함께 라말라 중심가에서 머물렀다. 산바르는 마흐무드 다르위시(Mahmoud Darwish)의 『지구는 너무도 작다』(La terre nous est étroite)라는 작품을 불어로 번역하였다. 우리는 이 초라하고 상처입은 도시의 둥근 광장 주변과 대리석 사자상 네 마리가 있는 메마른 분수대 주변을 산책했다. 산바르는 우리에게 이상한 것을 보여주었다. 사자 발에 조각가가 우스꽝스럽고 초현실주의적인 시계를 조각해놓은 것이다. 이 시계는 어떤 시간을 가리키는 걸까? 전쟁의 시간인가, 평화의 시간인가, 고문받는 이 땅에서 고통이 끝나는 시간인가? 우리 세 사람은 어제 텔아비브에 도착한 국제작가회의 대표단의 일원이다. 작가, 영화제작자, 저널리스트 들을 포함한 우리는 3월 24일 오전에 빠리를 출발하여 오후에 텔아비브에 도착했다. 그후 우리는 버스를 타고 라말라로 가면서 씨칠리아의 이블레이(Iblei) 고원 비슷한 바위투성이 사막 언덕의 풍경을 지나갔다. 우리는 이스라엘군 검문소에서 멈췄는데, 그곳은 위장막으로 덮여 있고 그 틈새로 자동소총의 총열이 불쑥 튀어나와 있는, 철근 콘크리트 진지였다. 여기서부터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우리를 떠맡았다. 불빛을 번쩍이며 음울한 싸이렌을 울려대는 경찰차가 우리를 앞에서 인도하였다. 우리는 호텔에서 다르위시를 비롯해 우리의 여정 내내 안내를 맡은 PLO 대변인 레일라(Leila)를 포함한 다른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만났다. 불과 며칠 전에 고이띠쏠로는 『르몽드』(Le Monde)지에 기고한 글에서 아라파트처럼 이스라엘인들에 의해 라말라에 연금되어 있는 시인 다르위시가 팔레스타인 민중의 환유(metonymy)라 쓴 바 있다. 이 ‘좁은 땅’에서 쫓겨나 강제로 난민촌에 수용된 사람들, 끝없는 분쟁으로 고통받는 팔레스타인에 갇힌 사람들 말이다.

다르위시는 「감옥」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내 주소가 바뀌었다

식사시간도 바뀌었다

담배 배급량도 바뀌었고

내 옷색깔, 내 얼굴, 내 모습도 바뀌었다

내 마음에 그토록

소중한 달도, 여기서

이제 더 아름답고 더 크다.

 

저녁 무렵 밖으로 나가자 엄청나게 환한 보름달이 맑은 하늘을 지배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언덕 꼭대기의 한 이스라엘 식민이주지(colony)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가리켰다.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라말라에 포격을 가했었다. 다음날 우리는 비르 자이트(Bir Zeit)로 떠났다. 가는 길에 우리는 『씨칠리아의 회교도 역사』를 쓴 19세기의 역사가 미껠레 아마리(Michele Amari)의 이름을 따서 알아마리(al-Amari)라 이름붙인 난민촌에 들렀다. 난민촌은 초라하고 비참했다. 좁은 길들은 검은 눈의 생기 넘치는 한떼의 아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떤 팔레스타인 사람은 “이스라엘인들이 우리 삶을 통제하고는 있지만 우리의 성생활까지 통제하지는 못한다”라고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인구통계학적인 투쟁도 점령, 즉 영토적·건축적·농업적·언어적 점령을 위한 투쟁인 셈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스라엘인들에 의해 내부가 파괴된 한 스포츠협회 건물들을 보여주었는데, 방이란 방은 모두 파괴되어 있었다. 가구는 아무런 형체도 없는 파편더미로 변했다. 나는 바닥에서 축구 팀을 그린 포스터 한 장을 집어들었다. 축구선수들은 빨간 티셔츠와 검은 숏팬츠를 입고 있었다. 나는 누가 아직 살아 있고 누가 죽었는지, 누가 여전히 자유롭고 누가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지 궁금해했다. 나는 예전에 사라예보에서 똑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포탄으로 파괴된 『해방』(Oslobodjenje)이라는 신문사 편집실의 잔해 속에서 신문 한장을 집어들었던 것이다.

매우 좁은 어떤 거리의 오두막들 사이에 네 노파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우리가 그들 곁을 지나가자 그들은 마치 자기들의 말에 리듬을 부여하고 싶은 듯 몸짓을 하면서 다함께 크게 소리질렀다. 신음과 욕설이 뒤섞인 말이 거침없이 흘러나왔지만,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는 유일한 소리는 “샤론”이었다. 네 노파가 함께 외쳐대는 말들은 마치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처럼 들렸다.

자동차와 트럭 들이 끝없이 줄지어 서 있고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길게 늘어서 있는 검문소에서 한참 기다린 후에 우리는 비르 자이트 대학에 도착했다. 우리는 학생들과 특히 ‘그들의’ 시인인 다르위시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강사들은 이 대학 학생수가 1500명인데 도로봉쇄 때문에 매일 등교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는다고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우리는 팔레스타인 작가 및 지식인들과 모임을 가졌고 팔레스타인 미디어쎈터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라말라로 돌아와 우리는 아라파트를 만나기 위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청사(the General Quarter of Palestinian Authorities)로 갔다. 잠시 뒤에 그가 사무실에 나타났다. 그는 소잉카와 사라마구를 알아보았다. 국제작가회의 의장인 미국인 러쎌 뱅크스가 3월 6일에 발표된 우리의 평화호소문에 대해 그에게 말해주었고, 우리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씨지가 무엇인지 물었다. 아라파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며칠 뒤에 유태민족이 이집트에서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유태인의 부활절이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오늘날의 노예인 우리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점령지들의 해방과 팔레스타인 국가의 인정을 이스라엘인들에게 요구한다고 미국 유태인들에게 전해주십시오. 어렸을 때 나는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 근처에서 살았습니다. 어린 시절 내내 나는 유태인 아이들과 함께 놀았지요. 사무실의 책상 옆에다 내가 유태교의 의식에 쓰이는, 가지가 일곱 개 달린 촛대를 간직해두고 있다고 미국인들에게 말해주십시오.” 그는 일어서서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그 가지가 일곱 개 달린 자그마한 촛대를 가지러 갔다. 그런 후에 그는 우리에게 여성 21명이 검문소에서 아기를 낳았으며 그중 갓난아기 한 명과 여인 두 명이 죽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나는 이 남자를 (20년 전인!) 1982년 9월에 튀니스(Tunis) 근처의 함맘리프(Hammam-Lif)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는 그해 레바논에서 탈출했고, 사브라(Sabra)와 차틸라(Chatila)에서 일어난 대량학살을 피해 그곳에서 피난처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일생의 적인 아리엘 샤론(Ariel Sharon)이 거기거 그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오늘 내가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 샤론은 다시 한번 그를 탱크로 포위하고 자치정부청사에 포격을 가해 전기도 물도 없이 두 개의 방에 갇혀 살도록 강요하고 있다. 그러는 동안 소년소녀들이 온몸에 폭약을 가득 채운 채 자살을 감행하고 이제는 지옥이 된 이 신성한 땅에서 서로를 죽이고 있다. 한편, 그의 적수인 샤론의 고집과 폭력, 그리고 그의 동맹자인 부시의 묵인이 여러 아랍국가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우리로 하여금 최악의 사태에 대한 두려움에 떨게 하고 있다. 교황은 거의 울먹이면서 “그들은 평화와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 막 돌아와 내 나라에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지내는 동안, 날마다 듣는 끔찍한 소식과, 팔레스타인 사람과 결혼하여 전기도 물도 없이 라말라의 집에 갇혀 사는 이딸리아인 친구 삐에라(Piera)와 매일 하는 전화통화들로 인해, 나는 모든 말이 부질없음을 느낀다. 나는 글을 써서 우리가 팔레스타인에서 목격한 것, 우리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 증언해야 하는 의무와 지금 벌어지고 있는 크나큰 비극 사이의 현격한 차이를 느낀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글을 써야 할 의무가 있다. 그 다음날 우리는 가자를 향해 떠났다. 국경지역에 있는 에레즈(Erez)의 검문소에서 역시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다. 반대편에서는 UN 깃발을 단 차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자에서 우리는 지옥의 고리들을 따라 내려가는 것처럼 칸 유누스(Khan Yunus)와 라파(Rafah)로 내려갔다. 이 두 마을은 최근에 재점령당해 파괴되었다. 특히 이집트 국경 근처에 있는 라파는 불도저로 땅바닥까지 완전히 밀어버렸을 정도이다. 안내원들은 우리에게 함께 붙어 있으라고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국경지역에 있는 높다란 소형 콘크리트 요새에서 발사된 총알에 부상을 당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파편더미를 오르고 있는 동안에 목발을 짚고 내 옆에서 걷고 있던 남자가 넘어져서 얼굴과 손을 다쳤다. 우리는 그를 도와 다시 일으켰다. 그는 어려움에 굴하지 않는 끈질긴 사람이었다. 그는 가까스로 우리 일행의 한가운데로 들어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 폐허 가운데 아내와 일곱 자녀와 함께 살던 그의 집이 있었다는 것이다.

새벽 두시에 탱크와 불도저가 도착해서 단 두 시간 만에 모든 집들을 파괴하고 밀어버렸다고 한다. 이제 그들 삶의 모든 것, 아이들의 연습장들 같은 그들 삶의 추억과 기념이 될 만한 물건들이 폐허 속에 묻혀 있다. 그 남자 옆에서 그의 아내일 법한 목소리 높은 여자가 그의 말을 되풀이하며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잠시 뒤 칸 야누스에서 우리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휘장과 꽃으로 장식된 좁은 거리에서 그들이 ‘순교자’라고 부르는 그 병사들과 테러리스트들 중 한 사람의 장례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장례식은 3일 동안 계속되는데 그 사이에 친척들이 방문하고 음식과 음악이 제공된다고 한다. 그것은 에르네스또 데 마르띠노(Ernesto De Martino)가 『죽음과 상례(喪禮)』(Morte e pianto rituale, 1958)에서 묘사한 고대 지중해의 의식이었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더 많은 죽음과 슬픔의 소식, 더 많은 팔레스타인 도시들이 점령당했다는 소식, 곳곳에서 자살과 대학살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비통한 소식이다. 그래도 나는 우리의 여행에 대해, 그리고 여행이 있었던 동안 다행스럽게도 잠깐이나마 폭력이 중지된 것에 대해 글을 써야만 한다. 그런데 잠에서 깨고 나면 단지 지극히 작은 단편들만을 기억하게 되는 꿈처럼, 그 여행에 대한 기억이 이제는 흐릿해졌다. 지금 기억나는 단편들은 다비드 그로스만(David Grossman, 이스라엘 동화작가---옮긴이)과의 만남, 옛 도시의 방문, 좁은 거리에서 벌이던 프란체스꼬 수도회 소속 수사들의 행진, 테두리가 넓은 모자와 기다란 코트를 입은 정통파 유태인들이 통곡의 벽을 향해 달려간 일, 그리고 우리의 정처없는 아랍 여행 등이다. 텔아비브에 있는 호텔의 거대한 홀과 샤론의 병사 옷을 입은 순진무구한 어린 소년소녀들의 광경처럼 기억나는 단편들이 더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의 반체체인사인 시인 아하론(Aharon)의 얼굴과 탈영병인 그의 아들 다비드(David)의 얼굴은 여전히 매우 뚜렷하게 기억할 수 있다. 버스가 공항으로 떠날 때 아버지와 아들은 침울한 미소를 짓고 힘없이 손을 흔들면서 우리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아하론과 다비드, 라말라에서 본 그 어머니, 작은 칼라민트 송이들과 둥근 낫을 앞에 둔 채 웅크리고 앉아 있던 그 여자가 기억난다.

[曺興根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