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해외촛점 | 팔레스타인 노트
점령지를 다녀와서
러쎌 뱅크스 Russell Banks
미국 소설가. 국제작가회의 의장. 프린스턴 대학의 명예교수이자 미국문예아카데미 회원. 장편소설로는 『대륙의 표류』(Continental Drift, 1985), 『감미로운 저세상』(The Sweet Hereafter, 1991) 등이 있다. 이 글의 원제는 “Some reflections on a journey to the Occupied territories”임.
ⓒ IPW 2002 / 한국어판 ⓒ 창작과비평사 2002, Reprinted with permission from IPW
3월 말 국제작가회의(International Parliament of Writers, IPW)의 다른 회원 일곱 명과 더불어 ‘팔레스타인 영토’의 마치 포격당한 섬들과 같은 특별보호구역을 둘러본 5일간의 여정의 마지막날, 나는 소위 리퓨즈니크(Refusenik)–––점령지에서 군복무를 하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스라엘 방위군(IDF) 군인들---라고 불리는 두 젊은 유태인 지도자와 텔아비브에 있는 킹 다비드 인터컨티넨털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이들은 반전운동가나 평화주의자도 아니고, 좌파도 아니며 현재 한풀꺾인 이스라엘 평화운동의 오랜 투사들도 아니다. 또한 그들은 분명히 겁쟁이도 아니다. 그들은 시온주의자이며 대학교육을 받은 논리정연한 이스라엘의 애국적인 아들들인데, 요즘처럼 끔찍한 암흑기에 그들의 입장은 이스라엘의 도덕적 신뢰성에 대해 이스라엘 내부로부터 제기된 어떤 도전보다도 진지한 도전이 되어왔다.
우리들만의 이 만남은 그들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그들이 나를 만나고자 한 것은 IPW의 의장이자 대표단장이라는 나의 역할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주된 이유는 내가 1960, 70년대에 베트남전 반대운동에 관여했던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팔레스타인 민족에 대한 자기 나라의 억압정책에 가담하지 않기로 한 자신들의 결정에 공감할 법한 사람에게서 삼촌이 주는 것 같은 친절한 충고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 대화를 나눈 때는 텔아비브에서 북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네타냐(Netanya)의 유월절 축제장에서 진저리나는 자살폭탄테러가 일어난 지 이틀 뒤였으며, 이스라엘의 샤론 수상이 아라파트 의장을 자신의 ‘적’이라고 선언하고 라말라에 대한 잔인한 공격과 더불어 방벽작전(Operation Defensive Shield)을 개시하기 하루 전이었다. 이 젊은이들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람들 모두에게 이제 모든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것임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내 충고는 간단했다. 단일쟁점 운동으로 꾸려가라, 모든 계층의 남녀와 온갖 유형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함하도록 당신들의 기반을 확대하라, 그리고 그 운동을 집안(이스라엘) 내부에서 계속해나가라, 그러고는 권력자에게 진실을 말하라는 것이었다.
글을 쓰는 이 싯점에 리퓨즈니크들은 370명에 이르렀는데 매주 10여명 정도가 이들에 가담해왔다. 지난주에 일어난 사태들은 그 증가율을 가속화할 수도, 반대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될는지 알 수는 없다. 나는 그들에게 무슨 동기로 이스라엘 방위군의 형제자매로부터 떨어져나와서 부모에게서는 분노와 당혹감을, 정부에게서는 징역형을 자초하였느냐고 물었다. 기껏해야 순진하다는 말을, 최악의 경우에는 비겁자이자 자기혐오적인 유태인이라는 말을 들을 텐데 무엇 때문에 이들은 이를 기꺼이 감수하려 했던가? 실제로 이 젊은이들은 이스라엘 언론과 집에서 이런 비난에 매일 부딪치고 있는 것이다. 이 젊은이들은 웨스트 뱅크와 다른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에 배치되었을 때 눈이 뜨이고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나와 IPW 대표단에 소속된 동료작가들이 지난 5일 동안 텔아비브에서 라말라까지 여행하고 웨스트 뱅크 지역의 여러 도시와 마을을 거쳐 가자(Gaza)로 내려가면서 목격했던 모든 것을 이 젊은이들도 그곳에서 목격했던 것이다. 우리는 가자의 난민촌을 방문했고 극심하게 파괴된 동네와 마을들 전체를 비통하게 지켜보았으며, 검문소에서 의도적인 굴욕감을 주는 행위들을 목격했고, 유태인 정착촌의 그 엄청난 규모와 위풍 그리고 침략상을 처음으로 목격했다.
우리 대표단은 네 개의 대륙으로부터 중동지역에 온 것이었다. 아프리카에서는 나이지리아 소설가인 월레 소잉카(Wole Soyinka)와 남아프리카 시인이자 전기작가인 브러이턴 브러이턴바흐(Breyten Breytenbach)가, 중국에서는 반체제 시인인 뻬이 따오(北島), 유럽에서는 스페인 소설가인 후안 고이띠쏠로(Juan Goytisolo)와 포르투갈 소설가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 이딸리아 소설가 빈첸쪼 꼰쏠로(Vincenzo Consolo), 그리고 프랑스 작가이자 IPW의 사무총장인 크리스띠앙 쌀몽(Christian Salmon)이, 북아메리카에서는 미국 소설가인 본인이 각각 참여했다. 우리는 IPW의 창립회원이자 위대한 팔레스타인 시인인 마흐무드 다르위시(Mahmoud Darwish)의 요청에 응답하여 그와 그의 팔레스타인 동료 시인과 작가들---이들의 생활조건과 작업조건은 점점 더 가택연금에 가까워지고 있었다–––에 대한 우리의 연대를 표현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국제작가회의는 인권단체나 NGO는 아니다. 이 조직은 창작활동 때문에 신체적 위협이나 정치적 통제를 당하는 동료작가들을 가능한 한 구체적인 방식으로 돕고자 하는 시인과 소설가 들의 느슨한 집합체일 뿐이다. 대다수가 라말라를 비롯한 여러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르위시와 그의 동료들은 우리가 보기에 참을 수 없는 상황을 일년 반 동안이나 견디고 있었으며, 자유로운 우리로서는 이런 상황을 비난할 의무가 있다.
마찬가지로 다르위시와 그의 동료들에 대한 우리의 연대를 표현하고 그들이 처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황을 증언함으로써, 우리는 팔레스타인 민중과의 연대를 표현한 것이다. 팔레스타인 예술가들의 시와 이야기 속에서 찬미되고 있는 것은 바로 팔레스타인 민중의 일상생활과 역사이기 때문이다. 네루다 편에 서는 것이 칠레 민중 편에 서는 것이고, 휘트먼을 찬양하는 것은 미국 민중을 찬양하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정부와 정치인 들은 대개 자신들을 찬양해줄 사람들을 스스로 찾아야 할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우리 자신의 눈으로 보고 우리 자신의 귀로 듣기 위해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에 왔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더불어, 이를테면 식료품을 든 노인들, 임산부들과 아기를 데리고 있는 어머니들, 겁에 질린 침울한 표정의 어린 학생들, 예루살렘과 텔아비브에 있는 직장에 출퇴근하는 남녀들과 나란히 검문소들을 통과했다. 우리 모두는 해가 뜨겁게 내리쬐는 가운데 중무장한 무표정한 군인들 옆으로 반 마일을 걸어가야만 했다. 우리는 라말라의 좁은 거리와 덮개 없는 하수도가 있는 골목길로 들어섰으며, 웨스트 뱅크와 가자 지구 난민촌의 무차별적으로 파괴된 집과 공공건물 들을 놀라서 멍하니 바라보았다. 우리는 학생과 교수 들이 어마어마한 탄압에 맞서서 비르 자이트(Bir Zeit)에 있는 자기들의 사랑스런 대학을 고수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고, 급속하게 확장되고 있는 유태인 정착지들의 방대한 형상을 당혹스럽게 바라보았다. 우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 대다수가 처해 있는 비참한 가난과 무기력을 직접 목격했다. 무자비한 통계자료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자포자기식의 절망이 그 뿌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라말라에서 머문 어느날 저녁, 마흐무드 다르위시를 비롯한 그 도시의 지적·예술적 공동체의 회원들이 주최한 만찬이 있은 후에, 나는 팔레스타인 소설가인 이즈자트 알가자위(Izzat Algazawi)와 함께 우리가 묵고 있던 호텔 뒤의 높다란 산등성이까지 산책을 하면서 그 아래의 달빛 비친 광활한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나의 동행인은 겨우 7마일 거리에 있는 예루살렘을 가리켰다. 예루살렘은 우주의 중심처럼 반짝이면서 전세계의 종교적 꿈을 담은 휘황찬란한 수도처럼 보였다. 좀더 가까이로는 미국 덴버(Denber) 시의 교외처럼 보이는 유태인 정착촌이 있었다. 깔끔하게 배치된 거리들과 소형 쇼핑쎈터들, 여러 층으로 된 주택과 아파트 단지 들, 위아래 사방으로 펼쳐져 있는 포스트모던한 기반시설, 이 모든 것이 바둑판 무늬 같은 가로등 불빛으로 환하게 밝혀져 있어서, 이 정착촌은 거대한 우주선 함대들이 바위투성이 산허리에다 하룻밤 사이에 세워놓은 것처럼 보였다. 정착촌 아래로는 약간 떨어져서 이스라엘군의 진지가 마치 게임판처럼 기하학적으로 정확하게 배치되어 있는데, 모퉁이마다 감시탑이 서 있고, 막사와 병참창고들이 감시탑들 사이 전략적인 위치에 배치되어 있으며, 탐조등 불빛이 기지 안마당을 훑어대며 그 너머 울퉁불퉁한 바위투성이의 달빛 비치는 땅을 정찰하듯 비추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더 아래에 라말라 시 인근의 그늘진 곳에는 대부분 콘크리트 블록으로 지어진 한 무리의 어둠침침한 입방체들, 즉 난민촌이 있었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불빛이라곤 골진 양철지붕에 반사된 희미한 달빛뿐이었다. 예루살렘, 유태인 정착지, 군 주둔지, 그리고 난민촌, 이 넷 모두가 똑같은 달빛에 흠뻑 잠겨 있었는데, 그것들은 그 인근의 라말라 산등성이의 똑같은 지점에서는 볼 수 있지만, 서로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아라파트 의장의 요청에 따라 심하게 부서진 청사에서 그를 만났다. 고국의 몇몇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마치 호치민(Ho Chi Minh)을 끌어안는 제인 폰다(Jane Fonda) 같은 사람들로 보일 것이라는 점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홍보활동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우리의 조사에서 특별히 “공평하게” 보여야 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스라엘의 작가들과 평화운동가들 역시 만났다. 월레 소잉카와 나는 초청을 받아 이스라엘의 외무장관인 시몬 페레스(Shimon Peres)를 만났고 1947년 이래로 중동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그의 소견을 들었다. 그러나 그의 소견, 즉 우파에서 좌파까지 이스라엘의 시각은 유럽이나 미국의 대중매체에서 우리가 매일매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것이었다. 팔레스타인의 시각은 그렇게 쉽게 접할 수는 없다.
여덟 명의 작가들이 보고 들은 바에 저마다의 고유한 경험과 기질, 그리고 정치적 성향이 영향을 끼친 것은 당연하다. 우리에게는 당노선이나 공식입장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처한 현실의 성격을 상상하기 위해서 우리는 일상적인 세부사항들, 즉 그들의 상황에서 일어나는 매일매일의 구체적인 내용들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서 중단된 평화협상 과정들, 깨어진 협정들, 속임수들 그리고 거부들에 대한 장황한 이야기를 일일이 다 들을 필요는 없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견주어 유추하고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이해에 도달하는 통찰력과 통로를 얻게 되었다. 소잉카와 브러이턴바흐는 남아프리카 인종격리정책과의 분명한 유사성을 그 차이점과 함께 볼 수 있었다. 나는 17세기 아일랜드의 영국인 ‘정착촌들’과 비교할 수 있었고 또한 북아메리카에서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군사적으로 제압한 후에 사용한 원주민에 대한 강제이주 및 봉쇄 정책이 1967년 이래 이스라엘의 점령지 정책과 몇몇 익숙한 방식들에서 일치한다는 사실을 괴로운 심정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는 발칸반도 분쟁 및 인종청소 전략과의 유사성, 그리고 티베트인들에 대한 중국의 취급과의 유사성 등등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우리 중 한사람인 사라마구는 심지어 나찌의 유태인들에 대한 취급과 비교하기조차 했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이것은 명백한 이유로 다른 대표단원들에 의해 즉각 반박당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점은 물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위한 평화, 자유, 그리고 안전만을 희구하는 우리 모두에게 대단히 큰 문제였다. 실제로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가 없다. 따라서 양쪽의 평화운동가들, 모든 나라 출신의 지식인들, 대학인들, 시인과 소설가 들, 그리고 특히 이스라엘 정부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위해 정책을 수립할 권력을 지닌 남녀들을 포함하여, 우리들 모두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깊숙이 우리의 상상력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점령지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터무니없이 무자비한 샤론의 공격과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팔레스타인 자살폭탄 대원들의 망연자실케 하는 공격은 중지되어야 한다. 팔레스타인 사람이건 이스라엘 사람이건 간에 우리가 여행중에 만난 사람들 거의 모두가 이 분쟁을 끝장내기 위해서는 제삼자가 필요하다고 믿고 있었지만, 늘상 그렇듯이, 우리는 UN이나 미국 또는 그 어떤 제삼자에도 의존할 수가 없다. 제삼자의 개입은 이미 시도된 적이 있었으나 너무나 여러번 실패했다.
중동에서 머문 마지막날, 리퓨즈니크라 불리는 두 이스라엘 젊은이를 텔아비브에서 만났을 때, 내가 아주 조금이나마 고무된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이 끔찍한 참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점령군에 소속된 남녀들은 군에 복무하기를 거부해야만 한다. 그렇게 될 때에만 비로소 비극적일 정도로 필사적인 반대편 사람들, 즉 인간폭탄이 되는 것을 제외하면 자기들에게는 의미있는 미래가 없다고 믿는 자기파괴적인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이 자기들의 삶이 살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기 시작할 것이다. 오로지 그때에만 협상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2002년 4월 3일, 뉴욕 쌔러토거 스프링스에서.
[曺興根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