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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가족 안의 고통의 궤적들

이혜경론

 

 

이재영 李在榮

문학평론가. 2001년 「상실의 세계와 세계의 상실」로 제8회 창비신인평론상 당선. 현재 베를린자유대학 독문학과 박사과정. tugend21@yahoo.co.kr

 

 

 

“그대는 죽는 날까지○○○를 신랑(신부)로서 섬기고 사랑하겠는가?”–결혼식에서 “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얼마나 이 질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느냐에 상관없이, 이 질문은 우리 시대의 남녀관계를 지배적으로 조직하고 있다. 사랑의 대상을 향해 격정을 쏟아붓는 미혼자들에게 욕망의 지향점은 영원하고 배타적인 사랑이며, 이러한 사랑의 지극한 이상성은 결혼식이라는 정점을 거친 부부로 하여금 환멸과 좌절감이라는 하강곡선을 그릴 수밖에 없게 한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보장해줄 것으로 여겼던 관계의 안정성과 확실성은 그후에 도래한 불행 앞에 선 자에겐 지겨움과 속박으로 인식될 뿐이다. 행복에 대한 약속의 실현을 희망해도 좋으리라는 무구(無垢)한 믿음이 낳는 부정적 결과에 대해, 그러한 믿음을 조장했던 사회는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대신 불행의 당사자에 대한 처벌의 위협으로 대답한다. 그러한 입장에 처한 자에게 남는 것은, 불행 안에서의 사회적 인정과 불행 밖에서의 사회적 처벌이라는 두 가지 나쁜 선택뿐이다.

서구 종교개혁의 부산물로 도입된 앞의 결혼서약은 가본위(家本位)의 혼인개념이 당사자본위의 혼인개념으로 이행하는 과정에 의미있는 기여를 했으며, 인생을 크게 좌우하는 결혼이라는 결합관계에서 개인의 자율적 결정을 주요한 조건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진보성을 띠고 있다.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결혼이란 개인간의 사적 결합이 아니라 가족간의 공적 결합이었으며, 새로운 가족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기존 대가족에 새로운 인원을 충원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합리적 통제가 어려운 개인적 감정인 사랑은 결혼의 이유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개인적인 특징이 배우자의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도 않았다.

이후 근대사회에 접어들어 결혼서약이 일반화될 수 있었던 사회적 조건은 자본주의적 산업화에 따른 도시 핵가족의 형성이었으며, 이는 동시에 공적 영역이 비대화되는 가운데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각각 남성과 여성의 영역으로 분리되는 과정이었다. 남자는 바깥에서 돈을 벌고 여자는 집에 머물면서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게 되었고, 따라서 여성은 사회적으로 퇴화되면서 경제적으로 더욱 확고히 남성에 종속되게 되었다. 또한 공적 영역에서 위계와 경쟁, 훈육과 강제의 성격이 강화되면서 가정은 귀가한 남성에게 휴식과 안정, 억압된 욕망의 해소를 제공하는 기능을 떠맡게 되었다. 이에 따라 엄숙함과 강인함, 감정의 억제능력, 권력 지향성, 책임의식 등이 발달된 남성과, 자애로움, 조화지향성, 발달된 감성과 유순함을 지닌 현모양처형 여성이 규범적 인간으로 간주되어 이러한 성역할에 따르는 인격교육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나아가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이 분리된 상태에서 핵가족 내의 관계가 오직 배우자들 자신의 인격적 능력에만 맡겨짐으로써, 가족 내의 갈등이 쉽게 폭력과 증오로 치닫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영원하고 배타적인 저 낭만적 사랑은 산업화된 사회의 기초로 요구되던 이러한 새로운 가족관계에 일치하는 내면적 가치였으므로 지속적으로 교육되고 권장되어왔다.

 

이혜경(李惠敬)의 소설들은 그간 한국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이 짊어져야 했던 성역할로 인해 초래된 개인이나 가족의 파탄과 좌절, 고통과 절망에 대한 집요한 관찰과 사색의 결과들이다. 이혜경이 그려내는 인물들은 근현대 한국의 가부장적 가족관계가 낳아온 고통의 보편적 연관 속에 얽혀 있으며, 그들의 삶이 가족이라는 단위에서 일관되게 조망됨으로써 이혜경의 전체 작품은 통일적 골격을 형성한다.

이 고통의 보편사에서 남성과 여성 가운데 어느 쪽도 특권적인 위치를 부여받고 있지 않다. 이혜경의 소설들은 여성의 고통에 특권적 가치를 부여하고 고통의 책임을 남성에서 찾으며, 따라서 문제의 해결을 기존 남녀관계를 전복하는 데에서 구하려는 흐름과는 거리가 멀다. 이혜경의 인물들은 여성이건 남성이건 사회적으로 맡겨지는 성역할의 수행의무로 인해 왜곡되고 좌절하며 고통에 빠진다. 맡겨진 성역할을 수행하는 자에게도, 수행하지 못하는 자에게도 고통은 예외없이 찾아오며, 고통을 근저에서 규정하는 것은 개인의 의식지평을 넘어선 사회적 연관이다.

『길 위의 집』(민음사 1995)의 길중은 근대적 남성상을 충실하게 좇아온 인물이다. 무위도식하는 몰락한 향반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남성의 경제활동 의무를 경시하는 유교전통에 기생하던 전근대적 남성으로서, 길중에게는 반(反)모범으로 작용한다. 대장장이의 가내공업에서 자본주의적 공장을 이루기까지 40년을 버텨온 그의 삶은 근대적 남성 1세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엄격한 노동윤리와 금욕적 생활태도, 강력한 의지로 경제적 성취를 지향해온 그는 앞에서 서술한 근대적 남성의 조건들을 넉넉하게 충족시켜온 인물이다. 효기의 탄생에 대한 그의 한없는 기쁨과 집 짓는 일에 대한 그의 집요한 정성이 보여주듯이, 길중은 자신의 노동에 기초한 경제적 성과에 대한 자부심의 정점을 튼튼한 가부장적 가족의 확립에서 찾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가족 역시 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재산의 일부였으며, 따라서 아내와 자식들의 자율적 의지란 그의 사고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길중의 이러한 강력한 소유의식은 공적 영역에서는 성공을 안겨주었지만, 가족 안에서는 파탄을 중첩시킨다. 자신이 걸핏하면 구타해온 아내에게서 정서적 교류와 공감을 구할 길은 없어졌고, 권위적 태도로 억눌러온 자식들은 자신에 대한 적대적 의식으로 뭉쳐 있어 아무런 인격적 결속도 남아 있지 않다. 자신이 쌓아올린 경제적 성채를 존중하고 상속할 자식도 없다. 결국 소설의 끝에서 길중은 자신의 인생이 실패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길중이 이 좌절의 원인을 배움의 부족에서 찾는 데에는 비겁함이 숨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학력이나 집안 등의 상징적 가치를 지니지 못한 채 삶을 시작해야 했던 길중에게는 경제적 성과를 통한 사회적 인정만이 유일한 자기확인의 방법이었고, 따라서 경제적 성공이 그로 하여금 그만큼 더 도취의 매력에 빠지게 했으리라는 점을 고려하면 정당한 면이 있다.

길중이 한천이라는 소도시에서 소경영자로 살아온 반면, 「젖은 골짜기」의 화자는 대도시에서 회사원으로 살아왔다. 길중과 비슷하게 생활력이 없는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작중화자 ‘나’는 대학 졸업 후 소규모 회사의 상무직에까지 올랐던, 가장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온 사람이다. 그러나 이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십수년 동안 과로에 시달려야 했으며, 경쟁적 인간관계에서 중압감을 느껴 잠적욕망에 휩싸이기도 했다. 결국 그는 회사에서 밀려나게 되었고 그간의 가혹한 노동의 결과가 “겨우 집 한 칸과 얼마 안 든 저금통장”(『그 집 앞』, 민음사 1998, 210면)뿐이라는 사실에 허망함을 느낀다. 약육강식의 ‘밀림의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가장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남자들은 내면의 공황상태에 빠지고, 과로로 인해 때이른 죽음을 당한다. 지친 몸으로 귀가하는 남자들은 아내나 자식과 소통할 여력이 없으며, 행복을 목적으로 했던 노동의 댓가는 행복이 아니라 불행과 죽음이다. 일체의 기력을 쏟아부어 얻게 된, 얼마 안되는 재산과 지위는 결국 죽음에 이르는 병이 더 깊어졌음을 알리는 증상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추락을 향한 이 경주에서 이탈할 경우 닥치는 것은 더욱 급속한 추락일 뿐이라는 현실적 전망은 남자들로 하여금 강박적으로 이 무참한 경주에 매달리게 한다. 「어귀에서」의 현순에게 비친 남편과 수한은 뛰어야 뒤처지지 않는다는 안타까운 강박에 이끌려 살아온 점에서 닮은꼴이다. 그 가혹한 경주에서 무난히 이탈하여 전업주부로 되는 것이 허용된다는 점에서 현순은 오히려 더 나은 입장에 있는 것이다. 그 경주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경주의 규칙을 받아들이고 내면화해야 한다. 「내게 바다 같은 평화」의 작중화자 ‘나’는 경제적 이윤을 남기지 않는 일체의 가치와 행위들에 대해 냉담한 외면으로 맞설 수 있기 때문에 순조롭게 살아가고 있다. 장인적 자세로 기사를 쓰는 김명우를 배제하고자 하는 나의 태도는, 진정한 의미와 가치 대신 오로지 교환가치만이 지배하는 상품사회 안의 소통매체 역시 신속히 유통되고 소비되어야 하는 상품에 지나지 않게 된 상황에서 관철되는 적자생존의 원리를 체현하고 있다. 이러한 인물이 이타적 행위로 인해 죽어간 김동진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거나, 삶의 의미를 묻는 청년을 귀찮게 여기고, 그 청년이 또 한번의 이타적 행위로 죽었건 말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꽃그늘 아래』, 창작과비평사 2002, 232면)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경주의 원리를 성공적으로 내면화해냄으로써 ‘바다 같은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내게 바다 같은 평화」의 ‘나’와는 달리 인간적 덕성과 타인에 대한 배려, 진정한 가치의 추구 등을 자신 안에서 지워내지 못하는 남성들은 좌절하고 밀려난다. 이혜경의 등단작인 「우리들의 떨켜」에서의 아버지는 근대적 남성관이 요구하는 모습과는 정반대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왜소한 체격을 지닌 그는 감상적이고 소심하며 수줍어하고 선량하다. 몸과 마음이 모두 저 경주에서 처지거나 밀려날 수밖에 없는 조건을 지닌 이 아버지가 저지르는 결정적인 실수는 바로 “감상적”(『그 집 앞』 221면)이 되어 빚보증을 서준 데 있다. 타인의 입장에 대한 연민과 측은해하는 마음, 도덕적 책임감이 그의 삶을 좌절로 몰아간 것이다. 병자에게 빚을 갚으라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는 「떠나가는 배」의 길우 아버지 역시 무능한 삶을 살아간다. 「젖은 골짜기」의 ‘나’의 좌절은 「내게 바다 같은 평화」의 김명우의 좌절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생산하는 상품에 자신의 인격을 담으려 함으로써 상품경제에 부적합한 태도를 보인 데 원인이 있다. 「언덕 저편」의 고시원 원장이 빚쟁이들에게 시달리게 된 것도 마찬가지이다. 「멀어지는 집」의 아버지가 결국 자살하게 되는 것 역시 정직함이라는 덕성이 무능함과 불순함의 표징으로 이해되는 상황에 있었다. 「어귀에서」의 수한 아버지의 자살이나 「어스름녘」의 한내댁 사위의 죽음은 경제적 파산을 감내해내지 못한 가장들의 죽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혹독한 조건하에서 살아가는 것이 남자들의 삶이라 하더라도,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족 안에서 남편들은 아내에 대한 지배자로 군림한다. 부부관계에 중점이 주어진 이혜경의 작품들에서 남편의 사회적 성취도와 아내에 대한 폭력성은 대체로 비례관계에 있다. 입지전적 인물인 『길 위의 집』의 길중, 처세에 뛰어나던 「그늘바람꽃」의 소희의 남편, 명문대를 졸업하고 중앙일간지의 기자로 일하는 「봄날은 간다」의 종애의 남편 등 아내를 구타하는 남편들은 모두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었거나 거두어가는 중이다. 반면 경제적 능력이 부족하거나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남편들은 대개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지도, 권위적이지도 않다. 이는 내면적 억압과 가혹한 규율이 남자의 경제활동 조건이며, 그 결과 남편들이 집밖에서의 과도한 자기억압을 집안에서 해소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에 따라 아내들은 대개 경제적 능력이 있으나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남편과 살거나, 경제적 능력이 없으나 권위적이지도 폭력적이지도 않은 남편과 살게 되는데, 그 어느 쪽도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경제적 능력이 없는 남편을 둔 아내들은 자식이 커서 돈을 벌기까지 가족을 스스로 부양해야 되는데, 여성이 공적 영역에서 배제된 상태에서 행할 수 있는 경제활동이란 대개 수입이 적은 단순한 일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런 상황에 처한 가족들은 대부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돈이 되는 것이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고 하며 살아온 「떠나가는 배」의 길우 어머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길우 가족은 가난과 허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이혜경의 작품들을 통틀어 볼 때 두드러지는 특징은, 남편/아버지가 죽거나 자살하거나 가출을 했거나 하는 이유로 인해 남편/아버지가 없는 가족들이 빈번히 묘사된다는 것이다. 이혜경의 단편집 『그 집 앞』과 『꽃그늘 아래』에 수록된 단편들 가운데 대략 절반가량의 작품들에서 남편/아버지가 없는 가족이 등장한다. 일제시대로부터 한국전쟁을 거쳐 그후의 격변기에 이르기까지 남자들이 죽거나 가족을 떠나가는 일이 빈번했던 건 사실이지만, 이혜경 소설에서 남편/아버지 들은 별개의 설명 없는 단순한 사망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혜경이 이렇게 남편/아버지의 죽음이나 부재를 빈번히 설정하는 것은, 고통의 지점에서부터 세계를 조망하고자 하는 작가의 태도에 기인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너무 이른 시기에 닥쳐온 남편/아버지의 사망은 남은 가족들에게 혹독한 가난과 정신적 상흔을 안겨주고, 어머니나 장남은 가족의 부양을 위해 고난스런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어머니는 대개 자신을 가족의 중심에 놓고 새로운 안정적 질서를 구축하기보다는 장남이 가족의 중심에 서기까지 교량역할을 하는 것에 자신의 역할을 제한한다. 가부장적 질서는 여성 안에서도 이미 강력하게 내면화되어 있어, 가부장이 없는 가정에서 여성이 새로운 전망을 추구하거나, 적어도 딸이 그 질서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일이 생겨나지 않는다. 오히려 장남에 대한 어머니의 집착은 더욱 강화되며, 가부장적 질서의 회복에 더욱 절실하게 매달리게 된다. 남편을 잃은 후 재산을 불려놓은 「고갯마루」의 어머니는 장남에게 성장기부터 지나친 특권과 혜택을 부여함으로써 오히려 그의 현실적 능력의 발달을 저해하고, 결국 장남은 어머니가 쌓아온 재산을 다 탕진하고 결혼생활에도 실패하고 만다. 「검은 돛배」의 진양댁은 아버지를 알지도 못하고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오랜 세월을 살아왔으나, 어린시절 자신에게 이상적인 가족으로 부각된 진양조합장집의 아들을 만나 그를 가부장으로 구축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녀에게 가부장이 없는 오랜 삶은 그 자체로 새로운 삶의 양식으로 자리매김되지 못한 공백기간에 불과했고, 따라서 허상뿐인 남자에게 가부장의 허울을 덮어씌우기라도 해야 비로소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최후의 작업이 실패로 돌아간 후, 그녀에게는 오로지 삶이 어서 끝났으면 하는 바람 외엔 더이상 아무런 희망이 없게 되었다.

가부장적 질서에 매여 있는 여성에게 자식, 특히 남아는 가족을 위한 오랜 노동에 대한 보상을 보장하는 존재였다. 남편과의 관계에서 탈권적 위치에 있어야 했던 것과는 달리, 어머니에 대한 효도의 덕목이 작동하는 한, ‘울타리’로서의 자식은 여성에게 제한된 정도로라도 권력을 발휘하고 가족을 위해 바쳐야 했던 노동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어머니의 이런 권력발휘와 보상요구는 가부장적 질서 안에서 아들에게 귀속되는 존재인 며느리를 주로 향하게 된다. 아들을 매개로 하여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행사하는 권력과 통제는 가부장적 질서에 종속된 하위 권력관계로 유지되면서 가부장적 질서를 재생산하는 데 일조한다. 이러한 여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는 특히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동일한 사적 공간 안에 묶여 있는 경우 그 일상적 지속성으로 인해 며느리에게 가장 가혹한 고통을 안겨주게 된다. 한시도 벗어날 길 없는 시어머니의 냉대 앞에서도 착한 며느리의 외양을 유지하도록 강제받고 있는 「그 집 앞」의 주연은 문제가 해결될 전망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심한 무기력감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저 “한 삼십년쯤 지나 있었으면”(『그 집 앞』 44면)이라는 허망한 소원을 빌어볼 뿐이다. 「어스름녘」의 시어머니가 아들이 죽고 난 후 며느리에 대한 자신의 권력을 더 확고히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며느리에 대한 자신의 권위가 아들의 죽음 후에 약화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어머니의 경우, 가족을 위한 노동을 해온 바가 없기 때문에 며느리보다 우월한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다.

이혜경의 소설들에서 남편의 권위적인 태도나 폭력, 경제적 무능력, 부재, 그리고 시어머니의 지배 외에도 가족 안의 불행을 낳는 주요한 원인이 되는 것은 배우자에 대한 사랑이 소멸되거나,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일이다. 배우자의 선택에서 개인적 특성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되고, 결혼관계가 배우자의 이러한 개인적 특성에 대한 사랑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은 동시에 사랑의 대상에 대한 시선이 더욱 세분화되고 까다롭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개인성에 대한 의식이 발달할수록 사랑의 대상에서 기대되는 모든 특성을 한 사람이 갖추고 있는 경우는 드물어질 수밖에 없다. 영원하고 배타적인 낭만적 사랑에 대한 기대가 의미하는 것은 이렇게 세분화된 요구를 단 한사람의 인격이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충족시켜줄 것이라는 희망인데, 이런 희망의 실현가능성은 개인성에 대한 의식이 발전할수록 희박해질 수밖에 없다. 개인성의 발견은 낭만적 사랑에 대한 기대를 낳는 순간 이미 낭만적 사랑의 좌절을 자신의 원리 안에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것보다 이혼하는 것이 더 큰 좌절과 더 큰 도덕적 과오로 간주되는 한, 결혼은 불행을 안고 이어진다. 「그 집 앞」의 주연은 아름다운 일상을 꿈꾸며 시작한 결혼생활이 “마른 강”(『그 집 앞』 51면)으로 고갈되고, 남편에게서 결혼 전의 면모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결혼생활을 구원해보려는 기약없는 다짐을 한다. 「언덕 저편」은 자식을 둘 거느린 가장인 ‘나’와, 딸이 있는 가정주부 희배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당초부터 아내의 사랑에 보답하느라 결혼했던 ‘나’는 희배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서로 배우자와 자식이 있는 몸으로서 이중의 이혼을 하고 다시 결혼한다는 것은 이들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침묵뿐인 만남을 반복하던 중 결국 희배가 이사를 감으로써 이들은 헤어진다. 결혼과 사랑은 분리되었다. 「일식」의 영월에게 유부남을 사랑하는 것은 죄이지만, 사랑 없이 결혼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영월에게 결혼은 “일상의 엄연한 질서”(『꽃그늘 아래』 106면)에 대한 굴복선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영월이 그렇게 엄연한 것으로 믿고 굴복해들어간 질서는 영월의 남편과 그의 여비서 인다 사이에서는 별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인다가 영월의 결혼관계 자체를 위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랑 없는 결혼생활이 불행할 것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혜경의 소설은 가족을 둘러싼 이러한 내력을 작중화자의 자전적 회고를 통해 서술하는 가운데 슬픔과 절망의 서정을 체념이나 화해로 이끌어간다. 현재시점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그 자체로서 자족적인 의미를 구성한다기보다는 대개 과거의 사건들을 보고하게 하거나 자아와 세계에 대한 반성을 촉발시키는 계기로 작동한다. 「젖은 골짜기」나 「검은 돛배」와 같은 단편들은 이와 같은 현재시점의 간결함의 극단으로서, 완전히 회상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회상되는 사건들은 현란하거나 새롭기보다는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그런만큼 과거를 회상하는 시선의 성격과 회상의 현재적 효과에 큰 비중이 주어진다. 대체로 이혜경의 소설에서 과거의 사건과 현재 사이에는 단절이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과거는 비판과 아이러니를 통해 상대화하는 시선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현재의 고통을 향해 축적되어온 등질적 시간을 돌아보는 회한의 시선으로 조망된다. 그런만큼 체험하는 자아와 서술하는 자아 사이의 간격도 좁다.

이혜경의 소설 안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충격적이며 예외적인 공격성을 드러내는 한마디는 『길 위의 집』의 도입부에서 은용이 오빠들을 향해 “너, 너, 너. 조용히 해, 조용히 해, 이 개새끼들아!”(『길 위의 집』 15면)라고 내지르는 외침이다. 그전에 은용은 피로한 인생 끝에 정신을 놓고 누운 어머니를 세심한 배려로 간호하고 형제들의 술자리까지 준비해주었다. 이렇게 전통적 여성상을 잔잔하게 구현하던 은용이 형제들이 좀 시끄럽게 했다고 저렇게 외칠 때, 독자들의 관심은 이후의 이야기에서 이 거센 비난의 이유를 찾는 데로 쏠리게 된다. 또한 비난받는 사람들이 오빠들이므로 이 소설이 여성의 시각에 특권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여성주의의 시각에서 남성들을 비판하는 소설이라고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그후에 전개되는 과거의 복원이 제각각 나름의 설득력과 진정성을 지닌 각 인물들의 시점을 통해 이루어지고, 이런 입장들의 어쩔 수 없는 얽힘 속에서 한 가족의 비극이 빚어지는 복합적 양상이 제시됨으로써, 이 작품이 단선적인 의식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런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시각을 잃지 않고 여러 상이한 지점에 서 있는 인물들에게 적절한 언어와 세계를 부여해주고 있다는 데에 이혜경의 작품세계의 미덕이 있다. 은용의 저 외침은 그러므로 이혜경의 작품세계를 오해하게 할 수 있으며, 실은 작품에서 묘사된 은용의 성격에도 맞지 않다. 은용은 사회적 성취욕망이 없는, 가사에 제한된 정신세계 안에 머무르고 있는 인물이다. 결혼에 대한 은용의 관점도 매우 소박하고 전통적이다. 인기의 기억 속에서 은용이 옆집 아이를 돌로 맞춘 사건이 제시되기는 하지만, 30여년에 이르는 생애 속에서 단 한번 있었던 사건으로 저 외침을 설명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다. 이러한 그녀로 하여금 저 공격적인 발언을 하게 하는 특별한 동기도 작품 안에서 제시되는 바가 없다. 간간이 제시되는 그녀의 일탈욕망도 삶의 누추함에 대한 막연한 반응일 뿐, 특정한 방향성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그러므로 은용이라는 인물의 내면적 일관성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서는 그녀의 저 외침을 제한된 상황에 대한 순간적 격정의 분출로 이해해야 하는데, 그것이 놓인 두드러진 위치로 인해 저 외침이 전체 독서를 이끄는 관심을 낳는다는 점에서 부적절하다.

다면적인 시각을 통해 서로 다른 곳에 서 있는 각 입장들이 지니고 있는 나름의 고유한 정당성과 진정성을 이해하고 드러내려는 이혜경의 지향은 소설 대다수가 1인칭 서술상황을 선택하고 있고, 3인칭 인물의 서술상황을 선택한 경우에도 상당수가 실은 1인칭 서술상황과 다를 바가 없다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이런 서술상황 안에서 각 인물들이 복원하는 기억들은 사건의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서술이 아니라, 사건들에 대한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조망과 성찰을 추구한다. 여러 상이한 인물의 주관적인 기억과 성찰을 통해 세계와 자아를 조망하는 가운데 인간에 대한 다면적이고 폭넓은 공감적 이해를 획득하는 것이 이혜경 소설이 지향하는 바이다.

타자의 시선을 획득함으로써 인간적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이혜경의 지향은 여성작가로서는 두드러지게 자주 남성인물의 시점을 선택하고 있다는 데에서도 나타난다. 이혜경의 등단작인 「우리들의 떨켜」의 화자가 어린이이기는 하지만 남자아이라는 것은 이미 이러한 특징을 예고하는바, 「떠나가는 배」 「젖은 골짜기」 「내게 바다 같은 평화」 「언덕 저편」 등의 단편들과 장편 『길 위의 집』의 17개 장 가운데 10개의 장이 남성인물의 시점을 택하고 있다. 여성인물의 시점을 택한 경우에도 「가을빛」 「어귀에서」 「꽃그늘 아래」 「대낮에」와 같은 작품들에서 남성의 삶과 관점은 주요한 관심의 대상으로 되어 있다. 남성들이 짊어져야 하는 삶의 부담과 의무, 이로 인해 황폐해지는 내면세계 등이 이러한 작품들 안에서 인상적이고 설득력있게 제시된다.

타자의 시선을 획득하려는 지향의 뒷면은 나의 시선을 타자에게 알리려는 지향이다. 「그늘바람꽃」 「젖은 골짜기」 「언덕 저편」 「검은 돛배」 「봄날은 간다」 등의 작품에서 사용되고 있는 대화체 형식은 소통에 대한 이혜경의 지향과 의지를 잘 보여준다. 대화상대라는 기능만 수행할 뿐 사실상 대화상대가 아무런 고유한 작용도 하지 않는 「그늘바람꽃」이나 「젖은 골짜기」에서조차 대화체를 선택했다는 것은 소통에 대한 작가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데, 이는 현실 속에서 단절되어 있는 소통의 회복이 인간간의 소외상태를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하리라는 작가의 기대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인 아내와의 사이에서조차 소통이 단절된 지 오래된 「젖은 골짜기」의 ‘나’는 어떤 기차역 대합실에서 처음 만난 여자에게 자기 삶의 내력을 길게 털어놓은 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그 집 앞』 213면)라고 읊조린다.

타자의 시선을 획득하려는 노력은 「봄날은 간다」에서 지원이 어릴 적 서울에서 내려와 동네아이들과 어울리지 않던 오누이를 회상하면서 “어쩌면 우리 동네애들이 그애들을 끼워주지 않은 건지도 몰라”(『꽃그늘 아래』 140면)라고 생각하는 데서도 나타나는데, 이 작품에서는 이런 타자 시선의 획득을 통한 연대라는 기획이 무기력한 시도에 그칠 수도 있음이 드러난다. 지원은 아들 재명에게 “남이 뭐라고 하면 싸우지 말고 그 사람이 왜 그럴까 먼저 생각해보라고”(같은 책 151면) 가르쳤다. 이런 가르침을 따랐으나, 왕따를 당한 재명은 과민성대장증후군에 걸려 앓고 있다. 가부장제 아래서의 여성의 입장과 동형적인 이러한 재명의 고통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타자 시선의 이해라는 기획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기획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상호성이 관철되어야 하며, 이것이 가능하려면 이 기획에 위배되는 타자 내의 성질들이 비판되어야 하고, 그러한 성질들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과 싸움이 수행되어야 한다. 이런 비판과 싸움이 없이 한쪽에서만 발휘되는 이해의 덕성은 억압적 상황을 오히려 온존시키는 데 기여하며, 그 자체로서 이미 억압적이다. 이해의 덕성은 자애로움과 상냥함이라는 전통적 여성상에 가까운 만큼, 자칫하면 고통을 낳아온 기존의 성역할 구도에 그대로 함몰되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유 없이 맞게 되면 맞붙어서 싸우라고 가르쳐야”(같은 책 152면) 했다는 인식은 정당하다. 상대를 이해하고 감싸주고 싶은, 일종의 우월한 자의식에서 출발한 결혼생활에서 남편의 지속적인 구타로 “나는 벌레만도 못하구나”(같은 책 148면)라는 자각에 이르기까지 종애가 전혀 저항하지 못한 채 살아왔던 것도 타자의 이해라는 기획을 자기에게만 적용시킴으로써 실은 자신을 부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에 이어 여동생에게까지 기생하며 살아왔던, 그리고 지금은 빤한 허세로 자신의 좌절을 은폐하고 있는 오빠를 오래 이해하고 감싸준 「고갯마루」의 선애가 작품의 말미에서 오빠에게 하고 싶었던 “빨리 돌아가세요”(같은 책 90면)라는 말은 자신의 일방적인 이해와 배려가 실은 오빠의 기생성을 유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자각을 표현하고 있다. 선애가 오빠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은, 기생할 가족이 없으나 미안함을 표시할 줄 아는 명재가 그 반대꼴인 오빠보다 차라리 더 낫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늘바람꽃」의 소희는 타자의 시선이 극단적 자기부정을 낳게 된 파탄의 양상을 보여준다. 소희가 모성애에 사로잡혀 남편과 결혼하는 과정은 「봄날은 간다」의 종애의 결혼과정과 흡사하지만,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독립적 자아를 발전시킬 수 없었던 소희에게는 애당초 부정될 자아조차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더 심각하다. 자신을 구타하고 천대하던 남편이 죽고 난 후에도 남편의 눈으로만 자신을 보던 소희는 이후의 남자들에게도 노예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외면적인 매력을 인격적인 매력으로 채우지 못하고, 따라서 늘 버림받게 된다. 그런 소희를 인격으로서 사랑하고자 하는 장씨는 소희에게 불편한 존재일 뿐이다. 타자의 시선에 자아의 시선으로 대응하지 못할 때 타자의 지배는 자연질서처럼 영구화된다.

가부장적 규범을 내면화한 여성의 경우에도 고통은 벗어날 길 없는 자연질서로 인식되고, 따라서 대안도 없다. 잠을 자고 나면 세상이 싹 바뀌어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 집 앞」의 주연의 소망은 현실적인 출구가 없음을 보여준다. “이대로 실타래 풀리듯 풀려 형체도 없이 스러졌으면”(『그 집 앞』 80면) 하는 「어스름녘」의 한내댁의 넋두리도 고통의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을 표현하고 있다. 윤회사상에 기대어 다음 생에라도 희망을 걸어보고자 하는 여러 인물들의 시도도 이번의 한 생은 어쩔 수 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체념을 드러낸다. 한평생 참고 견디는 것만으로 일관한 『길 위의 집』의 윤씨가 수의를 짓던 날 결연하게 내뱉는 “난 치마 안 입어요. 죽어서라도 남자 옷 입고 가야 다음 세상에 남자로 태어나지”(『길 위의 집』 254면)라는 말이나, 「젖은 골짜기」의 화자가 윤회라도 믿지 않으면 “어찌 맨정신으로 살아나가겠어요”(『그 집 앞』 213면)라고 토로하는 것, 존재의 허망함 앞에서 오랜 절망감에 휩싸여 있던 「가을빛」의 화자가 죽어가는 아버지의 숨결이 자신의 자궁 안에 깃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등은 현세에서 행복과 충일한 의미를 구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우리들의 떨켜」에서 어머니가 빠져드는 종교나 「떠나가는 배」에서 미연을 에워싸는 종말론적 불안감, 이 작품에서 대현스님이 “오늘에 살리라/내일에 의지하지 말라/그날그날이 최선의 날이다”(같은 책 193면)라는 젊은 시절의 좌우명을 버리는 대신 취하게 된 종말론적 세계관들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감당해낼 수 없음을 보여준다.

사실상 이혜경의 인물들은 현실을 타개해나가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를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배우자나 자식과 결합되어 있는 인물들이 취하려고 하는 희망의 포즈는 대개 무기력하고 막연하고 불안하다. 「그 집 앞」의 주연은 “다시 한번, 다시 한번 살아내리라”(같은 책 77면)라고 다짐하지만, 이 다짐을 감당해낼 수 있는 삶의 경험이나 인식이 없기 때문에 이 다짐은 주연 자신에게도 절망적인 몸짓으로 인식된다. 이혜경의 소설에서 새로운 삶의 전망이 어느정도라도 예감되는 것은 대개 미혼자나 이혼자, 별거자 등의 경우에서이다. 그러나 이들의 경우에도 새로운 삶의 국면은 소설 속에서 형태를 얻지 못하고,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려는 순간 소설은 끝난다. 별거상태에 돌입한 「봄날은 간다」의 종애가 서 있는 지점, 남자하고 자버리고 싶은 욕구를 느끼면서 노래하기 시작한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의 미정이 서 있는 지점, 그리고 “이 개새끼들아!”(『길 위의 집』 15면)라고 소리쳐버린 은용이 서 있는 지점에 이어질 다음 지점들이 궁금하다. 한국 가족의 고단하고 고통스럽고 때로 참혹하기까지 한 여러 면면들을 타협없는 정직한 눈으로 관찰하고 그려낸 이혜경의 소설들은 존재하는 문제들에 대한 충실하고 소중한 기록들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러한 문제들이 곪아터지면서 새로운 양상들을 드러내고 있다. 이혼의 증가, 혼외관계의 급증, 새로운 성역할 관념의 확산, 여성의 활발한 사회적 진출 등이 기존의 가족구상의 변화를 요청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흐름들이 낳는 개인적 삶의 궤적들이 이혜경의 찬찬한 시선을 거쳐 어떤 문학적 결정들을 맺게 될지 사뭇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