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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보편을 찾는 오랑캐
이상수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 길 2001
조경란 趙京蘭
성공회대학교 연구교수 jokl@mail.skhu.ac.kr
기자 이상수(李相洙)의 책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은 저자가 밝히고 있는 바, 새로운 보편의 논리를 찾고자 ‘보편주의’를 가장한 권위와 편견에 도전한 다소 ‘도발적인’ 철학이야기이다. 동서고금을 횡단하면서 자기논리를 교직해나가는 출중한 능력도 능력이지만 내가 보기에 이 책의 미덕은 이른바 동양철학의 내용을 주재료로 삼으면서 보기 드물게 전통회귀 또는 전통부정으로 빠지지 않고 균형잡힌 시각을 보여준 점에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진짜 미덕은 오히려 전통시대에서 지금까지 우리 사회 ‘주류’ 지식인들의 무의식에 내재해 있는 중심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서려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이 읽는이로 하여금 철학 에쎄이답지 않게 현실과의 긴장을 온몸으로 느끼게 만드는 것 같다.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은 우선 역사에 등장했던 어떠한 ‘보편주의’도 어느정도는 지역주의적 신념체계에 불과했음을 지적한다. 역사에서 ‘보편주의’의 횡포는 다양하게 나타났다. 우리는 지금도 가공할 미국 ‘보편주의’의 작태를 몸소 체험하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보편주의’는 타인이나 바깥세계를 자신의 의도대로 바꾸려 하고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생각을 용인하지 않는 데서 출발하며 중심주의---구체적으로는 인간중심주의, 남근중심주의, 자민족중심주의, 이성중심주의---의 또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어찌 보면 약소국인 우리나라는 전근대시기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강대국의 중심주의 횡포에 시달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근대시기에는 중화주의가, 이후에는 서구주의가 우리의 ‘보편’이었다. 전자가 위선적이나마 후자에 비해 체면을 중시하기 때문에 노골적으로 폭력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면, 이 두 ‘보편주의’는 타자를 자신과 대등한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우리나라의 ‘주류’ 지식인들은 전통적으로 ‘보편주의’의 횡포에 당당히 맞서기보다는 ‘중심’에 대해 경쟁적으로 노예적 사대(事大)를 해왔고, 급기야는 ‘중심’에 대한 동일화작업이 이들의 최대 관심사가 되었음은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일이다. 이 점에서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은 동쪽 오랑캐일 뿐인 조선 선비들의 중화주의의 내면화라는 자기최면을 정신병리학 연구의 사례로까지 꼽는다. 소중화(小中華)로 구차한 동일화를 시도하기보다는 오랑캐로 태어난 자체를 인정하고 그 자체를 즐기자는 것이다. 이는 사실 오랑캐의 논리로 살아갈 수 있는 뚝심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주변에 머물 것을 주장할 수 있는 자기정체성의 확인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며, 이럴 때 중심과 주변의 평등을 구상하는 힘있는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 이것이 전제될 때 이 책이 주장하는 바대로 중원의 사유를 오랑캐의 사유로 괴롭히고 그 속에서 보편의 사유를 읽어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를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유학자들에게 애초부터 공맹학과 주자학은 일차적으로 남의 것이 아니라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물론 이 말이 공맹학과 주자학이 이미 우리의 전통사상의 중요한 구성부분이 되어 있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공맹과 주자를 신봉하는 신도는 많았어도 그들의 존재성을 알려고 하는 분석가는 드물었다. 그 결과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이 예로 든 다산 정약용과 혜강 최한기 정도(발굴하면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예상하지만)를 제외하면 우리나라의 유학자들 대부분은 공맹학과 주자학을 흡수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자신의 주체 확립을 고민했다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공맹학과 주자학 교리의 정통성을 고스란히 지켜나갈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었다. 즉 그들은 ‘공맹의 조선’ ‘주자의 조선’이 되어야 한다는 데만 몰두했지 조선의 공맹이나 조선의 주자가 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고민이 없었다. 이는 비단 전근대시기의 ‘보편주의’인 중화주의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의 ‘보편주의’인 서구주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여기서 사상과 문화의 이질성을 자각하고 그것을 완벽하게 인식하려는 욕구가 강해질 때 오히려 독창적인 사상이 나온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중원의 사유를 오랑캐의 사유로 읽어야 한다는 저자의 ‘획기적’ 주장은 조선 오랑캐의 자기정체성에 대한 확인을 요구한 것이며 이런 면에서 이 주장이 새로운 보편의 모색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저자는 새로운 보편의 모색이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충고 또한 잊지 않으면서 과감하게 자기의 믿음과 신념을 의심하고 회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서양에서는 인간의 지고의 목표가 참된 인식에의 도달이었고 동양에서는 도덕적인 인간에의 도달이었기에, 보편을 찾는 방법에서 각각 인식론과 수양론이 발달했고, 각각 논쟁(論爭)과 덕쟁(德爭)을 통해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고 설명한다.
이 책이 주 내용으로 삼고 있는 공자의 정명론, 노자의 무명론, 묵자의 논리학, 손자의 군사사상은 기본적으로는 그 시대성과 지역성의 한계를 보여주는 논리임에는 틀림없으나 이 모두가 지금 우리가 잊고 있는 덕쟁의 방식을 통해 보편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려 했던 경우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는 남과 싸우는 대신 자신과 싸우라는 공자의 자송(自訟)의 논리가 밑받침이 되고 있으며 자송의 논리는 곧 논쟁을 덕쟁으로 전환시키는 논리이기도 하다. 이 덕쟁의 방식은 심지어 마오 쩌뚱이 치른 전쟁에서도 엿볼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현재는 이 동양의 덕쟁 전통이 서양 논쟁의 힘에 밀려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따라서 문제는 덕쟁 원리를 현대적으로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이다. 사실 힘이 덕을 갖추지 못한다면 그것은 폭력으로 떨어진다는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의 말을 상기해보더라도 현재적 싯점에서 덕쟁의 원리를 되살린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저자가 지적하듯이 덕쟁은 객관화가 힘들다는 한계 또한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인 자송이 기능을 멈출 때 덕쟁 또한 현실에서 독단으로 빠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현실적으로 덕쟁의 전통을 지닌 한국과 중국사회에서 오히려 공공관념의 부재, 타인을 대등한 상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현상이 많은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덕쟁의 원리가 극단적인 독단으로 빠지게 된 실례를 문화대혁명에서 목도한 바 있다. 거기서는 덕쟁의 원리가 극단화되고 유토피아성과 연결되어 최소한의 현실적인 논쟁조차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덕쟁의 원리는 우리가 이상으로 삼아야 할 소중한 문화전통임에 틀림없고 그런 면에서 그것의 현대적 재구성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구상인 덕쟁[仁治]과 논쟁[法治]의 원리적 상호보완이 아니라 논쟁 씨스템의 확립 위에서 덕쟁의 보완이라는 전략적 구상이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이런 점에서 당장 2002년 말에는 덕쟁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제대로 된 논쟁이라도 이루어질 수 있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 진정한 보편이 있는 사회의 기틀을 마련하리라는 기대를 해도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