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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다시 땅에 뿌리내리는 삶을 회복하기
전우익 『사람이 뭔데』, 현암사 2002
이병철 李炳哲
녹색연합 공동대표, 전국귀농운동본부장 hansimdang@hotmail.com
내 기억 중에서 이번 봄은 가장 화려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모든 봄꽃들이 한꺼번에 피었다. 매화가 채 지기도 전에 산수유, 생강나무에 이어 하얀 목련과 붉은 목련이 동시에 꽃봉오리를 터뜨리더니 진달래, 개나리, 벚꽃까지 활짝 피었다. 집앞의 동백꽃이 아직 붉은데 산에는 벌써 산벚꽃이 한창이고 어느새 산철쭉까지 피어났다. 정말 눈부신 봄이었다. 그러나 이 화려함의 꽃그늘 속에서 돋아나는 섬뜩한 두려움을 본다. 봄을 차례로 열어가던 꽃들이 제 필 때를 잊은 채 한꺼번에 피어날 수밖에 없는 이 계절의 이변이 나는 두렵다.
인간이란 사회적 존재이기 이전에 자연생태적 존재이다. 그런데 이 자연생태적 존재인 인간이란 종(種) 자체가 지금 심각한 생물학적인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지적과 경고가 지구촌 곳곳에서 발해지고 있다. 이러한 위기는 지구온난화 문제에서부터 환경호르몬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데, 문제는 이같은 재앙이 인간 자신들에 의해 초래된 것이고 그 결과 이제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 종의 멸종에서 보듯이, 지구 생명계 전체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지구생태 신학자인 토머스 베리(Thomas Berry)가 지적했듯이 지구 생태계의 한 종에 불과한 인간이란 생물종에 의해 지구상의 모든 생명계가 위기에 처한 것은 46억년의 지구역사상 일찍이 그 유례가 없던 대사건이다.
경상도 봉화 땅에서 나무를 자식처럼 돌보며 그 나무와 벗하고 사는 늙은 농부 전우익(全遇翊) 선생의 서한문 형태의 에쎄이집 『사람이 뭔데』는 바로 이러한 자연의 이변 앞에서 인간과 자연 생태계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되물으며 어떻게 사는 것이 과연 제대로 사는 것인가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이 책은 선생이 심고 돌보는 나무 이야기를 중심으로 도연명과 루쉰의 삶과 작품 이야기, 그리고 김용준의 『근원수필』과 『체 게바라 평전』에 대한 독후감도 함께 실려 있다.
선생은 이미 두 권의 책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1993)와 『호박이 어디 공짜로 굴러옵디까』(1995)를 펴낸 바 있는데 이번 책도 앞서의 책들과 그 형식과 내용이 닮았다. 책표지와 중간중간에 선생의 주름진 얼굴과 그가 아끼고 돌보는 나무와 세간들의 사진이 함께 실려 있는 것까지 그대로이다. 그래서 어쩌면 7년 만에 다시 나온 그의 책을 접하는 독자들에겐 참신성이란 점에서 아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다보면 한결같되 더욱 새롭고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메씨지들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처럼 선생의 잔잔한 이야기가 갈수록 더 큰 울림이 되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삶터의 무너짐이 절박하기 때문일 게다.
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을 유일한 즐거움으로 삼을 정도로 선생의 나무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유별나다. 선생은 이러한 나무를 기르는 과정을 통해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새롭게 살펴본다. 「나무 심는 즐거움」(1996)이란 글에서 비닐봉지에 넣어 화물로 보내는 바람에 묘목이 상처를 입어 죽어가는 것을 보며 “그 어린것을 포대기에 싸서 정성껏 안고 와도 먼길에 몸살을 할 텐데 어쩌자고 화물로 부쳤느냐고 후회했다”(12면)라고 적고 있다. 이렇듯 나무 한그루를 돌보는 것을 마치 어버이가 자식을 돌보듯이 하는 선생은 “생명을 가진 모든 것 중에서 나무는 특별한 존재 같아 엄숙한 느낌이 든답니다”(38면)라고 나무를 예찬한다.
그런 선생이 이땅에 누가 주인이고 누가 나그넬까 하고 우리에게 묻는다. 그리고 아마도 주인행세를 하려고 기를 쓰는 쪽이 나그네 같고 아무 말 없는 편이 주인 같다고 생각한다.
“큰 저수지엘 갔습니다. 어마어마한 물이 꽉차 있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사람은 그 만만분의 일만 모여도 야단법석을 떨 텐데 물은 정말 대단하구나 싶었어요. 앞산에 빽빽이 들어선 수많은 나무는 찍소리도 없이 한평생 보내는 걸 봅니다. 조용한 몸가짐으로 말을 넘어선 말을 하는구나 싶어요.”(86면)
그래서 선생은 인권(人權)에만 매달린 사람은 가짜 같다고 생각하며 목권(木權), 옥권(屋權), 산권(山權), 강권(江權) 등 천지만물에 두루 존엄함이 깃들여 있음을 알고 대접하는 사람이 참사람 아닐까(106면) 하는 생각을 털어놓기도 한다.
전우익 선생은 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제비를 걱정하며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제비의 안부를 묻는다. 그러나 어디 사라진 것이 제비뿐이겠는가. 이런 추세라면 이번 세기 안에 지구상의 동식물 삼분의 이 이상이 멸종될 것이라는 세계식물학총회의 경고와 잇따른 개발로 지구상의 원시림이 급속히 줄어들고 있으며 10여년 안에 전체 원시림의 40%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는 세계자원연구소의 발표에서 보듯이 인간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어김없이 자연은 파괴되고 사라진다. 이 자연 앞에서 선생은 ‘사람이 뭔데, 인간이 뭔데, 내가 뭔데’라고 되뇐다.
“우리 인간의 고향도 숲이지요. (…) 숲을 망치는 건 고향을 망치는 거죠. 숲이 시들어가고 사라지면 인간은 고향을 잃어버립니다. 고향을 잃어버린 생물이 아무 탈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요.”(41면) 선생의 이러한 생각은 ‘대지란 모든 살아 있는 생물들의 발꿈치를 받쳐주는 생명의 디딤판’이라고 여겼던 소로우(H.D. Thoreau)가 월든 호숫가의 콩코드 숲에서 생활하며 “건강은 사회가 아닌 자연에서만 찾을 수 있다. 정신과 영혼에 건강을 불어넣으려면 들판과 숲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몸의 건강을 위해 좋은 음식을 찾는 것처럼”이라고 고백했던 것과 닿아 있다. 스콧 니어링(Scott Nearing)이 땅을 토대로 한 간소하고 올바른 살림살이를 통해 스스로 생계의 필요를 마련하는 자립적 삶의 기쁨과 보람을 실현하면서 ‘날마다 발 아래 흙과 만나는 기쁨’을 노래했던 것처럼 선생 또한 이 광란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결국 “흙 밟고 흙 만지며 사는 게 기본이 아닐까”(92면) 싶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낫다, 편리하다는 게 얼마나 무섭고 반생명적인지”(114〜15면)라는 선생의 지적처럼 이제는 정말 물질적 풍요와 편리를 향한 미친 듯한 달리기를 멈추고 자신과 우리 둘레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멈춰 서서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과연 어떻게 살고 있는가, 우리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과연 제대로 사는 삶이며, 정말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나무를 벗하며 참사람을 그리워하는 늙은 농부가 지금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절박한 이야기는 이것인 듯싶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유례가 없는 것이며 시간은 우리편이 아니다.”(H.N. 호지 『오래된 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