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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전투적 경제주의’에서 ‘공공써비스 노동조합주의’로
발전노조의 투쟁에 대한 평가
박태주 朴泰鉒
산업연구원 연구위원. 전국전문기술노동조합연맹 위원장 역임. 저서로 『공공부문의 단체교섭에 관한 연구』(공저) 『전력산업의 구조개편에 따른 고용관계의 변화분석』(공저) 등이 있음. tjpark@kiet.re.kr
1. 들어가는 말
발전노조의 파업이 38일 만에 노·정 합의가 이루어지고 조합원이 복귀함으로써 끝이 났다.
이 파업은 민영화정책에 대한 정부의 무리한 강행이나 발전노조원의 ‘끈질긴 산개(散開)투쟁’, 시민사회단체의 폭넓은 가세, 그리고 민주노총 등 상급단체의 조급한 노·정 합의 등으로 많은 뒷이야기를 남기며 ‘미완의 투쟁’으로 마감되었다.
이 글에서는 먼저 발전노조 파업의 경과를 간단하게 정리하고 이어 발전노조 투쟁의 의의 및 문제점을 차례로 살펴볼 것이다. 특히 평가에서는 이번 파업을 ‘전투적 공공써비스 노동조합주의’라는 측면에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2. 정부의 구조개편안 및 노동조합의 대응
(1) 발전노조의 파업
정부가 전력산업 구조개편의 핵심을 민영화로 가닥을 잡은 것은 김대중 정권이 출범한 지 불과 4개월 뒤인 1998년 7월이었으며 세부안은 99년 1월에 확정되었다. 이러한 정부의 안은 곧바로 전국전력노동조합(전력노조)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전력노조는 99년 1월 ‘전력산업분할 및 해외매각저지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 서울역 집회를 개최하는가 하면 희생자 구제기금의 조성, 전력 6사 노동조합 공동투쟁본부의 설립 등을 통해 정부정책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나섰다. 그 결과 99년 12월에 국회에 상정된 ‘전력산업 구조개편에 관한 법률’은 폐기되었다. 2000년 9월, 전력산업 민영화 저지투쟁 선포식과 더불어 출범한 오경호 집행부는 파업을 배수진으로 삼아 전력산업 민영화 저지에 나섰다. 그러나 2000년 11월 말 이래 파업은 세 차례나 연기되었고, 결국 12월 3일 노조 집행부는 파업을 철회하고 중앙노동위원회의 조정안에 서명하고 만다. 이로써 전력관계 특별법 저지투쟁은 막을 내리고 법률안은 12월 23일 공포되었다.
전력산업의 구조개편에 대한 정부의 안은 기존의 수직적 독점체인 한국전력을 발전, 송전 및 배전을 분리하고 다시 발전과 배전을 분할하여 민간에 매각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러한 정부의 계획에 따라 한국전력은 2001년 4월, 한전의 발전부문을 수력·원자력 자회사 및 5개의 화력발전 자회사로 분할하였다. 그 다음 단계로서 정부가 계획한 것은 발전회사 매각이었다. 첫째로 5개 발전회사를 두 단계로 나누어 민영화하는 것인데, 1단계는 2개사를 민영화하되 2002년 상반기 중 1개사를 선정, 민영화에 본격 착수하며, 2단계는 나머지 3개사를 대상으로 2005년까지 민영화에 착수한다. 둘째로 민영화 방식으로는 경영권 매각과 증시상장 방식을 병행 추진하되 외국인에 대한 매각규모는 국내 전체 발전설비의 30%를 초과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한편 화력발전소가 한전 자회사로 분할되면서 발전노동자들은 기존의 전력노조로부터 분리하여 수·원자력 노조와 화력 단일노조(전국발전산업 노동조합)를 설립하였다. 수·원자력 노조는 독립노조로 남은 데 반해 발전노조는 조합원 76.1%의 찬성으로 전력노조를 탈퇴하고 민주노총 산하 공공연맹에 가입하였다. 2001년 8월의 일이었다.
발전노조를 아우른 공공연맹은 2001년 10월 말, 연맹 산하의 전력기술노조, 지역난방공사노조, 고속철도공단노조 등과 한국노총 산하의 가스공사노조, 철도노조 등을 묶어 ‘국가기간산업 민영화(사유화) 저지를 위한 공동투쟁본부’(약칭 공투본)를 구성, 연대투쟁을 선언하였다. 또한 11월에는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은 물론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 등 43개 단체가 참가한 ‘국가기간산업 민영화(사유화) 저지 및 해외매각 반대를 위한 범국민대책위’(약칭 범대위)가 구성되었다. 공투본이 민영화 대상인 발전노조, 철도노조 및 가스공사노조를 묶어 연대파업에 들어가기로 결정한 날은 2002년 2월 25일. 발전노조가 2월 21일부터 이틀간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실시한 결과, 조합원 5606명의 94.6%인 5305명이 투표에 참여, 86%에 해당하는 4560명이 찬성하였다.
2002년 2월 25일, 철도노조와 가스노조 및 발전노조는 예정된 대로 동시파업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파업 당일 가스공사노조가 복귀한 데 이어 27일에는 철도노조 역시 복귀하였다. 96%의 파업참가율로 시작한 발전노조의 파업은 당초 일주일을 넘기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발전노조의 파업이 날을 거듭함에 따라 정부와 사용자측은 민영화는 교섭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한편, 조합원을 복귀토록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3월 4일, 미복귀 노조원에 대한 징계절차에 돌입하고 조합원에 대한 가압류 신청에 이어 3월 12일 49명을 필두로 총 340명을 해고하는 한편, 3849명의 미복귀자에 대해서는 25일까지 복귀하지 않으면 전원 해임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김대중 대통령 역시 19일 “발전노조 파업은 부당하고 불법”이라면서 “안되는 것은 안되는 것이며, 민영화 철회요구는 안된다”고 못을 박았다. 그러나 조합원의 복귀율은 낮았다. 파업 한달 만인 3월 24일 당시 근무를 한 실제 복귀자는 파업 미참가자를 포함하여 전체 조합원의 13.9%인 775명에 지나지 않았다(노동조합 보도자료).
한편 중앙노동위원회는 2002년 3월 8일 중재안을 제시하여 노조 전임자수(13명)를 보장하는 한편 휴·폐업, 분할, 합병, 양도, 이전, 업종전환 등으로 인한 조합원 신분변동 때는 반드시 60일 이전에 조합에 통보하고 성실하게 협의하도록 결정하였다. 이로써 노사간 쟁점은 사실상 민영화 사항만 남은 셈이 되었다. 한편 민주노총은 발전소 매각과 관련하여 ‘민영화 철회’에서 ‘유보’로, 다시 ‘민영화 노 코멘트’로 요구사항을 완화하였지만 ‘발전소 매각 인정을 포함한 합의문 작성’이라는 정부의 강경방침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발전노조의 끈질긴 투쟁은 민주노총과 시민사회단체의 결합을 이끈 직접적인 동력이 되었다.
(2) 민주노총의 대응 및 시민사회단체의 결합
민주노총은 2002년 2월 26일 주5일 근무제의 즉각적인 실시와 공기업 민영화 반대를 위한 총파업을 조직하였다. 이날의 경고파업에는 자동차 3사 노조를 비롯한 19개 노조 10만여명이 참여하였다(민주노총 보도자료). 민주노총의 지도부를 포함한 범대위는 단식농성에 돌입한 한편, 민주노총은 발전노조로부터 교섭권을 위임받아 대정부 교섭에 나섰다. 3월 26일 긴급하게 소집된 대의원 대회에서 민주노총은 “전력대란 자초하는 집단해고를 철회하고, 조건없이 대화에 나설 것”을 정부에 제안했고, 정부가 끝내 대화를 거부한다면 4월 2일 총파업을 결행할 것을 결의하였다.
발전노조의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전력공급에 대한 불안이 높아가는 가운데 시민사회단체의 성명서도 쏟아져나왔다. 성명서는 정부는 발전소의 매각을 유보한 다음 사회적 합의에 맡겨야 하며 발전노조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라는 내용이 주조를 이루었다. 3월 7일 “전력생산의 60%를 차지하는 5개 화력발전회사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는 충분한 토론과 국민적 합의를 전제로” 해야 한다는 강원룡 목사 등 사회원로 988명의 성명서를 필두로,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3월 8일), 박형규 목사 등 사회원로 5인(3월 16일), 경제학·경영학 전공 교수 102인(3월 19일), 사회학 교수(3월 20일), 교육의료 13개 단체(3월 26일), 환경연합·녹색연합·참여연대·여성연합·민주노총(3월 27일), 문화예술인 105명(3월 28일), 기독교사회선교연대회의(3월 28일), 정치학자 30명(3월 29일), 경실련(3월 29일), 천주교 인천교구(3월 31일), 영국 유학생 40명(4월 1일), 대구지역 학계·법조계·종교계·시민단체 등 332명(4월 1일) 그리고 한국산업노동학회(4월 1일)의 성명서가 봇물을 이루었다.
민주노총의 ‘4·2 총파업’ 결정에 따라 전교조가 조퇴투쟁을 발표했고 철도 및 가스노조는 재파업 돌입을 선언하였다. 보건의료노조, 민주택시연맹, 화학섬유연맹 여수산업단지의 18개 노조, 금속연맹의 자동차노조 등이 파업을 선언한 가운데 민주노총 및 공공연맹의 교섭단은 4월 2일 정부와 합의안을 도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합의안은 곧바로 ‘항복문서론’을 유발시켜 이튿날 민주노총은 합의문을 폐기함과 동시에 임원진은 사퇴한다고 밝혔다. 공공연맹 역시 위원장이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다. 이와 더불어 민주노총은 4월 3일 열린 투쟁본부 대표자회의에서 민주노총은 ‘(가칭)국가기간산업(공기업) 사유화 저지 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민영화 저지를 위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는 한편, “발전소 매각을 강행하거나 현장에 대한 전면탄압이 진행될 경우 대의원대회에서 결의된 총파업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공공연맹 역시 4월 10일 중앙위원회를 소집하여 발전, 가스, 철도 이외에 한국통신, 부산지하철, 사회보험노조 등 구조조정 현안을 가지고 있는 노조들을 묶어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저지 총파업투쟁을 다시 조직한다”고 결정하였다. 노·정 합의가 이루어짐에 따라 발전노조는 4월 3일 “지부별로 4월 4일 조합원과 가족의 공동집회를 개최하고 출근은 4월 6일 09시 정각으로 한다”는 업무복귀 명령을 내렸다. 한편 산업자원부는 화력발전회사 중 우선 1개사를 선정, 상반기 중에 매각에 착수한다는 방침을 4월 9일 발표하였으며, 이는 이튿날 기획예산처가 주관하는 ‘공기업 민영화추진위원회’에서 확정되었다.
발전노조의 파업은 무엇보다도 공공성을 사회적으로 재규정하기 위한 사회적 갈등의 성격을 띤다. 이하에서는 발전노조 파업의 의의 및 한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이번 성격을 통해 강렬하게 부각된 공공써비스 노동조합주의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3. 공공써비스 노동조합주의의 개화
(1) 공공써비스 노동조합주의
공공부문은 무엇보다도 공공써비스의 제공으로 특징지어진다. 따라서 공공부문의 노동쟁의는 국민경제와 대중의 생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정부가 실질적인 사용자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노사갈등 그 자체는 ‘강한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된다. 공공부문의 이러한 성격은 단체행동의 전술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민간부문 노동조합이 단체행동을 하는 중요한 목적은 사용자들에게 경제적 제재를 가해 노동조합의 요구를 수용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공부문의 단체행동은 정부의 정치적 의지에 압력을 가하는 정치적 동원으로 나타난다. 이 경우 공공부문 노동조합의 힘은 그들의 노동시장 상황이나 노동시장에서의 연대에 의존하기보다는 그들의 정치적 위상이나 공공적인 이슈를 지배하는 정치적 연대에 의존한다.
이러한 공공부문의 특징은 공공써비스 노동조합주의(public service trade unionism)의 주요한 원천이 된다. 공공써비스 노동조합은 공공의 이익을 중시하며 나아가 다른 노동조합은 물론 시민사회단체 및 써비스 이용자 모임과의 연대(coalition)를 중시한다. 즉 공공부문에서 공공써비스의 제공이 갖는 정치적 성격을 고려할 때 ‘공공성의 실현’을 위한 대중의 지지와 이를 위한 사회단체와의 연대가 공공부문 노동조합의 단체행동에서 중요한 전술적인 고리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나라 노동운동은 ‘전투적 경제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기업별 노동조합으로서는 단기적 이익, 즉 임금이나 근로조건과 같은 경제적 보상을 추구할 수밖에 없으며 이를 위해 파업을 택하는 것이었다. 노동조합의 조직이 ‘공장 밖’을 나서지 못한 상황에서 ‘노동을 조건짓는 사회경제적 체제’에 대한 인식은 사치였고, ‘공장 안의 이슈’를 사회화해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파업밖에 없었다. 이러한 전투적 경제주의는 노동자계급의 이중화와 노동운동의 사회적 고립, 모험주의적 투쟁을 가져왔으며 결과적으로 노동조합의 투쟁을 ‘시시포스(Sisyphos)의 도로(徒勞)’에 갇히게 만들고 말았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번 발전노조의 파업은 ‘전투적 공공써비스 노동조합주의’의 개화를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할 수 있다.
(2) 공공써비스 노동조합주의의 개화 및 한계
발전노조가 파업에 들어가면서 제시한 요구사항은 여섯 가지였다. 발전소 매각방침 철회, 단체협약 쟁취, 해고자 원직복직, 공기업으로서 경영자율권의 쟁취, 인원의 충원, 그리고 경정비 도입의 철회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중 단체협약은 2002년 3월 8일 중앙노동위원회의 직권중재 결정에 의해 ‘해결’되었으며 매각철회를 제외한 나머지의 쟁점들에 대해서는 노동조합이 더이상 무게를 싣지 않았다. 한편 발전소의 매각에 반대하는 주요한 논리로서 노동조합은 국부의 유출, 다양한 공적 활동 및 값싼 전력공급의 유지를 들었다. 민영화와 관련된 고용의 보장이나 임금인상 등 노동조합의 ‘생존권적 요구’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러한 발전노조의 파업은 “생존권 투쟁에 근거하지 못한 민영화 반대투쟁”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논리에 대한 거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이번 파업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조합원의 38일간의 흔들림 없는 산개투쟁이었다. 그러나 공공써비스 노동조합주의의 관점에서 볼 경우 관심을 끄는 것은 발전소 매각철회라는 공공적 요구 및 조합원의 끈질긴 미복귀 투쟁만은 아니었다. 발전노조의 투쟁은 민주노총을 축으로 하는 연대파업과 결합하는 한편 더욱 중요하게는 시민사회단체와 결합함으로써 발전회사의 매각을 사회적 의제로 만드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즉 ‘노동조합의 전투성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연대의 형성’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민중연대를 중심으로 한 범대위의 구성 및 적극적인 역할, 그리고 파업과정에서 광범위한 시민사회단체의 지지성명서 발표 및 결합, 연구활동을 통한 지원 등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특히 국영기업체로서의 한전을 대표적인 반환경조직으로 지목해온 환경단체(환경운동연합과 녹색연합)나 한전의 민영화에 찬성입장을 밝혀온 경실련, 그리고 문화예술인의 참여 등은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물론 한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계의 대부분은 공공써비스 노동조합주의에 대한 인식의 부족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첫째로 발전소 매각철회에 대한 대안이 없었다는 점이다. 현재의 발전자회사 씨스템이 적어도 안정적인 경쟁체제를 보장하지 않는다면 그 대안이 있어야 하는데, 발전노조는 물론 상급단체나 사회단체 어디에서도 설득력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발전노조의 매각철회투쟁은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주술적 언사로 대체되고 말았으며 국민에 대한 설득력에서도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편 이는 노동조합의 투쟁이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채 비롯되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였다.
두번째는 시민사회단체와의 연대를 강화하려는 노력을 민주노총이나 상급단체 차원에서 충분히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참여한 사회단체의 폭이 상대적으로 제한되었을 뿐 아니라 환경단체나 여성단체 등을 광범위하게 조직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지적할 사항은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사이의 미묘한 경쟁관계가 노출됨으로써 사회적 연대를 형성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였다는 점이다. 민주노총은 3월 5일, 가스노조가 공공연맹으로 상급단체를 변경하고 철도노조에서도 그러한 움직임이 있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는 곧바로 한국노총의 “노동계 단일대오로 집중할 시기에 조직분열을 조장한다”는 유감성명으로 이어짐으로써 한국노총이 연대전선을 이탈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비록 노정간 대화와 타협을 선호하는 한국노총의 방식에 대한 조합원의 반발을 인정하더라도 투쟁의 시기에 민주노총으로서는 한국노총과의 미묘한 경쟁관계를 표면화함으로써 노동계의 내부분열을 낳고 만 것이다.
세번째는 상급단체의 전술상의 경직성이다. 전투주의 노선은 이번 파업과정에서 무리한 목표설정으로 나타났고 그것이 민주노총으로 하여금 합의를 서두르게 한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전투주의 노선은 세 과시에 집착한 나머지 사실을 과장하거나 왜곡하였다는 점에서 ‘허세의 운동이자 기만의 운동’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는 특히 163개 노조, 2만 7천명이 파업에 들어갈 것이라는 공공연맹의 보도자료, 그리고 철도·가스노조의 재파업 선언이나 항공 6사의 파업선언에서 잘 드러난다. 이러한 허세에 바탕을 둔 전투적 기풍은 민주노총의 지도부조차 파업동력을 불신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심각한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이러한 수사적 전투주의 노선은 민주노총이나 공공연맹이 발전회사의 민영화나 조합원에 대한 탄압이 자행될 경우 2차 총파업을 조직하겠다는 결의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어느 것도 조합원의 ‘행동하려는 의지’를 고려해서 내린 결정이 아니라 ‘주문(呪文)으로 바뀐 투쟁’과 ‘관성화된 파업시늉’이라는 합동 알리바이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현재 정부가 구체적인 매각방침을 밝히고, 현장에서 노조원이 전쟁포로나 교화대상자처럼 서약서를 쓰고 있는 상황에서 민주노총이나 공공연맹 차원의 대응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로도 잘 드러난다.
4. 맺음말: 경제적 조합주의를 넘어
공공부문에서 민영화와 구조개편 및 상품화가 진전되는 가운데 이번 발전노조의 파업은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흐름에 대해 공공성이란 화두를 부각시킨 투쟁이자 노동배제적 노동정책에 대한 노동현장의 저항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공공부문이 ‘노사갈등의 핵’으로 떠오르고 있는 현실에서 발전노조의 파업은 노동운동의 방향이 전투적 경제주의에서 벗어나 공공써비스 노동조합주의로 이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즉 발전노조의 파업은 공공의 이익을 전면에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다른 노조와 연대함은 물론, 노동자들의 이익과 공공써비스 이용자들의 이익을 연계해 사회적 전선을 펴는 운동노선에 대한 거대한 실험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이번 발전노조의 파업을 전통적인 조합주의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또한 전통적으로 노조활동의 핵을 이룬 단체교섭이 이번 투쟁과정에서 핵심적인 ‘투쟁의 장’으로 나타나지도 않았다. 이는 단순히 “민영화를 교섭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라는 정부의 방침을 넘어 이슈 자체가 작업장을 벗어나 사회적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이만(R. Hyman)은 “오늘날 노동운동의 위기는 노동운동 자체의 위기가 아니라 특수한, 협소화된 형태의 노동운동이 가져온 위기”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번 발전노조의 파업은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에서 ‘새롭고 진보적인 힘’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이 노정관계를 주요한 관계로 하면서도 실리주의에 매몰되어 자폐증상을 드러내거나 국민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대안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할 것이다. 이러한 공공써비스 노동조합주의는 그것이 공공부문을 넘어 정치적·사회적 제반 의사결정과정의 변혁뿐 아니라 정치참여를 위한 투쟁으로 발전한다면 이땅의 노동운동에서도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social movement unionism)가 개화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