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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0.75평 상상력의 승리─우리 옛말의 복원
김중종 『옛말로 풀어 읽은 우리 이름, 우리 문화』, 지식산업사 2000
김슬옹
목원대 강사, 통합언어학
최근에 나는 인간의 상상력에 대해 거듭 놀라고 있다. 먼저는 『왜란종결자』(이우혁 지음)라는 팬터지 소설을 읽고서였고, 또 한번은 얼마 전 북으로 간 비전향 장기수 김중종(金中鐘)님이 0.75평에서 20년을 넘게 연구해 펴낸 『옛말로 풀어 읽은 우리 이름, 우리 문화』를 보고서였다. 팬터지 소설과 연구서를 같은 반열에 놓고 얘기하니 괴이쩍게 여길 분이 있을 것이나 전혀 그럴 문제가 아니다. 두 책의 맥락에 비슷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왜란종결자』는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철저히 고증해 우주 팔계(八界)를 넘나드는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불어넣었다. 신립(申砬) 장군의 탄금대 전투 등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역사적 미스테리의 의미를 상상력을 통해 복원해내고 있는 셈이다. 김중종님은 기록으로 남아 있는 한자어에 대한 치밀한 고증을 통해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의 소리와 삶을 풀어내고 있다. 그것은 실증의 차원을 넘어선 상상력의 위대한 힘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의 저작을 상상력의 힘으로 평가한다고 해서 그의 저작이 황당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오늘날의 놀라운 과학적 창조물도 상상력의 결과라는 말은 지극히 상식적일지니, 상상력은 인간의 존립기반인 환상을 가능하게 하고 인간의 실존과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기본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0.75평의 독방생활에서 빚어낸 작품이기에 그의 상상력에 더욱 옷깃을 여미게 되는 것이다. 하긴 오랜 세월 한자를 빌려 우리의 풍부한 소리와 삶을 담아왔지만 어느새 문자의 포로가 된 우리는 다시 그 소리와 삶을 제대로 읽어낼 수 없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문헌에 의한 고증작업이 더없이 필요한 것이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문자의 안개를 벗어나려는 상상력의 힘이다.
이 책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근대적 지식체계를 뒤집는다. 근대 이후의 음운학자들이 분류한 소리체계는 그의 책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하긴 그 먼 옛날의 소리 세계를 근대적 분류지식으로 복원한다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그렇다고 그가 복원한 옛 소리에 체계가 없다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것은 현대의 지식 세계를 훨씬 뛰어넘는다. 일단 ‘서울’의 어원을 통해 그가 푼 방식과 기존 학자들이 푼 방식이 어떻게 다른지 보자. 기존 학자들은 음절별로 푼다. 가장 오래된 문서에서 발견되는 ‘셔ᄫᅳᆯ(『용비어천가』)’ 등을 기초로 ‘ᄉᆡ〔東, 新〕+ᄇᆞᆯ〔原, 谷〕’(김민수 편 『우리말 어원사전』, 태학사 1977 참조)이라고 풀었다. 이에 반해 저자는 음절별 어원 접근에서 벗어나 어구 이상의 말짜임이 녹아든 말로 풀이한다. ‘서울’은 단지 ‘서라벌’이라는 고유명사에서 온 것이 아니라 수많은 나라의 수도를 일컫는 보통명사라는 전제 아래 “높은 봉우리(울)에 올라(서)”라는 말을 짜맞춘 말이라는 것이다. ‘수도’의 의미가 말과 소리의 가락으로 녹아 있다고 본 것이다. 옳은지 그른지는 모르지만, 먼 옛날에는 이름을 지을 때 추상적인 음절이나 낱말 단위로 조작한 것이 아니라 삶의 이야기나 소망, 특징을 풀이하는 말을 담는 방식을 취했을 것이다. 인디언의 이름 ‘주먹쥐고 일어서’ 따위와 같이 지었을 것이고, 차츰 이를 줄이는 방식이 발달했을 것이다. 지금 이름짓기도 결국 그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지혜롭고 은혜를 잘 갚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는 뜻을 담아 ‘지은’으로 짓기 때문이다. 다만 지혜로운 지, 은혜로운 은이라는 음절 구성 단계를 거침으로써 본래 말의 가락과 풀이의 풍부함이 소멸되는 것이다.
그의 고증 방법이 현대 언어학자들의 방법과 꼭 동떨어져 있는 것만은 아니다. 보통 ‘굳+이’가 ‘구지’로 발음되는 것을 구개음화라고 하는데, 구개음(ㅈ)이 비구개음으로 바뀌거나 공존하는 것은 두루 알려진 바다. 그러니까 ‘질’이 ‘길’로 바뀐 곳도 있고 아직도 ‘질’로 발음하는 곳도 있다. 다만 ‘길’을 표준음으로 함으로써 ‘질’은 거의 소멸되어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저자는 ‘ㄱ’과 같은 소리를 굳은소리로, ‘ㅈ’과 같은 소리를 무른소리로 분류하여 옛 소리를 복원해내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鷄龍山’은 표준 한자음대로 하면 ‘계룡산’이지만 옛 중국 한자음대로 하면 ‘쥔룰뫼’, 즉 ‘세상을 제어하는(쥐는) 산’이라는 것이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용보다도 대학을 중퇴하고 북에서 검사까지 했던 좌파 지식인인 그가 왜 이런 연구를 하게 되었을까 하는 데 궁금증이 더했다. 가족호칭이나 예절 따위에 대한 그의 보수적 시각을 읽으면서는 내심 더욱 그랬다. 왜냐하면 그런 문제에 대한 그의 생각은 공자를 그대로 살려야 한다는 것만큼이나 지극히 규범적이며 원리원칙적이었기 때문이다. 봉건시대 예의범절의 허구성을 깨기 위해 ‘동무’라는 혁명적인 용어를 쓰고 있는 사회주의 북한에 대한 일반적 인상으로는 상상이 안 가는 부분이다. 물론 그가 왜 이런 연구를 하게 됐는지는 스스로 밝히고 있다. 이념문제 때문에 삼대에 걸쳐 당한 모진 시련에 대한 고통과 울분이, 얼룩지고 짓밟혀 그늘진 우리 역사를 되찾는 데 빠지게 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과 가족에 모진 고통을 안겨준 분단이념보다 분단을 극복할 수 있는 동질성으로서의 민족주의를 꿈꾸었는지 모른다. 비운을 겪은 당대 가족의 한을 넘어, 이념의 울분을 넘어, 그 가족이 있게 한 삶의 뿌리, 그것도 아주 먼 우리말 문화를 복원하려 했을 것이다. 아니면 늘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꿈꾸었을 그가 0.75평의 그 정반대 공간에서 문자의 오류에 빠진 소리의 고통을 듣고 그 소리를 구하려 했음인가.
다만 지식적인 측면에서 냉큼 동의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 한자어를 무조건 소리로만 풀려는 속내가 자못 궁금했다. 이를테면 ‘아우내→竝川’과 같이 한자의 훈을 빌려 적는 방식을 아예 부정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책에 직접적으로 나와 있지 않다. 또한 그가 복원해낸 말들은 거의 다 ‘리을(ㄹ)’이 들어가는데, 그 이유도 궁금하다. 물론 우리말의 주된 가락에 ‘ㄹ’이 놓여 있고, 우리의 소릿가락을 강조한 것은 노래와 풍류를 좋아하던 우리 겨레의 일반적 특징으로 보아 이해는 할 수 있지만, ‘ㄹ’이 없으면 소릿가락은 불가능한 것인지 등등. 인터뷰를 하고 싶은데 그는 이미 북한으로 갔으니…… 언젠가는 연락이 닿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