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평론

 

‘응시’의 미학, 숨은 그림을 찾아

하성란론

 

 

최강민 崔康民

문학평론가. 중앙대 강사. 주요 평론으로 「억압된 금기적 욕망과 쌍생아적 상상력–––신경숙론」 등이 있음. c4134@chollian.net

 

 

1. 반전도형인 ‘루빈의 술잔’과 경계선의 시선

 

하성란(河成蘭)의 소설은 수다스럽지 않다. 아니, 오히려 적막할 정도의 침묵과 여백으로 가득하다. 무표정한 목소리로 현대의 일상을 촘촘히 해부하는 그녀의 언어는 푸른 정맥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미세하다. 조각난 퍼즐의 수수께끼를 풀려는 작가의 촘촘한 시선은 하성란표 ‘아우라’를 발산한다. 그래서인지 하성란의 소설을 읽다보면 예전에 TV에서 보았던 ‘형사 콜롬보’가 떠오른다. 늘 후줄근한 바바리코트에 평범한 소시민의 모습을 한 콜롬보. 그는 엉뚱한 사람이 범인으로 지목된 상황에서 놀라운 추리력으로 사건을 반전시킨다. 하성란도 조커란 비장의 카드로 독자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1996년 「풀」로 등단한 하성란은 창작집 『루빈의 술잔』(문학동네 1997)과 『옆집 여자』(창작과비평사 1999)로 21세기를 선도할 작가로 주목받아왔다. 윤대녕(尹大寧)이 시원성으로 회귀하는 개인적 내밀함을, 공선옥(孔善玉)이 망각되어가는 역사적 상처와 사회적 모순을 되새김질했다면 하성란은 양자를 동시에 호출한다. 그녀는 미시적 일상을 재구성하여 거시적 차원을 함께 아우르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그녀가 처음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다른 작가와 어떤 차별성을 지닌 채 소설적 형상화에 접근했던 것일까.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그림으로 보이는 반전도형인 ‘루빈의 술잔’은 하성란의 소설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루빈의 술잔’은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좀더 색다르게 전달하려는 작가의 욕망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상징물이다. 그녀의 서사전략은 변죽을 쳐 복판이 울도록 하는 시적 ‘낯설게 하기’와 연결된다. 작가가 보기에 “깡통 따개는 중심에서 가장 먼 거리인 통조림의 가장자리를 돌지만 그것은 결국 깡통 뚜껑을 열기 위한 최선의 방법”(「루빈의 술잔」, 『루빈의 술잔』 19면)이다.

소설의 전통적 영역에 얽매이지 않는 작가의 퓨전적 상상력 속에 독자의 타성화된 인식회로는 일순 혼란에 빠진다. 이것은 일상의 현상을 무의미하게 바라보는 익숙한 ‘시선’들을 해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제 익숙한 것들은 낯설어지고, 낯선 것들이 익숙해지는 전복 속에 시선의 탈주가 시작된다. 독자들이 하성란의 소설에서 자주 영화적 체취를 느끼는 것도 바로 이 시선을 중심으로 서사가 배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성란의 소설은 ‘응시’에서 발원되어 ‘응시’로 종료되고 있는 것이다. 응시는 단순하게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세계관이자 욕망의 표현이다. 롤랑 바르뜨(Roland Barthes)도 “시선은 기호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의미한다”(김인식 『이미지와 글쓰기』, 세계사 1993, 110면에서 재인용)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응시의 미학을 선보이는 하성란은 대상을 바라볼 때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응시의 주체’와 ‘응시의 타자’ 사이에 생성된 틈새는 상호 합일할 수 없는 현대인의 소외성을 말하는 것이자 하성란의 독특한 미학이 빛을 발하는 지점이다. 그녀는 이 틈새에 ‘루빈의 술잔’을 결합하여 대상을 낯설게 만드는 데에 적극 활용한다. 이때 작가는 일상과 비일상의, 의식과 무의식의, 실험성과 전통성의 경계선에 위태롭게 자리한다. 이 중립적 지점에서 하성란은 후기자본주의의 발호 속에 철저히 감추어진 일상의 진실을 힘겹게 찾아나선다. 따라서 삶의 진실을 발견하고 싶은 독자는 형사 콜롬보가 되어 난관을 헤치고 나아가야 한다. 다행히 그녀는 작품 곳곳에 실마리를 놓아두고 있다.

 

 

2. 시선의 해체와 전복적 상상력

 

하성란은 3인칭 시점과 느린 호흡의 문장을 활용하여 일상의 풍경을 꼼꼼히 관찰한다. 높은 곳이나 먼 곳에서 응시하는 듯한 롱숏의 장면에서 작중인물은 무미건조한 배경에 묻혀 침묵한다. 일거수 일투족을 응시하는 클로즈업의 시선에서도 작중인물은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하성란은 작중 주인공을 중심으로 시선을 배치하지 않는다. 이것은 계몽적 거대담론의 몰락과 주체성 상실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작가는 카메라, 백미러, 거울, 유리, 고층 광고탑 등의 소도구를 등장시켜 시각적 이미지에 포위당한 현대인의 왜소한 모습을 차갑게 조망한다.

18세기에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은 일망감시체계인 원형감옥 파놉티콘(Panopticon)이란 모델을 제시한 적이 있다. 미셸 푸꼬(Michel Foucault)는 벤담의 모델을 이용하여 근대의 문명을 감시와 억압의 체계로 설명한다. 하성란의 소설에서 작중인물들은 바로 이 파놉티콘의 시선에 갇혀 있다. 우월한 위치에서 열등한 존재를 내려다보는 일방향성의 시선에 의해 그녀의 작중인물은 행동반경이 제한된다. 어둠속에 감춰진 비대칭적 감시의 시선은 빛에 환히 노출된 일상인을 옥죄는 심리적 기제로 작용하여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시선의 불평등성은 곧 권력의 차이와 억압의 발생을 뜻한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 지배질서에서 일탈하려는 반오이디푸스의 탈주는 거세 위협 속에 일상에 순응하도록 채찍질당한다. 하성란의 작중인물들은 보이지 않는 규율적 시선이 요구하는 질서를 내면화하여 재생산하도록 훈육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거리를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파놉티콘의 시선을 결코 벗어난 것이 아니다.

두 남녀의 평범한 일상을 그린 단편 「꿈의 극장」은 작가가 가진 시선의 성격을 예리하게 드러낸다. 이 작품에서 작중인물들은 자신의 주체적 욕망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에 의해 삶을 살아간다. 피팅모델인 여자는 날씬한 몸매를 선호하는 현대문명에 맞추어 자신의 몸무게를 조절한다. 그녀의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관념은 적정 몸무게의 초과가 아니라 오히려 미달로 나타나 결국 회사에서 해고된다. 자유기고가인 남자는 잡지사의 청탁으로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수면용 안대를 끼고 장님 생활을 한다. 장님 체험의 장소는 아이러니하게도 시각적 이미지가 지배하는 ‘극장’이다. 이러한 극장에 들어가기 위해 꼭 거쳐야 할 곳은 일종의 검문소인 매표소이다. 극장의 매표소에서 손님들은 여종업원의 얼굴을 보지 못하지만, 여종업원은 손님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다. 이러한 불평등한 시선의 교차는 감시와 억압이라는 근대적 시공간의 성격을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매표소를 지나쳐 그냥 들어가는 사람을 향해 ‘입술’로 명명된 여종업원이 어김없이 경고의 메씨지를 보내는 데에서 시선의 강제성과 권력을 확인할 수 있다.

 

유리창으로 된 매표소 위에는 영화 포스터들이 빼곡히 붙어 있어 여종업원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요금 3,000원이라고 쓰인 글자들 사이, 금과 3 사이의 조그만 틈으로 과자나 껌을 질겅거리는 입술이 얼핏얼핏 비친다. 붉은 립스틱을 입술선 밖으로 과장되게 내어 그린 그 입술은 숫자 0자 중의 하나처럼 보이기도 한다. 맨 처음 극장에 온 날 남자는 그 여종업원에게 ‘입술’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입술은 매표구 밖은 물론 매점 가판대까지도 쉴새없이 눈을 굴리며 관찰한다. 매표구를 지나쳐 그냥 들어가는 사람을 향해 말 대신 매표구 밖으로 반쯤 내놓은 손가락을 신경질적으로 탁탁 내리친다.

(「꿈의 극장」, 『루빈의 술잔』 125면)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은 스펙터클한 환영을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이다. 영화가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실재 사물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놀라운 광경에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은 영화가 실재 사물을 모사했을 뿐 실재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화는 실재와 무관한 시각적 환영의 이미지를 화려하게 공급할 뿐이다. 그런데 장님 체험을 하는 남자는 수면용 안대를 끼고 앉아 영화를 관람한다. 이때 그는 시각적 환영이 펼쳐지는 극장이 아니라 “볼 수 있는 사람이 못 보는 것도 있고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보이는”(같은 책 139면) ‘꿈의 극장’으로 잠시 이동한다. 이것은 장님 생활의 불편함과 정상인의 시각에 대한 찬사를 기대했던 잡지사의 의도와 상치되는 진정성의 몸짓이다. 이러한 남자의 태도는 시각적 환영의 소비성을 중시하는 근대문명에 대한 딴죽걸기일 수밖에 없다. 꿈의 극장에 대해 쓴 남자의 원고가 잡지사에 의해 폐기 처분되는 과정은 파놉티콘의 시선을 거부하는 역(逆)파놉티콘의 시선이 아직은 잠재적 가능성의 형태로만 존재함을 말해준다.

하성란의 소설에서 파놉티콘은 빅브러더(Big Brother)처럼 단일한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미시적 일상의 곳곳에 스며든 복수적(複數的) 존재이다. 은행, 아파트, 슈퍼마켓, 백화점, 회사 등등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일상의 시공간에서 파놉티콘의 시선은 음험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하성란은 시선의 규율에 갇힌 도시의 일상을 ‘수족관’ ‘통조림’ ‘상습정체지역’ ‘사출성형기’ ‘뻔한 이야기’ ‘종합병동’ 등으로 비유한다. 이렇게 박제된 일상에서 남편을 사고로 잃은 주부, 마네킹 역할을 하는 피팅모델, 묘혈 체험을 한 자유기고가, 불면증에 시달리는 화물차 운전사, 잡지사 여직원, 자동차 쎄일즈맨, 실직한 은행원 등은 ‘그림자 인간’으로 살아간다. 이들은 대개 원룸이나 아파트에 혼자 살면서 자신의 삶을 조금씩 살해한다.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구토의 장면은 이러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존재의 거부반응이다. 하성란은 구토의 “토사물처럼 정직한 것도 없다”(「양파」, 『옆집 여자』 251면)란 모토 아래 남들이 흔히 외면하는 부분에 오히려 세심한 눈길을 던진다. 그 결과 도시적 일상에서 마이너리그로 분류되던 쓰레기봉투, 냉장고, 씽크대 개수구, 삼류 다방, 옥상 등이 소생의 숨결을 힘겹게 내쉰다. 이것은 파놉티콘의 시선에 의해 ‘중심/주변’으로 분리된 이분법적 도식에 대한 저항이자 억압된 타자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이다.

이러한 하성란의 전복적 상상력이 가장 탁월하게 드러난 수작은 동인문학상 수상작인 단편 「곰팡이꽃」이다. 이 작품에서 동료 여직원을 짝사랑한 남자는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사는 그녀의 아파트로 이사해 남몰래 쓰레기봉투를 뒤진다. 그녀가 버린 쓰레기봉투를 찾음으로써 남자는 간접적으로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연히 밖으로 나온 그 여자를 아파트 놀이터 등에서 관찰하여 어떤 쓰레기를 버릴지 알아내려고 애쓰는 남자의 모습은 한마디로 병적인 사랑의 풍경이다. 여자의 체취를 발견하기 위해 아파트의 모든 쓰레기를 열심히 뒤지는 남자는 “쓰레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쓰레기야말로 숨은 그림 찾기의 모범답안”(같은 책 188면)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남자는 쓰레기를 통해 대면적 접촉에서 얻는 정보보다 더 많은 것을 얻어낸다. 인간은 죽어 있고, 오히려 쓰레기들이 생생한 생명의 활력을 전달하는 주객전도의 현실. 이것은 정상적 소통체계가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는 현대의 암울한 모습이기도 하다.

똑같은 출입문, 똑같은 평수의 아파트는 규격화된 삶을 요구한다. 그것에서 삶의 다양한 표정을 발견하기는 힘들다. 하성란은 붕어빵 얼굴 대신 아파트에서 소비되어 버려지는 다양한 쓰레기에서 개별적인 인간의 냄새를 추출한다. 이처럼 직접화법보다 간접화법을 애용하는 하성란의 글쓰기는 인간소외 현상을 오히려 더 효과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한다. 쓰레기장을 조사하여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실태를 알아보는 것은 ‘가볼러지’(garbology)라는 사회학의 수법이다. 하성란은 쓰레기봉투를 뒤지는 남자의 개인적 행위를 통해 아파트에서 고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확장하여 드러낸다. 하성란이 신경숙(申京淑)과 같은 현미경적 묘사력을 가지면서도 차별성을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부분에서이다. 그녀는 미시서사에 거대서사를 적극적으로 투영해 세계를 확대하는 것이다.

하성란의 소설에서는 작중인물이 꿈꾸는 이상향의 세계도 시각적 이미지에 의해 규정된다. 자본주의의 첨병인 광고는 일상의 탈출구로 ‘바다’ ‘하와이’ ‘저 푸른 초원’ 등을 끊임없이 선전한다. 하지만 그것은 후기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이 살포한 기만적 환상이기에 현대인은 탈출구라는 이미지만을 소비할 따름이다. 단편 「치약」에서 남자는 서해 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는 광고에 매혹되어 집을 구입하지만 고층아파트 때문에 시야가 막혀 보이지 않고, 「저 푸른 초원 위에」에서 부부는 완벽한 전원생활을 꿈꾸며 교외의 집을 얻지만 잡종견과 아이의 실종은 그것이 허망한 환상임을 알려준다. 삶의 안식처를 찾는 몸부림은 대개 추락하는 ‘이카로스(Icaros)의 촛농 날개’로 귀결된다. 소설에서 다양한 병자들이 대거 등장하는 것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 중에서 특히 폭식증(『식사의 즐거움』 「별 모양의 얼룩」)은 존재의 내면에 자리한 허기를,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음송증(「옆집 여자」)은 자기 자신과 대화하려는 나르씨시스트의 몸짓을, 기억의 단속적 상실이라는 건망증(「풀」 「옆집 여자」)은 일상에서 의미를 잃어가는 존재의 정체성을 날카롭게 환기한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도시적 일상이라는 보호막에 안주해야 할까. 문제는 현대적 일상이 그리 안전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첨단문명이 이룩한 일상의 견고성은 우연한 교통사고(「시즈오카 현의 한 호텔은 후지산이 보이는 날만 숙박료를 받는다」 「올콩」 「양파」 「개망초」 『삿뽀로 여인숙』), 건물 붕괴(「루빈의 술잔」), 익사(「내 가슴속의 부표」), 화재(「별 모양의 얼룩」), 실종(「내가 사랑한 것은 그녀의 등허리였을까」 「두 개의 다우징」 「와이셔츠」 「저 푸른 초원 위에」), 과실치사(「즐거운 소풍」), 추락(「촛농 날개」), 총기 오발(「밤의 밀렵」) 등 다양한 돌발사고에 의해 허무하게 무너진다. 안전하다고 선전한 도시적 일상이 오히려 위험하다는 사실 앞에서 현대인은 마냥 불안할 수밖에 없다. 현대인은 숙명적으로 불안이란 바위를 짊어지고 사는 씨시포스(Sisyphos)인 것이다.

하성란은 공동체에 대한 기억이 부재한 인물을 등장시켜 일상의 소외적 풍경을 개성적으로 그려낸다. 작가의 전복적 시선으로 벙어리이던 타자의 풍경은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는다. 인물의 내면세계가 언급되지 않음에도 풍경은 소외된 내면의 무늬를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다만 아쉬운 점은 작중인물의 계층적 변별성이 효과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장편 『식사의 즐거움』(현대문학 1998)에서 남자 주인공이 공장노동자로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그 인물에게서 노동자의 체취를 발견하기 힘들다. 이것은 작가가 중산층 여성의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처지임을 암시한다.

 

 

3. 이중구조, 失名에서 實名으로

 

하성란의 소설은 겹구조로 정교하게 짜여진 일종의 ‘매직아이’(magic eye)이다. 바깥과 안쪽이 전혀 다른 그림으로 구성된 이중성은 작가가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를 반영한다. 세계의 진실은 철저히 감추어져 있기에 숨겨진 그림을 보고 싶은 자들은 탐색여행을 떠나야 한다. 잡지사 직원인 여자는 ‘탐(探)’자를(「풀」), 조각가인 남자는 실종된 여자 K를(「내가 사랑한 것은 그녀의 등허리였을까」), 보험조사원은 사고로 숨진 박기철을(「밤의 밀렵」), 여자는 자신이 잉태한 아기의 아버지를(「기쁘다 구주 오셨네」) 찾아 이리저리 헤맨다. 작중인물로 보험조사원과 경찰이 등장하거나 소도구로 수맥 찾는 다우징과 열쇠 등이 애용되는 것도 감춰진 진실 찾기와 연관성이 깊다. 이처럼 그녀의 소설은 진실을 발견하려는 ‘찾기의 서사’와 감추려는 ‘은폐의 서사’가 맞부딪쳐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하성란의 작중인물들은 대개 이름이 없다. 그들은 고유명사 대신 ‘남자’ ‘여자’ ‘덩치’ ‘입술’ 등 보통명사로 호명된다. 이름이 삶의 정체성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실명(失名)은 개별 주체의 죽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양상은 「옆집 여자」에서 아들의 이름을 잊거나 사물에 인간의 이름을 붙여 대화하는 주부의 모습으로까지 심화된다. 실명(失名)의 작중인물은 소외감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지만 동시에 익명성의 우산 아래에서 편안하다. 그러나 그것은 삶의 주체성을 포기한 자기기만적 도피이기에 실명(失名)의 작중인물은 우연성을 매개로 잃어버린 실명(實名)을 찾고자 한다. 이것은 응시의 주체가 주변부로 내몰린 응시의 타자를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실명(失名)은 자신과 유사한 또다른 실명(失名)을 자아성찰의 거울로 삼아 실명(實名)과의 거리를 좁히고자 한다. 하성란이 비슷한 작중인물, 쌍둥이나 자매, 똑같은 이름이나 지명 등을 자주 등장시킨 것도 거울 모티프와 관련이 깊다.

중편 「루빈의 술잔」은 동사무소의 실수로 똑같은 주민등록번호를 지니게 된 두 명의 여성을 상호 대비한다. 동일하면서도 동일하지 않은 두 여자는 조우하지만 매번 엇갈림으로써 평행적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평행적 거리가 선사하는 객관성을 바탕으로 하여 남편을 사고로 잃은 ‘여자’는 은행원인 송미경을 엿본다. 절름발이인 송미경의 처지는 실명(實名)이 밝혀짐에도 불구하고 실명(失名)의 처지와 다름이 없다. 귄터 그라스(Günter Grass)의 『양철북』에서 보듯 일상인과 다른 신체적 특징은 현존 세계와의 불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호인 것이다. 여자는 송미경을 통해 일상에서 소외된 자신의 진면목을 발견하고 실명(實名)에 접근한다.

하성란의 이중적 서사는 작중인물의 심리상태와 사건전개를 암시하는 객관적 상관물을 복선으로 활용해 작품의 후반부에서 극적 반전을 이끌어낸다. 이 지점에서 작중인물이나 독자는 심화된 분규 속에 감춰진 진실을 발견한다. 송미경의 아파트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여자의 은밀한 이중생활은 송미경이 우연히 뜨개점을 방문함으로써 위기를 맞이한다. 여자는 그곳에서 송미경의 이름으로 등록해 뜨개질을 배웠기에 정체가 노출될 위험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하성란의 소설에서 시선은 일방향성으로 흐르기에 진실은 여전히 가려진다. 송미경은 자신의 이름으로 등록된 것을 친구의 소행으로 여기며 어떤 문제도 제기하지 않은 채 넘어간다. 또한 여자도 새로운 주민등록번호와 여권을 부여받음으로써 송미경과의 연결고리를 상실한다. ‘은폐/찾기’의 서사는 다시 엇갈려 평행선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의 실명(實名)은 끝내 밝혀지지 않은 채 미완결의 과제로 남는다.

 

어머, 벌써 회원에 드셨잖아요. 화면 위로 떠오른 개인 신상명세서를 들여다보던 주인 여자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아뇨, 전 처음인데요. 송미경씨. 맞죠? 생년월일이 68년 2월 29일. 지금 장미 모티프를 뜨고 계시는 중이잖아요. 한동안 왜 안 오시나 했죠. 여자는 핸드백 속에서 꽃 모양의 모티프 조각을 꺼내든다. 그래요. 바로 그거예요. 주인 여자가 손등으로 두 눈을 문지르며 여자를 쳐다본다. 아, 그애는 제 친구예요. 제 이름을 댄 모양이네요.

(「루빈의 술잔」, 『루빈의 술잔』 65~66면)

 

하성란이 즐겨 사용하는 이중적 서사구조와 극적 반전은 ‘미스터리 소설’의 문법에서 일부분을 빌려온 것이다. 이브 뢰떼르(Yves Reuter)에 의하면 극적 반전의 미스터리 소설은 범죄가 발생한 과거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이야기와 그것의 진실을 찾아 거슬러올라가는 현재의 이야기가 긴박하게 대립한다.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가 만나는 것은 어둠속에 가려진 진범이 누구인지 밝혀지는 극적 순간에서이다. 하성란이 즐겨 사용하는 현재형의 문장은 과거에 발생한 사건이 현재에 종료된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음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미스터리 소설은 결론 부분에서 진범의 정체와 범죄의 발생원인이 밝혀진다. 이에 비해 미스터리 소설의 문법을 약간 변주한 하성란의 소설은 진범, 즉 일상의 진실을 부분적으로 노출할 뿐이다. 그래서 찾기의 서사는 은폐의 서사와 합일하지 못한 채 또다시 멀어지면서 ‘to be continued’라는 자막으로 처리된다. 모든 탐색의 행위는 원점으로 회귀하고 견고한 일상은 난공불락의 성채를 자랑한다. 이처럼 하성란은 소설을 해피엔딩으로 끝내기보다 비극적 결말로 끝냄으로써 세계와 쉽게 타협하지 않는 비순응성을 보여준다.

하성란의 소설에서 복선을 적절히 활용한 우연성은 은폐된 일상의 진실을 폭로한다. 이때 우연성은 예측하지 못한 극적 반전과 맞물려 견고한 일상의 질서를 해체하는 전위대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다. 이러한 우연성은 삶의 불확실성과 주체의 몰락이라는 탈근대적 인식의 반영이다. 평범한 남자의 하루를 그린 단편 「올콩」에서 우연성은 돌발사고인 번개로 비유된다. 우연성의 개입 속에 계몽적 합리주의가 자랑하는 안정된 일상이라는 허구적 신화는 동요한다. 맑스도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버린다”(「공산당 선언」)고 하지 않았던가. 이 소설에서 데이트를 위해 자동차를 몰고 나선 남자는 우연적 사건의 연속 속에 약속시간을 어겨 끝내 여자에게 차이기까지 한다. 빈틈없이 짜여진 남자의 일상이 우연성의 개입에 의해 와르르 허물어진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나온 창작집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창작과비평사 2002)에서 우연성은 탈근대적 인식의 소산보다 흥미 위주의 극적 반전을 끌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면이 있다. 「와이셔츠」에서 실종된 남편을 찾아 예전에 살던 아파트 5층 옥상에 올라간 은옥은 남편의 와이셔츠를 우연히 발견하고, 「밤의 밀렵」에서 죽은 박기철의 사인을 조사하는 보험조사원은 박기철이 처했던 위험한 순간을 우연히 똑같이 경험하고, 「기쁘다 구주 오셨네」에서 여자인 ‘나’는 술에 취해 잠들었다가 애인과 애인 친구들이 과거에 저질렀던 집단강간 사건을 우연히 엿듣게 될 뿐만 아니라 자신도 똑같이 강간을 당한다. 복선의 위축 속에 소설적 개연성과 무관한 우연성의 남용은 작가가 직면한 상상력의 위기와 깊은 함수관계를 형성한다. 하성란의 여러 단편소설 중 바람난 아버지를 그린 「두 개의 다우징」과 「오, 아버지」, 피팅모델 경력의 여자가 등장하는 「꿈의 극장」과 「지구와 가까운 소행성과의 랑데부」, 광고모델이 등장하는 「깃발」과 「치약」은 동일한 모티프가 조금씩 달리 나타난 경우이다. 이것은 질적 변화가 수반되지 못한 소재의 반복 변주라 할 수 있다. 또한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에서 뉴질랜드 교포인 제이슨의 동성애를, 「당신의 백미러」에서 트랜스젠더(transgender)인 최순애를 다루고 있는데 심도있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인물의 심층적 내면갈등과 사회적 맥락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 금기의 형상화는 오히려 독자에게 작가가 왜 이 문제를 말하려고 했는지 의문이 들게 한다. 치열한 산문정신은 단지 새로운 소재를 발굴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고투하는 자세에서 발현한다.

작가 하성란은 당면한 상상력의 위기를 환상성으로 돌파하고자 한다. 특히 1999년에 발생한 씨랜드 화재사건을 소설화한 단편 「별 모양의 얼룩」에서 환상성은 현실과의 상호작용 속에 그 빛을 한껏 발한다. 잘 해주지도 못한 채 유치원생 아이를 하늘나라에 보낸 어머니. 그녀의 자책감은 가겟집 남자가 보았던, 아이의 가슴에 달린 ‘별 모양의 브로치’를 ‘별 모양의 얼룩’으로 절묘하게 환치시킨다. 이것을 통해 삶과 죽음으로 분리된 어머니와 자식 사이의 거리는 좁혀진다. 이러한 환상성은 느닷없이 출현한 돌연변이가 아니다. 하성란의 소설에 등장한 환상성은 우연성이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불온한 자식이다. 우연성과 환상성의 결합 속에 서사는 비선형적 흐름을 더욱 가속화시키며 탈근대적 풍경을 그려낸다. 그러나 하성란의 환상성은 택시운전사가 갑자기 마술사로 변신하여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새끼 손가락」에서 보듯 아직까지 제자리를 찾았다고 보기 힘들다. 특히 그녀의 환상성은 현실의 음영을 효과적으로 투영하지 못할 경우 대부분 미학적 균열로 이어진다. 글쓰기의 진퇴를 거듭하는 하성란은 현재 일종의 과도기적 단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4. 엿보기 욕망과 서사성의 빈곤

 

일상의 단면을 정밀하게 관찰하는 하성란의 시선은 일종의 엿보기 욕망에 기초해 있다. 이 엿보기 욕망은 “모든 현상들이 말을 하게 되어 있는 것”(「내가 사랑한 것은 그녀의 등허리였을까」, 『루빈의 술잔』 148면)이라는 명제 아래 작동한다. 도시적 일상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을 쌓으며 급속도로 성장해왔다. 우리는 벽 너머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도시문명의 확산 속에 텔레비전의 보급이 빠르게 이루어진 것도 타자의 삶을 알고 싶은 욕망의 간접적 표현이다. 이런 점에서 다른 존재에 대한 관심의 표현인 엿보기 욕망은 세계와 자아를 확장하는 유효한 수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하성란의 작중인물들은 대개 왜곡된 ‘엿보기 욕망’의 포로가 된다. 엿보는 주체와 엿보이는 타자 사이에 교감은 부재하다. 그래서 엿보기 시선은 출구를 찾지 못한 채 갇혀버린 존재의 수음(手淫)행위로 전락한다. 하성란은 이러한 작중인물의 삶을 엿보면서 서사를 전개한다. 물고 물리는 엿보기 관계. 독자도 이 대열에 슬쩍 동참한다.

하성란의 소설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대개 희미하거나 부정적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기존 지배질서를 상징하는 아버지에 대한 작가의 거부감을 보여준다. 하성란의 『식사의 즐거움』은 엿보기 모티프를 통해 현대인의 아비 부재의식과 소외현상을 함께 드러낸 장편이다. 이 소설에서 남자는 신생아실에서 간호사의 실수로 자신이 다른 부모에게 보내진 것을 기억해낸다. 이 기억은 물론 남자가 만들어낸 가짜 기억으로서 폭력적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욕망의 변형물이다. 남자는 살부(殺父)의 충동을 교묘히 변용해 인자한 친부모가 따로 존재할 것이라고 상상함으로써 오이디푸스의 위기를 벗어나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상상한 대로 감나무와 사자머리 손잡이가 있는 친부모의 집을 우연히 발견해 엿보기 시작한다. 남자는 친부모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직접 찾아가 자신이 28년 전 신생아실에서 뒤바뀐 친아들임을 밝히지 않고 주위를 맴돈다. 이것은 친부모로 생각한 사람들이 자신을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 직면하는 것을 피하려는 심리적 방어기제의 산물이다. 그래서 남자와 친부모로 생각한 사람들과의 만남은 계속 연기되고, 엿보기 욕망은 계속된다.

 

당분간 이 모든 것은 비밀에 부쳐두기로 했다. 놀란 부모님들은 남자가 찾아내지 못하는 곳으로 잠적해버릴 수도 있었다. 소독은 한달에 한번 있었고 지금 당장으로는 한달에 한번 부모님을 볼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생전 처음으로 이 직업을 물려준 아버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식사의 즐거움』 181면)

 

아버지 대 아들이 빚어내는 오이디푸스 갈등은 인류가 시작한 이래 계속되어온 고전적 문제이다. 작가는 이 갈등을 반듯한 포마이카 밥상에서 ‘식사의 즐거움’을 향유하려는 작은 소망으로 대체해 표현한다. 여기에서 오이디푸스 문제는 낯익은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다가온다. 그렇지만 하성란은 낯설게 하기로 문제를 새롭게 드러낼 뿐 그 이상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작가는 폭력적 아버지를 뇌졸중에 의한 사망으로 처리하여 부자간의 갈등을 임시 봉합하는 것이다. 문제의 해결은 아버지가 왜 폭력적 가장으로 변했는지에 대한 구조적 천착에서 출발한다. 이 부분을 소홀히 처리한 것은 아쉬움을 남긴다.

엿보기 시선은 타인이 감춘 비밀을 감지하는 데 요긴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관음증적 중독과 표피적 현상에 고착될 가능성도 많다. 응시 주체는 응시 대상의 경험을 직접적으로 소유할 수 없다는 태생적 한계가 있는 것이다. 하성란이 타락한 일상세계를 비판하기 위해 자주 쓰는 아이러니 기법의 파괴력이 일정 수준을 넘지 못하는 것도 엿보기 시선의 한계성과 관련이 있다. 상습정체구간 대 지상의 낙원 하와이(「깃발」),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파우스트 대 반가운 구세주로서의 태아(「기쁘다 구주 오셨네」), 이상적 공간인 저 푸른 초원 대 잡종견과 아이의 실종(「저 푸른 초원 위에」), 시끄러운 이웃 대 고요한 밤(「고요한 밤」) 등의 상반된 모습이 연출하는 아이러니는 현실의 문제점을 대개 슬쩍 들추어낼 뿐 그 이상의 세계를 보여주지 않는다. 엿보기 욕망은 작가를 세상과 연결하지만 동시에 심층적 접근을 차단하는 족쇄로 작용하는 것이다. 더욱이 경계선에 자리한 작가의 위치가 때로는 삶을 깊이있게 파악하는 데 방해물로 작용한다. 이런 점에서 상황에 따라 위치를 바꿀 수 있는 작가의 유연한 자세가 필요하다.

하성란은 엿보기 시선이 지닌 수박 겉핥기 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후각적 이미지를 끌어온다. 그녀의 소설에는 젤라틴처럼 굳어 있는 우유에서 나오는 코를 쏘는 악취, 다방에서 나는 썩는 냄새, 개수대에서 풍기는 쉰내, 썩은 배추와 생선 내장을 한데 버무린 듯한 극장의 냄새, 옷에서 나는 매캐한 먼지냄새, 아파트 안에서 풍겨나오는 덜 마른 생선냄새, 전철 출입구에서 발산하는 시큼한 땀냄새 등 다양한 냄새가 넘실거린다. 기분 좋은 향기 대신 악취로 표현할 수 있는 냄새들은 일상이 부패하고 있다는 징후이다. 동시에 우리는 각기 다양한 냄새를 통해 나이·직업·계층 등이 다른 일상인의 개별적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후각적 이미지는, 흔히 클로즈업으로 묘사됨으로써 대상을 일별하고 훌쩍 이동하는 시각적 이미지의 속도성에 브레이크를 건다. 하성란은 엿보기 시선으로 포착할 수 없는 사각지대의 진실을 후각적 이미지의 보조적 활용으로 극복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성란은 짧은 기간 동안 적지 않은 소설을 발표해왔다. 우리는 이것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작가의 듬직한 모습을 확인한다. 하지만 분량의 많음이 작품의 질을 보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성란의 소설은 단편에 비해 장편에서 상대적으로 취약성을 노출한다. 단편이 하성란 특유의 정밀한 묘사력과 실험성에 의해 대체적으로 미학적 긴장감을 유지한다면, 장편은 상투성과 서사성의 빈곤 속에 종종 통속성과 신파조의 낭만성으로 추락한다. 쌍둥이 동생인 선명의 죽음을 소재로 하여 진명의 성장사를 그린 장편 『삿뽀로 여인숙』(이룸 2000), 세 명의 여고생인 상숙·재희·송미와 수학선생인 수혁이 학교를 뛰쳐나오면서 겪는 일을 그린 장편 『내 영화의 주인공』(작가정신 2001), 고등학생인 영미·민선·소현이가 요양원에 있는 친구 명희를 만나러 가면서 겪는 3일 동안의 사건을 그린 경장편 「여름방학」(『눈물의 이중주』, 하늘 연못 2001) 등은 이렇다 할 미학적 성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세계를 총체적으로 그려낼 시선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성급하게 장편에 뛰어든 결과이다.

현대에 있어 소설의 본령이 장편이라 할 때, 하성란이 장편의 취약성을 서둘러 극복하지 못할 경우 21세기 문학을 선도한다는 일부의 평가는 한낱 수사로 종결될지 모른다. 물론 서사성의 빈곤현상은 하성란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거대담론의 몰락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은 90년대에 등장한 신세대 작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면죄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시대를 앞서가는 위대한 작가는 열악한 제반 상황을 뛰어넘어 놀라운 문학세계를 보여주지 않았던가.

 

 

5. 새로운 문학적 지평을 기대하며

 

하성란은 물신적 후기자본주의, 디지털의 속도문화, 폭력적 가부장제로 대변되는 도시적 일상을 현미경적 시선으로 무미건조하게 드러낸다. 그녀의 소설은 개인주의가 극단화되어 연대의 고리가 소멸한 시대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빠블로프의 개’가 되기를 거부하는 작가의 전복적 시선은 ‘지킬 박사의 숨겨진 얼굴인 하이드’를 잠시 동안 포착한다. 이것은 억압적인 파놉티콘의 시선에 의해 분열된 자아의, 단절된 소통체계의 복원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하성란의 소설은 잿빛 색채로 가득하다. 희망이나 장밋빛 미래를 찾기 힘든 그녀의 비극적 소설세계는 세계와의 불화를 통해 삶의 진정성을 지키려는 안간힘을 보여준다. 이때 그녀는 대상을 냉정하게 응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타자의 아픔에 가슴 아파한다. 이런 점에서 하성란의 글쓰기는 마치 죽음에 임박한 병자를 간호하는 호스피스(hospice)와 같다. 그녀는 끊임없이 사랑과 관심의 회복이 전망 부재의 소외적 현실을 극복하는 원동력이라고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린다.

하성란은 같은 소재라고 하더라도 이를 독특하게 형상화하는 데에 탁월한 장기를 발휘한다. 결코 평범하게 얘기하지 않겠다는 작가의 미적 자의식은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데 많은 힘을 쏟게 한다. 그녀가 미스터리 소설의 문법을 차용해 ‘은폐/찾기’의 이중적 서사구조를 애용한 것도 이러한 생각의 연장선에서 나온 것이다. 3인칭 시점, 더딘 걸음의 현재형 문장, 우연성, 극적 반전도 독자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는 데에 일조한다. 이처럼 그녀의 전복적 상상력은 미술가 마르쎌 뒤샹이 화장실 변기를 미술전에 출품해 일상품과 예술품의 고정관념을 허물어뜨린 것처럼 일상과 비일상이라는 경계선을 해체한다. 하성란은 틀에 박힌 일상의 풍경을 색다른 시각으로 복원함으로써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이것은 파놉티콘의 시선을 내면화하여 갇혀버린 일상인에 대한 따가운 비판이자 존재의 비상구를 찾으려는 모색이기도 하다. 이러한 작가의 참신한 도발 속에 우리는 한동안 행복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새로운 미학은 얼마 못 가 곧 기성의 지배적 전통이 된다. 그것은 더이상 독자에게 처음과 같은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지 못한다. 특히 글쓰기의 ‘무엇’보다 ‘어떻게’에 관심의 촛점을 집중한 작가에게 이것은 더욱 심하다고 할 수 있다. 변신의 필요성을 직감한 하성란은 장편 『삿뽀로 여인숙』과 창작집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 등을 전후하여 변화의 징후를 노출한다. 긴 호흡의 묘사체에서 짧은 호흡의 서술체로, 사실성에서 환상성으로, 3인칭 시점에서 1인칭 시점의 도입으로, 비극적 결말에서 해피엔딩이 조금씩 등장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침묵의 미학에서 대화 및 문장의 속도감을 증가하는 방향으로의 변신은 아직까지 만족스럽다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보여준 하성란의 문학적 에너지는 이 당면한 난관을 극복할 것이라는 신뢰를 안겨준다. 현재 그녀가 보여주는 미학적 완결성과 파탄이라는 상반된 색깔은 새로운 미학을 산출하기 위한 호된 진통을 암시한다. 우리는 인내를 가지고 그녀의 행보를 지켜볼 것이다. 하성란이 언제 독자의 뒤통수를 치며 새로운 문학적 지평을 열어보일 것인지. 작가의 분투를 바란다.