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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길의 시학
신경림과 황동규
최두석 崔斗錫
시인, 한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시집으로 『대꽃』 『임진강』 『성에꽃』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와 저서로 『리얼리즘의 시정신』 『시와 리얼리즘』 등이 있음. pinus@hanshin.ac.kr
1. 근래의 작풍과 기행시
‘시인부락’ 동인이기도 한 함형수(咸亨洙)는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한 편으로 남은 시인이다. 그런데 만약 오늘날 함형수 같은 이가 있다면? 아마 그는 시인이 되지도 못하고 「해바라기의 비명」 수준의 그의 시는 빛도 보지 못하고 묻히고 말 것이다. 수준작이 여러 편 있어야 등단의 기회가 주어지고 시집 한 권이라도 내야 겨우 문학판의 말석에 고개를 내밀 수 있는 시대이므로.
오늘날의 시작풍토와 관련하여 우선적으로 두드러지는 현상은 다작이라는 것이다. 시를 부지런히 읽는 편인 나로서도 읽지 못하거나 대충 훑어보고 넘어가는 잡지와 시집이 허다하다. 주요한 시인이라도 예전에는 시집 한두 권 내고 생애를 마치는 경우가 많았었는데 요즘에는 삼년이 멀다 하고 새 시집을 내는 이가 적지 않다. 그러지 못하면 시인으로서의 존립을 위협받는 시대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시인에게 좋은 시를 왕성하게 쓰는 것만큼 바람직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좋은 시가 어찌 그리 쉽게 씌어지겠는가. 이른바 절창이라고 불리는 시에는 시 쓰는 주체의 땀과 피와 혼이 스며들어 있는 법이다. 막연하게 많이 쓰다보면 절창도 쓰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크게 보아 동어반복의 유사품을 대량생산하기보다는 한편 한편의 시에 최선을 다하는 본분을 지키는 태도가 새삼스럽게 요구된다고 하겠다.
다작의 시대이기는 하지만 주도적인 흐름을 형성할 만한 시적 경향은 보이지 않는다. 문예지도 많이 발간되지만 뚜렷한 색상을 드러내는 잡지도 눈에 띄지 않는다. 필자의 눈이 어두워서인지는 몰라도 시운동이라고 불릴 만한 경향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굳이 지적하라면 사회역사적 상상력의 거대담론은 위축되고 개인의 내면을 드러내는 미세담론이 다양해졌다고나 할까. 아무래도 오늘날은 시인이 횃불 들고 군중 앞에 서 있는 시대는 아닌 듯하다.
다작이나 미세담론이라는 작풍과도 연결되는 것인데 근래에 기행시가 참 많이 나오고 있다. 해외여행까지 포함해서 여행이 빈번해진 사회현상과 무관할 수 없다 하겠다. 첨예하거나 우렁찬 목소리가 요구되는 절박한 사회적 쟁점도 줄고 시가 여가생활의 읽을거리로 존재하는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 기행시가 많아진 가장 큰 이유는 다작의 유혹을 물리치기 힘든 시인이 여행을 통해 손쉽게 소재를 구한다는 데에 있는 듯하다.
하지만 손쉽게 소재를 구하는 차원에서 쉽게 기행시를 쓴다면 좋은 시가 나오지 않는다. 어차피 풍물을 구경하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삶의 깊이를 드러낼 수 없다. 문학적 소재로서의 여행이란 주체의 세계로의 편력과 무관할 수 없고 편력이 사색의 깊이를 수반할 때 비로소 시로서의 성취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세계로의 편력이라는 길의 의미가 제대로 살아날 때 범상한 기행시의 평면성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하겠다.
인생길이라는 비유가 설득력을 갖듯이 삶은 길 위에 펼쳐진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니까 길의 의미찾기는 삶의 의미찾기와 겹쳐지는 부분이 많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가 주목하는 시인이 신경림과 황동규이다. 문단의 원로이면서도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두 시인은 기행시가 유행하기 훨씬 전부터 오랫동안 길의 의미를 천착해왔다. 지금은 색깔이 많이 바랬지만 속칭 창비파와 문지파를 대표하는 두 시인이 길을 중심에 놓고 상상력을 펼쳐왔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2. 신경림의 떠돌이의 노래
‘방안 퉁소’가 명인 되기 어렵듯이 집안에 틀어박혀서 좋은 시를 쓰기는 힘들 것이다. 세상 돌아가는 물정과 사람살이의 형편을 완전히 외면한 채 누에의 집짓기 식으로 시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 의미에서 길은 시인에게 세상 돌아가는 물정과 사람살이의 형편을 살피는 통로로서의 성격을 갖게 된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관심의 정도나 방향에 따라 길의 의미나 성격이 달라지겠지만 원천적으로 길과 무관하게 시를 쓸 수는 없다고 하겠다.
1956년에 등단한 신경림(申庚林)의 이력 가운데 특이한 것은 1957년부터 1965년 사이에 시작활동을 쉬었다는 것이다. 유명한 이 ‘십년 공백’이 실은 ‘십년 공부’라는 사실은 웬만큼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공부의 내막에 대해서는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크게 보아 순수시 혹은 전래적 서정시의 흐름 속에서 등단했던 시인이 십년의 잠복기를 거쳐 민중시 혹은 리얼리즘시의 흐름을 열게 된 사연이 잠겨 있기 때문이다.
아편을 사러 밤길을 걷는다
진눈깨비 치는 백리 산길
낮이면 주막 뒷방에 숨어 잠을 자다
지치면 아낙을 불러 육백을 친다
억울하고 어리석게 죽은
빛바랜 주인의 사진 아래서
음탕한 농지거리로 아낙을 웃기면
바람은 뒷산 나뭇가지에 와 엉겨
굶어죽은 소년들의 원귀처럼 우는데
이제 남은 것은 힘없는 두 주먹뿐
수제빗국 한 사발로 배를 채울 때
아낙은 신세타령을 늘어놓고
우리는 미친놈처럼 자꾸 웃음이 나온다
–「눈길」 전문
위의 「눈길」이 개인적인 정서를 드러내는 서정시와 사뭇 다르다는 점은 웬만한 안목의 독자라면 일독하면서 금방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나’ 대신 ‘우리’가 등장하는 것이 전래적 서정시와 다른데 시적 자아는 산골에서 은밀히 재배한 아편을 몰래 수집하러 다니는 약종상패에 끼어 있다. 시적 자아가 어떻게든 먹고살아야 하는 맨주먹 인생들에 자연스럽게 섞여들어 있는데 무엇보다도 그 점이 『농무』와 『새재』 시절 신경림의 민중시가 갖고 있는 장점이다.
외형상으로 시를 놓고 지낸 십년 공백기가 실은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득의의 시를 준비하던 시기였음은 인용시 「눈길」이 이 시기의 떠돌이생활 속에서 초고를 써둔 것이라는 본인의 술회에서도 드러난다. 실제로 공사판이나 광산에서 일하기도 하고 장돌뱅이 친구를 따라다니기도 한 이 시기에 시인은 본격적으로 세상공부를 한 것이다. 물론 시를 의식하거나 쓰기 위한 체험이 아니고 하루하루 살아가기 위한 밑바닥 체험이기에 더욱 시쓰기에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고 하겠다.
시가 사는 만큼 나오는 것은 아니겠지만 시가 삶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이른바 중국식 하방체험으로는 「눈길」과 같은 자연스러운 경지에 이를 수 없다. 「눈길」과 같은 신경림의 민중시가 갖는 장점이자 미덕은 지식인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빛바랜 주인의 사진 아래서 주막집 아낙과 음탕한 농지거리를 하고 아낙의 신세타령에 미친놈처럼 웃는 장면의 포착은 시인의 체험이 진하게 녹아들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하겠다. 즉 시인의 떠돌이생활 십년의 체험이 그의 민중시를 낳게 한 것이다.
‘순수시’와 대비되어 1960년대에 널리 통용되었던 말로 ‘참여시’가 있다. 육이오 이후에 잠복하던 사회현실 문제에 대한 시적 관심이 사일구를 계기로 터져나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1970년을 전후하여 민중시가 종전의 참여시를 이어받게 되는데 그러한 전환을 가져온 대표적 시집이 신경림의 『농무』라고 할 수 있다. 목소리를 높이다가 자칫 공허해지기 쉬운 참여시가 사람살이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민중시로 거듭났다고 하겠으니 그러한 문학사적 맥락에서 신경림의 떠돌이 십년이 갖는 의미를 따져볼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신경림의 초기시편들에서 길은 스스로 민중의 일원이 되어 민중의 삶을 체험하는 통로라 하겠고 인용시 「눈길」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그에게 민중은 ‘민중 속으로’라는 지식인의 구호나 의식적 실천의 차원에서 발견한 존재가 아니고 나날의 삶의 현장 속에서 함께 부대끼며 동행하는 존재이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파장」)나 “우리는 어느새 동행이 되어 있었다”(「동행」)와 같은 시구가 보여주듯 그의 초기시에서 길은 민중 속에 섞여 민중과 동행하는 길이다.
길이 주요하게 등장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기행시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길이 시적 구도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눈길」의 경우에도 기행시라는 명칭은 어울리지 않는다. 신경림의 초기시에 길이 많이 등장하지만 기행시라고 부를 만한 시는 별로 없다. 일상적 삶의 공간으로부터의 이탈이 여행이고 여행의 체험을 통해 쓴 시가 기행시라면 신경림의 초기시는 그에 해당되지 않는다. 민중 속에서 민중과 동행하는 길은 그냥 삶의 체험이지 여행이 아닌 것이다.
대체로 시작 초년에는 기행시를 쓸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성장과정이나 가족사 등에 얽힌 직접체험을 위주로 한 화제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집을 몇권 내다보면 적극적으로 소재를 개발할 필요가 있고 그에 따라 기행시를 시도하는 경우가 많다. 가정과 일터라는 일상적 삶의 공간에서 나올 수 있는 새로운 소재란 아무래도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경림의 경우 중기시가 모인 『달넘세』와 『길』은 답사를 통해 적극적으로 소재를 개발한 기행시집의 성격을 다분히 지니고 있다.
강둑에 바투 붙은 여인숙에서
물소리를 들으며 긴 가을밤을 보내고
아침에 강가로 나오니 강물은
고장 이름대로 그냥 봄이다
물에 손을 적셔보는데
주인이 나와 장터로 끌고 간다
짐차 석 대에 바리바리 실린 고추 푸대들
잘난 사람들 먹어보라고 오백리 길
서울 큰 마당에 갖다 부릴 거란다
죽을 병 든 아버지 약 구하겠다
나무하기, 불때기, 물긷기 삼년
그래도 몰라주니 바리데기라도 못 참아
진오귀굿 늙은 무당도 이른 조반 먹고 나와
성난 황소들 길 떠나는 채비를 돕고 섰다
강물에선 뽀얗게 물안개 피어올라도
농사 고을은 아무데도 봄이 없어
–「새벽길」 전문
‘영춘에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고 ‘영춘은 단양에서 50여리 떨어진 오랜 강고을’이라는 주석까지 곁들여 있어 기행시라는 호칭에 영락없이 들어맞는 시이다. 표지에 아예 기행시집이라고 써붙인 『길』에는 인용한 「새벽길」처럼 전국 각지의 지명을 넣어 부제로 삼은 시가 대부분인데 시인의 열정과 의욕을 엿볼 수 있겠다. 길과 관련하여 남다른 창조적 열정과 의욕이 없이는 전국 각지를 두루 답사하여 공간적 배경으로 삼은 시집을 묶을 수 없겠으므로.
인용시에서는 두 가지의 길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가장 집중적으로 부각된 길은 짐차 석 대에 바리바리 고추를 싣고 떠나는 농민시위대의 서울길이다. 농민들이 생존권 투쟁을 떠나는 새벽의 장터를 배경으로 하였기에 ‘새벽길’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강마을을 답사하다가 여인숙에서 자고 농민시위대의 출정하는 모습을 보는 시적 자아의 길이다. 여기에 덧붙여 이 시에는 병든 아버지의 약을 구하러 떠난 바리데기의 길이 숨어 있다. 시인이 얼마나 길에 민감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인 셈이다.
방금 답사라는 말을 썼지만 신경림의 여행은 명승지보다는 사람을 찾는 일에 역점을 두고 있다. 그의 여정은 주로 여러 고장에서 각기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으로 채워진다. 즉 그의 여행은 유람이라기보다 스스로 말한 일종의 ‘돌아다니면서 하는 세상공부’로서의 답사라 하겠다. 주로 못나고 힘없고 짓밟힌 자들을 만나면서 이루어지는 세상공부가 그의 민중시의 바탕을 이룬다고 하겠는데 「새벽길」의 경우 영춘의 장터가 그러한 공부의 장소인 셈이다.
아무튼 이 시에서 집중적으로 부각된 길은 농민시위대의 서울길과 시적 자아의 답사길인데 그 길이 영춘의 새벽 장터에서 만난 것이다. 그런데 「눈길」과 「새벽길」을 비교해보면 ‘길’의 성격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눈길」의 경우 민중과 동행하는 길인데 비해 「새벽길」의 경우 잠시 만나는 길이다. 농민들의 생존권투쟁에 공감하지만 아무래도 시적 자아는 ‘성난 황소들’로 비유된 농민시위대의 일원이 아닌 것이다. 시인이 농민이 아닌 이상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신경림의 여행은 전국 각처의 민중사실에 대한 탐구의 성격을 강하게 지닌다. 그렇지만 민중성의 실현이라는 면에서 그의 기행시는 『농무』 시절의 시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 있다. 시적 자아가 약종상패에 섞여 그들과 동행하는 「눈길」과 농민시위대의 출정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새벽길」의 차이는 그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그러한 변모는 시인으로서 부득이한 것이기도 하고 진실된 것이기도 하다. 이미 전문적인 시인의 길을 걷는 이상 그 입장에 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길』처럼 아예 기행시집이라 못박지 않더라도 기행시는 1985년에 간행한 『달넘세』부터 2002년에 간행한 『뿔』까지 여섯 권의 시집에 두루 편재한다. 즉 신경림은 기행시를 통해 전문적인 시인의 길을 개척해간 측면이 많다. 다시 말해 그는 의욕적인 답사여행을 통해 자신의 시적 공간을 확대하고 시적 변모를 이룩한 측면이 많은 시인이다. 가령 일생 동안 비슷한 성격의 시만 쓰는 시인이 있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그것은 살아 있는 시인의 모습이 아닐 것이고 그런 맥락에서 신경림의 기행시가 갖는 의미를 새겨볼 수도 있겠다.
기행시가 일반적으로 노출하기 쉬운 약점은 시적 대상을 충분히 소화해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위에 인용한 「새벽길」의 경우 지명인 ‘영춘(永春)’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다는 혐의가 있고 그것은 시적 대상에 대한 육화된 인식에 이르지 못한 증거로 보인다. 고추 푸대를 짐차에 싣고 출정하는 시 속의 계절은 가을인데 강물은 봄이라고 하는 것이나 농사 고을은 봄이 없다는 발상이 다소 어색해 보인다. 즉 시적 대상의 충분한 육화가 기행시에서 중요할 듯한데 역으로 육화가 충분하다면 이미 기행시라는 명칭이 불필요할 수도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신경림의 기행시에서 길은 우선 민중사실을 탐구하는 통로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그런데 그 길은 다른 한편 세상 사는 지혜를 깨닫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답사여행이 장기화되고 기행시를 지속적으로 쓰면서 그의 길은 후자의 성격이 강화된다. 가령 “지금 우리는 혹시 세상을/너무 멀리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너무 가까이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莊子를 빌려」)나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길」)는 그 점을 보여주는 시구이다.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떠도는 자의 노래」 전문
「떠도는 자의 노래」는 오랫동안 세상을 떠돌아본 시인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시이다. 체험이 충분히 곰삭아 우러나온 만큼 기행시라 부를 이유도 없다. 앞에서 길이 자신을 들여다보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고 했는데 그러한 성격이 잘 드러나 있다. 뭔가 놓고 온 듯싶어 찾으려고 여기저기 서성이고 기웃대는 것이 자신의 현생이고 그러한 행동이 전생에서 비롯하여 후생까지 이어질 것이라 한다. 떠돌이로서의 자신의 운명에 대한 깊은 자각과 성찰이 이 시의 주제라 하겠다.
신경림의 경우 떠돌이 의식은 초기시에서부터 나타난다.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목계장터」)나 “차라리 한세월 장똘뱅이로 살았구나”(「어허 달구」)와 같은 시구는 그가 떠돌이 장꾼의 정서에 얼마나 친숙한가를 보여준다. 「목계장터」나 「어허 달구」는 소문난 절창이거니와 이처럼 그가 장돌뱅이의 정서를 잘 표현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유년시절을 장터를 낀 동네에서 보낸 것과 직접 장돌뱅이가 되어보기도 하는 등 떠도는 생활에 익숙한 데서 찾을 수 있겠다.
시인으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이후에 그는 수시로 답사여행을 떠났고 그것이 그의 기행시의 바탕이 된다는 사실은 앞에서 논의하였다. 그러니까 그의 떠돌이 의식은 수십년에 걸친 답사여행을 거치면서 더욱 깊게 각인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정황은 “배낭 메고 산마을 갯마을 꽤나 헤집고 다녔지/더러는 광대 흉내에 장똘뱅이 시늉으로/장바닥 난달이나 정거장 의자에서 새우잠도 자고”(「마을버스를 타고」)와 같은 회상의 시구를 통해서도 가늠해볼 수 있겠다.
배낭 메고 다니다가 노경에 이른 시인으로서 떠돌이라는 자기인식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일 터이다. 세상을 보기 위해 배낭 메고 다녔는데 그러한 인생길을 회고하다보니 인용시에서 보듯 떠돌이라는 자기인식 혹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깨달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시가 세상에 대한 인식이나 발언일 수도 있고 시인 자신의 내면에 대한 성찰일 수도 있겠으니 「떠도는 자의 노래」는 주로 후자에 해당되는 시이다. 즉 「떠도는 자의 노래」에서 길은 세상물정을 살피는 통로라기보다 자기성찰의 통로로 작용하고 있다.
신경림은 가장 대표적인 민중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 1970~80년대 민중시운동에서 가장 중요하게 떠오른 시인이 신경림이다. 그런데 신경림이 계속해서 민중시만 써온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이후 그는 세상에 대한 인식이나 발언에 촛점이 놓인 민중시와는 달리 시인 자신의 내면 성찰에 촛점이 놓인 시를 많이 발표하고 있다. 가령 「떠도는 자의 노래」를 두고 민중시라는 호칭은 적절치 않다. 신경림은 민중시인이기 이전에 시인으로서 부단한 자기갱신을 거쳐 오늘에 이른 것이다.
3. 황동규의 여행이 된 생애
낯선 지역에 대한 호기심 혹은 동경은 누구나 갖게 마련이지만 청년 황동규(黃東奎)의 경우 그러한 성향이 유달리 강한 편이다. 호기심 혹은 동경에 의해 떠난 여행에 뚜렷한 여정이나 목적이 있을 리 없으니 그가 이십대 때 간행한 시집 『어떤 개인 날』과 『비가』 시편들에는 ‘방황’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런데 그의 방황은 인생에 대한 근본적 회의에서 출발한다기보다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젊은 영혼의 꿈 혹은 동경과 결부되어 있다.
그의 초기시에서 여행은 꿈 혹은 동경과 결부되면서 다분히 낭만적 색조를 띠고 있다. “그 어디라도 좋다./눈부신 국화 무더기로 핀 무허가 하숙집의 저녁이라도/고깃배 들어오다 마는 부두의 미명(未明)이라도”(「어떤 여행」)와 같은 시구는 그 점을 보여준다. 지금 이곳이 아니라면 어디라도 좋다는 충동이나 발상 자체가 낭만적이다. 황동규의 초기시에서 길은 낭만적 동경의 출구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만큼 다소 막연하고 흐릿한 상태로 등장한다.
말을 들어보니
우리는 약소민족이라더군.
낮에도 문 잠그고 연탄불을 쬐고
유신(有信) 안약을 넣고
에세이를 읽는다더군.
몸 한구석에 감출 수 없는 고민을 지니고
병장 이하의 계급으로 돌아다녀보라.
김해에서 화천까지
방한복 외피에 수통을 달고.
도처(到處) 철조망
개유(皆有) 검문소
그건 난해한 사랑이다.
난해한 사랑이다.
전피수갑(全皮手匣) 낀 손을 내밀면
언제부터인가
눈보다 더 차가운 눈이 내리고 있다.
–「태평가」 전문
1960년대 후반에 산출된 「태평가」는 황동규의 시적 변모에 있어 이정표와 같은 시이다. 낭만적 동경과 결부시켜 개인적인 감수성을 펼치는 초기시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방한복 외피에 수통을 달고 병장 이하의 계급으로 돌아다니는 마당에 낭만적 동경이란 가당치 않다. 그의 길에는 철조망과 검문소가 도처에 깔려 있다. 이처럼 황동규의 길이 모호성을 탈피하고 구체성을 띠는 것은 당대의 역사적 상황과 사회적 현실에 관심을 가지면서부터이다.
‘태평가’라는 제목에서 보듯 이 시는 전체적으로 반어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김해에서 화천까지로 개괄되는 남한땅 도처에 철조망과 검문소가 깔려 있는데 무슨 태평가를 부르겠는가. 낮에도 문 잠그고 연탄불을 쬐는 답답한 현실 속에서 그의 고민은 어떻게 사랑을 하느냐이다. 그 사랑이 개인적인 연정이 아니고 사회적 성격을 띨 때 어려울 수밖에 없을 터이다. 이 시의 주제어인 ‘난해한 사랑’은 분단상황 속에 사는 약소민족의 지식인이 어떻게 사랑을 할까의 문제일 터인데 그것이 어찌 어렵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길이 세상형편을 살피는 통로에서 나아가 현실인식을 강화하기도 한다는 점은 앞에서 신경림을 논하면서 언급한 셈인데 「태평가」에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신경림의 「눈길」의 경우 민중 속에 섞여 민중과 동행하는 길인데 비해 「태평가」의 경우 난해한 사랑으로 고민하는 지식인의 길이다. 후자의 기조가 되는 반어 자체가 다분히 지적인 미학이고 지적인 미학이 난해한 사랑을 떠받치고 있다. 두 시인의 삶의 이력과 시세계가 다른 만큼 길의 성격도 차이가 많다고 하겠다.
민중시를 지향하는 경우 지식인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은 미덕일 수 있다. 하지만 시인이 지식인인 경우 지식인의 체취를 풍기는 것은 당연하다. 시가 삶을 속일 수 없다는 명제는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민중이 역사를 움직인다는 이념 또한 신념의 차원에서 통용되기 쉽다. 아무래도 그러한 신념으로는 「태평가」와 같은 시를 폄훼하기 쉬운데 적절치 않아 보인다. 중요한 것은 「태평가」에서 발견한 난해한 사랑을 이후의 시편들에서 얼마나 적극적으로 궁극적인 데까지 밀고 나아가느냐이다.
사적인 내밀한 감성 표현 위주의 시를 쓰던 황동규가 사회역사적 상상력을 가동시키는 것은 『태평가』 『열하일기』 등의 시집에서이다. 그런데 그의 사회역사적 상상력은 궁극적인 데까지 적실하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봉준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일자무식하게. 아 한문만 알았던들”(「삼남에 내리는 눈」)과 같은 시구는 그 점을 보여준다. 전봉준이 한문을 모르는 일자무식한 사람도 아니거니와 동학농민전쟁을 전봉준의 무식한 울음으로 보는 것은 적실해 보이지 않는다.
황동규가 1970년대를 통과하는 모습은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에 잘 드러나 있다. “천리경(千里鏡) 속에는 바람 막힌 길이 있고”(「그 나라의 왕」)나 “몇 마디 아픈 말이 뱉어지지 않는다”(「세 줌의 흙」)와 같은 시구에는 엄혹한 군사독재체제에서 살아가는 그의 마음의 일단이 드러나 있다. 길은 막혀 있고 말이 나오지 않아 고통스러워하지만 그는 행동하는 지식인은 아니다. 그가 사회역사적 상상력과 함께 난해한 사랑을 궁극적인 데까지 밀고 나아가지 못한 이유는 사회적 실천과 호흡을 같이하지 않았던 데서 찾을 수도 있겠다.
군(郡) 이름은 잊었지만
무량면(無量面) 정토리(淨土里)
그런 곳이 없다면
누가 시외버스에 실려 몸 뒤척이며
암모니아 냄새 자욱한 홍어회처럼 달려가겠는가.
타버린 산이 삭고
산속에 새겨논 마애불도 삭아버리고.
이따금 돌조각이 저절로 굴러내리는
절벽 앞을 걷다가
흰 빨래로 걸려 있는 구름 앞에서
그 흔한 망초꽃 속의 어느 눈썹 섭섭한 망초 하나와 만나
인사를 주고받겠는가.
“듣고 보니 우린 꿈이 같군,”
“끝이 환했어,”
같은 꿈을 같이 꾼 자들이
같은 창살 속에 서서 같이 흔들리는 그런 곳,
무량면 정토리가 없다면.
–「망초꽃」 전문
인용한 「망초꽃」은 일종의 기행시이다. 무량면 정토리라는 지명에 이끌려 시외버스를 타고 달려가서 불 탄 산과 마애불을 보고 절벽 앞을 걷다가 망초꽃을 본다는 시의 구도가 기행시로서의 성격을 드러낸다. 지명이 불교적 이상향인 한적한 시골에서 만난 망초와 자신의 꿈이 같다는 상념이 이 시를 지탱하고 있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물의 이미지를 그리면서 그와 결부되어 떠오른 독특한 상념의 토로가 황동규의 기행시가 갖는 일반적 성격인데 「망초꽃」도 그러한 예이다.
신경림의 여행이 풍경은 뒷전이고 사람 만나는 게 우선이라면 황동규의 여행은 사람보다는 풍경을 만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신경림의 경우 사람들로 붐비는 저잣거리를 많이 찾는 데 비해 황동규의 경우 나름대로 자유롭게 사색에 잠길 수 있는 한적한 곳을 즐겨 찾는다. “나에겐 여행이 악기이다”(「지방도에서」)나 “아 나는 결국 풍경 중독자인가?”(「밤새워 글쓰기」)와 같은 시구는 황동규의 유별난 여행벽을 드러내는 동시에 풍경에 주목하는 그의 여행의 성격을 드러낸다.
풍경은 정지용 이래 우리의 문학사에서 독특한 의미를 갖는데 일단은 사회적 현안에 대해 직접적인 참여를 배제하는 시학과 결부되어 있다. 시의 화폭에 인물이 부각된 신경림과 풍경이 부각된 황동규의 기행시를 비교해보더라도 그 점이 드러난다. 앞에서 인용한 신경림의 「새벽길」이 농민들의 생존권투쟁을 다루고 있는 데 반해 황동규의 「망초꽃」은 어떻게 하면 욕심을 버리고 망초꽃처럼 조촐하게 살까에 주제가 맞추어져 있다. 물론 시 속의 풍경은 시인의 마음과 결부되지 않을 수 없다.
황동규가 풍경에 주목한다는 것은 사회역사적 상상력을 유보하거나 접는다는 것이다. 뒤집어 말한다면 사회역사적 상상력을 접으면서 본격적으로 기행시를 쓰기 시작하고 그 시기는 1980년을 전후해서이다. 1980년대 하면 우리의 시문학사에서 사회역사적 상상력을 통한 시쓰기가 유달리 융성했던 시기이다. 당시의 민중시운동을 포함한 리얼리즘시운동은 광주항쟁 이후 분출하던 민주화운동의 열기와 호흡을 함께하였다. 그런데 황동규는 그러한 시운동과는 다른 시쓰기의 길을 모색하였고 나름대로 그 길을 개척하였다.
상상의 날개라는 말이 있듯이 상상력은 몸이 가벼워야 자유롭게 발휘되는 속성이 있다. 그런데 사회문제에 도덕적 책임감을 느끼는 경우 실천력이 뛰어난 시인이 아니라면 무거운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또한 시인의 사회적 실천과 창작적 실천이 함께 잘 이루어지는 경우 또한 드물다. 자유로운 상상력을 중시하는 황동규로서는 그러한 부담을 떨쳐낼 필요를 일찌감치 절감하였고 그것이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는 시인의 성향이나 체질에도 더욱 부합된다고 하겠다.
1980년대 후반 이후 황동규의 시작활동은 부쩍 왕성해지는데 그의 왕성한 창작력은 주로 기행시를 통해 발휘된다. 1991년부터 2003년까지 이삼년의 시차를 두고 잇달아 간행된 『몰운대행』 『미시령 큰바람』 『외계인』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등의 주축이 기행시이다. 이쯤되면 이미 여행이 시인의 생활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으니 「걷다가 사라지고 싶은 곳」에 인용한 그의 일기의 한 구절, “어느샌가 내 생애는 이상한 여행들이 되어 있었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겠다.
신경림과 비교할 때 황동규의 여행은 자유롭고 분방하다. “만나는 사람들의 몸놀림 계속 시계침 같고” “읽는 책들도 하나같이 맥빠져 시들할 때” “어느 고장에 가서 마음을 떨구고 오지?”(「茶山草堂」) 하는 기분으로 떠나는 여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여행이 심심파적에 그친다면 어찌 왕성한 시쓰기가 가능하겠는가. 그의 기행시에서 길은 사유와 상상이 뻗어가는 가지이며 줄기라는 생각이 들고 시인으로서 사색과 상상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계속해서 여행을 떠난다고 볼 수 있다.
여행을 통해 황동규의 왕성한 창작활동이 가능해졌다는 것은 그의 기행시편 가운데 60행이 넘는 장시가 많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시집의 표제가 된 「몰운대행(沒雲臺行)」도 그러한 시인데 몰운대까지의 여정과 도중에 떠오른 온갖 상념이 시의 내용을 채우고 있다. 가령 “상동 칠랑에서 국도를 버리고/비포장 지방도로로 올라선다”는 여정을 밝히는 대목이고, “입적지(入寂地) 미상의 의상도/강원도 산골의 행려병자가 아니었을까”는 차를 모는 도중에 떠오른 상념이다.
대부분의 기행시가 그렇듯이 황동규의 기행시도 고도의 정련을 거친 완성도가 높은 시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고도의 정련을 거친다는 생각 자체를 거부하고 길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맡기는 자세 속에서 그의 기행시가 산출된 듯하다. 그러니까 그의 긴 기행시들은 곳곳에 금이 박혀 있는 정련을 거치지 않은 원광석에 비유할 수도 있겠다. 고도의 정련을 거친 절창과 여정에 따라 상념을 토로하는 기행시는 속성이 다르고 황동규의 경우 기행시의 속성을 잘 살리고 싶었던 셈이다.
아무래도 나는 너무 환한 곳
사방이 물비누로 정갈히 씻은 본 차이나 같은
실하고 눈부신 곳으로는 못 가리.
멸종 위기의 동물답게
막 어둡기 전 거리를 채 뜨지 못하고
짐말처럼 한세상 터벅터벅 걸어온 다리는
동그랗게 오므리고, 고개 약간 숙이고
겨울 저녁
뿔뿔이 제 갈 길 가는 사람들 위에 나직이
잘 뵈지 않게 떠서
혹 아는 이를 만나면 숙인 머리 더 숙이고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벗어나
가볍게 떠돌리.
느린, 늘인 걸음으로.
–「해마(海馬)」 전문
「해마」는 오랫동안 여행으로 산 시인의 체험이 짙게 배어들어 있는 시이다. “상상력은 졸아들면서 더 진해진다”는 그의 말처럼 긴 여행의 체험을 거쳐 노경에 이른 시인의 진한 상상력이 해마를 발견하여 감정이입을 하게 했을 것이다. “한세상 터벅터벅 걸어온 다리는/동그랗게 오므리고”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벗어나/가볍게 떠돌리”와 같은 시구는 시인의 길에 대한 깊은 사색을 보여준다. 그 사색의 한 가닥은 시인이란 어쩌면 멸종위기에 처한 해마처럼 갈 길 바쁜 사람들 보이지 않게 가볍게 떠도는 존재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황동규는 상상력을 중시하는 시인답게 가벼움을 미덕으로 여긴다. 시인치고 상상력의 중요성을 모르는 이는 없겠으되 그에 못지않게 시대정신을 중시하는 시인 또한 적지 않다. 하지만 황동규는 시대정신이나 역사의식의 중압을 거부하고 자유롭고 가볍게 상상의 날개를 펼쳐왔다. 그러한 시쓰기의 체험이 해마의 가벼운 유영에 동질감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이렇듯 황동규는 사회역사적 상상력의 거대담론보다는 개인의 내면을 드러내는 미세담론으로서의 시쓰기에 장기를 보여온 시인이고 「해마」도 그러한 예이다.
황동규가 가벼움을 미덕으로 여긴다고 해서 그의 시의 주제가 가볍다는 것은 아니다. 그가 1982년부터 1995년에 걸쳐 70편의 연작시로 「풍장」을 쓰면서 집요하게 죽음의 주제를 천착한 사실이 그 점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는 죽음조차도 가벼움으로 길들이려 한다. “나비나 하루살이 몸에/식물의 마음 심은 가벼운 것이 되어/떠돌리라”(「풍장 31」)와 같은 시구에는 그러한 시인의 자세가 드러난다. 「풍장」 연작시에서 형성된 ‘가볍게 떠돌기’는 중년에서 노년에 이르는 시인의 여행길의 자세로도 보이고 인생길의 자세로도 보인다.
최근에 나온 황동규의 시집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에는 「해마」처럼 노년에 이른 시인의 심경이 드러난 시가 적지 않다. “집보다는/길에서 가고 싶다”(「집보다는 길에서」)나 “시작이 반이면 끝도 반이 아니겠는가?”(「한 걸음 한 걸음 이리 얕아지니」)와 같은 시구에는 어떻게 생애를 마무리할까 생각하는 시인의 심경이 드러나 있다. 그의 생각은 끝까지 시쓰기의 길을 가겠다는 것인데 “끝도 반이 아니겠는가”라는 물음 뒤에 “실하고 깊은 자국 남기지는 못해도/퍼질러 엎드려 두 무릎 형상 남기진 않으리”라고 결의를 밝히고 있다.
4. 시인의 생애와 시쓰기
이육사나 윤동주처럼 굵고 짧게 사는 것이 시인답게 보이던 시절이 있었다. 워낙 질곡의 세월이다보니 오래 사는 게 오히려 굴욕으로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요절이 오히려 신비화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나이를 먹으면 주접이 붙는다고 말한 김수영의 경우도 요절은 아니지만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신비화된 측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요절이나 돌연사는 엄연히 시인에게 불행이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자신의 시세계를 좀더 넓고 깊게 발전시킬 기회를 상실했으므로.
아무래도 시인이 시다운 시를 쓰지 못하면서 오래 사는 것은 욕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오래 살다보면 여러가지 너절한 일을 치르거나 구차스러운 짓을 할 기회도 많아진다. 그런데 그것은 시인이 각자 자기 할 나름인 것이고 문제는 얼마나 제대로 살면서 지속적으로 좋은 시를 쓰느냐이다. 굵고 짧게 불꽃처럼 살다간 시인의 시세계도 소중하지만 그것은 청년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정진한 시인의 시세계만큼 다채롭거나 풍요롭기는 어려울 것이다.
신경림과 황동규는 청년시절에 활동을 시작하여 노년에 이르기까지 정진한 우리 시단의 대표적 시인들이다. 1950년대 후반에 등단하여 시력이 50년 가까운 오늘날도 수준급의 시를 계속 발표하고 있다. 젊은 시절 한때 좋은 시를 발표한 시인들은 많지만 청년부터 장년을 거쳐 노년에 이르기까지 수준급의 시를 통해 지속적으로 변모를 이룩한 시인은 드물다. 양과 질을 구비한 풍요로운 시세계를 이룩하고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소중한 시인들이라 하겠다.
앞에서 길을 중심에 놓고 그들이 풍요로운 시세계를 이룩하게 된 내막이나 이유를 살펴보았다. 기본적으로 그들에게 길은 시의 소재를 찾는 통로이다. 나아가 그들에게 길은 세상을 살피면서 세계로 편력하는 통로이면서 사색과 상상을 펼치는 통로이기도 하다. 신경림의 경우 전자에, 황동규의 경우 후자에 좀더 역점을 두지만 크게 보아 그것은 비중의 차이이다. 또한 그들에게 길은 삶의 의미를 찾고 자기를 들여다보는 통로이기도 하다. 즉 그들의 시세계에서 길은 단순한 기행시 차원을 넘어 훨씬 넓고 깊게 뻗어 있다.
길을 통로로 삼아 오랫동안 시를 써오다보니 그들에게 길은 ‘인생길’ 혹은 ‘시인의 길’의 의미를 띠기도 한다. 배낭 메고 다닌 떠돌이라는 신경림의 자기인식이나 해마처럼 가볍게 떠도는 존재라는 황동규의 자기인식은 각자 인생길 혹은 시인의 길을 걸어 노경에 이른 그들의 자화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사회적 책임을 중시하는 전자와 자유로운 상상력을 중시하는 후자의 차이가 드러나기는 하지만 그들의 자기인식은 떠도는 존재라는 점에서 의외로 닮은 데가 많다.
이상의 길의 의미로 보아 시인이 아예 길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또한 워낙 다양하게 뻗어가는 게 길이라서 여타의 시인들에게도 얼마든지 다른 방향과 위상의 길이 열려 있다고 하겠다. 길에 얼마만큼 비중을 두고 시세계를 개척하느냐는 각자 다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길이 단순히 기행시의 차원에 머물러서는 평면성을 탈피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길을 새로운 소재 찾기의 통로로만 알고 시를 양산해서는 의미있는 시세계를 이룩하기 힘들 것이다.
시인이 시를 쓰다보면 태작도 나오고 수작도 나오게 마련이다. 또한 절창만으로 풍요로운 시세계를 이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기검증 과정을 거쳐 태작을 얼마나 가려내는가는 각기 다르겠으되 아무래도 시세계의 구축에 기여하는 태작은 없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생애를 둔 시쓰기의 의미를 숙고할 필요가 있겠으니 얼마나 꾸준하게 시세계의 확충과 변모를 이루어내느냐가 문제이다. 오늘날 다작이 문제인 이유는 시세계의 확충과 변모에 기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