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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희망의 문학, 계몽의 담론
어린이문학의 역사와 창비아동문고
김상욱 金尙郁
문학평론가. 춘천교대 국어교육과 교수. 저서로 『소설교육의 방법 연구』 『숲에서 어린이에게 길을 묻다』 등이 있음. childlit@hanmail.net
1. 출판과 어린이문학의 관련 양상
꽃이 지고 난 자리마다 새잎들이 돋아나고 있다. 작고 투명한 이파리들이 햇빛에 반짝이는 물비늘처럼 마구 몸을 뒤척이고 있다. 계절이 더할수록 이 새잎들은 연두에서 초록으로, 진초록으로 빛을 더욱 깊게 안으로 그러모으며 자랄 것이다. 눈에 보이는 잎새들뿐만이 아니다. 잎을 매단 가지들은 더욱 높고 굵어질 것이며, 우듬지 아래의 밑둥치는 쉼없는 노동으로 나이테를 더하며 대지에 깊이 뿌리를 내릴 것이다. 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나무들을 보며 어린이문학의 지금·여기를 가늠해보는 것은 자칫 턱없는 비약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명의 역동적인 변모를 어린이문학이란 특정한 문학적 장르의 생성과 성장, 쇠퇴와 소멸에 빗대어보는 것은 지금·여기에서 필요한 성장의 환경이 무엇일지 유추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그리 쓸모없는 궁리만은 아닐 것이다.
지금·여기에서의 어린이문학은 언뜻 보아 왕성한 성장기를 맞고 있는 듯이 보인다. 문학의 위기는 물론이거니와 인문학 전체의 위기가 공공연히 거론되는 즈음인데도 어린이문학만큼은 유독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그럴듯한 규모와 연륜을 지닌 출판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어린이도서를 대대적으로 기획하고 있으며, 매체들 또한 어린이문학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고 있다. 서구의 뛰어난 문학작품들이 그다지 큰 시차 없이 우리 어린이들의 손에 건네지고 있는 것만 보아도 사정이 어떠한지 엿보게 해준다.
그러나 이들 두드러진 징후들을 근거로, 초록의 광휘로 뒤덮인 여름날의 숲을 보듯 어린이문학의 전성기가 도래했다고 찬탄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들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큰 문제점은 현단계의 성장을 출판이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출판사는 출판과 연계된 문학상을 통해 창작의욕을 고취하기도 하고, 입도선매에 가까운 형태로 작가들의 작품을 서둘러 묶어내기도 하며, 뛰어난 그림과 함께 작품을 포장하여 상품으로 손색이 없게 만들기도 하는 등 어린이문학을 둘러싼 소통의 모든 단계를 제어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출판은 어린이문학의 외적 환경에서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축이며, 출판의 발전이 어린이문학의 발전을 위한 필요조건인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출판은 어린이문학을 위해 존재하기보다 문화산업의 한 부문으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할 수밖에 없다. 문화창조라는 고유한 기능과 함께 상업적 기획으로부터도 결코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어린이문학의 성장을 출판이 주도한다는 것은 자칫 출판의 또다른 칼날인 상업주의에 어린이문학을 저당잡히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징후는 도처에서 드러나고 있다. 무엇보다 장르간의 불균등 발전은 그 대표적인 실례가 아닐 수 없다. 현재의 어린이문학은 서사장르가 여타의 장르들을 압도하고 있다. 특히 서정장르의 역사적 구체태인 동시는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을 뿐, 어린이문학의 성장이 안겨주는 어떠한 혜택으로부터도 배제되고 있다. 최근 들어 이러한 현상을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생적인 역량들이 축적되는 단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 서사장르의 내부를 들여다보아도 문제는 다를 바 없다. 서정장르와 안팎으로 연관된 그림동화나 판타지동화는 충분히 개화하지 못한 상태이며, 이들 양식은 대부분 외국문학의 번역으로 독자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그나마 왕성하게 성장해온 현실주의적인 양식들조차 최근 들어 고학년과 저학년으로 이원화된 채, 저학년을 겨냥한 작품들이 집중적으로 양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출판이란 어린이문학의 주요한 축이 긍정적인 기능을 하기보다 역기능으로 전화될 싯점에 놓여 있음을 입증하는 생생한 실례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출판의 논리에 어린이문학이 끌려다니는 것은 어린이문학의 발전을 위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출판의 공공성을 최대한 강화해가는 노력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러나 이는 출판에 거는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기대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제도적인 장치를 통해 시장에 개입함으로써 출판이 갖는 문화적 특성들을 견인해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계몽적 장치는 교실과 도서관이다. 문학교육의 활성화와 공공도서관의 내실화를 통한 제도적 장치의 정착은 비평기능이 복원되는 길이 열림을 의미한다. 동시에 출판을 시장논리에 앞서, 풍부한 문화자본을 생성하는 공공영역의 한 부문으로 설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실제 어린이도서연구회라는 시민단체의 활동이 출판시장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그 가능성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문학의 발전이 새로운 공공영역의 창출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곧 우리 어린이문학의 단계가 성장의 정점에 도달해 있는 것이 아니라, 고작해야 잠시 흐드러진 꽃을 피운 다음, 숨을 고르며 잎새를 틔울 준비를 하는 시작의 단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절감케 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공공영역의 광범위한 창출이 단순히 어린이문학을 둘러싼 외적 환경이 아니라, 작가와 작품, 독자를 연결하는 내적 자질로 존재한다는 점 또한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어린이문학은 문학이 갖는 예술적 자율성과 함께 어린이의 지각·인식·정서와 직결되는 계몽적 기획과 분리하여 논의할 수 없는 실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계몽성을 어떻게 탈피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올바른 계몽성에 한결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사실 우리 어린이문학의 역사적 전개과정은 바람직한 계몽성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모색하고 발견해온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글은 어린이문학의 역사적 전개 속에서 여러 작가들이 성취한 계몽성의 질적 차이를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와 함께 이 글은 작가와 작품, 독자로 이어지는 일직선상의 연결을 한층 풍요롭고 다층적으로 만드는 출판의 내재적인 가능성을 새삼 확인하는 소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최근 들어 200권을 넘어선 ‘창비아동문고’라는 특정 출판사의 출판물에 한정하여 논의를 진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이들 작품만으로도 오늘날의 어린이문학을 가능케 한 중심적인 한 축을 거칠게나마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덧붙여 이 글이 새롭게 형성되어야 할 공공영역이 무엇을 기저로 자신의 실체를 확립할지, 그리고 비평의 기능을 어떻게 수행해나갈지를 내다볼 수 있게 된다면 그만한 다행스러움이 없을 것이다.
2. 어린이문학 전통의 복원
무릇 모든 새로운 출발은 과거를 재평가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는, 과거를 새로운 관점으로 재조명하고 과거 속의 ‘오래된 미래’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1970년대 후반 ‘민족문학의 일부’로서의 어린이문학을 모색한다는 취지에서 출간된 ‘창비아동문고’ 역시 자신의 미래를 과거로부터 찾았다. 그 결과 선정된 작가들은 식민지시대부터 작품활동을 해온 이원수(李元壽, 1911〜81)·이주홍(李周洪, 1906〜87)·마해송(馬海松, 1905〜66)이다. 이 이름들이 그저 단순한 작가들의 나열이 아님은 명백하다. 이 세 작가는 서로 다른 출발과 지향에도 불구하고 우리 어린이문학의 앞선 역사로 거론되기에 손색이 없는 작가들이며, 민족문학으로서의 어린이문학을 빛낸 이들이다.
다채로운 함축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민족문학은 민족의 역사적 과제, 민족구성원의 구체적인 삶의 현실을 중심적인 묘사대상이나 주제로 형상화하는 것을 지칭한다. 이들 초기의 세 어린이문학 작가들은 역시 민족의 역사적 과제를 자신들의 작품 속에 끊임없이 담고자 하였다. 마해송 동화집 『사슴과 사냥개』(1977)에 수록된 「떡배 단배」 「토끼와 원숭이」는 의인동화이면서 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요구되는 자주독립 정신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원수의 『잔디숲 속의 이쁜이』(계몽사 1973)나 『숲속 나라』(신구문화사 1953)는 판타지를 통해 해방을 성취하는 과정과 그 소망스러운 실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주홍의 『아름다운 고향』(1981) 역시 3·1운동을 중심에 둔 식민지시대의 고통을 풍부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작가들은 상대적으로 민족·역사·독립 등의 거대담론에 치중한 반면, 공통적으로 삶의 세부를 형상화하거나 어린이들이 겪는 일상적인 삶에 대한 경험의 형상화는 부족한 편이라고 볼 수 있다.
세부적으로 이 세 작가들이 활용하는 창작의 방법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어린이문학의 발전을 밀어올리는 동력은 조금씩 다른 듯이 보인다. 먼저 가장 앞서 작품활동을 시작한 마해송은 「바위나리와 아기별」(1923)이란 최초의 창작동화를 쓴 것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상징성이 높은 이 작품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그는 의인동화를 즐겨 썼다. 특히 「떡배 단배」는 떡배와 단배라는 외세의 경제적·문화적 침략을 사건의 중심에 두고, 두 인물의 대응방식을 대조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자주적인 민족국가 건설의 구체적인 방안을 설파한 작품이다. 그러나 작품은 강렬한 주제의식에도 불구하고, 현실과 우화적 세계를 지나치게 단선적으로 대응시킴으로써, 미적 풍부함을 충분히 획득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정작 마해송 동화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우화적인 작품이 아니라 『모래알 고금』(가톨릭출판사 1958)과 같이, 경험한 세계를 객관적으로 기술한 작품일 것이다. 이 작품의 두드러진 미덕은 서술자의 개입이 최대한 억제되었다는 점인데, 이는 서술자인 ‘고금’을 서술대상인 경험세계와 엄밀하게 분리시킴으로써 경험을 있는 그대로, 과장이나 왜곡 없이 드러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고금’이 개성적인 인물로서 형상화되지 못한 채 서술의 매개적 장치로서만 존재한다. 이는 우화적 형식의 다른 동화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특성이다. 결국 마해송의 동화는 초기 아동문학의 계몽적 특성을 민족문학적 지향 안에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작품들임은 분명하나, 문학적인 성과는 계몽성을 어느정도 덜어낸 작품들에 있다.
마해송이 객관적 관찰을 통해 계몽성으로부터 어느정도 벗어난 것과 달리 이원수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거대담론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는 초기 작품에서 보여준 계몽의 담론들을 새로운 작품집 『꼬마 옥이』(1977)를 통해 상당부분 넘어서고 있다. 그는 이 작품집에서 다양한 형태의 실험들을 거듭한다. 「어린이날과 아지날」을 비롯하여 「루루의 봄」과 같이 우화와 다를 바 없는 의인동화가 있는 반면, 「화려한 초대」에서처럼 현실의 문제인 도농간의 격차를 보여주면서도 주요인물인 한선생과 점순이를 통해 인물의 내적인 지각과 정서를 깊이 천착한 작품도 선보이고 있다. 특히 점순은 구체적인 빈부 격차와 도농간 격차라는 이중의 모순관계를, 공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할 만큼의 섬세한 정서적 감응으로 드러내고 있다. 특히 작품의 마지막 부분, 낯선 여행에서 되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겪는 점순의 심정을 이원수는 설득력있게, 그러나 과장되지 않게 그려 보이고 있다.
점순이는 새 옷을 벗어 던지고 제 치마 저고리로 그 아이에게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멀어져가는 그 아이를 보고 “점순아―” 하고 부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왈칵 콧날이 시큰해지면서 걷잡을 수 없는 설움에 옷보따리를 안고 그 위에 얼굴을 묻으며 흑흑 느껴 울었다. 눈물이 보따리에 넘쳐 나왔다.
눈을 꼭 감은 한선생은 점순이의 거동을 눈치챘는지 입술을 꼭 깨물며 잠든 듯이 말이 없었다. 차바퀴 소리만이 일정한 리듬으로 그들의 마음을 달래 주듯 덜컥거리고 있었다. (『꼬마 옥이』 150면)
차창 밖으로 본 소녀를 자신과 동일시할 뿐만 아니라, 그 동일시를 통해 시골 아이들 전체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 나아가 농촌의 현실을 설움과 울분 속에서 성큼 추상화하는 날카로움을 이 대목은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날카로운 현실인식과 그 문학적 형상화는 다른 작품에서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작품집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풍부한 시적 계기들이다. 표제작인 「꼬마 옥이」나 첫번째 수록된 「나의 그림책」은 서사적 발전을 보여주기보다, 시적 이미지의 병치를 통해 한편의 서사를 엮어 보이고 있다. 더욱이 이들 작품의 내부에 깃들인 주제 또한 닿을 수 없는 것들, 스러져버린 것들에 대한 아득한 그리움이라는 점에서 현저히 시적이다. 곧 “사랑하는 것은 죽어도 죽지 않는 것 같고, 오래오래 가슴속에 살아남는 것”이라는 주제는 작품의 전편에 걸쳐 반복되는 것이다. 이원수는 내용과 형식 모두 시적인 요소들에 기대어 계몽의 억압에서 일정정도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었다. 선명한 현실적 계기인 전태일 열사의 죽음에 창작의 연원을 두고 있는 「불새의 춤」과 같은 작품에서 시적 자질을 극대화한 상징을 활용한 것은 주목할 만한 작업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해와 같이 달과 같이』(1979)에서처럼 시적 장치들을 떠나 다시금 서사의 본질로 회귀하였을 경우, 이원수의 작품은 ‘일하는 아이들’의 형상을 흥미진진하게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투적인 결말의 처리와 지나치게 낙관적인 인물 형상화,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묘사로 빠져든다.
객관적 관찰이나 시적 자질의 확장을 통해 계몽성을 탈피하고자 한 마해송·이원수와 달리 서사장르의 특성을 비켜서지 않으면서도 어린이문학의 발전적 양상을 유감없이 제시하고 있는 작가가 바로 이주홍이다. 『못나도 울엄마』(1977)에 실린 편편들은 어린이문학, 특히 동화의 가능성을 한껏 심화하고 확장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옛이야기 형식을 차용하고 있는 「가자미와 복장어」는 전통적인 미의식인 풍자와 해학을 마음껏 펼쳐 보이고 있으며, 이원수의 『숲속 나라』에 기대어 이를 보완·확장하는 「외로운 짬보」 역시 파노라마적인 구성을 통해 폭넓은 서사적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읽는 즐거움을 듬뿍 안겨준다. 「딱부리집 식구」에서는 현실을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인물의 갈등을 능청스런 익살로 누그러뜨리는 여유를 발견하게 된다.
다양한 스펙트럼도 주목할 만하지만 이 작품집의 가치는 「비 오는 들창」과 「못나도 울엄마」를 빼놓고 논의하기 어렵다. 「비 오는 들창」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란 연극의 연습과 가뭄이 야기한 이웃간의 ‘물싸움’을 중첩하여 이야기를 전개하는 가운데, 인물들의 외적 갈등과 주인공의 내적 갈등을 조화롭게 해소한 작품이다. 더욱이 이 작품은 현실인식의 치열함이나 구성의 완결성이란 측면에서 현덕(玄德, 1909〜?)의 작품 「나비를 잡는 아버지」(『집을 나간 소년』, 아문각 1946)가 획득한 성취를 고스란히 계승하고 있다. 특히 현실의 갈등을 직접적으로 개입시키는 대신 원경으로 배치하고, 일상적 경험이란 매개를 통해 인물의 갈등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이 작품에서 단초를 열어 보이고 있는, 어린이의 눈을 통한 현실의 긍정적인 굴절 혹은 재해석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어린이의 발견’으로 고양될 여지가 많다.
「못나도 울엄마」가 갖는 문학사적 의미 역시 이 지점에 놓여 있다. 「못나도 울엄마」는 한 아이의 꿈을 통해 소박하게 서사를 진행시킨다. 그러나 이 꿈은 교훈을 전달하기 위한 장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 경험의 확충 혹은 심리적 갈등의 변형으로 존재한다. 그 결과 꿈속에서의 새로운 경험은 현실세계의 우위를 승인하기보다, 역설적으로 비켜서고 싶은 세계를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새로운 발견으로 고양된다. 이 모든 것이 아이의 마음과 생각의 결을 한치도 놓치지 않고 작가의 의식이 어린이의 세계로 하강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원수·이주홍·마해송으로 이어지는, 1970년대 후반에 나온 ‘창비아동문고’ 초기의 작품집들은 민족문학의 건설이란 거대담론 속에서 기획되고 추진되었음에도 정작 작품의 구체적인 실제들은 기존의 이념적 도식과는 다른 자리에서 어린이문학의 성장을 도모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때로는 시적 자질의 도입으로, 또 때로는 엄밀한 객관적인 관찰에 힘입어, 마침내는 존재하는 어린이의 세계에 가깝게 다가감으로써 민족문학 자체를 새롭게 발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3. 전통의 계승과 변용
‘창비아동문고’가 어린이문학 초창기 작가들의 작품집에 이어 잇따라 출간한 것은 ‘5인 동화집’ 『똘배가 보고 온 달나라』(1977)이다. 초창기 작가들이 대체로 1910년을 전후한 시기에 태어난 이들이라면, ‘5인 동화집’의 다섯 작가들은 1930,40년 즈음에 태어난 이들로 이땅의 어린이문학이 새로운 세대로 중심축이 이동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한편의 작품들 또한 이전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어린이들의 세계에 접근하고 있어 축적된 역사적 경험을 엿보게 해준다. 이 가운데 돋보이는 작가는 「무명 저고리와 엄마」 「금복이네 자두나무」를 쓴 권정생(權正生, 1937〜 )과 「보이나 아저씨」 「가뭄과 홍수」를 상재한 이영호(李榮浩, 1936〜 )이다.
이영호의 작품은 그동안 기이하리만큼 제대로 평가된 적이 없는데, 그러나 매우 독창적이다. 「보이나 아저씨」는 문둥병을 앓고 있는 ‘보이나 아저씨’와 그 가족들, 그리고 그 가족들을 대하는 주인공 아이의 심경을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다. 작품의 구성은 ‘보이나 아저씨’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되어, 그 두 딸아이를 매개로 한 호기심과 애정으로, 마지막으로 열차에 오르는 그들 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안타까움으로 옮겨가는 짜임새를 지니고 있다. 사건의 연결이 지극히 정교하며, 마지막 장면에서 엿보이는 가족간의 유대는 아름답기까지 하다. 구성의 정교함, 서정적인 결말의 처리, 아이의 눈과 아저씨 가족의 삶이 시종일관 서로 교호하는 가운데 정서적인 공감의 상승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적 장치와 함께 이영호의 작품에서 놓칠 수 없는 것은 독특한 문체이다.
반은 외고 읽으면서 아이는 금세 천자문 한 번 읽기를 끝냈다.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시작했다.(…)아버지의 기침소리는 좀처럼 끝나질 않았다.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버지는 전신을 흔들며 기침을 토해내다가 갑자기 놋재떨이에 땅땅 담뱃재를 떨었다. 담뱃대 속에서 쏟아져나온 아직 덜 탄 담배가 살아 있는 작은 괴물처럼 하얀 연기를 스멀스멀 뿜어올렸다. (『똘배가 보고 온 달나라』 123면)
이 인용에서 확인되듯, 이영호의 문체는 어린이문학에서 통상적으로 사용되어온 경어체 문장이 아니다. 작품은 과거시제 종결형으로 시종하고 있다. 이와 같은 소설적 문체는 사건을 서술하는 속도감을 한층 강화한다. 그리고 서술의 촛점을 아이에게 분명하게 둠으로써 서사와 묘사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만들고 있다. 작가는 아주 능란하게 촛점화자와 서술자를 오가며 통상의 어린 주인공에게서 발견되는 제한들을 말끔히 씻어내고 있다. 이와 같은 문체적 특성은 「가뭄과 홍수」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제 막 피어오르는 소녀에 대한 애틋한 감정과 자꾸만 엉켜들기만 하는 주인공의 일상이 맞물리면서 사건은 밀도를 더하게 된다. 인물의 내면심리 또한 치밀하게 묘사됨으로써 어린이문학은 성큼 문학 일반의 성취와 나란히 어깨를 겯기에 이른다. 이러한 문체적 특성에 힘입어 선명한 주제의식이나 결말의 교훈성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으로 남겨지게 된다. 여기에 이르러 어린이문학 작품은 그 자체로 폐쇄되지 않은 채, 독자의 감상을 통해 완결되는 새로운 면모를 획득하게 된다. 작품의 결말은 이를 다시금 입증해주고 있다.
“너 이 자슥, 죽을라고 환장했나!”
큰형의 커다란 손바닥이 소년의 뺨에서 철썩 소리를 냈다.
“직이삐리야 됩니더. 그 개새끼 때문이란 말입니더. 직이야 해예!”
뺨을 맞고 귀울음이 멈춰지자 잠시 멍청하게 섰던 소년이 그제야 와악 울음을 토해내며 큰형의 그 우람한 가슴속으로 무너지듯 머리를 박았다.
소년이 떨어뜨린 몽둥이가 흙탕물에 곤두박질을 치면서 멀리멀리 떠내려가고 있었다. (『똘배가 보고 온 달나라』 172면)
이 작품의 결말은 그전의 어린이문학에서 제시되어온 익숙한 어린이의 형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거칠게 쏟아내는 말들과 정서적인 개입을 가로막는 속도감있는 서술 속에서 아이의 감정은 정제되지 않고 폭발하고 있다. 거듭되는 불운의 연원이 자기를 보면 짖어대는 개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를 통해, 서사는 많은 여지들을 그대로 남겨둔 채 격정적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 지점에 이르면 동화는 더이상 계몽적인 목소리를 들려주는 데에 연연하지 않는다. 한걸음 더 나아가 사건과 사건 속에서 유발되는 인물의 정서와 행위 자체를 보여주는 것으로 어린이문학은 자신의 소임을 다하게 된다. 거대담론과 짝을 이루던 계몽성이 새롭게 재구성되는 싯점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영호에 견줄 때, 권정생이 오히려 앞선 작가들과 더욱 가까운 듯이 보인다. 「무명 저고리와 엄마」 「강아지 똥」 「똘배가 보고 온 달나라」 등은 여전히 민족사 전체와 맥락이 닿아 있다는 점에서, 또 때로는 우화의 틀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는 차후 우리 어린이문학의 가장 빛나는 성취라고 평가되는 『몽실 언니』(1984)로 연결되면서 민족문학으로서 어린이문학이 발전해가는 한 경로로 자리매김된다. 그런데도 이들 작품에서 견지하고 있던 무거움을 벗어던지고 서러운 풍경 한자락을 가만가만 펼쳐 보이고 있는 「금복이네 자두나무」는 당시 어린이문학의 역사에서는 값진 것이다. 적어도 계몽의 담론으로부터 한층 비켜서 있으며, 민족문학의 내실을 더욱 풍부하게 하고 구체화하기 때문이다.
「금복이네 자두나무」에는 선하게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이 있다. 또 그 가난한 이들의 아주 작고 소박한, 결코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꿈들이 있으며 그 꿈의 실현을 가로막는 척박한 현실이 있다. 인물들은 서러움과 연민을 자아내게 하며, 슬픔을 안으로 삼키고 현실 앞에서 망연자실 멈춰 서 있다. 이후에 이어지는 『사과나무밭 달님』(1978) 『점득이네』(1990) 또한 다르지 않다. 이 작품들은 권정생 문학의 전형적이며 가장 권정생다운 측면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들 작품들에서 권정생은 좁은 의미의 계몽성을 완전히 벗어나고 있다. 그는 다만 보여줄 따름이다. 풍경처럼 포착한 삶의 흔적에 대해, 펼쳐낸 서사의 의미에 대해 그는 결코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그는 교훈을 언어로 제시하기보다 인물의 삶, 인물의 성격을 통해 표출하고 있다. 소재가 갖는 비극성과 현실의 고통도 이와 같은 담담한 서술 속에서 정제되어 있다. 그리고 잠복되어 있는 작품 속의 희망의 전언 역시 결말에서 형식적으로 제시되기보다 인물의 가치 선택과 행위의 양상을 보여줌으로써, 또 그 가치 선택과 행위의 이면에 어떠한 마음의 결들이 떠올랐다가 가라앉는지를 보여줌으로써 헐벗은 계몽성을 대신한다. 아니 계몽의 의미를 한층 확장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서술의 방식, 계몽성을 인물의 행위와 심리 속에 흩뿌려놓는 방식은 박상규(朴相圭, 1937〜 )의 작품에서도 잘 나타난다. 『고향을 지키는 아이들』(1981)의 제1부 ‘조그만 마음’에 실린 작품들은 어느 하나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고 간결한 서술 속에서 뚜렷한 형상을 획득한다. 「새 엄마」는 기존의 선입견을 또다른 억지스런 행위, 감상적인 과장으로 대체하지 않는다. 그 대신 서술자인 아이의 심리적 단층들을 면밀하게 답사하면서 마침내 반전으로 끌어간다. 「감 장사 첫날」에서도 가난한 이들의 서러운 일상이 아이의 관찰과 마음의 흐름 속에서 과장 없이 포착되고 있다. 「아버지의 모습」 「산골의 봄」 또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자아내는 흐뭇한 인정 속에서 인물은 새로운 경험을 하고, 또 그 경험 속에서 자신의 지각과 인식을 변전시켜나간다. 이 작품들이 모두 서사를 걸러내고 기술하는 주체를 언제나 어린 촛점화자로 설정함으로써 독자의 적극적인 동일시를 이끌어내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진전이다.
그러나 이영호·권정생·박상규 등이 일구어온 문학적 전통은 쉽게 다음 세대의 역량으로 전이되지 않는다. 꼭 10년이 지나고 난 다음, 작가들의 세대로 따지자면 20년 남짓한 차이를 두고서야 임길택(林吉澤, 1952〜97)의 『산골 마을 아이들』(1990, 원제는 ‘우리 동네 아이들’)을 만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 어린이문학은 설익은 계몽으로부터 온전히 놓여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임길택의 글쓰기 방식이 갖는 특성 때문일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동화와 이야기를 엄격히 구분한다. 그리고 자신의 글이 동화가 아닌 이야기로 머물러 있기를, 아니 고양되기를 바란다. 따라서 그의 글은 보고 들은 것을 자세하게 기록할 뿐, 그 체험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은 피하고 있다. 더욱이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역사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숨결과 땀과 눈물이 배어 있는 역사에 섣부른 주관적 감상을 들이밀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그의 시각이다. 그 결과 그의 작품에는 작가의 목소리가 엄격하게 소거되어 있다. 다만 인물들이 겪는 생각과 느낌을 곡진하게 밀고 나갈 따름이다.
『산골 마을 아이들』에 수록된 작품들은 대체로 세 가지 경향으로 구분된다. 서술자인 작가의 목소리가 뚜렷하게 부각되는 작품인 「정말 바보일까요?」 「아버지, 우리 아버지」와 같은 계열의 작품과 「모퉁이집 할머니」와 「순이 삼촌」과 같이 현실의 결핍과 그 결핍 속에서 스러져가는 인물들의 삶을 담고 있는 작품들이 그것이다. 두번째 경향은 소재의 선택과 주제의 처리방식에서 명백하게 권정생·박상규를 잇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두드러진 임길택의 성취는 세번째 경향의 작품들이다. 「정아의 농번기」 「들꽃 아이」 「명자와 버스비」 등의 작품들에는 한결같이 작가의 목소리가 배제되어 있으며, 현실의 누적되는 고통도 비극적으로 펼쳐지지 않는다. 이 작품들은 대체로 주인공이 직접 촛점화자가 되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바를 빠짐없이 기록한다. 이러한 작품의 서술특성은 새로운 유형의 인물 창조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야기를 서술하는 어린 인물들은 마주치는 경험의 세계와 대상세계에 언제나 깊이 공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인물들은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삶의 진정성을 나름의 제한 속에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상황이 허락하는 작은 희망에 어기차게 매달린 채 자신의 앞에 주어진 삶을 밀고 나아가는 것이다. 그 낙관적인 전망은 이야기의 구성이 갖는 정교함에서 나오기보다 오히려 등장한 모든 인물들, 인물들이 일구어가는 소박하고 진정한 삶, 그 삶의 의미와 가치를 놓치지 않고 포착하는 생각의 깊이와 섬세한 마음의 결들로부터 필연적으로 분비되어 나온다. 「정아의 농번기」에 나오는 다음의 인용은 그 실제를 잘 보여준다.
‘괜히 들어왔구나!’ 뉘우치며 병숙이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병숙이 할머니도 마지막 모를 꽂으며 “끙” 하고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할머니가 가장 늦게 일어나곤 하는 것은 할머니 옆의 성자 어머니가 한 포기라도 덜 꽂고 일어나게 하려는 것이었다. 성자 어머니는 아기를 가졌는데, 허리 숙여 모를 심고 일어난 걸 보니 길에서 볼 때보다 배가 더 볼록 나와 보였다.
정아는 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순예도 어머니와 새참을 가지러 집으로 가고 없었다. 정아는 손에 쥐고 있는 것만 심고 나갈 참이었다. 모를 집으려면 이제는 엉금엉금 기어야 할 정도로 허리가 아팠다.
‘쌀밥 먹기가 이렇게 어렵다니, 공부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산골 마을 아이들』 190〜92면)
「정아의 농번기」에서는 이제 4학년이며, 반에서 가장 키가 작은 정아가 등장한다. 정아는 사람들의 행동에 담긴 섬세한 마음 씀씀이를 깊고 골똘한 관찰을 통해 남김없이 포착한다. 더욱이 직접 일하는 경험 속에서 소중한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이렇게 형상화된 인물은 결코 계몽적인 관점에서 가르침의 대상이 되는 어린이도 아니며, 그렇다고 세상의 모순과 동떨어진 채 순수의 거푸집 속에서 칩거하는 어린이도 아니다. 관찰하고 사유하고 공명하는 새로운 어린이의 형상이 임길택의 작품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이전 단계의 미적 성취들을 온전히 자신의 글쓰기 속에 온축하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4. 어린이문학의 분화와 발전
1996년은 어린이문학의 역사에서 기념할 만한 해이다. 창작과비평사가 처음으로 ‘좋은 어린이책’ 원고 공모를 한 해이기 때문이다. 물론 공모제는 ‘좋은 어린이책’ 이전에도 많이 있어왔다. 그러나 창작과비평사의 공모는 오랜 동안 민족문학의 중심축을 형성해온 동력과 이념적 지향을 어린이문학에까지 확장한 것이기에 기존의 공모제와는 질적으로 다른 지평으로 평가된다. 창작과비평사는 이 공모제를 통해 창비아동문고가 갖는 재생산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었으며, 어린이문학 작가들 역시 동심주의와 계몽주의의 틀 안에 갇힌 기존 문단과 제도적인 결별을 감행할 수 있게 된다. 도식적인 틀을 강제하는 신춘문예나 문학잡지의 추천을 받지 않고서도 어린이문학의 작가로 몸을 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공모제는 출판사와 작가지망생들을 직접 연결함으로써, 작가를 선별하고 작품을 출판하는 결정권을 많은 부분 출판사에 위임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출판이 어린이문학의 흐름 자체를 좌우하는 단초를 열어 보인 것이다. 물론 이는 나무랄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공모를 통해 몇몇 뛰어난 작품을 독자에게 건네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작가들이 작품을 발표할 지면을 제공하는 일이다. 또한 이미 출판된 작품에 대해 문학상을 수여함으로써 기존 작가들의 창작의욕을 진작시켜나가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러저러한 공과에도 불구하고 ‘좋은 어린이책’ 원고 공모가 갖는 문학사적 의미는 거듭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평가가 수상작품들과 분리하여 논의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어쩌면 이들 수상작품이 문학사를 한결 풍성하게 이어가는 그만큼 1996년은 문학사의 획기적인 분수령이 될 것이다. 그리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창비아동문고는 첫번째 수상작으로 채인선(蔡仁善)의 『전봇대 아저씨』(1997)를, 이어서 이가을의 『가끔씩 비 오는 날』(1998)을, 그리고 이미옥(李美玉)의 『가만 있어도 웃는 눈』(1999)과 박기범(朴起範)의 『문제아』(1999), 김중미(金重美)의 『괭이부리말 아이들』(2000) 등 아주 뛰어난 작품들을 독자에게 건넬 수 있게 된다.
이 가운데 민족문학사의 전통과 가장 긴밀하게 결부된 작품은 『문제아』와 『괭이부리말 아이들』이다. 이들 두 작품은 현실인식의 치열함이나 견고한 이념적 지향이란 측면에서 기존의 현실주의적인 어린이문학 작품들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방정환·이주홍·현덕·이원수·권정생·임길택의 연장선 위에서, 그 지평을 더욱 확장하고 심화하며 스스로의 위상을 정립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문제아』와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이전의 작품들과 명확하게 단절되어 있기도 하다. 이전의 작품들이 고통으로 가득 찬 현실에 압도되거나 현실을 인물의 자의적인 공간으로 끌어당겨서 제한된 희망에 자족하던 것과 달리, 이들 두 작품 속의 인물들은 낙관적인 전망으로 충만해 있다. 이는 단순히 결말의 처리가 희망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서사의 진행 속에서 인물들의 인식과 지각, 경험이 마주치는 새로운 깨달음은 현실의 결핍을 능동적으로 충족시킬 뿐만 아니라, 현실의 모순 전체를 날려버릴 정도로 희망으로 충만해 있다. 「독후감 숙제」나 「전학」 「문제아」 등 박기범 작품집의 주인공들은 물론이거니와 영호나 김명희 선생님과 함께하는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어린이들은 희망을 소박한 바람이 아닌 현실로 치환할 충분한 동력을 자신들의 내부에 갖기에 이른다. 이 단계에 이르러 현실주의적인 어린이문학은 협소한 계몽성의 범주와 결별하고, 삶의 진정성이 불러일으키는 희망에 대한 예감으로 충만하게 된 것이다.1
박기범과 김중미를 비롯하여 현실주의적인 전통의 심화·확장이 90년대 후반 어린이문학의 한 축이라면, 이와 나란히 마주세울 수 있는 또다른 경향은 단연 판타지일 것이다. 이원수의 『숲속 나라』처럼 그동안의 어린이문학이 판타지를 전혀 도외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우화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채, 판타지의 초기 형태인 의인화 방법만을 거듭 반복해왔을 따름이다. 그러나 계몽적인 거대담론의 주술로부터 벗어날 것이 암묵적으로 요구된 90년대 후반의 상황은 판타지라는 새로운 양식적 실험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내게 되며, 채인선의 『전봇대 아저씨』는 그러한 시도의 한 성과이다.
채인선 작품에 대한 평가는 의외로 후한 편이다. 발문이 갖는 특성을 충분히 고려하더라도 작가 박완서가 “상상력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환상적인 기법과 사실성의 기막힌 조화”라고 평가한 것이나, “채인선의 동화에는 ‘지금 여기 아이들’이라는 현재성이 생생하다. 그리고 과거 다른 작품에서 보기 힘든 발랄한 감수성과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돋보인다”는 원종찬의 평가2가 그러하다. 두 평가 모두 공통적으로 ‘상상력’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상상력이란 기발함과 동일한 개념은 아니다. 판타지의 근간을 이루는 상상력이란 언제나 현실을 더욱 선명하게 투영해 보기 위한 장치이지, 현실에서부터 자유분방하게 멀어져도 좋은 착상의 기발함이 아닌 것이다. 상상력의 개념을 제한적으로 사용할 때 채인선 작품집 『전봇대 아저씨』에 실린 편편들은 상상력의 분방함으로 규정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적지않다. 이들 작품들은 고른 성취를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봇대 아저씨』에서 상상력과 관련하여 손꼽을 수 있는 작품은 「그림자는 내 친구」와 「할아버지의 조끼」가 아닐까 한다. 「그림자는 내 친구」에서 전개되는 상상력은 전적으로 놀이의 공간 속에서 비롯되고 또 완결된다. 주인공이자 서술자의 놀이공간 속에서 그림자라는 새로운 판타지적 요소는 그 누구의 틈입도 허용하지 않는 자기충족적인 서사공간 안에서 작동한다. 그림자와 주인공의 내적 대화는 어린이들의 일상적인 세계 속에서 손쉽게 발견할 수 있는 전형적인 놀이이다. 그러기에 작품은 실감을 동반한 채 풍부한 울림으로 상상의 즐거움을 안겨준다. 「할아버지의 조끼」 역시 판타지 양식을 교묘하게 작품 후반부에 끼워두고 있는데, 귀신 이야기와 같은 결말의 반전이 인상적이다. 그럼에도 단순한 괴기담으로 떨어지지 않은 것은 이야기의 내면에 존재하는 할아버지의 간절한 갈망 때문이다.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소망이 판타지적인 장치에 힘입어 상상의 즐거움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작품들은 그렇지 못하다. 「학교에 간 할머니」는 웃음을 자아내기는 하지만 그로테스크하며, 「식탁 밑 이야기」는 자유분방하나 선명하지 못하다. 상상하는 즐거움들이 현실과의 경계를 지워버린 채 허공 속을 부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채인선의 작품이 갖는 이와 같은 동요(動搖)는 서술의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주인공인 어린이가 직접 서술자로 나서는 1인칭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어느 일요일 오후였어요. 나는 말했어요”(「우리 모두 다른 사람이 되었어요」)와 같은 서사전개 특성은 작품집의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그러나 정작 ‘나는’이라고 말하는 이 1인칭의 서술자는 작품 속에서 비현실적이며 추상적이다. 이 서술자는 명료한 정체성을 갖지 않은 채, 자유롭게 상상의 유영을 즐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채인선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지금 여기 아이들’은 실재하는 아이들이라기보다 채인선의 주관적 관념 속에서 만들어낸 아이들인 것이다. 결국 긍정적인 계기와 부정적인 계기를 동시에 안고 있는 채인선의 동요는 『내 짝꿍 최영대』(재미마주 1997)에서 발전적으로 상승하기도 하지만 『그 도마뱀 친구가 뜨개질을 하게 된 사연』(창작과비평사 1999)에서처럼 턱없이 조락해버리기도 한다. 계몽성이 문제가 아니라 어떠한 계몽성인가가 문제이듯, 어떠한 판타지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적어도 판타지 양식의 수용이란 관점에서라면 채인선은 새로운 출발이기보다 새로운 출발의 경계에 놓인 작가라고 봄이 더욱 적절하다. 오히려 그와 같은 소임은 다른 작가에게 귀속되는 듯하며, 그 가능성은 『샘마을 몽당깨비』(1999)의 작가 황선미(黃善美)에게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비록 계몽의 담론 속에 여전히 머물러 있기는 하지만, 『샘마을 몽당깨비』는 현실과의 날카로운 긴장을 한시도 늦추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또 한국적인 판타지를 진지하게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돋보이는 작품이다. 장편이라는 작품의 특성도 있겠지만 서사의 공간도 그저 기발한 발상에 그치지 않는 넓은 편폭을 지니고 있으며, 서사 자체도 문학사적 평가를 감당할 만큼의 밀도와 완결성을 획득하고 있다.
현실주의적 경향과 판타지적 경향이 오늘날 어린이문학의 중요한 축들이며, 그 가능성들이 박기범과 김중미, 황선미를 통해 분방하게 표출되고 있다고 할 때, 그 어디에도 쉽게 귀속되지 않는 경향들 또한 적지 않게 발견된다. 이미옥의 『가만 있어도 웃는 눈』이나 이가을의 『가끔씩 비 오는 날』이 이들 경향 속에 포함될 것이다. 이 작품들은 문학사적 전진이 선명하지 않으나, 미적 완결성이란 점에서 돋보이는 작품들이다. 특히 『가만 있어도 웃는 눈』은 근래에 보기 드문 작품이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조밀한 짜임 속에서 사건이 전개되며, ‘세상은 한 권의 책’이라는 은유를 시종일관 서사의 전체 속에 변주해 넣는 통일성도 인상적이다. 그리고 서술자인 ‘나’의 경험과 경험에 대한 반성적인 사유는 새삼 진정한 어린이의 발견이 무엇인지를 엿보게 한다. 다만 아쉬운 점은 작품에서 성취한 미적 완결성이 현실인식의 불철저함으로 훼손되고 있다는 점이다. 인물이 경험하는 ‘가난’이 작품 속에서와 같이 잠시 동안의 머무름일 리는 없기 때문이다. 여행자의 눈으로 가난을 보는 것은 여전히 소시민적인 발상이다. 작가는 개인적 경험 속에 칩거하기보다 오히려 서사적 경험 속에서 개인적인 경험을 거꾸로 반추하는 지혜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린이문학 작가의 올바른 의식일 것이다.
90년대 후반 이후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주요한 작가들은 이처럼 어느 하나의 경향으로 묶이지 않은 채 다양한 분화를 보여주고 있다. 다양한 분화에 바탕을 둔 이들 작가들의 개별적인 전진도 어린이문학 전체의 발전임은 분명하다. 예컨대 어린이를 등장시키는 방법만 해도 그렇다. 이전의 어린이문학과 달리 이들 작가들은 어린이들 스스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도록 만든다. 어른의 관점이 아닌, 스스로의 주체적인 관점으로 사물과 사람들, 그리고 세계를 경험하고 서술하도록 만든다. 박기범이 그러하며 채인선·이미옥 등이 그러하다.
5. 새로운 공공영역과 비평의 기능
지금까지 70년대 후반에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어린이문학의 전개과정을 거칠게 답사했다. 전체를 조감하지 못한 채 특정 출판사의 작품들을 쫓아왔기에 글의 한계는 아주 명확할 것이다. 그럼에도 선택한 작품들이 그저 범상한 작품들의 나열이 아니라 뚜렷한 성취를 이룬 작품들이기에 다행스러운 감 또한 없지 않다. 이원수로부터 이미옥에 이르는 역사적 과정과 이들 작가의 구체적인 작품들이 있기에 어린이문학의 역사는 쟁점을 분명히하며 더한층 전진할 수 있는 근거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어린이문학의 현실적 기반이 의외로 빈약한 것 또한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예전에 비해 괄목상대할 성장을 거듭했음에도 작가층은 여전히 두껍지 못하며, 작품들 역시 많은 부분 설익은 계몽주의와 추상적인 동심주의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다. 어린이문학의 견인차 역할을 해온 독자들조차 언제까지나 든든한 후원자로 남아줄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문화적 환경의 변화도 변화려니와 좋은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또 풍성하게 창작되지 않는 한, 독자들의 관심은 점점 엷어져갈 것이 분명하다. 결국 이러저러한 정황들은 특정한 한 주체의 분발에 모든 것을 떠맡기기 어려운 상황임을 말해준다.
문학과 예술이 작가의 분투 속에서 역사적 발전을 이루는 것과 달리 어린이문학은 예술적인 헌신만으로 완결되지 않는 복합성을 지니고 있다. 어린이문학의 주체는 작가나 연구자, 비평가로 국한되지 않고, 관여하는 모든 이들이 그 주체이다. 어린이문학은 문학임과 동시에 미래를 향한 윤리적·정치적 기획이기 때문이다. 어린이문학이야말로 희망의 문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린이문학의 역사는 작가와 작품의 역사만이 아니다. 작품을 둘러싼 그 모든 주체들이 함께 밀고 나아가는 희망의 역사이다. 어린이문학의 발전을 위해 이를 둘러싼 새로운 공공영역의 창출이 거듭 강조되어야 함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비평이 제자리를 찾는 것이야말로 출판을 비롯한 다양한 층위의 공공영역이 제 몫을 다하는 길이며, 어린이문학의 진정한 발전을 도모하는 길이다. 우리는 이제 그 과제를 밀고 나갈 입구에 서 있다. 나무의 생애에 견주어본다면, 어디를 향해 가지를, 또 잎을 내밀 것인가 하는 가장 중요한 싯점에 놓여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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