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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통신

 

땅속에 묻어두었던 5·18 사진들

 

 

김인곤 金仁坤

80년 당시 중앙일보 사진기자. 현재 5·18 기자클럽(http://cafe.daum.net/518photoclub)을 개설해 당시 공개되지 못한 사진들을 올리면서 사진 접수를 받고 있음. igokim@altermedi.com

 

 

1. ‘전쟁’이란 전략과 전투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전쟁에 참가하는 ‘말단 소총수’의 역할은 전투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말단 소총수는 그저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치르는 수뇌부에서는 전략상 적들을 유인하기 위해 질 것이 뻔한, 아니 반드시 져야 하는 전투를 지시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들이 미끼로 사용되는 전투라는 사실을 알았건 그렇지 못했건 간에 말단 소총수는 전투를 수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투를, 아니 전쟁을 평가하는 것은 말단 소총수의 역할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단 소총수에게는 그럴 능력도, 필요도 없어야만 훌륭한 군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남자는 누구나 나이가 차면 국군이 됩니다. 그러나 전쟁터에는 아군과 적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1980년 당시 중앙일보 3년차 사진기자였던 29세의 그는 선배기자 2명과 함께 5월 20일 광주에 급파됩니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것처럼 80년은 전국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로 뒤덮였던 시절입니다. 서울에서도 대규모 시위로 매일같이 서울역과 태평로 일대가 최루탄 연기로 가득했으니까요. 게다가 4월 말쯤부터 부산과 마산에서 극렬한(?) 시위가 있었고, 뒤이어 광주에서 벌어지는 시위의 강도가 심상치 않다는 신문사의 판단으로 우리가 급파된 것입니다.

 

초기 과잉진압의 현장

초기 과잉진압의 현장

 

그를 비롯한 동료기자들이 광주로 진입할 당시인 20일쯤에만 해도 벌써 고속도로의 장성 부근쯤부터 군과 경찰이 삼엄한 검문검색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광주를 만나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습니다. 신분이 확실한 신문기자였으니까요. 신문기자인 그가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하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광주 시계(市界)에 들어서는 순간 그는 이미 피비린내를 맡았으니까요. 그래서 소위 말하는 데모, 그 현장을 수없이 겪었던 사진기자인 그는 이곳 광주에서의 데모진압 형태가 ‘도’를 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며칠 사이에 진압군의 발포가 이루어졌고, 총을 맞고 쓰러지던 시위군중이 자위수단을 찾아 무장하게 되는 상황에 이릅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만의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항쟁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오직 신분이 사진기자인 그로서는 전쟁이라고 부를 수도, 항쟁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현상을 실감나게 알리는 기자의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한 그는 그저 초라하기 그지없는 구경꾼일 뿐이었습니다.

 

과잉진압 희생자를 손수레에 싣고 시위하는 장면

과잉진압 희생자를 손수레에 싣고 시위하는 장면

 

2. 1980년 5월 17일부터 27일까지. 열하룻동안 전개되었던 사건은 분명히 전쟁이었습니다. 살과 피가 튀어오르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죽임과 죽음’이 공존했으니까요. 그 전쟁터 한복판에 우두커니 남겨진, 그러나 이쪽도 저쪽도 아닌 제삼자인 사진기자는 솔직히 그 무엇도 할 일이 없었습니다. 곁에 서 있던 ‘사람’이 하나 둘 쓰러져가는 전쟁터에서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 그저 목을 움츠리고 앉아 있어야 하는 사진기자의 심정을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오직 카메라뿐이었으니까요. 자신이 스스로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습니다.

서울에서 발행되는 신문에서 “대폭동에 휩싸인 현장, 그리고 혼란 그 자체”라고 보도되던 22일부터 27일까지, 광주는 사실 정말 평온했습니다. 거의 모든 상점이 문을 열었고, 시내통화도 가능했고, 전기도 공급되었습니다. 방송국을 비롯한 지역언론들은 솔직히 말해 자진해서(?) 문을 닫았습니다. 자신들의 동생과 형님이 무장한 시민군으로 시민들의 생명을 지키고 있는데, 그들을 폭도로 불러야 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광주시계를 국경으로 하는 독립국이 탄생한 형국이었습니다.

그 와중에서도 그는 주민등록증에 기재된 주소지가 광주권이 아니라고 식당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라면을 사러 가서도 주민등록증을 보여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을 떠날 수도 없었습니다. 이쪽도 저쪽도 아니지만 어차피 그는 전쟁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서울에서 방송되는 라디오에서는 “지금 광주에서는 대약탈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목격한 것은 시민들이 자진해서 길거리에 몰려나와 시민군에게 밥을 해주고 음료수를 건네주며 격려하는 모습들뿐이었습니다.

그는 또 밤마다 전율했습니다. “시민여러분……” 뼛속을 파고드는 절절한 목소리가 시민군과 국군의 전쟁상황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시민’도 아니고 ‘국군’도 아니었지만 심장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3. ‘시민’의 패배로 전쟁이 끝났습니다. 당시에는 그랬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마침내 닫혔던 광주시계를 벗어나게 됩니다. 외부와의 전화가 다시 개통되고, 송정리역에서 서울행 열차가 다시 구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첫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면서도 사진을 찍었습니다.

 

27일 이후 체포되어 곤욕을 치르는 젊은이들

27일 이후 체포되어 곤욕을 치르는 젊은이들

 

후에 그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광주에서 본 것은 무엇인가. 서울에 돌아오니 내가 본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나는 광주라는 환상 속에 빠져 있다가 되돌아온 것인가.

그는 알았습니다. 그와 동료들이 광주에서 찍었던 흑백필름이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는 순간, 영원히 되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그는 밤새워 미친 듯이 필름을 확대기에 걸어놓고 사진들을 만듭니다. 몇장인지 무슨 장면인지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그 자신이 직접 찍은 것인지 어떤 선배가 찍은 것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아니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자신이 눈으로 목격한 현장들이 환상이 아니라는 증명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아무도 모르게 그 사진들을 기름종이에 싸고 비닐로 또 싸서 앞마당에 묻어버립니다. 물론 가족들에게조차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찍은 사진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죄’가 되는 상황에 있었던 것입니다. 전쟁터에 있었다는 사실이 죄가 된 것입니다. 단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죄송스럽고, 단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화가 나고, 이쪽도 저쪽도 아니었다는 사실에 허탈해하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기억을 지워버리는 일입니다. 의식적으로 그때의 기억을 지우려 애를 쓰는 것이지요. 명상수련이, 단전호흡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적어도 ‘외상후 증후군’ 같은 증상은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잠시 사라질 수는 있어도 영원히 지워지지는 않는 것이 기억입니다.

 

고교생 희생자를 도청으로 운반하는 장면

고교생 희생자를 도청으로 운반하는 장면

 

이후 그는 사진기자라고 하는 직업에 심한 자괴감을 느끼게 됩니다. 역사를 기록한다는 자부심에서 시작했고, 1980년에는 사진기자로서 최고의 명예인 보도사진전 금상을 수상했고, 81년에는 한국기자상(사진부문)까지 받았지만 사진기자라는 직업에 더이상 열정을 바치지 못했습니다. 그는 사진부를 떠나 취재기자가 됩니다. 그것은 일반인으로서는 직업을 바꾸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정말 광주는 잊었습니다. 정말이지 “광주 쪽을 향해서는 소변도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4. 2000년 11월, 그는 신문사를 그만두게 됩니다. 인터넷 관련 사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가 가능한 한 광주를 외면하고 살아오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렀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광주에 대한 평가가 달라집니다. 아마 그것이 바로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제삼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든 ‘80년 광주’로부터 풀려나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기름종이에 싸서 땅속에 묻어두었던, 버릴 수도 없고 내놓을 수도 없었던 ‘그것’들을 세상에 풀어놓았습니다. ‘자신만의 전쟁’에서 놓여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가 인터넷 관련 사업을 하면서 싸이버 세상에 대해 알게 된 것이 그 사진들을 내놓은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당시 현장에 있었던 몇몇 선배들에게 조심스럽게 자신의 뜻을 알렸습니다. 그사이 나이가 들어 이제는 대부분 은퇴한 사진기자 선배들 역시 “버리지도 내놓지도 못한 사진들을 가슴속에 묻어두고 있었다”고 고백하는 말을 들으면서 그는 처음으로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공개를 결정합니다. 빌린 오토바이에 함께 타고 사진을 찍다가 앞유리에 총탄을 맞는 바람에 오토바이가 전복되면서 다리가 찢어졌던 선배 기자 한분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그 선배도 자신의 뜻에 선뜻 동의해주리라 그는 믿습니다. 그래서 그는 싸이버 세상에 공짜로 땅을 주는 곳에 ‘5·18 기자클럽’ (http://cafe.daum.net/518photoclub)을 개설합니다.

 

청소차로 주검을 도청에서 상무관으로 옮기는 장면

청소차로 주검을 도청에서 상무관으로 옮기는 장면

 

80년에 봄에 있었던 것에 대한 제대로 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대로라면 그가 서 있던 자리도 역사에서 사라질 것이 뻔했습니다.

 

5. 그는 생각합니다. 기자생활 23년. 그의 첫번째 인생이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두번째 인생을 준비중입니다. 그가 첫번째 인생을 보내며 깨달은 것은 우리나라에는 역사를 증명할 기록다운 기록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투명해지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기록다운 기록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고 언젠가 그 기록이 공개될 것이라는 냉철한 역사의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의 미래는 적어도 지금과는 달라질 것입니다. 교통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신호를 위반하는 장면을 카메라로 찍는 감시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그를 참으로 부끄럽게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 이곳저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하나하나 누군가에 의해 기록으로 남겨져 언젠가는 시시비비가 공평하게 가려진다면, 비리·부패가 줄어든 사회를 후손에게 남겨줄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80년 광주’는 그의 손을 떠났습니다. 그가 원하듯 사진에 나와 있는 주인공들, 시민군, 친척들 그리고 당시 현장을 설명해줄 사람들을 찾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사진에 생생한 이야기들을 붙여 역사기록집을 남기고 싶다는 그의 바람이 이루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진실에 대한 검증과정도 필요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도움도 필요하고, 비용도 필요할지 모릅니다.

 

염도 제대로 받지 못한 희생자들

염도 제대로 받지 못한 희생자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 바람을 갖고 지켜볼 것입니다. 몇몇 선배들도 참여의사를 밝히고 있기 때문에 더욱 힘이 납니다. 그런가 하면 사진을 공부하는, 또는 사진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도 무언가 힘을 보태겠다는 의사를 보내오고 있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