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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미국과 세계: 메타포로서의 쌍둥이빌딩[1. 2001년 12월 5일 브루클린대학에서 행한 Charles R. Lawrence II Memorial Lecture의 강연원고.]

 

 

이매뉴얼 월러스틴 Immanuel Wallerstein

1930년생. 현재 예일대학 사회학 교수 겸 페르낭 브로델 쎈터 소장. 속간중인 『근대 세계체제』(1~3권 간행)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 『유토피스틱스』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 등 수많은 저서와 논문이 있음. 본지 109호(2000 가을)에 「인종차별주의, 근대의 쌍생아–––오스트리아 새 정부의 출범을 지켜보며」를 발표. 이 글의 원문은 Social Science Research Council의 홈페이지(http://www.ssrc.org/sept11/essays/wallerstein.htm)에 실렸으며 원제는 “America and the World: The Twin Towers as Metaphor”임. 말미에 덧붙인 이메일 인터뷰는 월러스틴의 논문을 보완하고 최근 그의 견해를 들어보기 위해 기획된 것임.

ⓒ I. Wallerstein 2001 / 한국어판 ⓒ 창작과비평사 2002

 

 

1. 아름다운 미국

 

아 아름다운 애국자의 꿈, 여러해가 지나도 그대 희고 보드라운 도시들이 빛남을 보네, 인간의 눈물로 흐려지지 않은 채! 미국이여! 미국이여! 신께서 그대에게 은총을 내려 그대의 선함 위에 형제애의 왕관을 씌우시길, 이 바다에서 저 빛나는 바다에까지!

---「아름다운 미국」(America the Beautiful, 애창되는 미국 찬가––옮긴이)

 

1990년 10월 24일 나는 버몬트대학 200주년 기념 저명인사 강연 씨리즈의 첫번째 강연을 해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나는 그 강연의 제목을 “미국과 세계: 오늘, 어제, 그리고 내일”[2. Theory and Society, 21권 1호(1992년 2월), 1~28면에 발표.]이라고 붙였다. 그 강연에서 나는 미국에 대한 신의 축복을---현재에는 번영을, 과거에는 자유를, 미래에는 평등을---논했다. 왠지 몰라도 신은 이런 축복을 모든 곳의 어느 누구한테나 나누어주지 않았다. 나는 미국인들이 신의 은총의 이런 불평등한 분배를 매우 의식하고 있음에 주목했다. 나는 미국이 자신을 규정하고 자신의 축복을 측량하는 데 항상 세계를 척도로 삼아왔다고 말했다. 우리가 더 낫다느니, 우리가 더 나았다느니, 우리가 더 나을 것이라느니 하는 식으로 말이다. 어쩌면 보편적인 축복이란 진정한 축복으로 간주되지 않는 것인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신에게 오로지 소수만을 구원해달라고 강요하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대다수를 흔들어놓은 사건, 즉 일단의 개인들이 2001년 9월 11일 쌍둥이빌딩을 파괴한 사건의 그늘 아래 살고 있다. 그 개인들은 자신의 이데올로기와 미국에 대한 도덕적 분노에 너무나 헌신적이라서 미국과 미국의 지지자들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지정학적 타격을 가하기 위해 여러해 동안 방법을 모색해왔으며, 자신의 목숨을 희생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이 일을 수행했다. 대다수 미국인은 이 사건에 깊은 분노와 애국적인 결의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상당한 당혹감도 계속 갖고 있었다. 당혹감은 두 가지였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는 것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느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당혹감은 엄청난 불확실성으로 장식되었으니, 그런 사건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아니 일어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대두된 것이다.

11년 전에 내가 한 말을 돌이켜보면, 그때 한 말 가운데 어느 것도 바꾸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강연할 때의 자세에 대해서는 약간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마치 다른 어떤 곳에서, 이를테면 화성에서 온 민속학자인 양, 이 ‘미국인’이라는 흥미로운 종족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글을 썼던 것이다. 오늘 나는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분명 한 인간이며, 인류의 운명을 걱정한다. 그러나 나는 또한 미국의 한 시민이다. 나는 여기서 태어났고 여기서 내 삶의 대부분을 살았다. 그러니 나는 나와 입장을 같이하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여기서 일어난 일과 여기서 일어날 일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나는 미국을 내부에서부터 봐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

그래서 나는 미국과 세계를 다시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미국인들이 세계라는 프리즘을 통해 자신을 보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미국인들이 세계를 어떻게 보아왔는지, 미국인들이 이곳 내부에서부터 세계를 어떻게 보기를 원하는지 살펴보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점에서 상당히 논쟁적인 입지에 서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적어도 20세기 미국 대통령 가운데 어느 싯점에서든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라고 선언하지 않은 사람은 드물었다. 도처에 널려 있는 미국의 여론조사기관들이 우리의 공중에게 이 질문을 직접 한 적이 있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런 선언에 동의할 미국인들이 매우 많다고 믿는다. 나는 여러분에게 그런 선언이 우리와 매우 다른 문화를 가진 가난한 나라 출신의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우리의 가까운 우방과 동맹국---캐나다인, 영국인, 그리고 물론 프랑스인---에게 어떻게 들리는지 숙고하기를 요청한다. 토니 블레어(Tony Blair)가 미국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로, 대영제국보다 더 위대한 나라로 생각할까? 그가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는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그런 생각을 할까? 미국인들과 미국 이주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누가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을까?

국가주의가 물론 미국 사람들한테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거의 모든 나라의 시민들이 애국적이며 종종 국수주의적이기도 하다. 미국인들이 이를 의식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은 세계 곳곳의 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주하기를 희망하고 있고 다른 어떤 이민의 장소도 미국만큼 인기가 높은 것 같지 않다는 사실을 눈여겨보는 경향이 있으며, 이런 사실을 하나의 국가로서 미국의 우월한 미덕에 대한 그들 자신의 믿음이 옳다는 증거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우월한 미덕이 어디에 있다고 여기는 걸까? 나는 우리가 가진 많은 것들을 타자들이 갖고 있으며, 우리가 더 많이 갖고 있다는 사실이 은총의 표시라고 믿는 경향이 미국인들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 덜함의 개념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많은 경쟁의 장들을 좀더 상세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대다수 미국인들이 아주 확신하는 듯한 바로 그 경쟁의 장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미국인들은 다른 나라들이 덜 근대적이라고 믿는데, 이때의 근대는 과학기술의 발전 수준을 의미한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과학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과학기술은 이 나라 곳곳의 가정에서 볼 수 있는 기계·전자 장치, 통신·교통의 네트워크, 이 나라의 기간시설, 우주탐사 기구들, 그리고 물론 우리 군대가 사용하는 군사적 하드웨어 등에 들어 있다. 과학기술이 이렇게 축적된 결과, 미국인들은 미국에서의 삶이 좀더 편안하고, 미국제품이 세계시장에서 좀더 성공적인 경쟁력을 지니며, 따라서 타자들이 우리를 끌어들인 전쟁에서 우리가 분명히 승리할 수 있다고 여긴다.

미국인들은 또한 자신의 사회가 좀더 효율적이라고 여긴다. 직장, 공공영역, 사회적 관계, 관료와의 대면에서 일이 좀더 원활하게 운영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적 관행들 가운데 어떤 것에 대한 우리의 불만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다른 곳을 돌아다녀보면 타자들은 일을 그렇게 잘 운영하지 못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되는 듯하다. 타자들은 미국인의 적극성을 갖고 있지 않은 듯하다. 그들은 크고작은 문제들의 해결책을 발견하는 데서 덜 창의적이다. 미국은 앞으로 나아가는 데 반해 그들은 전통적이거나 공식적인 방식의 수렁에 빠져 정체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이들---나이지리아인, 일본인, 이딸리아인---에게 어떻게 하면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지 우정어린 충고를 베풀 준비가 되어 있다. 타자들이 미국적 방식을 열심히 모방하는 것은 미국인들이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평가할 때 큰 가산점이 된다. 대니얼 분(Daniel Boone, 1734~1820, 미국 초창기의 전설적인 서부개척자--옮긴이)에다 평화봉사단(Peace Corps)을 더한 것이 타국의 정치경제를 비교, 평가하는 바탕이 된다.

그러나 대다수 미국인들이 타자들의 덜함을 단지 물질적인 것만이라고 생각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 덜함은 정신적이기도 한 것이다. 혹시 정신적이라는 용어가 세속적인 인본주의자들을 배제하는 것 같다면, 그것이 문화적이기도 하다라고 표현해도 좋다. 우리 대통령들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듯, 우리의 애국적 노래들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듯, 미국은 자유의 땅인 것이다. 타자들은 우리보다 덜 자유롭다. 자유의 여신상은 “자유를 숨쉬고자 열망하는 온갖 잡다한 대중들”에게 손을 뻗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밀도있는 자유는 수많은 방식으로 가시화된다. 다른 어떤 나라가 권리장전을 가지고 있는가? 다른 어느 곳에서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연설의 자유가 그토록 존중되는가? 다른 어느 곳에서 이민들이 정치체제 속에 그토록 통합되어 있는가? 이곳에 십대에 와서 오늘날까지 강렬한 독일식 액센트의 영어를 하는 사람이 전세계에 대해 미국인들의 제1대표자라 할 국무장관이 될 수 있는 나라가 미국말고 또 있는가?(전임 국무장관 올브라이트Madeleine Albright를 가리킴--옮긴이) 실력이 있는 사람에게 사회적 이동성이 그토록 높은 나라가 또 있는가? 그리고 민주주의의 실현 정도에서 어떤 나라가 우리와 경쟁할 수 있을까? 양당제의 핵심이라는 정치구조의 지속적인 개방성뿐 아니라 일상적인 관습에서도 우리만큼 민주주의적일 수 있을까? 미국은 일상적 삶의 관행에서 특권을 지닌 사람이 우선권을 갖는 체제와 반대되는 ‘선착순’의 원리를 유지하는 데 빼어난 나라가 아니던가? 그리고 공공영역에서나 사회생활에서 이런 민주적인 습속이 400년 전까지는 아니라 해도 적어도 200년 전까지 거슬러올라가는 나라가 아닌가?

도가니(melting pot)에서 다문화성(multiculturality)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실제 미국인의 삶에서---식당에서, 대학에서, 정치적 지도층에서---의 놀라운 종족적 혼합을 자랑스러워해왔다. 그렇다, 우리에게도 결함은 있었지만, 그런 결함을 극복하려고 애쓰는 데 우리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 많은 노력을 했다. 지난 몇십년 동안 성과 인종의 장애들을 허물어뜨리고, 완벽한 실력주의 사회를 끊임없이 새로 모색하는 데, 우리가 선두에서 이끌지 않았던가? 심지어 우리의 항의운동조차 우리에게는 자부심의 원천이 되고 있지 않는가? 다른 어디에서 항의운동이 이렇게 지속적이고 다양하고 정당하단 말인가?

그리고 1945년까지는 우리가 세계의 전위가 아니라고 시인하던 단 하나의 각축장, 즉 고급문화의 각축장에서도 이제 사정이 완전히 달라지지 않았는가? 뉴욕이 오늘날 미술·연극·음악·무용·오페라의 세계적인 중심지가 아닌가? 우리의 영화가 너무도 뛰어나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 관객들이 우리 영화를 더 많이 보지 못하도록 보호주의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이다.

이 모든 것을 우리는 미국인들이 적어도 9·11 이전에는 별로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마음속에서는 중하게 생각하는 하나의 구절로 표현할 수 있다. 우리는 세계의 나머지보다 더욱 문명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나머지 지역을 예전에는 경멸의 표시로 구세계(the Old World)라고 말하곤 했다. 우리는 그냥 미국인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가장 높은 열망을 대변한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이고, 타자들은 우리가 지도력을 보여주기를, 자유의 기치와 문명의 기치를 높이 쳐들기를 기대하며 우리를 쳐다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세계의 지도자이다.

나는 이 가운데 어느 것에 대해서도 아이러니컬하게 말하지 않았다. 나의 제시에 당혹해하면서 자기들은 그런 합의에 동조한 것이 아니며 자기들의 관점은 그것보다는 한결 코스모폴리탄적이라고 주장할 사람들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나는 나머지 세계의 덜함이라는 이미지가 미국인의 정신 속에 깊숙이 새겨져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리고 쌍둥이빌딩이 완벽한 메타포가 되는 것은 무엇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그것은 무제한적인 열망의 신호였고, 과학기술적 성취의 신호였으며, 세상의 횃불을 나타냈다.

 

 

2. 미국에 대한 공격

 

미국이 오늘날 맛보는 것은 우리가 수십년 동안 맛보아온 것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이다. 우리 민족은 80년 이상이나 이런 수모와 경멸을 맛보아왔다. (…) 그러나 80년이 지난 후, 정작 미국에 칼이 떨어진 경우에는 위선이 그 추악한 고개를 치켜들고, 이슬람교도의 피와 명예와 성지를 함부로 더럽힌 이런 살인자들의 죽음을 애도한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 최소한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타락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오사마 빈 라덴 2001년 10월 7일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Raden)은 미국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미국인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대다수 미국인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했다고 생각하는 미국인들도 일부 존재한다. 우리는 미국의 문화적 우파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미국의 문화적 우파의 비판과 오사마 빈 라덴의 비판이 일상적인 습속과 관련해서는 어느정도 겹치긴 하지만, 빈 라덴의 근본적 비난은 그가 세계의 각축장에서의 미국의 위선이라 일컬은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세계의 각축장에서 미국에 관해 논할 때 이런 특징 묘사에 동의할 미국인들은 거의 없을 것이며, 빈 라덴과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할 법한 사람들조차, 빈 라덴이 보기엔 부적절하고 용납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런 견해와 미묘한 차이를 두려 할 것이다.

이것이 미국인들에게는 9·11의 두 가지 큰 충격 가운데 하나였다. 세계의 각축장에서 미국의 행동과 동기에 어떤 선의도 부여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점 말이다. 가치있는 모든 것을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그들 자신의 실력으로 얻었다는 사실을, 모든 것을 덜 가진 사람들이 의심하는 게 어떻게 가능할 수 있단 말인가? 빈 라덴의 도덕적 뻔뻔스러움에 미국인들은 경악했으며 그 뻔뻔스러움에 쓰라림을 느꼈다.

빈 라덴이 이런 종류의 언어공격을 가한 최초의 인물은 분명 아니지만, 그는 그런 언어공격을 미국땅에 대한 물리적 공격으로 옮긴 최초의 인물이었고, 그 공격에 미국은 기습을 당해 적어도 한동안은 무력한 상태였다. 이런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미국은 세계에 너무나 만연해 있는 언어공격들을 바보들의 헛소리라고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보들은 이제 악당이 되었다. 게다가, 악당들은 사태의 초기에는 성공적이었는데, 이것이 두번째 크나큰 충격이었다. 우리가 그런 비판들을 무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상처받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는데, 이제 우리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9·11 이후에 세계는 결코 다시는 예전과 같을 수 없다는 말이 종종 나왔다. 나는 이 말이 어리석은 과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국인의 정신이 결코 다시는 예전 같을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일단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면 그것은 생각할 수 있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산발적인 일단의 개인들이 미국 본토를 직접 공격하는 일은 과거에는 늘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본토안보국(Office of Homeland Security)이라는 것을 창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펜타곤이 미국 자체를 관할하는 소위 지역사령부---지역사령부란 이제까지는 미국 바깥의 지역들에 한정되어 미국 이외의 나머지 전세계를 관할하는 군사구조인데---를 창설해야 되느냐 아니냐를 논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제 우리의 상용어 속에 ‘테러리스트’라는 것을 갖게 되었다. 1950년대에 ‘공산주의자’라는 말은 광범위한 용법을 가지고 있었다. 이 말은 공산주의 정당들의 당원뿐 아니라, 자의로나 타의로나 공산당의 ‘동조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심지어 수소폭탄 개발에 충분한 ‘열의’가 결여된 사람들까지 지칭했다. 이런 열의 부족이 사실은 미국 원자력에너지위원회가 1953년에,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알려지고 그때까지 명예를 누려온 오펜하이머(J. Robert Oppenheimer)의 신원보증을 중지하게 된 구체적인 고발내용이었다.

지금 ‘테러리스트’라는 용어는 그와 똑같은 광범위한 의미를 획득했다. 2001년 11월 나는 ‘법과 질서’(Law and Order)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았다. 그날 에피소드는 건설중인 한 건물의 방화사건을 중심으로 짜여 있었다. 이 에피소드의 배경은 한 건설도급자가 시로부터 땅을 불하받은 일이었다. 이전에 그 땅은 동네의 정원이었으며, 지역공동체가 이를 돌보아왔다. 지역공동체 내에서는 건설공사에 대한 반대여론이 일었다. ‘환경운동가’로 밝혀진 일군의 젊은이들이 항의의 뜻으로 그 건물을 불태우기로 결정했다. 이야기가 복잡하게 된 것은 누군가가 그들 모르게 우연히 그 건물 속에 있었고 화재로 인해 죽었다는 것이다. 결국 방화범들은 붙잡혀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진부한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프로그램 방영 내내 방화범들이 거듭 ‘테러리스트’로 언급된다는 것이다. 테러리스트를 어떻게 정의하더라도 이 사건에서 그 말을 사용하는 것은 억지이다. 하지만 전혀 문제될 게 없다! 이미 그렇게 쓰였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쓰일 것이니까.

미국은 자유의 땅이지만, 오늘날 너무도 많은 자유를---특히 비(非)시민들에게---부여하였으며 ‘테러리스트들’이 이 자유를 이용했다는 소리가 정부와 언론 그리고 일반 주민에게서 나오고 있다. 따라서 안보의 요건을 충족시키는 절차에 자유의 특권은 양보해야 한다고들 한다. 예컨대 ‘테러리스트들’을 붙잡아 재판에 회부할 경우 테러리스트들이 공개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유죄판결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 설령 유죄판결을 받는다 해도 사형선고를 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리는 명백히 우려한다. 그래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확실히 하기 위해서 우리는 대통령이 소집하는 군사법정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이 법정은 그 규칙을 대통령 혼자서 수립하고, 어떤 사람에게도 항소권이 허용되지 않으며, 완전히 비밀로 운영될 수 있어 속히 판결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사형판결일 터이며, 그 집행 역시 십중팔구 비밀로 이뤄질 듯하다. 이런 재판이 종결될 즈음에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런 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의 이름뿐일 것이다. 어쩌면 그것조차 알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 자유의 땅에서 이런 일이 폭넓은 박수갈채를 받고 있으며, 이에 대해 소수의 용감한 사람들만이 미온적인 반대를 하고 있다.

우리는 미국에 대한 공격을 미국의 가치와 문명 자체에 대한 공격으로 생각한다고 공언했다. 우리는 그 공격을 후안무치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테러리즘에 대한---테러리스트들 그리고 그들을 비호하고 지원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세계적인 전쟁에서 승리하겠다는 단호한 결심을 한다. 우리는 이런 공격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이며 또 그런 나라로 남아 있음을 보여주겠다고 결심한다. 이런 점을 입증하기 위하여, 대통령이 우리에게 간청하는 것은 개인적인 희생을 해달라는 것도, 심지어 좀더 많은 세금을 내는 작은 희생을 해달라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생활을 정상적으로 영위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정부와 군대가 무슨 일을 하든, 심지어 그 일이 정상적이지 않다고 해도, 우리는 아무 유보 없이 박수갈채를 보낼 것으로 기대된다.

‘유보 없음’이라는 이 요구가 어느 정도인지는 9·11사태의 원인을 ‘설명’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광범위한 비난에서 알 수 있다. 그 설명이 테러의 정당화이자 사실상의 찬동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린 체니(Lynne Cheney)와 상원의원 리버먼(Joseph Lieberman)이 창립한 전미 대학 이사 및 동창 평의회(ACTA)는 “문명의 수호: 우리의 대학들이 미국을 어떻게 저버리고 있으며 그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가”[3. 집필자는 제리 마틴(Jerry L. Martin)과 앤 닐(Anne Neal)이다. ]라는 제목의 팜플렛을 2001년 11월에 출간했다. 이는 놀랄 만큼 간결하게 논점을 밝힌 짤막한 글이다. 여기에 “대학교수들이야말로 이번 공격에 대한 미국의 반응에 있어서 약한 고리이다”라고 씌어 있다. 연이어 이런 분석이 나온다.

 

교수들은 공개적으로 영웅들을 언급한 적이 거의 없으며, 선과 악의 차이라든지 서구 정치질서의 성격이나 자유사회의 미덕에 대해서도 논한 적이 거의 없다. 그들의 공개적인 메씨지들에서 애국심은 짧고 자기질타는 길었다. 실로 대학교수 상당수의 메씨지는 ‘미국을 먼저 탓하라!’는 것이었다.

 

이 팜플렛은 117개 인용으로 이뤄진 부록에 지면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으니, 집필자들은 이 인용이 그들의 논지를 잘 보여준다고 느끼는 모양이다. 이 인용에는 노엄 촘스키(Noam Chomsky)나 제씨 잭슨(Jesse Jackson)과 같은 인물들뿐 아니라 평상시에는 이런 비난을 덜 받는 사람들---프린스턴대학의 우드로우 윌슨 대학원 학장과 전임 국무차관---의 진술도 포함되어 있다. 간단히 말해서, 팜플렛의 저자들이 겨냥하고 있는 대상이 광범위하다는 것이다.

이 싯점에서 설령 9·11사태가 현 세계의 근본적인 지정학적 현실들을 바꾸지는 않는다 해도, 미국의 정치구조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얼마만큼의 영향을 끼칠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러나 내가 앞서 언급한 미국인들의 당혹스러움---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리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은 하나의 수수께끼처럼 보이는데, 현재는 우리가 이 수수께끼에 자유롭게 반응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다.

쌍둥이빌딩은 또 미국에 대한 공격을 나타내는 메타포이다. 이 빌딩은 대단한 공학적 기술로 지어졌고, 온갖 종류의 우발적·고의적 파괴행위에도 견딜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고의적으로 그 빌딩을 향해 돌진한, 제트 연료를 가득 채운 비행기 두 대가 파괴의 효과를 최대화할 수 있도록 꼭대기로부터 20% 아래의 지점을 정확히 들이받으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명백하다. 또한 그 빌딩이 서서히, 불가항력으로,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내려앉고 그 여파로 다른 건물들을 무너뜨릴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 붕괴로 촉발된 화재가 그후 몇달 동안 계속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미국이 그 공격에 대한 보복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공격을 돌이킬 수는 없다. 과학기술은 결국 방어막으로서는 완벽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된 것이다.

 

 

 

3. 미국과 세계권력

 

[19세기 영국에서] 발전된 형태의 반(反)카톨릭주의는 통상 변증법적인 기능을 하였다. 그것은 영국의 자유, 최상의 해군력, 농업적·상업적 번영 및 그로 말미암은 우월한 양식의 제국이라는 가정을 좀더 부각하기 위하여 카톨릭 정권들의 독재, 미신, 군사적 억압 및 물질적 궁핍이라는 가정에로 주의를 돌린 것이다.

---린다 콜리[4. Linda Colley, “Multiple Kingdoms,” London Review of Books (2001년 7월 19일) 23면. ]

 

린다 콜리의 인용구로 이 절을 시작하는 것은 미국이 근대 세계체제의 역사에서 최초가 아니라 세번째의 헤게모니 국가이며 그 헤게모니는 취약성뿐 아니라 문화적 규칙도 지니고 있음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이다. 그 문화적 규칙들 가운데 하나는, 세계권력의 효과적인 행사를 가능케 하는 내적인 자기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타자들을 멸시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이다.

성공만큼 눈을 멀게 하는 것은 없다. 그런데 미국은 지난 200년 동안 상당한 몫의 성공을 누렸다. 성공의 고약한 결과는 성공이 반드시 계속되리라는 확신을 거의 불가피하게 낳는 데 있는 것 같다. 성공은 현명한 정책을 낳는 데는 좋은 길잡이가 못되는 것이다. 실패는 최소한 성찰로 자주 나아가는 반면 성공은 그런 예가 거의 없다.

50년 전, 세계체제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는 (모든 경쟁국들을 훨씬 능가하는) 생산성 효율, 유럽과 아시아의 동맹국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은 세계적인 정치의제들, 그리고 군사적 우월성의 결합에 기초하고 있었다. 오늘날 미국기업들의 생산성 효율은 매우 광범위한 경쟁, 무엇보다도 가장 긴밀한 동맹국 기업들과의 경쟁에 직면해 있다. 그 결과, 미국의 세계적인 정치의제는 더이상 동맹국들의 열렬한 지지를 그다지 받지 못하며, 심지어 종종 반론에 봉착하기도 하는데, 특히 소련의 해체로 말미암아 더욱 그런 실정이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군사적 우월성뿐이다.

지난 50년간 미국 행정부들이 지속적으로 추구한 미국의 외교정책 목표들은 검토해볼 만하다. 분명히, 미국은 호전적이거나 적어도 미국의 이해에 적대적인 정부들이 가하는 위협들에 관해 우려해왔다. 이 점이 잘못되었거나 예외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근대 세계체제에서 어떤 국가, 특히 강대국의 외교정책에서 이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미국이 이런 위협들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점이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미국은 매우 강해서 그다지 큰 어려움 없이, 그리고 최소한의 군사력으로 다른 나라의 정부들을 뜻대로 조절할 수 있는 듯했다. 미국이 싫어하는 정부들은 중립화되거나(우리는 그것을 봉쇄라고 불렀다), 약한 정부의 경우 미국의 은밀한 지원을 받는 내부 군사력에 의해 전복될 수 있었는데, 간혹 약간의 구식 함포외교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중립화는 공산주의 세계에 대하여 사용한 전술이었다. 미국은 동부·중앙 유럽에서 소련이나 소련의 위성국을 무너뜨리려 하지 않았다. 미국이 이런 전복을 꾀하지 않은 것은 기본적으로 소련정부의 예상되는 저항을 무릅쓰고 이를 수행할 만큼의 군사적 지위를 가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소련이 자기네 영토를 확장하려고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한다면 미국정부는 이런 전복을 시도조차 하지 않겠다는, 소련과의 암묵적인 합의에 들어갔다. 우리는 이런 내용의 규약을 얄따협정이라고 칭한다. 이런 협정이 사실인지 의심스러우면, 1953년의 독일민주공화국, 1956년의 헝가리, 1968년의 체코슬로바키아, 1981년의 폴란드 등에 대한 미국의 외교정책을 살펴보라.

그러나 이런 합의는 동아시아에 적용하려고 의도된 것은 아니었다. 동아시아에는 무엇보다 중국과 북한의 공산주의 정권들의 고집 덕분에 소련의 군대가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베트남 정권은 물론 이들 정권을 실제로 무너뜨리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는데, 이는 미국의 여론에 심각한 상흔을 남겼다.

그러나 미국은 나머지 세계에 자신의 의지를 강요할 수 있었고, 실제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런 강요를 했다. 1953년의 이란, 1954년의 과떼말라, 1956년의 레바논, 1965년의 도미니까공화국, 1973년의 칠레를 생각해보라. 자유선거로 선출된 쌀바도르 아옌데 정부를 삐노체뜨 장군이 미국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무너뜨린 칠레의 쿠데타는 9월 11일 일어났다. 나는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추종자들이 이런 날짜상의 일치를 알고 있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다수의 사람들, 특히 라틴아메리카의 사람들이라면 눈여겨볼 상징적인 일치이다. 이는 또한 쌍둥이빌딩의 또하나의 메타포를 가리킨다. 쌍둥이빌딩은 경이로운 과학기술적 성취였다. 그러나 과학기술적 성취란 모방될 수 있고 앞으로 모방될 것이다.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이미 건축학적으로 쌍둥이빌딩을 모방하였으며, 이보다 더 큰 마천루가 현재 샹하이(上海)에서 지어지고 있는 중이다. 상징들 역시 모방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희생자들이 애도하는 9·11 기념일을 두 개 갖고 있는 것이다.

70년대 미국의 외교정책은 변했으며,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칠레는 미국이 다른 나라 정부를 자기 입맛에 맞게 대담하게 조정할 수 있었던 최후의 주요한 사례였다. (군사적 방어형태가 보잘것없는 아주 작은 나라들인 그레나다나 파나마의 경우는 치지 않는다.) 이런 변화를 야기한 것은 세계경제에 대한 미국의 경제적 지배력의 상실이 베트남에서의 미군의 군사적 패배와 겹친 탓이었다. 지정학적 현실이 변해버린 것이다. 미국정부는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데에도 더이상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미국정부의 제1의 목표는---세계경제와 군사적 각축장 양자에서---자신의 권력이 너무 급격하게 침식당하는 것을 방지하는 일이었다.

세계경제에서 미국은 서유럽 및 일본의 경쟁자들이 토해내는 기염(氣焰)뿐 아니라 나머지 세계의 큰 부분들에서 ‘개발주의’ 정책들, 즉 주변부 나라들을 희생시켜 자본을 축적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중심부 나라들의 능력을 억제하기 위해 특별히 고안된 정책들의 그럴듯한 성공과도 맞닥뜨리게 되었다. 우리는 유엔에서 70년대를 ‘개발의 시대’로 선언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70년대에는 ‘새로운 국제경제질서’를 창출한다는 이야기들, 그리고 유네스코에서는 ‘새로운 국제정보질서’를 창출한다는 이야기들이 무성했다. 70년대는 미국 공중에게 공포의 물결을 안겨준, 그 유명한 두 차례의 OPEC 유가 상승의 시기였다.

이런 모든 공격들에 대해 미국은 불편해하면서 모호한 태도를 취하거나 아니면 정면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전지구적으로는, 반격을 개시했다. 이 반격에는 신자유주의의 공세적인 주장과 소위 워싱턴 합의, GATT의 세계무역기구(WTO)로의 변형, 다보스(Davos) 회의들, 그리고 지구화의 개념과 그 결과인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 TINA)란 논리의 확산 등이 포함된다. 근본적으로는, 이 모든 노력들이 결합되어 전세계에 걸쳐, 특히 세계경제의 주변부 지역들에서 ‘개발주의’ 정책들이 해체되는 양상을 보였다. 단기적으로, 즉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미국정부가 주도한 이런 반격은 성공하는 듯했다.

세계경제의 최전선에서 시행된 이런 정책들은 ‘핵확산 반대’ 정책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집요한 세계 군사정책과 짝을 이루었다. 미국은 1945년에 성공적으로 원자폭탄을 처음 만들었을 때, 그처럼 강력한 무기에 대한 독점을 유지하려고 결심하였다. 미국은 이 독점을 자신의 충실한 하위파트너인 영국과 나누어가질 용의는 있었지만, 거기서 끝내려 했다. 물론 주지하다시피 다른 ‘열강들’은 이런 주장을 간단히 무시했다. 처음에는 소련이, 다음에는 프랑스가, 그 다음에는 중국이 차례로 핵능력을 보유했다. 그 다음에는 인도, 그리고 나중에는 파키스탄이 핵능력을 보유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역시 핵능력을 갖게 되었는데, 남아공의 인종격리차별 정권은 권력에서 물러날 때 비로소 이 사실을 인정하였고, 권력을 그 후계자인 좀더 민주적인 아프리카 흑인 다수파 정부에게 이양하기 전에 핵능력을 해체하는 신중함을 보였다. 그리고 이스라엘 역시 핵능력을 보유했는데, 공개적으로는 항상 이를 부인하였다.

그 다음에는 핵능력에 근접한 국가들---실제로 이들 국가가 아직도 ‘근접함’의 범주에 있다면 말이지만---즉 북한, 이란, 이라크(이스라엘은 이라크를 ‘근접함’의 범주에 묶어두기 위하여 80년대에 이라크의 핵시설을 폭격한 바 있다), 리비아, 그리고 어쩌면 아르헨띠나 등이 있다. 게다가, 핵능력을 물려받은 예전 쏘비에뜨의 국가들---우끄라이나, 벨로루씨아, 까자흐스딴---이 있다. 여기에다 다른 치명적인 과학기술들, 이를테면 생화학전쟁 무기들이 추가되어야 한다. 이런 것들은 만들고 비축하고 사용하기가 훨씬 쉽기 때문에 이 분야에서 얼마나 많은 나라들이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갖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미국은 단순·명료한 정책을 취해왔다. 무력을 사용하든 매수를 하든 어떻게 해서라도 미국은 이런 무기들에 대한 모든 나라의 접근을 봉쇄하기 원한다. 이 정책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분명하지만, 지난 여러해에 걸친 그 노력이 적어도 핵확산의 속도를 늦추었다. 미국의 정책에는 또하나의 함정이 있다. 미국은 국제적인 협정들을 이용하여 확산을 제한하려 하는 한편, 그와 동시에 자국은 그런 억제책에 매이거나 최소한으로라도 구속되지 않으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미국정부는 다른 나라 정부가 그런 제재를 거부하려 하면 소리높여 비난하면서도 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언제라도 그것을 거부할 것임을 분명히 해두었다.

하나의 정책으로서 핵확산금지는 장기적으로뿐 아니라 심지어 중기적으로도 실패할 운명에 처한 듯하다. 향후 25년간 미국이 할 수 있는 것은 확산의 과정을 다소 늦추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역시 도덕적·정치적 문제가 있다. 미국은 자신 외에는 다른 어느 누구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정부는 북한이 핵확산금지 규약을 위반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북한의 특정 장소들을 사찰하기 원한다. 반면 미국정부는 미국의 특정 장소들의 사찰 권한을 유엔이나 다른 누구에게도 준 적이 없다. 미국은 그런 무기들을 현명하게, 자유수호(겉보기에는 미국의 국가이익과 일치하는 개념)에 사용할 것이라는 자기신뢰를 하는 것이다. 미국은 다른 누군가가 그런 무기를 자유(이 역시 겉보기에는 미국의 국가이익과 일치하는 개념)에 대항하여 사용할 의도를 지닐 수 있다고 가정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어떤 정부도 그런 무기들을 현명하게 사용할 것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그런 무기들이 모두 금지되는 꼴을 보면 좋겠지만, 작금의 열국체제에서 그런 조치가 정말 시행될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나는 이 문제를 놓고 도덕적인 논의를 하지 않는다. 도덕적인 논의를 하면 위선이라는 비난을 받을 소지가 있다. 그리고 냉소적인 신현실주의자(십중팔구 나도 포함되는 범주)라면 모든 정부들이 위선적이라고 비난할 터인데, 만약 자국의 상대적인 미덕을 근거로 다른 나라들의 지지를 바란다면 그때의 도덕적인 논의는 심히 역겨울 것이다.

 

 

4. 미국: 이상 대 특권

 

보편적인 문명이 이미 정착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은 현재의 현실에 고의적으로 눈을 감는 것이며, 더욱 나쁜 것은, 그 목표를 하찮은 것으로 만듦으로써 미래에 있을 진정한 보편성의 구현을 방해하는 것이다.

---치누아 아체베[5. Chinua Achebe, Home and Exile (New York: Anchor Books 2000) 91면.]

 

지구화와 지역적 전통들 간의 대립은 그릇된 것이다. 지구화는 지역적 전통들을 직접 소생시키고, 문자 그대로 그것들에 기반하여 번창한다. 그렇기에 지구화의 반대는 지역적 전통들이 아니라 보편성인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6. Slavoj Zizek, On Belief (New York: Routledge 2001) 152면.]

 

미국과 세계권력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 이 순간 아주 간단히 요약될 수 있다. 나는 미국과 미국인들이 세계의 모든 불행과 부정의 원인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나는 미국인들이 이런 불행과 부정의 으뜸가는 수혜자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국가들의 세계 속에 위치한 미국이라는 한 국가의 근본적인 문제이다.

미국인들, 특히 미국의 정치가들과 홍보 담당자들은 우리의 이상에 관하여 말하기를 좋아한다. 크리스 매슈즈(Chris Matthews)의 베스트쎌러 『이제, 내가 진정으로 생각하는 바를 네게 말할게』(Now, Let Me Tell You What I Really Think)의 광고에는 이런 발췌문이 나온다. “생각해보면 우리 미국인들은 남다르다. ‘자유’라는 그 단어는 단지 우리의 문서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카우보이 영혼 속에도 있다.”[7. New York Times 2001년 11월 28일자 E8면. ] 카우보이 영혼이라,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이보다 더 나은 표현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이상은 어쩌면 특별한 것일 게다. 그러나 이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바로 그 사람들은 어쩌면 특별한 것일 수 있는 우리의 특권들에 대해서는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실, 그들은 특권을 말하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그러나 이상과 특권은 함께 간다. 양자는 대립관계에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서로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나는 미국의 이상을 헐뜯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나는 미국의 이상이 상당히 훌륭하고, 심지어 참신하다고까지 생각한다. 나는 그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마음속에서 불러내고, 진작시킨다. 이를테면, 미국 헌법의 수정조항 1조---모든 해당 예식에서 미국의 이상을 육화(肉化)한 것이라고 올바르게 상기되는 것---가 그렇다. 그러나 수정조항 1조에 관하여 두 가지를 상기하자. 수정조항 1조는 원래의 헌법에는 들어 있지 않았는데, 이는 그것이 건국원리로는 여겨지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종종 여론조사를 통해, 미국공중의 과반수가 소위 평상시에조차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이 권리보장을 변경·축소하거나 심지어 제거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우리가 ‘테러와의 전쟁’과 같이 ‘전쟁’중에 있을 때에는 미국정부도 미국공중도 이런 이상을 수호하리라 믿을 수 없으며, 심지어 연방최고법원조차도 ‘비상사태’에서는 그런 이상을 굳건히 지키리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수호하는 것은 대개 여론 가운데 기껏 소수의 지지밖에 얻지 못하고 소심한 태도를 종종 보이는 조직, 가령 조직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이 총선의 출마자한테 표를 얻지 못하는 사유가 되는 것으로 종종 언급되는, 미국시민권연합(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의 몫으로 남겨진다. 그렇기에, 나는 발언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와 그밖의 모든 자유에 찬성하지만, 미국 역시 이를 찬성하는지 가끔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 이유는 미국의 공중에게 볼떼르(Voltaire, 기성체제의 권위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비판으로 유명한 프랑스 문필가--옮긴이)적인 기질이 부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가끔 우리가 우리의 특권이 침식당하거나 사라질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는 대다수 사람들이 이상보다는 특권을 앞자리에 둔다. 또다시 미국인들은 이 점에서 유별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그저 좀더 강력하고 좀더 많은 특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이상을 좀더 자유롭게 무시할 수 있기 때문에 이상을 좀더 자유롭게 취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카우보이 영혼마저 제압할 힘이 있는 것이다.

미국인들 앞에 놓인 문제는 사실은 이렇다. 미국의 헤게모니가 서서히 쇠퇴하고 있다면---나는 의심할 나위 없이 그렇다고 믿는데---이상을 제압할 힘이 감소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상을 상실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우리의 카우보이 영혼들이 쇠퇴의 위험에 처한 우리의 특권들을 지키기 위해 우리의 국가라는 목장 주위에 철조망을 칠 것인가? 마치 특권이 철조망을 통해 빠져나갈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여기서 나는 쌍둥이빌딩에서 비롯되는 또하나의 메타포를 시사하고자 한다. 파괴된 빌딩은 다시 지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빌딩을 똑같은 방식으로---우리가 별을 향해 손을 뻗치면서 그 일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똑같은 확신을 갖고, 그 빌딩이 세상사람들에게는 횃불로 보일 것이라는 똑같은 확실성을 갖고---지을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 우리에게 정말로 가능한 것, 그리고 우리에게 정말로 바람직한 것에 관해 세심하게 숙고한 다음, 다른 방식으로 지을 것인가?

그리고 이때의 우리는 누구인가? 미국정부와 언론계 그리고 미국의 공중 가운데 다수가 찬성한, 법무장관 애시크로프트(John Ashcroft)의 진술에 따르면, ‘우리’는 더이상 미국의 모든 사람이 아니며, 심지어 미국에 합법적으로 거주하는 모든 사람도 아니며, 오로지 미국의 시민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라는 범주가 가까운 미래에 더욱 협소해지지 않을까 궁금해진다. 지젝이 지적하듯이, 지구화는 지역주의의 반대가 아니고, 지구화는 지역주의에, 특히 강자들의 지역주의에 기반하여 번성한다. 아무리 상상력을 확장해도 ‘우리’는 ‘현명한 현존 인류’(homo sapiens sapiens)는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사람이라는 속(屬, homo) 자체가 그렇게 현명한(sapiens) 것일까?

 

 

5. 미국: 확실성에서 불확실성으로

 

다윈의 혁명은 자연현실의 핵심범주를 본질 대신 변종으로 대체한 것으로 요약되어야 한다. (…) 우리 현실개념의 완전한 전도(顚倒) 혹은 ‘멋진 공중제비’보다 더 당혹스러운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플라톤의 세계에서 본질은 상위의 현실을 기록하는 반면 변종은 우연적이다. 다윈의 전복에서 우리는 변종을 결정적인 (그리고 이 세상의 구체적인) 하나의 현실로 평가하는 반면, 평균치들(우리가 실제작업에서 ‘본질들’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은 정신적 추상물들이 된다.

---스티븐 J. 굴드[8. Stephen J. Gould, Full House: The Spread of Excellence from Plato to Darwin (New York: Three Rivers Press 1996) 41면.]

 

자연은 실로 예측불허인 신기함의 창조와 연관되어 있는데, 그 지점에서 가능한 것이 실재하는 것보다 더 풍부하다.

---일리야 프리고진[9. Ilya Prigogine, The End of Certainty: Time, Chaos, and the New Laws of Nature (New York: Free Press 1997) 72면. ]

 

부시 대통령은 미국 사람들에게 그들의 미래에 대한 확실성을 제시해왔는데, 그의 제시능력을 완전히 넘어서는 것이 한가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미국의 미래, 세계의 미래는 단기적으로도 그렇지만 중기적으로는 더욱 불확실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특권을 곰곰이 생각하면, 확실성은 바람직해 보인다. 특권이 쇠퇴할, 심지어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고 생각한다면 확실성은 덜 바람직하게 보인다. 그리고 만약 이 세계의 오사마 빈 라덴들이 모든 진영에서 승리할 것이 확실하다면, 누가 그런 확실성을 소중히 여기겠는가?

앞서 내가 미국인들이 현재 느끼고 있는 당혹감들 중의 하나로 거론한 문제, 즉 9·11과 같은 사태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고 일어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하고,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다시 살펴보자. 우리는 미국정부의 압도적인 강제력---무엇보다 군사력---의 행사가 이를 보장할 것이라는 대답을 듣고 있다. 우리의 지도자들은 그런 보장을 얻자면 시간이 좀 걸릴 거라고 상기시키는 신중함을 보이지만 중기적인 확신을 다짐하는 데는 주저하지 않는다. 당분간은 미국민중이 이런 가설을 기꺼이 시험해보려는 듯하다. 지금 미국정부가 비판을 받고 있다면, 그런 비판은 주로 미국정부의 군사력 표현이 너무나 소심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서 나오고 있다. 미국정부가 훨씬 더 강하게 나가도록, 이를테면 이라크를 공격하는 군사작전을 감행하도록 압박하는 중요한 집단들이 있는데, 몇몇은 공격대상에 이란, 시리아, 수단, 팔레스타인, 북한을 추가하기를 바란다. 그 다음에는 꾸바가 포함되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심지어, 좀더 젊고 좀더 씩씩한 전사들이 나설 수 있도록, 마음 내켜하지 않는 장군들은 퇴역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겟돈(선과 악의 최후의 결전--옮긴이)을 재촉하는 것이 자기들의 역할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이런 가설을 반박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미국이 그렇게 세계적인 규모의 군사적 격돌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이 누구한테보다 먼저 자신한테 돌아올 이런 전쟁기도의 도덕적 결과를 떠맡고 싶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행히, 현실주의와 이상주의 가운데 양자택일을 해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도덕적 가치들이 기초적인 상식의 지지를 받는다고 해서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남북전쟁 이후, 미국은 자신의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 미국이 북미대륙 전체를 지배할 것이 명백하다는 믿음--옮긴이)을 추구하느라고 약 80년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미국은 줄곧 자신이 고립주의 국가가 되고 싶은지 제국적인 국가가 되고 싶은지 확실한 입장을 정하지 못했다. 그리고, 1945년 미국이 마침내 세계체제의 헤게모니를 획득했을 때, 미국이 (셰익스피어의 탁월함처럼) 위대함을 스스로 성취했을 뿐 아니라 위대함이 떠맡겨지기도 했을 때(『십이야』에서의 말볼리오Malvolio의 대사--옮긴이), 미국민중은 자신이 당장 해야 할 역할에 대해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는 이 세계에서 “우리의 책임감을 떠맡는” 법을 배우느라고 30년을 보냈고 이를 그런대로 잘 익혔을 때, 우리의 헤게모니는 정점을 지나버린 것이다.

우리는 지난 30년 동안 우리가 아직 헤게모니를 갖고 있으며 모든 나라는 이 점을 계속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소리높여 주장했다. 그런데, 진정으로 헤게모니를 갖고 있다면 그런 요청을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지난 30년을 낭비한 것이다. 미국에 현재 필요한 행동은 새로운 현실---즉 미국은 모든 나라에 득이 되는 것을 이제 더이상 일방적으로 결정할 힘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미국은 자신에 득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일방적으로 결정할 위치에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미국은 세계를 상대해야 한다. 우리가 대화를 해야 할 상대는 오사마 빈 라덴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까운 우방과 동맹국들, 이를테면 캐나다와 멕시코, 유럽, 일본 등과 먼저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그들 나라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 역시 이상과 이해를 갖고 있다는 것을, 그들 역시 생각과 희망과 열망을 갖고 있다는 것을 믿을 만큼 자기훈련을 한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는 나머지 세계, 즉 세계의 다수 국가들과 대화할 준비를 갖추게 될 것이다.

이 대화를 우리가 일단 시작한 연후에는 그것이 쉽지 않을 것이고, 심지어 불쾌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에게 몇몇 특권들을 포기하라고 요청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우리의 이상을 실현하라고, 그리고 배울 것은 배우라고 요청할 것이다. 50년 전에 아프리카의 시인이자 정치가인 셍고르(Léopold-Sédar Senghor)는 전세계가 “주고받는 만남”에 나설 것을 요청하였다. 미국인들은 그런 만남에서 무엇을 주어야 할지 알고 있겠지만, 받고 싶은 것이 어떤 것인지 깨닫고 있을까?

우리는 요즈음 정신적인 가치들로 돌아가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마치 우리가 이런 가치들을 한번이라도 지켰던 것처럼. 그런데 이런 가치들은 대체 무엇인가? 상기해보자. 기독교 전통에서는 이렇게 씌어 있다. “부자가 신의 왕국에 들어가기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가 더 쉽다.”(마태복음 19장 24절) 유태인 전통에서 힐렐(Hillel, 팔레스타인 유태교의 랍비--옮긴이)은 우리에게 말한다. “다른 사람들이 네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다른 사람에게 행하라.” 그리고 무슬림 전통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혹은 그들이 하늘과 땅을 만들었더냐? 아니다! 그들은 어떤 확실성도 갖고 있지 않다.”(꾸란 52장 36절) 이런 것들이 우리의 가치들인가?

물론 단 하나의 미국적 전통이나 단 하나의 미국적 가치 모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그렇고 항상 그랬듯이 수많은 미국들이 있다. 우리 각각은 우리가 선호하는 미국을 기억하고 거기에 호소한다. 노예제와 인종주의는 뿌리깊은 미국적 전통이며 아직도 상당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서부 변경의 개인주의와 권총을 휘두르는 무법자들도 미국적 전통이며 아직도 상당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악덕 자본가들과 그들의 박애주의적 자녀들도 미국적 전통이며 아직도 상당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그리고 세계산업노동자연맹과 헤이마켓 사건(Haymarket riots, 1886년 5월 시카고의 헤이마켓 광장에서 경찰과 노조원이 충돌한 사건으로서, 5월 8일 노동절은 이를 기념한 것임--옮긴이)---미국을 제외한 세계 곳곳에서 경축되는 사건---도 미국적 전통이며, 아직도 상당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1851년 전국여성회의(National Women’s Congress) 연설에서 “난 여성이 아닌가요?”라는 발언을 한 써저너 트루스(Sojourner Truth, 1797〜1883, 흑인여성 노예의 삶을 겪은 후 노예제철폐운동과 여권신장운동에 헌신함--옮긴이)는 미국적 전통이다. 그러나 흑인과 이민자의 표들에 대해 균형을 잡아줄 것이라는 근거로 투표권을 주장한 19세기 후반의 여성참정권론자들 역시 미국적 전통이다. 이민을 환영하는 것과 이민을 거부하는 것이 모두 미국적 전통이다. 애국적 결의로 단결하는 것과 군사주의적 참전에 저항하는 것이 모두 미국적 전통이다. 평등과 불평등이 모두 미국적 전통이다. 거기에는 본질이 전혀 없다. 거기에는 딱히 꼬집어 규정할 만한 것이 없는 것이다. 굴드가 상기시키듯, 현실의 핵심은 본질이 아니라 변종이다. 그리고 문제는 우리 가운데 변종이 줄어드느냐 늘어나느냐, 아니면 그대로 남느냐이다. 내가 보기에는 지금 변종의 정도는 예외적으로 높다.

오사마 빈 라덴은 곧 잊혀질 테지만, 우리가 테러리즘이라고 부르는 종류의 정치적 폭력은 향후 30~50년 동안에도 우리 곁에 상당히 남아 있을 것이다. 테러리즘은 세상을 바꾸는 데 매우 비효율적인 방식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반생산적이고 반발세력을 낳아, 종종 그 당장의 행위자들을 소멸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테러리즘은 계속 발생할 것이다. 세계와의 관계를 자신이 문명을 대표한다는 일방적인 확신에 근거하여 계속하는 미국이라면, 고립주의적인 물러섬의 형태든 적극적인 개입주의의 형태든 세계와 평화롭게 살 수 없으며, 따라서 자신과도 평화롭게 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세계에 행하는 것을 우리 자신에게도 행하는 것이다. 자유와 특권의 땅이 쇠퇴하는 와중에서도 모든 곳의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하는 땅이 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국경 내에서 동등하게 대하지 않는다면 과연 세계체제 속에서 동등하게 대할 수 있을까?

우리는 지금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나는 내 나름으로 선호하는 것이 있을 수 있지만 나나 당신은 우리가 무엇을 할지는 예측할 수 없다. 사실 우리가 이런 기획된 미래들 가운데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은 행운이다. 그런 불확실성은 우리에게 도덕적 선택을 남겨두고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실재보다 더 풍부한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예측불허의 신기함을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끔찍한 시대로, 우리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슬프게도 금방 익숙해질 수 있는 갈등과 악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우리의 감성이 생존투쟁 속에서 모질어지도록 용인하는 것은 쉽다. 우리의 카우보이 영혼을 구하는 것은 훨씬 어렵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끝나는 지점에 확실성과는 거리가 먼, 훨씬 실질적으로 합리적인 세계, 좀더 평등한 세계, 좀더 민주적인 세계의 가능성---요컨대 주고받음에서 비롯되는 보편성, 지구화의 반대인 보편성의 가능성---이 놓여 있다.

쌍둥이빌딩에 결부된 마지막 메타포는 이 건물들이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하나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예전에 이 건물을 짓기로 선택했다. 우리는 이제 이 건물을 지을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는 중이다. 이런 선택에 개입하는 요인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앞으로 아주, 아주 많다. 우리는 미국을 다시 짓고 있는 중이다. 세계는 세계를 다시 짓고 있는 중이다. 이런 선택에 개입하는 요인들은 지금도 앞으로도 아주, 아주 많을 것이다. 우리가 이제껏 만들어온 세계는 우리가 창조할 수 있었던 수천개의 대안적인 세계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불확실성 가운데서도, 우리가 향후 30~50년 동안 만들게 될 세계는 어쩌면 지금보다 나을 수도 낫지 않을 수도 있고 우리의 이상과 특권 간의 모순을 감소시킬 수도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확실성 가운데서도 우리는 우리의 도덕적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인샬라(신께서 뜻하신다면).

[韓基煜 옮김]

 

 

▣ 이메일 인터뷰

 

한기욱 선생은 9·11 공격의 순간에 어디에 있었으며, 첫 느낌은 어떠했습니까?

월러스틴 나는 연구실에 있었는데, 어떤 이가 텔레비전을 켜보라고 전화하더군요. 그래서 거의 모든 것을 처음부터 봤지요. 나의 첫 반응은 누군가 그런 과감한 공격을 성공시켰다는 데 대한 충격과 공포 그리고 놀라움이었어요.

한기욱 선생은 앞의 논문에서 “대다수 미국인은 이 [9·11] 사태에 깊은 분노와 애국적인 결의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상당한 당혹감도 계속 갖고 있었다. 당혹감은 두 가지였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는 것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느냐는 것이었다”라고 언급합니다. 그런데 선생은 대다수 미국인이 이 당혹감에 아직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했다고 판단을 하시는 듯한데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월러스틴 미국정부가 미국사람들로 하여금 당혹감을 줄일 수 있게 하는 그런 종류의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하지 못하도록 무척 애썼다고 생각해요. 미국사람들이 아직도 당혹스러워하고 불편해한다고 생각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자기가 왜 불편함을 느끼는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고 봐요. 그들은 누구를 비난할지 확신하지 못하고, 명료함이 부재한 가운데서 국가적 위험의 시기에 정부를 지지해야 한다라는 규범에 의지하고 있지요.

한기욱 『새 정치과학』(New Political Science)의 편집인 죠지 캇찌아피카스(George Katsiaficas)는 『창작과비평』 2002년 봄호에 「9·11과 미국인의 양심」(September 11 and the American Conscience)이라는 짧은 글을 기고하였는데, 거기서 놀랄 만큼 많은 미국 지식인들이 그들의 정부와 군대가 벌이고 있는 것, 즉 전세계적인 ‘테러와의 전쟁’을 아무 유보 없이 찬동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선생의 견해는 어떠한지, 이라크에 대한 공격 가능성을 지닌 제2단계 테러와의 전쟁에서 어떤 유의미한 변화는 없는지, 그리고 선생 자신의 비판적 입지가 미국 내 선생의 동료들한테는 일반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월러스틴 나는 다수의, 어쩌면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고립주의적인 동시에 군사주의적으로 되는 경향이 강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자국의 변경 너머의 문제들에 관여하지 않기를 원하면서 동시에 미합중국이 세계의 최강대국임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이지요. 이와 다른 대안적인 반응, 즉 세계의 공동체에 참여하는 좀더 ‘국제주의적’인 반응은, 비록 그것이 교육받은 엘리뜨들 가운데서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으며 그 엘리뜨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다수를 설득하려고 노력하고는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항상 소수의 견해이지요. 지금 당장에는 ‘매파들’---말하자면 군사주의적 측면을 강조하면서 고립주의적·군사주의적 자세를 취하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미국정부의 통제권을 사실상 쥐고 있습니다. 이라크 전쟁으로 이 상황이 바뀔까요? 탈레반과의 전쟁에서처럼 이라크전에서 쉽게 승리한다면, 바뀌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이라크전을 손쉽게---말하자면 다수 미국인의 인명 손실 없이---이기는 것이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래요, 앞으로 미국의 여론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직은 그렇지 못해요.

한기욱 부시 대통령은 연초의 의회연설에서 이란·이라크·북한의 대량살상 잠재력이 있는 군사력을 서로 연결하면서 ‘악의 축’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나는 이 표현이 정당하다거나 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반미 국가들을 벌 주려는 부시의 강력한 의지는 과소평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가 대통령직에 있는 동안 이라크를 칠 가능성은 다분합니다. 그러나 북한을 공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지난 2월 부시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 후 몇달 동안 한반도에는 평화와 화해의 분위기가 다시 조성된 듯합니다. 북한을 잠재적인 적으로 의심하는 부시의 공언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세심한 분석과 논의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관심을 갖는 것은 한국의 작금의 긴장완화 분위기가 일시적인 현상으로 장기적으로 보면 착시적 환상의 일종인지, 아니면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가능해진, 세계체제의 ‘암흑기’에 예외적일 수 있는 공간인지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에 대해 논평하고 싶은지요?

월러스틴 글쎄요, 나는 매파들에게는 악의 축 전체가 전쟁 의제에 올라와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번에 하나씩 상대하겠지요. 이를테면, 매파들이 사담 후쎄인을 무너뜨린다면, 그 다음에는 이란으로 이행할 것이고, 그 다음에는 북한으로, 또 그 다음에는 다른 많은 정권들로 나아가겠지요. 그러나 나는 이런 의도의 씨나리오가 가능할지 무척 의심스러워요. 미국 매파의 의도와 미국의 실제능력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지요. 북한 쪽에 진정한 변화가 있습니까? 분명치 않아요. 전략문제로 내부 투쟁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쪽이 이길지 알 만큼 우리는 [북한의 내부를] 충분히 알지 못해요. 장기적으로는, 북한이 데땅뜨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에요.

한기욱 브루스 커밍스는 「9·11 이후의 몇가지 생각들」(Some Thoughts Subsequent to September 11th, http://www.ssrc.org/sept11/essays/ cumings.htm)이라는 글의 서두에서 조지프 콘래드(Joseph Conrad)의 『밀정』(The Secret Agent)에 덧붙여진 ‘작가의 말’의 한 구절을 인용합니다. 그는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를 무너뜨린 파멸적인 허무주의를 겪은 후에 내가 처음으로 눈길을 돌린 것은 바로 이 소설이었다”고 하면서 현대적 테러리즘의 한 종류에 대한 이 소설가의 묘사력을 찬양합니다. 커밍스가 인용하는 구절은 이렇습니다.

“나는 교리, 행동, 정신상태, 이 모든 것의 허망한 범죄성과 거의 광적인 포즈의 비열한 면모와 마치 언제나 자기파괴에 열중하는, 너무나 비극적인 인류의 사무치는 불행과 열렬한 경신(輕信)을 이용하는 뻔뻔스러운 사기꾼 같은 면모를 주목했던 기억이 난다. (…) 그것은 너무나 멍청한 종류의 피로 얼룩진 경거망동이라서 어떤 합리적이거나 심지어 비합리적인 사유의 과정으로도 그 원천을 헤아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The Secret Agent, Penguin Books 1989, 8~9면)

커밍스는 “그때 콘래드의 첫인상이 오늘 나의 확신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이런 확신에 기초하여 9·11 공격이 그와 똑같은 종류의 유아(乳兒)적 허무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밀정』에서의 콘래드의 테러리스트 묘사를 어떻게 생각하며, 우리가 9·11을 이해하는 데 그런 묘사가 얼마나 적절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월러스틴 글쎄요, 나는 콘래드가 다수 테러리스트들의 정신상태를 포착하고 있지만 그 핵심인물들의 정신상태까지 반드시 포착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로서는 오사마 빈 라덴이 지정학적인 게임을 상당히 합리적으로 하고 있는, 냉정하고 계산적인 분석가라고 생각해요. 그는 미국이 과도하게 반응하기를, 즉 미국이 무슬림 정부들로 하여금 내부적인 불만을 불러일으켜 스스로를 무너뜨릴 짓들을 하도록 강요하기를 원해요. 처음부터 나는 빈 라덴의 주된 목적이 파키스탄과 사우디아라비아 정권이 무너지게끔 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파키스탄에서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지금까지 그만한 성과를 내지는 못하고 있어요. 그러나 이라크에서 전쟁이 터지면 비록 사우디아라비아가 전쟁에 관여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그의 의도를 실현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을 겁니다. 행위들을 비합리적인 것으로 설명하는 것은 분석적으로는 항상 최후의 수단이라고 생각해요. 분석을 시작할 때에는 항상 지적인 행위자가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의 의미를 알고 있다고 가정해야 합니다.

한기욱 문학과 관련된 질문을 하나 더 하겠습니다. 에드워드 싸이드(Edward Said)는 9·11 후에 미국대중이 전쟁으로 돌진하려는 데서 비합리적인 충동을 알아챘고, 그것을 에이헙 선장이 흰고래 모비딕을 광적으로 추적하는 것에 비유했습니다(“Islam and the West are inadequate banners,” The Observer, 2001. 9. 16). 사실, 나 자신도 미국문학도로서 유사한 논점을 독자적으로 창비의 웹싸이트(http://www.changbi.com)에서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유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9·11 이후 미국공중의 집단적인 전쟁 노력을 설명하는 데 과연 얼마만큼 적절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월러스틴 나라면 모비딕이 오사마 빈 라덴이 아니라 사담 후쎄인이라고 생각할 테지만, 싸이드의 논점은 분명히 일리가 있군요.

한기욱 마지막으로 선생에게 묻고 싶은 것은 9·11 이후 더욱더 심각해지고 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쟁점입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지난 3월 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통제하고 있는 지역을 침입한 이래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발의한 ‘50 대 50의 타협안’은 고사하고 어떠한 합리적인 평화안의 실효를 기대하는 것도 어려워졌습니다. 그리고 선생은 페르낭 브로델 쎈터 홈페이지(http://fbc.binghamton.edu)에 연속으로 올리는 한 논평에서 미국은 “공정한 개입자의 포즈조차 사실상 포기하였고 다른 누군가가 이런 역할을 맡을 수도 없도록 단속하고 있다”(「논평 89」)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부시 대통령으로서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미래를---그냥 내버려두면 미국과 미국의 아랍동맹국들의 사이를 황폐화시킬 것이 틀림없는---잔인한 아리엘 샤론에게 맡겨둘 처지는 못되기 때문에, 지금 모종의 팔레스타인 임시국가안으로써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를 개선 혹은 재편하려고 노력하는 듯합니다. 선생은 ‘험악해지는’ 상황을 개선하려는 미국의 노력이 성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9·11 이후 세계정치의 관점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어떤 논평을 하고 싶습니까?

월러스틴 부시 대통령은 이 문제에 관하여 상당히 다른 종류의 여러가지 압력들에 처해 있지요. 하지만 나로서는 그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과 관련해 어떤 유용하거나 분별력있는 조치를 취하리라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앞으로 상황의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미국정부 내에서보다는 이스라엘 내에서 나올 공산이 더 큽니다. 하지만 내가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다는 점을 고백할 수밖에 없군요.

[韓基煜 정리·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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