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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칠십일과(七十一果)의 괴(怪)

유홍준 『완당 평전』 1·2, 학고재 2002

 

 

김지하

시인

 

 

작년 십이월 손댄 지 꼭 이십년 만에 처음으로 인사동에서 묵란전(墨蘭展)을 치렀다. 전시중 손님이 좀 뜸한 틈에 서너 차례인가 화폭들을 둘러보며 곰곰 따져보았다. 몇가지 큰 험이 보였다.

그런데 연초 출간된 유홍준(兪弘濬) 교수의 『완당 평전』이 참으로 기이하게도 바로 그 험들, 문제들에 대해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해주었다. 두 권으로 된 평전을 사흘 만에 완독한 뒤 너무도 재미있고 너무도 가르치는 바가 많아 먹으로 방서(倣書)하며 되풀이 되풀이 중요한 부분을 다시 읽고 깊이깊이 마음에 새겨두었다.

세상에는 추사(秋史)를 모르는 사람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다고들 말한다. 완당(阮堂) 생전에도 그랬다지만 오늘 살아 있는 우리에게는 더욱 그렇다. 우선 전(篆)이니 예(隸)니 행(行), 해(楷), 초(草) 등 한자(漢字)를 거의 모르기 때문이고 동양과 중국, 그리고 우리 민족의 문화사까지도 아예 남의 집안 일이 돼버린 지 오랜 까닭이다. 그 높은 벽(壁)을 뛰어넘은 유교수에게 먼저 큰 박수를 보낸다. 이십년 세월을 완당 공부에 바쳤다 한다.

책을 읽고 또 만나 잠시 들어보니 유교수가 참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칠십일과(七十一果)의 괴(怪)에 있었던 듯싶다.

세상이 그를 알면서도 모르는 것이 첫째 ‘괴(怪)’다. ‘칠십일과’란 말은 ‘나이 일흔한살 먹은 과천(果川) 사는 늙은이’라는 뜻이다. 과천 사는 이 늙은이의 ‘괴’란 무엇일까? 완당학의 비밀은 바로 이 ‘괴’ 한 자에 있는 듯하다. 첫째 동양문명의 해체와 그 문화력의 쇠퇴에 ‘괴’의 뿌리가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완당을 이해하거나 더욱이 감식할 만한 지식도 지혜도 정서도 없다. 그저 추사체 글씨나 판각(板刻)한 「불이선란(不二禪蘭)」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다. 역시 ‘괴’다.

둘째 ‘괴’는 청(淸), 즉 당시 중국에서의 그의 인기와 청나라 및 그 주변의 온갖 변화에 대해 무슨 방도를 써서라도 낱낱이 알아내고야 마는 완당의 그 지독한 중국벽(中國癖)이다. 자칭 타칭 뭇 민족주의자들이 입을 모아 모화주의자(慕華主義者),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로 폄하여 마지않는 이런 점은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유교수는 당시 동양의 개념으로는 중국 중심의 십이제국(十二諸國)이 곧 세계였으므로 중국과 또 중국 기록으로 알 수 있는 여러 새외민족(塞外民族)들에 대한 관심과 그로부터의 평가는 오늘의 윤이상(尹伊桑), 백남준(白南準), 이응노(李應魯)에 해당하며 옛일로서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과 맞먹는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도리어 글로벌 시대의 국제주의자의 선례요 모범이라고까지 본 것이다. 이러한 중층성이 이 ‘괴’의 한 근거다.

셋째 그러면 국제주의자인 완당에게 그 당시 흔한 사대부들마냥 민족적 자부심이 없었던 것일까? 그렇지도 않았다는 점에 또하나의 ‘괴’가 있다. 북청 유배시절 그 지역을 옛 숙신(肅愼, 주신 또는 조선)의 땅, 즉 고조선의 옛 영토로 비정(比定)하고 돌화살촉[石ᅌᅪᇝ] 등을 고증했으며 그에 근거한 행동과 시편을 남기고 있음을 유교수는 지적하였다. 신라 시절 북방을 개척한 진흥왕의 순수비를 황초령 근처 산곡(山谷)에서 끝까지 찾아낸 그의 민족적 자존심과 사랑은 그의 중국열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역시 ‘괴’다.

지금에조차 ‘괴’인 이 부분에 대해 나는 현대 중국의 금문(金文) 연구에서 고대 중국의 문자와, 동이족·한민족의 음운이나 사라져버린 부호 등과의 불가분의 관계가 강조되고 있음(낙빈기·김재섭)을 지적하고 싶으며 1890년대 이래의 동작빈(董作賓) 등의 갑골학에 의한 고대문자 즉 전서(篆書) 등과 인방족(人方族, 동이족)의 문화인 ‘인(仁)’ 또는 ‘인(人)’ 또는 ‘이(夷)’ 사상의 관계를 짚어두고 싶다. 이미 그 당시에 완당은 청의 고증학에서 고대문헌들(『산해경』 등)에 대한 평가절하 유행과는 달리 현대의 고고학적 안목에 접근했던 것이 아닐까? 완당의 고비(古碑) 등에 대한 금석학이 서예가의 관심으로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중국문화 우월주의’에 의해 억제된 조선적 민족문화의 유풍(遺風)을 상고하려 한, 그래서 하나의 ‘괴’를 형성한 ‘민족주의이면서 동시에 국제주의적인’, 전혀 철학적으로 독특한 또하나의 관점은 아니었을까?

민중적 체취가 강한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에게 행한 완당의 오만방자한 귀족주의 등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과천 시절의 시편에

 

한그루 늙은 버들, 두어 서까래집에

머리 하얀 영감 할멈 둘이 다 쓸쓸하네

옥수수 가을 바람에 칠십년을 살았다오

 

와 같은 민중적 서정이 낭만인 양 깃들이고 「대팽두부(大烹豆腐)」 등에서와 같이 소탈한 먹거리가 인생의 낙인 서민의 정조가 넘치는 것을 보면 역시 또하나의 ‘괴’로서 다산(茶山) 못지않은 민중지향적 예술가가 또한 완당임을 알게 해준다.

완당은 젊은 시절에 그토록 매도해 마지않던 백파선사(白坡禪師)에게 그의 사후 힘차고 신운생동(神韻生動)하는 비문을 바치며, 또는 초의선사(草衣禪師)를 그리워하며 봉은사(奉恩寺)의 판전횡액(板殿橫額)을 써주며, 또는 ‘수졸산방(守拙山房, 어수룩함을 지키는 산방)’ 등의 고졸함을 삶과 예술과 담론에서 실현함으로써 선(禪)의 최고경지인 ‘허공(虛空)’이나 ‘무애(無碍)’ 즉 ‘허화(虛和)’를 넘나들었으니 그의 청춘시절의 천재기질·양반기상에 비해 ‘괴’ 중의 ‘괴’ 아니겠는가.

116-388완당은 말년에 기(氣)와 흥(興)과 허(虛) 그리고 선(禪)과 난(蘭)을 진술함에 이르러 ‘괴가 이미 괴가 아닌 경지’ 아니, ‘괴 아니라면 아(雅)가 될 수 없다는 미학적 깨달음의 영역’에 도달하니 이것이 이 ‘괴’라는 한 글자가 추사체의 비밀이요, “일부러 공교롭게 꾸미려 하지 않고[不計工拙]” “큰 기교는 기교가 없는 것과 같은[大巧無巧]” 지예(至藝)의 땅, ‘아무 잘못이 없는 천연의 괴’(朴珪壽)의 미학적 안목이 아니었을까 한다. 서양 미학으로 친다면 ‘숭고(崇高)와 그로테스크’ ‘장엄(莊嚴)과 추(醜)’의 변증법 같은 지경이 아니었을까라고도 생각된다.

바로 이 ‘괴’가 ‘하늘에서 놀고 바다에서 노닌다[遊天戱海]’ 즉 “구름과 학이 하늘에서 노닐고 갈매기떼가 바다에서 노닌다[雲鶴遊天 群鴻戱海]”는 중국인 종요(鍾繇)의 글씨의 세계에 이르는 ‘길’은 아니었을까? “산은 높고 바다는 깊다[山崇海深]”로 상징되는 이 ‘괴의 길’ 안에 민족미학의 허허한 옛 ‘홀로 외롭게 변화하는 신의 선도[獨化之仙道]’가 따로 있음은 아니던가!

나는 여기에 이르러서야 완당의 ‘괴’가 곧 원효(元曉)의 무애(無碍)나 일심(一心)의 도(道), 또는 율곡(栗谷)의 이기학(理氣學), 남명(南冥)의 경(敬), 수운(水雲)과 혜강(惠剛)의 신기(神氣)의 철학에 맥맥이 관통하고 드디어는 다석(多石)과 함석헌 그리고 그 위로 심지어는 진경산수와 송석원시풍(松石園詩風)에까지 이어지는 동이(東夷) 선도의 미학적 핵심인 것을 알아차리며, 지난 전시에서 드러난 나의 험들이 종내는 완당의 이같은 선예(仙藝)의 맥을 놓친 데에 있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나는 묵란으로 문인화가임을 자처하고 내 나름의 달마도(達磨圖)로 머리 검은 사문(沙門)임을 뻐기어왔다. 그러나 유·불·도, 기독과 진취적 과학의 알심을 가로지르는 선취(仙趣)를, 청산에서 백학(白鶴) 놓치듯, 깜박 잃었으니, 무슨 할말이 남아 있겠는가? 완당에 대한 이십년의 공부 끝에 유교수가 발견한 바로 이 ‘괴의 미학’에서 나의 지난 ‘험’과 ‘문제’를 극복할 새 단계의 핵심 해답을 얻었으니 더이상 무슨 할말이 남아 있겠는가? 소위 태극(太極)과 같은 모순과 일치의 동시어법, 생극론(生克論)과 중도(中道), 그리고 “아니다 그렇다[不然其然]”의 생명논리, ‘모심[侍]’의 미학이 그것 아니던가? 다만 먼저 완당을 칭송하고 그 다음 유홍준 교수의 노고를 치하하는 마음뿐이다.

내 나이 이제 육십이세인데 멀리 한강에 비취는 봄 노을에 문득 내 나이가 혹 ‘칠십이’는 아닐까 하고 멍청한 의문에 사로잡힌다. 내가 아호 ‘칠십이구초당(七十二鷗草堂)’에 칠십일세로 별세한 완당이라도 된단 말인가? 허허허.

(단기 4335년 4월 11일, 일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