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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통신

 

비정규노동자 문제의 해결을 위한 소고

 

 

박영삼 朴泳三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정책기획국장. 저서로 『자동차산업의 원하청 관계와 노동자간 격차』(공저) 『비정규노동의 사회적 대안』(공저) 등이 있음. yspark@kcwn.org

 

 

1. 전체 임금노동자의 절반이 넘고 여성노동자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엄청난 규모, 각종 불법·탈법적 고용관행의 만연, 극도로 열악한 노동조건, 비합리적인 차별대우, 사회적 배제, 노동빈민으로의 전락……

흔히 이렇게 요약되는 비정규노동자들의 문제는 각종 통계수치의 발표와 함께 한국통신 계약직, 방송사 비정규직, 캐리어 사내하청, 보험모집인, 학습지 교사, 골프장 캐디, 레미콘 운송기사 등등 생존의 위기에 몰린 그들이 극한적인 투쟁을 통해 자신들의 처지를 알리고 이에 부응한 시민사회단체들의 공동행동이 활발해지면서 비로소 우리의 시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후 언론들이 앞다투어 이 문제를 보도하고 대통령이 정부 차원의 대책마련과 함께 이를 위한 노사정위원회 특위 설치를 지시하면서 조만간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초 2000년 10월에 약속했던 정부의 대책은 어느 것 하나 구체화되지 않은 채 공은 노사정위로 넘어갔고, 출범한 지 1년이 넘도록 끌어온 노사정위는 합의된 결론은 고사하고 올 6월로 예정된 공익안 발표 약속조차 제대로 지킬지 의문이다.

개별 사안들도 마찬가지다. 파업투쟁을 시작한 지 무려 500일을 넘긴 한국통신 계약직노동자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노동자의 절박한 요구 중에서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고, 노동자들이 생활고와 가정파탄으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겪는 동안에 이들의 문제를 다루는 노동위원회와 법원은 작정이나 한 듯이 앞선 판결들을 뒤집으며 좀더 확실히 사용자편에 서려고들 안달이다. 입법·사법·행정의 모든 국가기관이 말잔치로 세월을 보내는 동안에 최소한의 사회정의를 믿고 행동에 나선 노동자들만 죽을 노릇인 것이다.

 

2. 실업률이 외환위기 이후 최저치인 3%대를 기록하고 외환보유액이 1천억 달러를 넘어선 지금,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넘는 비정규직노동자들이 ‘은폐된 잠재실업자’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에 불과하며 국민연금·건강보험·고용보험·산재보험 등 최소한의 사회보험 혜택을 적용받는 경우도 5명 중 1명에 불과하다.

4년 전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연설에서 눈물까지 보이면서 “잘못은 지도층이 저질러놓고 고통은 죄없는 국민이 당하는 것을 생각할 때 한없는 아픔과 울분을 금할 수 없다”며 “소외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한숨짓는 사람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어떠한가. 불과 1년 사이에만 부동산 가격이 30% 이상 치솟고 증권시장은 지수 1,000선을 넘보고 있다. 주식과 부동산 가격은 IMF 이전 수준을 완전히 회복했고 이에 따라 자산계급들은 화려한 영화를 누리고 있건만, 7백만이 넘는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몸값은 계속 떨어져 그들의 삶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노동자 가구 안에서도 상위 20%의 소득은 지난 4년간 11.1%가 증가한 반면, 하위 20%는 명목소득조차 5.3%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얼마 전 발표된 2000년 지니계수는 0.351로 사회안정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그러므로 비정규직노동자 문제는 소득불평등 심화와 함께 현정권의 대표적인 정책실패로 지목된다.

 

3. 비정규직은 전국의 사무실과 공장, 거리 어느 곳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때로는 방문판매원으로, 때로는 은행 출납직원으로, 때로는 전화상담원으로, 그리고 때로는 가게점원으로, 특송배달부로, 전화가설원으로 그들을 만난다. 사무실의 책상 하나를 사용하는 똑같은 동료이기도 하고, 공장에서 일하는 작업자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새벽의 인력시장과 건설현장 그리고 농촌의 상업적 품앗이가 비정규 고용의 전형적인 형태였지만, 지금은 사업체가 있고 영업활동이 있는 우리 사회 모든 곳에 비정규직이 넘쳐나고 있다.

불과 몇개월 뒤의 내 운명을 알 수가 없고, 과거와 현재 및 미래의 선택들간에 합리적인 연관이 사라지고 있다. 그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이어나갈 뿐이다. 무한히 자유롭기도 하지만 그것은 정착의 희망이 사라진 불안정의 자유일 뿐이다. 아이를 낳지 않는 딩크(DINK)족의 등장은 신세대의 자유분방한 가치관에 따른 것일 수도 있지만,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오늘날 신규 취업자들의 불안과 공포가 불임(不姙)의 동거체제를 채근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지금의 상태는 극단적인 룰(rule) 부재에서 비롯되는 기업의 사회적 일탈이 만연하고 있다. 불법과 탈법의 경계가 애매하고 정당한 기업활동에 대한 보상도 불확실하다. 주가관리를 위해서는 합병과 분사 그리고 다운싸이징을 끊임없이 재촉해야 하고, 새로운 사업분야에는 너도나도 뛰어들어야 하는 것처럼 보이고, 이러한 무모한 경영행위로부터 자본을 보호하는 길은 고용에 따르는 책임을 최소화하는 것으로만 귀결되는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는 기업에 대한 종사자들의 헌신과 일체감을 기대하기 어렵고 나아가 지속가능한 경영 자체도 어렵다.

 

4. 이와 같은 노동과 자본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새롭고 진취적인 사회운동과 정치세력의 등장은 너무도 절실하다. 이를 위해 기존의 노조운동·사회운동과 함께 새로운 양상의 운동 속에 여전히 답습되고 있을지 모르는 잘못된 유산에 대해서도 함께 짚어보아야 한다.

현재 대기업노조의 주요 투쟁들은 본질적으로 이들을 중심의 위치로부터 끌어내리려는 자본의 공격에 대한 방어투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투쟁의 일차적인 목표는 중심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거나 그곳으로 복귀하기 위한 것이며, 주변적 지위에 늘 있어온 비정규직과 영세기업의 노동자들에 대해 ‘전술적인 원군’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조합의 중앙조직들이 대기업노조의 투쟁을 전국적인 연대투쟁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기왕의 비정규노동자 문제나 이주노동자 문제 등 소외집단의 요구는 쉽게 가려지고 만다. 이와 함께 비정규직노동자를 비롯한 주변부노동자들의 투쟁과 요구는 사실상 정규직과 대기업 노동자의 현재 지위를 위협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인정된다. 만일 그 수위를 넘어선다면 “노동의 하향평준화를 초래하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비판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 논리는 일견 타당할지 모르지만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상층부에 속하는 노동자들의 기득권에 털끝 하나 손대지 않고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처지와 권리를 개선하는 일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자본을 압박함으로써 노동의 전체 몫을 늘리는 동시에 노동 내부의 해결책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이 문제가 적극적으로 고민되지 않으면 앞으로도 상당기간 비정규직노동자의 처지를 개선하는 일은 난망할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은 비정규노동자운동 안에서도 얼마든지 재연될 수 있다. 크게 보면 전투적이고 계급적인 관점을 강조하면서 직접적인 공동투쟁을 연대의 원칙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문제를 넘어서서 인권과 소외극복 차원에서 폭넓은 사회적 연대를 이루어가야 한다는 입장이 존재한다. 참가주체들의 경향과 정치적 태도에서도 이질적인 그룹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구호가 아니라 실제의 내용을 두고 말하자면 이같은 비정규노동자운동에 관한 전략은 기존의 노조운동 또는 사회운동이 안고 있는 두 가지 편향, 즉 천박한 조합주의적 혹은 제도주의적 경향과 조급한 이념주의적 편향을 동시에 극복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즉, 모든 문제의 해결을 단체교섭과 정책참가를 통해 해결하여야 한다는 관점도 교정되어야 하며, ‘계급적’ 혹은 ‘신자유주의 반대’ 등 화석화된 슬로건을 모든 상황에 대입하는, 선언적인 진보성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방식도 달라져야 할 것이다. 현재 비정규노동자운동은 과감하고 대중적인 항의행동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동시에 다른 집단과 계층에 대한 끊임없는 설득과 동참 요청을 통해서 그 성과와 사회적 의의를 확보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것은 비정규노동자운동을 제약하는 조건이지만 동시에 더 깊고 넓은 운동의 지평을 열 수 있는 도전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견지에서 비정규노동자운동은 전통적인 민중운동 내부 소집단간의 ‘내부적’ 연대에 머물기보다는 다양한 영역과 수준의 사회세력에 대해 ‘개방적인’ 연대와 공동실천을 요구할 필요가 있으며, 주변의 활동가들 역시 이러한 방향의 활로를 모색하는 데 적극적인 도움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연대(solidarity)란 기본적으로 서로 이질적인 집단들이 힘을 모으고 보태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연대는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집단들간의 결속보다는 그렇지 않은 경우에, 심지어 자신의 이해에 일부 반하는 경우에라도 그 손해를 감수하고 정당한 요구를 지지하는 것이지 않을까.

 

5. 나아가 비정규노동의 문제를 총자본과 총노동, 시장과 반시장의 대결로 단순화하는 주장도 되짚어보아야 한다. 현대사회의 복잡한 맥락을 무시한 채 좁은 의미의 노동운동이나 사회운동으로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는 없다. 비정규직노동자들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사회는 노동과 자본의 대립항으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으며, 시장과 국가의 영역에서 모든 것이 갈등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비정규노동의 경우에서는 합리성의 부재 또는 독점에 의해 불구화된 경쟁이 주요한 문제점이기도 하다.

“제가 있는 의장부는 작년 임단협 이전에 있던 사람은 (시급---인용자) 2560원 받고 그후에 들어온 사람은 2450원 받습니다. (…) 2450원으로 한달에 특근 2개하고 한달 내도록 일하면 400시간이 조금 안됩니다. 계산해보면 1,032,000원에 버스비+만근수당+컨베어수당 하면 1,100,000 정도 되고 거기에 각종 세금 빼면 1,050,000 받습니다. 받아야 될 각종 수당은 사장통장으로 입금되고…… 일하는 사람이 젊은 사람들이라면 집에 부모님도 벌고 하니깐 돈 많이 모으겠구나 싶겠지만, 처자식 먹여살리는 입장 되면 이걸로는 한달 살기 바쁘지 돈 한푼 모으기 힘듭니다. 보너스달이나 돼야 친구랑 술 한잔 하고 자식 장난감 하나 사줄 형편이니…… 조합원님들은 하청직원들이 지금 받는 월급이 적당하다고 보십니까?” (펌 「조합원들은 과연 하청 시급이 얼마나 돼야 된다고 생각합…」, 울산하청노동자www.hachung.net 자유게시판 2002년 4월 23일)

정리해고에 항의하는 하청노동자(2002년 1월)

정리해고에 항의하는 하청노동자(2002년 1월)

이 노동자는 컨베이어벨트에서 정규직과 똑같은 일을 한다. 그리고 이런 처지에 놓인 사내 하청노동자들은 울산의 공장에서만 대충 1만명을 넘는다. 작년 11월까지 4년 동안 임금이 오른 적이 한번도 없다고 한다. 잔업과 특근을 다 하고 받는 1백여만원의 임금은 3만 6천여명에 달하는 정규직노동자들의 기본급에도 못 미친다. 그래도 이 노동자는 다른 사업체의 사내 하청노동자에 비해서는 그나마 조건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거의 같은 일을 하는 정규직노동자에 비해 임금은 절반에 불과하다. 더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수천명에 달하는 대부분의 사내 하청노동자들이 잦은 해고로 인해 6개월을 넘기기 어렵다는 것이고, 이를 빌미로 사회보험 가입의무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업체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같은 일을 하는 노동자에게 절반의 임금만 지급하고 사용자의 사회보험 가입의무를 회피하는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선진국의 경우 만약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인권침해로 해당 기업을 고발해버릴 일이다. 똑같이 존엄한 시민인 노동자를 아무런 객관적 기준도 없이 차별하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의 기업주들이 원만한 노사문화의 모범으로 일컫는 일본의 법원조차 동종의 노동자에 대해 시간당 임금의 차이를 20% 이상 설정하는 것은 위법이라고 판결하지 않았던가?

문제의 본질은 우리나라 대기업의 고질적인 전근대적 거래관행이다. 외부 하청업체에 대한 원청 대기업의 전횡과 수탈은 거래의 체결과 이행, 갱신 등의 전과정에서 자행되는 불평등의 백과사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자기 회사의 퇴직자를 다른 업체에 떠안기면서도 오히려 관계유지를 위해 혜택을 주는 것이라고 강변할 정도이다. 어쩌면 이런 부당한 관행과 일방적인 규정을 사내 하청업체와 그 노동자들에 강요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런 상태에서 사내 하청노동자들의 임금과 사회적 권리가 정당하게 보장되기를 기대하는 것부터가 잘못인지도 모른다.

비정규 고용을 방임하는 것이 결코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대안이 될 수는 없다. 기업들이 탈법적이고 경쟁적인 인건비 절감과 노동규제 완화에만 의존할 경우 ‘혁신을 통한 질적 경쟁력의 제고’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특히 노동시장에서 가장 취약한 지위에 있는 계층의 보호장치로서 규제를 포기하는 것은 노동 내부의 경쟁만 강화할 뿐, 그 노동을 구매하는 자본간의 경쟁 즉 기업들의 경쟁은 오히려 약화시킨다. 이는 노동자들의 몫을 빼앗는 기업과 그러한 중소기업들에 대한 수탈을 통해 초과이윤을 확보하려는 독점기업들의 횡포를 방치하게 되고, 결국 공정한 게임을 통해 성장하려는 정상적인 기업의 활동을 방해하는 결과를 초래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의 희생 위에서 이익을 얻는 악의적인 기업들을 보호하고 있는 현재의 상태는 시급히 혁파되어야 하며, 그 첫단추는 비정규 고용에 대한 규제, 사회적 기본권의 보장, 그리고 동일노동·동일임금 원칙을 확립하는 것이다.

비정규노동자의 문제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문제가 그러한데, 한 사회의 유지와 발전을 위한 공통의 합의점을 찾기 위해서는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문화적 가치 가운데 어느 한 측면만을 중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경제의 성장과 사회적 형평, 문화적 가치는 동시에 추구되어야 하며, 이 모든 것은 결국 구성원들의 자유롭고 인간다운 삶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