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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자명성의 감옥

최근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에 부쳐

 

 

김명인 金明仁

문학평론가. 평론집 『희망의 문학』 『불을 찾아서』 등이 있음. critikim@chollian.net

 

 

 

1. 논쟁은 아무리 지독한 논쟁이라도 좋다

 

아직도 리얼리즘론이라니…… 짐작이지만 90년대 세대들이라면 이렇게 혀를 찰 만도 하다. 해방 전까지 갈 것도 없이 70년대부터만 해도 그후 30년 동안 리얼리즘을 둘러싼 논의는 우리 비평사의 단골손님이었다. 다만 7, 80년대의 리얼리즘 논의가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양상을 띠었다면, 90년대 이후의 리얼리즘 논의는 소극적이고 암중모색의 성격이 강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90년대 초반,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제를 둘러싼 리얼리즘론자들 내부의 추상수준 높은 논쟁이 썰물처럼 급격히 빠져나간 뒤, 중반 무렵부터는 일종의 리얼리즘 해소론이라고 할 만한 논의들이 고개들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경향은 일부 완고한 리얼리즘론자들의 꾸준한 단속과 경계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최근에는 이른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이라는 명제가 제출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굳이 평가를 하자면 90년대는 리얼리즘론이 여러모로 곤경에 빠져든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뭐니뭐니해도 리얼리즘론의 강점은 그것이 역사적·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체계와 관련된 강한 역사의식과 총체적 세계인식을 보유하고 있다는 데에 있는데, 90년대를 경과하면서 통시적 역사인식에서도 공시적 세계인식에서도 리얼리즘론은 돌아가 의지할 확실한 정처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리얼리즘론은 확실히 일종의 답답한 동어반복이 되고,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 꼴이 되어갔다. 리얼리즘의 가장 단순한 원리가 ‘현실 혹은 실제에 즉하는 것’이라면 90년대의 리얼리즘론은 그 현실과 실제에 즉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노릇인가를 뼈저리게 인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목하 또다시 ‘리얼리즘’이 출몰하고 있다.

임규찬(林奎燦)이 『창작과비평』 2001년 겨울호에 발표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둘러싼 세 꼭지점」이라는 글은 새로운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의 시작이 되었다. 2001년에 나온 세 비평가의 평론집, 즉 최원식(崔元植)의 『문학의 귀환』(창작과비평사), 윤지관(尹志寬)의 『놋쇠하늘 아래서』(창작과비평사), 황종연(黃鍾淵)의 『비루한 것의 카니발』(문학동네)에 대한 리뷰 형식의 이 글은 이 세 비평가들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에 관한 견해들에 대하여 자못 논쟁적이고 공격적이었다. 그는 윤지관에 대해서는 도구화된 당파성론에 매달리고, 자유주의와 모더니즘을 혼동하여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모더니즘까지도 부정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어 황종연에 대해서는 리얼리즘을 일개 반영론으로 격하시키고 있으며, 모더니즘에 의한 리얼리즘 흡수통합론을 주장하고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황종연의 90년대 작가들에 대한 독법을 문제삼고 있는데 황종연이 장정일(蔣正一)과 최인석(崔仁碩)을 ‘비루한 것에의 매혹’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묶은 것, 신경숙(申京淑)과 윤대녕(尹大寧)을 ‘내면의 탐구’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묶은 것을 사회성의 문제를 간과하고 스타일과 기법의 유사성에만 착목한 ‘모더니즘적’ 입장의 결과라고 비판했다. 최원식의 리얼리즘·모더니즘 회통론에 대해서도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이라는 대립물의 질적 차이를 무시한 일종의 중도통합론, 또는 버먼식의 포괄주의로 기울고 있다고 보았다.

이에 대하여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윤지관이었다. 그는 『창작과비평』 2002년 봄호에 기고한 「놋쇠하늘에 맞서는 몇가지 방법」에서 임규찬의 예의 ‘삼각형 그림’이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을 다시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환영하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리얼리즘의 심화를 통한 모더니즘의 통합’론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간다. 그는 나름대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우리 문학사에서 갖는 특수한 지위와 성격에 대한 통찰을 펼치면서, 백민석(白旻石)·장정일 등 90년대 소설계의 총아들에 대한 비판적 언급을 통해 한국 모더니즘문학에 대하여 ‘자기 안의 계급과 민족’을 발견함으로써 모더니즘적 한계를 넘어 리얼리즘으로 나아갈 것을 주문하고 있다.

그 뒤를 황종연이 이음으로써 논쟁은 한층 제 꼴을 갖추게 된다. 황종연이 『창작과비평』 2002년 여름호에 기고한 「모더니즘에 대한 오해에 맞서서」는 리얼리즘·모더니즘의 이분법적 대립 자체가 “차이의 통제에 의존하는 동일성 구축의 논리”를 지니고 있으며, 사실상 둘 사이의 경계가 칼로 베듯 확연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차이를 먼저 확실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전제하고 임규찬·윤지관 등을 상대로 한 본격적인 논전을 전개한다. 그에 의하면 임규찬과 윤지관 등 리얼리즘론자들이 펼치는 논리는 기본적으로 “루카치의 판례를 좇는 리얼리즘의 법정”이며, 임규찬과 윤지관, 나아가 최원식과 백낙청(白樂晴) 등은 “모더니즘의 업적을 리얼리즘의 이념으로 흡수하여 리얼리즘의 경계를 넓히는 일종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도모할 뿐이다. 이어서 그는 마샬 버먼(Marshall Berman)에 기대어 “액체 근대에 적응·저항하는 방법으로서의 모더니즘”을 말하고, ‘고체 근대’에 속박된 윤지관 등을 비판한다. 다만 그가 끝부분에서 90년대 문학의 나르씨시즘을 비판하고, 개인을 넘어서 개인 사이의 제휴를 독려함으로써 ‘리얼리즘’과의 소통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전의 논쟁들이 주로 ‘리얼리즘론 진영’ 내에서 이루어졌던 것에 비하면, 이 일련의 논쟁은 각자 공공연히 리얼리즘론자, 모더니즘론자로 자처하는 비평가들 사이에서 전개됨으로써 본격적인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의 이름에 값한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그 점에서 논쟁에 과감히 뛰어든 황종연의 자세는 높이 평가받아 마땅한 것이다. 이 논쟁이 지니는 또 하나의 의의는 그것이 이전의 논쟁들과는 다르게 담론논쟁으로 일관되지 않고 90년대에 산출된 구체적인 작품을 매개로 하는 해석논쟁의 형식을 띰으로써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이 현단계 한국문학의 실상과 함께 나아가는 바람직한 양상을 낳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양상이 잘 발전하면 마치 70년대가 그랬듯이 작품이 이론을 산출하거나 통어(統御)하는 ‘생산적 전환’도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정의 관례는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여라”지만 적어도 문학비평계에서는 그 반대가 옳다. 흥정은 말리고 싸움은 붙여야 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논쟁은 없이 모양만 바꾼 온갖 흥정들이 횡행하던 우리 평단에는 싸움다운 싸움이 정말 아쉽다. 아직은 관찰자적 위치에 있는 나의 이 글이 벌어진 싸움을 더 키우는 데 얼마나 기여를 하게 될지 모르지만 오랜만에 흥미로운 논쟁을 목도하는 내겐 옅은 흥분이 인다. “논쟁은 아무리 지독한 논쟁이라도 좋다. 제발 순조롭지만 말아다오.” 이것이 이 논쟁을 바라보는 솔직한 내 심정이다.

 

 

2. 리얼리즘, 모더니즘, 그리고 그 이항대립을 넘어서

 

임규찬의 ‘선언’과 ‘사고’ 사이에는 일정한 모순이 존재한다는 황종연의 지적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가 윤지관의 ‘경직성’을 비판하고, 체계가 아닌 작품에 주목해야 한다고 할 때는 “리얼리즘론을 근원에서부터 재구축”하는 길로 나선 것처럼 보이는 반면, 황종연과 작품해석을 다툴 때는 틀림없는 루카치주의자로 나타난다. 과연 그가 말하는 ‘리얼리즘론의 근원적 재구축’ 프로그램에 모더니즘 계열의 작가나 작품들에 대한 ‘루카치주의적 편견’에 대한 재검토는 포함되지 않는 것일까? 일종의 악순환이다. 하나의 글 안에서 “리얼리즘을 근본에서 지지하는 입장”이라는 진술과 그러면서도 “리얼리즘론을 근원에서부터 재구축”해야 한다는 입장이 이런 식으로 순환하면서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다.

윤지관의 경우는 이런 식의 착종이나 충돌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그의 경우 리얼리즘에 대한 신념은 거의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신념은 그가 맞닥뜨리는 모든 문제를 리얼리즘이라는 체계 속으로 환원시키며 리얼리즘의 절대적 지위를 고수하게 만든다.

 

80년대의 일부 문학에서 ‘도식성’과 ‘교조성’이 보인다면 그것은 리얼리즘이 충분히 실현되지 못한 폐해일 뿐이지 그것 자체가 리얼리즘의 쇠퇴를 증거하지는 않는다. 작품에서 드러나는 리얼리즘의 빈곤은 누가 뭐라고 하기 전에 바로 리얼리즘의 기준에서 비판받을 일이며, 다름아닌 루카치가 누누이 역설한 바도 리얼리즘에 미치지 못하는 이같은 ‘자연주의적’ 작품은 리얼리즘보다는 오히려 파편으로서의 세계상이라는 모더니즘의 관점과 맺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90년대 문학에서 거론된 리얼리즘의 쇠퇴란 리얼리즘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라기보다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용법, 즉 어느정도 진영적인 구분이 동반된 속화된 이해에 바탕한 것이다. (윤지관 「놋쇠하늘에 맞서는 몇가지 방법」, 『창작과비평』 2002년 봄호 258면)

 

전혀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전부 맞는 말이라고도 할 수 없다. 80년대 일부 문학의 ‘도식성’과 ‘교조성’이 리얼리즘의 불충분한 실현 때문이라는 진술은 일정하게 수긍할 수 있지만, “리얼리즘의 빈곤은 리얼리즘의 기준에서 비판받을 일”이라는 진술에서는 거의 종교적 맹신에 가까운 숨막히는 자기동일성에의 집착 같은 것이 느껴진다. 만일 리얼리즘의 기준에 어떤 문제가 있다면, 그 리얼리즘이 ‘빈곤’하다는 것은 어떻게 판명될 수 있는가를 나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임규찬과 윤지관의 텍스트 속에서 ‘리얼리즘’은 일종의 자명한 어떤 것으로 존재하고 있다. 자명한 것으로 여겨져온 온갖 것들이 그 기원을 드러내고, 또 회의되고 비판되는 인식론적 전복의 시대에 그들은 왜 이 자명성에 관해 회의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황종연의 경우라고 사정이 나을 것은 없다. 처음엔 리얼리즘·모더니즘 이분법을 수상쩍은 이데올로기 구조라고 문제삼던 그도 정작 논의를 전개해나가면서 임규찬·윤지관·백낙청 등 리얼리즘론자인 타자들과 충돌하기 시작하자 상투형의 한 모더니즘론자로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에 대한 기왕의 고정관념에서 한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는 “장정일·김영하·백민석 같은 모더니스트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 경우 그는 해당작가들의 모더니즘적 한계에 대한 윤지관의 상투적 비판을 고스란히 불러들이는 꼴이 된다. 그들을 모더니스트들이라고 규정하는 근거를 탐색하지 않는 한, 그리하여 모더니즘이 과연 무엇이고 무엇이었던가를 다시 묻지 않는 한, 그 ‘모더니즘’에 대한 루카치적 비판을 재비판하는 것 역시 ‘그 밥에 그 나물’ 격으로 기왕의 리얼리즘·모더니즘의 이항대립이라는 상설무대를 조금도 못 벗어나 타자의존적 담론을 재생산하는 수준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맑스가 처음 말하고, 버먼이 영토화하고, 황종연이 다시 전유하고 있는 ‘단단한 것은 모두 녹아 날아간다’라는 말을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라는 선험적 소여(所與)같이 ‘자명한’ 것처럼 보이는, 그러나 사실은 ‘역사적인’ 것에 불과한 개념들에는 왜 적용하지 않는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에 관한 한 우리는 이 ‘자명성의 감옥’을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할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무슨 새로운 얘기를 할 처지는 아니다. 나로서도 아직은 이 골머리 아픈 문제에 대해 내가 썼던 「리얼리즘·모더니즘, 민족문학·민족문학론」(『창작과비평』 1998년 겨울호)의 기본적 문제의식을 다시 환기하고 이를 조금 더 보충하는 것 이상의 사유를 진전시킬 자신은 없다. 4년 전의 그 글에서 나는 지금 임규찬·윤지관·황종연을 두고도 그런 것처럼, 당시 리얼리즘에 관한 입론을 폈던 진정석·김명환·윤지관·방민호 등의 경우도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나아가 문학 자체에 대한 역사적 파악”을 결하고 있다고 평한 바 있다. 즉 리얼리즘이건 모더니즘이건 하나의 역사적 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발자끄(H. de Balzac)·스땅달(Stendhal) 등에 의해 꽃피워진 고전적 리얼리즘이 1830년에서 1848년에 이르는 프랑스 혁명기의 특수한 산물이라는 것, 엥겔스가 이 문예사조로서의 리얼리즘을 이념이자 방법으로서의 리얼리즘으로 전화시켰다는 것, 전자 즉 19세기 리얼리즘이 객관세계의 ‘사실(寫實)적 재현’을 핵심으로 한다면, 후자 즉 엥겔스 이후 20세기의 리얼리즘은 객관세계의 ‘법칙적 재현’을 핵심으로 하고 있으며, 그 법칙적 재현의 난관이 오늘날 리얼리즘의 위기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는 것, 한편 플로베르(G. Flaubert) 이후 서구문학의 비엥겔스적 행로는 ‘있는 그대로’의 불가능성과의 고투과정, 즉 그대로의 ‘사실(寫實)’이 아니라 그 사실의 방법, 즉 변화무쌍하고 물신화된 현실을 파악하는 미학적 매개를 확보하는 지난한 탐색의 과정이거나 “환멸의 부르주아 세계 전체에 대립하는 미의 왕국을 세우는 길” 즉 이른바 ‘협의의 모더니즘’의 행로였다는 것, 그리하여 소외와 물신숭배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가 하나의 거대한 체계로 대두하면서 작가들은 이 현실과 대결하고자 하는 쪽과 현실 저편의 미적 피안으로 뛰어 건너가고자 하는 쪽으로 나뉘었고, 후자는 다시 엥겔스적 리얼리즘의 원칙을 견지하고자 하는 쪽과 다양한 미학적 가공을 모색하는 쪽으로 나뉘었다는 것, 그리고 헤겔·맑스·엥겔스적 원칙을 견지하는 쪽이 리얼리즘으로, 나머지가 대체로 뭉뚱그려져 모더니즘으로 분류되어 왔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분화는 리얼리즘의 러시아적 변용이랄 수 있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배타적인 당파성 미학과 일체의 모더니즘을 퇴영적이고 불건강한 것으로 보는 루카치적 편향에 의해 그 적대성이 실상 이상으로 과장되어왔다는 것, 결론적으로 이러한 리얼리즘·모더니즘의 이항대립이 존재하는 한, 근대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원래 같은 이념적 고향을 갖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원시반본(原始返本)적 재통합을 통해 근대극복의 미학적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 각각의 역사 속에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형성시켜온 나름의 신화와 관습을 깨고 그 과정에서 진정한 인간해방을 담지해나갈 새로운 미학적 기준, 혹은 미학이념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 이는 리얼리즘의 편에서 보면 역사적·변증법적 유물론에 기초한 낡고 고식적인 미학적 강령들을 해체하는 것이며, 모더니즘의 편에서 보면 단자화와 파편화를 극복하여 ‘전체’로서의 현실을 중심에 두는 사고를 시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 등이 당시의 나의 주된 논지였다. (『창작과비평』 1998년 겨울호 253~57면 참조)

이 새로운 미학이념을 무어라 부를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황종연과 임규찬/윤지관이 서로 비난하듯 ‘리얼리즘에 의한 모더니즘의 흡수합병론’이나, ‘버먼식의 (모더니즘에 의한 리얼리즘의) 흡수통합론’ 등 위장된 리얼리즘이나 위장된 모더니즘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실제로 이러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이항대립적 경계를 넘어선 제3의 어떤 것은 뛰어난 작가들의 나날의 작품적 실천 속에서 수시로 산출돼왔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황종연이 언급했던 대로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율리씨즈』(Ulysses)는 통상적 분류로는 모더니즘 작품이지만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과 프랑꼬 모레띠(Franco Moretti)에 의해 ‘탈사물화의 대표작’ ‘근대의 사회적 총체성을 장악한 작품’ 등으로 평가된다. 덧붙이자면 나는 카프카(F. Kafka)를 토마스 만(Thomas Mann)에 견주어 모더니스트라고 폄훼하는 루카치(G. Lukács)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그 점에서는 윤지관도 비슷한 처지인 모양인데 제임스 조이스와 도스또예프스끼(F.M. Dostoevskii), 이상(李箱)과 김수영(金洙暎)에서 아일랜드와 러시아와 우리의 ‘민족’을 읽어낸다거나 하는 것, 그리고 “도대체 어떤 작가가 리얼리스트이고 어떤 작가가 모더니스트인가라는 기본적인 갈래에서부터 확실한 정답이 없으니”라고 하는 탄식어린 토로에서는 그 고집 센 리얼리즘 환원론자 혹은 리얼리즘 일원론자에게도 리얼리즘·모더니즘 이분법이 때로는 곤혹스러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알 수 있다.

리얼리즘이건 모더니즘이건 이제 ‘리얼리즘’ ‘모더니즘’으로 한정되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그것들은 이제 하나의 문화사적 산물로, ‘역사’의 한 부분으로 자리매김되어야 한다. 최원식이 말한 대로 “서구에서 상륙한 이래 이땅에서 벌어진 긴 이데올로기 투쟁과정에 얽히고 설킨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은 제아무리 갈고 닦아도 구원의 가망이 없는 용어들”(최원식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 『문학의 귀환』, 창작과비평사 2001, 56면)이라면 그것들을 역사적 한정 속에서는 사용하되 이제부터의 문학을 말하는 데에는 사용하지 않는 것은 어떤가 하는 게 나의 제안이다. 임규찬·윤지관·황종연 세 사람의 논쟁들은 각각의 논지가 지닌 나름의 합리적 핵심들에도 불구하고, 또 그 합리적 핵심들을 중심으로 한 소통가능성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자명한 것’으로 선험화된 ‘리얼리즘’ ‘모더니즘’, 그리고 그 오랜 상호의존적 이항대립은 그 소통을 방해하고 소모적 논쟁을 부채질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이 낡고 거추장스러운 개념들의 주박으로부터 좀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는가.

 

 

3. 작품의 실상에 기대어---장정일과 최인석의 경우

 

이 논쟁적인 세 편의 글은 비록 이처럼 리얼리즘·모더니즘 이항대립의 오랜 관습과 주박을 못 벗어나고 있다는 문제점들은 있지만 그 안에 많은 흥미로운 논의거리들을 담고 있다. 이를테면 프레드릭 제임슨의 ‘리얼리즘 재발견’이 한국을 비롯한 제3세계적 현실에서 어느 정도의 유효성을 가질 수 있는가, 그 경우의 ‘리얼리즘’은 전통적인 리얼리즘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 것인가 하는 점이라든가, 마샬 버먼의 ‘새로운 모더니즘’은 ‘리얼리즘’의 새 버전인가 아니면 ‘모더니즘’의 새 버전인가 하는 점 등은 그 자체로 많은 흥미롭고 의미있는 논의들을 산출할 수 있는 의제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논의는 ‘판단정지’ 상태로 두고 후일 다시 기회를 도모하기로 한다.

대신 앞에서도 말했듯 나는 이 논쟁이 추상적 담론논쟁이 아니라 90년대에 산출된 작품들을 매개로 한 해석논쟁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이 논자들이 거론하고 있는 작가와 작품들에 대한 이들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리얼리즘’도 ‘모더니즘’도 아닌 새로운 미학이념의 형성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타진해보고자 한다. 이는 최원식이 말한  ‘구체적인 또는 단독적인 작품’으로의 귀환, 또는 “비평담론 안에 갇힌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을 창작측으로 방(放)하”(최원식, 같은 글 58면)는 일에 해당한다. 나는 이 과정에서 가급적 ‘리얼리즘’ ‘모더니즘’과 관련된 기존의 낯익은 척도들을 작품에 손쉽게 적용하지 않으려 한다. 이것은 저울 없이 무게를 재겠다는 것처럼 무모한 일에 가까운 것이고 오히려 혼돈을 배가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일이다. 하지만 어떤 척도도 믿음직하지 않게 된 지금, 잘못된 저울을 들이대서 무거운 것을 가볍다 하고, 가벼운 것을 무겁다 하는 것보다 손으로 직접 대상을 들어보아 ‘이건 무겁고, 저건 가볍군!’ 하는 ‘소박한 경험주의적 실감’에 의존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이 논쟁 과정에서 주요하게 거론된 90년대 작가들은 신경숙·윤대녕·장정일·최인석·백민석 등인데 여기서는 일단 장정일과 최인석에 대해서만 살펴볼 생각이다. 그나마 거론된 이들의 작품들에 관해 전부 논의할 수도 없고 이 작가들에 대한 이 논쟁자들의 견해와 내 견해를 간략하게나마 대비시켜보는 정도에 그치겠지만 그 정도라도 하나의 ‘연습’으로서 의미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황종연은 「비루한 것의 카니발」(『문학동네』 1999년 겨울호)이라는 글에서 장정일과 최인석의 작품세계가 “스타일에서나 주제에서나 대극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판이하지만” “비루한 것에의 매혹”을 공유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비루하게 만들기는 그들 소설의 모든 반문화적 충동이 집약되어 있는 심리기제”로서 장정일에게서는 ‘카니발화’의 기능을 하고, 최인석에게서는 ‘현존하는 세계에 대한 총체적 거절’을 표현하는데 이는 “정치적으로나 이념적으로 빈곤한 의식에게 유일하게 가능한 저항의 책략”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러한 ‘비루하게 만들기’가 기성문화에 대한 대안은 될 수 없지만 개인 자신에게 진실한 삶을 살려는 ‘진정성의 파토스’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는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억압의 기제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에 대항할 능력의 도덕적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임규찬은 앞서의 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둘러싼 세 꼭지점」에서 이러한 황종연의 장정일·최인석 해석에 이의를 제기한다. “광기와 같은 정신병리학”을 인간본질의 왜곡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피방법으로 제시하는, 그리하여 “인간본질의 왜곡이 존재의 정상적인 상태처럼 되고 만” 장정일의 소설과, 기이함을 지니되 그것이 “사회적 모순이 집약된 특별한 사회, 이를테면 감옥·수용소·매음굴·공사장·고아원·군대 등이 알레고리적으로 상징화하는 사회구조적 왜곡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는 최인석의 소설 사이의 문학적 거리는 황종연식으로 ‘진정성’이라는 주관적 기준으로 한데 묶기에는 너무 멀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에 대해 황종연은 두 작가의 ‘근원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리얼리즘 계열과 모더니즘 계열로 분류되는 경향이 다른 소설을, 그러한 분류의 경계를 넘어 읽고 있다는 것”을 임규찬이 간과하거나 무시하고 있다고 반론을 펴고 있다. 흥미로운 쟁점이 아닐 수 없다. ‘비루한 것에의 매혹’과 ‘진정성’을 축으로 두 작가의 공통성에 주목하는가 아니면 ‘사회성’(?)을 축으로 두 작가의 차이를 강조하는가? 여기엔 분명히 해묵은 ‘리얼리즘·모더니즘’ 이항대립 담론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나는 장정일의 소설에서 ‘병리적인 것에 대한 강박’을 읽는 것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미학사 1992)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미학사 1994) 『내게 거짓말을 해봐』(김영사 1996) 그리고 『보트하우스』(산정 1999)에 이르는 그의 일련의 작품들에는 겉보기에 참으로 기괴하고 병적인 인간군상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그 인물들은 대체로 작가의 ‘멀쩡한’ 윤리의식에 의해 나름대로 조종되고 여과되고 있다. ‘병리적인 소설’이 ‘병리적인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이 아니라 ‘병리적인 세계관’이 지배하는 소설이라고 할 때(물론 무엇을 ‘병리적’이라고 하는가 하는 것도 섣불리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장정일의 소설들은 ‘병리적인 것에 대한 강박’의 소산은 아니다. 아버지(들)로부터의 탈출, 사실은 지옥에 불과한 ‘가짜 낙원’으로서의 반복되는 일상에 대한 거부 등 그의 소설을 이루는 주제의식들은 그가 타이프라이터와 턴테이블과 뭉크 화집만 지닐 수 있고(『아담이 눈뜰 때』), 얼음을 재운 콜라 한잔만 있으면(『보트 하우스』) 행복한, 한 사람의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쁘띠 부르주아 작가에 불과하다는 사실과 함께 어떻게 보면 진부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

황종연에 의해 ‘세계의 카니발화’라고 불리고 임규찬에 의해 ‘병리적인 것에 대한 강박’으로 불린 장정일의 그로테스크 취향이란 것은 그러니까 일종의 가면쓰기 놀이 같은 것이지 ‘광기’의 수준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작가 자신이 미치지 않는 한, 진정한 광기는 불가능한 것인데 내가 보기에 이 작가는 미치지는 않았다. 장정일 소설에 나오는 수많은 인생유전들---배우가 된 섬유공장 노동자, 그 배우의 수행비서가 되는 전직 은행원인 소설가, 타이프라이터가 된 여사무원, 마약밀매조직원이 된 은행원, 전당포주인의 노예가 되는 여대생, 싸도마조히즘계의 세계적 거물이 된 ‘와이’---의 변화하는 정체성은, 그 그로테스크화의 정도만큼 가상의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은 그러한 인생유전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으며, 그 변화의 가능성이 희박한 만큼 그 변신은 그로테스크해지기 때문이다. 작가 자신은 ‘인생은 유전한다’고 여러번 강조해서 말하고 있지만, 나는 그 진술을 무한히 반복하는 세계, 즉 지옥 같은 세계의 악무한성을 넘어서고자 하는 작가의 해체적 열망이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획득한 반어적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카프카의 「변신」(Der Verwandlung) 이래, 그로테스크는 차라리 상투적인 미학적 장치가 되어버렸다. 그 정도가 조금 심하면 엽기가 되지만, 요즘엔 엽기성도 주요한 상품미학의 목록에 올라버리지 않았는가. 그러니 장정일의 그로테스크의 미학에 지나치게 과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것은 임규찬에게나 황종연에게나 똑같이 해주고 싶은 말이다. 그게 그다지 ‘병리’가 못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다지 ‘위반과 전복’도 되지 못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떠들썩했던 화제작 『내게 거짓말을 해봐』조차도 ‘병리’가 되기에는 너무 윤리적이고, ‘위반과 전복’이 되기에는 너무 소심한 작품이다. 왜 그런가.

소설이란 것 자체가 본질적으로 일종의 씨뮬레이션이지만, 장정일의 소설들은 너무 뻔히 보이는 씨뮬레이션이기 때문이다. 즉 이제부터 씨뮬레이션을 시작한다고 요란하게 광고를 하고 시작하는 씨뮬레이션이라는 것이다. 언젠가 나는 장정일을 ‘보론(補論) 체질’의 작가라고 지칭한 적이 있는데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메타소설 취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튼 그는 ‘이게 거짓말’이라고 너무 여러 곳에서 밝힘으로써 독자들이 소설에 몰입하는 것을 강제로 방해한다. 황종연은 장정일의 이러한 카니발레스크의 뒤안에 ‘진정성에 대한 소망’이 가로놓여 있음을 말했지만 그러한 진정성의 표백은 장정일의 경우 서사구조의 안쪽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즉 전지(全知)적 또는 보론적 개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설사 어쩌다가 주요 서사구조 내에서 그 표백이 이루어지더라도 그것은 곧 서사적 견고성을 잃고 붕괴되어 한갓 희화가 되어버리기 일쑤이다.

장정일이 지닌 가장 큰 문제는 세계에 대한 딜레땅띠슴적 태도이다.

 

분명 모든 인생은 유전한다. 하지만 모든 유전에는 필연성이 있고 그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생은 유전하지만 그들이 세계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엔 본질적인 변화가 없다. 그것이 좁게 말하면 이른바 존재의 계급성이며 역사성이고, 크게 말하면 헤어나올 수 없는 운명이다. 인간은 어느날 갑자기 우연한 계기로 이 운명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건 투쟁 끝에 그 속박을 이겨낸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이러한 인식이 들어설 깊이가 없다. (김명인 「진정한 감동은 어디에 있는가」, 『불을 찾아서』, 소명출판 2000, 77면)

 

장정일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 대한 평문으로 90년대 초반 무렵 격앙의 흔적이 묻어 있기는 하지만 내겐 지금도 이 생각은 유효하다. 장정일의 ‘비루한 영웅들’은 나름대로 세상과 맞서 싸우지만 그 싸움은 대단히 불성실하다. 장정일 소설의 서사구조 안에서는 세상을 넘어설 아무런 해결책도 전망도 없음은 물론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방법도 끝장을 보는 투쟁도 없다. 단지 서사구조 밖에서의 사실은 기만적인 메타픽션적 관조와 진부한 해설과 투정어린 ‘진정성’이 있을 뿐이다. 장정일의 소설이 소설 이전인지 아니면 소설 이후인지 잘라 말하지는 않겠지만, ‘진짜 씨뮬레이션’으로서의 소설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최인석의 90년대 작품들을 읽을 때마다 왠지 최서해(崔曙海)를 비롯한 1920년대 중반의 ‘신경향파’ 작가들의 작품들을 다시 읽는 기분이 든다. 황종연이 최인석의 문학에 “야수의 세계, 원한의 문학”이라 이름붙인 것이나, 임규찬이 최인석의 문학에서 ‘사회구조적 왜곡’을 읽어낸 것도 나의 이런 생각과 멀지는 않다고 생각된다. 폭력과 야만과 착취로 가득한 세계, 가장 열악한 조건 속에서 그것과 대결해야만 하는 고립된 개별자, 따라서 단말마적 비명의 형태로서밖에는 표현될 수 없는 저항 등, 확실히 최인석의 소설들은 신경향파 소설들과 유사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것이 사실상 결정적인 차이일 것이다) 신경향파 소설들을 관류하는 것이 어떤 ‘상승의 감각’이라면 최인석 소설들을 관류하는 것은 ‘하강의 감각’이라는 것이다. 즉 신경향파 소설들의 살인·방화 등의 단말마적 저항은 그 개별자적 주체의 생의 의지를 상승시키며 조만간 일어날 더욱 근본적인 삶과 세계의 변혁과 잇닿아 있지만, 최인석 소설 속 개별자들의 저항은 미래와 연결되지 않은 허무와 절망을 확인하는 것에 가깝다.

최인석에게는 그만큼 80년대와 90년대를 가르는 단층은 깊었고 90년대의 환멸은 도저했던 것으로 보인다. 황종연이 최인석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들인 주변적 인물들을 두고 “전통적으로 정치적 급진주의를 촉진시킨 인간유형”이며 “70년대와 80년대 문학을 풍미한 민중이라는 이름의 인간집단과 대체로 부합되는 사회적 신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마침내 “원한에 사무친 최인석의 비루한 영웅들 속에서 우리는 어쩌면 80년대 민중주의의 몰락 이후 어떤 신화적 후광도, 정치적 권력도, 도덕적 위엄도 갖지 못한 대다수 익명의 사람들 내면의 비참한 광경 하나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을 때, 그는 최인석의 90년대 이후 작품들을 지배하는 절망과 환멸의 원인과 그 깊이를 제대로 파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최인석 소설의 ‘원한에 사무친 비루한 영웅들’은 절망이 만든 인간들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환멸의 감각 속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장정일 소설의 ‘반항하는 비루한 영웅들’에 비해 훨씬 더 절박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서사구조의 안쪽에서 자기를 소진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궁극적으로 실현하고 입증한다는 점에서 장정일의 꼭두각시 같은 인물들보다 훨씬 ‘그럴듯하다’. 하지만 이것이 최인석 소설이 장정일 소설에 비해 더 우월하다거나 더 ‘현실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절망적 자기부정의 형식으로밖에는 자기존재를 입증할 수 없는 이 극단적 아이러니는 소설적 서사의 극한을 보여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절망적 자기부정의 형식으로 입증하는 자기 존재에 아무런 ‘긍정’이 없다면 그것은 아이러니의 실현이 아니라 그것조차 부정하는 것이 된다.

최인석 소설의 시공간적 배경은 대단히 구체적이다. 시기 추정도 가능하고 감옥·수용소·매음굴·공사장·고아원·군대·벽촌 등 공간도 우리가 그 좌표를 잘 아는 곳이다. 그런데도 이런 그의 소설 속 시공간은 소설이 진행될수록 점점 낯설어지고 어느새 비현실적인 절대적 시공간이 되어간다. 그 속에서 행동하고 생각하는 인물들은 그 시공간에 완전히 속박되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최인석 소설에서의 그로테스크는 바로 여기서 온다. 겉보기에는 현실적인 시공간이 악마적인 시공간으로 변하는 것, 그 범위와 동향과 소속된 물목을 자세히 그리면 그릴수록 그 악마성이 강화되는 것, 「노래에 관하여」의 삼청교육대와 「심해에서」의 매음굴을 보라. 얼마나 악마적으로 막막한 공간인가. 절망이 현실을 그로테스크로 변화시킨 것이다. 임규찬이 이런 외면적으로 친숙한 민중적 공간들의 존재 때문에 최인석 소설에서 ‘사회적 맥락’을 읽었다면 그것은 이런 맥락에서 보면 오독에 가까운 것이다. 절망적 자기부정의 서사구조와 그것을 감싸안는 그로테스크한 악마적 시공간, 이것이 최인석의 소설세계의 특징이다.

최인석처럼 서사구조 안쪽에서 ‘진정성’을 실현하면 그것은 절망이 되고, 장정일처럼 서사구조 바깥에서 진정성을 운위하면 그것은 일종의 자기기만 혹은 위선이 된다. 이것이 어쩌면 환멸의 감각 위에 건설된 90년대 소설이 지닌 딜레머인지도 모른다. 이 딜레머가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지 나는 아직 잘 모른다. 하지만, 이 딜레머는 장정일의 소설은 소외의 병리학, 최인석의 소설은 사회적 모순과의 대결이라는 낡은 이분법으로 갈라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둘 다 ‘진실한 삶을 살려는 파토스’인 ‘진정성’을 바탕으로 ‘비루함’이라는 소설전략을 구사한다는 공통성을 지녔음을 확인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님은 분명하다. 병리적인 것에 대한 강박이건 사회적 모순과의 대결의지건 그보다 근저에 있는 ‘진정성’이건 이 세계에 대한 아주 초보적인 윤리적 대안으로서도 겨우 예선을 통과할까 말까 하는데 그것을 미학적 대안으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게 하려고 해도 거기엔 거쳐야 할 너무나 많은 과정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아직도 문제는 리얼리즘이고 모더니즘인가. 세계에 대한 무지도 독단도 아닌, 냉소도 절망도 아닌, 탈주도 안주도 아닌, 그러면서도 ‘이것이 아닌 선택 가능한 다른 것’을 이 미증유의 억압과 소외로 가득한 후기 자본주의 세계에 대한 탐사과정 그 자체로부터 찾아낼 수 있는 윤리적·미학적 대안을 모색하는 일에도 여전히 ‘리얼리즘·모더니즘’ 패러다임은 유효한 것인지 묻고 싶다.

 

 

4. 할 이야기는 많고 갈 길은 멀다

 

최소한 백민석까지는 거론하고 싶었다. 그는 말하자면 장정일이나 최인석과 같은 ‘환멸의 감각’조차 먼 생짜 90년대 작가로서 이 두 작가가 선택한 ‘비루함’이라는 미적 전략을 채택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윤지관이 이 작가의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이라는 작품을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대비하여 그 기괴성의 ‘모더니즘적 근원’을 말하고 『목화밭 엽기전』(문학동네 2000)을 황석영의 『손님』(창작과비평사 2001)과 대비하여 그 ‘폭력과 제도적 질곡의 알레고리’의 한계를 말한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비교작업으로서, 나중에 제출된 황종연의 문제적 반론과 함께 필히 적절한 논쟁적 개입이 따라야 할 ‘생산적 일감’이 아닐 수 없으나 그 목전에서 멈추게 되어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신경숙과 윤대녕과 관련하여 황종연의 제기한 90년대 문학에서의 ‘내면성 회복’ 문제도 역시 참견해야 할 말이 많은 논제가 아닐 수 없다. 이를테면 신경숙의 ‘내면’은 신경숙 소설의 화수분 같은 제재이기는 하지만 황종연이 말한 바 근대적인 ‘자기 정의적 주체’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며, 윤대녕의 ‘내면’ 역시 세계의 압도성에 대응하는 적극적 주체라기보다는 그것에 짓눌리는 수동적으로 구성된 주체라는 점, 그리고 바로 이런 과잉해석이 이들의 ‘내면 탐구’ 작업으로서의 소설쓰기를 신비화하고 특권화한 점이 없지 않다는 점 등도 필히 언급되었어야 했지만 역시 다른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곁에서 끼여들어 참견하는 내가 이렇게 할말을 다 못해 입맛을 다시는 정도라면 논쟁의 당사자들은 어떻겠는가. 앞에서도 말했듯 모더니즘·리얼리즘 이항대립의 틀을 시원하게 벗어던지지 못한 점을 제하고는 이 논쟁은 대단히 중요한 의제들을 내장하고 있다. 제임슨과 버먼 이론의 한국적 전유와 관련된 여러 주제들도 그렇지만, 특히 각각 리얼리즘으로의 흡수통합, 모더니즘으로의 흡수통합이라는 일견 상반된 원심력이 작용하면서도 윤지관이 ‘모더니스트들’에게 ‘자기 안의 계급과 민족’을 발견할 것을 주문하고, 황종연이 90년대 소설에서의 나르씨시즘을 비판하고 개인을 넘어 개인 사이의 제휴에 관심을 가질 것을 주문하면서 이에 호응하는 눈치를 보인 것은 이른바 ‘80년대적인 것과 90년대적인 것’의 ‘변증법적 소통’의 시기가 올 때가 되지 않았는가 하고 있던 내게는 자못 반가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갈 길은 아직 멀지만, 갈 길이 아직 멀다는 판단부터라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소중한가. 이 논쟁의 생산적 전개가 동시대의 미학적 과제를 해결하는 것 이전에 우리 비평의 오랜 침체를 훨훨 털어버리는 절호의 기회가 되기를 기대하며 미진한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